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신앙의 은폐된 폭력성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

소년의 꿈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세상살이의 온갖 시련을 겪던 한 소년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이후 어린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에 빠져들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열세 살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은혜 속에 사는 신비를 체험하며 살았다. 밥을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좋고, 판잣집에 살아도 놓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도 괜찮았다. 공납금을 못 내도 아무 근심 걱정이 없었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천국 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그만큼 은혜는 좋은 것이었다. 은혜 충만은 내 몸과 마음을 주장했고, 그 충만한 은혜 덕에 내 몸과 마음은 빛이 났다.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 두란노, 2005년. 이하 ‘무릎’)

중학교 입시준비에 모든 힘을 쏟아 부어야 할 그 시기에 이 소년은 한강 모래사장에서 열리는 부흥회를 쫓아다녔으며, 철야기도를 했고, 은혜를 받으면서 “눈물, 콧물 흘리며 밤새 회개기도”를 드리곤 했다. 학급에서 노래 부를 기회가 되면 찬송가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318장)와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186장)를 부를 정도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심취해서 살았다. 그때부터 친구들은 이 소년을 ‘정 목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소년이 바로 현재 수영로교회의 담임이신 정필도 목사님이시다.(이하 ‘정 목사’)
평자는 정 목사의 간증을 담은 책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를 읽으면서 그는 타고난 전도자이며, 설교자이고, 목회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 불과한 소년 정 목사는 “우리 반 친구들 전원이 예수 믿도록 전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친구들을 교회로 데리고 갔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이 직접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이 소년은 그때부터 야무진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내가 이 나라 백성들을 몽땅 예수 믿게 해야 되겠다.”(무릎 32)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늘 그렇듯이 그의 목표도 원래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었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 가장 큰 낙이요, 기쁨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결국 “돈 잘 버는 판검사가 되기보다는 온 나라 사람들을 예수 믿도록 하는 목회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이렇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나는 하나님께 칭찬받는 목사가 되겠다. 그러기 위해서 학교를 갈 수 있다면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를 나온 뒤에 신학교를 가서 목사 안수를 받겠다.(무릎 41)

이 소년은 자기의 계획대로 어려운 형편에서도 경기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급기야 서울대학교까지 졸업한 후 총신대학교 신대원을 나왔다. 그가 정식 교회 사역자로 나서서 처음 맡은 부서는 학생회였는데, 60명에 불과했던 중고등부를 3개월 만에 200 명 이상의 학생회로 키웠다.(무릎 114) 공군 군목 시절 일월산에 있는 부대의 모든 장병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급기야 1975년 6월1일 집사 두 가정, 여 전도사 한 분과 함께 개척한 수영로 교회를 부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 초등학교 6학년 소년의 복음을 향한 열정과 꿈이 이렇게 큰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을 보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정 목사에게 딱 들어맞는 것 같다. 민족복음화의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 50 여년이 지난 오늘도 정 목사는 그 꿈을 접지 않았다. 수영로교회 안에 1만 개의 소그룹을 만들고, 5백만 부산시민에게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50만 영혼을 책임지며, 5천 명의 해외 선교사 파송을 21세기의 비전으로 제시하면서, 오늘도 그는 여전히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보통사람들’을 위한 설교(?)
소년시절부터 육십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복음전도의 꿈을 키워온 정 목사의 설교를 검토하기 위해서 평자는 위에서 인용한 정 목사의 간증서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 외에 <하나님의 사람>(이하 ‘하나님’)과 요한복음 강해 상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이하 ‘자녀’), 요한복음 강해 중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이하 ‘자유’), 그리고 수영로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정 목사의 설교문(2005년 10월30일-2006년 5월7일)을 꼼꼼히 읽었으며, 동영상도 필요에 따라서 시청했고, 몇몇 잡지에 실린 정 목사의 대담과 짧은글들도 참조했다.
우선 홈페이지에 올라온 주일공동예배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본당 은혜홀을 가득채운 신자들이 감격적으로 예배드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평자는 아직 그렇게 큰 예배에 참석해본 적이 없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누구라도 대형 프로젝터가 강단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매머드 교회당에서 그렇게 많은 청중과 함께 찬송을 부르고,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며, 한마음으로 기도드리고, 설교를 들을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로 교회는 작년부터 5부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교역자로는 당회장인 정 목사를 비롯해서 41명의 부목사, 5명의 강도사, 15명의 전도사, 8명의 교육전도사가 사역하고 있다. 주일학교 학생들만 몇 천 명씩 모인다고 한다. 엄청난 규모의 크기를 자랑하는 교회이다.  
