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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부활 (1) <김경재, 서공석>
<김경재> : 한신대, 연세원, 미국 듀북 대학 신학원, 클레몬트 대학원 종교학과, 네덜란드 유트레 히트
대학 종교신학 박사, 전)한신대 종교신학과 교수, 크리스찬 아카데미 원장
부활 신앙은 육체의 소생이 아니라, 죽음 이후 하느님께서 덧입히시는 전혀 새로운 몸인 “영적인 몸”으로
변화를 말한다. 죽음과 동시에 지상에 존재했던 몸과는 다른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나 아닌 것이 아니기에 “불연속적 연속성”이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이미 삶과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으로서의 현상을 뛰어넘어 이미 현재적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기 때문에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다음에 인생 제2막에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한 생명으로 죽는다. 이것이 죽어도 산다는 것의
역설적 의미이다.
부활 생명은 내가 경험하고 아는 시공 4차원의 세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더 높은 차원의 존재 질서 속에서의
또 다른 나의 존재를 말한다. 그 세계는 은하계 우주 밖에 존재해야 할 필요는 없고, 차원만 달리하면서,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불연속적인 연속성을 지닌다.
또한 그 세계는 현재의 존재 양식과는 다른 세계, “빛과 진리와 사랑의 세계”를 말한다. 그리고 그 영적인 몸은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항상 전체적이다. 또한 시공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종말에 일어날
“육체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토론
<최영실> 오늘의 상황에서 부활신앙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김경재> 유교는 주검의 문제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다루고 생각한 종교이다. 불교는 죽음을 가장 진지하게 다룬
종교이다. 기독교는 주검과 죽음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죽임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서공석> : 파리 가톨릭 대학,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 교의신학 박사, 전)광주 가톨릭 대학, 서강대 교수
부활은 현재의 삶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하느님으로 인해 전혀 새로운 삶이 내 안에서 태동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부활의 여정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부활을 선취하신) 그리스도와 연대적인 삶을 말한다
.
부활의 삶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숨결인 성령과의 연대성 안에서 살겠다고
약속하는 세례에서 이미 시작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지상적 생존과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고, 장차 부활할
것만 기대하고 산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삶과 부활은 자기 삶을 비롯하여 다른 이들의 삶을 돌보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생명을 수용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대성을 사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
즉 “나는 살아 있지만 이미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 2:20)
부활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정보 제공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함께 계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인간 생명의
한계를 넘어서 이루신 일에 대한 희망의 고백이다. 부활의 삶은 세례에서 이미 시작한다고 말하는 신앙언어이다.
사도신경에서 육신의 부활은 물질적인 육신이 부활한다는 말이 아니고 모든 인간관계가 부활한다는 말이다.
하느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부활이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삶, 헌신, 사랑, 용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토론
<김경재> 개신교 보수 교단처럼 부활의 몸을 신체의 소생으로 보거나, 몸을 단순히 정신화, 관념화시키는 양 극단을
극복하는 부활의 몸인 영적인 생명체에 대한 의견은?
<서공석> 유대인의 이해로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히브리어로 몸은 인간관계를 뜻한다. 사도 신경에서의 육신의
부활은 물질적인 육신이 부활한다는 말이 아니고 모든 인관관계가 부활한다는 말로 나는 이해하고 있
다. 그렇게 보면 물질적인 육, 정신적인 육으로 구분하지 않아도 된다.
<박태식> 육체적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
<서공석> 죽음은 고통이고 무능이고 없어지는 것이다.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가듯이 절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속에서 하느님 안에 던져지는 것이 부활이 아니겠나 생각한다.
<박태식> 죽고 나서도 여전히 ‘나’라는 존재는 지속성이 있다고 보시는지? 그렇게 되면 부활이 있어야 한다.
<서공석>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속성이 있고, 모든 인간관계가 부활한다고 본다.
<김경재>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죽음 후에 어떻게 되는가를 상상한 결과 부활이 생겨났다는, 부활을 상징 언어로
보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목숨을 내던진 사도들의 의도를 훼손시키게 되고, 예수의 부활이 있었기에
부활 신앙고백이 발생한 것이라고, 즉 부활을 사실 언어라고 생각하면 손에 꼭 붙잡혀서 좋을 것 같지만
부활신앙이 죽게 된다. 부활을 사실 언어로 보는 신부님의 이에 대한 생각은?
<서공석> 예수의 부활은 사실이다. 다만 그것을 전하는 언어가 복음서마다 차이가 있다고 본다.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고, 그래서 제자들이 자꾸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만졌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어떤 사실, 죽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그 사실을 증명한다고 본다. 그러나 거기에 준해서 우리의
부활을 너무 상상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실수를 하게 된다.
<양현혜> 관계성 회복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연대성을 말할 때, 개인의 아이덴티티에 집착하면 연대성, 공동체성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서공석> 저는 아이텐티티와 연대성이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 제대로 된 아이덴티티는 연대성 안에서
가능하고, 연대성도 이이덴티티가 제대로 검증된 사람 안에서의 연대성이다. 아이덴티티와 연대성이
하느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 예수님의 삶, 헌신, 사랑, 용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부활이라고 본다.
그것이 참다운 아이덴티티, 참다운 연대성을 회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