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은혜, 무거운 은혜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

이번에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님(이하 ‘조 목사’)의 설교를 접하면서 필자는 여러 번 놀랐다. 우선 향린교회와 조 목사가 지난 2년 동안 ‘평택 미군기지확장 저지운동’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그렇다. 그는 마치 독립운동에 나선 독립투사처럼 매우 결연한 태도로 이 문제에 맞서고 있었다.  
향린교회의 예배도 필자에게는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라고 까지 할만 했다. 예배의 시작은 징소리였으며, 중간에 부르는 예배찬송도 부분적으로 국악으로 꾸며졌다. 물론 반주에 사용되는 악기도 경우에 따라서 양악과 국악이 병행되고 있었다. 특별한 절기에만 국악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매주일 이런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한국에서 향린교회 이외에는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향린교회의 예배는 예배의 토착화라는 차원에서 우리의 모범이 되고 있다.
토착화는 한국교회의 신학과 목회현장에서 훨씬 치열하게 일어나야 할 문제이다. 이는 단순히 동양과 서양을 배타적으로 갈라놓은 이념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영혼에서 우러나야 할 기독교 영성의 본질에 속한 문제이다. 신앙의 본질이 문화의 옷을 입고 표현되어야 한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는 당연히 한민족의 언어와 음악경험으로 채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18,19세기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신앙 형식을 절대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든지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과 같은 부흥회 류의 찬송을 기독교 영성의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다. 이런 찬송가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관심은 축소되고, 대신 사람들의 종교적 감수성이 과도하게 드러나는 것들인데도 말이다. 요즘 열린예배에서 사용되는 현대적 감각의 복음찬송가도 역시 기본적으로는 이런 범주에 속한 노래들이다. 향린교회의 국악찬양은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시도이다.
향린교회의 예배에서 또 하나의 특징은 주일공동예배의 설교가 한 사람에 의해서 독점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신도주일에는 여자 부목사가 설교를 하고, 청년주일에는 평신도 청년들이 간증을 겸한 설교를 한다. 그 이외에도 교회 외부 설교자들이 참여하는 경우도 잦고, 강단 교류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향린교회만큼 강단이 개방된 교회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는 2006년 한 해 동안 서른 번 남짓의 주일설교만 했다. 두 달간의 안식 휴가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를 가장 적게 하면서도 제대로 된 연봉을 받는 설교자는 한국에서 조 목사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각각의 교회가 처한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인 원칙을 정할 수는 없지만 강단의 독점적인 구조를 깨는 것이 한국교회 개혁에서 적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도 향린교회는 앞서 가는 교회이다.
향린교회에서 받은 강한 인상을 더 이상 나열하지 않겠다. 향린 공동체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평신도 운동이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지, 고(故) 안병무 박사가 교회 창립 12명 중의 하나라는 사실과 문익환 목사의 통일신학 운동이 향린교회에서 꽃피웠다는 역사적 사실이 오늘의 향린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특히 조 목사 개인의 영성이 어떻게 목회에서 현실화하고 있는지, 그 결과로 교회 민주화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지만 줄이겠다. 지금 필자는 가능한 다른 대목들은 줄이고 조 목사의 설교에 집중해야만 하니까.

