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 설교의 함정
-만리현 성결교회 이형로 목사-

이형로 목사님(이하 ‘이 목사’)이 2005년과 2006년에 행한 설교 14편을 텍스트로 읽거나 동영상으로 시청하면서 필자는 심리적으로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편안하다는 느낌은 기본적으로 나의 영성이 그의 설교에 공명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도 쉽지 않다. 어떤 경우는 공격받는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 어떤 경우는 허황하거나, 심지어는 속은 거 같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 목사의 설교가 표면적으로 대중을 사로잡을만한 카리스마를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청중들의 영성을 잔잔하게 울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는 전반적으로 매우 침착하게 설교한다. 감정적으로 크게 요동치는 일이 없다. 강조하는 대목에서 목소리의 톤이 높아지는 경우는 있어도 오버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아마 그의 내면세계가 그렇게 안정되어 있는 탓이리라. 이런 대목은 설교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웅변하듯이 목소리와 감정을 고조시키는 설교가 순간적으로는 청중들에게 어필하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안정적인 태도로 진행되는 설교가 훨씬 효과적이다. 그가 이렇게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설교를 끌고 나가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감정’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여러분! 라합이 가지고 있던 목숨을 건 믿음의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가요? 이 믿음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감정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중략>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확신은 내 감정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감정은 변하고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석으로 변하는 내 감정에 기초해서 내가 믿는다 하고 내가 확신한다고 하면 내 감정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고 확신이 흔들려서 축복을 받지 못하지만 ... .,. 바뀌지 않는 사실에 근거를 둔 믿음과 확신은 영원합니다.(2006년 1월15일 설교 “확신을 가지고 전진하라.” 중에서. 이하 연과 월일만 숫자로만 표기)

이 목사는 영혼의 심층에서 울려나는 존재론적 음악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예술가처럼 믿음이라는 사실에 집중해서 설교한다. 그런 설교자는 공연히 흥분해서 열을 올릴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청중들에게 감정적인 접근을 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영적인 세계에 포착되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라는 사실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런 설교는 청중들의 이성을 자극하고, 더 나아가 건전한 영성을 자극하기 때문에 청중들의 내면세계에 평화를 제공한다.  
필자가 그의 설교에서 영적인 평안, 혹은 평화를 느낀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그가 신앙의 근본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접한 설교에서 그는 십일조 헌금을 비롯해서 헌금에 대해서 한 번도 강조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설교 시간에 신자들을 책망하는 법이 없다. 신자들을 닦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설교에서 헌금과 책망이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런 것들이 설교의 중심에 자리할 수 없으며, 특히 케리그마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서는 최대한 자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요소들은 신앙의 결과일 뿐이지 신앙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목사는 기독교 신앙으로 사는 게 무엇인지, 고달픈 인생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는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보석처럼 연마하는 설교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야기 식 설교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감정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해서 찬찬히 풀어가면서 청중들을 설득해가는 그의 설교는 일단 필자의 눈에 건강해보였다. 이런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소중한 가르침을 받는다고 느낄 것이다. 이를 멘토(mentor) 영성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 목사의 설교를 큰 틀에서 윤곽을 잡았지만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야겠다. 이 분석은 기본적으로 그의 설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이런 멘토 영성의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의 가장 우선적인 대답은 그의 설교가 ‘내러티브’(narrative), 즉 이야기 식의 특징을 그대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설교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한결같다. 그는 말 그대로 청중들과 이야기하듯이 설교한다. 친구나 연인, 또는 자상한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그는 상대방에게 편안한 마음이 들도록 이야기하는 설교자이다. 마음의 문이 닫힌 청중이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정신이 번쩍 드는 법이다. 우선 형식적인 부분으로부터 시작하자.
이 목사의 설교 어투는 두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그의 어투는 명령형이 아니라 설득형이다. 예컨대 2005년 3월27일 “나는 승리했노라.”(요 20:1-10)는 설교의 한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 부활이야말로 예수님에게, 우리에게 영원한 적이었던 그 세 가지 적, 죄와 죄책과 죽음에 대한 승리인 줄로 믿으시기 바래요.

