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텍스트의 침묵과 도그마티즘
-충신교회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홈페이지를 통해서 박종순 목사(이하 ‘박 목사’)께서 최근에 행한 설교를 시청한 필자는 이전에 박 목사의 설교를 직접은 물론이고 방송을 통해서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는데도 그의 목소리가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다는 사실 앞에서 약간 놀랐다. 간혹 처음 본 사람인데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처럼 박 목사의 목소리도 그런 것일까? 기억을 되살려보니 그 목소리는 필자가 기독교 방송을 즐겨 듣던 젊은 시절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그 당시에 박 목사는 매주 월요일마다 기독교방송의 “새롭게 하소서” 시간에 신앙상담을 맡고 있었는데, 필자는 박종순이라는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한 것이다. 목사 중에서도 저렇게 감칠맛 나는 음색을 가진 분이 있다니 하고 내심 부러워한 것 같다.
박 목사의 목소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필자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목소리 자체만이 아니라 매우 뛰어난 말솜씨에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말이 표현해낼 수 있는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언어구사 능력을 갖고 있다. 우선 구음이 명확하다. 발음이 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마치 고도의 테크닉을 지닌 바이올리니스트의 주법처럼 그는 노련하고 정확하게 발음한다. 그뿐만 아니라 말의 장단고저가 서편제 기능보유자의 그것처럼 깊고 화려하다. 그는 혹시 그런 훈련을 특별하게 받은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훈련으로 습득된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타고난 것에 가깝다. 더구나 그가 풀어내는 신앙상담의 내용이 매우 신중하고, 현실적이고, 건전했으니 어찌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번에 동영상을 통해서 들은 박 목사의 설교에서도 이러한 그의 진가는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설교 내용은 둘째 치고 귀에 들리는 그 소리 자체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천상유수라는 뜻이 아니다. 많은 것을 쏟아내는 달변도 아니다. 최소한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최대한의 효과를 얻어낼 줄 안다. 젊은 설교자들은 박 목사의 이런 설교행위에서 배울 게 많을 것 같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같은 내용으로 높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배우지 않겠는가. 그를 흉내 내라는 말이 아니다. 밖으로 내놓는 언어와 말하는 주체가 어떻게 일치되고 있는가를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희년에 부르는 보혈의 노래