예배 분위기에 압도당한 평자는 정 목사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전반적인 예배 분위기와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설교는 청중들을 사로잡을만한 세련미는 둘째 치고 지나치게 평범하게 보여서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발음도 경우에 따라서 어눌하고, 설교하는 태도도 역시 초보자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내용적으로도 평자의 마음을 끌어들일만한 게 거의 없었다. “말씀중심의 교회”를 가장 중요한 목회철학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설교가 목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80%에 이른다고 강조하는(그말씀 2005년11월호) 정 목사의 설교가 왜 이렇게 평범한지 모르겠다. 그런데 조동진 선교학연구소장은 이 대목을 평자의 생각과는 다른 뉘앙스로 이렇게 해명했다. “그의 설교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설교였다. 그는 항상 단순하고 가장 무식한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를 했다. 어려운 용어나 지식의 말을 결코 쓰지 않았다.”(월간목회 2006년 5월) 어쩌면 그의 평가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알아듣고 은혜 받을 수 있는 설교는 아무나 할 수 없다. 실제로 구름떼처럼 많은 청중들이 매주일 정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몰려든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설교에 무언가 청중을 끄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지금 평자는 막강한 카리스마를 행사하고 있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설교가 ‘별로’로 보인다는 이 해괴한 상황에 빠져버리고 만 셈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게 오늘 설교비평의 숙제다.  
우선 평자는 독자들에게 정 목사의 설교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적절한 한 편의 설교를 소개하겠다. “선택과 기회”라는 제목의 설교는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갈 5:13-15)는 바울의 편지를 본문으로 한다.(하나님 78-92) 정 목사는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설화를 인용하면서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는 말로 이 설교의 문을 열었다. 사실 이 본문은 선택의 중요성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할례주의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과 연결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한 설교자는 복음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율법의 진수인 할례와의 관계를 통해서 참된 자유의 본질을 설명해나가야 하는데 이 설교는 출발부터 성서 텍스트의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정 목사는 선택의 중요성을 언급한 다음에 잘못된 선택이 큰 불행을 부른다는 주제로 넘어간다. 물론 이런 주제도 오늘의 본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잘못된 선택으로 불행을 당한 성서의 예를 열거하기 시작했다. 첫째,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를 택하는 대신 원망을, 찬양하는 대신 불평을, 순종하는 대신 불순종” 선택했으며, 결국 그들은 “불행하게” 되었다. 둘째,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판단을 잘못하고 선택을 잘못해서” 결국 작고 약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 셋째,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왕들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고, 바알 신을 선택함으로써 큰 불행을 당했다. 다섯째,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소돔을 선택했기 때문에 불행한 민족의 조상이 되고 말았다. 다섯째, 어리석은 부자도 재물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평자는 지금 정 목사가 무슨 설교를 하려는 건지 종잡기가 힘들다. 이런 식으로 잘못된 선택의 예를 들기 시작하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내용을 그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정 목사의 설교는 이제 두 번째 큰 주제로 넘어간다. 선택을 잘 한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도 다섯 명의 사람이 등장한다. 아브라함, 요셉, 다윗, 모세, 나아만. 정 목사는 성서가 영웅들의 선택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총에 무게의 중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내용들은 성서 텍스트의 변죽을 울리는 것이었지만, 어쨌든지 잘못된 선택과 잘된 선택을 구분했다면 그것만으로 설교는 끝날 수 있으며, 당연히 끝나야만 했다. 여기서 신자들은 이미 선택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 목사는 그 순간에 또 다시 “믿음으로 선택하면 축복받고 성공한다.”는 주제로 달려간다. 좋은 선택을 한 믿음의 사람들을 설명할 때 이미 제시된 그 내용을 그는 또 하나의 주제로 삼았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받고 성공합니다.” 하고 주장하더니 우리가 선택할 때 성령과 악령이 영향을 준다는 주제를 다시 끌어들인다. 선택의 중요성을 앞에서 언급한 마당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언급한 마당에 또 다시 성령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의 설교가 얼마나 산만하게 진행되는가에 대한 반증이다.
