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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낙과 바르트의 논쟁: 편지교환

조회 수 11408 추천 수 0 2010.04.25 20:56:05
요약 정리: 박영식

출처: Walter Feurich (Hg.) Karl Barth: Klärung-Wirkung-Aufbruch, Union Verlag Berlin 225ff.

<하르낙과 바르트의 논쟁: 편지교환>

- 바르트가 1922년 Römerbrief(로마서강해 2판)를 출판하고서 괴팅엔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게 되었다. 바르트는 신학수업 5년 후 자펜빌에서 목사로 있으면서 성서를 깊이 연구하게 되었고, 신학수업기간동안의 스승이었던 하르낙이 히틀러의 정책에 찬동하고 나서자, 하르낙을 위시한 자유주의 신학의 사조와 철저히 단절하면서 로마서 강해를 저술한다. 

로마서1판과는 완전히 다르게 기록되었다는 로마서 2판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인간중심적 신학을 거부하고, 자유주의신학자들에게서 중요한 경험, 전통, 문화, 교양, 경건 등의 개념을 거부, 새로이 해석한다.

이에 대해 하르낙은 바르트에게 먼저 편지를 보내어 신학과 인생의 스승으로서 무언가 충고를 하려다가 오히려 호되게 뺨을 얻어받게 되는 격이 되었다. 그리하여 하르낙은 다시 한번 바르트에게 글을 보낸다. 그러나 바르트의 마음은 스승에게서 완전히 돌아서 있었고, 이 둘은 서로에게 전혀 이해될 수 없는 채로, 각자의 운명을 달리해야만 했다.

- 인간 중심적 신학과 신 중심적 신학의 대결이며, 역사비평과 성서현실주의의 충돌이다. 특히 신학의 학문성이 문제시되고 있다.

- 바르트와 하르낙의 편지교환은 먼저 하르낙이 [신학자들 사이에서 학문적 신학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한 15개의 질문] (Fünfzehn Fragen an die Verächter der wissenschaftlichen Theologie unter den Theologen)이란 제목으로 "Die Christliche Welt"(기독교 세계) 1923년에 개재하고 이에 대해 바르트가 같은 잡지에 하르낙 교수에게 하나 많은 16개의 답변을 제시함으로써 전개된다. 그 후에 하르낙의 공개편지와 바르트의 공개답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르낙의 정리로 끝이 난다.

- 다음의 이 요약은 첫 번째 하르낙의 질문(**이하의 내용은 본인의 견해임)과 바르트의 답변, 그리고 하르낙의 공개편지에서 질문(☞)을 상호 관련시켜 엮어놓았다.

225쪽

"신학자들 사이에서 학문적 신학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한 15개의 질문"

1. 신앙이나 경건 그리고 삶의 관점에서 간단하게 성서에 대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서의 종교 또는 성서 안에 있는 계시들이 그렇게 단조로운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복음의 내용을 확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관적 경험이나 체험에 넘겨지든지, 아니면 이때 역사적 지식 geschichtliches Wissen이나 비판적 숙고 kritisches Nachdenken가 요구되지 않겠는가?