설교의 완성도
필자는 조 목사가 2006년 1월부터 12월까지 행한 설교를 주로 텍스트 중심으로 검토했고, 2007년의 설교는 부분적으로 동영상으로 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설교 텍스트는 2백자 원고지 70-80매나 되었다. 35매에도 못 미치는 필자의 설교 원고에 비해서 두 배나 되는 양이었다. 실제로 설교 시간도 제법 길었다. 보통 35분이고, 간혹 40분이 넘을 때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절제미를 추구하고 있는 향린교회 예배에서 조 목사의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게 조금 의외였다. 이렇게 긴 설교는 긴장감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조 목사의 설교에는 그런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대학교 강의실에서 한 단어 한 단어에 의미를 담고 강의하는 교수처럼 그는 한 치도 흐트러지는 법 없이 설교를 끌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40분 가까이 설교한다는 것은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하는 영적 에너지가 분출하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조 목사의 설교를 읽고 들으면서 필자는 이러한 에너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머뭇거림 없이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갈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능력은 보통 입담이 좋거나 거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요소이다. 그러나 조 목사의 설교는 그런 것과는 종류가 다르다. 그의 스피치는 명망가 설교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세련미는 없고 오히려 설교로서는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투박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설교에서는 영적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선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가 전개하는 설교의 흐름이 매우 유연하다는 점이다. 필자는 그의 설교가 완성도 높은 한편의 단편소설이나 신학 에세이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구성력이 아주 뛰어났다. 일반 문학작품도 마찬가지이지만 설교도 그 구성이 탄탄해야하는데, 이런 작업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성서를 정확하게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고, 2천 년간 계속된 신학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하고,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력을 갖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나름으로 고도의 글쓰기 훈련이 병행되어야만 한다. 내용은 둘째 치고 설교 구성이라는 점에서도 수준 이하인 설교가 비일비재한 한국교회 강단에서 조 목사는 이런 준비가 잘 갖추어진,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통적인 설교학에서도 설교의 구성에 대해서 말하기는 한다.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가장 초보적인 구성으로부터 시작해서 대지와 소지의 구분에 이르기까지 설교의 구성을 말하기는 한다. 필자가 말하는 구성은 그런 교과서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 건 한 시간이면 모두 배울 수 있는 기초에 불과하다. 설교 구성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설교의 주제를 논리적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설교 주제를 가볍게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깊은 쪽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이런 능력은, 평소에 꾸준히 수행해온 책읽기와 사물에 대한 통찰력에 토대해서 고급의 논술이나 에세이를 쓸 수 있듯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삶의 심층적 인식에 관한 꾸준한 공부에 의해서 주어진다. 벼락치기로는 결코 영성의 깊이를 파고드는 설교를 할 수 없다.
탄탄한 구성력과 주제의 심화를 통해서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설교는 당연히 창조적일 수밖에 없다. 좋은 문학작품이나 미술작품이 창조적이듯이 조 목사의 설교도 그렇다. 필자는 조 목사의 설교를 대하면서 한국교회 강단에서 찾아보기 드믈 정도로 창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설교자가 생명의 영인 성령과 소통하고 있다면 그는 당연히 창조적인 설교를 할 수밖에 없다. 설교에서 창조성이라니 무슨 말이냐,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진리만 분명하게 전하면 되지, 하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기독교 영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베드로의 신앙과 바울의 신앙이 다르듯이,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창조적이듯이 설교도 역시 그렇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 한국교회 강단의 위기는 창조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박 아무개 목사의 설교와 최 아무개 목사의 설교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 아무개 목사와 심지어 신 아무개 장로의 설교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거의 모든 설교가 짝퉁이다. 조 목사는 설교행위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갈 줄 아는 설교자이다. 직접 그의 설교 안으로 독자들을 모시고 들어가야겠다.