그러나 이 설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좋은 선택을 위한 3가지 방법”이 다시 제시된다. 그야말로 이 설교 구조는 옥상옥이다. 세 가지 방법이 무엇인지는 웬만큼 눈치가 있는 독자라면 이미 짐작이 갈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해야 한다는 게 그 방법이다. 이 설교는 여기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는다. 선택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모든 기회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로 삼는 사람과 모든 기회를 사랑을 베풀 기회로 삼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설교의 마무리는 이렇다. “선택을 잘하면, 좋은 날이 찾아옵니다. 행복이 찾아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는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평생 선택 잘하시기를 바랍니다.”(하나님 92)
평자에게 인내심이 부족한 탓인지 영성이 매마른 탓인지, 그의 설교를 읽거나 들으면 은혜가 아니라 오히려 짜증이 난다. “중언부언”(마 6:7)하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내용적으로 동어반복에 불과한 설교를 듣고 어떻게 영적인 평화와 생명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산만한 설교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는 이 현상이 평자에게는 놀라울 뿐이다.

성서 텍스트의 파괴
혹시 독자들 중에서 평자가 정 목사의 설교를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일부만을 침소봉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거의 모든 설교가 위에서 인용한 설교와 비슷한 패턴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게 아니다. 이제 우리의 궁금증은 그의 설교가 그렇게 산만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미 앞에서 예로 든 설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정 목사가 기본적으로 성서 텍스트를, 더 정확하게는 성서 텍스트에 놓여 있는 ‘삶의 자리’를 파괴한다는 게 그 대답이다. 이런 문제는 평자가 다른 글에서도 몇 번에 걸쳐 강조한 적이 있을 정도로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 목사가 2006년 3월19일 주일에 전한 설교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구약 시편 67:1-5절을 본문으로 한다. 시편 67편이 이스라엘의 추수감사제 찬송이라는 사실은 6절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 목사는 5절까지만 본문으로 삼았으며, 결과적으로 본문이 말하고 있는 주제와는 전혀 다른 설교를 했다. 시편 기자는 추수감사제를 맞아 근동의 종교처럼 자연숭배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 찬양을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이런 본문을 읽는 설교자는 당연히 척박한 생활 조건 가운데서도 생존을 보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고대 이스라엘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충분하게 풀어내면서 동시에 오늘의 삶에서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대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설교자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성서 텍스트의 근본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정 목사는 이 텍스트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아니 찾는다기보다는 본문과는 전혀 상관없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대한 자기의 주관적 상식만을 전하려고 애를 썼을 뿐이다. 그게 참으로 이상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정도로 사용하고 자기의 학문이나 철학, 사상을 전달하는”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분이(자유 16) 스스로 그렇게 설교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물론 먼 길을 돌아간다면 이 본문으로 그런 설교를 할 수 있겠지만, 이런 방식의 성서 텍스트 적용은 전형적인 아전인수이다. 정 목사가 이 본문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천천히 따라가자.
정 목사는 성숙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특징을 열거하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의미로 설교의 문을 열었다. 물론 몇몇 예화를 들면서, 그것도 문맥에 맞지 않는 예화를 끌어들이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다섯 가지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열거하기 시작했다. 1.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2. 전 세계를 마음에 품고 삽니다. 3.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일보다 영원한 그 나라를 항상 생각합니다. 4. 핑계거리를 찾지 않습니다. 5.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삽니다. 정 목사는 일반적으로 틀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추수감사 찬양이라는 시편 말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설교를 했다. 이런 설교는 분명히 성서 텍스트를 살리는 게 아니라 파괴하는 행위이다. 그래도 청중들이 은혜만 받으면 괜찮은 거 아닌가 하고 말하지는 말자. 이러한 은혜 만능주의는 설교자와 청중들의 영혼을 속병 들게 할 것이다.
