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이야기에 밀려난 하나님 이야기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

타고난 이야기꾼
청송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의 억양이 그대로 살아있는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와 충청도 사람들마저 두 손 들 정도로 느린 말투만 본다면 김진홍 목사(이하 ‘김 목사’)는 청중을 대상으로 설교해야 할 사람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청중들은 그의 이야기 안으로 아주 쉽게 끌려들어간다. 그의 설교를 비평하겠다고 총대를 멘 평자도 그의 설교를 듣는 순간에 그런 강한 흡인력을 경험했다. 어떤 설교자처럼 미국 사람들의 예화를 부풀림으로써 청중들을 자극하거나, 개그맨 저리가라 할 정도로 웃기는 데 초점을 두거나, 소녀 취향의 센티멘털리즘에 호소하지도 않는 그의 설교가, 또는 수려한 외모로 기교를 부리거나 목사의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는 것도 아닌 그의 설교가 청중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김 목사의 설교가 뿜어내는 대중 설득력이 다른 설교자들과 구별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그가 대중을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의 이야기를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쯤이야 웬만큼 설교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주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겠지만, 이건 보통의 내공으로는 되는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전달해야 할 어떤 메시지가 명확하다고 해도 청중들의 반응에 따라서 흔들릴 때가 많지만 김 목사는 그런 일이 전혀 없다. 유명한 대중 설교자들도 대개는 자기가 하는 말과 자신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말해 놓고 그것으로 곧잘 흥분하거나, 또는 청중의 반응에 따라서 의기소침해지지만, 김 목사는 그런 상황과 아무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갈 줄 안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짐짓 여유를 보여도, 청중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아도 그들은 여전히 이야기의 기술에 머물러 있는 반면에, 김 목사는 이야기의 도(道)에 들어가 있다.
그의 설교 행위는 흡사 베를린 필의 지휘자였던 카라얀의 지휘 모습과 비슷하다고나 할는지.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고 구도자처럼 음악에만 집중함으로써 신비로운 카리스마를 풍기던 카라얀처럼 김 목사는 설교의 시작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림 없이 동일한 템포로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설교자라는 말이다. 누가 이걸 흉내 낼 수 있겠는가?
그는 어떻게 그런 경지에 들어간 것일까? 김 목사는 어려서부터 이런 이야기꾼으로서의 소질이 뛰어났던 것 같다. 동네꼬마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대신 군것질거리를 얻기도 했으며, 대학생 시절 잠시 돈벌이로 나섰던 화장품 외판에서도 그는 특유의 입담으로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아래와 같은 그의 회고에 따른다면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은 이미 대학교 시절에 공인된 셈이다.

각 과별로 메이 킹 후보 한 사람씩을 뽑아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한 명의 킹을 뽑았다. 방식은 후보자들에게 10분 동안 장기 자랑을 하게 한 후 인기투표로 결정했다. 나는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거듭 메이 킹으로 뽑혔다. 비결은 장기자랑에 나갔을 때 전교생을 웃기는 솜씨였다. 내가 마이크를 잡고 온갖 잡설로 웃기고 나면 너무 웃어서 다음날 뱃가죽이 아프다는 여학생들도 있었다.(황무지가 장미꽃같이 1권, 111쪽. 이하 ‘황무지’).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타고났다고 해서 누구나 김 목사와 같은 경지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삶의 경험들이 그 내면세계에 켜켜이 쌓여있었다. 그가 30대에 뛰어들었던 청계천 판자촌 빈민선교, 40대의 정열을 쏟아 부었던 남양만의 농촌세우기, 50대의 공동체 운동이 모두 인간 삶의 극한 경계에까지 이른 경험들이었다. 그런 치열한 삶을 통해서 김 목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유기적으로 묶어내는데 성공했다. 평자가 그를 다른 설교자들과 품격이 전혀 다른 이야기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요소들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 수는 없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의 온갖 노하우를 습득했다고 해서 이런 능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을 자신의 삶에 체화한 김 목사는 이 시대의 독보적인 이야기꾼 목사이다.