니고데모와 키에르케고르
2006년 3월19일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하늘뜻펴기’인(향린교회는 설교를 이렇게 부른다.) “니고데모와 키에르케고르”는 니고데모에 관해 보도하고 있는 요한복음 3:1-12절을 주요 본문으로 하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하는 순간에 하나님이 숫양을 준비하셨다는 이야기인 창세기 22:9-14절을 보조 본문으로 한다. 이 두 본문이 조 목사의 설교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 자못 궁금하지 않은가.
조 목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니고데모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로부터 설교를 시작했다. 니고데모는 예수 당시에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사람이었다. 본문은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밤을 새워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조 목사는 예수를 만나러 오기 전에 니고데모가 겪었을 정신적인 두려움을 이해해야 하고, 예수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던 그의 절박한 마음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서를 읽을 때 행간의 서사(敍事)와 의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데, 옳은 주장이다.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서 언어를 뚫고 그 이면으로, 그 너머로 들어갈 수 있는 힘이다. 설교자가 청중들을 그렇게 이끌어 들일 수만 있다면 그는 굳이 “믿습니까?”라거나 “축복합니다.”, 또는 “할렐루야” 같은 용어를 반복적으로 쏟아 내거나, 예화에 치우치거나 고함을 지를 필요도 없다. 청중들은 성서의 새로운 세계가 열릴 때 영적 긴장감을 느끼는 법이다. 니고데모 이야기처럼 어떤 구체적인 사건의 진행에 관한 보도만이 아니라 서신이나 예언서, 또는 시편이나 잠언처럼 서술형의 진술들도 행간에 어떤 세계를 담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걸 포착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조 목사는 성서본문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지만 조금만 눈여겨보면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야기 안으로 청중들을 이끌어간다. 자신이 니고데모라면 예수를 찾아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전혀 다른 신분의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간다는 것은 체면을 구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직접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내가 왜 예수라는 젊은이를 찾아가 지혜를 찾아야 합니까? 이 사실을 백성들이 안다면 나는 도대체 뭐가 되는 겁니까? 그리고 예수라는 젊은이는 도대체 그 출신부터 문제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사마리아 출신 다음으로 경멸하는 갈릴래아 출신입니다. 그의 하는 일은 아버지를 따라 목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 목수 하면 어떤 직업적 개념을 갖습니다만, 당시 목수라는 것은 날품팔이를 의미하는 수준의 단어였지 요즘같이 어떤 기술을 가진 생활이 보장된 직업적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그는 성서학자 제임스 로빈슨이 전하고 있는 역사적 예수의 문제를 다뤘다.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는 문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런 정도로 예수의 사회적 신분이 낮았다는 의미이다. 조 목사는 그런 역사적 예수 연구 자체를 청중들에게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의 강조점은 니고데모의 입장에서 예수라는 청년은 피해야 할 대상이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그건 단지 신분의 차이만이 아니라 “이 성전을 허물라.”는 식으로 사회체제를 허무는 예수의 과격한 사상과 행동에도 놓여 있었다.

요즘말로 아주 간단히 표현하면 오늘 니고데모와 예수의 만남은 정부의 핵심 요원이 빨갱이를 접선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있어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고 모험에 찬 행동입니다. 그간 쌓아올린 명예와 지위가 송두리째 날아갈 뿐 아니라 맥카시 의원이 이를 안다면 자신과 가족을 모두 빨갱이로 몰 것이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조 목사는 이렇게 묻는다. 상황이 이런대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왜 예수를 찾아 나섰나? 청중들도 이와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품은 신앙의 문제, 즉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성서본문은 하나님 나라를 보아야겠다는 니고데모의 진술을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전달한다. 조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열망은 그 당시에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아야겠다는 니고데모의 열망은 매우 혁명적인 생각이다. 조 목사는 니고데모를 유대교의 기존 체제에 어떤 변혁이 오지 않으면 유대교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보았다. 산헤드린 안에서의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성서는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질책을 들은 것처럼 묘사하지만 조 목사는 “이날 밤 두 사람은 유대교를 개혁하고 하느님 나라 운동을 위해 공동전선을 펴나가기로 어떤 묵약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창조적으로, 혹은 거꾸로 해석한다.
이에 대한 근거를 그는 니고데모가 요한복음에 두 번 더 등장한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요한복음 7장이 전하고 있는 산헤드린 회의 결과가 첫 근거이다. 모든 위원들이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에서 니고데모는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 예수를 죄인으로 단정하는 것은 율법정신에 어긋난다고 주장함으로써 주변 동료들로부터 무시를 당한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뒤에 몰약을 백 근이나 들고 온 니고데모가 아리마데 요셉과 함께 예수의 시체를 안장한 사건이 또 하나의 다른 근거이다. 다른 설교자들도 이런 일련의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다룰 수 있지만, 조 목사는 훨씬 풍부한 인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에 두고 접근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비교된다. 그의 설교를 따라가고 있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바로 2천 년 전 바로 그 장소에 가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말재주가 아니라 성서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는 해석학적 능력이다.
이제 조 목사의 설교는 키에르케고르에게로 점사 방향을 튼다. 그는 니체와 키에르케고르가 신의 존재에 대해서 서로 상반되는 길을 걸었지만 “신조와 전통 속에 자신을 가둬두려는 신앙의 표피를 공격하고 인간의 내면성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키에르케고르가 실존적 신앙 문제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성서텍스트가 바로 오늘 설교의 보조 본문인 창세기 22장이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묶고 그의 목을 치려고 칼을 드는 순간 아브라함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는 윤리적 고통과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는 종교적 사명 사이에서 불안에 떨며 번민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조 목사는 키에르케고르가 모리아 산에서 겪은 아브라함의 실존적 불안을 니고데모에게서 그대로 발견한다. 자신을 감싸고 있던 안락한 삶의 조건을 떨치고 나오는 니고데모에게서 우리는 불안과 고뇌를 본다. 그는 삶과 유리된 형식적인 종교를 거부하고 예수를 찾아 나섰다. 이런 점에서 니고데모는 “예수 시대의 영웅”이다.