한편의 설교만 더 확인하자. 2006년 1월1일 주일에 행한 설교 “예수님만 오시면”은 이사야 61:1-3절을 본문으로 한다. 이 본문은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어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게 하신다는 이사야의 메시아론적 신앙고백이다. 정 목사는 예수님이 곧 인생의 마스터키와 같다고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모시면 죄인이 의인으로, 저주받은 사람이 축복의 사람으로, 절망의 사람이 소망의 사람으로, 쓸모없는 사람이 꼭 필요한 사람으로, 슬픔의 사람이 기쁨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고 강조했다. 정 목사가 말하는 대로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인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2천 년 전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셨지만 이 세상은 그 이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설교자는 성서의 약속과 현실 사이에 놓인 긴장과 틈을 뚫고 들어가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과 그에 상응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정 목사는 메시아인 예수를 믿으면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처럼 성서의 메시지를 호도하고 있다.
위의 설교에서 그는 예수를 모시기만 하면 일어나게 될 아홉 가지 일들을 일일이 거론했다. 1)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2) 승리의 복을 받습니다. 3) 평안의 복을 받습니다. 4) 모든 저주를 속량 받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됩니다. 5) 치료의 복을 받게 됩니다. 6) 생명이 있습니다. 7) 존귀한 자가 됩니다. 8) 평강이 있습니다. 9) 사랑이 넘치고 행복이 있습니다.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모셔 들이기만 하면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참 행복자가 됩니다. 올 한 해 주님을 모시고 사셔서 성공하시고 행복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용했던(눅 4:17 이하) 이사야 예언자의 이 본문을 일종의 행복예찬론으로 풀어내는 정 목사의 기발한 착상 앞에서 우리는 유구무언이다. 그는 이사야가 메시아적 희망을 품고 예언의 중심 주제로 삼았던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상한 사람들, 포로 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화되며, 또한 우리가 그들의 삶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 본문을 선택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정 목사는 성서 텍스트에 의존하고 싶은 생각이 아예 없다. 정 목사의 깊은 속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설교에 나타난 현상만 본다면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다만 형식적으로 그리스도교 예배와 설교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성서 텍스트를 선택할 뿐이다. 일종의 구색 맞추기이다. 그리스도교적인 용어로 포장되어 있기만 하면 성서 텍스트와 아무 상관이 없는, 오히려 파괴하는 설교를 하더라도 얼마든지 용납되는 오늘의 이 교회 현실이 우리를 숨 막히게 만든다.  

설교의 매너리즘
위에서 제시된 두 가지 문제, 즉 설교의 산만성과 성서 텍스트의 파괴 이외에 그의 설교에는 복음적인 설교로서 위험한 크고 작은 요소가 적지 않다. 예컨대 선정적인 표현이 그중의 하나이다. 지면 관계로 맥락을 무시하고 몇 대목만 인용해보겠다. “그랬더니 어떤 분들은 ‘제가 일등으로 일억 바치게 해주세요.’ 어떤 사람은 ‘십등 안으로 헌금을 바치게 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믿음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하나님 161)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수지맞습니다.”(하나님 215) “저도 십의 오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감동 안하시겠습니까?”(하나님 220)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는 문제가 반드시 해결될 것입니다.”(하나님 268)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하나님 333)
이러한 선정적인 표현은 설교 현장의 분위기에 따라서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정 목사가 인용하는 예화 내용의 선정성은 심각하다. 예컨대 2005년 11월13일 설교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벧전 2:1-3)에서 정 목사는 14년 동안 절의 총무로 활동하던 승려가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성서를 70번 정독한 뒤에 예수를 믿고 신학교에 들어갔다는 예화를 들었다. 그의 결론은 “이처럼 스님도 성경을 읽으면 은혜를 받습니다.”였다. 11월20일 설교에서는 청교도들이 북미대륙에 건너간 첫해에 드린 추수감사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감동하셨기 때문에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다는 예를 들었다. 이런 역사 이해가 어떤 타당성이 있는지 평자는 이해할 수 없다. 얼굴이 잘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얼굴값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정 목사는 아래와 같이 ‘화류계 여인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화류계 여인들 중에 못생긴 여자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다보니 온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년이 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하나님 135)

지금 정 목사는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지, 아니면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는 중인지 평자는 잘 모르겠다. 만약 그 자리에 정 목사의 표현대로 화류계에 종사하는 분이 앉아있었다면 그들의 기분이 어떠했으리라는 건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성도의 얼굴”이라는 이 설교는 정 목사의 개인적인 관상학이지 설교라 할 수 없다.