영웅 이야기
이런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인지 김 목사의 설교에는 우리를 가슴 뭉클하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설교만이 아니라 강연이나 자서전도 거의 이런 사람들의 휴먼 스토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청중들이 그의 말과 글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아마 이런 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들려주는 이런 이야기에는 묘한 특징이 담겨있다. 그것은 곧 이야기의 대부분이 영웅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다른 목사들의 설교에도 영웅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김 목사의 경우에는 이런 경향이 아주 노골적이다.
평자는 김 목사가 해외집회로 교회를 비운 8월 한 달을 제외하고, 지난 7월31일부터 11월6일까지 김 목사가 두레교회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 11편을(이하 주일설교는 월일로 표기함) 꼼꼼히 읽었는데, 김 목사는 그 짧은 기간에 대략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거명했다. 모택동, 공자, 부처, 맥아더 장군, 몽고의 국무총리, 김활란, 황신덕, 김좌진, 김지하, 크롬웰, 나폴레옹, 루터, 존 웨슬리, 어거스틴, 톨스토이. 매일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이메일로 배달된다고 하는 ‘오늘의 묵상’에도 영웅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본 정객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본받고 싶은 인물로 제시하기 까지 한다.(오늘의 묵상 6월8일). 이처럼 그가 존경하는 인물들은 대개가 자신의 안일을 포기하고 나라를 토탄에서 구한 위인들이다. 예컨대 “지금같이 어려운 시기에 옛날의 김구 선생이나 조만식 선생이나 안창호 선생 같은 분, 한 분만 있어도 나라가 달라질 것”이며, 그런 인물들이 없기 때문에 “백성들만 골병드는 것”이라는 주장을(비젼 있는 교회, 40쪽, 218쪽 참조. 이하 ‘비전’) 우리는 그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특징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 설교를 한 편 보자. 10월23일 주일에 행한 설교 “이스라엘의 남은 자”(습 3:12, 13)에서 김 목사는 아래와 같은 인물들을 차례대로 소개했다. 죽을병에 걸렸다가 15년 생명을 연장 받았다는 히스기야, 아이 성 공격에 실패했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다시 성공했다는 여호수아,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가 빌립보서 4장13절을 읽고 영감을 얻은 후 청교도를 모아 영국을 새롭게 일으켰다는 크롬웰, 죽을 때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 위대했다.”고 고백했다는 나폴레옹, 히스기야의 아들로서 나라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는 므낫세, 그리고 종교개혁의 선봉자인 요시아를 키워낸 스바냐 선지자가 그들이다. 이런 인물들 중에는 본문과 연관된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훨씬 많았다. 한편의 설교에 이렇게 많은 위인들이 등장한다는 건 그의 설교가 영웅 지향적이라는 사실의 반증이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설명한다면, 나는 그의 설교를 들을 때마나 왼쪽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단 전쟁 영웅의 연설을 듣는 것 같다. 그의 설교와 강연에는 영웅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그것과 어울리는 자신의 신앙적 무용담이 가득하다는 말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설교할 때 개인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설교와 설교자, 복 있는 사람, 머리말), 이와 달리 김 목사는 넝마주의를 하던 밑바닥 인생부터 시작해서, 백악관 조찬기도회 연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내놓을만한 경험도 많고, 그런 의욕도 강하다. 영웅들에게 심취하는 사람들은 간혹 영웅과의 동일시를 현실로 경험하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한일장신대 신약신학 교수 차정식은 김 목사의 설교를 다룬 “개량된 복음주의의 행로”라는 글에서 청중들이 그의 ‘영웅적 낭만주의’ 요소에 빠져든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 51).  
어쨌든지 그날의 설교가 워낙 빼어난 이야기꾼의 설교이기 때문에 나는 40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기는 했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설교에서 바로 이게 문제였다. 그가 전달한 그 많은 영웅들이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런 이야기가 나의 영성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내 마음이 닫혀 있다는 말인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그의 설교에는 흡사 무협지처럼 영웅들만 설치고 있지 하나님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는 게 그 대답이다. 하나님 이야기가 없는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본인이야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겠지만 실제로는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 이야기가 과잉 생산됨으로서 결국, 좀 심하게 말해서 하나님은 골방 늙은이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평자가 이 자리에서 한국교회의 개혁, 공동체 운동,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김 목사의 설교를 빈정대려는 건 결코 아니다. 김 목사가 국내외적으로 이룬 목회적, 사회적 업적에 대해서는 젊은 시절 <새벽을 깨우리로다>를 단숨에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평자도 후배 목사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생각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이룬 업적이라는 건 순전히 껍데기 같다는 엄정한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영적인 세계로 끌림 받는 게 곧 설교가 아닌가. 바로 이런 대목에서 길을 잃으면 목회의 업적이 많은 설교자들일수록 설교의 기초에서 멀어질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나님 망각