율법이 지배하던 시대에 그 율법의 울타리 안에서 모든 것을 누렸던 한 인간, 누구보다 지식이 많았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노학자, 미래가 보장된 사람, 그러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쌓아올린 학문과 깨달음에 스스로 이의를 제기하고 오랜 고뇌 끝에 자신을 죽이기로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보리라. 한 번의 깨달음을 위해, 참 자기를 알기 위해 그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전 생애를 맞바꾸기로 한 것입니다.

이제 그의 설교는 절정을 넘어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조 목사는 향린교회의 지성인들을 향해서 성서본문이 말하는 거듭난다는 말의 의미를 요약적으로 풀어주면서 니고데모와 같은 결단을 촉구한다. 거듭난다는 말은 문자와 전통이라는 형식으로 하나님을 만나던 방식을 떨쳐내고 “나만이 경험하는 내면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바람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러하다는 말씀. 바람과 성령.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로 표기하면 하나의 단어 ruah, 곧 하느님의 숨입니다. 하느님의 숨에 쏘이는 그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하늘에 속하기에 그의 삶의 궤적이 어디로 향할는지 결코 예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그러나 이 불안함이 그를 참 자기에게로 인도해 줍니다.

필자는 그의 설교를 따라가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놓칠 수 없었다. 설교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니고데모와 키에르케고르라니! 이 성서본문으로 대다수의 설교자들은 니고데모가 결국 영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거나, 조금 더 괜찮은 시각이라고 한다면 지성인들에게 나타나는 신앙적 결단의 유약성을 짚는데 반해서 조 목사는 그를 불안과 고뇌로부터 참된 실존적 신앙의 세계로 뛰어든 영웅으로 해석했다. 이런 해석의 옳고 그름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그가 나름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성서텍스트를 풀어내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그가 이미 성서와 이 세계를 고유하게 바라보는 해석학적 경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창조적 설교의 한 전형이다.

교회와 정치
일반적인 목사들의 설교나 명망가 설교는 내용의 깊이와 완성도 없이 천편일률로만 전개되기 때문에 대개 속독으로도 읽어낼 수 있지만 작품성이 뛰어난 조 목사의 설교는 문장의 뉘앙스까지 살펴야하기 때문에 읽기에 까다롭다. 그래도 이런 설교를 읽을 때, 혹은 들을 때 청중들의 영혼이 공명하는 법이다. 모처럼 성서와 신학, 그리고 그것이 담겨 있는 삶과 역사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는 설교자를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필자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도 직접 만난 일은 없지만 그가 길벗처럼 느껴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공교롭게도 그는 필자와 동년배이다.
길벗이라고 해서 늘 붙어 다닐 수는 없다. 잠시 만나서 담소하다가 헤어지고, 또 우연하게 만나면 함께 생각을 나누다가 또 다시 자기 길을 가야한다. 비슷한 방향을 가더라도 속도도 다르고 관심도 다른 법이니 말이다. 필자는 이제 속도의 차이에 대해서 짚어야겠다. 이것이 단순히 속도의 차이인지 아니면 세계관의 차이인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또한 그것이 사소한 것인지 아니면 근본적인 것인지에 대해서 아직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어딘가에 차이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역사를 보는 관점은 비슷하나 설교자의 자리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짚어보자.
이 글머리에서 언급했듯이 평택 미군기지 문제가 2006년에 행한 조 목사의 설교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사회적 이슈였다. 그는 마치 원리주의자로 보일 정도의 열정으로 이 문제를 매우 중요한 설교 주제로 삼고 있었다. 평택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보안법, 한미 FTA 같은 사회적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슈를 따라가는 그의 발걸음이 너무 빨라서 필자는 어지러울 정도였다.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시간에 필자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가능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는 편이다.
향린교회는 국가보안법철폐와 미군기지 확장반대 현수막을 걸었으며, 조 목사는 워싱턴에서 있었던 한미 FTA 반대 삼보일배에 참여했고, 평택의 대추리를 사랑방처럼 드나들었고, 급기에 그 사건에 연루되어 31년 만에 비록 짧은 3일간이지만 구치소 신세를 진적도 있다고 한다. 역사 진보를 위해 조 목사가 취하는 신앙적 태도는 사뭇 전투적이다. 2006년 부활절에 행한 설교의 앞부분에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자.

