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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 비성경적

조회 수 2892 추천 수 0 2010.03.05 20:29:56
관상(觀想)기도 (Contemplative Prayer)

  

 

관상영성: 고대의 신비적 훈련을 통해서 변화된 의식상태(침묵)를 유도하며 신비주의와 신비술에 뿌리를 두었지만 자주 기독교적 용어로 포장되는 신앙체계로서 관상영성의 전제는 범신론적이며, 만유내재신론적이다.

동양적 신비주의 사상과 카톨릭 신비주의를 물려받은 것 중의 하나가 현대 관상기도/향심기도입니다.

카톨릭과 성공회의 관상기도의 선배로는 토마스 키팅, 토마스 머튼, 헨리 나우웬, 노르위치의 줄리안, 십자가의 요한, 아빌라의 테레사가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에서 "토마스 머튼이 선불교, 수피즘, 도교, 힌두교(우파니샤드)의 영성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동양 명상의 여러 형태들이 크리스천들 속으로 섞여 들어왔다"고 적고 있습니다.

 

관상영성이 복음주의 교회로 들어오게 된 것은 70년대 세 명의 수사(修使)들(토마스키팅, 윌리엄 매닝거, 베이질 페닝턴)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종교통합적인 카톨릭 신학자들, 일주일간 불교명상 피정을 제공한 동양 선의 대가인 조슈 사사키, 초월명상을 가르친 트라피스트 수사였던 폴 메리첼 등을 수도원으로 초청했다. 카톨릭 수사들과 동양명상가들의 대화를 통해 카톨릭 관상기도는 평신도를 포함한 다양한 계층의 신자들이 손쉽게 훈련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죠셉 샌드만 (어메리카 매거진 2000년 9월<<)

관상기도는 신사도들에 의해서도 매우 증진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앞에서 많이 본 타드 벤틀리의 이전 홈페이지에는 "관상기도를 통해서 삼층천을 보는 방법" (Guided Visualizations of the THIRD HEAVEN) 에 대한 관상법 강의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그 자신이 관상기도 중에 영계에서 선다 싱을 만났다고 적었으며, 선다 싱은 요새 종교분야 베스트셀러의 주인공인 스베덴보리를 영계애서 만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영계에서 만난 자들은 모두 친숙령들(familiiar spirits)입니다.

성경은 죽은 자와의 교통(Necromancy)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신명기 18:11)


관상기도는 신복음주의권에서도 매우 유행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레노바레리차드 포스터The Message를 쓴 유진 피터슨을 꼽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관상기도에 대한 칼럼 중의 일부입니다.

"관상이란 깊은 사고로 생각이 머무는 자리, 궁극적으로는 생각 자체를 뛰어넘어 생각 자체도 쉼을 누리는 자리를 뜻합니다."
- L목사 목회칼럼

 

"명상(冥想)이란 정신을 하나로 집중하여 모든 생각, 모든 관념을 비워 빈마음을 이루어내는 작업이다. 불교에서는 명상의 목표를 우주와 진리와의 합일을 목표로 삼는다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과의 합일을 목표로 삼는다. 글자 그대로 영적 체험이요, 신비체험이다."
- K목사의 아침묵상

 

"(관상)기도하는 것은 생각하는 행위에서 출발하는 것인 만큼 교파를 달리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본다는 점에서 불교의 수행법인 참선과도 일맥상통합니다"
- 틸덴 에드워드 샬렘인스티튜트 설립자

 

[7월 25일 추가내용입니다] 관상기도에 관한 참고글 두 개 더 링크합니다.

서양이 동양을 만날 때<<

새 과학과 관상영성<<

 

마지막으로 "관상기도 - 진짜인가?"라는 몬테네그로의 글의 (TLT의 들풀님의) 번역을 소개합니다. 조금 길지만 관심 있으면 읽어 보기 바랍니다.

Marcia Montenegro
(Midwest Christian Outreach Journal, 2005년 2월)

 

“하나님의 첫 언어는 침묵이다.” 
“하나님과의 친밀의 진행은 침묵으로의 진행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느슨한 상태로 등을 곧게 펴, 활력 에너지가 수월하게 흐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순수한 처녀성 지식으로, 관념이 가난하고 추론은 더욱 가난하지만 바로 그것의 청빈과 순수에 의해 ‘그 분이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을 따를 수 있게 해 준다.”

 

향심기도 또는 "듣는 기도"라고도 불리는 관상기도는 로마 카톨릭 수사들인 토머스 머튼, 토머스 키팅, 버질 페닝턴 뿐만 아니라 퀘이커인 리처드 포스터 등에 의해 가르쳐지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이 기도 방법은 하나의 권위가 없고 단일화된 가르침도 없다. 비록 대부분의 스승들이 중세 신비주의, 힌두교, 불교의 영성 교사들을 인용해도 그렇다.