이왕에 예화 문제가 나왔으니까 선정성만이 아니라 상투성에서도 크게 문제라는 점을 한번 짚어야겠다. 정 목사는 무슨 설교를 하든지 아브라함, 이삭, 요셉, 모세 같은 성서 인물들을 자주 인용한다. 다른 설교자들에게서도 자주 발견되는 현상인데, 설교의 본문인 성서 텍스트가 담고 있는 영적인 심층의 세계로 들어가서 새로운 생명의 지평을 열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신앙형식을 청중들에게 주입하기 위해서 신구약성서를 오르내리면서 수많은 위인들의 이야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설교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지름길이다.
또한 정 목사가 예로 드는 세속 인물들이 대개 록펠러, 크롬웰, 워싱턴,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수많은 재벌과 위인이라는 것은 그의 예화 적용이 상투적이라는 의미이다. 위인들 이외에 그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예화도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예컨대 수술을 받았지만 실패하고 죽을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던 부인이 모든 걸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겼더니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하나님 175) 군대에서 예수를 믿게 된 무당 아들이 휴가를 나왔다가 어머니의 굿을 보고 주기도문을 외우자 굿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자녀 171) 본인으로서는 이런 예화가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고 생각하겠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재탕, 삼탕으로 약발이 다 떨어진 찌꺼기와 같다. 이런 상투적인 예화들이 교회 강단에서 거리낌 없이 사용되면 결국 설교의 천박성은 피할 길이 없다. 이런 방식이 바로 보통사람들을 위한 설교라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선정적이고 상투적인 정 목사의 예화 사용이 최근에 들어서 훨씬 그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1995년과 2001년에 출판된 설교집에 비해 홈페이지 올라온 최근의 설교에는 훨씬 많은 예화가 남발되고 있었다. 그에게서 설교의 연조와 예화의 의존도가 정비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약 좋다 남용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2006년 2월12일의 설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라”(고후 12:7-10)에 실린 예화를 간추려보자. 1) 원래 구두 수선공이었던 인도의 선교사 윌리엄 캐리 이야기. 2) 건축 중인 교회를 둘러보다가 머리를 다쳐서 앓다가 죽은 사람. 3) 축구경기를 하다가 쓰러져서 하반신이 마비된 채 앓다가 죽은 어느 목사 이야기. 4) 이스라엘의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 여사의 자서전 이야기. 5) 소아마비였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이야기. 6) 미군 군인과 결혼한 한국 여자 이야기 7)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의 경구. 그 이외에도 성서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2006년 3월19일 설교 “성숙한 그리스도인”(시편 67:1-5)에 다음과 같은 예화들이 등장한다. 1) 지나던 길에 얻은 전도지로 예수를 믿게 된 중국 청년 마징링 이야기. 2) 수족관에 일하는 청년의 간증. 3) 무디의 경구. 4)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 선교하던 몰간 목사의 이야기. 이 설교에도 역시 그 이외에 수많은 성서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편의 설교만 더 확인하자. 2006년 4월2일의 설교 “삶의 목적”(고전 10:31-33)은 다음과 같은 예화를 담고 있다. 1) 알로피셔(alopecia)라는 탈모증에 걸렸던 록펠러 이야기. 2) CCC 창립자인 빌 브라이트. 3) 일제시대에 황해도에 살면서 십일조를 잘했던 이찬영 장로. 4) “불로장생주”를 만들어 팔다가 망해버린 프레몽트르 수도원. 5) 새로 부임하여 7백명의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만 기쁘게 해드리겠다고 고백하는 젊은 목사 이야기. 이런 정도면 정 목사의 설교는 설교인지 예화모음인지 구분하기조차 힘들어진다. 수영로교회에 전문적으로 예화를 수집하는 부 목사가 활동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예화가 시와 때도 없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성서 텍스트의 비중이 점점 떨어진다는 사실은 그의 설교가 매너리즘의 늪으로 빠져들었다는 증거이다.

