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6

현대신학의 흐름22

조회 수 4098 추천 수 0 2013.07.25 18:15:26
 
현대신학의 흐름22
 
 
오늘은 불트만. 세 번째 절 '역사적 예수와 인간의 결단'을 연재하겠습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1) 예수의 삶과 메시아적 자의식 2) 예수의 메시지 3) 인간의 응답과 결단
 
 
3. 역사적 예수와 인간의 결단
 
1)예수의 삶과 메시아적 자의식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성서의 내용을 강화하는 것보다 이런 신학적 사고를 자주자주 접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 역사적 예수의 삶의 형태
 
[불트만은 예수를 유대주의의 범주에서 이해한다.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유대인이었다.
그의 선포는 유대주의의 사고의 양식과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예수는 원래 당시의
세례파에 속했고
, 예수의 집단은 세례 요한의 집단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예수는 당시에
팽배한 메시아적 기대 속에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했다
.]
 
예수가 당시의 동시대인과 함께 내려온 전승을 공유했을 뿐 아니라, 경건한 유대인에게 관례화된
종교적 규례들을 반대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트만은 예수의 생애를 보면 크게 두 가지 삶의 형태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하나는 예언자적인
형태이고
, 다른 하나는 랍비적인 형태이다. 즉 예수의 삶의 형태를 외견상으로 본다면, 예언자나
랍비와 유사하다
.]
 
신약성서 전체와 복음서를 관통하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근거로 본다면 예수는 예언자입니다.
또한 복음서에는 예수의 윤리적 말씀도 적지 않게 나옵니다. 이를 근거로 예수는 랍비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복음서는 예수를 예언자 또는 랍비로 칭한 구절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와 구약의 예언자 사이에, 그리고 예수와 랍비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외형적인 삶의 양식(여자, 세리, 창기, 가난한 자, 이방인 등과의 교제)뿐만 아니라
하나님
, 인간, 율법 등에 대한 해석에서 나타난다.......보다 중요하게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대한 선포는 다른 예언자들의 묵시적 기대와는 달랐다
.]
 
예수는 당시의 율법주의(인간의 성취로써의 율법)는 비판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전 실존을
포함한 근본적인 순종을 요구했습니다. 겉으로는 당시 유대율법주의자들과 차이가 없게 보이나
예수의 삶의 스타일(여자, 세리, 창기, 가난한 자, 이방인등과의 교제)과 율법에 대한 해석이
서기관과 종교 지도자들과는 판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예수의 삶의 형태가 십자가의
죽음을 불러옵니다. 불트만은 예수의 죽음이 비정치적이기도 하고 정치적이기도 한 것으로 봅니다.
이유는 예수의 선포는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지 않았으나, 대중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 냈기
때문입니다.
 
 
(2) 메시아적 자의식
 
일단 불트만에게서 예수가 '메시아적 자의식'이 있었는지 여부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는 저자의
말을 던져 놓겠습니다. 이유로는 '메시아' 혹은 '메시아 됨'(Messiahship)의 용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라는군요.
 
['메시아'라는 용어는 기원으로 볼 때 유대 종말론의 국가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말도 구약에서 왕을 상징했다.......그러나 예수의 모습은
왕이 아니라
, 예언자와 랍비였다. 나아가 불트만은 예수가 자신의 인격을 묘사하기 위해서
어떠한 기독론적 칭호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 또 예수는 자신을 유대 전승의
메시아적 인물과 일치시키려는 사람들의 모든 시도를 거부했다
.]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호칭에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선재'의 개념이 결합된 것은
헬라 교회에서 시기적으로 상당히 늦게 일어난 일이다
.(이런 호칭은 존재론적이기보다
기능적인 성격이 강하다
.) , 이런 호칭들이 예수에게 붙여진 것은 일차적으로 예수의 본성
때문이 아니고 예수의 특별한 기능과 역할 때문이다
. 이 역할은 예수가 행한 구원의
담지자로서의 역할이다
.]
 
불트만은 호칭의 원래 의미의 다양성을 떠나 예수에게 붙인 이러한 호칭이 종말론적인
구원 - 전달자를 지칭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질문을 변형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구원의 담지자로서의 자의식은
있었는가?"
 