 

www.contemplativeoutreach.org 에 따르면, “향심기도는 크리스천 관상기도의 유산인 고대의 기도 수행으로부터 유래되었다. 특히 사막의 교부/수녀들, 렉시오 디비나 (거룩한 독서), '무지의 구름', '십자가의 성 요한', 그리고 아빌라의 '성 테레사'로부터 유래되었다. 이것은 1970년대에 매서추세츠 스펜서의 성 요셉 수도원에서 세 명의 트래피스트 수사들-윌리엄 메닝어, 버질 페닝턴 그리고 토머스 키팅에 의해 간단한 기도 방법으로 증류되었다”고 한다. 덧붙일 것은, “키팅이 수도원장이었던 이십년 동안 (1961~1981) 이 수도원은 불교와 힌두교 대표자들과도 수시로 대화를 나눴고, 한 선승이 수사들에게 1주 수련회를 이끌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전 트래피스트 수사였던 초월명상 교사도 역시 수사들을 가르쳤다.”

 

관상기도에 대한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은 명백하다. “이탈”, “변이”, “비움”, “계발”, 그리고 “각성” 같은 단어들이 관련 도서의 바다에 들락날락 거린다. 비록 관상기도가 '크리스천 훈련'으로 제시된다 해도 이런 용어들의 사용은 무엇이 가르쳐지는지 보다 면밀한 검색을 확실히 요구하고 있다.   

 

관상기도 운동에서 회자되는 것으로 발견되는 테마들은 참된 기도는 침묵적이고, 말을 넘어서며, 사고도 넘어서고, "거짓 자아"를 없애 버리며, 의식의 변이를 촉발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는 개념들을 포함한다. 제안되는 방법에는 흔히 호흡훈련, 상상하기, 단어나 어구의 반복, 그리고 사고 이탈 등을 포함한다.

 

말을 넘어서: 침묵

 

상기한 인용문에서 보듯이, 침묵은 하나님의 ‘언어’라고 가정되었다. 이것은 모순으로 보이는데, 언어는 주로 낱말 사용 또는 최소한 기호 사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을까? 몇몇은 시편 62:5 “나의 혼아, 침묵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기다려라, 내 희망이 그 분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라.”를 인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성구는 도피처와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 대한 것이지, 어떻게 기도하는 것인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강조점은 오직 하나님만을 기대하는 것 ?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비록 시편기자가 기도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침묵이 기도의 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침묵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키팅은, 말로 하는 기도는 가장 심오한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관상기도 옹호자들이 주로 인용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관상의 진일보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교육과 수행/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일반적으로 기도라고 불리는 것에서 볼 수 있는 말들이나 간구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명료하게 발음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형태도 없다.”

 

관상기도의 명백한 아이러니 중의 하나는 그것은 필연적으로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리는 낱말들을 넘어선다는 것은 선불교의 관념이다 (이것은 또한 도교의 관점이기도 한데, 선의 뿌리는 도교와 불교이기 때문이다). 선불교는 가르치기를, 진리는 반드시, 앉아서 명상(좌선)을 하거나, 이성적 생각이 초월되도록 생각들을 버리는 마음비우기를 계발하거나, 또는 아마도 린자이 종(역자 주: Rinzai School, 중국 린지이수안/臨?義玄을 본받은 일본식 좌선파)에서처럼 선문답에 의해 사람의 각성이 촉발되도록 할 때 깨달아지는 것이 틀림없다고들 한다(선문답으로는, 한 손으로 박수를 칠 때 어떤 소리가 나는가? 태어나기 전, 당신의 얼굴은 무엇이었는가? 같은 것이 있다). 선불교에 따르면, 부처(Buddah)의 실제 메시지는 항상 말해지지 않은 채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단어들로 메시지를 표현하려고 할 때 그것들이 메시지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해버린다는 것이다.

 