흔히 보수언론에 주입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미군주둔이 북한의 위협이 있는 현재 상황에서는 필요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평택에 확장되는 미군은 북한의 위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미국국회에서 보고하였듯이 평택기지가 완성되는 2008년도가 되면 남한에 거주하는 미군의 숫자는 현재의 3만여 명에서 칠천 명으로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북한 침략을 막기 위한 미군주둔만 목적으로 한다면 기지 확장이 아닌 기지축소를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이는 미국이 동북아 패권유지를 목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와 비슷한 주장을 우리는 그의 설교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일일이 인용하지는 않겠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그의 평화 지향적 설교에 박수를 보내면 보냈지 시비를 걸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강단에서 현실적인 정치 경제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뿐이다.
그는 위의 설교에서 평택의 미군기지가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는 게 아니라 미국의 동북아 패권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단적으로 말했다. 그 근거로 2008년도에 주한 미군의 숫자가 현재의 3만 명에서 7천명으로 줄어든다는 점을 지적했다. 필자도 개인적으로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찬성하는 사람이지만 교회강단에서 주한미군의 병력 숫자까지 제시하면서 이런 논리를 제시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는다. 그런 문제는 군사전문가나 정치평론가가 훨씬 정치(精緻)한 방식으로 감당해야할 몫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가 위에서 인용한 구절만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전반적으로 필자가 생각하는 설교자가 넘지 말아야할 경계를 쉽게 넘나들고 있었다.
교회와 국가, 또는 복음과 사회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매우 오래된 신학 논쟁의 주제였다. 예수가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는 복지사회 건설이라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별개인가, 충돌하는가, 일치하는가, 긴장하는가, 역설적인가? 큰 틀에서 본다면 루터는 ‘두 왕국론’에 근거해서 비교적 별개의 영역으로 보았으며,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 신학에 근거해서 비교적 하나로 보았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루터는 이원론적이며, 칼빈은 일원론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말이다. 이런 신학적 경향에 근거해서 루터는 농민전쟁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오히려 폭력은 세속의 질서로 제어되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영주들에게 힘을 실어준 반면에, 칼빈은 제네바를 신정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반대파를 숙청하기도 했다. 여기서 누가 옳은가 하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자신들의 신학에 근거해서,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길을 간 그들을 오늘의 관점으로 재단하거나 매도할 수는 없다.
글의 흐름이 끊길지 모르겠지만, 많은 부분에서 같은 시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약간 염려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필자의 구차한 처지를 변명하기 위해서라도 공소한 신학이론으로 빠지지 않는 선에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하겠다.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이렇게 진술한 적이 있다.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1절) 이 한 구절을 제대로 주석하려면 한편의 논문이나 한권의 책도 부족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에 근거해서 국가나 정권의 모든 정치적 행위들을 비호하려는 게 아니다. 바울이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제국주의에 용감히 맞서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권위에 복종하라고 했다 해서 그가 로마 제국 자체를 인정했다는 말도 아니다. 바울은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을 내다보고 있었다. 십자가와 부활 이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 그에게 로마 정권도 역시 잠시 기세를 부리다가 사라질 세속 질서에 불과했다. 그런 잠정적인 질서와 극한적인 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의 영적인 에너지를 소진하는 게 아니겠는가. 조 목사는 그게 바로 바울의 한계라거나, 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생존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좀더 두고 천천히 생각해야보아야겠다.
예수는 “유대 민중들이여, 로마 제국주의에 항거하라!”고 선동하지 않으셨다. 로마 제국이 유대 민중의 삶을 어떻게 훼손시키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의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빌라도 앞에서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신 적이 있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 18:36) 이런 성서구절에 근거해서 예수가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세속정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건 아니다.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을 무시한 채 하나님의 나라를 뜬구름 잡듯이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성서텍스트에서, 그것이 예수의 친언인지 아니면 요한공동체의 해석인지는 불문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정치 경제적인 차원과 직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배울 수 있다. 물론 조 목사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명백히 정치적 사건이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로마의 고위 정치인이었던 빌라도에 의해서 정치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을 개연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예수 사건의 적나라한 정치적 의미를 무조건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생각에 예수 사건은 오히려 정치경제, 사회문화적 차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혁명가가 아니라 바로 메시아이다. 정치적 혁명으로 생명사건이 완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다. 그런데 그는 왜 교회강단에서 정치적인 문제에 발을 깊숙이 들여놓는가?  