그 옛날 존경하던 고향의 어르신을 만난 것 같은 기쁨으로 필자는 금년 첫 주일인 1월7일에 행한 설교를 들었다. 충신교회는 금년(2007년)에 희년을 맞는다. 정확하게 1957년 2월3일 충신교회가 시작되었다. 그 뜻을 기려 박 목사는 이 날 “제 50주년, 희년을 선포하라.”(레위기 25:8-12)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박 목사는 레위기 본문에 근거해서 희년 사상이 담고 있는 의미를 핵심적으로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해방(자유)이다. 나팔로 시작되는 희년에 모든 노예들이 해방을 맞는다. 희년의 현대적 의미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예를 그는 링컨에게서 찾았다. 링컨이 노예 소녀에게 자유를 주자, 그 소녀는 이제 링컨을 기꺼이 주인으로 섬기기 시작했다. 이 소녀는 이제 의의 종이 된 것이다. 구약의 종들은 희년에 해방되었지만, 신약의 종은 예수의 십자가로 자유를 얻었다. 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좋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감사하시면 큰 소리로 아멘 하십시오!” 하면서 청중들의 아멘을 끌어냈다. 다른 하나는 바른 삶을 선포하는 것이다. 땅을 쉬게 해야 하며, 저절로 열린 곡식은 배고픈 사람들과 짐승들이 먹을 수 있도록 주인이 거두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희년은 사람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14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박 목사는 매매 관계에서 ‘속이지 말라!’고 강조했다. 경제정의와 공정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희년 설교는 일단 방향이 잘 잡혔다. 해방, 자유, 정의, 평화가 곧 희년에 담긴 기본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을 예수의 구원 사건과 연결시킨 것도 주일 공동예배의 설교가 기본적으로 케리그마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설교를 모두 듣고 난 뒤에 무언가 허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별로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기본적인 방향도 그런대로 괜찮을 뿐만 아니라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호소력이 넘치는 목소리로 전달된 설교인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영적 공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박 목사는 그날 레위기에 적시된 몇 가지 원칙만 던진 채 신자들의 개인적인 신앙에만 관심을 기우였을 뿐이지 성서의 세계 안으로 치고 들어가지 않았다. 희년은 기본적으로 안식일에 근거한 종교법이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은 모두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사회구조적 강제규정이다. 안식일에 노예까지 쉬게 하라는 모세 법은 공산주의 못지않게 혁명적이고 변혁적이다. 인간과 동물과 자연까지 모든 체제가 원상 복귀해야 한다는 안식년 법과 희년 법은 오늘 자본과 경쟁력 중심으로 작동되는 이 사회를 향한 통렬한 비판이며 대안이다. 설교자는 우선 성서텍스트가 말하는 그 희년의 역사적 실체 안으로 좀더 깊이 들어가야 하며,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필자는 그의 설교에서 그런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그날 해방과 자유라는 구호만 몇 번 외치고 설교를 끝냈다. “따라 하세요. 나는 자유인이다. 나는 해방되었다.” 이런 설교를 듣고 내 영혼이 어떻게 반응할 수 있단 말인가.
성서의 영적인 깊이로 들어가지 않은 채 구호만 외치는 방식으로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과의 소통은 가능하지 않다. 설교자 스스로 이러한 영적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탓인지 박 목사는 그날 설교 후반부를 이상한 방식으로 끌어갔다. 청중들을 모두 일으켜 세운 채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라는 복음찬송을 부르게 했다. 중간에 특유의 감성적인 멘트를 날리면서 두 번 반복해서 부르게 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다시 두 손 들고 부르게 했다. 사회변혁의 영성이 개인의 실존적 영성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요즘 박 목사는 설교 시간에 복음찬송을 자주 부르는 것 같다. 2월4일 주일에도 위와 똑같은 “보혈을 지나”라는 복음찬송을 불렀다. 3월4일의 설교 중간에는 초등학교 때 어머니에게 혼이 난 예화와 더불어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이라는 복음 찬송을, 물론 두 손 들고 부르게 했다. 그날 그는 30분 길이의 설교에서 예화와 복음찬송으로 10분을 소비했다. 박 목사의 노래실력은 대단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음악선생님이 성악가가 되라고 한 게 빈말이 아니다. 그의 목청만 듣는다면 누가 원로급 목사라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전문적인 찬양사역자보다 오히려 윗길로 보였다. 그렇지만 청중들에게 은혜롭다고 해서 모든 게 허용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주일공동예배에서 복음찬송 부르기가 왜 문제인지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한 마디만 하자. 박 목사가 선택한 종류의 복음찬송은 거의 대부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통치와 존재 신비는 간 곳 없고 단지 청중들의 감수성에만 호소하는 노래들이다. 단순한 가사의 반복과 사람의 감정만 자극하는 노래들은 예배에서, 특히 주일공동예배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청중들이 그런 복음찬송에 은혜를 받는데 어떻게 하냐, 하고 현실론을 제기할 분들이 계실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신비와 거룩성을 상실한 채 청중들의 감성적 요구에만 눈높이를 맞추는 은혜 만능주의는 곧 한국개신교회의 영적 위기이다.
예배와 설교가 엄숙주의와 본질주의에 빠져도 괜찮다거나, 감성적인 접근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성서말씀의 깊이를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설교의 영적 무력증을 감추기 위해서 청중들에게 신앙 구호를 따라하게 하거나 복음찬송을 부르게 하는 방식을 문제 삼은 것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설교의 외적인 요소들만으로 청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노하우를 확보한 설교자들은 말씀의 깊이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으며, 또한 말씀의 깊이를 모르기 때문에 다시 청중들에게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런 능력을 본인들은 귀한 은사로 생각하겠지만, 설교 외적인 은사가 결과적으로 설교 내적인 은사를 말살하고 만다면 불행한 일이다.
사실 박 목사는 필자가 제시하는 문제점을 모두 일소에 붙이고도 남을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명설교자이다. 그는 매년 설교집을 냈다. 지금까지 24권이 나왔다. 그것도 모두 양장본이다. 출판되는 설교집마다 여러 쇄가 찍히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 같다. 그는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유명 설교자 45명의 설교를 비평한 <한국교회의 설교를 조명한다> 1,2권을 출판했으며, 현재 한국강해설교학교 교장으로 활동한다. 특히 금년 4월8일 새벽 5시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리는 “2007 한국교회부활절 연합예배” 설교자로 선정되셨다고 한다.
지금 필자는 난감하다. 설교 부분에서 일가를 이루신 박 목사의 설교가 내게는 “영 아니올시다.”로 들렸다는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간다는 말인가. 좌고우면 없이 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이제 필자는 문자로 기록된 그의 설교를 조금 더 세밀하게 추적하려고 한다. 전체 설교집을 읽기는 힘들고, 다섯 권으로 줄였다. 제15권 <달음질 하는 사람들> 1997년, 제16권 <손들고 이긴 사람들> 1998년, 제17권 <나눠주는 사람들> 2000년, 제23권 <웃고사는 사람들> 2005년, 제24권 <예수를 만난 사람들> 2006년이 그것이다. 실제로 설교가 행해진 것은 출판 연도 한 해 앞이라는 사실을 참고하기 바란다.(이하 인용할 경우에 권수와 쪽수만 표기)

