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6

현대신학의 흐름12

조회 수 4914 추천 수 0 2013.05.08 10:01:18
 
현대신학의 흐름12
 
오늘은 "2장 계시의 주체 : 바르트"의 마지막 부분 5'말씀의 인식 가능성과
인간의 책임성'을 연재하겠습니다. 바르트 신학의 특징으로 볼 때 앞서 연재했던
내용과 골격이 비슷합니다.
 
 
5. 말씀의 인식 가능성과 인간의 책임성
 
계몽주의로 발현한 자유주의 기독교 운동으로, 종교개혁의 파고를 헤치고
나온 개신교 주류 교회가 맥을 못 추고 있을 때 혜성처럼 등장하여 개신교
신정통주를 이끈 칼 바르트도 여러 비판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신학적 특징인 하나님의 계시와 주권 앞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은 어떠한 책임도 없다는 것인가?" 라는 비판입니다. 저자는 이런 비판이
대부분 바르트 신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교의학을 중심으로 "말씀의 인식 가능성""인간의 책임성"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말씀의 인식 가능성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는데 인간의 경험론적 접근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인간의 주관성에 기울어질 수 있기 때문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느낍니다. 말씀의
인식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 속으로 들어가 보시죠.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인간의 경험 가능성의 근거로서 어떤 특수하거나
혹은 은밀한 인간학적인 장들
(centres: 인간의 의지, 감정, 양심 등)을 요청하거나
발견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바르트는 '경험'이 말씀의 인식을 다루는 적절한 개념이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인식에 있어 인간의 경험을 대치할 개념으로 '승인'(acknowl-edgment)
이야기합니다. 교회 교의학에서는 9개 항목으로 규정하는데요. 저자는 그 특징을
네 가지로 압축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보겠습니다.
 
첫째, 말씀이 스스로 승인할 때는 승인에 인식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승인이
일어나면 인격에서 인격으로
, 이성에서 이성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인간에게
경험의 범주에서 인식될 수 있다
.
 
둘째, 말씀의 승인은 말씀의 내용과 함께 이루어진다. , 말씀의 승인은 인간의
창조자
, 화해, 구원의 말씀과 같은 내용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과
함께하는 하나님에 대한 긍정 속에서 성립한다
. 그러므로 말씀의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 단순히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인식 능력을 논하는 것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셋째, 승인이라는 개념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에 대해, 우리에게 말함에
대해
, 판단에 대해 권한을 가진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임하는 것은
신적인 자유와 선택의 행위이다
. 말씀은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임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즐거움에 따라 임하는 것이니
, 그 말씀은 인간에게
 어떤 모양으로 임하든지 하나님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
 
넷째, 승인이 일어나는 곳에는 인간의 승복이 일어난다. 말씀의 승인이 다가오면
말씀이 승인하는 그 분 앞에서 인간의 멈춤이 일어난다
. 그는 한 타자의 권위 앞에서
승복한다
. 하지만 이 승복은 인간 실존의 자아결정에 모순되지 않으며, 인간의
자아결정은 보다 높은 다른 결정 안에서 그 시작과 근거를 발견한다
. 이 승인 행위
안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결정하는 삶의 중단 없이 그의 근원을 승인된 자 안에서 가진다
.
 
결론적으로 말씀의 인식 가능성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고,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내재적 능력이 완전히 배제되고 오직 하나님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말씀의
인식 가능성은 객관적이라고 합니다. 바르트는 이 객관성을 일차적 객관성과 이차적
객관성으로 나누는데요.
 
삼위하나님 = 일차적 객관성(인간이 논의할 수 없음)
매개체를 통한 인식 = 이차적 객관성(구약과 신약에 많이 나타남)
 
그렇다면 인간은 말씀의 인식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하며 철저히 소외되어 있는가?
이 물음에서 바르트는 인간의 '신앙'으로 인한 말씀의 인식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 무슨 말일까요? (이랬다 저랬다)
 
바르트가 주장한 신앙의 인식 가능성을 두 가지로 나눠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이 자율적인 성격을 가지는가?
 
바르트는 신앙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앙은 타고난 것도 아니며 획득된 것도 아닌 것으로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 중에
하나가 아니다
......신앙의 실체 안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신앙의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기능으로서
, 그리고 전적으로 사용하도록 부여된 가능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
 
그렇다면 여전히 인간의 말씀에 대한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고, 신앙이라는
개념으로 말씀의 인식 능력을 논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인데요. 바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승인이 인간의 행위와 경험으로 될 수 있는
그러한 승인으로 일어난다면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경험을 가실 수 있고
'유한은 무한을 품을 수 없다.'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품을
수 없다
.'와 같은 명제들이 내포한 의미들이 우리가 긍정적인 진술을 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
 
머리가 아프려고 하네요.^^ 인간 스스로 신앙을 만들 자율성은 없지만, 하나님의
승인 아래에서는 바르트가 강조한 유한과 무한의 질적 차이가 극복된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실제적인 인식론적 범주가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신앙은 경험이라는 것, 구체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인간의 시간 안에서의
행위라는 것
, 승인의 행위라는 것을 단언한다......신앙이 관계하는 것은 말씀 곧
그리스도이니
.....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신앙의 대상(object)으로 부여하기
때문에 신앙은 신앙이며 진정한 경험이 된다
. 이를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신앙의 대상(object)으로 자신을 주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객체가 된다는 것을 늘 경계했던 학자입니다. 객체가
된다는 것은 말씀이 인식의 한 대상이 되는 것이며, 이는 바로 주 - 객 이원론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바르트는 신학에서 인간이 주체가 되어 말씀을 연구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인간은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구조를 가집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가 신앙의 객체가 된다는 주장은
이제껏 자신의 주장과는 다른데요. 계속 이어지는 바르트의 주장입니다.
 
