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공, 불신 실패” 구도의 저력과 한계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1980년 7월6일 김삼환 목사님(이하 ‘김 목사’)은 이십 여명의 신자들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의 하나인 명일동 500번 버스 종점 부근의 홍우상가 2층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예배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비약적으로 성장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힘 있게 뻗어나가고 있는 명성교회의 시작이었다. ‘명일동의 소리’가 되자는 뜻으로 시작한 명성(明聲)교회가 오늘처럼 명성(名聲)을 날리리라는 걸 그 당시에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 교인수가 교회개척 13년째인 1993년에 3만 명이고 2006년에 8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지금쯤은 이 숫자를 훨씬 상회할 것이다. 초청예배에 참석하는 숫자만 1만7천명에 이르고,(2006년 7월9일 설교) 주일학교 출석인원이 1만 5천명이며,(2007년 5월6일) 매 신년 초가 되면 4천명의 신자들이 단숨에 늘어난다고 한다. 상상하기 힘든 저력이다.(2006년 1월15일. 이하 연월일의 숫자만 표기함)
매년 3월과 9월에 실시되는 특별새벽기도회(일명 ‘특새)는 명성교회를 대표하는 브랜드이며, 그것은 어느 사이에 한국교회의 트렌드가 되고 말았다. 한 교회의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다. 참고적으로 2007년 9월 특새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일시는 9월1일(토)-6일(목), 주제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창 12:2), 강사는 조용기, 오정현, 김삼환 목사이며, 집회시간은 1부가 새벽 4:30, 2부가 5:40, 3부 6:50, 5부 10:00시이다. CBS TV가 생중계와 재방송을 하며, CTS 기독교 TV가 녹화방송을 했다. 새벽부터 모여든 신자들은 마치 인기 높은 영화관 매표소 앞에 긴 줄을 만드는 관객들처럼 교회 앞마당에 구름떼처럼 모여 기다리고 있었으며, 어린아이들도 매일 9천명이나 참석한다고 하니(07.2.28) 특새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명성교회 신자들의 신앙적 열정에 관해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명성교회가 국내외적으로 펼치고 있는 선교, 교육, 의료 및 각종 봉사활동을 소개하고 싶지만 이 글이 목회 전반이 아니라 설교를 다루어야 하기에 생략하겠다. 필자가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명성교회의 왕성한 활동을 알만한 분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에티오피아의 명성기독병원 설립과 우물파주기, 캄보디아의 대학설립 등이 일례들이다. 이미 25년 전부터 장학관과 사모관을 운영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남편을 잃은 목사 사모들의 복지에 힘을 쏟았다. 이런 일들을 거론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예배와 각종 모임의 활성화, 국내외에 걸쳐서 펼쳐지는 섬김 및 미래를 향한 교육 투자 등등, 일종의 김삼환 신드롬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런 신앙적 역동성이 어디서 나오는지, 자못 궁금하다. 이런 궁금증도 여기서는 묻어두기로 하겠다. 김 목사의 설교를 비평해야 할 필자가 우선적으로 짚고 싶은 대목은 명성교회 신자들이 김 목사의 설교에 열광하는 이유이다.  
명성교회 예배에 참석해 본 분들은 청중들이 김 목사의 설교에 열광하고 환호한다는 필자의 표현이 괜한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정서적인 연대감이 이렇게 탄탄하게 이루어지는 교회는 흔하지 않다. 첫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처럼 청중들은 김 목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번의 설교에도 수십 번의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어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설교에 온전히 빠져드는 명성교회 예배 모습은, 유명 가수와 그의 열성 팬들이 모인 라이브 콘서트나 지난 남북정상회담 차 평양을 방문한 우리 일행이 관람했다고 하는 북한의 아리랑 공연을 방불케 했다. 청중들의 이런 영적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일까?

