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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부활 (7)

조회 수 3229 추천 수 1 2014.04.17 02:51:29

내가 믿는 부활 (7)  마지막입니다.

 

이제민 신부님은 "교회- 순결한  창녀", 등 저술 활동 때문에 1997년,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 아닌 파문을 당하신 세 사람의 신부

(정양모, 서공석, 이제민)  중의 한 분이시다.

 

그 분들의 글들이 교황청의 정통 교리에 어긋난다는 명분으로

기톨릭 주교회의 간행물에 이들의 글을 게재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세 분 모두 이런 저런 이유로 신학교 교수직을 그만 두게 되었다.

 

세 분 모두 한국 가톨릭 주교회의 결정문의 정식 통보를 받지 못하였고,

소명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정양모, "내 글 보고 내가 웃는다" 28쪽)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 분 모두 본 신학 콜로키움의 가톨릭측 주 발표자로 나왔다.

 

정양모 신부님은  "내 글 보고 내가 웃는다", "나는 예수를 이렇게 본다"

서공석 신부님은 "신앙언어" 등의 저서를 통해서 접했고,

이제민 신부님도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라는 책을 통해서이지만,

가까운 밀양 낙동강을 끼고 있는 명례 성지 조성 위원장으로 계시기에

가끔 찾아뵙고 하는 분이시다. 이 분의 사목 활동의 주된 관심은

"복음화 교실"이다. 교회 내부의 복음화가 우선되지 않았는데,

무슨 외부로의 선교 활동이냐는 것입니다. 즉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입니다.

 

끝으로 총 열두 분의 영성 깊은 신학자들의 "내가 믿는 부활"에 대한 단상들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다비안님들의 신앙 여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추신: 1.아래 첨부는 "내가 믿는 부활" (1)~(7)  전체 내용을 모은 총 21쪽의 파일입니다.

          2. 기회가 되면 "톰 라이트"와 "마커스 보그"의 논쟁을 실은 <예수의 의미>에 나오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글도 올려 보려고 합니다. 저희 교회 <신학 공부>

              모임은 제1강 후 바로 제6강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서'로 건너뛰었으며, 위 두 권의 책과

              이와 관련한 정목사님의 설교 몇 편과 신학 단상에 나오는 글들을 같이 읽고 있습니다.

 

 

 

<이재민> : 오스트리아 그랏츠 대학,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 신학박사, 전)광주 가톨릭대학 교수,

                                 현)밀양 명례성지 주임신부

 

성경에는 같은 부활에 대한 다양한 체험(마리아, 도마, 베드로, 바울)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양한

부활 이야기가 있는 것인가? 다양한 부활이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그것들 중에 하나가 된다.

우리가 부활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같은 부활에 대한 다른 체험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다른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인가?

 

마가복음 8:27~33을 보면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와 예수님의 논쟁이 나온다. 같은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베드로와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르게 체험했다는 말로

넘길 일이 아니다. 문제는 베드로가 예수님에게서 사탄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베드로의 그리스도가

예수님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는 데 있다. 이는 부활 체험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아무 상관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시중에 떠도는 천국 체험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 예다. 부활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부활 체험에 근거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중요하다.

 

부활 메시지의 의미는 무엇인가?

 

1. 부활 메시지가 단순히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이 이 다음에 다시 살아나 천당에 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슬픔도 고통도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일어 날 수 없는 일을 전 하는 건 분명 아니다.

 

2. 부활신앙은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의 허무를 달래기 위한 진정제도 아니며,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만

    부활하고 나머지는 부활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도 난센스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칼 라너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믿는 이러한

    부활은 고맙게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3. 부활신앙은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생사에 얽매어 사는 인생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생과 사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물음이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반드시 생사에 대한 물음을 던져야 한다. 사후 와 사후의 삶은 이 과정에서 던져지는

    질문이다.

