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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교회와 私立(사립)교회

조회 수 3604 추천 수 0 2010.01.06 11:25:27
  워치만 니는 그의 저서 <교회의 정통, Orthodoxy of the Church> 에서 지금 우리가 일반
적으로 "교회"라고 통칭하고 있는 개신교의 형태를 가리켜 "사립교회"라고 정의(규정)
했다. 

  내가 처음 그 책을 읽을 때는 그의 그러한 정의에 관해서 적잖이 당혹해했다.  전혀 뜻밖
으로 처음 듣는 얘기인데다, 내가 교회에 관해 끔찍히 생각하고 있는 소위 근본주의적인
모습인 내게는 그 말이 주님의 교회를 폄훼한 것처럼 괴상하게 느껴지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치만 니라는 분이 내가 이상한 얘기를 하는 그런 분으로 그냥 치부하고 말 수 있
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저서를 접하는 당시부터 익히 알게 됐다. 혹자가 그분에
대해 어떠한 얘기를 하던간에 실제로 그분은 엄청난 수의 교회들을 세우고 돌본 그러한 이
력을 가진 분이다. 그 많은 숫자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했다는 말인데,
누구라도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후 나는 그 문제를 가지고 끝없이 사고했다. 사고했다기 보다는 차라리 그 책을 읽은 후
수년간이나 그 말이 계속해서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의 결론은, 워치만 니는 대단한 영성을 가졌던 사람이고 나는 애숭이에 불과
했다는 판단이다. 세상에는 公교회와 私立교회가 분명히 구분 가능하게 존재한다는 그것이
지금의 내 사고다. 그 판단의 기준은 어떠한 외형적인 모습도 아니다. 순 개념적인 것으로,
예를 들어, 비록 두세 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더라도(대다수의 한국 교회들이 창립 초기
늘상 그래왔었던 것처럼 말이다) 거기에 순수한 뜻이 지배하면 그게 공교회일 것이고,  수십
만이 모여서 멋진 예배당에서 멋지게 예배를 드리더라도 거기에 일인(혹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지배적인 힘만이 작용하고 있다면 그건 분명히 사립교회가 될 것이다. 물론 적은 
수가 모이는 교회라고 해서 사립교회가 아니라는 법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일이고,
반대로 많이 모이는 교회라는 이유를 들어 사립교회라고 해석할 수는 없는 일이겠다. 
어떻든 그 양자를 분별하는 일은, 쉽게 대볼 수 있는 어떤 잣대나 기준도 없는 일이고 해서
매우 고난위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그저 몇차례 그 교회에 출석해본다고 해서 간단히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려운 문제다. 나아가 사립개념의 교회들이 대다수
를 차지하고 있는게 현실이라면 그속에서 과연 올바른 모습을 가진 교회를 찾아 낸다는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신앙적 지조를 가지고(이때 그
"지조"가 온전한 것인가 그렇지 못한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별개의 사안일 것이다) 신앙생
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인 큰 난관이다.

공교회는 주님이 주인이시지만, 사립교회는 사람이 주인 역할을 한다는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세태를 놓고 볼 때, 공교회가 사립으로 떨어질 수는 있겠으나 불행하게도 사립교회가
공교회로 회복되는 그 일은 어려워 보이기만 한다.

또한, 그 둘을 구분(분별)하는 일은 각자의 몫이며, 그 일이 자신이 출석할 교회를 결정하
게 할 최우선적인 가치기준이라고 판단된다.



[레벨:4]주향한

2010.01.09 12:58:25

예수만 선생님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계시군요
젊은 청년시절 미칠듯한 열정
교회를 위한 사랑
제 자신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꿈같은 시절을 돌다가
언제부턴가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사교회라는 표현이
안타깝게도
교회가 아니다라는 표현으로 들려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군요

제 형제중에도
정말 인생을 함께할 친구중에도
선배 후배들 중에도
교회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분들이 많은데
몽땅 사교회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없고
거참...
어렵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번번히 귀한글 감사합니다

[레벨:12]진 예수만

2010.01.09 17:59:25

주향한님!  우선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썩은 거름더미 속에도 언제나 감춰진 채 살아
있는 씨앗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때가 되면 새로운 대지위
에서 기적적으로 움터나와 자라나게 돼있습니다.(저는 어린시절 그걸 많이 
목격했습니다) 
단지 그 거름더미 속에서도 생명을 갖고 살아있는 그 위대한 씨앗은 숫자
면에서 매우 귀하다는 것이지요. 거름더미가 시커먹게 썩었다고 해서 그
속에 생명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그걸 염두에 두고 절대로 영적
으로 좌절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향한님께서 "한 때 상기되어 들떠있던 신앙적 열정" 그리고 그후 마치 폭풍
이 크게 한차래 지나가고 난 그런 대지와도 같은 적막감, 그걸 말씀하셨는데요.
그렇습니다. 들떠있는 상태에서 진정한 열매가 나타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꽃샘추위와도 같은 처절함이 수반되고 나서야 결국은 뭐가 이뤄져도 이뤄진
다고 생각됩니다(워치만 니는 이걸 "그분에게 처리하심을 받고 나서야 진정한
사역자가 될 수 있다" 라고 썻더군요. 구약에는 풀무불 속에서 정금이 되어 나
온다 라고 했고 말입니다)

나아가, 씨앗은 움틀 기회를 만나면 활발하게 움터 새로운 그루터기로 성장
해야만 그 구실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속에 너무 오래있다가보면 씨앗 그
자체도 생명이 사라지고 그냥 거름더미로 섞이고 말게 되는 것이겠지요.

저는 주님의 가르침인 "깨어 있음"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
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어찌보면 그 숫자가 극소수일 수도 있겠음이
한편은 너무도 두렵고 떨리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정말 신앙의 본질은 처절한 희생과 아픔의 감내라고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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