아마 다른 설교자였다면 “믿으십시오!”하고 말았을 텐데, 이 목사는 “믿으시기 바래요.”하고 말한다. “ ... 하시기 바래요.” 하는 어투는 그의 설교 어느 곳에서나 지천으로 발견된다. 이런 어투가 일반대화에서도 나오는 이 목사의 습관인지, 아니면 설교 행위에서만 나오는 특별한 표현방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대상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담겨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청중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안내하는 멘토라는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긴 하다. “사실 목회자는 명령이 필요한 것이지 사정하거나 부탁하거나 ... 이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제가 하도 점잖아 가지고 뭐뭐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하십시오.’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하십시오.”(06.1.8) 그러나 그는 천성적으로 청중에게 명령하거나 강요하는 사람이 못된다. 이런 점들이 오히려 그의 설교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둘째, 그의 설교에는 의문문이 놀랍게 자주 등장한다. 이 부분도 청중들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설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현상인지 아니면 이 목사의 개인적인 캐릭터인지 필자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또한 청중들을 향해서 거의 반복적으로 질문하는 이런 방식의 설교패턴이 옳은지 아닌지도 설교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는 말할 입장이 못 된다. 다만 그의 이러한 어투가 매우 효과적으로 청중들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설교에서 의문문 형식의 어투는 앞에서 언급한 설득형의 어투보다 훨씬 자주 등장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라.

축복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두 번째 방해물이 무엇인가요? 연약함입니다. 두려움이 어디에서 오나요? 연약함에 옵니다. 강한 사람들은 두렵지 않습니다. 자기가 강하면 무엇이 두려운가요?(06.1.8)

반복적인 의문형의 어투는 때에 따라서 설교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위험 요인도 된다. 그러나 이 목사의 경우에는 전체적인 설교형식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그런 위험 요소가 극복된 것 같다. 약간 다른 뉘앙스이지만 그의 어투에 수동형이나 수동의 반복형이 예상 외로 자주 나오는데, 이건 명확한 문장으로 바꾸는 게 좋다. 예컨대 “여호수아 1장 말씀에 기록돼 있음을 보게 됩니다.”(06.1.1)는 “기록되어 있습니다.”로, “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어지고”(06.4.16)는 “해결됩니다.”로 표현해야 한다.
이 목사는 위에서 말한 어투에서만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청중과의 소통에 큰 비중을 두는 설교형식을 취한다. 그는 영상을 적절하게 사용한다. 설교 도중에 필요한 성구나 요약된 본문을 프로젝터로 보여주면서 설교를 끌어간다. 그가 사용하는 예화도 청중들에게 매우 친근하게 다가간다. 예컨대 캘리포니아 주민을 대상으로 한 연구조사에서 나온 통계치를 이렇게 인용했다. 교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다. 튜크대학교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혈압 수치에서도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온 노인들이 그렇지 않은 노인들에 비해서 정상 수치에 훨씬 가깝다고 한다. 수술 후 회복기간에 대한 조사, 우울증에 대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이런 통계수치를 통한 예화들은 청중들의 일상적인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에 설교의 설득력이라는 점에서 매우 효과가 높은 것이다. 그 이외에도 이 목사가 제공하는 예화들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현실적인 것들이 많았다.  

전도설교
위에서 짚은 대로 필자의 생각에 이 목사의 설교는 청중들과의 소통에 무게를 둔 이야기 식 설교이다. 물론 설교는 기본적으로 청중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청중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설교자는 없으며, 또한 설교는 말로 전달되기 때문에 나름으로 이야기 식으로 전개되지 않는 설교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설교가 이런 특징으로 분류되는 건 아니다. 청중과의 소통은 접어둔 채 설교자 혼자서 권위적으로 설교하는 경우도 흔하고, 신학 에세이나 논문처럼 ‘내러티브’보다는 개념에 중심을 둔 설교도 있다. 이 목사의 설교는 이런 점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소통과 이야기라는 특징이 있다.
이런 특징이 설교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가 행하는 설교 내용은 거의 초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전도설교이다. 이런 설교와 내러티브 설교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만, 필자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의 설교가 청중들과의 소통에 무게를 두기 때문에 설교의 내용도 역시 청중들의 눈높이에서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그는 무슨 설교를 하든지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전하는 데 치중한다. 2005년과 2006년의 부활절 설교를 간단히 요약하겠다.
이 목사는 2005년 3월27일 부활절에 “나는 승리했노라”(요 20:1-10)는 설교를 했다. 그는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부활절 전승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자신의 신학적 해석을 곁들이지 않고 성서의 진술을 그대로 전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무덤 속에 놓여있는 예수의 수의가 바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예수의 부활은 세상의 역사를 바꿔놓았으며, 개인의 생애도 바꿔 놓았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고 하면 우리가 죽어서 묻히는 무덤은 우리의 최종 거주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기에 우리가 살다 죽어서 묻히는 무덤은 우리의 최종 거주지가 아니라 임시 체류지가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래요.” 그는 결론적으로 부활의 생명에 대한 은혜에 응답하는 길을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다. 그는 이날 복잡한 말을 하지 않았다. 예수 부활의 확실성과 그것에 근거한 우리 부활의 확실성, 그리고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의 태도인 감사와 충성이 그것이다.