 

4.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이 전하는 메시지를 깨치려 하기보다 부활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증명하여 믿게 하려는 데 급급하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마저 그분의 시체가

    ‘되살아난’ 것으로 여기며 이를 증명하려 든다. 빈 무덤과 현현 사화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으며, 이는 부활한 자의 삶이 무덤 안에 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후의 삶을 증명하려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사후의 삶’을 지금 당신의 인생을 통하여 보여주려

    하셨다. 그분은 사후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해주셨다. 인간은 사후에 누리고 싶은 영광을 죽기 전에 누릴

    수 있다.(막 9:1)

 

5.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우리도 지금 죽기 전 에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지금 부활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한다. 부활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놓친 사람은 영원히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한다.

 

6.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복음에 근거한다. 그분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이 복음은 하늘에서 가져온 비책이 아니라, 인간의 아들로서 그분이 이 땅에서 체험하신 바를 복음으로

    선포하셨다. 마가는 이를 하늘이 찢어지는 체험, 하느님 아들로서의 체험, 성령의 체험이라고 표현한다.

    그분은 하늘과 땅, 생전과 사후, 천당과 지 옥, 영과 육 등과 같이 구분하는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가 찢어지는

    체험을 하시면서 인간의 아들인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체험하셨다. 멸하고 사하시는 당신의 유한한

    생명에서 불사불멸의 삶,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이 생명을 가지고 하느님의 아들딸이라는 사실을 체험하신 것이다. 하늘을 체험하기 위해 인간은 땅을

    떠날 필요가 없으며, 영생영복을 얻기 위하여 시간을 떠날 필요가 없다. 인류는 이를 믿어야하고, 믿기 위해

    사고를 달리해야 한다.(막 1:15)

 

7.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깨쳐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서 뿐만 아 니라, 만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생명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예수 믿으면

    죽은 다음에 다시 일어나 영원히 잘 살게 된다.”는 정도의 약속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복음에 근거하지

    않은 부활은 인간의 헛된 망상이나 이론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과

    관계가 없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복음에 기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복음의

    삶을 살지  못한다.

 

내가 믿는 부활

 

1.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여 가게 된다는 저승(천국이든 극락이든)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지금 여기에)을 통하여 저승에 대한 우리 의 상투적인 사고를 수정해주신다.

    부활신앙은 죽음이 지배하는 듯한 이 세계가 결코 허무가 아니라 불사불멸의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고백하게 한다. 우리가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레에 맞갖은 충실한 삶을 지금 여기서 살 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마 25장)  우리는 살아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부활의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

 

2. 나는 내가 죽은 후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살아나게 되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죽음으로 내 인생은 모두 끝난다. 다시 살아나는 삶은 없다. 그리스도교의 부활은 영만의 부활이나 영과 육의

    재결합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영과 육, 생과 사, 영원과 순간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실재를 이루고 있으며,

    인간은 사멸하는 육을 지닌 존재지만 불사불멸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영원한 존재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것같이 사도신경이 말하는 ‘육신의 부활’은 영과 육의 재결합이 아니다.

 

 

3. 나는 산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즉 부활은 살아 있는 동안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산 자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덤에 묻힌 시체가 되살아나 영생을 누릴 수 없는 것은,

    죽은 자는 더 이상 죽을 수 없으며 동시에 산 자 만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부활했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앞서 죽은 이들이 지하세계에서 부활을 기다리며 누워 있다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상상일 뿐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나는 부활이다”라고 하신 말씀에 유념해야 한다. 무엇을 체험하였기에 그분은

    살아 있는 당신을 부활이라고 하셨는가?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달아났던 제자들은 무엇을 체험하였기에 다시

    돌아와서 그분의 부활을 선포하는 데 목숨을 걸었을까?

 

4. 나는 사후를 믿지 않는다. 사후란 없다. 그렇다고 사후에 대한 이야기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후의 세계는 생물학적인 목숨이 끝난 다음에 펼쳐지는 세계가 아니다. 사후는 ‘인생 다음’이 아니라

    ‘인생 중’에, 인생의 한복판에 일어나는 사건이며, 또 이 시간 안에 일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내 인생에서 사후가 일어날 때 새 하늘, 새 땅,  새 세계가 열림을 체험하고, 새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십자가 죽음 이전에 “나는 부활이다”(요 11:25)하시며, 살아서 부활의 삶을 사신 예수님은 새 인간이며 우리의

    미래다. 그분의 죽음이 생의 마지막에 다가오는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분은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삶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십자가를 통해서 깨우쳐 주셨다.