낮춤의 영성
필자의 생각에 그의 설교 전반에 낮춤의 영성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 이런 현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그는 자신이 촌사람이라는 사실을 늘 강조하고 인간적으로도 부족한 게 많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그의 고향은 남한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의 한 곳인 영양이다. 울릉도에도 있는 신호등이 영양군에는 없다는 사실을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전해 듣고 “아~ 얼마나 창피한지 세상에, 제 고향이 영양군인데 신호등이 없다고 합니다.” 하고 한 마디 했다.(06.2.19)
촌사람 의식이 잘못하면 열등감으로 작용하겠지만 김 목사에게는 자기를 땅바닥까지 내려놓는 낮춤의 영성으로 작용한다. 이런 영성으로 세상을 대하는 김 목사는 기본적으로 사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천성적으로 남에게 모진소리를 하지 못한다. 가능한대로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애를 쓴다. 심지어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도 지나놓고 보니 좋은 대통령이었다고 하며, 지금 노무현 대통령도 그렇다고 말한다.(07.9.30, 06.9.24 참조) 이 설교가 있던 주일의 교회소식을 보니 남북정상회담을 위해서 기도하자는 내용이 있었다. 아무개 대형교회 목사는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자고 하고, 국내외 저명 목사 70명도 대놓고 남북관계를 훼손하는 모임을 열고 있는 마당에 신앙적으로 비슷한 경향의 김 목사가 이 부분에서 전향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라 할 낮춤의 영성이 한국교회의 신앙적 정서를 극복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 낮춤의 영성은 그의 설교 행태가 매우 서민적이라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설교의 스타일도 그렇고, 설교 내용도 그렇다. 그의 설교가 서민적이라는 말은 작위적인 꾸밈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김 목사의 설교를 직접 들어본 분들은 잘 알겠지만 그는 여전히 경상도 안동 지역의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고향을 떠난 지 40년이 되었으면 사투리에서 졸업하실 만한데도, 그리고 초대형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셨으면 세련되어 보이도록 발음교정이라도 받으셨을 텐데 그는 아예 그런 걸 무시하는 것 같다.
발음만이 아니라 김 목사가 구사하는 어법도 순수 토산품과 같다. 그의 설교에는 학문적이거나 개념적인 용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수천, 수만의 청중 앞이라고 한다면 품위 유지를 위해서라도 고상한 용어를 사용하기 마련이고, 어체(語體)도 어느 정도는 문어체를 병행하기 마련인데 김 목사의 설교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동네 사람들과 한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서 편안하게 담소하거나 설득하는 촌장처럼 그는 속에서 나오는 대로,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쏟아낸다. 모르긴 몰라도 설교학 교수들은 김 목사의 설교 형태를 신학생들이 배워야 할 모범으로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설교자들이 흉내 내면 전혀 감동이 없을 법한 설교행태가 김 목사에게서 유난히 빛난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은가. 그의 이런 설교형태는 가히 김삼환 류라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경상도 사투리와 토속적인 구어체에 이어서 그의 설교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특징은 찬송 부르기이다. 그는 설교 중에 찬송을 자주 부른다. 그 연세에 비해 목청도 좋고, 음감도 정확하다. 그런 찬송 부르기는 앞의 두 가지 특징과 어우러져서 김 목사 설교에 역동성을 제고시키는 듯하다. 필자는 김 목사가 설교 중에 얼마나 자주 찬송가를 부르는지 일부러 검수해보았다. 지난 2006년 전체 설교와 2007년 1월부터 9월16일까지 도합 80여회에 이르는 주일공동예배 설교에서 그는 일백열한 번이나 찬송을 불렀다. 예배 찬송가에 수록된 찬송만이 아니라 복음찬송에 이르기까지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특별 집회가 아니라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서 이렇게 자주 찬송을 부르는 설교가 설교학적으로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모습도 필자가 보기에는 격식을 따지기보다는 청중들의 영적 눈높이에 바싹 다가가려는 낮춤의 영성이 반영된 것이다.  
명성교회 신자들이 교회활동에 매우 열성적이고 김 목사의 설교에 환호하는 이유를 속속들이 밝히려면 설교비평보다는 사회현상학이나 종교심리학적인 검토가 필요할지 모른다. 이런 종합적인 연구는 언젠가 세월이 흘러 김 목사가 현직에서 떠나게 될 때 쯤 한국교회사 전문가가 감당할 것으로 보고, 필자는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의 설교행위를 다루겠다.

언어구사의 순발력
위에서 필자는 명성교회 신자들이 김 목사의 설교에 열광의 이유를 낮춤의 영성이라고 설명했는데, 여기서 덧붙여 또 하나의 요인은 바로 언어구사의 순발력이다. 그가 설교 도중에 톡톡 튀는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말에 재미를 불어넣을 줄 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아와 어가 다르듯이 그의 언어구사에는 감칠맛이 난다.