근심 퇴치법

박 목사가 출판한 설교집 스물 네 권의 제목에는 특징이 있다. 소위 ‘사람들’ 시리즈이다. 2권과 4권만 제외하면 나머지 22권이 모두 “ㅇㅇ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런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의 설교는 거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설교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의 선포이니까 사람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설교자가 사람에게 관심을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그는 성서텍스트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며, 거꾸로 말씀과 하나님에게 영혼을 빼앗겨야 그는 사람을 진정으로 살리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글의 진행에 따라서 밝혀질 테니까 그냥 접고, 박 목사의 설교 안으로 들어가자.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는 48편의 설교가 들어 있다. 필자가 보기에 거의 모든 설교가 성서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사람들과의 대화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성서본문의 표면에 드러난 사실을 간단히 제시한 후 재빨리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이야기로 빠져든다. 이게 필자가 그의 설교를 듣거나 읽으면서 짜증스러웠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다. 거의 모든 설교가 그런 식이었는데, 그 중에 “근심 퇴치법”(마 14:22-33)이라는 설교를 보자.
성서본문은 깊은 밤, 파도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제자들의 배로 예수님이 걸어왔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빠지는 순간 예수님이 그를 붙잡아주었고,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는 이야기이다. 박 목사는 남편의 사업이 부도 맞고, 아들은 폭행죄로 구속되었으며, 실연당한 딸은 자살미수를 저지른 탓에 불면증에 시달리는 어떤 부인의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했다. 이 부인은 점쟁이를 찾아갔지만 돈만 쓰고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으며, 절에 가서 불공드리는 일도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친구의 주선으로 용한 도사를 찾아갔더니 교회를 찾아가라고 해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 뒤로 일이 잘 풀려 남편은 사장, 아들은 상무, 딸은 더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1남1녀를 낳았다고 한다. 박 목사는 예수가 고통과 근심을 모두 해결하시고, 죄도 해결하신다는 뜻으로 이런 이야기를 길게 전했다.
이어서 그는 본문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해석한다기보다는 나름으로 그 의미를 찾기 시작했는데, 전체적으로 세 단락으로 구분된다. 첫 단락은 제자들이 배를 타고 풍랑을 만난 이유는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중요한 것은 “주님이 계시느냐”이다.(24/303)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박 목사는 미국 볼티모어 오리올스 야구팀 선수인 새미 소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구두닦이를 하던 그에게 미국인 사업가가 야구 장갑과 방망이, 야구공을 선물로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그는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인생이 변한다는 사실이 이 대목에서 그가 전하는 핵심이다.

하물며 우리는 나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 영이 변하고, 내 삶이 변하고, 내 환경이 변하고, 내 신분이 변했습니다. 야구선수 소사가 연봉 1,800만 달러 받는다고 부러워하지 맙시다. 1조8천억 달러를 주고도 살 수 없는 생명을 받았고 천국을 얻었습니다. 이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면 사람 자격이 없습니다.(24/304)

두 번째 단락은 베드로의 의심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모두 의심에 싸여 살아간다는 사실을 아담과 하와 가정을 예로 들어 전했다. 그는 의심하지 말고, 믿고 따르자고 권고했다. “남편을 의심하고, 아내를 의심하고, ... 지도자를 의심하는 것은 결단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24/305)
세 번째 단락은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는 것이다. “바람이 그쳤다는 것은 근심이 그쳤다는 것”이다.(24/306)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는 것이 곧 가장 효과적인 근심 퇴치법이라고 한다. 박 목사는 이를 변호하기 위해서 존 맥스웰이 쓴 <자기 경영의 법칙>이라는 책의 한 토막을 소개했다. 맥스웰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기도가 초기 교회에 성령의 불을 붙였다고 했다. 이처럼 세상도 “한 사람 예수님에 의해서 바뀌었고, 바뀌고 있고, 바뀌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만이 해결의 열쇠이고 방법이라는 것이다. 박 목사는 다시 월간잡지 <한길>에 실린 이야기를 소개했다. 어느 목사가 교회당 건축 중에 재정이 모자라 중단한 채로 있었다. 동네 사람이 찾아와 동네 미관에 지장을 준다고 불평했고, 목사는 재정 형편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불쾌한 표정으로 돌아간 그 사람이 다음날 찾아와 돈을 내놓으면서 교회 건축을 마무리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주님이 문제와 근심을 해결하신 간증인 것입니다.”(24/307) 결론은 다음과 같다.