"인간은 신앙의 주체(subject)이다. 신앙을 하는 것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신앙 안에서 주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주체의 서술로 괄호 쳐진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은 주체로 남으며, 인간의 이러한 나(I)라는 자아는 주체인
하나님의 당신
(Thou)에게서만 온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서 주체가 될 수는 없지만 인간은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인식의 주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언뜻 말장난처럼 비춰질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간은 주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대상으로 주어진 말씀을 인식한다.
물론 말씀에 대한 승인의 시작(initiative)은 하나님이 가진다.]
 
말씀의 인식 가능성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스스로 자신을 객체로 허락했고, 인간은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면한다
. 바르트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며,
이 인간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나님과 대면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르트가
주장한
"하나님의 말씀의 인식 가능성은 오직 말씀에 있고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다."
는 말은 그 표면적 의미만큼 인간에게 어떠한 위치도 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결국 바르트에게서 말씀의 인식 가능성은 자연인의 이성이나 감정과 같은 영역으로부터
신앙이라는 영역으로 바뀐 것뿐이다
. , 말씀의 인식의 차원이 인간의 자율적 경험에서
신앙으로 범주가 달라진 것이다
. 신앙안에서 인간은 말씀을 대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여전히 자아라는 주체성을 가진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느낌을 지을 수 없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에밀 브루너와 차이가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다음은 호외로
인간의 책임성에 대해 연재하겠습니다.

profile

[레벨:18]天命

May 08, 2013

이렇게 요약된 글을 보는데도 이리저리 헷갈리는데
바르트의 원문을 통째로 번역한 것을 읽는 날에는
우리 남은 평생 읽어도~ 읽어도 무슨 뜻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채
세상 하직하게 될 것 같습니다.... ^^^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21]小木

May 09, 2013

신학을 조금 씩 알아가면 갈수록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는 느낌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사회적거리 유지 기간 온라인예배 [레벨:24]임마누엘 2020-03-05 43268
공지 말씀예전 - 성경봉독 - 에문. 2023.12.10 file [레벨:33]우디 2018-01-09 45221
공지 서울샘터교회 휘장성화 총정리 file [7] [레벨:33]우디 2014-01-04 84271
공지 교인나눔터 게시판이 생겼습니다. [2] [레벨:10]mm 2012-02-13 196404
공지 2024년 교회력 [1] [레벨:33]우디 2011-11-26 232915
공지 서울샘터 교회 창립의 변 [123] [레벨:100]정용섭 2008-10-24 293985

현대신학의 흐름17 [1]

  • [레벨:21]小木
  • 2013-06-11
  • 조회 수 5102

현대신학의 흐름16 [1]

  • [레벨:21]小木
  • 2013-06-04
  • 조회 수 4636

현대신학의 흐름15-1 [4]

  • [레벨:21]小木
  • 2013-05-31
  • 조회 수 4799

현대신학의 흐름15 [7]

  • [레벨:21]小木
  • 2013-05-28
  • 조회 수 4813

현대신학의 흐름14 [1]

  • [레벨:21]小木
  • 2013-05-23
  • 조회 수 4863

현대신학의 흐름13 [3]

  • [레벨:21]小木
  • 2013-05-21
  • 조회 수 4793

금요신학강좌 마지막회 [1]

  • [레벨:21]小木
  • 2013-05-18
  • 조회 수 4698

현대신학의 흐름12-1

  • [레벨:21]小木
  • 2013-05-10
  • 조회 수 4014

현대신학의 흐름12 [2]

  • [레벨:21]小木
  • 2013-05-08
  • 조회 수 4914

현대신학의 흐름11-1 [1]

  • [레벨:21]小木
  • 2013-05-03
  • 조회 수 5043

현대신학의 흐름11

  • [레벨:21]小木
  • 2013-05-02
  • 조회 수 4296

현대신학의 흐름10 [2]

  • [레벨:21]小木
  • 2013-04-23
  • 조회 수 4647

서울샘터교회 봄소풍 안내 [8]

현대신학의 흐름9 [2]

  • [레벨:21]小木
  • 2013-04-18
  • 조회 수 4849

현대신학의 흐름8 [2]

  • [레벨:21]小木
  • 2013-04-13
  • 조회 수 4977

잠자리와 진화, 그리고 성령 file [5]

귀촌을 생각하며, [3]

현대신학의 흐름7 [2]

  • [레벨:21]小木
  • 2013-04-09
  • 조회 수 5106

교인나눔터에 못들어가는 경우 [1]

  • [레벨:10]mm
  • 2013-04-06
  • 조회 수 5048

현대신학의 흐름6

  • [레벨:21]小木
  • 2013-04-02
  • 조회 수 3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