[불트만의 사상을 분석해 보면, 구원의 담지자와 연관시킬 때 예수는 구원 - 전달자
(salvation - bringer)로서 자신의 사명에 대한 독특한 의식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불트만은
이러한 의식을
'종말론적 인물' 혹은 '예언자적 의식' 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는 전통적 의미의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자신이 메시아적인 칭호를 사용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메시아적인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독특성을 인식했으며, 자신의 선포와
말씀이 구원의 징조, 구원과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구원의 담지자(salvation - bearer)였고, 구원을 가져오는 자(salvation - bringer)라는 인식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예수의 메시지
 
불트만은 예수의 메시지를 통해 역사적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역사비평방법으로 예수의 말씀을 분석해 선포의 핵심을 이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불트만은 예수의 메시지를 종말론적인 범주와 윤리적 말씀의 범주에서 다룬다. 전자에서는
예수의 예언자적인 삶의 스타일이 드러나고
, 후자에서는 랍비로서의 모습이 드러난다.
내용적으로 볼 때 전자는 하나님 나라와 연관된 말씀들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뜻과 연관이 있다.]
 
(1) 하나님의 나라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는 국가적인 혹은 정치적인 나라가 아니다......다른 말로, 인간이
어떤 의를 통해 갈 수 있거나
, 죽어서 가는 공간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의미이다.......또한
하나님 나라는 묵시록적 성격을 가진 것도 아니다
. 그 당시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종말과 함께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와 '지배'를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그를 자신의 세상적인 안정으로부터 불러내는
'구원'을 뜻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시간성'의 문제이다. 20세기 초반까지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이 되면서
하나님 나라에 현재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 신학적으로 관심을 끌게 되었다
........불트만은
하나님 나라에는 미래적 요소와 현재적 요소 모두가 존재한다고 본다
........불트만은 이
두 요소의 조화를 시도한다
. 조화의 핵심은 '실존적인 현재'이다......., '지금' 내려지는
실존적인 결단에 무게가 실린다
.]
 
"하나님의 나라는 비록 순전히 미래적이지만 전적으로 현재를 결정짓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인간에게 결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도 현재를 결정한다."
 
(2) 하나님의 뜻
 
[불트만에게서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의 뜻"(the will of God)은 예수가 선포한 윤리적 말씀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 예수의 윤리적 말씀을 통해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의 뜻에 접근할 수 있다.]
 
[예수의 메시지에서는 경전의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권위는 명백히 포기되어졌다.......
예수의 윤리적 말씀은 세계-개혁, 시민의 권리, 사회적 혹은 정치적 프로그램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다
.]
 
"하나님은 근본적인 순종을 요청한다. 하나님은 완전히, 총체적인 순종을 요구한다."
 
"예수는 사랑을 인간의 완전으로 향하는 덕목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사회의 도덕적 함양을
위해 필요한 행위로 보지도 않았으며
, 오히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나는 구체적인 삶의 정황
안에서 자기
-의지(self-will)를 극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불트만은 예수가 자신의 '인격'을 믿으라고 설교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의
인격은 그의 결단의 요청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예수는 자신의 인격으로서
결단을 요청한다
."
 
[불트만은 예수의 종말론적 말씀과 윤리적 말씀이 조화롭게 통일성을 이룬다고 믿는다.
종말론적인 말씀과 윤리적 말씀 모두에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으로 같은 견해가
전제된다
.......종말론적인 선포와 윤리적 요구 모두는 인간을 하나님 앞으로 몰아가고,
하나님 앞에 그를 서게 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두 종류의 말씀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 지금을 하나님을 향한 결단의 순간으로 만듦으로 모든 시간을 '현재'가 되게 한다.]
 
 
3) 인간의 응답과 결단
 
[불트만이 이해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인간에게 결단을 요청한다.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의 뜻'도 인간에게 응답을 요구한다.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의 종말론적인 말씀과
윤리적 말씀의 연결 고리도 인간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궁극성과 응답성이었다
.]
 
인간의 '결단 가능성'이 있는가?
 
"지금만이 의미가 있다. 모든 것은 전적으로 현재의 순간에 흡수된다. 지금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결단의 의미이다.......누구든지
인간을 결단의 위기 속에 있는 것으로 보고
, 그리고 이것이 인간 실존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 결단이 과거의 경험에 바탕을 두거나 합리적인 연역에 의하지 아니하고
즉각적인 상황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알 것이다
."
 
말이 어렵지만 불트만은 인간 역량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 있는 인간에게 결단을 단지 남겨두었다."
 
"책임성은 인간에게 놓여 있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답변해야 한다. 그의 행동은 자신의
존재의 표현이고
, 자신의 행위에 의해 그는 심판받는다."
 
여기까지의 불트만의 말을 들으면 그가 이야기 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상충되는 발언
들입니다. 예수를 통한 구원과 인간의 결단과 책임이라는 상반되는 입장의 결론입니다.
 