내가 보기에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등등,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앙의 영웅들을 청중들에게 전달하거나, 또는 교회 밖의 수많은 위인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는 설교는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파급 효과를 즉시 얻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의 영인 성령과의 만남에서만 획득될 수 있는 영성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조금 더 비판적으로 말해서, 영웅이 극대화한 설교는 청중들을 자기 망상에 빠지게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심한 자학이나 무력감에 빠지게 할 개연성이 높다. 성서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적 영웅을 설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는 처음부터 신학공부를 다시 해야 하고, 새로운 눈으로 성서를 다시 읽기 시작해야 한다. 성서는 하나님 이야기이지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 어떤 설교자가 요셉 설화를 본문으로 “요셉처럼 꿈과 비전을 갖자!” 하고 설교했다면 그는 성서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이다.    
불행하게도 오늘 한국교회의 강단에는 이런 설교가 남용되고 있다. 이건 설교자만의 책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신자들도 사람의 가능성을 자극하는 그런 설교에만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결과적으로 오늘 우리 강단에서 하나님 이야기는 단지 구색 맞추기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형이상학에 기울어진 서양 철학의 상황을 ‘존재망각’이라고 표현했던 하이데거의 말을 빌린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와 설교에 나타나는 이런 현상은 곧 ‘하나님 망각’인 셈이다.  
연중무휴 편의점이나 세상살이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빠짐없이 구비해 놓은 대형할인마트처럼 새벽기도회로부터 시작해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집회가 열리고 있는 한국교회에 하나님이 망각되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런 종교적 열정의 이면에는 그런 현상이 매우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교회가 거의 프로그램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설교도 역시 도덕성 회복이나 나라 살리기 차원의 운동에 머물러 있고, 결정적으로 신학무용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게 이에 대한 반증이다. 영성마저 방법론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는 곧 신앙생활이 인간학으로 떨어져버렸다는 의미이다. 내가 여기서 설교의 인간학적 토대를 무시하는 의미에도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세계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에 인간 삶의 흔적에 대한 공부라 할 인문학적 소양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설교는 인간의 책임감과 결단보다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직면하는 데서부터, 바르트 식으로 말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Deus dixit!)는 사태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안타깝지만 오늘 우리의 설교에는 바로 이 근본이 약화되고, 대신 감성적이거나 도덕적인 가치들과, 심지어는 주술적인 욕망으로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왜 이런 사태로 치닫고 있을까?
그 답은 우리가 교회를 단지 종교적 업적의 기회로 여긴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지난 2천년 동안 교회는 이런 유혹을 계속 받아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둘째 이반의 입을 통해서 그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실체를 고발한다. 그 소설에서 이반은 막내인 수도승 알료사에게 그 유명한 ‘대심문관’ 이야기를 전한다. 예수가 재림했다. 그는 초림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념하다가 구속된다. 어느 날 밤 정교회의 총대주교가 감옥의 예수를 찾아와서 이렇게 흥정한다. 당신이 예수라는 건 알겠소. 그러나 우리 교회는 더 이상 당신이 필요 없소. 우리가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까 당신은 안심하고 당신이 있어야 할 하늘나라로 가시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예수 없이도 운영될 수 있는 조직으로서의 교회, 결국 더 이상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없고 대신 자신들의 종교적 능력만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 당시의 교회와 오늘 우리가 확실히 다르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교회의 본질 회복과 개혁 문제에서는 김 목사가 평자보다 훨씬 예리하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 한국 개신교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를 준비하던 교계 지도자들을 찾아가 겁도 없이 따질 정도로 개혁 마인드가 투철했다. 100주년 기념대회 행사에 소요되는 100억 원을 대폭적으로 절약하고, 남은 돈으로 노동자, 빈민, 농민들을 위해서 쓰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빌리 그레함 목사를 주 강사로 초청하는 것을 비판했다는 건 그의 민족의식이 이미 그때부터 남달랐다는 의미일 것이다.

