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설교와 위로설교를 넘어서


설교학의 새로운 요구
텍스트(성서)와 컨텍스트(청중)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인 설교 문제를 다룰 때 일반적으로는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청중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진다. 설교를 위한 각종 세미나의 내용이나, 잡지에 실리는 글들은 거의 이런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 성서 주석문제는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졌다는 판단 때문인지 그렇게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청중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힘을 얻고 있다. 청중 중심의 설교라거나 스토리 텔링 방식이라거나 귀납법적 설교방식 등등의 제안들은 한결같이 청중에 대한 깊은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기독교 사상> 2003년 6월호에 한신대학교 고재식 교수의 글 “설교자여, 뽕짝의 기본과 감정을 터득하라”는 바로 이런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다. 그는 한신대 출신 목회자들이 설교를 못하는 이유가 전통적으로 원고 설교에 있다고 지적한다. 원고설교는 청중을 위해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취에 빠져버리고, 개념적인 용어들로 인해서 청중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청중을 무시하는 그런 고상한 설교에서 벗어나서 설운도의 ‘뽕짝’처럼 노래의 기본과 멋을 더불어 갖춘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성서의 근본의미도 모른 채 멋만 부리는 부흥사 류의 설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청중의 고달픈 현실을 외면한 채 성서의 근본만을 고지식하게 전하고 마는 학자 류의 설교도 아닌, 그러니까 기본과 멋을 동시에 갖춘 설교가 요청된다는 말이다. 고 교수는 사도 바울이야말로 이 요소, 즉 기본과 멋을 함께 갖추고 있던 설교자였다는 진단과 함께 “한 주간 고생하다가 교회에 나온 교인들에게 위로가 되고 고통과 분노를 풀어주는 고전적 뽕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말로 글을 맺고 있다.
설교 행위에서 청중을 위로하는 요소가 핵심적이라는 주장을 나는 지난 7월말쯤에 내 신학대학교 후배가 되는 이 아무개 목사와의 대화에서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목사는 현재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모 한인교회에서 역동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데, 잠시 한국에 다니러 나왔었다. 목회와 설교를 주제로 나눈 그와의 대화 중에서 대부분은 서로의 생각이 같았지만, 뒷부분에서 갈라졌다. 이 목사는 꾸준하게 청중을 위로하는 목회와 설교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나는 그것보다 복음의 본질에 천착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한 부분에만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지만 어디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가에서 생각이 달랐다. 위에서 예로 든 고재식 교수의 주장처럼 이 목사도 한 주일 내도록 고달픈 세상살이에서 위로를 받으려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감정적인 방식으로라도 위로를 끼칠 수 있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이러한 일련의 주장은 전통적인 설교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전통설교의 문제
청중을 위로하는 것이 설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판단에 따르면 전통 설교는 내용적인 면에서 지나치게 기독교 교리에 묶여버림으로써 현실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일 주일 내도록 고된 세상살이에 지쳐있는 신자들에게 목사가 하나님 나라가 어떻고 사회정의가 어떻다고 설교한다면 아무도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부부의 갈등으로 인해서 사니 갈라서니 하고 있는 마당에 생태학적인 설교를 듣게 된다면 이런 사람들의 귀에는 이 설교가 한 마디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청중들과 설교자의 주파수가 다르다보면 그 설교 자체의 내용이 아무리 충실하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라는 점에서는 무의미하다. 이런 주장에는 나도 동의한다. 헬무트 틸리케는 이런 설교 상황을 “설교의 가현설”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또한 형식(전달방식)이라는 점에서 전통적 설교는 지나치게 이성적이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전통설교가 주로 기독교 교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결국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영악한 세상에서 이리 저리 머리 굴릴 일이 많은데 교회에 나와서 까지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게 만들면 사람들이 ‘교회는 골치 아픈 곳이구나’하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비밀을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깨닫지 못하지만, 또는 알아듣는다고 해도 별로 감동이 없지만, 어떤 복음송 가수의 찬양을 듣고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는다. 흡사 슈베르트의 리트보다는 이미자의 트로트에서 훨씬 많은 음악적 체험을 하거나, 박경리의 소설보다는 티브에서 방영되는 시트콤에서 인생의 재미를 훨씬 많이 경험하는 것과 같다. 이런 현실을 감안한다면 모더니즘의 이성에 치우치기보다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감성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이 옳다.