 

5. 부활은 죽기 전 인생에 일어나는 사건이며, 또 일어나야 할 사건이다. 인간은 죽기 전에 죽을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부활은 깨달음의 문제이다. 살아 있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기에 그만이 부활한

    삶을 살 수 있다. 죽은 자가 부활할 수 없는 것은 죽은 자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활신앙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다. “살아 있는 동안 부활의 이치를 깨달아 새 삶을 살도록 하라”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 11;26)

 

6. 예수님의 십자가(죽음)는 그분 생애의 마지막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분의 생애 처음부터 그분의 생애 안에서

    늘 일어난 일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처음에 제자들은 그분께서 남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이미

    다 바친 삶을 사셨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벗을 위 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위대한 사랑은 없다.”,

    ”목숨을 잃으면 얻을 것이고, 버리면 얻을 것이다.“,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받아먹으라.“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제자들은 한참 후에 그분의 삶을 깨닫게 된다. 이로써 그들에게 인생의

    과제도 주어졌다. 그들도 이제 그분처럼 죽고 부활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분처럼 기적을 일으키면서 살아야 한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1.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밀알과 성체의 신비를 이해해야 한다. 성체는 영생의 신비를 깨우쳐 준다.

    그리스도의 몸은 쪼개지면서 우리 몸속에 들어와 완전히(영원히) 사라진다. 그분은 사라짐을 통하여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 되신다. 우리는 그분의 부활한 몸이다. 이를 깨닫는다면, 부활을 믿는 우리도

     이웃을 위하여 영원히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

 

2. 예수님은 세례 때 하늘이 갈라지는 체험을 하셨다. 하늘과 땅, 생과 사, 성과 속, 선과 악, 행과 불행 등을

    갈라놓는 언어, 그 대명사인 하늘이 갈라지는 체험을 하신 것이다. 이로써 그분은 새 하늘과 땅, 새 인간,

    새 삶을 체험하셨다. 이는 이원론적 사고에 근거한 삶이 갈라지는 체험을 상징한다.

 

3. 하늘이 갈라지는 체험과 함께 그분은 만물 속으로 들어가 만물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겉을 가를 때

    사물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이 가름을 방해하는 것은 부와 힘과 명예 등이다. 이것들에 대한 집착이다.

    그 마음을 가르고 가난한 자, 고통을 당하는 자, 감옥에 갇힌 자, 우는 자들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부활한 삶을 살 수 없다.

 

4.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성전 휘장이 두 갈래로 찢어졌다. 성전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사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사제와 일반인을 구분하던 휘장이 찢어졌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성과 속, 하느님과 인간을

    갈라놓는 벽이 무너졌다. 이로써 인류에게 부활의 삶을 사는 길이 열렸다.

 

5. 부활의 삶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유다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갈라 놓는 마음을

    찢어라. 모두를 가슴에 안아라. 안지 못하는 마음을 찢어라. 이웃과 원수, 성과 속, 선과 악을 가르는

    마음을 찢고 그들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라. 그들 안에 와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엡 2:18~21)

    마가가 전한 백인대장의 고백은 성전의 휘장 이 찢어졌다는 것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막 15:39)

 

6. 십자가야말로 마지막 기적이 일어난 곳이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

    인들의 오류 중 하나는 부활을 십자가를 내려놓은 상태로 여기는 것이다. 십 자가를 진 자만이 천국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 그분은 남을 살리기 위해 당신의 존재를 죽음에 붙이셨다. 남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만 부활하여 행복을 누리겠다는 생각은 아예 접어야 한다.(막 8:34~35)

 

언제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1.부활의 삶은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고백만으로 살아지지 않는다. 또한 천국은 입으로만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교회가 자기들만 다시 살아나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리라고 꿈꾸는 이들이 모여 기도하는 집단이거나, 죽 음을 허무로 생각하는 이들이 믿음의 이름으로

   죽음에서 일어나 영원히 살게 되리라는 믿음 을 강조하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종교의 타락은

   여기서 비롯된다.