** 하르낙의 질문은 반어적 물음이다. 조건절의 내용은 하르낙이 이해한 바르트의 논리이며, 주절의 질문은 하르낙 자신의 주장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 성서의 종교 혹은 성서 안에 있는 계시들은 그것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지식이나 비평적 사고가 필요 없을 정도로 일의적이고 분명한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어떤 인간적 영혼과 정신기능에도 그것이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마음에서 비추어질 때까지 단지 기다리고만 있어야만 할 정도로 파악되지 않고 기술될 수 없는 것인가? 만약 이 두 견해 모두가 잘못이라면,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내적인 개방성과 함께 역사적 지식과 비판적 숙고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3. 하나님체험 Gotteserlebnis은 신앙의 각성 Erweckung des Glaubens과 다른가 아니면 동일한가? 만약 그것이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규제될 수 없는 열광(熱狂)과 어느 정도나 차이가 나는가? 만약 그것이 동일한 것이라면, 어떻게 복음의 설교에서 생겨나지 않고 다르게 생겨날 수 있으며, 어떻게 그러한 설교가 역사적 지식과 비판적 숙고 없이도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 하르낙에 의하면 복음의 설교는 반드시 역사적 지식과 비판적 숙고(이는 모든 학문적 기초이다)를 거쳐 이해되어야 하는데, 바르트는 신학과 설교의 과제와 동일시하면서도 이러한 학문론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광신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Erweckung이란 단어는 카톨릭 전통에서는 없는 단어로서 갑작스런 변화, 우리 교회전통에서 볼 때, 부흥회에서 일어난 신앙의 대각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교회사에서는 웨슬리 성결운동이나, 무디의 부흥운동 등을 Erweckungsbewegung(각성운동)이라고 부른다.

4. 하나님체험이 모든 그 밖의 체험에 반대되고 모순된다면, 어떻게 급진적인 세상도피의 필연성을 모면할 수 있을까? 또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자신의 의지의 결의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한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에 머물러야만 한다는 식의 궤변론 Sophismus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225)

5. 하나님과 세계(하나님 안에 있는 삶과 세상적인 삶)가 전적으로 대립되어 있다면, 성서의 핵심적인 내용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긴밀한 연관, 바로 이 양자의 동등성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도덕을 최고로 여기지 않고서 어떻게 이러한 동등성이 가능하겠는가?(226)

6. 하나님과 세계(하나님 안에 있는 삶과 세상적인 삶)가 전적으로 대립되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에게, 즉 선을 향한 교육이 가능하겠는가? 또 역사적 지식과 그리고 도덕을 최고로 여김 없이 어떻게 교육이 가능하단 말인가?

7. 하나님이 진정, 문화의 발전과 인식 그리고 도덕으로부터 말해질 수 없다면, 어떻게 이 문화를 보호하며 그리고 자신을 무신론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단 말인가?

8. 괴테의 범신론과 칸트의 신개념 또는 유사한 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진술과 결국엔 대립된다고 한다면, 이러한 진술이 야만인 Barbarei들에게 내버려지리라는 사실을 모면할 수 있단 말인가?

9. 만약 그 역이 옳다면, 즉 모든 물리적인, 정신적 발전처럼, 여기서 대립들이란 동시에 단계들이며, 그리고 단계들은 동시에 대립들이라는 사실이 옳다면, 어떻게 인간은 이러한 근본적인 인식을 역사적 지식과 비판적 숙고 없이도 파악할 수 있으면 확장할 수 있겠는가?

10.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인식이 최고의 확정적인 하나님 인식이며 그리고 사랑, 기쁨 그리고 평화가 그의 영역이라면, 어떻게 항상 문짝과 문쩌귀 사이에 머물러야만 하며, 기독교 경험을 꿰뚫고 있는 요소들을 제외시키고 끔찍스러운 시점을 영원화하려고 하는가?

** 자유주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최고의 선이며 인류의 이상이며 하나님 자신의 영역에 속한다. 

11. 해방시키는 경구가 여전히 유효하다면-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존경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좋은 것이라 말해지는 것은 바로 관용과 같은 것, 기릴만한 칭송같은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체험과 선, 참과 아름다움 사이에, 역사적 지식과 비판적 숙고를 통해서 이것들을 하나님체험과 연관시키는 대신, 칸막이 Scheidewände를 세울 수 있단 말인가?