누가 근심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트로트 가수가 부른 노래 구절처럼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차차차” 한다고 근심이 달아납니까? 대통령 담화나 정치인이 만든 정책으로 문제가 해결됩니까? 갈등과 침체, 분열과 긴장, 걱정과 근심을 퇴치하고 푸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이 해답, 예수님이 열쇠, 예수님이 방법, 예수님이 완성! 그렇습니다. 아멘입니다.(24/307)

독자들은 오늘의 본문으로 ‘근심 퇴치법’이라는 설교가 가능하다고 보시는지. 멀리 돌아간다면 이런 설교를 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런 식이라면 ‘물에 빠지지 않은 법’이라는 설교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 본문의 핵심은 33절이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초기 기독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바람과 파도마저 그에게 굴복하는 사건에서 믿었으며, 그것을 변증하려고 했다. 여기서 근심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구나 우리가 근심을 퇴치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다. 그가 서론에서 예로 든 것처럼, 절박한 상황에 빠진 어떤 부인이 예수 믿고 모든 게 좋아졌다는 식의 삶을 반복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성서 시대 사람들이 폭풍 제어 사건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경험했다는 사실을 역사 비평적으로 따라가는 게 우선 중요하다. 그 다음에 오늘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으며, 또한 이 시대에 어떻게 변증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모두 생략한 채 “예수님이 해답, 예수님이 열쇠, 예수님이 방법, 예수님이 완성! 그렇습니다. 아멘입니다.” 하고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끝나는 설교 앞에서 청중들은 습관적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보일지 몰라도 성서텍스트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웃음 건강학

<웃고 사는 사람들>의 제호로 채택된 설교를 보자. 성서본문은 그 유명한 구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가 포함된 시편 126:1-6절이다. 야훼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고 희망하는 이들이 감격스럽게 부르는 찬양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포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그 믿음으로 그들은 지금 찬양과 함께 제사를 드리는 중이다. 이 시인은 그 감격을 울며 씨를 뿌린 사람이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묘사했다. 아튜어 와이저는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시는 단조롭지만 가치 있는 정취를 풍겨주는 하나의 값비싼 보석과 같다. 믿음에 기초를 둔 희망, 즉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신뢰에 바탕을 둔 희망의 부드러운 정신세계가 이 시 전체에 파급되어 있다.”(국제성서주석 16-2, 452)
박 목사는 이 시편을 본문으로 “웃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기쁨은 웃음으로 표현되니까, 그리고 본문에 웃음이라는 낱말이 있으니까 제목 자체는 탓할 게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 주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보면 그가 성서기자의 영성에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 입에 웃음이 가득하고”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고 하면서 “한 마디로 마음이 편해야 얼굴도 편하고 웃을 여유도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웃음을 잃은 시대에 우리는 억지로라도 웃어야 한다. 왜냐하면 웃어야 할 이유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교의 문을 연 다음, 박 목사는 세 단락으로 설교를 구성했다.
“첫째, 왜 웃어야 합니까?” 박 목사는 시편기자의 웃음과 기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다짜고짜로 노만택 씨의 <웃음건강학>에 소개된 몇 가지 웃어야 할 이유를 소개했다. 예컨대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의 상처가 빨리 아문다고 한다. 여성들의 경우에 웃음은 돈 안 드는 화장이지만 울음은 화장을 망가트리는 애물단지라는 것이다. 원광대 김 아무개 교수가 100세 이상의 건강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조사도 공개했다. 그것은 금연, 31인치 이내의 허리둘레, 스트레스가 없는 낙천적인 성격, 즉 웃고 사는 것 등등, 여섯까지의 요인이 건강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박 목사는 웃어야 할 이유를 줄줄이 사탕 식으로 이어갔다. 이 단락의 마지막은 이렇다.