위로설교
전통적 설교의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교회는 그 동안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 나는 이런 새로운 유형의 설교를 일단 ‘위로설교’라고 칭하겠다. 이들 위로설교의 내용은 전통설교에 비해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라는 점에서 확연히 구별된다. 설교의 비현실성, 또는 가현설적 성격을 극복했다는 말인데, 약간 부정적인 면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물질에 대한 축복을 강조한 설교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가 바로 물질이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설교는 없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기복적인 차원에서 물질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돈을 어떻게 기독교인답게 사용하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설교도 가능하다. 실제로 그런 설교들은 많다. 최근에는 두레 공동체의 김 아무개 목사가 다단계 판매 회사에 깊이 관여했다고 해서 의견이 분분한 것 같은데, 김 목사도 역시 신자들에게 돈 버는 것과 돈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는 생각에서 이런 데까지 나간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주로 지성적 교회에서 행해지는 윤리적 설교도 역시 설교의 현실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뒤따라 산다는 것을 그저 추상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이 사회 속에서 윤리적 삶의 실천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한국교회의 특징은, 특히 잘 나가는 교회의 특징은 부와 윤리에 있다 하겠다.
위로설교는 설교의 전달 방식이라는 점에서도 상당히 적극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설교자의 일방적인 선포가 아니라 청중 중심의 전달방식이 개발되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정신발달, 상담학, 커뮤니케이션 이론이 동원된다. 어떤 교회의 예배는 거의 열린 음악회나 연극처럼 연출에 의해서 진행된다. 확실한지 모르지만 온누리 교회가 이런 유형의 교회를 대표하는 것 같다. 이런 교회가 잘된다는 소문이 있는 탓인지 요즘 전국의 모든 교회들이 이런 찬양집회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이런 찬양집회는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고조시킴으로써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역할을 한다. 여러 관현악기와 건반악기, 그리고 타악기의 연주와 목소리 좋은 전문 찬양 사역자의 노래, 그리고 중간 중간에 혀 굴리는 발음으로 “여러분은 싸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자극적인 멘트로 이어지는 찬양집회는 사람들의 심리를 무장해제 시키기에 안성맞춤이다. 거기에다가 깔끔한 유니폼을 차려입은 청소년들의 춤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는 흡사 노인들을 대상으로 건강식품을 파는 약장사들이 약을 팔기 전에 유사 연예인들을 등장시켜 기분을 고조시키는 것과 같다. 우리와 약장수들의 차이는 우리 쪽이 약간 고상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밖에는 없다. 어쨌든지 이런 형식의 찬양집회와 위로설교가 전통설교의 답답함과 고지식함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위로설교의 함정
그런데 이러한 ‘위로설교’가 과연 신자들을 제대로 위로하며, 더 나아가서 그것이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합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위로설교에는 몇 가지 함정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도구화’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한다는 명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일종의 도구로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은 사람들을 이런 방식으로 위로하는 일에 굳이 기독교의 복음이 나설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전문적인 사람들이 많다. 프로이트와 융의 무의식연구로부터, 동양의 기수련, 음악 쎄라피 등, 온갖 인간학적 방법론이 개발되어 있다. 이들은 인간의 생체적, 심리적, 사회적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인간성이 회복될 수 있는 방식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런 요소들은 복음전파에 약간의 참조사항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님나라보다도 이런 것들이 우리의 목회와 설교에서 핵심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은 본말이 바뀐 현상이다.