1969년 시골 전도사로 목회할 때 도둑이 들었다고 한다. 잠을 자다가 기분이 이상해서 눈을 떴는데, 도둑이 안으로 잠긴 방문 고리를 따기 위해서 창호지를 뚫고 손을 넣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고 한다. 무서워서 꼼짝 못하던 그는 아내를 깨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무서워 입이 떨어지지 않자 그는 무작정 아내를 꼬집었다고 한다.  

일어나라고 소리도 못 지릅니다. 너무 무서우니까. 계속 꼬집으니까 집사람이 “자는데 왜 이러냐”고 계속 그럽니다. “아니라니까. 저거 보라니까. 큰일났다니까.” 꼬집었더니 집사람이 잠이 깨어나서 소리를 지릅니다. “왜 자는데 이러느냐”고. 그걸 보고 그 사람 손이 쑥 내려옵니다. 그리고 딱 도망칩니다. 그때 제가 문을 열고 “야~ 이 새끼야.” 도망칠 때 그때 힘이 났습니다. 또한 남자된 걸 그 때 뭔가 보여야 되고 하니 문을 열고 한 100m 따라가다가 돌아왔습니다.(06.11.26)

백 미터쯤 따라가다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청중들이 얼마나 웃었겠는가. 젊은 시절에 일어난 그 사건을 사실 그대로 전한 건지 조금 부풀린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언어구사의 순발력이 없는 사람은 이런 코멘트를 달 줄 모른다. 한 군데 더 보자. 유럽의 오페라 문화와 한국의 문화를 비교하는 한 대목에서도 그의 이런 순발력은 여지없이 발휘된다.

좋은 거 하고는 그 다음에 마치면 박수를 보통 20분 이상 치고, 축하해주며 천천히 나와서 Tea Time을 가집니다. 나와서 이렇게 과자하고 커피를 마시는데, 우리는 박수도 안 치고 나가면 끝납니다. 그냥 밀고 팍 나가는 이것은 완전히 문화인이 아닙니다. 갈 데도 없으면서 그냥 막 나갑니다. 박수 좀 해주고 나가도 얼마든지 되는데...(06.3.12)

‘갈 데도 없으면서 그냥 막 나갑니다.’는 대목에서 필자는 한참 웃었다. 만약 그 구절이 없었다면 연주 후에 박수를 크게 쳐주는 유럽 사람들과 인색한 우리의 차이가 그저 밋밋하게 전달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개그맨 못지않은 언어의 순발력을 구사할 줄 아는 말꾼이다. 이런 건 단순히 말 재주만이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신앙의 힘이다. 일반적으로 삶의 여유가 없는 사람은 농담도 못하듯이 신앙적인 여유가 없으면 이런 순발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의 언어 순발력이 때로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적지 않다. 2006년 2월 초 이스라엘을 방문한 김 목사는 택시를 탈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택시 기사가 노인처럼 보여 나이가 몇이냐고 묻자, 기사가 마흔 다섯이라고 대답했다. 도저히 믿겨지지 않아 부인이 몇이냐고 다시 묻자, 넷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다시 장가를 갔는데 자기 아내가 서른한 살이라고 좋아했다고 한다. 김 목사는 택시 기사가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까 엉뚱한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코멘트를 했다.  

“야~ 이 사람아! 고생문이 훤하다. 어이 이제 서른한 살을 새로 맞이해 가지고 어떻게 살겠냐?”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모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 문화가 어두움의 문화입니다. 가족 문화든, 의복 문화든, 생활 문화든, 음식 문화든 잘못됩니다. 이것을 그들은 모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삶을 완전히 엉뚱한데다 맞춰 살아갑니다. 그 마흔 다섯 된 분이 얼마 더 살겠습니까? 제가 보니까 한 삼년 더 살면 못살 거 같습니다. “아~ 저분 살겠냐?” 싶습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입니다. 마흔 다섯에 할아버지입니다. 서른한 살 난 분이 새로 들어왔는데 어떻게 살겠습니까?(06.2.12)

‘한 삼년 더 살면 못살 거 같습니다.’는 표현은 일종의 비아냥거림처럼 들린다. 남에게 가능하면 좋은 말을 하는 김 목사가 의식적으로 이렇게 표현한 건 아니겠지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야겠다는 의욕이 앞서면 말의 실수가 벌어지는 법이다. 말에 자신감이 넘친 탓인지 김 목사는 간혹 개그와 똑같은 이야기들도 서슴없이 한다. 독자들께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주일공동예배 시간에 들었다고 상상해보라.