흑백논리
8월13일에 행한 설교 “향린의 개혁과 영성의 길(4)”에서 그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설교했다. 그의 절절한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설교였다.

경제우선 경제제일 하는데, 우리나라가 정말 미래의 경제를 먼저 생각했다면 자유무역협정은 중국이랑 먼저 해야 합니다. 중국의 시장 크기는 미국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지역적으로도 가깝습니다. 남북통일을 위해서도 중국과의 자유교류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쪽에서 먼저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요구한 4대 선결조건을 굴욕적으로 받아들이고 미국과 먼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군사적으로 예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변명이 중국의 값싼 농산물 때문이라고 하는데, 지금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면 제일 큰 피해는 농민들이 입습니다. 어차피 땅덩어리가 큰 나라들과 자유무역협정을 맺게 되면 농산물 부분은 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것이 농산물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천하가 다 아는 거짓말입니다. 눈 가리고 아웅입니다. 진짜 이유는 미국의 감정을 건들기 때문입니다. 미군이 주둔하는 한 이러한 굴욕적 역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문맥을 약간 손질했음, 필자 주)

조 목사는 신학강연에서나 어울리는 내용들을 왜 설교단 안으로 끌어들이는가? FTA를 미국과 먼저 해야 하는지, 중국과 먼저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목사가 설교강단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다. 미군 주둔 때문에 한국정부가 어쩔 수 없이 미국과 FTA 협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주장은 사실관계에서 별로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설교강단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언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설교는 신학강의가 아니며, 교양강좌도 아니고, 시사평론이나 경제해설도 아니다. 말 그대로 케리그마가 선포되는 사건이다.
필자는 반공, 반북 그리고 친미에 열을 올리는 목사들이 교회강단에서 시국강연을 하는 걸 보고 그들이 “외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그들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조 목사의 설교에도 그런 행태가 그대로 보이다니,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것인지. 필자의 생각에 양자의 공통점은 흑백논리이다. 극우보수에 속한 설교자들도 세상을 선명하게 선악, 흑백으로 구분하고, 조 목사도 역시 그렇다. 그는 확신에 차서 사탄의 세력을 허물자고 외친다.

향린교회 창립일은 5월 17일입니다. 이는 5.16군사 쿠데타와 5.18광주 민주화운동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는 향린교회의 정체성과 그 부름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반평화적인 사탄의 세력과 내일의 하느님 나라 사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둠의 어제를 향하여 있지 않고 밝음의 내일을 향해 있습니다.(밑줄은 필자)

오늘 평화를 파괴하는 사탄의 세력은 누구인가? 자본가와 미국인가? 기득권자인가? 조 목사는 그걸 명확하게 뚫어보는지 그게 정말 궁금하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나의 경우에는 두 요소가 내 삶과 영혼에 그대로 담겨 있다. 나는 나름으로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평화를 파괴할 때도 많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향해서 사탄 세력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11월5일 설교 “천국과 지옥 이야기”의 결론은 아래와 같다.

