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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상> 2009년 2 월호

 

 

위기와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오라

 

 

 

독 사의 종류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래의 노하심을 피하라 하더냐. 그런고로 회개함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맘속에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 것은 광야의 예언자 세례 요한이 그 세례를 받으러 나온 바리새교인과 사두개 교인을 보고 발한 책망이다. 왜 그는 이런 격분한 말을 했던가. 저들이 양심의 갈급함이 없이 형식으로 외모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양심’ 위에 ‘주의 길을 예비하며 그 첩경을 곧게’ 하자는 그의 눈에는 외모의 믿음은 간교한 독사의 일같이 가증하게 보이었던 것이다.

이제 이 같은 부르짖음을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를 향하여 보낼 필요가 있는 때가 왔다. 은혜와 진리가 흘러넘쳐 사막 같은 이 세상에 생명 물을 공급하는 오아시스이어야 할 하나님의 교회는 저 자신이 물이 다한 우물처럼 타 말라, 보기 싫은 신조의 죽은 껍질만을 남겼을 뿐이다.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는 믿는 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교회 명부에 이름이 있는 것이요, 주일과 기도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것이요, 날마다 성서보고, 목소리를 높여 찬미하고, 장강유수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요, 연보를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밖에 없다.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대답하기를 죄 속함을 입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이 그런가. 그보다도 생활이 나아지기 위하여, 남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인격 수양을 위하여, 사회사업을 하기 위하여 믿는 자가 더 많지 않을까. 그 증거로는 그들 중에 자기 죄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가 없다. 그들은 죄라면 살인강도나 간음, 사기 같은 법률상의 죄로만 알 뿐이요, 그것이 없는 한 자기는 의인인 줄로 안다. 기도할 때는 습관처럼 ‘저는 죄인이오나…’ 하나, 머리를 들고 있는 동안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영생을 원한다고 하나 그 영생이란 늙은이에 있어서는 욕심밖에 더 되는 것 없고, 젊은이에 있어서는 내용 없는 말밖에 되는 것 없다. 불신자가 누리는 세상 영화에서 털끝만한 것도 빼지 않고 다 누린 후, 천당에 가서 불신자는 못 가지는 복락을 또 한 가지 더 얻자는 것이니 욕심의 변태가 아니고 무엇이며, 몸은 비록 죽으나 우리의 사업과 정신이 후에 (‘남는’의 옛말) 것이라고 생각하니 텅 빈 말만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날의 신자는 말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일은 어떤 것인가.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유치원을 하는 것이다. 농촌사업을 하는 것이다. 하기아동성서학교를 하는 것이요, 청년회, 하령회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기 위하여 불신자에게도 기부를 청하고 남의 보조를 받고 운동을 하고 교섭을 하고 선전을 한다. 거기도 수완이 있어야 하고 책략이 있어야 하고 우량한 성적을 말하는 높은 숫자의 보고서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신자는 전도를 열심히 한다.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불쌍한 영혼은 끌려서 어디로 가나, 하나님께로 가나, 예수께로 가나, 아니, ‘우리 장로교’로 가고, ‘우리 감리교’로 간다. 때로는 좌우편에서 끌어 그 가련한 양은 갈팡질팡하는 수도 있다. 그것을 없애기 위하여 구역의 설정이 있다. 저기는 네 구역, 여기는 내 구역, 재산 분배를 청하는 사람을 보고 “누가 나를 너의 위에 법관과 물건 나누는 자로 삼았느냐?”고 책망한 예수가 그 구역을 분배하였을까.

통히 말하면 오늘날 교회의 신앙은 죽었다. 그 정통이라는 것은 생명 없는 형식의 껍질이요, 그 진보적이라는 것은 세속주의다. 이제 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의 지체도 아니요, 세상의 소금도 아니요, 외로운 영혼의 피난처조차도 되지 못한다. 한 수양소요, 한 문화기관이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적어도 기독교만은 형식에 떨어지고 세속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바로 그 형식의 종교와 세속주의를 박멸하기 위하여서가 아니었던가. 이제 다시 그와 영합하는 것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를 생명으로 아는 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에게 절대 복종하고, 절대 신뢰하는 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가 명령하기를 부모나 형제나 처자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라 하였으면 그대로 하는 것이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 하였으면 그대로 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그저 말로나 외모의 행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의 전 생명을 그리스도에게 넘겨주는 일이다. 종래 자기 표준, 인간 중심으로 살던 것을 그리스도 표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일이다. 자기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일이다.

그러 므로 신앙은 안에 있는 것이요, 밖에 있지 않으며, 양심에 있고 행동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통회한 영혼이요, 제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 법규를 다 지키고 외양의 행동을 선히 하여도 ‘나’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 이상 신앙은 아니다. 내 영혼이 구원 얻기 위하여, 내 인격이 높아지기 위하여, 내가 영생하기 위하여, 내 가족, 내 민족이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아무리 열심이 있고 경건이 있어도 신앙이 아니다. 그는 내 재산, 내 세력을 모으려는 것보다 정도는 높을는지 몰라도 ‘나’ 표준, ‘인간’ 중심인 데서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것처럼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은 없다. 죄란 살인강도를 가리킴이 아니요,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이 자기중심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의 신자는 그 거짓 신앙에서 뛰어나와야 한다. 그 ‘나’ 표준의 태도를 버리고 그 문화주의 살림을 폐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에게 돌리는 하나님 중심의 믿음에 돌아와야 한다. 불신자에게 회개를 권하기 전에 저 자신이 먼저 회개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바리새교인더러 천국 문에 서서 자기도 아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한다고 책망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떨치지 못하는 원인은 불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신자 자신에 있다. 형식주의, 문화주의의 거짓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오늘날의 신자는 역시 천국 문을 가로막아 서는 자다. 아아, 무서운 일이여! 저희는 속히 이 무서운 자리를 떠나야 한다. 회개하고 성령을 고쳐 받고, 성서를 고쳐 읽어라! 내 뜻대로 헤매었던 탕자가 돌아옴같이 산 신앙을 도로 찾아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1935년 12월)

편집자 주: 이 글은 『김교신 전집2 -신앙론』(부키)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글쓴이 / 김교신

김교신 선생이 1935년 비판한 한국교회의 모습이 2011년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레벨:3]심료

2011.03.24 07:28:24

귀한 말씀정보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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