어떤 부부가 결혼 30주년을 맞이했다. 남편은 쉰다섯 살, 부인은 쉰네 살이다. 그들이 잠을 자다가 천사를 만났다. 천사는 결혼 30주년의 소원이 무언지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은 남편과의 세계여행이었다.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천사가 다시 남편에게 똑같이 소원을 물었다. 남편은 지금의 늙은 아내보다 30년 젊은 여자와 살게 해달라고 했다. 천사도 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보니 여자는 그 나이 그대로였지만, 남자는 여자보다 서른 살이나 많은 할아버지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이 개그를 듣고 명성교회 신자들은 한바탕 웃었을 것이다. 삶의 중심을 바꿔야지 환경을 바꾸는 데 신경을 쓰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개그를 설교 시간에 그대로 전한다는 것은 필자가 보기에 설교를 재미있게 해야 한다는 조급증에서 나오는 과욕이다.  
자신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청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피에로처럼 초대형교회의 담임목사라는 권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개그를 전달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김 목사의 진정성이 바로 이 대목에서 확인되는 거 아니냐, 하고 말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도 이런 문제에서 아직 결정적인 대답을 제시하기 어렵다. 생각을 필요로 하는 설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청중들 앞에서 설교자는 과연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청중들에게 들리든 않든 상관없이 성서와 기독교의 진리를 올곧게 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가, 아니면 개그 아니라 그것보다 더한 언어 및 스피치 기교를 통해서라도 일단 청중들에게 들리는 쪽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가? 이건 다시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상관관계로 돌아가는 논의인데, 오늘은 이런 주제로 들어가지 말자.

기도 만능론
필자는 앞에서 청중들이 왜 김 목사의 설교에 열광하는가, 하는 질문을 말머리로 제시한 뒤 낮춤의 영성과 언어구사의 순발력이 그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요인들이 그의 설교를 직간접적으로 견인해나가고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그렇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훨씬 본질적이고 구성적인 요인은 그의 설교가 “예수 성공, 불신 실패” 패러다임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의 요인들도 모두 이 구도의 귀결에 불과할 정도로 이것은 그의 설교에서 일종의 블랙홀과 같아서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김 목사가 설교 도중에 노골적으로 “예수 성공, 불신 실패” 구호를 외치는 건 아니지만 그의 설교에 철저하게 내면화되어 있다는 건 분명하다. 어떤 본문의 설교이든지, 어떤 주제의 설교이든지 오직 이 한 가지 구도로 돌아간다. 비율적으로만 본다면 그는 ‘불신 실패’보다는 ‘예수 성공’을 훨씬 많이 거론하는 편이다. ‘불신 실패’를 말하는 경우는 대개 ‘예수 성공’을 강조하려는 때이다. 그의 설교는 전반적으로 신앙의 승리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설교 한편을 소개하겠다.
2007년 6월24일에 김 목사는 “기도하던 곳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설교를 했다. 이 본문(삼상 1:21-28)은 한나가 어린 사무엘을 데리고 엘리 제사장이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가서 드린 기도이다. 김 목사는 서론적으로 찬송가 197장 1절을 소개하면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도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시편 91편을 읽은 후에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했고, 이사야 43:2절과 에스겔 36:37절을 다시 인용했으며, 중보자이신 예수님에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일반적인 내용을 전했다. 그 뒤로 그는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 관한 이야기를 성경말씀보다 더 자세하게 전했다. 지난 3월에 베른 의원의 초청을 받아 미 연방의회에 갔다가 라이스를 직접 만났던 일을 회고하면서 그는 이렇게 전했다.

그런데 얼마 전 신문에 났습니다. 이분이 어떻게 일을 감당하느냐? 그 비결이 어디에 있느냐? 늘 기도한다는 겁니다. 항상 아침마다 기도하고, 백악관에서 금식기도까지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부르짖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왔느냐? 이미 어려부터 아버님이 목사님입니다. <중략> 매일 아침 부시와 함께 기도 하고, 이래서 큰일을 감당하는 겁니다. 여러분! 국무장관 일이 얼마나 큽니까? 크든 적든 기도하면 하나님은 도와주셔서 솔로몬에게는 세계적인 지혜를 주셔서 세계적인 왕이 되게 하신 하나님, 기도하면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이어서 오래전 1988년에 명성교회 학생회에 등록한 한 사람을 다시 소개했다. 그는 명성 장학관에 들어와서 힘들게 공부하면서 현재는 국군장교가 되어 강원도 전방에 근무하면서도 매 주일 명성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분이다. 김 목사는 그가 어떻게 대학원까지 공부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 속사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 외에서 장학관 출신으로 크게 성공한 세 사람을 소개했다. 그들은 그날 예배에 참석했다. 금주섭 목사는 에딘버러에서 Ph.D.를 했으며 현재 WCC 선교국장으로 근무한다. 정성욱 교수는 하버드에서 Ph.D를 했으며, 이강근 목사는 히브리 대학에서 Ph.D를 했다. 이렇게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전하면서 김 목사는 설교를 이어갔다.