우리에겐 폭소, 미소, 파안대소가 필요합니다. 냉소, 비소, 실소는 좋지 않습니다. 그런 웃음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한을 품은 여자가 비오는 날밤 소복 입고 짓는 웃음과 같습니다.(23/90)

“둘째, 웃음을 빼앗아가는 원인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는 죄, 자존심, 환경이 그 원인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몇몇 위인들의 경구를 인용했고,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기뻐하고 찬송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고통과 아픔과 실패와 절망 속에서라도 나를 도우시고 구원하신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웃는 것”이 성숙한 신앙이라는 말로 두 번째 단락을 정리했다.
“셋째, 웃으면 어떻게 됩니까?” 1) 생리적 변화가 일어난다. 웃으면 잠든 에너지가 살아난다. 신체리듬이 되살아나고 엔돌핀이 살아난다. 2) 분위기가 바뀐다. 3) 영혼이 회복된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흔듭니다. 사람은 기분이 좋으면 웃습니다. 내 영혼이 기뻐하면 그 기쁨이 얼굴로 나타납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렇게 외쳤다. “웃고 삽시다. 웃음을 주고받읍시다. 우리 사회, 우리 교회를 웃고 웃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듭시다.”(23/92)
필자는 박 목사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아니 그가 좋지 않다고 경고한 실소였는지 모른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주일공동예배의 강단에서 웃음건강학을 강연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시편 기자의 웃음과 기쁨은 생존의 위기를 겪어낸,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환희의 찬양이다. 그것은 웃음일 뿐만 아니라 울음이기도 하고, 기쁨일 뿐만 아니라 슬픔이기도 하다. 시편 기자가 찬양하는 생존의 환희가 ‘웃음이 꽃피는 교회를 만들자’는 구호로 변질되고 말았다.
혹시 필자가 박 목사의 많은 설교 중에서 특별한 것만 예로 드는 게 아닌가 하고 우려의 눈으로 보실 분이 있을 것이다. 위에서 밝힌 대로 필자는 그의 설교집 스물네 권 중에서 다섯 권을 꼼꼼히 읽었다. 5년 치의 설교인데, 대략 250편 가까운 분량이다. 필자가 보기에 거의 대부분이 위에서 예로 든 세 가지 설교 유형에 속한다. 첫째 유형은 동영상으로 본 설교인데, 성서 언어와 개념이 언급되지만 성서의 세계가 열리지 않는 설교다. 둘째 유형은 “근심 퇴치법”에서 볼 수 있듯이 본문이 말하는 것의 핵심으로부터 비껴난 설교이며, 셋째 유형은 “웃고 사는 사람들”에서처럼 성서본문과는 아무 상관없는 설교이다. 이 세 유형을 하나로 묶는다면 성서텍스트의 침묵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거의 모든 설교가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만약 필자의 판단이 박 목사의 설교에 대한 트집잡기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공개적으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성서와 악보