미국 '유니티'(Unity) 종파의 기독교 일치 학교(The Unity School of Christianity)는 ? '새생각원리'(New Thought principles)에 의해 세워진 집단으로, 창설자들은 동양종교에 영향 받은 뉴에이지 운동의 선두 주자다. 유니티는, 예수님을 '길 안내자'로 부르며 그 분이 완전성을 얻었을 때 크리스토가 되었다고, 또 모든 사람들 역시 크리스토와 비슷하게 될 수 있는 내부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유니티 소책자 '일치라 불리는 모험'을 보면, 기도란 사람의 온 지성을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 진리의 긍정적 진술을 받아들이는 것, 신적 원리들을 명상하는 것, 그리고 끝으로 일치(Unity)가 침묵이라 부르는 거기서 사람이 하느님의 고요하고 미세한 음성을 잘 받아들이는, 놀라운 적막의 시간 속에 자기존재 안에서 돌아섬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위의 말은 '신적 원리'란 구절을 제외하고는 관상기도 문집에서 발견되는 진술과 비슷하다. 유니티는 또, 영적 친교는 침묵 속의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침묵 명상이 기도라는 주장에 사용되는 또 다른 인기 성구가 시편 46:10-“잠잠하라 그리고 내가 하나님임을 알라.” 그러나 이것은 문맥에서 벗어나 있다. 이 시편에 대한 한 연구는,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말씀임을 보여 준다. 몇몇 번역본들은 이것을 “저항을 그만 두라 그리고 내가 하나님임을 알라”고 번역해 놓았다 (NASB, ESV). 이 성구에 대한 찰스 스펄전의 견해는 “손을 놓아라, 너희 대적들아! 앉아서 인내 가운데 기다려라, 너희 신자들아! 여호와는 하나님임을 인정하라, 그분의 저주의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아! 그분을 숭배하라, 오직 그분만을, 그분의 은혜의 보호에 참여하는 사람들아!” 이다. 

 

침묵 속 기도 또는 침묵 가운데 성경말씀을 숙고하는 것은 정상이다. 그러나 침묵을 말(단어) 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성경은 "하나님의 언어가 침묵"이라는 개념에 대해 어떠한 지지도 보내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리처드 포스터는 심지어 침묵 관상기도를 "좀 더 성숙한 신자들을 위한 것"이라며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는 하나님 편이 아닌 영적 존재들과 마주칠 수도 있는 영적인 영역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다”고. 그러면서 그는 '보호의 기도'를 제안하는데 자신을 '크리스토의 빛'으로 감싸면서 “모든 어둡고 악한 영들은 당장 떠나라”는 기도와 기타 다른 말로 악한 영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몬테네그로)는 지난 날 뉴에이지 시절 때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때 점술 행위나 죽은 자들과 접촉하기 전, "보호의 하얀 빛"을 불러 들이라고 배웠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서 17장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악한 영으로부터 지켜 주소서”(15절)고 간구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사탄의 간계들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기 위한 간구이지, 우리의 기도 중에 악령들을 떨궈 내려는 하나의 공식이 아니었다(역자 주: 몬테네그로의 이 점은 일부 교회와는 견해가 다를 수도 있음).

 

크리스토에 관한 어떤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당신한데 말하는 것은 바로 당신 마음 안에서다. 그는 당신의 가장 친밀한 친구인데 때로는 단어들로, 때로는 단어들을 넘어서 여러분에게 말을 하신다”고 썼다. 이 책은 뉴에이지 고전이고, 이러한 말들은 관상기도 저자들에 의한 많은 진술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침묵은 우리를 달래고 위로해 줄 수 있다. 우리는 조용한 가운데서 깊은 통찰력들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조용해지려는 것이 곧 기도는 아니다. 참된 기도는 말없음이라는 견해가 뒷받침 될 근거가 성경엔 없다. 기왕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록된 계시를 주셨고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들은 성경 전체에 걸쳐 두루 확실히 상찬된다. 예컨대 시편 119편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석과 등불로서 기린 것처럼. 이사야서 40:8 말씀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서리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성부님께 “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고 요한복음 17:17에서 선언했다.

 

마음을 넘어서: 생각 비우기

 

키팅에 따르면, 관상기도는 생각으로부터의 이탈, ‘생각 없음’ 상태에 들어가기, "모든 생각들 심지어 제일 좋은 생각들까지도 떨쳐버리는 시간"으로 오직 순수한 각성만이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우리가 논리와 지성을 사용하면 성령님은 참견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의 매우 제한된 인간적 방식의 생각과 개념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이런 신적인 레벨로 작용하기 시작하시도록 환영하는 공간을 열 때…우리의 중심(Center)이 우리의 인간적 생각들과 논리를 뒤에 두고 신성과 성령을 경청하는 수행에 집중할 때"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도의 급진적인 재 정의와 함께 생각 또는 논리와 영성 사이의 거짓된 이중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뉴에이지에서 흔한 개념이다.

 

페닝턴은 ‘의식의 전이’ 그리고 "보통 의식" 너머 "순수 의식" 상태로의 진입을 논하면서 거기에서 '참 자아'를 위해 '거짓 자아'를 떠나 하느님과의 ‘일치-의식’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기도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한 아직 기도하고 있지 않다”는 사막교부들의 말과 “우리는 생각 너머로 일어서야 한다”는 토머스 머튼의 말을 인용한다. 페닝턴은 “순수 의식”이란 제하의 장에서 하느님을 어떤 '주체-객체' 지식보다는 순수 의식 속에서 알게 된다"고 진술한다.