12. 죄가 다름 아닌 경외와 사랑의 결핍 als Mangel an Ehrfurcht und Liebe이라면, 어떻게 이 부족함을,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과 그 분의 사랑에 대한 설교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메울 수 있는가?(226) 어떻게 감히 모든 가능한 역설들과 미의(微意) Velleitäten들을 거기에 혼합할 수 있단 말인가?(227)

13. 모든 무의식적인 것, 감각적인 것들, 누미노제 Numinose, 파스키노제 Faskinose 등이 이성에 의해 붙잡혀지지 않고, 파악되지 않고 정화되지 않았을 때 그리고 그 자신의 정당한 속성 안에 보호되지 못할 때, 이것들은 오랫동안 인간 이하의 것 untermenschlich으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면, 어떻게 이러한 이성을 질타하고 근절시키기를 바래야만 한단 말인가? 이러한 헤로스트라트(역자설명: 헤로스트라트는 주전 356년 공명심에 이끌려 아르테미스 신전에 불을 지른 그리스인)와 같은 업적이 성취된다면 무엇을 보존해야만 한단 말인가? 그 잔해 위로 이미 지금 영지적 신비론이 떠오르는 것은 아닌가?

14.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복음의 중심에 서 있다면, 꿈꾸어온 그리스도를 실제적 그리스도와 맞바꾸지 않기 위해서 이 인격에 대한 신빙성 있고, 공동체적인 인식을 위한 토대 마련을, 비판적인 역사연구를 통하지 않고서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누가 이 연구를 학문적 신학(wissenschaftliche Theologie)과는 다르게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15. 진정 학문과 확고한 관련성과 혈족관계에 서 있는 저 신학과는 다른,- 게으름, 근시안적 사고, 수만가지 질병을 시인하면서- 그런 신학이 아직도 있단 말인가? 만약 그러한 어떤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으며 어떤 가치가 있을까?(227)

** 결국 하르낙의 바르트에 대한 공격은 신학의 학문성에 대한 재론으로 귀결되었다. 바르트 신학의 급진성은 19세기 신학의 학문론과의 단절이다. 19세기의 신학의 학문론이 계몽주의 이후의 인간 중심적, 조직적 체계적 학문의 계승이었다고 한다면, 바르트는 인간이성으로 파악 불가능한 계시의 하나님에서 출발하는 신학 본연의 학문적 성격을 앞세운다.

Berlin-Grumewald(베를린 그린발트) Adolf v. Harnack

** 위의 하르낙의 공개질문은 전문을 모두 번역한 것이다.

<바르트의 답변>

-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은 개혁신학 reformatorische Theologie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신학의 중심주제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결코 경험이나 문화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신학의 과제는 곧 설교의 과제이다. 신학은 설교에 봉사해야 한다.

227쪽

교수 하르낙에게 보내는 16개의 답변.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이래로 그리고 특히 독일의 지난 50년간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된 개신교적-학문적 신학의 형태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라고 해서 결코 >>학문적 신학의 경멸자<<일 수는 없다. 

1. 성서의 종교와 계시들의 저편에 신학의 주제로서 하나님의 유일한 하나의 계시(die eine Offenbarung Gottes)가 또한 주목되어져야 한다. 

역사적 지식 Geschichtliches Wissen도 물론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복음의 내용<<(Inhalt des Evangelium)의 전달은 언제나 그 자신의 진술에 따라 내용을 다룸으로써 스스로 실행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비판적 숙고 kritisches Nachdenken도 물론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복음에 대한 이러한 진술은 내용의 본질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근거해 있으며 또한 진지하게 고려되어져야 한다.

신학의 학문성 Wissenschaftlichkeit은, 주체(Subjekt) 이전에 신학의 객체(Objekt)가 있었고. 또 언제나 그러해야 함을 기억했어야 한다. 그것은(객체) 경험과 체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 신학의 객관성은 바르트에게서 방법론의 객관성이 아니라, 신학대상의 객체성(객관이 주관의 반대라면 동일한 독일어 객체는 인간주체의 반대어로 이해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선재성(先在性)을 의미한다. 즉 신학의 가능성은 인간주체의 경험과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다.