 

2. 하느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이미 우리를 당신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셨다. 부활의 삶, 영원 한 생명을

   살게 하셨다. 부활을 믿는 자는 이승의 삶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승의 사람 들을 사랑으로 대하며

   봉사한다. 부활을 믿는 자는 섬기기 위하여 세상을 산다. 살아 있는 동안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죽어서 영원한 생명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그 때를 먼 미래로 미루지 마라.

 

3. 부활한 삶을 살려면 나눔과 희생이 필요하다. 나눔과 희생은 부활한 삶을 사는 데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그분처럼 우리의 몸을 쪼개어 남에게 나누어줄 때 우리는 그분처럼 부활의 몸이 될 것이다. 자기 살 생각을

    포기하고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놓아 사라지게 하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부활에 대한 오해는 세상을 살리는 일 보다 자기 사는 것에 온 마음을 쏟는 데에 있다.

 

 4. 부활은 단순히 한 개인의 육체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인생에

     빛을 밝혀 어둠을 사라지게 하는 사건이다. 죽은 자를 어둠 속에서 빛으로 다시 살리는 사건이다. 부활은

     그렇게 살았어도 죽은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삶을 깨우쳐 준다. 부활은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인생을

     사는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다. 부활은 살아 있는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로 살게 하는 복음이다.

 

어머니의 부활신앙

 

우리 어머니는 사후 천국에 가서 당신의 아들인 내가 오기를 기다리다 만나게 될 거라 믿고 계신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상상하는 사후의 재회가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나를 만나지

못하겠지만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어머니를 계속 만날 것이다. 나의 이런 어머니 만남도 나의 죽음과 함께 끝날

것이다. 죽음과 함께 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건 재회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실망시키며 서운하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운함을 달래기 위해 그런 날이 올 거라고 믿는 것은 인생을 속이는 일이다

 

그렇다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희망 속에서 위안을 얻으며 세상을 떠나게 될 우리 어머니의

꿈은 어떻게 되는가? 그 꿈은 헛된 것인가? 분명한 것은 어머니가 그 꿈과 함께 살아 있는 나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어머니에게 재회의 희망을 포기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 또한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재회의 희망 속에서 죽을 수 있다. 사람들은 내가 죽어 묻힌 무덤의

비석에서 어머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느끼며, 천국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 그동안 이루지 못한 행복을 누리리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 영원한 신비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죽음의 신비에, 사라짐의 신비에 맡기는 삶을 새로 익혀야 한다. 이를 신학 용어로 ‘신비로의

안내(mystagogia)'라 한다. 인생이 정말 신비스러운 것은 이 사라짐 속에 생명의 역사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 어머니와 나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겠지만 이로써 어머니와 나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 나의 현재와 나의 미래를 가슴에 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머니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도 나는 어머니와 대화할 수 있다. 이 대화 또한 나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나겠지만 어머니와

나의 사랑 이야기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토론

 

<박태식> 내가 사라진다면 나의 아이덴티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제민> 우리는 ‘나’라는 개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죽음 으로써 일단

                  모든 것이 끝이다. 그렇지만 내 유한한 존재로 다른 존재들을 살리는 그러한 우주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박태식> 내가 살면서 뭔가 나의 가치나 인격 같은 것이 있었을 텐데 죽으면 우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 안 할 수 없다.

<이제민> 우리가 생사불멸의 하느님의 생명을 가지고 산다고 했을 때에는 우리의 삶이 이미 천지창조의

                  삶으로까지 끌어 올려진 것이다. 현재의 시간 안에는 과거와 미래가 함 께 만나고 있다는 차원도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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