 

청소년사역 전문단체 'Youth Specialties'의 한 필자는 댈러스 윌러드, 리처드 포스터, 그리고 나중엔 마이스터 엑카르트, 아빌라의 테레사 몰튼 켈지 같은 신비주의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관상기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그는 기도실을 지어놓고 보고했다: “그 공간에서 나는 초를 켜고 향을 태우며 묵주들을 걸어 놓고 베네딕트 수사들의 테잎을 들었다. 단어들, 이미지들 그리고 소리들을 몇 시간이고 명상했다. 나는 알파 뇌파의 패턴을 얻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고 그 상태에서 여전히 깨어 명상하는 동안 꿈들이 일어난다.”

 

이것은 마치 의식의 변환 상태 ?가벼운 황홀경-에 들어간 것처럼 들린다. 이것은 동양종교/뉴에이지 명상 안에 들어간 것과 같은 상태이고 자기최면 기법에 버금가는 것이다. 사실 동양종교와 뉴에이지 명상의 목적은, 마음을 넘어서려는 것인데, 마음은 영적 깨달음에 장애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 필자는 또, 어느 수련회에서 “기도 중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휘장이 더 얇아진다는 신념에 근거하여 ‘얇은 장’ 예배를 드렸다. 여러 날 밤을 꼬박, 이끔이가 있는 명상과, 드럼서클(둥글게 둘러 앉거나 서서 하는 타악기 연주: 역자 주)들과 '영혼 실험'에 몰두했다"고 진술한다.

 

사실 성경에는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이 결코 생각 없는 수행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성경 안에 ‘묵상’으로 번역된 많은 낱말들은 ‘숙고하다’, ‘음미하다’, ‘말하다’, 또는 ‘소리 내어 읊다’를 뜻한다. 이 낱말들 대부분은 시편에 있는데 다? 등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교훈들과 말씀들을 찬양하면서 그런 것들은 우리가 배우고 순종하고 음미해야 할 숙고해야 할 것이라고 확인시켜준다.
이것은 분명, 또 다른 차원의 의식을 위하여 보통 생각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존재하지도 않는) 휘장을 더 얇게 하기 위해 취하는 행위도 아닌 것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죽음이 성전 지성소 안의 두껍고 무거운 휘장을 찢어버림으로써 신자들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영원히 열렸음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지 않았는가?  

 

우리의 문화에 끼쳐진 동양종교와 뉴에이지의 영향 탓에 ‘묵상(명상)’이란 단어는 다른 의식 상태로 들어가기, 생각 초월하기, 영적 각성 실현 등을 의미하게끔 되어 버렸다. 이런 기법과 목적들을 ‘묵상(명상)’으로 번역된 성경의 낱말들로 파악할 수는 없다. 성경의 '묵상'은 동양종교/뉴에이지적 의미와는 전혀 무관한, 서로 다른 여러 히브리어 낱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낱말들의 컨텍스트는 능동적인 숙고, 생각하기와 배우기를 가리키는 것이지 기법이나 마음으로부터의 이탈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자아를 넘어: 거짓 자아 대(vs) 참 자아

 

토머스 머튼은 주장한다: “피상적인 ‘나’는 우리의 진짜 자아가 아니다. 단지 우리의 ‘개체성’과 ‘경험적 자아’일 뿐이다. '우리가 그 속에서 하느님 눈 앞에 존재하는, 그 숨겨지고 신비로운 인격체'는 아니다”고. 이런 식의 생각은 키팅과 페닝턴에게서도 발견된다. 키팅은, 관상기도가 "아는 자, 앎, 그리고 알아진 것들이 모두 하나인 그 장소’로 우리를 데려 간다. 오직 깨달음만이 남는다. 깨닫는 사람은 의식의 대상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과 함께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신적 연합이다”고 말했다.

 

신비주의를 의존하는 한 필자는 오늘날 관상기도의 가르침에 참여하고 있음을 거의 알지 못하면서, “신비적 삶의 최고 상태는 자아의 완전한 죽음이 있는 때 그리고 어둠의 침묵으로 들어간 때에만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무(Nothingness)이고, '길 없는 길'(Wayless Way)이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어서 “신비적 상태들은 느낌의 상태들 보다 더한, 지식의 상태들이다”고 한다. 이것은 지식에 대한 영지주의적 관점이다 ? 이런 높은 상태들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지식.

 

키팅과 머튼 둘 다, 거짓 자아와 참 자아를 논한다. 키팅은 '자아'(Self)를 대문자화 하면서 “하느님과 우리의 참 자아(Self)는 별개가 아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은 아니지만 하느님과 우리의 참 자아는 같은 것이다”고 말한다. 머튼에 따르면, 우리의 "외부적, 일상적인 자아"는 거의 '허구'이며 "찾기가 쉽지 않은 우리의 참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중심에 있는 불분명과 무(Nothingness) 안에 감춰져" 있다. 거기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직접적인 의존 가운데" 있는 것이다.