민족의 잔치에 빌리 그리함 목사는 왜 모셔와야 합니까? 민족의 잔치에 아직도 남의 힘을 빌리고 미국인 목사의 설교를 들어야 합니까? 100년 복음역사에 세계적으로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자랑스러운 주님의 참된 일꾼들이 있습니다. 강원도 탄광에 가면 막장에서 석탄가루 마시면서 복음 전하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낙도에 가면 서울대학교 나오고 대학원까지 나오고도 빗물 받아먹고 고구마 말린 것 먹어가면서 복음 전하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정금같이 나오리라, 131쪽. 이하 ‘정금’).

김 목사는 지금도 교회 개혁에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가 시무하는 두레 교회가 교회 건축을 준비하는 중인데, 그 교회에 어울리는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대략 150-200억 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20억 원으로 천막 교회를 짓고 나머지는 국가와 중국 선교를 위해서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 같다.(9월25일). 부동산에 집착하는 한국교회의 실정에서 두레교회의 선택은 신선하다 못해 기이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처럼 그는 평생 한국교회의 개혁을 화두로 삼고, 말과 실제 행동으로 본을 보였다.
누구나 본받아야 할 만큼의 역사의식과 도덕성과 개혁성을 확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김 목사의 설교가 생각 없는 목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망각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이다. 여기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이 놓여 있겠지만, 그게 사실인 것만은 분명하다. 좀 야박하다는 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평자는 그 사실을 까발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개혁성과 도덕성이라는 명분으로 설교의 근본이 훼손되는 현상은 그런 명분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문제보다 훨씬 심각하기 때문이다. 평자는 앞에서 영웅 서사의 과잉이 하나님 이야기를 밀어났다는 점을 짚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밀려난 현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따라가려고 한다.

“따로 국밥”
겨우 11편의 설교만 듣고 이런 현상을 정확하게 분석한다는 게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가 펴낸 설교집과 자서전 및 강연집들을 충분히 읽어두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그가 지난 2년간 매일 쓰고 있다는 ‘김진홍의 매일묵상’을 금년 1월부터 10월말까지 꼼꼼히 읽었는데, 이것도 그의 설교를 분석하는 이번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지혜와 훈련의 책, 잠언”(잠 1:7)이라는 설교는(7월31일) 하나님이 지혜를 주는 목적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긴다. 행복에 이른다. 진정한 성공에 이르게 한다.’ 이 설교에서 김 목사는 잠언 1장부터 24장에 이르기까지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인용하고, 이를 보충할 수 있는 다른 성서 구절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40분간의 시간을 채웠다. 설교 중간에 다니엘 이야기, 교회 건축 이야기, 모택동에 얽힌 설화, 본인이 남양만 생활에서 겪었던 일화를 곁들였다.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오면 무슨 말이든지 무게감이 더해지기 때문에 그곳에 모인 청중들은 큰 은혜를 받는 것 같았는데, 내가 보기에 이런 설교는 케리그마가 선포되어야 할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로서는 방향설정의 오류이다.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는 본문을 깊이 있게 해석하지 않고, 잠언서 전체를 개론적으로 설명하고 말았다는 것은 김 목사가 본문을 철저하게 외면한다는 의미이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9월11일)이라는 설교에서 김 목사는 옛날 신유운동을 하던 현신애 권사가 예수 만나는 꿈을 꾼 다음에 50억 원을 내놓았다는 이야기로 설교의 문을 열었다. 그는 본문(마 7:16-23)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네 가지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제시했다. 회개의 열매, 전도의 열매, 봉사의 열매, 성령의 열매. 앞의 세 가지 열매에 대해서 매우 일반적인 차원에서 설명한 다음에 그는 성령의 열매를 다시 갈라디아서 5장에 근거해서 훨씬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했다. 이 설교의 결론은 “열매 맺자”였다. 기독교 신앙에서 변증법적으로 작용하는 존재와 행위의 내면적 깊이를 진술하는 본문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도그마로 단순화되고 말다니, 얼마나 허무한 설교인가. 다른 설교자들에게서도 흔하게 발견되는 현상이지만, 단순히 열매를 맺어야 할 당위를 강조하고, 열매의 여러 형태들을 나열하는 데 머물러 있는 설교는 청중들이 아무리 은혜를 받는 포즈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성서 텍스트를 죽이는 설교이다. 설령 기독교인들에게 열매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열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열매를 가능하게 하는 영의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게 설교의 역할이다. 이런 대목을 눈여겨보지 않는 설교자는 창조적인 설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단순히 들은풍월에 안주하게 된다. 물론 김 목사가 설교한 내용 자체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텍스트의 깊이를 외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무의미한 설교가 되고 말았다.