오늘의 물질적 성공과 개인의 행복추구가 진리가 되어버린 이 타락한 현실세계에서 나의 영원성을 회복하고 이 땅에 하느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평화와 평등과 사랑의 새 하늘과 새 땅을 함께 일구어 전태일 열사의 산화된 몸이 우리 안에 부활의 몸으로 계속 꽃피워져 가기를 기도합니다.(밑줄은 필자)

조 목사가 말하는 타락한 현실세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진술을 그대로 따른다면 물질적인 성공과 개인의 행복추구가 진리로 행세하는 세상을 말하는 것 같다. 그는 이런 타락한 현실 앞에서 분노하고 있다. 그 분노는 필자도 똑같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세상을 타락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지 우리가 감당해야할 현실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생존의 욕망이 작동되는 한 조 목사가 타락했다고 보는 그런 현실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어느 누가 일종의 에로스로 나타나는 이런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타락한 현실 앞에서 분노하는 조 목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함께 일구자고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필자에게는 매우 관념적으로 들린다. 이상한 일이다. 보수 우익의 설교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그런 관념성이 조 목사에게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게 말이다. 결국 관념성은 흑백논리에 갇혀서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동일한 현상이라는 말인지. 타락한 현실을 타파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일굴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이 무엇인지 나는 대답을 듣고 싶다. 한미 FTA를 파기하고, 미군을 당장 철수시키고, 재벌을 해체하고, 새만금을 원점으로 돌리고, 더 나아가서 천성산의 생태를 파괴하는 KTX 공사를 중단하고, 지금 당장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쪽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원룸 아파트를 제공하고, 저소득층에게 의료와 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며,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국내 노동자들과 동일한 노동법을 적용하면 그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것일까? 스웨덴 정도의 민주화와 복지가 이루지는 게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가? 이런 정도로 삶의 질이 향상된다면 더 바랄 것도 없겠지만, 그리고 필자도 그런 세상을 향해서 몸부림치고 있지만, 예수가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가 겨우 이런 정도에 머물러 버린다면 기독교의 종말론과 진보주의자들의 역사관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아닌가.

낭만적인 평화 원리주의
필자가 보기에 보수우익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관념화했다면, 조 목사는 인간의 삶을 관념화했다. 전자의 논리에는 구체적인 역사가 실종되었다면, 후자의 논리에는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현실이 실종되었다. 전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성격이 역사 밖으로 날아간 반면에 후자에서는 세속역사 안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양자 모두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능력을 훼손시켰다.
관념적인 설교는 결국 감상주의로 빠져드는 것 같다. 보수우익의 설교자들에게서만이 아니라 조 목사에게서도 그런 흔적이 발견된다. 5월14일에 행한 설교 “일어나 빛을 발하라!”에서 그는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사 2:4)는 말씀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감동적으로 설교했다.  

전 이 구절을 읽으면서 부서진 대추초등학교가 다시금 새로워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가톨릭 개신교 불교 원불교 4대종단의 사제들이 함께 대추리에 모여 평화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우리 모든 사제들은 무너진 대추초등학교 건물 주위에 손을 잡고 둘러서서 침묵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곳에 학교건물이 들어서고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노는 모습을 꿈꾸었습니다. 지금은 뿌리 채 뽑혀져 죽어가는 저 자리에 언젠가는 나무가 자라고 이런 팻말이 붙어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느티나무’

