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6

기독교를 말한다.(인간 현실로서의 죄)

 

 

죄의 문제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또 온전히 성서의 특수한 지평에 속한 문제다. 그러다 보니

그것으로 인해서 근대의 많은 학자들로부터 기독교가 원색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성서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보고 있으며, 기독교 신자들도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다. 세례 받을 때도

죄를 용서받은 경험이 있는지 질문을 받는다. 찬송가의 상당 부분도 역시 죄에 대한 고백이며, 기독론과

구원론도 역시 이 죄론에 근거하고 있다. 교회의 모든 가르침과 종교의식의 밑바탕에는 이런 죄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과연 성서가 인간을 죄인이라고 전제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진술은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창세기에 그려져 있는 죄에 관한 대표적인 설화 두 가지가 있다.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과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 사건이다. 그리고 이 두 사건 이외에 노아홍수사건과 바벨탑 사건이 있다. 아브라함

이전의 이야기를 담은 보편역사(원역사)는 창조사건 일부를 제외하고 일체가 인간의 죄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이 정도로 성서는 죄를 인간의 본질로 이해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인

로마서도 역시 인간 현실로서의 죄를 준엄하게 추궁하고 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1:29~30) 야고보서는 죄를 욕심이라고 했고, 초대교부들과 신학자들도 이런 점에서는 같은

입장에 섰다. 예컨대 어거스틴은 죄를 휘브리스(교만)라고 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모르 수이

(자기사랑)라고 했다.

 

성서 기자들이 이토록 인간의 죄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인간과 사회의 현실을

어떤 토대에 두고 있는지 분명하게 인식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도 그렇지만 현실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죄에 의해 현실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다.

 

일단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을 몇 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보자. 하나는 죄의 보편성이다. 원죄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런 개념이다. 기독교에서는 실제로 죄를 지은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죄의 유전성

때문에 모든 인간이 죄에 물들어 있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죄의 과격성이다. 소크라테스는 죄를 지식의

결핍이라고 보았지만 기독교는 훨씬 엄격하게 생각했다. 인간 존재 자체의 부패다. 인격 자체의 파손이기

때문에 이런 근원으로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라고 말한다. 사죄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적인 영역에

속하기에.

 

과연 이러한 죄 지향성, 죄의 보편성 강조가 분명히 성서에 토대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성서가 분명히 인간의 죄와 타락을 직시하고 있고 그것의 위험성을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긴 하지만 관념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실제 삶에서 접근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설교를 읽어 보라. 그들은 죄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설교하지 않았다.

권력을 잡은 자들, 부자들, 가나안의 물신적 제의를 추종하는 자들, 강대국에 빌붙어 나라를 지탱해

보려는 왕들의 구체적인 죄를 질타하고 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설교했지만

이 말씀의 초점은 인간 죄의 보편성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에 있다. 인간을 죄의

연결고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연관해서 바라본 예수의 인간론에 근거해서 볼 때 그렇다.

 

이에 반해 바울은 죄의 보편성을 말한다. 심지어 사람만이 아니라 피조세계 모든 것이 죄로 물들어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경우에 인간은 밝은 빛을 발하는데 바울에게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다. 이는 바울이 기독교 신앙을 교리화 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어쩔 수 없는 비관적

인간이해가 아닌가 생각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인간을 죄의 숙명주의로

몰아넣었다기보다는 구원받아야 할 인간 현실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바울의 인간 이해에서도

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구원이 그 핵심이라는 말이다.

 

 

죄는 숙명인가?

 

기독교 신앙의 한 복판에 또아리를 틀 듯 자리 잡고서 신자들의 의식을 훼손시키고 있는 죄론은

성서 기자들의 확고한 생각이라기보다는 중세기의 역사적 상황이 생산해 낸 교리에 불과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말하자면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 받은 후 기독교가 로마 정치와

맞물려 돌아가면서 적지 않은 교리가 그런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쪽으로 발전하게 된 것처럼 이 죄론도

역시 정치적 필요에 의해 강화된 교리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간단한 답이

나온다. 황제나 교황의 권위가 유지되려면 민중들의 절대적인 순종을 받아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원죄론보다 더 요긴한 방도는 없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이런 원죄론에 의해 교육받고 세례 받은 사람은

혁명을 일으킬 수 없다. 숙명론적 죄론이다. 독실한 기독교인들의 의식은 대개 이런 죄에 대한 콤플렉스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린다. 툭하면 회개하라고, 툭하면 죄 때문이라고 한다. 소위 매조키즘적인 카타르시스

(자기학대의 쾌감)를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다.

 

죄가 기독교인들에게 숙명적으로 작용하게 될 경우에 구약성서가 제시해주고 있는 정의로운 세계는

우리와 상관없게 되고 악이 교묘하게 준동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죄론이 은총론을

말살시킨다는 점에서 상당히 위험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현실인 죄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 그것은 은총론에 놓여있다. 사실

인간의 죄는 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죄가 은총과 자유의 세계까지 허물어 버린다는 데 있다.