“하늘이 열리며”(10월2일)라는 설교는 스데반의 마지막 순교 장면이 본문(행 7:54-60)이다. 스데반과 하늘의 열림이라니, 얼마나 기대되는 설교 주제인가! 그는 성서에 등장하는 깊은 영성의 사람이 모세와 엘리야와 이사야라고 설교의 운을 떼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엘리야에 관한 이야기를 그는 지루할 정도로 자세하게 전했다. 36분짜리 설교에서 31분을 주로 엘리야 이야기로 보낸 다음에, 스데반에 관한 본문에 대해서 한 마디 하는 것으로 설교를 끝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태도가 왜 그렇게 불성실한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그가 엘리야를 설교하고 싶었다면 그것에 해당되는 열왕기상을 본문으로 선택할 일이지 무슨 이유로 스데반 이야기를 본문으로 택한단 말인가. 그의 설교는 본문 따로, 설교 따로 논다. 김 목사가 청소년기를 보낸, 그리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하양과 인접한 대구에는 “따로국밥”이 유명하다.
내가 보기에 김 목사의 설교가 본문에 충실하지 않는 이유는, 김 목사가 성서 텍스트 안으로 들어갈 능력도 없으며, 그럴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하늘이 열렸다는 그 보도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그는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스데반은 지금 이 세상의 생명 형식과는 전혀 다른 생명의 세계로 옮긴 예수를 매우 신비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스데반의 영적 경험을 부활과 종말론적 생명의 신비와 연관해서 풀어낼 능력이 김 목사에게는 전혀 없었다. 성서가 말하는 하늘이 무엇인지, 그 빛과 소리의 메타포가 무엇인지 자신의 신학적 깊이와 영적인 깊이에서 해명하지 않은 채, 단순히 하늘이 열리는 걸 경험하고, 하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강변할 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서 텍스트 안으로 들어간 경험이 없는 사람은 스데반에 관한 본문을 놓고도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공과지도를 하듯이 엘리야의 일대기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귀중한 설교시간을 소비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본문의 변죽만 울리는 설교에 훨씬 큰 은혜를 받는 우리의 현실이 곧 하나님 망각 아니고 무엇이라는 말인가?
좀 더 냉정하게 말하면, 김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싶은 생각이 기본적으로 없는 것 같다. 9월25일 주일에는 설교형식을 떠나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편하게 하겠다고 말머리를 열었다. 이게 곧 설교에 대한 김 목사의 가장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그는 성서 텍스트에 의존하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싶어 한다. 그날 “경륜 있는 크리스천”(엡 1:9,10)이라는 설교에서 그는 본문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 30명이 중국의 미래를 위해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중에 한국교회를 벤치마킹 하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를, 그것도 남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매우 진지하게 전했다. 그 뒤로 천막교회 건축, 맥아더 동상, 몽고 교회지원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전하다가, 설교의 막바지에 이른 34분이 지난 다음에 느닷없이 역대상 12장18절을 중심으로 잇사갈 지파가 다윗을 중심으로 뭉쳤다는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난세에 깃발을 든 잇사갈 지파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레교회 신자들이 다음 대선에서 잇사갈 지파 같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뉴라이트 운동에 발 벗고 나선 자신을 밀어달라는 것인지 그 깊은 뜻을 누가 알랴.
그날 김 목사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으로 거론한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노 대통령이 어떻게 해야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가, 하고 조언을 청한 옛날 운동권 친구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어려울 것 없다. 대통령이 헌법을 지켜야 한다. 어떻게 하면 헌법을 지키지 않을까 꽁수 부리지 마라. 그러다가는 물러난 다음에 콩밥 먹는다.’ 나는 그 순간에 내 귀를 의심했다. 그는 청중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프로파간다’ 하는 이데올로그인가?