본문으로 잠시 돌아온 김 목사는 한나의 기도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 기도는 탈출이다. 한나는 기도를 통해서 절망과 고통스러운 삶에서 탈출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힘으로 탈출할 수 없는 모든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기도하면 우리는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가정에 있는 모든 불행, 저주, 멸망, 질병, 여러분을 덮고 있는 감당할 수 없는 모든 검은 먹구름들을 기도할 때 우리는 거기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둘째, 한나의 기도는 성전중심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유럽의 장군 두 명을 소개했다. 나폴레옹과 넬슨이다. 나폴레옹은 목사를 모시고 기도한 후에 전쟁에 나가자는 참모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결국 전쟁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반면에 영국의 넬슨 제독은 시편 127편1절을 의지하면서 군목과 함께 기도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국을 지켜낼 수 있다고 한다. 루즈벨트, 링컨, 맥아더 장군 역시 기도를 먼저 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넬슨은 나라를 살리고 귀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도 다치지 않게 했습니다. 자기에게도 영광이 왔습니다. 자기를 따르던 부하도 다 살릴 수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부모는 자기도 살고 자녀도 살며, 가정에도 모두에게 영광이 옵니다. <중략> 기도하면 삽니다. 일으키십니다. 구원이 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옵니다. 특별히 어려운 일을 당하여 눈물로 부르짖을 때 그 눈물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김 목사는 기도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도로 승리한 사람들을 예로 들었다. 기도를 드린 사람들은 모두 성공하고 기도를 드리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산 사람은 모두 실패한다는 이런 단순논리가 과연 기독교 신앙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필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나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은 옳지만 기도 때문에 사무엘을 얻었다는 말은 반만 옳다. 그녀가 기도를 하고 아들을 얻었지만, 이런 성서본문에 근거해서 누구나 기도하면 아들을 낳을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이다. 한나 이외에도 아들을 낳지 못하는 수많은 여인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진실하게 기도하지 못했고 한나만 바르게 기도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세상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기독교 신앙은 아전인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사무엘은 사사와 왕정시대를 이어주는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의 아들들은 불한당이었다. 어려서부터 평생 기도의 삶을 산 사무엘이 왜 아들 교육 하나 제대로 시키지 못했을까?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아내는 삼대 악처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한 신앙의 영웅이 왜 자기 아내 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했을까? 기도 만능론의 설교는 기독교 신앙을 오도할 뿐만 아니라 상식에도 미치지 못한다.
필자는 지금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기독교인의 성공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기도를 성공의 방편으로 선포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판넨베르크) 주기도에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는 것은, 기도란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스텐리 하우어워스) 올바른 기도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잠겨 있을 경우에만 드려질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그 사태 안으로 들어갈 때 가능하다. 필자는 김 목사의 설교에서 기도의 영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단지 기도만 하면 세상살이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예수 성공” 구호가 아무런 신학적인 근거 없이 일방적으로 선전된다는 느낌만 들었다.  

기독교 신앙과 엘리트주의
이런 성공주의는 엘리트주의와 짝을 이룬다. 그의 설교에는 자수성가한 사람들, 국내외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사람들, 소위 출세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무한정 꼬리를 문다. 워싱턴, 링컨, 루즈벨트, 아이젠하워, 클린턴, 부시 대통령, 맥아더, 헬렌 켈러, 베토벤, 하이즈 워드(미국 슈퍼볼 2006년 엠브이피) 같은 인물들이 자주 언급되고, 사회 고위직이라 할 수 있는 국회의원, 장군, 대통령, 경찰서장, 검사, 의사, 교장, 변호사, 박사, 교수에 해당되는 이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대개의 소재들은 ‘아침마당’과 같은 티브이 프로그램의 성공신화에 소개될만한 이야기들이다.      