 

비슷하게도, 또 다른 저자는 “하느님-신비주의 안에서 항상 발견되는 기본 생각은 영혼의 불사(不死)이고 무한한 바탕 ? 즉, 하나님 ? 에게로 향한 영혼의 귀환이라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귀환’이란 단어를 주의하라. 우리의 영혼이 원래 하나님과 함께 있었을지라도 이것은 명백히 비성경적 개념이다.

 

불교는 우리의 정체성이 마치 필름 위의 영상처럼 단순히 덧 없는 이미지 또는 흔적에 지나지 않거나 "우발과 진행의 연속"에 불과하다면서 따라서 우리의 '참 본성'인 부처의 본성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 기존 개념의 '자아' 또는 '인격체’는 주로 골라낸 기억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역사로 구성된다고 가르친다. 어느 선승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당신은 없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숨을 내쉬고 들이킬 때 움직이는 흔들문짝(a swinging door)일 뿐이다...당신의 마음이 이 동작을 따를 만큼 충분히 순수하고 조용할 때 아무 것도 없게 된다 ? ‘나’도 없고 세상도 없고 마음도 없고 몸도 없는 것이다, 마치 흔들문짝처럼.”이라고 말한다. 힌두교, 도교나 불교에서 자아란 허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유일한 실체는 절대, 도, 또는 부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관상기도 교사들은 우리가 실제 신/하나님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자아와 참 자아를 갈라 제시한다. 성경말씀은 옛 죄성과 그에 대비되는 크리스토 안에서의 새 피조물을 말한다. 이것은 참 자아와 거짓 자아, 또는 허상과 실상이라는 견지에서가 아니다. 오히려 죄에의 결속과 거듭남이라는 견지에서다. '깨달음'의 문제가 아닌, 성령님에 의한 거듭남의 문제이다.

 

머튼은 비록 거짓 자아와 참 자아에 대해 어느 때엔 융(Jung) 심리학적 용어로, 또 어느 때엔 영적인 용어로 여전히 말하지만, 한 책에서는 이 거듭남의 문제를 시인한다. 우리의 죄성은 '거짓 자아'인가? 실체가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거짓 자아는 확실히 아니다. 그런 용어들은 동양종교의 개념들을 반영하며, 적어도 혼란스럽게, 오해하게 만든다.

 

보통을 넘어: 특별한 영성 기법들

 

대부분의 관상기도 교사들은 관상기도는 기법(기술)이 아니라고 공언해 놓고는 정작 다양한 기법들을 추천한다. 페닝턴은 세 개의 "법칙들 또는 지침들"을 제공하는데, 그것들은 "긴장 풀기", "당신의 중심에 내주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속에 머물기", "사랑 낱말 갖기", 그리고 "당신이 뭔가 의식하게 될 때마다 당신의 기도 낱말을 써서 주님께로 그냥 부드럽게 돌아가기"를 포함한다.

 

머튼, 키팅, 페닝턴, 때로는 포스터까지도 관상기도 중 예수, 주님, 아버지, 친구, 또는 예수의 기도 등 낱말이나 어구의 반복을 제안한다. 이것은 크게 "안으로 깊이" 되뇔 수 있고 또는 뭔가 딴 것을 의식하게 될 때 돌아가야 할 낱말로 쓰일 수도 있다. 페닝턴은 조언한다: “그것을 외워서 자신에게 천천히 반복하라. 그것이 걱정들, 기억들, 생각등 당신의 내부 세계와 상호적용하게 허락하면서.”라고 한다. 키팅은 이 개념을 신비주의적인 ‘무지의 구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돌린다. 그리고 “그 단어는 사랑의 단어이어야 하며 그것은 무한자에게로 향하는 사랑의 이끌음으로서 우리가 우리의 평범한 의식을 넘어가도록 할 것이다.”고 충고한다.

 

힌두교, 티벳 불교, 초월명상, 그리고 때로 뉴에이지 명상에서는 만트라라 불리는 한 낱말을 되풀이하도록 명상가에게 주어진다. 이것은 흔히 어느 신의 이름 또는 때로는 "나는 그거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또는 단순히 "나는 있다"를 의미하는 구절이다. 이 만트라의 목적은 자기정화이며 "영적 진리"로 열려 있기 위함이다. 한 단어나 어구의 계속적인 반복 역시 자기최면의 한 방법이다. 관상기도 교사들이 쓰는 용어들 중 다수는 최면술과 동양종교/뉴에이지 가르침에서 사용되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의식의 전이", "순수 의식", "마음 비우기", "공간 만들기", "생각 넘어서기" 등등.

