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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의 고독한 근대인 이순신

조회 수 3814 추천 수 0 2014.08.20 22:44:04

          영화 <명량>이 관객 1천4백만명을 동원하면서 최고 흥행영화로 등극했습니다. 한국영화시장에서 특정 영화가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경우 그 중 상당수는 해당 영화를 두 번, 세 번 이상 관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량>은 세대를 초월한 이순신의 인지도, 반일감정에 기반한 민족주의, 전쟁스펙터클의 시각적 위용이 잘 버무려져 몇 번이라도 재관람을 유도하는 데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평론가들은 관객이 현실에서 부재한 멸사봉공의 리더십을 영화 속 이순신 장군에게서 보고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나라가 백척간두에 선 상황은 정유재란(1597-98)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순신과 같은 지도자가 없다는 상실감이 <명량>의 인기를 불러왔다는 분석입니다.

 

          저는 대중의 열망이 문화상품에 투사되어 결국 흥행작을 낳는다는 관습적 해석이 항상 불만족스러웠습니다. 대중은 한 가지의 욕망으로 수렴되는 존재가 아니며 서사작품 또한 수작일수록 다층적 해석을 품기 때문입니다. <명량>에서 이순신의 경우를 두고 좀 더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명량>의 시나리오작가가 <난중일기>로부터 이순신의 캐릭터를 추출해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난중일기>를 참고할지언정 작가는 이순신을 극화할 유형적 캐릭터 하나를 먼저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정서에서 이순신은 민족을 구한 불세출의 영웅으로서 독자적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 이순신을 재탕할 경우 스토리가 진부해질 것이기에 작가는 가령 다음과 같은 조합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과 리어왕, 이순신과 벤허, 이순신과 제갈공명, 이순신과 글래디에이터. 예로 든 각각의 유형적 캐릭터들은 영화가 구현할 수 있는 이순신 이미지의 실체인데 양자가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인간 이순신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난중일기>는 극의 사실성을 보완하기 위한 참고자료일 뿐입니다.

 

          <명량> 속 이순신에게서 이상적 리더십을 파악한 평론가들은 아마도 이순신과 제갈공명 또는 이순신과 글래디에이터의 조합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유형들을 대입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이 초인적 지도자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영화 속 이순신 장군을 살펴보면 그가 뜻밖에도 고독한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입부에서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모진 고문을 겪고 직위까지 박탈당합니다. 국가적 비상사태가 재발하여 해군지휘관으로 복귀하지만 그를 둘러싼 참모들은 왜군의 파상공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순신에게 후퇴를 종용할 따름입니다. 이들은 각자 목숨과 체면과 군법을 추종하며 사분오열되어 있는데 이순신은 묵묵부답 내면에 침잠해있습니다. 그가 공명이라면 묘수를 제안하여 부하들을 안심시켰을 것이고 <글레디에이터>의 막시무스라면 장검을 들어 사기를 진작시켰을 것입니다.

 

          통치집단으로부터 버림받았지만 추종자들마저도 무지하고 범박하여 그의 내면을 헤아릴 수 없는 이순신은 제갈공명이나 막시무스가 아닌 나사렛 예수나 소크라테스의 인물형에 가깝습니다. 이순신과 사분오열된 부하장수들의 작전회의 장면은 가령 사약을 앞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에게 도망을 권유하거나 저항을 도모하거나 불가항력의 현실 앞에서 좌절하기도 하지만 정작 소크라테스는 법의 원칙을 고수하며 사약을 들이킵니다. <명량>에서 문제적 장면으로 일컬어지는 도주병의 참수장면은 이순신과 소크라테스를 연결시킬 수 있는 확실한 근거 중 하나입니다. 이순신은 군법의 위엄을 고수하고자 아까운 병력 한 사람을 희생시키지만, 이는 리더십의 과시라기보다 악법에 순응해서라도 공화정의 원칙을 수호하려 했던 철학자의 언행일치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순신과 아들 이회의 관계는 부지지간이라기보다 스승과 제자관계가 더 어울려 보입니다. 극의 시종일관 이회는 전투의 선봉에 선 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하기보다 그가 남긴 용병술의 해석에 몰두해 있습니다. 클라스막스의 전투장면은 두 부자의 대화장면을 교차편집으로 끼워 넣습니다. 여기에서 이회는 병사의 두려움을 용기로 뒤바꿀 수 있는 장수의 리더십을 몸소 확인합니다. 아버지의 지략을 이해하고 그 실천을 확인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회는 소크라테스의 언행을 기록한 플라톤에 비견될 만합니다. 이회가 목격하는 아버지 이순신은 사태 저변의 원리를 해득하려 애쓰는 또 하나의 관찰자입니다. 그는 공포가 기백으로 돌변하는 집단심리의 메커니즘을 통해 백성들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자연과학적 통찰을 발휘해 울돌목의 소용돌이를 해전에 역이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회의 사후적 깨달음을 제외하고 이순신의 속마음을 이해하는 인물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최후의 결전 앞에서 충신 안위의 배마저도 돌진명령을 외면하고 후퇴합니다.

