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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흐름25

조회 수 4601 추천 수 0 2013.09.12 19:23:46
 
현대신학의 흐름25
 
 
오늘은 [4장 계시와 실존 : 불트만] 마지막 부분으로 저자의 평가를 연재하겠습니다.
 
 
6. 평가
 
 
역사와 신앙
 
[불트만이 우리에게 남긴 중요한 통찰은 '역사와 신앙'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이다
. 20세기 이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오는 세대에도 신학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주제는
'역사와 신앙'의 조화 문제일 것이다. 역사적 사고는
역사의 진행에 있어서 어떠한 초월적 존재의 간섭도 용납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
반면 기독교의 계시는 초월적 존재의 역사 내의 섭리를 기본 명제로 하고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과 계시 자체가 초역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
 
18세기 계몽주의 이전에는 '역사와 신앙'의 갈등이 없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유는
교회가 진리를 독점하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 진리개념이 다양화
된 이후로는 역사적 사고와 기독교는 뚜렷한 해결 방안 없이 심각한 갈등을 시작합니다.
이런 와중에 불트만 신학은 '역사와 신앙'의 해결 가능성을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통해 보여 줍니다.
 
[역사비평학으로 역사적 예수에 접근한 신학자도 많았고,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한
신학자도 많았다
. 그러나 불트만처럼 철저히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동시에
추구하며 그 연속성의 근거를 제공한 신학자는 없었다
.]
 
저자는 불트만 신학으로 인해 역사와 신앙이라는 두 영역이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귀중한
단초를 우리에게 남겼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역사와 신앙"
관계가 우리 시대에 아주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기독교 신앙이 역사의 장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실현되는지, 기독교의 종말 사상이
어떻게 현재 역사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지
, 하나님의 나라가 이 역사와 어떤 연결 가운데
역사의 목표를 제공하는지
, 하나님의 섭리가 보편사와 어떻게 관계되는지 등은 우리
시대에 해결해야 할 신학적 과제이다
.]
 
개인적으로는 불트만 이후 독일 역사신학자인 판넨베르크가 이 과제에 대해 나름
신학적으로 답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비신화화
 
불트만은 비신화화를 통해 성서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우리가 오해하기
쉽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언급 합니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복음이 쓰여진 당시의
세계관이 신화론적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성서의 내용인 '복음'이 신화적이라는 게
아니라 복음이 표현된 당시의 세계관이 신화론적이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불트만은
우리가 오해하는 것처럼 복음을 비신화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세계관'
비신화화하려고 했던 것이죠.
 
현대인들 특히나 한국교회의 양적 규모가 자꾸 퇴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윤리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근본적인 이유는 성서의 세계관과 현대인의 세계관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약간 독특한? 면이 없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모든 세계교회가
세계관의 충돌과 그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비신화화의 목적은 신약의 전근대적인 세계관을 현대인의 사고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복음이 드러나게 하여 지금 우리에게 복음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다.......불트만은
20세기 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변함없는 복음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불트만이 시도한
비신화화는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 성서의 중심 사상들이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저자는, 비신화화는 성서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우리 시대에도 복음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 평가합니다. 또한 불트만이 사용한 해석학은 '-
이원적 사고'의 극복을 보여 줍니다. 즉 우리는 성서를 이해하는 주체가 되고, 성서는
우리에게 알려지고 정보를 제공하는 객체라는 분리의 사고를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불트만의 해석학은 성서의 텍스트를 넘어 텍스트에 담겨진 원래의 '사건'을 만나는
것입니다. 즉 텍스트가 나에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천 년 전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현재' 나에게 말씀을 하시고 결단을 요구하는 예수의 말씀이 되는 것이죠.
 
 
종말과 윤리(예수의 말씀)
 
예수의 두 종류의 말씀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종말론적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말씀입니다. 이 두 종류의 말씀은 서로 상반된다는 것이
기존 인식이었습니다. 임박한 종말 앞에서는 예수의 윤리의 말씀은 의미가 없게 되고,
윤리적 말씀은 이 세계의 지속을 전제로 이해되는데, 여기서는 예수의 종말론적인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렵게 됩니다.
 
이 또한 신학에서 오랫동안 해결해야 될 주제였습니다. 불트만은 두 종류의 말씀이 다
진정성 있는 예수의 말씀이라고 보았고, 그 사이의 공통적인 성격으로 '궁극성'이라는
특징을 찾아냈습니다.
 
[예수의 말씀들은 인간을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마주하게 하며, 말씀을 마주한 인간에게
실존적
'결단'을 요청한다. 불트만은 말씀이 가지는 '궁극성'과 인간의 실존적 '결단'
통해 두 종로의 말씀을 조화 있게 볼 수 있도록 했다
.]
 
하나님 나라
 
예수의 선포에서 하나님 나라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가장 큰 난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간성' 문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초기 연구에서는 이를 미래적으로 해석했지만, 계속되는 연구를 통해 현재적 요소도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요소의 조화가 어려웠습니다.
 