 

포스터는 관상기도 교사들과 신비주의자들의 말을 퍽 많이 인용한다. 문제성 주장들도 있는데 “영적 실체들을 향한 실험적 자세를 지녀 보십시다”, “우리는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하느님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기도하면, 뭔가가 역사 속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 “그것이 주님 뜻이라면”이라고 기도해선 안 된다고 하는 것들이다. 그는 기도할 때 결과들을 초래하기 위한 시각화 기법의 사용을 지지한다. 또 “하나님은 여성 신격에 반대되는 의미의 남성 신격이 아니다”고 말한다.

 

긴장완화에의 집중, 단어/어구 반복, 집중호흡, 사고이탈, 논리초월 등의 관습은 자못 우려를 자아낸다. 크리스찬이 되기 전 오랫동안 다양한 형태의 동양종교와 뉴에이지 명상을 배우고 연습했던 나는 관상기도 변호자들이 제안하는 기법을 써서 가벼운 황홀경에 들어갈 수도 있음을 증언할 수 있다. 이것은 뉴에이저나 기타 사람들이 ‘순수 의식’이라 부르는 상태로, 거기서 수행자의 능동적 사고와 판단능력이 정지돼 버린다. 사실 선불교는 수행자가 마음으로부터의 이탈과 판단 중지 능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비평적 사고가 제 자리에 있지 않으면 마음이 열려 수동적이 된다. 비록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내주하실지라도 우리는 속임이나 기만에 면역성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말씀은 속임수와 거짓 교사들에 대해 그처럼 한사코 신자들에게 경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기법들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어 주나? 특히 그 기법들이 동양종교의 수행과 다름 없을 때도? 에페소서 2:13 은, “전에는 멀리 있던 너희가 이제는 크리스토 예수 안에서 크리스토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크리스토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히 4:16). 기법들을 통해서가 아니다. 요한 1서가 크리스토 안에 머무름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은 크리스토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서로에게 보여주는 사랑에 관해서다. 

 

서양을 넘어: 동양으로부터의 지혜

 

키팅은 ‘비우기’를 논하느라고 불교의 주 경전인 '금강경'(Diamond Sutra)을 인용하면서, 독자들에게, 공중부양과 같은 심령술들이 관상기도에서 비롯될 지도 모르지만 그런 능력들은 케이크에 설탕을 입히는 것과 같다며, 우리는 설탕을 입힌 것만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을 것이지만, 만일 독자들이 심령술에 관심이 있으면 반드시 인가된 교사 아래서 수행하라고 다짐을 놓는다. 명상에서 비롯되는 심령술에 이끌림에 대한 그런 경고들은 힌두교와 불교 명상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들이다.

 

신비주의를 의존하는 한 저술가 역시도 관상기도에서 사용되는 것 같은 많은 기법들을 역시 논하는데,  인류가 진화의 사다리를 더 높이 오를수록 점점 더 일반화 될 의식이, 한 종류의 의식의 선두 주자들을 신비주의자들 가운데서는 우리가 볼 수 없는가 라고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뉴에이지의 것과도 같다. 그것은 사람이 영적으로 진보될수록 심령술이나 초신비 능력 그리고 실체의 본성에의 통찰을 포함할 확장된 의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단정한다. 신비주의자들과 관상기도의 명상적 수행자들에 따르면, 관상가는 신비주의자가 접촉하는 것과 같은 실체와 접촉한다고 진술하며, 또한 관상가는 진리에 대한 순수하고 직접적인 비전을 받는 것으로 느낀다고 진술한다. 이 생각은 동양종교적 명상기법들을 통해 ‘생각 비우기’ 상태에서 좀 더 순수한 형태의 진리를 얻는다고 가르치는 동양종교의 믿음에서 발견된다. 

페닝턴은 "위대한 요기(Yogi) 스와미 사치다난다지"에 대한 경의와 아울러, "진정한 슬기를 찾아" 어느 힌두 스와미 밑에서 공부하려고 인도로 간 한 미국 교수를 자신이 승인해 준 데 대한 글을 썼다. 그는 "대다수 힌두교인들에게 예수는 한 신의 많은 현현 중 하나일 뿐"이라며, "각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신존재 또는 신의 현현을 지닐 자격을 받았다. 예수는 서양 사람을 위한 현현일 뿐이다"고 썼다. 페닝턴은 또 머튼 및 다른 한 명이 관상기도가 ‘수피 명상/기도’와 동일함을 봤다며 기독교인이 초월명상 참여를 옹호한다. 그는 또 아무나(즉 비기독교인도) 관상기도를 배울 수 있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서 관상기도를 그 누구랑 나누는 것도 전혀 주저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묻고 싶을 것이다: 여기 크리스토가 어디 계시냐고.