필자의 궁금증은 이것이다. 박 목사의 설교에서는 왜 성서텍스트가 침묵당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그가 왜 성서의 세계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건 기본적으로 신학의 문제이다. 설교에 무슨 신학이 필요한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들에게 잘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경험이지 이론은 아니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다. 필자의 생각에 “신학 없이 설교 없다.” 신학과 설교의 관계를 아주 짧게나마 설명할 시간을 필자에게 허락해 달라.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분명히 어떤 이론이 아니라 경험에서 시작했다. 예수에게서 일어난 구원 사건에 대한 경험이다. 예수의 가르침, 십자가, 그리고 부활, 그의 전체 운명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했다.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지듯이 그렇게 예수를 경험한 것이다. 그런 경험은 주로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공동체가 꾸려지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언어로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적인 경험은 언어를 뛰어넘는 법이지만(不立文字) 진리를 담는 그릇으로 언어와 문자는 가장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진리경험이 문자로 형상화될 때 어떤 사유의 틀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신학(theo-logy), 즉 하나님에 대한 로고스이다. 예컨대 바울이 칭의론을 언급할 때 그는 로마의 법을 생각했으며, 요한도 언어존재론의 차원에서 예수를 시원적(始原的) 로고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원(原)경험과 성서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 곧 신학이라는 말이다. 오늘 성서를 텍스트로 설교해야 할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목은 바로 성서기자들의 예수 사건에 대한 원경험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를 통한 하나님 경험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이며, 통치이다. 그런 근본적인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오늘 설교자들은 반드시 전문적인 신학 훈련을 받아야한다. 그것이 없으면 원래의 예수 경험과 성서 사이에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전혀 따라잡을 수 없다.
다른 예를 들겠다. 여기 베르디의 교향곡 <레퀴엠> 악보가 있다 하자. 베르디는 자신의 영혼을 울리는 그 소리를 악보로 남겼다. 악보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담아내는 기호이다. 기호는 소리를 완전하게 담아낼 수는 없다. 소리에 대한 베르디의 원(原)경험은 악보에 완전하게 담길 수 없다는 말이다. 그 경험은 악보에 드러나는 게 아니라 숨어 있다. 정확하게 말해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근본적으로 숨어 있다. 오늘 베르디의 <레퀴엠>을 연주해야 할 지휘자가 악보에 드러난 부분적인 음악에만 빠져 있다면, 사실 그것을 바르게 연주하는 것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는 베르디의 음악을 연주한 게 아니라 자기의 연주 실력만 과시한 것에 불과하다. 뛰어난 지휘자라고 한다면 악보에 충실하면서도 그 악보가 은폐의 방식으로 담고 있는 소리에 대한 베르디의 원경험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성서와 악보는 비슷한 구조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한 성서기자들이 기록한 성서는 그것을 은폐의 방식으로 담고 있다. 바르트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은폐와 노출의 변증법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성서를 바르게 해명하기 위한 가장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길은 신학공부에 놓여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학은 단순히 정보가 아니라 신학적 사유를 가리킨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이런 신학적 사유의 과정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기독론과 삼위일체론과 종말론 등등,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들이 형성될 수 있었다.  
뛰어난 신학자가 되지 않으면 설교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뛰어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신학의 맛은, 즉 기독교적 영성의 맛은 알고 있어야 한다. 바둑 4급에 불과한 아마추어 기사라고 하더라도 프로 9단이 둔 기보에서 무언가를 배우려고 노력한다면 바둑의 맛을 느낄 수 있듯이, 우리가 모두 신학과 영성의 대가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낮추고 계속 배움의 자세를 유지한 채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기만 하면 우리는 성서의 근본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으로 천천히 성서세계의 놀라운 깊이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설교 명망가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확보한 대중성이 그 길을 막는다. 우리가 그렇게 목말라 하는 대중성은 경우에 따라서 설교자의 영혼을 질식시키는 독과 같다. 청중들의 환호와 갈채는 설교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설교자를 독단에 빠지게 한다는 말이다. 성서텍스트의 침묵과 설교의 대중성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독단론(dogmatism)은 설교 명망가들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다. 여기서 독단론은 규범 일원론적 성격을 가리킨다. 박 목사의 설교에도 요소가 아주 강하다.

도그마티즘

박 목사에게 기독교 신앙은 이미 결정된 그 어떤 규범(율법)이다. 주일 성수, 기도, 전도, 십일조, 금연금주, 성경공부 같은 요소들이 그것이다.(23/108) 풀어서 말한다면, 그의 설교에서 예수 잘 믿으면 복을 받고, 믿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는 원칙론만 스테레오 타입으로 반복된다는 뜻이다. 설교는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설교자들은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십계명을 비롯해서 신구약성서에 많은 규범들이 있지만 설교는 그런 규범을 그대로 전하는 게 아니라 그런 규범에 이르게 된 과정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규범은 그것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에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규범을 절대화했고, 예수님은 그것의 실체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인 예를 하나 들어야겠다.
얼마 전에 저녁 식탁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 끝에 두 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고려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고려장(高麗葬)에 얽힌 일화는 많다. 내 딸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설명했다. 늙은 아버지를 지게에 매고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아들이 돌아 나올 때 길을 잃을까 걱정이 되어 아버지가 나무 가지를 꺾어 놓았다거나, 뒤따라간 손자가 훗날 아버지를 모셔다 놓기 위해서 지게를 다시 들고 나오는 바람에 고려장 제도가 없어지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만약 학교 선생님들이 고려장 제도를 그런 방식으로만 가르쳤다면 크게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것의 실체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교육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고려장은 고대인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지켜내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이었다. 생각해보라. 끼니가 없어 가족 전체가 굶어죽어야 할 위기 앞에서 어린 손자들이 죽어야 하는가, 아니면 할아버지가 죽어야 하는가? 어느 쪽이 그 가족의 생존에 합리적인 선택인가? 지금도 몽골의 유목민들에게서 비슷한 경우를 발견할 수 있고, 동물들의 세계에서는 강한 새끼를 지켜내기 위해서 약한 새끼를 죽이는 일도 있다. 생존을 위한 반윤리적인 행위들은 구약성서에도 흔하다. 지금 필자는 고려장의 불가피성을 논파하는 게 아니라 참된 교육도 어떤 규범을 전수하는 게 아니라 훨씬 중층적인 삶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중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 역시 규범의 강화가 아니라 영성의 심화이다.
박 목사의 설교는 거의 대부분이 도그마티즘에 사로잡혀 있다. “복 받은 사람들”(시편 128:1-6)이라는 설교에서 박 목사는 하나님을 경외하면 “개인과 가정과 나라가 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여기서 그가 가장 길게 예로 든 것은 미국의 케네디 가(家)이다. 조지프 케네디는 술 밀매와 할리우드 영화 사업으로 돈을 벌어 케네디 가를 명문가로 만들었지만 그 후손들이 결국 모두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설교를 끝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살기 때문에 개인이 복 받고, 가정이 잘 되고, 이 나라에 평강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23/143)
그는 성서의 세계를 전혀 모르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신앙과 복을 일치시킬 수 있는가 말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오히려 그가 말하는 복으로부터 멀어질 개연성이 높다. 다른 건 접어두고 예수의 가르침에서 외형적인 복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의 운명을 걸어둔 사람이 어떻게 박 목사가 말하는 그런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궁극적인 생명과 연결되는 성서의 놀라운 세계가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안에서는 기복을 강조하는 도구로 떨어져버렸다. 이런 설교들은 성서를 규범(율법)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설교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도그마티즘의 한 전형이다.