 

          <명량>이 묘사하는 이순신은 고독한 근대인입니다. 그에게는 협량한 왕권도 조변석개하는 민심도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없습니다. 근대인은 모든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 인격이기에 이순신이 강박적으로 되뇌는 군법 또한 소크라테스의 악법처럼 법치주의의 이상을 지시하는 손가락에 불과합니다. <명량>은 끝까지 이순신과 백성 사이에 놓인 생각의 거리를 암시합니다. 뜻밖의 승전에 고무된 백성들이 자신의 전공을 늘어놓은 마지막 장면 또한 이순신의 고독을 부각시킵니다. 반면 관객의 입장에서 이순신의 고독은 다층적인 해석과 감정이입을 가능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그 감정의 여백이 보수와 진보, 원칙과 아량, 논리와 눈물을 모두 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량>의 이한민 감독은 이순신 장군의 삼대해전을 모두 영화화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결국 마지막 해전이 묘사할 이순신 장군의 전사가 충신의 죽음일지, 민중의 죽음일지, 혹은 철인(哲人)의 죽음일지 가늠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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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2]샘터

August 21, 2014

역시 영화 전문가  입장에서의  분석이 다르군요..


 저는  평소에 영화를 자주 안봐서 그런지 도무지 깊은해석이 안됩니다.

 가족들과 같이 오래간만에 이영화를 보고 흥행요인을 내 나름대로

 반일감정적 사회분위기 , 이순신이란 영웅의인지도, 그리고 방학 특수가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평소 별로좋아하지 않는 진중권이가 이영화를 "졸작"이라고 평했다는것에

 저는 수긍이 같습니다.   


 제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런 류의 영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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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1, 2014

이렇게 좋은 글은 다비아 본 사이트에 올려야 되는데요. ㅎㅎ

나는 지난 봄에 어느 분이 <데칼록>을 주어서

열편을 다 봤습니다.

여운이 오래 남았습니다.

<명량>을 보진 못했지만

흥행에서 신기원을 마련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언듯 스치는 생각에

세월호 참사가 이런 흥행에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한 건 아닌가 했어요.

몇년 전인가 <도둑들>이 그렇게 인기가 있다고 해서

가족들과 함께 봤는데

좀 허탈했다는 느낌만 남았군요.

내적 논리성도 떨어지고

미국영화 흉내 내고,

여배우가 예쁘다는 것 밖에는 별로 남는 게 없어요.

위 글 읽고 영화에 대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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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체호프

August 22, 2014

목사님, 집사님 안녕하세요.

댓글로 여러번 기별을 주셨는데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서울샘터 주일예배에 안정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아내 모두 샘터에 복귀하게 된 걸 다행으로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들 하준이도 형들, 누나들 사이에서 어리광부리며 교회생활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제 글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배때 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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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小木

August 23, 2014

야~~ 이렇게까지 평론이 가능하네요.^^ 집사님의 평론 잘 읽었습니다. 저는 지지난 주 가족들이랑 같이 가서 봤는데, 화려한 전투씬과 간간이

감성을 자극하는 부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온 가족이 가서 나름 재밌게 감상 했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왕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과의

정치적 긴장감을 삽입해서 그것을 통해 대한민국의 현재를 투영했으면, 더 풍부한 재미와 여운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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