뉴 라이트?
위의 선정적인 대목만이 아니라 김 목사는 11편의 설교에서 집요할 정도로 노 정권을 비난하고 있었다. 노무현 때리기라는 유행을 따르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설교 시간이라는 걸 감안하면 좀 심하다싶다. 그 내용을 대충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노 대통령은 과거에 매달리고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지난 8.15 경축사에는 미래가 없었다(9월4일). 설문조사에서 이 나라의 경제와 정세가 위기라고 느끼는 국민이 70, 80%인데, 청와대만 괜찮다고 주장한다(9월25일). 맥아더 장군 동상 문제는 토론의 주제도 되지 않는 것이다(9월25일). 이 나라가 앞으로 2,3년간 어려울 것이다. 이 나라 지도자의 솜씨가 그렇게 되어 있다(10월2일). 친일만이 아니라 친북자도 밝혀야 한다. 여당 국회의원 중에 주체 사상가들이 있다.(10월9일). 현 정권은 왼쪽으로 치우쳤으므로 2007년에 교체해야 한다(10월9일). 국민이 남북의 잘못된 정권을 바꿔야 한다(10월9일). 평통 만화 공모전에서 반교육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10월16일). 요즘 사람들은 개혁에 짜증난다. 뭘 챙기려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혁한다는 사람이 참회가 없기 때문이다.(10월30일).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대해서는 서로 평가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김 목사의 그런 비난 자체에 대해서 평자가 왈가왈부할 생각은 전혀 없다. 목회에도 정신없이 바쁘신 분이 요즘 정치권에서 핫이슈로 등장하고 있는 ‘뉴라이트’라는 단체의 상임의장을 자임하고 나선 걸 보면 현 정권에 대한 그의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만 하다. 지난 11월7일에 열린 뉴라이트 전국연합 대회에서 박근혜 한나라 대표,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등, 한나라당에 연줄을 대고 있는 고위급 정치 인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축사를 했다. 김 목사의 정치력을 실감나게 하는 대목이다. 그들은 김 목사가 앞으로 한나라당의 후보를 지원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 같았다. 박근혜 대표는 그날 축사에서 한나라당과 뉴라이트의 길이 같다고 피력했는데, 이 발언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의 이심전심이 아닐는지.
우파, 그러나 도덕성을 상실한 올드라이트가 아니라 자기 개혁적이고 도덕적인 뉴라이트가 바로 김 목사의 이념적 스탠스다. 그런 우파의 시각으로 노 정권은 좌파라는 말이 된다. 과연 그 말이 옳은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하는데, 김 목사는 무슨 근거로 노 정권을 좌파라고 주장하는 걸까? 노 정권은 앞의 김영삼 정권이나 김대중 정권에 비해서 좌편향이라는 증거는 없다. 좌파는커녕 유럽의 온건한 사회당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금 이 나라는 소위 세계화의 첨병으로서 여전히 개인의 자유와 시장경제가 우선적인 가치로 작동하고 있고, 재벌들은 여전히 장사를 잘하며, 부의 양극화 현상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고, 미국의 요청으로 국군의 이라크 파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노 정권은 좌파라기보다는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실사구시에 근거해서 좌와 우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현실파라고 할 수 있다. 좌파다, 우파다 하는 이념 논쟁 자체가 무의미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노 정권이 토지공개념을 강력하게 도입하고, 부유세를 신설하고, 교육과 의료를 국가 예산으로 해결하고, 영구 임대주택 보급률을 50% 이상 끌어올리는 정책을 과감하게 펼쳤으면 좋겠다. 너무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비웃음을 당할지 모르지만, 나는 독일 SPD 전 당수였던 라퐁테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한다. ‘인간의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런 문제에서도 우선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분명한 방향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이나 차이를 두지 않고 똑같이 하루 일당을 주는 게 바로 과수원 주인의 뜻이라는 예수의 비유를(마 20:1-16) 굳이 들이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경쟁력보다는 생존권에 기초한 평등한 사회가 곧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그런데 김 목사는 전(全)지구적 경쟁구도를 강화하고 있는 신(新)자유주의에 줄을 서겠다고, 더 나가서 사람들을 그곳에 줄을 세우는 데 앞장서겠다고 깃발을 들었다.
그런데 2년 전만 하더라도 김 목사는 균평 잡힌 시각으로 이 사회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이영희 선생이 쓰신 책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와 비슷한 논조로 새겨들을 수 있는 아래와 같은 김 목사의 진술을 보자.