2006년 4월16일 “꼭 예수를 믿어야 하는 12가지 이유 (1)”(요 11:17-27)라는 설교는 세 주간에 걸친 연속 설교의 첫 번째 설교이다. 죽어 장사 지낸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집에 들르신 예수가 마르다와 나눈 대화가 성서본문의 내용이다. 이 목사는 이 날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그는 7,80년에 불과한 이 땅에서의 삶에 비해 영원한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매우 극적으로 설명해나갔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영원을 살게”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둘째, 예수를 믿어야 죄 사함을 받는다.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평안, 영광, 건강, 소망, 구원, 영생이라는 열매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또박또박 설명했다. 셋째, 예수 믿으면 병 고침 받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병에는 육체적인 것도 있고 마음에 속한 것도 있고, 더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것도 있는데, 그 모든 것이 건강해진다. 그는 청중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으므로 여러분 모두 영생을 얻기 바랍니다. 영원히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죄 사함 받기 바랍니다. 죄 사함 받고 나면 우리의 삶에 풍성한 좋은 열매들이 많이 맺혀서 우리의 삶이 부유해집니다. 풍성해집니다. 그리고 병 고침 받고 이 땅에 사는 동안도 예수 믿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몸도 마음도 영혼도 정신도 가정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축복이 함께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요약만으로 그의 설교가 독자들에게 충분하게 전달될 수는 없겠지만, 필자의 눈에는 그의 설교가 조선반도에 처음으로 복음을 들고 온 초기 선교사들이나 조선의 1세대 설교자들이 행한 설교처럼 들렸다. 가장 원초적이고 단순한 복음의 내용으로 채워진 설교이다. 이 목사는 말 그대로 순전한 복음에 천착하는 설교자이다. 우직하게 보일 정도로 그는 복음의 기초와 진수에만 골몰하고 있다. 설교자의 주관적인 간증과 해석이 범람하는 오늘의 강단 풍조에서 볼 때 이 목사의 설교는 마치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파묻혀 살다가 모처럼 예쁘게 단장하고 나선 시골처녀와 같다. 비유가 적절했는지 모르겠는데, 설교의 순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었으니까 이해를 바란다.
그런데 설교에 비해서 목회는 놀랍도록 진취적이고 화려하다. 2006년 교회 표어는 “우리는 축제예배로 간다. 우리는 구역교회로 간다!”였다. “34비전”도 야무지다. 3천명의 신자, 300명의 평신도 목회자, 30억 비전센터, 3개 교회개척이 그들의 꿈이다. 3으로 시작한 4가지 목표이다. 이런 비전이 현실로 다가올 날이 차츰 다가오는 것 같다. 오늘의 만리현 교회는 성결교회 중에서 모범사례가 될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05년 4월13일 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만리현교회에 관한 보도를 보면 이 목사가 만리현 교회에 부임한 1994년 이후 10년 동안 장년 신자가 350명에서 900명으로 늘었다. 만리현 교회의 활동은 지역교회에 밀착되어 있다. 교회가 위치한 곳이 전형적으로 낙후된 지역이기 때문에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방과 후에 방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만리현 교회는 이 아이들을 위한 ‘방과후교실’을 운영하고, 독서교실, 코스영어, 음악학교 등 지역과의 일치를 위해서 교회당을 전방위적으로 개방하고 있다. 인근의 홀몸노인들과 소년소녀가장, 장애우들을 꾸준히 도와주고 있으며, 매주 수요일마다 경노당과 효창공원의 노인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수지침을 놓아드리거나 치매예방을 위한 종이접기를 실시하기도 한다. 이 목사의 순수한 설교와 열정적인 목회가 교회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가지치기 식 설교
오늘 필자가 처한 입장이 좀 난처하다. 내러티브 설교의 한 전형을 보이면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내고 있는 이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필자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만리현 교회가 지역 공동체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지켜내고 있는 마당에 말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사족으로 전락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한 채, 딴죽걸기라는 욕을 먹을 각오로,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을 합해서 선을 이루시는 성령에게 의지하는 마음으로 그의 설교에서 맛본 아쉬운 대목을 간략하게나마 제시해야겠다. 이것은 곧 내러티브 설교가 빠지기 쉬운 함정에 대한 설명이다. 물론 이런 함정이 반드시 내러티브 설교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관성이 높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필자는 이 목사가 실제로 그런 함정에 갇혀 있는지, 아니면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청중들을 배려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인지 판단할 수 없다. 