 

동양으로부터 심각한 영향을 받은 또 다른 관상기도 교사는 토머스 머튼이다. 그는 대단한 지성인이란 사실이 저술로 명백해진다. 그러나 그는 아시아에서 달라이 라마와 조우한 사실을 글을 썼는데 달라이 라마와의 "영적 결속"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티벳 불교도들과 함께 명상 개념들과 카톨릭 수사들의 방법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했다고 진술했으며 심지어 티벳 불교 명상 센터를 미국에 건립하는 것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는 또 티벳 불교 지도자인 초기암 트룽파를 "지혜로운" 그리고 "진정한 영적 대가"라고 불렀다. 그는 심지어 족첸(dzogchen)?비의적 티벳불교 명상법?을 전수받을 생각이었고 불교 저작전집 중 하나를 편집할 참이었다. 그는 이미 선불교에 대해 책을 쓴 적이 있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상의 프로젝트가 1968년 겨울, 아시아에서 그가 급사하는 통에 중단되었다. (역자 주: '족첸'의 본래적 어의는 이미 완벽하고 항상 현존하는 근원적, 원초적인 상태, 자신의 절대 본성 또는 그것을 찾기 위한 명상법을 의미함.)

 

머튼이 쓴 마지막 글인 ‘아시안 저널들’은 그가 동양종교의 신념들과 수행에 매혹되었음을 드러낸다. 스스로가 기독교를 동양종교로 대체하려는 성향을 결코 보이지 않았지만,  동양종교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며, 동양종교 신념의 일부를 기독교 신앙 속으로 기꺼이 영입할 의사를 보였다.- 하기야 족첸 전수를 위한 자문을 구하고 티벳 불교 명상 센터 건립에 도움 줄 생각을 썼다니 그렇게밖엔 더 달리 생각되겠는가! 


나를 비롯한 대다수 크리스찬들은 불교도들에게 크리스토를 보여 주려고 대화를 추구하지, 불교의 행습을 전수 받거나 그들의 가르침을 대신 전파해 주려고 나서지는 않을 터이다.

 

관상기도를 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 가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숙고는, 말씀을 계속 생각하고 속깊이 스며들게 한다는 관점에서 정상적인 학습과 이해 방법이다. 우리의 정신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 또는 그 분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장애물이 아니다. 사실상, 마 22:37~38에서 예수님은 “너의 마음과 너의 혼과 너의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은 첫째이며 가장 큰 명령이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신명기 6:5 말씀을 참조한 것인데, 그것은 “사람의 마음과 혼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으로서 다양하게 표현된다.

 

NET 성경은 신명기 6:5에서 ‘마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lebab’에 대해 이러한 설명을 주고 있다: “구약시대 생리학에서는 마음은 생각 또는 지성의 자리로 간주되었으니 사람은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마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kardia’는 다른 구절에서는 ‘생각’으로 번역되었다. 또 다른 설명: “마음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낱말 ‘leb’ …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kardia’이다.

 

조디어테스(Zodhiates)는 그의 히브리어 자전에서, “‘마음’이란 낱말의 주된 용도는 ‘사람의 내부적 또는 정신적 성숙의 전체’를 가리킨다. 마음은 당신의 지성, 감성, 그리고 의지의 자리이다. 그것은 ‘생각’과 거의 동의어다.” 바인(Vine) 주해사전은 “구약시대의 도덕적 의미로서의 마음이란 감정, 이성 그리고 의지를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해하기’, ‘생각’ 그리고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들은 흔히 성경에서 호환된다.


성경말씀의 ‘마음’은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때로는 ‘생각과 이해’, 때로는 ‘의지’, 때로는 ‘감정’, 때로는 ‘의식’, 때로는 ‘혼 전체’를 뜻한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의 "온 혼"과 그 모든 기능들을 나타낸다. 그 기능들은, 절대적이진 않지만 모두 도덕적 작용들을 총괄하는 한 원리처럼, 그 모두가 사람의 선행이나 악행에 서로 관련된다.

 

우리의 문화 속에 자리잡힌, 마음과 생각 사이의 허구적인 이분법은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문화는 감정들을 마음과 연결시키고 흔히 영성을 마음과 연계시키면서 그것을 생각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이것은 현대적 개념(아마도 낭만주의 소산)이지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 허구적인 이분법을 관상기도에서도 본다. 한 쪽의 생각(또는 추론)과 다른 한 쪽의 감정들(또는 영적 경험들) 사이에. 포스터는 마음의 기도로부터 분리된 생각의 기도를 옹호하는 그의 책 한 권에서 이런 종류의 주제를 잡는다. 그 메시지는 분명한데,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사용하면 그는 하나님과 진정으로 교제할 수 없다는 것 ? 그가 하나님과의 친밀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려면 이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 사람이 하나님과 진정한 연합을 이루려면 말(단어)들을 넘어서 침묵으로 들어가야만 한다고. 이러한 개념들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을 뿐더러 잘못된 기대를 갖게 하고 인위적인 경험을 불러 일으키기가 쉽다. 