[불트만은 이 두 요소를 '실존적 현재'라는 개념으로 해석했다. 불트만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들이 실존적 결단 속에서 언제든지 현재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불트만의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간성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한계와 과제
 
[불트만의 신학은 오늘까지 많은 신학적 통찰을 준다. 하지만 그의 신학이 가지는 한계와
극복해야 할 부분도 없지 않다
. 불트만의 신학에 대한 비판은 주로 그의 신학이 가지는
강점과 연관되어 있다
. 즉 그의 신학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가 '실존'에 대한 강조이다.
불트만이 성서에 대한 실존적 해석으로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불트만
신학의 문제점도 대체로
'실존'과 연관해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불트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존적으로 접근해서 시간성 문제를 '실존적 현재'
라는 개념으로 해석했습니다. 새로운 관점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은 약화 됐다고 합니다. 개인의 '실존'에 지나친 초점이 주어지기 때문이라는군요.
비슷한 문제가 불트만의 해석학과 종말론에서도 나타납니다. 불트만의 강점인 '실존'
지나치게 치우치기 때문에 반대급부로 다른 문제들이 불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트만의 신학이 역사 책임적 실천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다. 불트만의
신학적 특징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되어질 수 있다
. 왜냐하면 실존적인 결단이 내적인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성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불트만의 실존적 신학의 특징이
사회
-경제적, 혹은 정치신학적 특징과 연관되어 발전될 수 있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불트만의 신학의 강점인 개인의 '결단'과 결단의 '현재성', 개인에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장으로 변화를 준다면 불트만 신학의 약점이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실제로 최근 불트만 신학과 행동신학이 연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불트만에 대한 연재를 마치겠습니다. 다음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5장 인간과 신의
상관관계 : 틸리히'를 연재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profile

[레벨:18]天命

September 13, 2013

25번 공부하러 들어가기 전에,

먼저 지난 주 8번 내용을 좀 보충할 자료가 나왔기에 댓글을 답니다. (서철원 교수)
칼 바르트의 로마서강해와 하르낙과의 논쟁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중략)
 
....그런데 칼 바르트가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참 진행중인 그 무렵 모든 신학공부를 마치고
처음으로 제네바의 옛날 칼빈의 교회에 와서 부목사로 일을 했다. 그리고는 스위스
자펜빌 Safenwil에 가서 목회를 했다. 그는 선생 Adolf von Harnack에게 배운 대로
비평적 방법으로 종교사적으로 며칠씩 열심히 연구하여 설교를 했었다.

아, 그런데 교인들이 자기 설교는 들으러 오지 않고 주말이면 다 산으로 가고 
어린 아이들만 온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러 와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의 설교를
외면하는 것을 보고, 이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목사는 커텐을 열어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남다른 지각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목회하러 왔는데 이 사태에 답답함과 괴로움이
참으로 많았던 것이다. 그때 그는 자기의 자유주의 선생들에게서 배운 자유주의 신학을 가지고는
도저히 안되는 줄을 깨달은 것이다.

그 때 마침 키에르케골의 저서들이 독일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키에르케골은 신론을 변증법적으로 전개하여 하나님은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고 썼다.
 
당시 스위스에는 두 종류의 종교개혁 교회가 있었다. 그것은 칼빈의 노선과 다른 노선인데
Karl Barth는 종교개혁자의 교회로 되돌아 가서 무명의 인사로서 로마서 강해를 쓰기 시작했고
그 첫판이 1918-19년에 나왔다. 그는 그 책에서 역사 비평적인 방법으로 서양문화가 갖는
그 선에서 연속되는 신학작업을 강렬하게 비판하고, 인간과 하나님이 같은 선에 서 있다는 자료를
깨부수기 시작했다. 그때는 전쟁 중이기 때문에 위기의식이 가장 높아져 있었고 또 전쟁이 끝날 무렵의
그 위기의식이 Karl Barth의 변증신학을 탄생시킨 것이다.
 
Karl Barth의 책(로마서 강해)가 출판되자 지금까지 內在神學으로 그처럼 평화롭던 곳에 그것이
폭탄으로 작용하기를 시작했고, 신학계가 온통 깜짝 놀란 것이다. 사실 Karl Barth 자신도 그것이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놀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학의 주제를 빼앗아 간 것이었다.

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전통적인 개신교 신학의 주제를 다시 찾아주면서
새 방향을 선정해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서구 19세기에서 20세기 사회로 넘어오는 큰 전환점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내적으로 말씀해 오신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위로부터 말씀해 오시는데, 오실 때 마다 그냥 심판주로 심판하시기 위하여 위기에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렇게 큰 반항을 일으킬 줄 몰랐기에 그는 그 변화를,

“어린아이가 밤중에 종탑에 올라가서 떨어지려고 해서 붙잡은 것이 종 줄이었다. 그래서 매달렸더니
종 소리가 사방에 울려 사람들이 다 잠에서 깨어 버렸다. 종을 칠려고 했거나 사람을 깨울려고 하지 않았지만
깨우게 되었다.”는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다.
 
이때 그의 선생 Adolf von Harnack이 제일 먼저 Karl Barth의 신학적인 전개를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바르트가 제일 많이 논쟁을 벌인 것은 그의 선생 Adolf von Harnack 이었다.
Adolf von Harnack은 “네가 그 길로 가면 이제까지 기독교가 쌓아온 역사적인 비평방법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Karl Barth는 신학 강의를 하러와서, 신학 강의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설교 원고를
읽었던 것이다. 1921년에 再版이 나왔는데 이때 그는 대학교수로 이미 청빙되어 있었다.
여기까지가 Karl Barth에게 오기까지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엽까지의 신학사상의 대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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