다만 필자가 생각하는 그 함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설교가 너무 길다. 40분이라는 시간도 그렇긴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설교의 흐름이 그렇다는 뜻이다. 그의 설교는 질질 끌린다는 느낌이다. 아무리 순수한 설교라고 하더라도 진부하다고 느끼게 되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는지. 그의 설교가 필자에게 그렇게 전달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의 설교는 하나의 관점으로 집중되는 게 아니라 가지치기 식으로 분산된다. 전체 설교를 서너 가지 작은 주제로 나누고, 그 작은 주제를 또 다시 서너 가지 소주제로 나누기도 한다. 소위 대지소지 식의 구성이다. 이렇게 되면 청중들은 지금 전체적으로 무엇을 듣고 있는지 그 맥을 놓치기 쉽다. 예를 들어 2005년 9월4일 설교 “내 눈을 열어서 무너진 것을 보게 하소서”(느 1:1-11)에서 이 목사는 느헤미야가 처한 역사적 배경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삶과 교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찾아서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신앙적 태도를 그는 네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바르게 질문하는 것이다. 그 뒤로 이 목사는 4절에 나오는 일련의 동사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필요한 항목들을 나열했다. 둘째, 울며 슬퍼하는 것이다. 셋째, 기도이다. 여기까지는 이 목사의 설교 패턴이니까 그렇다 하고, 그가 세 번째로 제기한 기도 문제를 또 다시 네 가지 소주제로 가지치기를 했다. 즉 올바른 기도의 자세는 첫째로 찬양, 둘째로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 셋째는 회개, 네 번째는 간구이다. 설교가 옥상 옥처럼 구성되고 있다. 이렇게 올바른 기도의 조건을 네 가지로 설명한 다음에 다시 전체 주제로 돌아가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기 위한 마지막 네 번째 요소를 헌신이라고 제시했다.
그가 대지와 소지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들을 보라. 질문, 회개, 기도, 헌신, 찬양, 위대한 하나님, 회개, 간구, 헌신이 필요에 따라서 순서만 바뀌고 있다. 그의 다른 설교에서도 이런 용어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가 나열하고 있는 각각의 신앙 용어들은 제 각각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모두 담고 있는 것들이다. 그중에서 하나만 붙들고 씨름한다고 하더라도 3,40분의 설교시간이 부족한 마당에, 그 모든 것을 한 설교에서 다루고 있으며, 서로 중복되고 있으니 장황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내러티브 설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성서 언어의 심층적인 세계로 들어가지 않은 채 흡사 ‘돌려막기’ 식으로 설교를 끌어가는 방식 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설교학에서 언급되는 내러티브 설교가 무조건 이런 함정에 빠지는 건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야기 방식에 무게를 두다보면 이런 개연성에 노출되기 쉽다.
이런 현상은 비단 이 목사의 설교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성서와 신앙 언어를 생각 없이, 즉 해석학적 과정 없이 쏟아내는가? 필자가 보기에 오늘 한국교회 강단의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신앙언어의 인플레이션과 형해화! 창조, 영생, 기도, 종말, 사랑, 희망, 믿음, 구원, 실존, 칭의, 성화 등등, 이런 신앙 언어 안에 놓인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지 않은 채 그걸 적절하게 배열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한다. 설교의 차이는 다만 감동적인 예화,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입담, 또는 설교자의 인격에 있을 뿐이다. 매주일 설교제목과 본문은 바뀌지만 내용은 늘 “그 시절 그 노래”에 불과하며, 수많은 설교자들의 설교가 ‘붕어빵’처럼 닮았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교회 강단의 이런 현상은 신자들에게는 불행이고, 설교자에게는 비극이다.  
신앙언어의 심층으로 들어가지 않고 슬쩍 건드리는 방식으로 설교한다고 해도 목회에는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조금 심하게 말해서, 한국교회 신자들은 가벼운 종교적 욕구를 건드려주는 방식의 목회와 설교에 길들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자의 영성은 그런 방식으로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다. 예컨대 설교자가 창조의 영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단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외치는 것으로는 도저히 영적으로 만족할 수 없다. 설교자의 영성은 신탁(神託)에서만 보존된다. 그건 깊이의 영성이지 높이의 영성이 아니다. 그건 존재의 차원이지 소유의 차원이 아니다. 목회의 성과와 전혀 상관없이, 오직 성서의 영적인 깊이에서 존재론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영성이다. 만약 이런 영성 없이 설교자로 활동하면서도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를 속이든지 아니면 기독교 영성의 깊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지금 필자가 도사 연 했다면, 용서를 바란다.  