설교의 폭력성
정 목사의 설교가 산만하건 말건, 성서 텍스트를 파괴하건 말건, 예화의 과잉으로 인한 매너리즘에 빠져있건 말건 상관없이 수영로교회는 한국의 어느 교회도 쉽게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교회성장은 목사의 설교와 상관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정 목사는 이런 설교의 한계를 넘어설만한 목회자로서의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런 현상을 종합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은 설교비평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런 내막을 뚫어볼만한 영적인 통찰력이 평자에게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정도에서 대충 글쓰기를 끝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요소들을 합한 것보다 훨씬 불량하게 보이는 문제점만은 마저 짚어야겠다. 이 문제점은 비단 정 목사만이 아니라 한국의 여러 대중적인 설교자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며, 또한 어떤 점에서는 위의 궁금증을 간접적으로 설명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이렇게 마지막 자리로 미뤄졌다. 이제 어린아이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과자의 유해성을 밝혀낸다는 자세로, 숨을 고르면서 이 글쓰기의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어보자.
평자의 생각에 한국교회에서 활동하는 대중적인 설교자들의 설교는, 모든 이들의 설교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공격적이며, 따라서 폭력적이다. 그런데 설교의 폭력성과 대중성 사이에는 모종의 은밀한 거래가 형성된다. 대중적 설교자들의 넘치는 자신감은 종교적 폭력성을 수용하는 대중들의 심리적 약점에 토대하고 있으며, 설교자들을 향한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는 그런 폭력성에 기대서 얻을 수 있는 종교적 대리만족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거래가 강화되면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은 비합리적 열광주의의 포로가 되고 만다. (설교의 공격성에 관해서는 장 아무개 목사의 설교를 비평한 졸고 “허무주의 영성”을 참조할 것. 기상 2005년2월)
그런데 목회와 설교의 폭력성은 대개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설교자나 청중들이 이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사랑을 입에 달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인류 역사에 행사한 폭력성을 보면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름으로 벌인 큰 전쟁은 접어두고라도, 또한 우상타파라는 명분으로 벌인 마녀사냥은 접어두고라도, 매우 바람직하다고 일컬어진 청교도들의 배타적이고 금욕적인 삶의 태도에 깃든 반생명적 요소도 역시 폭력이다. 주변의 중소형 교회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수십 대의 교회 버스를 운용하거나 대형 이벤트를 벌이면서 무조건적인 성장 프로그램을 밀어붙이는 대형교회의 행태도 역시 은폐된 폭력이다. 아니 그것은 노골적인 폭력에 가깝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 두는 게 좋겠다. 진화론자들과 동성애자들과 공산주의자들과 사형폐지론자들과 자신들의 평화 지향적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 군 대체 복무를 요구하는 소종파 종교인에게는 비난의 화살을 겨누면서, 경제적인 차원에서 실제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신자유주의와 오늘날 국제정치에서 가장 폭력적인 기질을 보이고 있는 미국을 향해서는 옹호 내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국 그리스도교 교회 앞에서 평자의 이런 문제제기는 공연히 분위기만 썰렁하게 만들 테니까 말이다.
안타깝지만 정 목사의 설교도 이런 폭력적인 요소를 적지 않게 안고 있다. 평자의 이런 주장이 어떤 분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정 목사는 기본적으로 설교자의 은혜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설교에 관한 한 대담에서 “설교는 받은 은혜와 삶의 체험을 통해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목회자 자신이 은혜를 받아 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과 상관없고 자신에게 은혜를 주지 못하는 설교는 죽은 것입니다.”고 밝힌 적이 있다.(그말씀, 2005년 11월호에서) 그가 강조하는 은혜와 평자가 지적하는 폭력성은 어울리는 개념이 아니지 않은가.
또한 정 목사는 기본적으로 신자들을 착하다고 보는 인격적인 목회자이며 설교자이다. 직접 만난 일이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정 목사와 수영로 교회 신자들 사이에는 깊은 인격적, 신앙적 신뢰감이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신뢰감이 수영로 교회가 성장하는 밑거름의 하나로 작용하지 않을는지. 그런 마당에 평자가 정 목사의 설교를 폭력적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평자에게 사리 판단력이 턱없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어떤 비틀린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오해를 받기에 안성맞춤이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오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보이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평자가 보기에 정 목사의 설교에 내재된 가장 결정적인 폭력성의 뿌리는 정 목사가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처럼 주장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저도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 있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다보면 주님이 제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체험을 여러 번 하다 보면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습니다.(하나님 274)

어려움을 만났을 때 기도하고, 주님의 위로를 받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바른 삶의 태도이다. 그러나 정 목사가 주장하는 체험은 그런 일반적인 신앙의 태도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영적 경지가 탁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와 관련된 그의 주장을 천천히 추적해 보자.