다른 하나는 값싼 위로설교는 인간을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전혀 위로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그들이 그런 극히 현대적 문화방식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참된 의미에서 위로를 줄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위로가 계속해서 신자들의 삶을 성숙시켜나갈 수 있다면 그런 대로 긍정적인 것으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위 찬양집회나 그런 류의 설교를 통해서 얻은 위로는 일반 사람들이 열린음악회 공연장에 가서 얻는 위로나, 또는 노래방에 가서 실컷 노래를 부르면서 경험하는 위로나 별로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세상의 방식은 남녀의 애절한 사랑이 주제이고,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주제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런 주제와 상관없이 인간의 주관적 경험이 핵심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같은 현상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얻는 위로는 늘 반복되어야만 유지된다.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된 사람은 그런 흥분된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다시 알코올과 마약을 복용해야 하는 것처럼 찬양집회나 위로 설교에서 느낀 감정을 유지하려면 그런 형식의 집회에 늘 따라다녀야 한다.  
셋째로, 전통적 설교의 대안으로 등장한 이런 현대적 감각의 위로설교는 전통 설교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극복을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서 찾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아주 ‘세속적인’ 시대정신에서 찾고 있다. 그런 태도는 현대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겠다는 일종의 ‘상품논리’이자 ‘대중추수주의’와 다른 게 아니다. 여기에는 청중을 중심으로 삼겠다는 발상이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을 포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복음의 정체성을 훨씬 강화시키는 게 아니라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사는 대중들’의 욕구에만 눈높이를 맞춤으로써 결국 복음의 역동성과 날카로움을 순치 시키고 만다는 위험성이 숨어 있다. 이런 사태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자주 발견된다. 청중의 요구에만 부응하는 거짓예언자들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반면에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만 집중해 있던 예언자들은 자주 따돌림을 당하곤 했다. 이런 점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청중의 반응에 따라서만 설교자를 평가할 수는 없다.
이렇듯 전통설교를 극복하려고 했던 위로설교가 자기 함정에 빠져 있다는 말은 그들이 전통설교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전통설교가 전하는 내용이 교리적이기 때문에 현실성을 담아내지 못한다거나, 또는 설교자의 전달방식이 이성적이거나 일방적이기 때문에 청중들의 참여를 끌어내지 못한다는 그 문제 제기는 너무나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전통설교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처방도 역시 지엽적인 것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기껏해야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그것도 돈이나 윤리에 연관된 문제를 다루거나, 청중들의 심리를 이용한 전달방식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

‘넘치는’ 자신감으로 선동하는 설교
그렇다면 전통설교의 근본문제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다가 자신들도 역시 똑같은 한계 안에 머물게 된, 다른 한편으로는 훨씬 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떨어져버린 위로설교의 근본문제는 무엇인가? 설교자들이 성서와 기독교 교리의 현실성(reality)을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고 있다는 것이 그 대답이다. 교회가 성서와 역사를 통해서 전승시켜온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해명이 기독교 교리라는 점에서 설교는 당연히 교리적이어야 한다. 그것 이외에 우리가 설교해야 할 더 이상의 것이 있을까? 문제는 설교자들이 그 기독교 교리가 안고 있는 인간과 세상과 역사와 하나님의 세계를 훨씬 심원한 깊이에서 풀어내지 못하고 그저 문자에 한정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청중들은 설교의 내용이 교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깊이가 없어서 흥미를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성서와 기독교 교리가 담고 있는 현실성을 풍부하게, 즉 인문학적 지평에서 풀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수사적 문제에 그렇게 집착하게 된다. 이는 곧 사이비 약장수들이 약 자체에 대한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또는 그것이 아예 없기 때문에 차력술이나 음담패설을 통해서 승부를 거는 것과 같다.