새가 좌·우 두 날개로 날듯이 한 나라와 한 사회도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가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갈 때 제대로 갈 수 있다. 그러니 보수와 진보가 싸우려 들지 말고 서로 의논하여 나라를 이끌어 나가자.(오늘의 묵상, 2003년 10월17일).

평자가 동의할 수 없지만 어쨌든지 현 정권이 왼쪽 날개라고 한다면, 그리고 제1 야당인 한나라당이 오른쪽 날개라고 한다면,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새는 중심을 잘 잡고 있는 형편이 아닐는지. 좌우 날개를 가진 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지금은 접으셨는지, 아니면 이 세상이 그렇게 달라졌진 것인지 궁금하다. 해방 이후 지난 60년 가까이 야만성의 상징인 ‘레드 콤플렉스가’가 대한민국의 정체였다는 사실은 민족상쟁과 분단체제라는 특이한 상황이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조금씩 합리성의 사회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약간의 혼란을 빌미로 뉴라이트라는 단체를 선도하겠다는 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할 목사로서 정체성 혼란이 아닐까 모르겠다.

북한인권 문제
지난 11월10일 오후 6시, 유엔에 상정된 북한인권 결의안 통과 염원 촛불기도회에 참석한 김 목사는 현 정권이 “북한 동포들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돌보지 않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이며 김정일 정권에 간접적으로 동조하는 반민족적인 정권임을 시인하는 것이다.”(크리스천신문 인터넷판, 11월11일)라고 주장하면서, “우리 정부는 유엔 총회에 상정된 북한인권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문했다. 이어 “어떤 권력이라도 인권을 짓밟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며 “한국교회가 북한 인권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그는 이미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 격한 어조로 비판한 적이 많다.

최근 북한에서 들려 온 슬픈 소식은 작업장에서 성경 한 장을 주머니에 넣고 틈틈이 읽던 한 젊은이가 발각되어 그로 인해 한 지하교회가 들통이 나게 된 일이다. 그 교회 교인들이 사형 당하고 수용소로도 보내지게 된 소식이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해방의 메시지가 꼭 필요한 땅이 우리들의 반쪽의 조국 북한이다. 북한 문제를 대할 때 동포들의 인권과 존엄성 그리고 민주화를 다루지 않는 모든 접근은 사이비다. 김정일의 독재 폭압정치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이요, 정책이다. (오늘의 묵상 9월6).

다층적으로 얽히고설키는 인간 역사의 묘(妙)를 충분히 직시하고 있음직한 김 목사가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만은 수구적인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 북한이 폐쇄된 체제인데다가, 오랫동안 생존 문제에 시달려온 집단이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에서 볼 때 상당히 심각한 인권 문제를 안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치가들이 아니라 지성적인 종교인들이라고 한다면 여기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을 놓치지 않고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선 북한 인권에 대한 정보는 대개 실체적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탈북자의 증언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한 가지이다. 물론 외국인 기자들이 전하는 크고 작은 실증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대한민국, 미국, 독일 등, 그 어디에도 인권 문제가 없는 나라는 없다. 다른 하나의 관점은 인권 문제를 그 나라가 처한 문화적, 역사적 정황 안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수천 년의 역사경험과 문명발전을 통해서 얻어진 인권의 인류 보편적인 기준들을 모든 나라들이 준수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대한민국이 국제적으로 반인권 악법의 대명사로 불리는 국가보안법을 분단체제라는 명분으로 여전히 유지하고 있듯이 이것 역시 오직 하나의 잣대로 강요될 수는 없는 게 아닐는지.    
그런데 북한의 인권 문제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김 목사가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비인간적 행위를 두둔하고 나선 적이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대만은 인신매매한 사람을 잡아서 비행기에 싣고서 높은 곳에 가서 밖으로 떨어뜨리는 방법을 사용해서 인신매매를 근절시켰다고 합니다. 좀 과감할 때는 과감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엉뚱한 데 과감합니다.(희년과 성령공동체, 172).

지난날 아프리카 독재 국가에서, 그것도 어쩌다가 있을 법한 이런 사건이 대만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지만, 그는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사실처럼 전달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렇다 하고 넘어가자. 나는 다만 김 목사가 대만과 북한을 이중 잣대로 평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 궁금할 뿐이지, 천부적 인권이 상황에 따라서 유보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는 데 반해서 요즘 우리 개신교회의 일부는 다시 7,80년대의 냉전체제로 돌아가는 것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게 마음에 께름칙하다. 심지어 서 아무개 목사는 평양의 봉수교회가 가짜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있으니, 의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개신교회가 어떻게 비칠지 답답하다. 다른 것은 다 접어두고 선교의 차원에서라도 좀 더 멀리 내다보면서, 좀 조용하고 지혜롭게 접근해주었으면 한다.