조지 부시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 영성은 확보될 수 없다. 앞서 한번 짚은 대로 설교자들은 스스로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느낀다. 존재의 심층에 관계되는 기독교 영성을 싸구려 약장수처럼 단지 규범과 구호로만 접근하는 사람은 영성의 궁핍을 피할 길이 없다. 이걸 모면하기 위해서 설교자들은 주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예화를 끌어들인다. 그래야만 청중들이 설교에 움직이기 때문이다. 박 목사도 예외가 아닌데, 몇 대목만 간추리겠다.
경남 마산에서 교회를 개척한 목사에게 마을 사람들이 십자가의 불을 켜지 말라고 요구했다. 앞장서서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들이 “차례대로 죽고, 쓰러지고, 반신불수”가 된 뒤에 마을 사람들은 교회를 무서워하게 되었다고 한다.(24/180) 어느 목사가 중학교에 다니는 딸 방에 들어갔다가 “부시를 죽이자!”는 벽보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딸의 설명에 따르면 학교 선생님이 “부시가 전쟁을 일으킨 원흉이기 때문에 죽여야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24/251) 미국 미네소타주 어느 한 곳에 교회와 나이트클럽이 마주보고 있었다. 신자들은 나이트클럽이 망해서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몇 달 후에 나이트클럽에 불이 났다고 한다.(23/27) 나눠주는 삶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영화배우 말론 브랜도의 예를 들었다. 인기와 명성으로 돈방석에 앉은 사람이지만 그의 딸과 첫 아들은 자살했고, 첫 아내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의 아내는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어 죽었다고 한다. “결혼 네 번, 자녀 11명,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불행과 갈등을 식탐으로 풀기 위해 밤낮없이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체중이 200kg이 되었다는 것입니다.”(15/376) 김태정 전 검찰총장과의 점심식사를 나누면서 들은 이야기를 그는 이렇게 전했다. 김태정 씨가 대검차장으로 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대통령 집무실에 들렸다가 책상 위에 놓인 성경을 보고 한 마디 했다. “각하, 책상 위에 성경책이 있군요. 참 보기가 좋습니다.” 김 대통령은 그 말 때문에 김태정 씨를 검찰총장으로 발탁했다는 것이다. 박 목사가 보기에 “김태정 검찰총장은 검찰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 하는 분입니다.”(16/330)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김태정이라는 이름에서 한국교회를 크게 망신시킨 ‘옷로비’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그의 주장은 명백하다. 예수를 믿지 않거나 박해하면 모두 망하며, 거꾸로 예수를 믿거나 교회를 위해 충성하면 크게 잘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우연하거나 별로 직접적으로 상관없이 예화를 작위적으로 제시한다. 청중들은 이런 예화를 들으면서 만에 하나 망하는 일이 자기에게 닥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을 느낄 것이다. 이게 기독교 영성이라는 말인가?
마태복음 28:16-20절을 본문으로 한 “가라, 전하라.”는 설교는 세 단락으로 구성된다. 1) 경배했습니다. 2) 의심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3) 가서 전하라. 전혀 상관이 없는 단락이 단지 나열되고 있을 뿐인 설교의 구성은 그렇다 치고, 그는 본문에서 별 의미도 없는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뜻으로 자신이 직접 경험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어떤 신자에게서 회사의 개업식 예배를 인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날 행사가 복잡하니까 예배를 아주 간단히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약속 당일 개업식에 참석해서 보니, 인산인해인데다가 온갖 주류와 음료수, 화환 등으로 정신이 없었다. 사장은 재차 “목사님, 간단히 예배를 드려 주시지요.”라고 귓속말을 했다. 기분이 상한 박 목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드렸다고 한다. 그이 말을 그대로 따오겠다.