설교자가 성서와 기독교의 현실성을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한다는 말은 곧 설교자가 성서의 세계와 기독교 교리의 세계를 ‘모른다’는 뜻이다. 물론 일정한 수준의 신학훈련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세례를 받아야 하며, 종말에 마지막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알고 있다. 그 이외에서 성서에 관한 많은 정보를 알며, 기도와 찬송에 대한 훈련을 제법 쌓았으며, 나름대로 경건의 모양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런 내용들은 거의 기독교 신앙의 초보에 속하는 것뿐이다. 굳이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고 일반 평신도로 교회를 나가기만 해도 빠른 시간 안에 습득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한국의 평신도들이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별로 기대를 걸지 않는 이유도 목사의 설교가 열어내는 세계라는 것이 자기들이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범주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나는 어떤 목사 모임에서 ‘부활’이 무엇인가, 하고 그들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대다수의 목사들은 우물쭈물 할 뿐이었다. 부활이 부활이지 뭐 다른 게 있느냐, 라는 식이었다. 이런 목사들은 아마 부활절 때마다 “예수님이 부활했습니다. 우리도 부활합니다. 믿습니까?”라는 식으로 설교할 것이다. 또는 부활의 실존적 의미만을 부각시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심판하시며 새로운 세상(에온)을 일으키실 하나님을 믿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우리가 약장수처럼 들은 풍월로 부활을 선포하거나, 신학책에서 얻은 정보에 근거해서 희망이라는 실존적 결단을 부추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들은 풍월로 전달되는 말은 우리를 순간적으로 흥분시키기는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면 속았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실존적 결단은 어떤 감동을 받고 기독교적인 교양을 갖추게는 하지만 여전히 영적 실체를 깨우치게는 못한다. 우리의 설교가 성서를 해석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예수의 무덤이 비었다’는 성서의 선포 방식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부활사건은 결국 보편적 생명과의 연관성에서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의 인문학과 자연과학에서 논의되는 생명 현상을 바탕에 깔고 다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개의 설교자들은 현대의 생명담론과 대화할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매번 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만 되풀이하게 된다. 결국 이 말은 설교자가 부활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는 뜻이다.
사실 설교자가 부활만 모르는 게 아니라 종말에 대해서도, 하늘에 대해서도, 계시에 대해서도, 더 근본적으로 성령과 하나님에 대해서도 모른다. 모르니까 결국 보험회사 세일즈맨처럼 일러준 말만 되풀이 할 뿐이다. 이런 설교가 지루하지 않을 까닭이 있을까? 그런데 대개의 설교자들은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으며,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설교자는 늘 설교에 부담을 안고 남의 설교집을 기웃거린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 우리는 결국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설교에 익숙하게 된다. 실제로는 모르지만 알고 있는 같은 착각에 빠짐으로써 ‘넘치는’ 자신감으로 설교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설교자가 아니라 선동가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격다짐 식으로 전통설교에 머물러 있는 목사나 발 빠른 위로설교를 추구하는 목사 모두에게 해당된다. 앞의 사람들은 복음을 교리의 문자에 한정시키는 반면에 뒤의 사람들은 복음을 문화에 적응시킬 뿐이지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안고 있는 생명과 그 역사의 깊이를 간과한다는 점에서 똑같다.

신학공부가 필요 없는 설교(목회)풍토
목사가 기독교의 근본을 모르면서도 이런 사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데에는 몇 가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은 신학교의 교육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내 경우를 보더라도 신학대학원 졸업 후의 내 정신세계는 설교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주일학교와 학생회, 대학 청년부를 지도하긴 했지만 그건 단지 어떤 조직을 관리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성서공부도 단지 성서의 정보를 알려주는 것에 불과했고, 설교도 교회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거나 윤리적 기준을 제시해주는 것에 불과했다. 신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보는 것을 말한다”는 차원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내가 받은 신학교육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현상은 아마 요즘의 신학생들에게도 역시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신학교를 졸업하면 신학공부와 아예 담을 쌓고 교회를 관리하는 기술에만 전력투구한다는 데에 있다. 목회 현장에 나온 다음부터는 신학책을 읽지 않으며, 더구나 인문학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실제적인 차원에서의 영성훈련에도 게으르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교회 운영에 집중됨으로써 신학적 사유와는 거리를 둔다. 이렇게 신학적 사유와 단절되는 이유는 교회의 과중한 업무 탓도 있기는 하지만 좀더 현실적으로는 목회가 신학적 사유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개업한 의사들의 경우와 비슷하다. 일단 전문의가 된 의사들은 개업한 후에 자기 전공 분야를 공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의원을 꾸려갈 수 있다. 자기들이 진찰해야 할 환자들은 기껏해야 감기, 당뇨, 복통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문지식이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환자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쓴다. 목사들의 목회와 설교도 이런 정도의 구조에서 굴러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의사와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단지 사람의 육체적 생명을 기계적으로 다루는 입장이지만 우리는 훨씬 복합적인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학문(신학)을 감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부분에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이 그렇기도 하고 본인들의 정신세계가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이중의 한계 안에서 그저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 설교자가 선택해야 할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무언가 좀 알고 설교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이 되기 위해서 어떤 속성코스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여기에 어떤 왕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신학생부터 꾸준하게 공부하고, 영적인 훈련을 하고, 아울러 주변의 인문학을 공부하는 과정이 탄탄하게 진행되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미 이런 과정을 충분한 준비 없이 지내버린 우리 설교자들이 이제라도 설교의 현실성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전통설교의 답답함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로설교의 가벼움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의 현실성을 담는 길
이는 곧 성서와 기독교 교리의 현실성을 청중들에게 풀어내는 이 설교 행위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분야가 무엇인지 명백하게 인식하는 작업이다. 그것에 대한 훈련이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전통설교나 위로설교나 결국은 기독교의 중심에 천착하지 못하고 사이비적인 것에 매달리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조직신학적 훈련이다. 조직신학이야말로 성서와 설교 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 왜 그런가?  