2006년 6월18일의 설교 “교회에 대한 비전”(엡 3:14-21)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릭 워렌 목사는 빌리 그레엄 목사 다음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워렌의 집까지 찾아갔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 김 목사는 워렌이 이미 명성교회에 와서 설교한 적도 있고, 이번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했다. 조엘 오스틴이 쓴 <긍정의 힘>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다. 이에 덧붙여 김 목사는 이렇게 코멘트를 달았다. “공부를 하든, 결혼을 하든, 사랑을 하든, 스포츠를 하든, 무엇을 하든 예수 잘 믿고 한 교회에 뿌리 내려서 나아가면, 여러분은 세계적인 인물이 되고 세계적인 일을 할 수 있으며, 온 세계에 좋은 일을 하면서 위대한 인물, 위대한 공헌을 하는 인물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한국에서 외국어대학을 졸업하고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이희범 박사는 옥스퍼드 대학교 종신 교수와 이사가 되었다. 그는 9.11 테러가 나던 날 지독한 설사를 만나는 바람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인 강영우 박사, 경기고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미국에서 인공위성의 열처리 문제를 해결함으로 최고의 우주과학자로 대접받고 있는 정재훈 박사는 모두 세계적인 사람들로서 기도하고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이다. 김 목사는 이렇게 세계적인 인물들을 나열하면서 다음과 같이 촌평을 달았다. “새벽기도하면 하나님이 안 알려주는 게 어디 있습니까?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가르쳐주지 않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김 목사의 설교에는 서로 조화될 수 없는 두 가지 관점이 묘한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낮춤의 영성과 지금 언급되고 있는 엘리트주의이다. 서로 대립적이어야 할 이 두 요소가 결합된 김 목사의 설교가 한국교회에서 상당한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이율배반적인 정체성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신앙은 영적 순수성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엘리트주의를 지향한다. 외피는 순수한 영성주의가, 내면은 천박한 자본주의가 어색하게 자리하고 있다. 조금 더 넓게 보면, 이런 교회의 모습은 대다수 중산층 이하의 한국 사람들이 세속적인 성공을 이루어 엘리트가 되려는 욕망에 상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김 목사의 설교는 바로 이들의 욕망을 대리적으로 해소시켜주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당신 주장은 믿음 없는 소리야, 성공주의와 엘리트주의가 뭐가 나쁘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목회의 차원에서 임상적으로 돌봐야 할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지만, 목회적인 심정과 공적인 설교와는 구별해야 한다. 설교는 청중들이 원하는 것을 전하는 게(포퓰리즘)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전하는 것(신탁)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기독교인들이 십일조 1억 원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하는 것이라고(06.9.17) 주장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런 주장이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영성과 공동체성을 허물어버린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한 두 마디는 남겨야겠다.
첫째, 설교자들은 기독교 신앙과 그 신앙이 토대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종말론적 지평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삶은 잠정적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 세상의 삶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빛으로 조명 받아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고 규정하는 성공과 실패는 그것 자체로가 아니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막 25:31-46) 말하듯이 오늘 우리의 모든 행위는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심판받을 것이다. 목회의 성공이 오히려 주님의 책망을 받을 수 있으며, 목회의 실패가 오히려 주님의 칭찬을 받을지 모른다. 우리는 늘 종말론적 지평에서 우리의 신앙과 설교를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은 우리의 모든 종교적, 세속적 업적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움을 얻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에도 그대로 부합한다. 안타깝게도 중세기 로마가톨릭의 업적주의 신앙으로부터 엑서더스 한 개신교회가 광야의 삶에서 늘 이집트의 삶을 그리워한 히브리인들처럼 어느 사이에 다시 업적의(義)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게 아닐는지. 그래서 세속적인 성공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닌지.
둘째, 성공주의와 엘리트주의에 기울어진 설교는 이 세상에서 실패한 민중 기독교인들을 열패감에 빠지게 만든다. 이 대목이 교회 현장에서는 훨씬 강력하게 작용한다. 생각해보라. 믿음생활을 잘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명제가 교회 안에서 진리인 것처럼 선포될 경우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믿음생활을 잘못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했으며,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실패였다. 예수님은 그렇게 세상의 삶을 접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이 부활은 이 땅의 성취가 아니다. 아무리 진실한 기도를 올리고, 아무리 신앙생활에 성실하더라도 이 땅에서 부활의 생명을 실질적으로 얻을 수는 없다. 오늘 설교자들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에 관해서 입을 다물고 오직 종말론적 생명인 부활생명에 천착해야 한다.