 

크리스천의 기도는 성경 말씀 특히 신약 성경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주요 성구들로는 마태 5:43~45 (우리의 원수들을 위한 기도), 마 6:6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기도), 마 6:9~13 (주의 기도), 마 7:6 (반복적이지 않는 기도), 마 9:38 (하나님께 추수를 위해 일꾼을 보내 달라는 기도), 마 21:22 와 약 1:6 (믿음 안에서의 기도), 눅 18:1~8 (낙심하지 않는 기도), 요 16:23~24 (예수 크리스토의 이름으로), 롬 8:25~27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심), 고전 14:15 (영으로 하는 기도와 마음으로 하는 기도), 살전 5:17 (쉬지말고 기도하기 ? 생각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자세를 가지고 만물 가운데 주님 안에 있으면서), 그리고 약 5:14~16 (병자를 위한 기도) 등이 있다. 우리의 기도들은 말들과 생각을 이용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변증론 웹사이트, ‘카톨릭이 답한다’에 있는 한 주요 기사는 이렇게 경고한다. “많은 사람들이 향심기도가 카톨릭 전통과 일치한다고 가정하지만, 사실 향심기도의 기법들은 크리스천적이지도 않고 기도도 아니다. 그것들은 사람의 작용이지 하나님의 작용이 아닌 것처럼 그런 것들은 인간의 능력의 레벨에 있다. 그 기만과 위험성이 농후하다." (역자 주: 물론 이런 주장이 카톨릭 전체에 공통된 것은 아니다.)

 

맺음말

 

관상기도를 권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논리와 이성을 향한 "깔끔하게 포장된" 복음주의적 기독교와, 관상기도의 경험적 신비주의적 면모들 사이의 '딜레마'라는 허위 개념을 똥긴다. 이 생각은 현재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점점 더 일반화되고 있다. 이것은 거짓 딜레마임이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한 부분으로서 이성과 생각을 지지함으로써 성경말씀과 조화를 이룰 수 있고, 침묵기도, 감정들 또는 경험들에 대하여 차별하지 않는다.

 

성경 말씀 어디에도 기도가 기법 또는 생각을 넘어선 방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통째로 성경과 동떨어진 기도신학 창출이 특히 위험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주관론과, 경험에 바탕을 둔 진리로 가득찬 영역-따라서 우리 스스로 속을 수 있는-영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관상기도 교사들은 기도는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것이고 하나님과 신적 연합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기도를 말(단어)들과 생각들로 제시한다. 관상기도는 우리에게 내적으로 집중하라고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밖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훈계한다. 관상기도에 관한 한 평가서는 관상기도가 뉴에이지, 동양종교적 기법들과 성경 밖 개념들의 혼합물이라는 것을 밝혀 준다.

 

관상기도는 틀린 명칭이다. 왜냐면 그것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대로의 기도나 관상(명상, 묵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하라고 권유하는 어떤 지침에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기도 전 또는 도중에 어떤 특정 방법으로 호흡하도록 한다
어떤 자세나 몸의 위치를 유지하도록 한다
한 단어나 구를 반복하도록 하거나, 그것이 성경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또는 집중된 상태로 있기 위해 한 단어나 구를 사용하도록 한다
생각이나 사고를 넘어서도록 한다
하나님을 발견하거나 함께 하기 위해 안으로 돌아서도록 한다
진정으로 기도하기 위해 침묵 가운데 있도록 한다
관상기도가 진짜 기도라는 것을 믿도록 한다 

 

출처 :영적 분별력 원문보기   글쓴이 :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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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차성훈

2010.03.05 21:51:32

1. 밑 글(성공회의 종교통합적 에큐메니즘의 활동상)이랑 출처를 좀 적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 두 글을 가만히 읽다보면, 이상하게 '음모론'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네요. 프리메이슨이니 뉴에이지니 해도, 엄밀하게 따지면 검증되지 않은 음모...수준이 아닌가 싶습니다.('빨갱이'논리나 다를게 없다니까요, 음모론은^^;)

3. 최근 통계를 보니, 세계에서 (로마 가톨릭을 제외한) 단일 교단으로는 성공회가 가장 '쪽수'가 많다고 하더군요. 그말인즉슨, 그 많은 '쪽수'들의 오랜 '역사'가 축적된 전통을 단순한 음모론으로 채색해버리긴 좀 위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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