일반적으로 목사의 설교 행위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준비된다. 설교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는 두 경우가 있다. 하나는 성서를 읽다가 우연하게 설교의 영감이 떠오르는 경우와,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있고 이에 해당되는 본문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이든지 설교자는 제일 먼저 본문 주석으로부터 시작한다. 주석은 본문의 배경과 편집과정 등, 그 본문과 연관된 여러 요소들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얻어진 본문의 주제를 청중들의 상황에 맞도록 적용시키는 것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설교라고 한다. 설교자의 능력에 따라서 좋은 예화를 사용한다거나 아니면 수사학적 감각을 보충할 수 있다. 설교를 어떻게 치장하든지 이런 설교의 핵심은 성서주석으로부터 직접 설교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석과 설교 사이에 반드시 거쳐야할 단계가 있는데, 그것이 곧 조직신학이라는 여과장치이다. 이런 조직신학적 작업을 통해서 정제되지 않고 성서주석에서 직접 설교로 진행됨으로써 설교는 양극단으로 치우치게 된다. 한편으로 현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텍스트만 강요되든지, 아니면 성서의 현실성이 배제되고 단지 오늘의 청중이 현실로 인식하는 것들만 설교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텍스트가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설교는 앞서 설명한 전통설교이며, 독자들의 현실인식만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설교는 위로설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분명히 텍스트와 컨텍스트는 직접 연결되는 게 아니다. 즉 성서주석에서 오늘의 삶으로 직접 연결되는 게 아니라 그 중간에 해석(hermeneutic)의 과정이 필요하다. 성서와 기독교 교리가 이미 그런 해석을 거쳤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풀어내야 할 설교도 역시 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이런 해석이 곧 조직신학에 의해서 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성서신학이 이런 해석의 기능을 감당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성서학은 여전히 주석에 머물 뿐이다. 본문 형성이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거기서 사용된 용어가 어떤 어원이 있는지, 이 본문이 담지하고 있는 삶의 자리가 무엇인지, 그 구조는 어떤지에 대해서 고찰한다. 반면에 조직신학은 성서가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성서의 집필자나 그 이후 신학자들이 그 당시의 철학적 사유와 더불어 논의해온 사상적 흐름을 근거로 해서 성서를 체계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예컨대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서에 없지만 초기 기독교는 수 백년간의 역사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그렇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이런 삼위일체론적인 시각을 충분하게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설교를 하게 되는 경우에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발생한다. 하나님을 흡사 산신령이나 옥황상제쯤의 존재로 생각하거나, 성령을 인간이 기술적으로 다룰 수 있는 어떤 신통력쯤으로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 종말, 계시 등과 같은 주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도그마가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변화, 발전되어 왔는지, 그리고 오늘의 인식론과 존재론적 바탕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어야만 우리는 성서의 현실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런 작업은 주로 조직신학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서주석은 늘 조직신학의 검토를 받아야만 한다. 