성서의 중심 주제는 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다. 그것이 은총이며, 이 은총에 기초해서

죄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의식에 묶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투쟁하고,

용서하고, 변혁해 나가도록 돕는다. 이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는 도덕적으로 살라고 말하기

보다는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는 기독교 복음이 인간성을 말살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회복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참고)

기존질서에 반기를 드는 혁명은 죄의 숙명론에서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왕족만이 천부적 권한을 갖고

태어난 게 아니라 민중도 역시 그렇다는 의식이 바로 혁명이다. 사제나, 사제의 수장인 교황만이 특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마틴루터의 만인사제설, 왕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왕답게

살아야 한다는 칼빈의 만인왕권설도 역시 이런 혁명적 사고전환이다. 동학의 후천개벽 사상도,

철학이라는 학문도 기존의 권위적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물론 종교는 이런 점에서

 더욱 철저하다.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자유와 해방인데도, 즉 어두운 동굴로부터의 벗어남인데도,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종교의 틀과 죄책감의 감옥 안에 묶임으로써 안정감을 가지려고 한다. 동굴 안에서 느끼는 억압된 평화를

기독교 신앙으로 이해한다면 불행이다.

 

 

인간에 대한 물음 결론

 

성서는 인간에 대해서 어떤 생물학적, 철학적, 심리학적 정보가 아니라 신학적 이해를 제공할 뿐이다.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관점이다. 이런 기초적 사유의 틀 안에서 인간은

흙으로 피조 된 존재이기도 하고 영적인 본질을 갖고 있기도 하며, 죄와 연관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구원에 참여한다는 게 성서의 인간론이다.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고

예수의 영이기도 한 성령에 충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피조물이며, 비록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하더라도 부활을 희망하는 이들이다. 생명의 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기독교인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운동과 연대해서 인간의 인간다움, 인간의 하나님 형상성 회복, 생태계와

일치를 위해 투쟁해 나가야 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사회적거리 유지 기간 온라인예배 [레벨:24]임마누엘 2020-03-05 43222
공지 말씀예전 - 성경봉독 - 에문. 2023.12.10 file [레벨:33]우디 2018-01-09 45176
공지 서울샘터교회 휘장성화 총정리 file [7] [레벨:33]우디 2014-01-04 84216
공지 교인나눔터 게시판이 생겼습니다. [2] [레벨:10]mm 2012-02-13 196363
공지 2024년 교회력 [1] [레벨:33]우디 2011-11-26 232866
공지 서울샘터 교회 창립의 변 [123] [레벨:100]정용섭 2008-10-24 293903
846 함께 하면 즐거운 반 모임 file [2] [레벨:11]QED 2015-04-26 4886
845 기독교를 말한다.(기독교의 윤리적 지평) [레벨:21]小木 2015-04-24 2893
844 기독교를 말한다.(기독교의 윤리적 지평) [레벨:21]小木 2015-04-14 2883
843 부고 [3] [레벨:21]小木 2015-04-07 4492
» 기독교를 말한다.(인간에 대한 물음 마지막) [레벨:21]小木 2015-04-01 2852
841 기독교를 말한다.(인간에 대한 물음) [레벨:21]小木 2015-03-26 2901
840 기독교를 말한다.(인간에 대한 물음) [레벨:21]小木 2015-03-18 2895
839 기독교를 말한다.(인간에 대한 물음) [레벨:21]小木 2015-03-11 2703
838 기독교를 말한다.(하나님에 대한 물음) [1] [레벨:21]小木 2015-03-05 3723
837 봉투 3장 [7] [레벨:25]산꾼 2015-03-01 3219
836 기독교를 말한다.(하나님에 대한 물음) [레벨:21]小木 2015-02-12 2682
835 [공지] 2015 서울샘터교회 소모임 정리되었습니다! [4] [레벨:13]열린미래 2015-02-11 3168
834 기독교를 말한다.(하나님에 대한 물음) [레벨:21]小木 2015-02-06 2626
833 [*초대] 음~ 김영진 목사입니다. [4] [레벨:23]김영진 2015-01-31 3641
832 기독교를 말한다.(하나님에 대한 물음) [레벨:21]小木 2015-01-30 2667
831 기독교를 말한다.(기독교의 형태와 본질) [레벨:21]小木 2015-01-27 3031
830 기독교를 말한다.(기독교의 형태와 본질) [레벨:21]小木 2015-01-20 2649
829 [공지] 2015년 샘터교회 운영 달력 [1] [레벨:13]열린미래 2015-01-19 3254
828 [공지] 소모임 정비에 대한 알림입니다!!!! [9] [레벨:13]열린미래 2015-01-19 3259
827 기독교를 말한다.(기독교의 형태와 본질) [레벨:21]小木 2015-01-13 26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