☞ 이에 대해 하르낙은 바르트의 주장이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대답한다 (Trotz heißem Bemühen ist sie mir totalunverständlich.). 바르트가 경건주의와 계몽주의가 형성한 기존의 신학을 지나가버린 산물로 취급한 것에 대해, 하르낙은 이 신학을 communis opinio(공동의 견해)를 점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한다. 하르낙에게는 이러한 학문적 신학만이 대상을 적합하게 인식할 수 있다.

2.>>내적 개방성innere Aufgeschlossenheit<<- 경험, 체험, 마음 등-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역사적 지식 geschichtliches Wissen<< 그리고 >>비판적 숙고 kritisches Nachdenken<<은 성서를 이해하려고 할 때, 권장할만 하기도 하고,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도 하고, 또는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성서는 이런 것을 통해서나 어떤 심혼의 역할이나 정신의 기능을 통해서 이해되지 않으며 오히려 영의 내용과 동일한 영에 의해서 >>이해되어진다.<<

☞ 하르낙은 성서의 종교를 이해할 때, 내적인 개방성, 경험, 체험, 마음, 역사적 지식, 비판적 숙고를 원칙적으로 텅빈 백지tabula rasa로 만들어버리면, 무엇이 남겼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3. 그러므로 소위 하나님 체험(Gotteserlebnis)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통해 신앙이 일깨워지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실제로 그것은 통제되지 않는 열광(熱狂)과 구별되지 않는다. 

신앙은 실제로 설교를 통해서 오고, 설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비록 그것이 설교자의 역사적 지식과 비판적 숙고와 관련이 있다하더라도) 신학의 과제는 설교의 과제와 하나이다. Theologie ist eins mit der Aufgabe der Predigt.

☞ 이에 대해 하르낙은 신학의 과제는 학문의 과제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반박한다. "당신은 신학교수직을 설교하는 목사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나는 전체 교회사를 근거로 하여 당신에게 이러한 시도는 건설적nicht zum Erbauen이지 않고 오히려 소모적sondern zum Auflösen이 되리라고 미리 알려 드립니다."

4. 하나님에 의해 일깨워진 신앙은 어느정도 이 세상에 대한 급진적인 저항의 필요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확실히 이 신앙은 그 희망을 약속되어진 불가시성에 두고 있다. 이세상과의 근본적으로 신앙이 거리를 두고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학은 창조자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세상은 전적으로 대립되어 있으며, 창조자와 피조물의 원초적이며서 유한적인 통일성은 우리는 인간으로서 다만 십자가에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228-229)

5.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나란히 함께 있다는 사실은 >>세상 안에 있는 우리의 삶<<과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삶<< 사이의 관계가 전적으로 대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지시하고 있다. 이 대립은 다만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의 기적에 의해서만 극복되어진다.(229)

>>도덕을 최고로 여긴다<<, 좋다. 그러나 대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그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되면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어떻게 되는가?

6.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다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를 나는 마지막 날에 일으켜 깨울 것이다<<

7. >>문화의 발전에서 그리고 그러한 인식과 도덕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에 관한 언설(Aussage über Gott)은 이를 특별한 >>하나님체험<< 표현으로 이해하고(예컨대, 전쟁의 체험에 대한 표현), 그러한 높은 선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하는 원시적 민족들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자 할 것이다 (예컨대 모든 나라의 전쟁신학자들의 언설이 그러하다). 이러한 언설이 결코 >>복음의 설교<<로 생각될 순 없다. 그리고 이것이 문화와 개인을 >>무신론에 대해 보호할 것인지<<도 고려될 수 없다. 