물론 거꾸로 조직신학의 체계도 성서학적 타당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런데 설교 행위에서 주석작업은 당연시되고 있는 반면에 조직신학은 별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설교행위의 일탈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직신학이 합당하게 작동되지 않음으로써 벌어지는 설교 행위의 일탈은 아주 명백하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 설교가 기독교의 근본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시켜주는 도구로 전락한다. 우리의 지난 몇 십년 간에 걸친 경험에서 확연히 드러나듯이 기독교가 흡사 반공이데올로기의 첨병인 것처럼 설교가 행해졌다. 일전에 ‘뉴스앤조이’를 통해서 남서울은혜교회 홍 아무개 목사의 설교를 읽었는데, 나는 그렇게 열려진 시각을 갖고 있는 분들도 여전히 반공이데올로기의 포로로 남아 있다는 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분이 ‘남북나눔운동’의 실무 책임자로 일한 지난 10년 동안 북한에 계속해서 흉년이 든 것을 보고 하나님의 심판 운운했을 뿐만 아니라, 6.25 전쟁 때 우리가 당한 일을 생각하면 이가 갈릴 정도라고 토로하셨다. “그러고 보니 제가 북한에 관심을 가진 10년 동안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매년마다 물난리 아니면 한발로 온 땅이 황폐해졌다는 소식만 거듭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원수 갚은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육이오를 생각하면 빼앗긴 것이 많아서 이가 갈립니다. 전쟁의 무수한 고통을 우리가 당했습니다.” 만약 홍 목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종말론적인 희망과 신정론에 대해서 좀더 진지한 생각이 있었더라면 그런 말씀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즘 여러 교회들이 경쟁적으로 복지관을 세우면서 사회복지에 대해서 강조를 많이 하고 있는데, 이런 경향도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지평과 교회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종의 해프닝이다. 하나님 나라에 뿌리를 둔 교회는 국가가 감당해야 할 일들을 독점함으로써 자족할 게 아니라 더욱 교회의 본질에 투철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예컨대 교회 일치에는 소극적이면서 사회복지에 힘을 쏟는다면 중요한 일을 제쳐놓고 사소한 것에 매달리는 격이다. 이처럼 신학적 인간론, 계시론, 창조론, 성령론, 화해론, 종말론, 구원론 등이 설교 안에서 충분하게 녹아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인간 망상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충분한 조직신학적 훈련이 없음으로써 설교의 방향이 일탈하게 되는 경우는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이만 접어두려고 한다. 다만 이런 일탈이 조금 더 과격해지면 아주 간단하게 사이비가 된다는 점만은 잊지 말아야겠다.

설교자의 자유를 위하여
이제 오늘의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성서와 기독교 교리는 나름의 고유한 세계를 확보하고 있다. 탈레스가 만물의 본질을 물이라고 보았고,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이라고 보았으며, 노자와 장자가 도라고 보았듯이 기독교는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인식하고 믿는 공동체이다. 특히 역사적 실존 인물인 예수에게 절대 존재인 하나님이 계시되었다고 믿는다. 문제는 탈레스가 만물을 물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 자체를 그대로 따라서 외친다고 해서 우리가 탈레스 사상을 아는 게 아니라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런 인식에 도달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스테레오 타입으로 외친다고 해서 우리가 기독교를 아는 게 아니라 어떤 현실성에 근거해서 그런 인식에 도달했는지를 알고 믿어야만 한다. 조직신학은 바로 이런 기능을 감당한다. 세례, 교회, 죽음, 부활 등, 이런 기독교의 신앙적 담론에 근거와 리얼리티를 확보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준비가 된 설교자는 기독교의 토대를 알기 때문에 전통설교의 특징인 텍스트에 문자적으로 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로설교의 특징인 청중에 휘둘리지도 않고 자기의 영적인 눈에 드러나는 길을 따라갈 뿐이다. 이렇게 길을 가는 사람의 설교는 자유롭다. 어떤 방식으로 설교하든지 진리가 열어주는 길을 따라 가기 때문에 자유롭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예수님께서 성령이 바람처럼 임의로 분다고 말씀하신(요 3:8) 맥락과 비슷하다. <기상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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