이사야의 신탁이 오늘 재현되는 설교처럼 들린다. 그러나 필자는 조 목사와 달리 미군기지가 평택 대추리로 옮겨지는 덕분에 남한 곳곳에 흩어졌던 미군기지가 공원으로 탈바꿈되는 꿈을 더불어 꾼다. 욕먹을 각오로 더 노골적으로 말하겠다. 미군기지로 사용되는 용산의 그 땅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정말 해괴한 논리지만 미군주둔 때문이었다. 미군기지가 아니었다면 이미 그곳은 초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창피하게 대구 시내 한복판에도 미군기지가 몇 군데나 있다. 이제 이런 시설이 평택으로 옮겨간다면 대구에 꽤 쓸 만한 도시 공원을 마련할 수 있으려나.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와 한미 FTA 반대에 서명했고, 나름으로 그런 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필자가 지금 빈정대듯이 조 목사의 설교를 트집 잡는 이유는 그가 설교와 시국강연을 혼동함으로써 그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축소시킬 염려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의와 평화의 느티나무’라는 매우 문학적이고 감상적인 수사가 결국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정확하게 뚫어볼 수 없게 만드는 자기함정은 아닌지. 필자의 눈에 조 목사는 낭만적인 평화 원리주의자처럼 보인다. 그는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에 대한 바울의 진술을(엡 3:18) 설명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일입니다. 이것은 삶의 높이입니다. 이 의무를 다하는 일이 곧 완전한 삶을 사는 일입니다.” 그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말을 덧붙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조국과 민족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깊이입니다.’(8월13일)

조국과 민족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라는 말은 흥사단 대표가 할 말이지 종말론적 메시야 공동체인 교회의 목사가 강단에서 외칠 말은 아니다. 이런 주장은 흡사 유신시대 조회시간에 행한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아닌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이탈리아 건국 영웅 가리발디를 소개한 다음, 작은 공동체로 분리되는 새로운 교회 모형을 제시하면서 자기를 따르라고 이렇게 외친다.

그리하여 감히 용기를 내어 가리발디를 따라 말하겠습니다. ‘향린교우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배고픔과 목마름과 고난과 죽음 밖에는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대망한다면 나를 따르십시오.’(8월13일)

비장미가 넘치는 그의 마지막 발언은 너무 무겁다. 어려운 게 아니라 무겁다. 그의 설교는 깊이와 흥미를 겸하고 있는 고품격이긴 한데, 전체적으로 너무 무겁다. 자신보다 민족과 국가를 더 사랑하라는 공자 왈 투의 말도 무겁고, “배고픔과 목마름과 고난과 죽음 밖에는” 줄 것이 아무도 없지만 “나를 따르십시오.” 하는 그의 주장도 너무 무겁다. 이런 설교가 향린교회의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할 말은 없다.    

값싼 은혜, 무거운 은혜
어쨌든지 필자가 보기에 기존의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설교자들이 삶의 실천 없는 ‘값싼 은혜’에 치우쳤다면, 역사진보를 위한 프락시스에 온몸을 던지는 조 목사는 청중들이 감당하기에 벅찬 삶과 역사의 짐을 지움으로써 ‘무거운 은혜’에 떨어졌다. 값싼 은혜나 무거운 은혜 모두 ‘값비싼’ 은혜는 아니다. 값싼 은혜는 기독교인의 삶을 희극화한다면, 무거운 은혜는 비극화한다. 전자는 삶을 지나치게 천박하게 만든다면, 후자는 지나치게 엄숙하게 만든다. 조 목사는 무거운 은혜를 전하는 것이 설교자의 몫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팔 하나쯤 냉큼 잘라 던져내는 그런 신앙인들을 원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향린이 편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팔 하나쯤 잘라내는 일을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참 향린인입니다.(3월5일)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참된 안식을 주신 예수의 말씀이(마 11:28) 조 목사의 설교 앞에서는 무색하다.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짐만이 율법이 아니라 진보주의자들의 역사적 짐도 율법으로 작동될 수 있다. 민중의 영혼을 마비시키는 값싼 은혜나 민중들의 영혼을 신경과민하게 만드는 무거운 은혜나 모두 칭의론의 해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자기의(義)가 아니라 전가(轉嫁)된 의이다.
당신 주장은 전형적인 양비론이야, 당신은 결국 값싼 은혜에 떨어져버린 거야, 하고 반박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보인다면 어쩔 수 없다. 나는 청중들을 종교적인 자기도취에 빠지게 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사변혁의 용사가 되라고 충동하고 싶지도 않다. 생명의 세계를 겨우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는 내가 어찌 우주론적 깊이에서 움직이는 개개 청중들의 영혼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그들에게 예수가 선포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참된 자유와 안식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성령이여, 도우소서. (기독교사상,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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