["죄는 본질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사악한 의지이다." 다른 말로, 죄는 인간에게 붙어
있는 종류가 아니다
. 이는 죄 된 인간성의 특징이다. 그래서 예수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하지 않았고
, 죄 된 인간을 말했다." 이처럼 불트만은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실존적'으로 이해했다.]
 
[불트만은 '믿음'도 역시 실존적으로 해석한다. 신앙은 죄-아닌 상태, 생의 특별한 순간에
체험되어지는 어떤 힘을 의미한다
.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일반론적으로
말하지 않고
, 구체적으로 분명한 상황과 연관해서 말한다." 인간은 특수한 순간에 하나님의
뜻에 저항해서 자신의 자아에 죄 되게 매달리고 있는 자신을 심각하게 만난다
. 동시에
그는 자신을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어떤 힘
, 즉 신앙을 경험한다.(순차적이 아니라 동시에)]
 
[불트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 신앙, 그리고 은혜 같은 용어들을 각기 분리하지 않고
실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 그것은 바로 결단, 혹은 순종이라는 단어이다. 진지한 의미에서
인간은 오직 실존적인
'결단' 속에서만 자신의 죄 된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그러므로 불트만에게서는 '결단'이라는 용어는 인간이 자신의 죄 된
상태와 무기력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고
, 동시에 동전의 다른 측면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결단''은혜' 같은 용어들을 보통 우리가 이해하는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면 분명히 상반되는 용어들입니다. 하지만 불트만식으로 즉, 실존적으로 이해한다면
이 두 용어는 같은 사건의 다른 측면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셨는지요?^^ㅎㅎ
 
다음은 네 번째 절 '비신화화와 해석학'을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profile

[레벨:18]天命

July 26, 2013

열심히 공부해서 아래의 뜻을 풀어서 댓글로 올리겠습니다 :

- 불트만은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실존적'으로 이해했다.

profile

[레벨:21]小木

July 27, 2013

부탁드리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사회적거리 유지 기간 온라인예배 [레벨:24]임마누엘 2020-03-05 43217
공지 말씀예전 - 성경봉독 - 에문. 2023.12.10 file [레벨:33]우디 2018-01-09 45168
공지 서울샘터교회 휘장성화 총정리 file [7] [레벨:33]우디 2014-01-04 84203
공지 교인나눔터 게시판이 생겼습니다. [2] [레벨:10]mm 2012-02-13 196358
공지 2024년 교회력 [1] [레벨:33]우디 2011-11-26 232860
공지 서울샘터 교회 창립의 변 [123] [레벨:100]정용섭 2008-10-24 293890
746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4] [레벨:22]샘터 2013-09-27 4739
745 현대신학의 흐름26 [1] [레벨:21]小木 2013-09-25 4373
744 서울샘터 가을맞이 소풍풍풍풍!!! file [8] [레벨:26]은빛그림자 2013-09-23 5207
743 현대신학의 흐름25 [1] [레벨:21]小木 2013-09-12 4600
742 현대신학의 흐름24 [2] [레벨:21]小木 2013-09-05 4531
741 8월 25일 서울샘터 예배는!!!!! [1] [레벨:26]은빛그림자 2013-08-24 4605
740 2013년 서울 샘터 여름수련회 최종 공지!!! [25] [레벨:26]은빛그림자 2013-08-12 5497
739 현대신학의 흐름23 [5] [레벨:21]小木 2013-07-31 4807
» 현대신학의 흐름22 [2] [레벨:21]小木 2013-07-25 4098
737 촛불 예배 file [21] [레벨:26]비가오는날 2013-07-17 5304
736 권력 / 종교권력 [2] [레벨:21]小木 2013-07-16 4599
735 현대신학의 흐름21-1 [2] [레벨:21]小木 2013-07-12 4709
734 현대신학의 흐름21 [레벨:21]小木 2013-07-09 4092
733 현대신학의 흐름 20-1 [레벨:21]小木 2013-07-05 3985
732 "당신의 전을 향한 질투가 나를 잠식했나이다" [2] [레벨:26]비가오는날 2013-07-03 4627
731 현대신학의 흐름20 [1] [레벨:21]小木 2013-07-02 5163
730 현대신학의 흐름19 [레벨:21]小木 2013-06-26 4077
729 현대신학의 흐름18-2 [레벨:21]小木 2013-06-21 3544
728 현대신학의 흐름18-1 [5] [레벨:21]小木 2013-06-19 4858
727 현대신학의 흐름18 [2] [레벨:21]小木 2013-06-14 4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