필자는 김 목사의 설교를 한 번 더 좋은 쪽으로 보고 싶은 생각도 많았다. 성공주의에 치우친 설교가 결국은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해주기 위해서 마지못해 선택한 방법이 아니냐 하고 말이다. 아직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오지 못한 신자들에게는 흡사 유아기의 아이들에게 죽을 먹여야 하듯이 소화시키기 좋은 내용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런 부분을 감안하다고 하더라도 설교가 세계관 자체를 왜곡시키는 데까지 나간다면 무조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교회를 배회하는 악령들    
김 목사의 성공, 출세, 엘리트주의는 세계관과 역사관을 관통하고 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부한 나라는 모두 하나님의 축복이고, 가난한 나라는 모두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다.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로 자주 등장하는 두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이다. 필자는 그의 설교에서 반복되는 이런 진술 앞에서 당혹스럽다.  
김 목사는 2006년 10월8일의 설교에서 우리를 지켜준 미국과 잘 지내야 한다고 외쳤다. 우리의 해방도 미국 덕분이고, 6.25 남북전쟁에서 살아남은 것도 미국 덕분이며 우리의 경제성장도 역시 미국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와서 우리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어서 우리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며 우리 교육, 사회, 가정, 스포츠 우리의 모든 문화를 모두 미국이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조승희 사건 앞에서 미국 시민들이 보여준 너그러움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서 일어났다면 경찰서를 습격하고, 국무총리도 모두 사표를 내야 했을 텐데 미국은 사흘 만에 모든 장례식을 끝내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조승희 사건을 2002년도에 한국에서 일어난 효순이 미선이 사건과 비교했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이미 미국 사람과 마찬가지였던 조승희 사건을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효순 양 사건과 비교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배웁니까?” 하는 김 목사의 주장은 자학사관이 아닌가.
이어서 김 목사는 뉴욕, 워싱턴, 휴스턴, LA 지역의 큰 교회를 방문한 경험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미국의 큰 교회를 방문하는 이유는 벤치마킹하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미국교회의 벤치마킹이 필요한 것인지는 접어두자. 그는 미국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이유가 영적인 힘이며, 교회의 힘에 놓여있다고 역설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원래 그 땅은 인디언의 땅입니다. 쓸모없는 땅인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음의 땅을 만들어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길 때 그 땅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축복을 받아 짧은 300여년 밖에 되지 않은 역사지만은 세계를 이끌어 가는 이 놀라운 풍성한 포도나무 열매가 맺어졌습니다.(07.1.21)

필자는 인디언이 살던 북아메리카가 쓸모없는 땅이었다는 김 목사의 말에 깜짝 놀랐다. 여기서 영국 청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유럽인들의 북아메리카 침략사를 재론하지 않겠다. 최소한의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현재 인디언들의 땅을 강탈한 이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미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방식이라고 한다면 십자군 전쟁도 역시 성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김 목사는 친미사대주의적인 발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남한과 미국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이유가 영적인 문제라고 설명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 많으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미국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하는 것으로 알고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세계 전체를 돌보는 나라”인(06.7.30) 미국정부에게 남한정부가 고분고분하지 않는 게 불신앙이라니, 이해하기 힘들다.
김 목사에게는 이스라엘도 역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민족이다. 유대인들에게 배울 게 많다는 그의 말은 원칙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접근 논리가 신앙적으로 건강하지 않다. 그는 이스라엘이 작은 나라이지만 세계의 정치, 경제, 학문, 예술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나열했다. 세계 굴지의 석유회사 일곱 개 중에 여섯이 유대인의 소유라고 한다. “여러분! 돈이 어디로 갑니까? 그쪽으로 갑니다.” 유대인들이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는 이유는 4천년 동안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07.8.26) 필자는 다른 대중 설교자들에게서도 흔하게 듣는 유대인 예찬론 앞에서 헛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열을 올리면서 칭찬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그들이 실제로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 세상 모든 권력을 손에 넣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분들이 바로 그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인들을 칭찬한다는 것은 일종의 코미디 아닌가.