주님, 주인 되는 사람의 요청도 있고 해서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축복도 간단히 해주십시오. 예배도 간단히 끝냅니다. 회사도 간단히 되게 해주십시오.

그 회사는 1년6개월 만에 문을 닫았고, 사장 가족은 미국으로 도피성 이민을 떠났다고 한다.(24/256) 불행과 신앙의 일치는 욥기에서 볼 수 있듯이 근본적으로 불신앙이다. 그는 독단적인 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37살의 젊은 나이에 죽은 다이애나가 안 되기는 했지만, 테레사의 죽음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다이애나의 죽음과 삶이 추해 보였”다고 한다. “아무리 버림받은 상처가 크다손 치더라도 막된 여자처럼 남성을 편력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16/233) 다이애나와 테레사의 죽음을 이렇게 단순 비교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미국만이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썩 괜찮은 대통령으로 존경받았던 존 에프 케네디의 피살을 그는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생각한단다. 왜냐하면 그가 대통령이 된 뒤로 공립학교에서 실시해오던 기도와 성경과목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17/138) 칼 세이건의 죽음에 대한 그의 콤멘트를 들어보시라. “세이건은 62세에 부인과 5남매와 하던 모든 일을 그대로 놔둔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반드시 지옥에 갔을 것입니다.”(16/130) 그 이유는 하나님을 부정했기 때문이란다. 필자는 세이건의 책 <코스모스>와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를 읽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그런 점에서 세이건은 뛰어난 물리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신학자였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박 목사는 부시를 기도하는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운다. 부시는 백악관에서 매주 목요일에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기자가 전쟁에 대해서 아버지 부시와 의논했는가 하고 묻자 부시는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나에겐 두 분의 아버지가 있다. 나를 낳아 주신 아버지는 텍사스에 있고, 더 높은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 나는 더 높은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결정했다.” 박 목사에게는 “이것이 부시의 신앙입니다.” 하고 강조했다.(23/336) 필자는 박 목사의 이런 태도에서 십자군 전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평신도들은 박 목사의 설교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정확하게 따라잡기가 힘들 것이다. 이는 흡사 의료사고가 계속되는데도 환자들이 그것이 의료사고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심증이 간다 하더라도 도움을 받을 데가 없는 상황과 비슷하다. 설교행위에서는 훨씬 자주, 거의 구조적으로 이런 사고가 발생한다. 의료사고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의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의사들인 것처럼 설교 사고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도 역시 전문적인 공부를 한 신학자들이다. 그들이 입을 다문다는 것은 의료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의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직무유기가 아닐는지. 뜬금없이 동료신학자들에게 화살을 돌린 이유는 이렇게 부실하고 불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박 목사의 설교가 한국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그리고 이에 대한 지적이 신학자들에게서 거의 없었다는 사실 앞에서 필자가 평상심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성서텍스트의 침묵과 도그마티즘에 매몰된 한국교회의 강단을 예언자적 신탁(神託)의 지평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이미 이 글쓰기 꼭지에서 몇 번 밝혔기 때문에 그걸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 오늘은 이렇게만 말하겠다. 하나님의 때(카이로스)를 기다리는 게 가장 현명하다. 성서가 침묵하건 말건, 기독교 영성이 도그마티즘에 빠지건 말건 이미 그런 방식으로 목회와 설교에서 업적을 남긴 분들이 그 자리를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는 한 그 어떤 대안으로도 한국교회의 전체 흐름을 돌리기 힘들다. 또한 바꿔 놓고 생각해보면 그분들도 그 시대에 그런 방식으로 한국교회를 위해서 일정한 역할을 감당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영적인 차원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신학적 사유의 틀이 바뀌는 과도기이다. 한국교회에 큰 상처 없이 이런 틀 전이(패러다임쉬프트)가 원만하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런 사태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젊은 설교자들은 서두르지 말고, 그리고 공연히 천동설에 마음 빼앗기지 말며, 하나님 나라를 향한 구도정진의 자세를 잃지 마시라.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신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라. 우리는 종말론적 영성으로 길을 가는 사람들 아닌가! (기독교사상,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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