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을 위한 책갈피입니다. 나누고 싶은 책 내용이나 소개하고 싶은 글들은 이곳에 올려주세요~

어제 서점에 갔다가 프랑스의 노 운동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아주 얇은 책이었다.

인터뷰나 주석, 추천글 등을 빼면 더욱 얇아지는 책이다.

본문의 내용은 30페이정도이고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읽어 낼 수 있는 책이다.

어쩌면 책이라기 보다는 청년시설 접하던 선동문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 기사에서 접하고 얼마 전 한겨레 신문에 소개가 된 적이 있어 너무나 작은 분량이 충분한 내용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들고 나왔다.

인터넷 상으로도 충분히 전달되고 읽힐 만한 분량과 내용이 도대체 왜 책으로 나왔을까?

이것은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들이다.

 

레지스탕스의 생활과 운동을 통해 이루어 놓은 것들 그리고 그것의 가치와 성과들이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로 인한 분노는 충만하다.  여느 어른들 처럼  젊은 이들에게 못마땅해 함이 묻어나고  자신들이 살아온 방식대로 투쟁할 것을 타이르지만 사실  '분노하고 투쟁하라'는 이야기 외에는 하고 있는 이야기는 없는 듯하다. - 물론 스테판 에셀의 삶이 가지는 가치를 충분히 평가하지만 그것이 현재적 삶 속에서 가지는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의미있는 과정'이라고 보는 헤겔의 진부함에 끌린 노 투사의 사고는 역사에 의미있는 행위를 하지 못하는  젊은 이들을 세상에 무관심하다고 보고있다.

 

광범위한 현상으로 무관심 자체를 사유하지 못한 것은 스테판 에셀이 가지는 사고가 밀고갈 수 없는 부분인 듯 하다.

어떠한 권력화의 과정에도  포함되고 싶지 않은 '무관심'.

하지만 이러한 무관심은 어느 힘에건 휩쓸리는 그러한 무력함이라기 보다는 지금의 영토화된 것들에 속하지 않는 '무관심'으로 그 상태를 고집하는 완고함으로 잠재되어 있을 수 있다.

분명 이것은 권력화에 포획된 심리적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사고하게 만드는 부분임에도 이부분에 대한 고민과 이야기는 방기되어 버린다.

 

비폭력에 대한 그의 입장은 레지스탕스를 통한 충분한 폭력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인지 자못 당당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스스로 충분히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그에 대한 삶의 충고가 정당한 것은 아니다.

세계에는 여전히 폭력의 문제가 선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생존의 문제인 어느 구석이 존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그러한 삶의 터널을 지나온지 얼마되지 않았으며 그 굴로 다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언제 또 다시 그러한 삶이 의미를 발생시킬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이다.

넬슨 만델라, 마틴 루터 킹의 메시지가 타당한 내용이라고 이야기 하기 전에 이를 열렬히 지지하던, 하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는지를 생각하라.

'이성'이란 이름 앞에 대중의 투쟁의지를 꺽던 이들이 아니던가?

누군가에겐가 강요되는 폭력, 그것의 피해자 이건 가해자 이건 간에  그것은 생존을 담보로 강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폭력을 강요하지 않는 것 만큼이나 비폭력을 강요하지 않는 것도 균형을 이루는 일 아닌가?

 

'평화적 봉기' 그것은 폭력앞에 겁먹고 주춤거리는 비폭력으로 위장한 무력함이 아니다.

'이만하면 의지를 잘 보여줬다.'고 물러서는 나약함이 아니다.

우리들은 매우 많은 경우에 이러한 물러섬이나 무력함을 평화적이라고 이야기 한다.

무엇이 평화적인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영국의 폭동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그들의 투쟁은 폭력적이기에 부당한 것인가?

배제된 자들의 투쟁은 어쩌면 항상 그럴지도 모른다.

당신은 배제된 자인가?

 

"창조, 그것은 항상 저항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며

저항, 그것이 항상 창조적인 것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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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14.01.16 12:5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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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셀 옹의 책이 출판되자마자 불어를 하는 친구가 거칠게 번역한 것을 읽었었습니다.
기억으로는 투쟁에 무관심한 현실에 부싯돌로 불꽃을 튀기려는 느낌을 받았었어요.
투쟁할 꺼리가 없는 것일 수도 있고
투쟁할 것을 인식못할 수도 있고
투쟁할 역동성이 부족할 수도 있는 경우가 있겠죠.

투쟁방식에도 폭력과 비폭력은 둘다 있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에게 표출이고 위협이고 설득이 필요하니까요.
사안마다 방식은 달라져야겠지만
폭력과 비폭력의 교차로 두 방식이 더 효과적이 될 수 있을 것같아요.
폭력의 극한이 비폭력이 될 수 있고,
비폭력이 무기력으로 보일 수 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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