지금 필자는 유대인들의 신앙이 무의미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들과 부단히 메시아니즘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가능한 대로 그들과 신앙적으로 대화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여기서 트집 잡듯이 유대인들의 신앙을 거론한 이유는 오늘의 대중 설교자들이 유대인들의 세속적인 성공을 바로 믿음의 열매와 직결시키는 잘못을 지적하려는 데에 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이다. 세속적인 성공과 힘이 진리라는 것이다. 이런 힘 앞에서는 예수도 없고 진리도 없다. 겉으로야 예수를 메시아라고 외치지만 내심으로는 미국과 이스라엘처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힘을 메시아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기회를 빌려 필자는 젊은 설교자들에게 메시아니즘 논쟁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접근하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메시아니즘은 구원론을 가리킨다. 우리가 전하는 구원의 현실(reality)은 무엇인가?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명제의 실질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너무 초보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가 이런 초보적인 질문마저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설교자의 위기이며, 한국교회의 위기이다. 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화두이다.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무엇인지,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믿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믿음과 신뢰는 어떻게 다른지, 믿음과 이성의 관계는 어떤지 설명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영혼 구원이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인간의 몸과 영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영혼은 불멸하는지, 아니면 부활하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름으로 고유하게 구원의 현실들을 제시하는 문학, 예술, 물리학 등등, 이 세상의 메시아니즘과 대화하고 논쟁할 수 있어야한다.
필자의 생각에, 이런 질문 앞에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최선으로 대답을 찾아나가는 것이 곧 신앙, 즉 영성이다. 이런 영성에 근거해서 우리는 이 세상과 선한 메시아적 투쟁을 벌여나갈 수 있다. 이런 영성이 없을 때 우리의 목회와 설교는 시나브로 세속주의에 빠져들고 말 것이며, 따라서 군대귀신이 들려 거라사 공동묘지에 살던 사람의 경우처럼 한국교회 안에 이미 성공주의, 영웅주의, 제국주의, 사대주의, 천민자본주, 교권주의라는 악령이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런 현상에 부화뇌동할지도 모른다. 오늘 누가 엑소시스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불안과 갈망
아쉽게도 지면 형편 상 김 목사의 설교를 전반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특히 설교구성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이 문제는 설교가 살아 움직이는가, 아니면 죽어 멈춰있는가 하는 것이다. 간단히 예만 들겠다. “십자가만 아는 사람”(2006년 4월9일)이라는 설교는 고린도전서 2:1,2절을 본문으로 한다. 김 목사는 설교의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 한 가지만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외쳤다. 설교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바울이 왜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겠다고 말했는지, 또한 우리가 현실에서 왜 십자가에만 집중할 수 없는지도 설명하지 않았으며, 십자가에만 집중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무엇인지, 또한 그 당시에 율법신앙과 십자가 신앙의 차이가 무엇인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필자는 지금 설교자가 성서텍스트의 신학적 깊이를 반드시 짚어야만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럴 능력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설교의 주제를 앞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설교는 단조로움을 피할 수 없다. 김 목사의 다른 설교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구조인데, 김 목사는 극적인 예화를 과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이런 단조로움을 극복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런 방식의 설교에서 그는 이미 일가를 이룬 셈이다. 위의 설교에서도 그는 베르사이유 궁전과 루이 14세 이야기, 엘비스 프레슬리, 귀금속 사기사건, 중매 이야기를 길게 늘려 전했고, 찬송가를 두 곡이나 불렀다. 이렇게 단조로운 설교가 여전히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예수 성공, 불신 실패” 구도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감안한다면 그런 방식으로라도 교회를 부흥시키면 좋지 않느냐는 주장이 가능하다. 필자는 그런 주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생각이 없지만, 그것의 한계만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 성공, 불신 실패” 패러다임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청중들은 두 가지 심리적 현상을 보일 것 같다. 하나는 이 세상살이에 대한 심한 불안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이루는 성공에 대한 갈망이다. 갈망은 불안을 잠시 외면하게 만들고, 불안은 갈망을 증폭시킨다. 이런 심리가 한 인격체에 내면화하면 그는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없고, 기독교 영성에 깊이 들어가기도 힘들다. 공연한 불안과 과도한 성공에 대한 집착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그것을 기독교 영성으로 착각하지 않을는지.
글을 마쳐야 할 이 순간에 필자는 마음이 약간 착잡하다. 김 목사는 누구든지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온화한 성품, 고매한 인격과 깊은 신앙, 더구나 어느 누구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목회 은사를 지닌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이기에 큰 기대를 갖고 설교를 살펴보았지만, 결과적으로 당신이 쌓으신 목회 역량에 훨씬 못 미치는 설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잘못 짚었다면, 넓은 마음으로 용서를 구한다. 부디 김 목사께서 섬기는 명성교회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일에 크게 쓰임 받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주의 은총이 모든 분들께!  <기독교사상 11월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