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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攝理)와 악(惡)의 문제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풀기 어려운 또 하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와 악에 관한 문제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통해 이해 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계시는 성서를 통해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준 신비한 하나님의 행위 일체를 말한다. 신앙의 출발점도 바로 이 계시에 관한 믿음이다. 자연을 통해 보여주는 세계 창조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신비한 모습을 엿보는 것을 일러 일반 계시라고 한다면,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특별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상 계시로 인한 지식은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식이지 이성의 눈으로 완벽하게 파악 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은 아니다. 바울도 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 전서13:12).”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부분적인 지식일 뿐이요, 그것도 희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칼 바르트의 말처럼 모든 신학은 필연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사고’다. 이 점은 세상 속의 악의 문제를 대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지만 세상의 고통과 재난을 당할 때는 악의 참혹한 실재에 대해 당황하게 된다. 성서는 모든 피조물에게 끊임없는 사랑과 돌보심을 말한다(시편104:27-30, 마태복음5:45, 6:26-30, 10:30). 그러나 고대의 역사로부터 늘 그래 왔지만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도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치렀다. 핵무기를 동원한 가공할 만한 파괴력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 걸프전과 이라크 전쟁 등 중동전쟁의 참사와 아프리카의 내전과 학살 등은 참으로 비참하다. 에이즈로 죽어가는 선의의 피해자는 또한 얼마인가? 세상 속에 이토록 많은 악들은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신학은 솔직히 대답해야 하는 신정론(神正論)의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이른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세상에 이토록 많은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의 악이나 고통이 존재한다. 하나는 치명적인 질병이나 생로병사를 포함한 자연적 고통과 재난으로서의 악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저지르는 도덕적 악이다. 자연적 재난에는 교통사고에서부터 대지진에 이르기까지 끔직한 참사들이 주변에 얼마든지 어느 때든지 볼 수 있게 발생한다. 한편으로는 현대 문명사회 속에서도 인간의 내면에는 끔찍한 증오심이 내재하여 수시로 전쟁을 일으키곤 한다. 아우스비츠 수용소의 집단 처형과 같은 무고한 고통은 하나님의 부재와 같은 느낌을 같게 한다. 사실 유대인들이 당한 학살보다 우리 한민족의 근세사에서도 일본인에게 당한 수난을 생각하면 그보다 고통의 크기는 훨씬 더한 것도 있다. 이른바 생체실험과 같은 끔찍한 고통과 죽임 등이 그렇다. 이러한 고통의 참담함을 예수 자신도 십자가 위에서 경험했다. 그는 울부짖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가복음15:34).”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어거스틴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이라는 책에서 세상의 모든 악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 자신들이 잘못 사용한 자유의지의 남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칼빈(J. Calvin)은 섭리론을 주장하면서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의해 통치되고, 어떠한 것도 하나님에 의하여 기꺼이 정해지지 않은 것은 없다”는 예정론(豫定論)을 들고 나왔다. 어거스틴이나 칼빈의 가르침은 어떠한 역경 속에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하는 겸손함을 가르쳐 준다는 이점도 있다. 그리고 끝내는 하나님의 알 수 없는 비밀스런 힘으로 그리스도인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말하는 바, “성서가 역병, 전쟁, 그리고 다른 재난들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가르친다”고 하는 이러한 주장은 다소 문제가 있다. 모든 고통을 반드시 죄의 문제로 귀결시키려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예수도 장님을 보고 그 자신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고 했던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요한복음9:1-3). 칼빈은 이점에서 죄와 고통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 시켰던 셈이다. 악과 고통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교육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사도 바울의 생각도 이에서 멀지 않다.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로마서8:18).”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무고한 고통이나 있어서 안 될 불필요한 악이 횡행해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정의로운 투쟁을 하는 가운데서 벌어지는 고통은 장차 영광에 비하면 족히 견뎌야만 하는 것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고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피조물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칼 바르트(K. Barth)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의 빛에 의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중심적 삼위일체 개념을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관계하며 섭리하고 통치하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섭리를 보존과 동반 그리고 통치의 개념으로 해석한다. 보존은 피조물에 대한 보존으로서 은혜의 행위이며, 동반은 하나님이 피조물과 생명을 공유하며 피조물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신다는 뜻이고, 피조물들을 마지막 궁극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통치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도 결국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지배의 논리에 따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피조물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악은 창조의 활동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셨던 것으로부터 오는 ‘무(無, nothingness)’라는 소외된 힘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무’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동일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뜻과 모순 되는 것으로, ‘무’ 그 자체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견해는 현대 신학에서 섭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소 사변적으로 치우친 설명으로 인해 고통과 악의 실재에 직면한 인간의 인내와 항변 사이의 긴장관계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한편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을 주장하는 자들은 악의 문제에 관한한 하나님의 능력은 제한적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강제적인 힘이 아니라 설득적이다. 이를테면 창조도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저항하는 물질을 설득적으로 지어낸 결과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힘을 독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기에 대참사를 막는다거나 교통사고 같은 재난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과정신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힘의 일부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악의 잠재성이 태동하도록 막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악에 대하여 간접적으로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비난받을 수 없는 까닭은 하나님은 언제나 선을 의도하시고 세상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과정신정론이다. 이러한 과정 신정론은 두 가지 결정적인 점에서 성서적 증언과 위배된다. 하나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거부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고통과 악에 대한 선의 최종적인 승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존 힉(J. Hick)과 같은 학자는 인간 형성 신정론(Person-making theodicy)을 주장했는데, 한마디로 고난과 악의 경험은 성숙을 지향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 견해는 다소 사변적이어서 사회 윤리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고통의 제거를 위한 노력 보다는 고통의 수용이라는 측면에 강조를 두기 때문이다. 고통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물론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고통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문제다. 특히 이러한 관점은 해방신학자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게 마련이다. 해방신정론(Liberation theodicy)에 따르면, 출애굽 전통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의 고통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해방시키는 일을 하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신정론에 관한한 다양한 이론들이 제기 될 수 있으나, 여전히 남는 숙제는 있다. 다만 성서적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이 직접 악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문제와 반드시 선한 하나님은 악을 이기고 끝내 승리하신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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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전혀 필요 없다고 여기는 자에게 가장 많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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