영웅은 난세를 즐긴다.
이렇게 말하다보니 김 목사의 뉴라이트 운동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확실하게 드러난 셈이다. 김 목사가 설교시간에 언급했듯이(10월9일) 남한 정권과 북한 정권을 갈아치우는 게 그들의 목표인 것 같다. 이미 오른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왼쪽으로 보일 테니까, 아무리 중심으로 돌아서라고 말려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매사에 상대를 좋게 여기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극단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하며(황무지 2, 167), 나쁜 건 눈감아주고 좋은 건 추어주면 사람은 좋은 쪽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는(9월11일) 김 목사가 이런 문제에서는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처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평생 눈물과 땀으로 한국교회 개혁과 빈민선교와 농민운동에 헌신했으며, 이제 은퇴를 준비해야 할 그 나이에 김 목사가 비장한 자세로 또 하나의 큰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이유를 말이다. 과연 지금이 독재타도를 외치던 70,80년대와 비슷하다는 말인가?
내가 보기에 지금은 명실상부한 탈권위주의와 합리주의적 민주의 시대로 패러다임 쉬프트가 진행되는 국면이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여전히 수출은 잘 되고, 주식 지수도 괜찮고, 그래서 그런지 외국의 국가신용평가 기관들도 우리의 신용등급을 높은 쪽으로 조정해가고 있는 중이다. 더구나 북핵 위기도 시나브로 해결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개성공단을 중심으로 남북경협도 속도를 높이고 있다. 물론 부정적인 시각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들은 정치, 경제적인 차원에서 책임 있는 사람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야 할 일상적인 것이지, 선악을 다투는 ‘제로, 섬’ 게임의 대상은 결코 아니다.
나는 글머리에서 김 목사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과 그 이야기가 주로 영웅에 집중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바로 여기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영웅은 험한 시절이 만든다. 태평세월에는 영웅이 필요 없다. 그래서 난세를 만나지 못한 불행한 영웅은 난세를 만들고 싶어 한다. 크롬웰과 나폴레옹을 자주 언급하시는 김 목사는 바로 그것을 꿈꾸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말꼬투리 잡는다는 비판을 각오하고, 김 목사가 설교 시간에 언급한 한 마디를 인용해야겠다. 김 목사는 9월4일 “해방신앙”이라는 설교 끝부분에서 ‘나는 성격상 지루한 건 못 참는다. 달밤 체조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 ’ 다양하고 신바람 나는 일이 있어야 인생사는 말이 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이런 발언은 본인의 속내를 정확하게 내보인 것이다. 그는 밋밋한 일상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이었다. 영웅적이라고 하면 영웅적이라 할 수 있는 그런 기질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역사를 새롭게 만든다. 김 목사의 지난날은 분명히 이런 긍정적인 영웅의 면모를 보였다. 이미 청년시절에 빈민선교를 위해서 그는 전액 장학금이 보장된 미국유학과 교수자리를 포기했으며, 심지어 가정생활까지 포기했다. 미국 의회 조찬기도회 책임자가 남양만으로 찾아와 2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제의했을 때 그는 거절했다.(황무지3, 48이하). 남양만에서 시골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 3천명 교인이 모이는 교회가 그 당시 김 목사가 받던 월급의 일곱 배를 제시하며 청빙했지만, 그는 거절했다.(비전 147). 1974년도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중에 창문으로 날아든 한 쌍의 비둘기를 보고 붙여준 이름을 훗날 두 아들에게 주었는데, 백성을 사랑한다는 뜻의 ‘민애’와 백성을 깨우친다는 뜻의 ‘민혁’이라는 이름이 그것이다.(황무지 2, 211). 그는 “내 경력에 군 경험이 빠지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고 말할 정도로(황무지 1, 165) 늘 나라 걱정이 많다.

결론적으로 내가 정치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도산 안창호나 백범 김구 선생처럼 나라를 지키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유화, 선진화 달성에 기여하겠다고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뉴라이트 운동이 일어나고 저의 소신과 맞기에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4월19일, 두레교회 홈페이지, 인터뷰 기사 중에서).

“인간에게 최고의 도덕은 애국심이다.”는 나폴레옹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김 목사는 안창호, 김구, 장준하, 이순신, 서선대사(오늘의 묵상, 10월15일), 그리고 한용운처럼(오늘의 묵상 11월8일) 애국자가 되고 싶은 것 같다. 아니 그는 이미 나라를 누란(累卵)에서 구하겠다고 나선 애국자다. 애국심에 대해서는 뭐라 딱 잘라서 할 말은 없지만, 목사가 이념적인 문제에 구체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그러나 김 목사가 이미 그쪽을 선택했으니, 어쩌겠는가? 다만 불안한 마음으로, 그 선택이 민족을 향한 김 목사의 순수한 열정이기를, 그래서 우리 후손들에게 좋게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글이 설교비평이면서도 상당한 부분에서 어설픈 정치평론이 되고 말았다. 독자들의 용서를 구하면서, 이렇게 갈무리하겠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김 목사가 말하듯이 영웅과 애국지사를 키우는(비전 214) 단체가 아니라, 깨어있는 영성으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그래서 영웅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민족과 세계를 구원하겠다는 야망과 망상을 접는 날, 우리 교회는 종말론적 메시야 공동체로서 발걸음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라나 타!(고전 16:22).
<기독교사상, 2005년 1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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