** 바르트는 하르낙의 발전사관에 의존하고 있는 신학방법론을 제국주의적 모델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서양제국주의가 표방하고 나선 문화와 도덕을 앞세워 신앙을 미개인에게 전한다는 식의 제국주의적 선교모델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8.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진술<<은, 오직 인간이 종교나 문화의 높이에서가 아닌, 계시 앞에 그리고 심판 아래 자신을 세워야 함을 알 때만 진정으로 시행된다. 이 대상(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간의 진술은 그것이 괴테와 칸트의 것이라 할지라도 심판아래 놓여 있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야만인에 대한 경고는 비본질적이며, 사태에 걸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어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문화과 마찬가지로 >>야만<<과도 같은 정도로 관계하기 때문이다.(229-230)

9. 하나님의 진리(비록 그것이 인간의 언설로 구술될 수 있다 하더라도)와 우리의 진리는 다만 대립(Gegensatz)되며, 다만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 oder)만 있을 뿐이다.(230) 옛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단계가 없다. 어떠한 발전도 없다. 오히려 다시 태어남이 있을 뿐이다.(230)

12. 만약 죄가 경외심과 사랑의 부족 이상을 의미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면,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의 떨어져 나감과 하나님닮음- 그것의 종말은 죽음이다 -을 잃어버렸음을 의미한다면, 이 때 하나님의 거룩한 존귀함과 사랑에 대한 설교는 우리 인간적 사유와 언설에 깃들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과제이다.(230-231)

Wenn Sünde vielleicht noch etwas mehr sein sollte als Mangel an Ehrfurcht und Liebe, nämlich Abfall des Menschen von Gott und Verlorensein in eine Gottähnlichkeit, deren Ende der Tod ist, dann ist die Predigt(die Theologie) von Gottes heiliger Majestät und Liebe eine Aufgabe, die wunderliche Wege zu gehen unserm menschlichen Denken und Reden nicht ersparen zu können scheint.

구경꾼 신학은 모든 가능한 역설들과 미의(微意)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누군가가 이와 동일한 과제를 쉽게 풀 수만 있다면,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역사적 지식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바울과 루터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Zuschauertheologie mag dann von allen möglichen Paradoxien und Velleitäten reden. Wer in der Lage ist, dieselbe (aber dieselbe!) Aufgabe einfacher zu lösen, der zeigt, wie man das macht. Geschichtliches Wissen sagt uns, daß Paulus und Luther nicht in dieser Lage waren.

** 하르낙이 바르트를 부흥사(Erweckungsprediger)라고 부른 것에 대해 바르트는 하르낙을 구경꾼신학자(Zuschauertheologe)라고 놀려대고 있는 것이다.

14.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인식의 신뢰성과 공동체성이 복음의 중심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일깨워진 신앙의 신뢰와 공동체성 외에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 오히려 비판적 역사적 연구는 결과적으로 이 인식 근거의 필연적인 종말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를 더 이상 육체로써 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는 자는 비판적인 성서학으로부터 그것을 듣게 될 것이다. 

☞ 하르낙은 다시금 복음의 중심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인지하려면, 역사적 인물에 대해 고려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비판의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15. 만약 신학이 다시금 중심주제(Sachlichkeit)로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된다면, 계시의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에 대한 말씀의 증인이 될 용기를 얻게 된다면, 이때야 비로소 >>진정 학문<<은 신학과 확고한 관련성과 혈족관계를 갈망할 수 있게 될뿐이지, 그 역은 아니다.(231)

Göttingen Karl Barth

** 바르트의 제목에 의하면 답변은 16개인데, 번호는 15번까지 붙여 놓았다. 아마 첫 번째 답변은 번호를 매긴 내용이전에 써 놓은 서문격의 말을 뜻하는 듯 하다. 이 번역은 바르트의 답변의 완역이 아니라, 부분번역이다.

** 결과적으로 하르낙은 "유감스럽게도 나의 편지에 대한 당신의 답변은 다만 우리 사이를 가르는 골의 깊음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다만, 나의 신학과 당신의 신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복음이 어떻게 올바르게 이해될 것인지만이 중요하다. 만약 당신의 방법이 영광을 얻게 된다면, 복음은 더 이상 가르쳐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성경이해를 자유로이 하며 특히, 자신의 영광을 세우는 부흥설교가들(Erweckungsprediger)의 손에만 복음은 주어질 것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편지를 끝맺는다.