한편의 설교를 더 예로 들어야겠다. 2006년 4월23일의 설교 “꼭 예수를 믿어야 하는 12가지 이유(2)”는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를 걸어오신 사건을 본문(요 6:16-21)으로 한다. 지난주에 이은 연속설교인 탓에 그는 네 번째 이유부터 열거해나가기 시작했다. 넷째,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다섯째, 예수를 믿으면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 여섯째, 예수를 믿으면 축복을 받는다. 일곱째, 예수를 믿으면 형통함을 얻는다. 그는 이 설교에서 성서텍스트를 거의 무시했다. 네 가지 요인 중에서 앞의 세 가지 요인에 관련된 성구는 다른 데서 인용했고, 마지막 요인만 호수 위를 걸으신 본문으로 설명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기적적인 사건으로 해명하고 있는 본문을 형통의 원리로 제시한다는 것도 정당한 성서해석은 아니다.
이 목사는 성서텍스트의 변죽만 울리면서 부단히 설교를 옆으로만 확대재생산하고 있었다. 다섯 번째 이유로 제시된 ‘기도의 응답’이라는 주제는 이미 한편의 설교로 담아야할 정도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여러 대지 중의 하나로 삼은 채 기도의 응답을 받는 사건들을 성서전체에서 끌어들이고 있었다.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 15년 생명 연장을 받은 히스기야, 옥에서 벗어난 바울, 비를 몰고 온 엘리야 등이다. 이런 방식으로 설교를 끌어가기 시작하면 설교자는 성서텍스트와 씨름할 필요 없다. 성구사전 한권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성서가 한낱 소품처럼 취급되는 이런 설교를 만날 때마다 필자는 설교허무주의를 맛본다.  

찬송가 설교?
이 목사의 설교에서 성서텍스트가 소품 정도로 취급된다는 사실은 2006년 사순절 기간에 행한 찬송가 중심의 설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3월5일 주일에 그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를 본문으로(마 26:36-46) “주님을 생각할 때에”라는 설교를 했다. 그는 성서본문은 접어둔 채 찬송가 510장 “겟세마네 동산의”라는 찬송가 가사를 중심으로 설교했다. 찬송가 1절은 함께 부르고, 2절은 성가대에서 찬양하고, 3절은 탁용수 전도사가 독창으로 부르고, 4절은 현악팀이 연주하면서, 그야말로 은혜로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시간이 기도원에서 개최한 신앙수련회였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주일공동예배라는 사실 앞에서 필자는 뭔가 찜찜했다. 그에게는 성서기자들의 하나님 경험에 대한 진술보다 찬송가 작사자들의 영성이 더 뛰어나다는 말인가?
3월12일의 설교는 마태복음 11:28-30절을 본문으로 한다. 그렇지만 이 목사는 크로비가 작사한 찬송가 321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를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했다. 성서본문은 주마간산 격으로 한번 짚었을 뿐이다. 그는 왜 성서텍스트 없이 설교하는가? 대답은 한 가지 밖에 없다. 성서를 하나님의 은폐된 계시사건이 아니라 단순한 정보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주간에 걸쳐서 찬송가 설교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의 말은 성서실증주의에 불과한 것 같소, 신자들이 은혜를 받으면 됐지 성서에 묶일 필요가 있겠소,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성서실증주의와 은혜지상주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하다. 이렇게 내 입장만 변호하는 것으로 정리하자.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우리는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서)라는 신학적 슬로건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간혹 기독교 역사에서도 성서보다는 개인 신앙의 경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때가 있었지만, 결국 기독교는 성서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성서의 해석인 신학을 통해서 성서의 깊이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 없이 신앙체험을 강조하거나 청중들의 은혜나 목회의 효율성을 강조하기 시작하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길을 잃는다. 대개의 사이비 이단들의 단초가 바로 성서 중심으로부터 체험과 은혜 중심으로 치우치는 것이었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목회, 은혜, 교회는 모두 성서의 하부구조이다.
글머리에서 필자는 이 목사의 설교가 내 영혼을 평안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목회자요 설교자로서 이 목사에 대한 필자의 기본적인 신뢰는 분명하다는 뜻이다. 위에서 필자가 제기한 몇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서 그의 설교 전체가 훼손되는 건 아니며, 더 근본적으로는 필자의 비평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부분에서 오해가 없기를 바라고, 독자들께서 필자의 중심을 헤아려주기 바란다. 앞으로 만리현 교회가 이 목사를 중심으로 말씀과 삶에서 더욱 풍요로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활천> 200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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