** 하르낙의 두 번째 편지는 공개편지의 형식으로 바르트에게 보내졌으며, 바르트가 이미 대학교수가 되었음을 비꼬아서 Hochgeehrter Herr Kollege!(대단히 존경하는 동료에게!)라는 이례적인 인사로 시작된다. 물론 바르트의 답장도 만만치 않아, 역시 Hochgeehrte Herr Doktor!(대단히 존경하는 박사님!)라는 인사로 시작된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하르낙과 같이 교수이지만, 박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신학마당

[레벨:9]용남군

2010.04.25 21:35:13

하르낙의 역사신학은 리츨의 윤리신학으로, 리츨의 윤리신학은 칸트의 도덕철학으로 소급됩니다.

결국 구세주로서 예수의 ‘가치(?)’를 지고의 가치관의 제공자로서 보고

그 예수를 신앙하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찾기 위하여 역사적 객관성에 집중하자는 뜻인데,

꼭지글을 퍼온 이로서 사견을 덧붙이자면, 하르낙은 독일철학 전통에 휘둘린 채

역사와 역사관념을 혼동함으로, 결국 복음도 잃고 역사도 잃었습니다.

예수의 복음으로부터 새롭게 규정되는 역사는 시간관념의 의미론적 배열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순간이며, 그렇기 때문에/그에 따라서 생명의 순간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이 점을 정확히 선포하지 못한 채 그저 신학의 ‘중점’에 관하여

지극히 관념적인(혹은 관념론적인) ‘주체로서의 하나님’을 이야기했던 바르트 역시

복음의 현실적인 영향력(곧, ‘권-능’)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현실은 현상이 아닌 오로지 복음으로부터만, 그 세계로부터만 발견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은 민중신학이나 순복음신앙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모로 ‘현실적인 것’에 관심이 깊기 때문에,

‘복음으로부터의 현실’ 속에서의 고유한 역사를 선포할 신학이 자라기에 가장 좋은 토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억지로 본래의 지평조차 상실된 독일신학을 붙잡으려고 하기보다,

한국적인 언어로 한국적인 기본 정서로부터 승화된 복음 그 자체의 신학이 발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rofile

[레벨:17]바우로

2010.04.25 23:18:40

한국적인 언어로 한국적인 기본 정서로부터 승화된 복음 그 자체의 신학이 발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일개 신자에 불과한 저도 동의합니다. 바알신앙에 불과한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를 아무런 분별없이 수입하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좋지 못한 모습을 아는 터라,  민중의 정서와 역사가 담긴 고유의 신학을 만들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역사적 예수가 그 자신이 민중이었기에 민중의 언어로 이야기한 것처럼 말입니다.

[레벨:9]용남군

2010.04.26 14:44:39

참고로 제가 언급한 ‘한국적인 언어’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한국어’를 의미합니다.

류영모의 글 같은 예를 들 수 있겠네요.

그의 씨얼정신은 거부합니다.

profile

[레벨:17]바우로

2010.04.26 21:09:36

저도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한국말 곧 역사의 밑바닥에서 살아간 민중들의 한과 얼이 담긴 신학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으로요. 태백산맥이나 공동번역성서를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레벨:10]차성훈

2010.04.26 00:16:16

박영식 교수님의 글에 대한 자세한 출처입니다.(http://kr.blog.yahoo.com/religionstheologie/52.html?p=3&pm=l&tc=39&tt=1272208251)

 

뱀다리. 역사엔 IF란 없겠지만, 만약 하르낙(그리고 독일 문화개신교주의자들)이 히틀러와 나치를 지지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그리고 신학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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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2010.04.26 21:06:30

베땅이님이라는 분의 블로그에도 박영식 교수님의 블로그가 연결되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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