이미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깊은 신앙을 체험한 그는 강도사 시험을 앞두고 비를 맞으며 바위 위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을 때 “목사가 되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무릎 59) 이런 체험은 그의 목회 전반을 지배한다. 주일 저녁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뒷자리가 빈 걸 보고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뒷자리가 비었네요. 빨리 심방하셔야겠어요. ... 제발 심방 좀 해 주세요.” 대표기도가 끝나자 곧 교인들이 몰려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그 장면에서 다시 기도했다. “주님, 수고하셨습니다.”(무릎 154) 그는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 때마다 주님께 심방을 가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런 특별 기도를 한 다음에 어떤 신자는 정 목사를 찾아와 이렇게 간증한 적도 있다. “목사님, 그동안 교회에 못 나와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젯밤 꿈에 목사님이 나타나셨더라고요. 안 나올 수가 없어서 이렇게 교회 다시 나왔습니다.”(무릎 155)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는 이런 “기도와 응답”에 관한 간증으로 일관된다. 정 목사는 목회의 모든 문제를 주님에게 드리는 기도와 그 응답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수영 로터리에서 목회할 때의 이야기이다. 교회 주차장이 부족해서 주일마다 간선도로에 세워둔 교인들의 차가 견인당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정 목사는 이런 일로 신자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강단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님, 주차장을 주세요. 주차장을 주세요.” 그날 밤 꿈속에서 주님은 “주차장을 주겠노라”고 응답하셨다. 그는 교인들에게 주님의 약속을 선포했다. “저 땅을 하나님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저 땅을 우리 교회가 매입하길 원하십니까? 원하시면 두 손 들어 ‘할렐루야’ 하십시오.”(무릎 61) 계약금만 내고 중도금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 목사는 금식기도를 했으며, 주일 새벽에 주님이 이사야 45:2,3절 말씀으로 응답하셨다고 한다. 그 순간에 정 목사는 기뻐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다 됐네요! 다 됐네요! 다 됐네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그 주일 설교에서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간증했고, 다음날 교회 계좌로 헌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2006년 5월7일, 어린이 주일 설교에서도 그는 1991년도에 있던 일을 전했다. 정 목사 가족들이 미국에서 생활한 다음에 세 남매를 그곳에 남겨두고 부부만 수영로 교회로 돌아오게 될 때의 이야기다. 자기들끼리만 남게 될 아이들이 걱정되어 악몽을 꾸기까지 한 정 목사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청교도를 타락시킨 마귀가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라 진을 치고 있다.”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정 목사는 다음날 아침 세 남매에게 이런 주님의 음성을 전했다고 한다.
정 목사는 이러한 자신의 체험에 관한 주변의 우려 섞인 소리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같은 교단의 목사님들이 정 목사의 간증을 들으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도대체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소리로 들립니까? 소리가 납니까?” 하고 묻는다고 한다. 그러면 정 목사는 설명할 길이 없어서 “들어 보셔야 알죠.” 하고 대답한다.(무릎 134) 과연 그에게 일어나는 이런 경험의 실체는 무엇인가? 주님의 음성이 아람어로 들리는가? 한국어로 들리는가? 평자가 알기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주장은 대개 비현실적인,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이나 아니면 사이비 교주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잠정성
설교는 물론 성서 텍스트에 근거해서 주님의 뜻을 청중들에게 선포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주님의 응답을 말하거나, 또는 문학적인 수사의 차원에서 주님의 음성 운운하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 목사의 경우처럼 구체적인 목회의 문제를 주님의 음성과 연결시킨다는 건 위험하다. 생각해보라. 교회의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서 목사의 생각을 반대하고 있는 신자들을 향해서 목사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노라 하면, 그 공동체의 질서가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만약 목사가 주차장이든, 복지관이든, 교회묘지이든 그런 것을 구입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면 신자들과 더불어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해결해나가면 될 것이다. 이런 문제를 주님의 응답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리고 설교에서 그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평자가 보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을 모르는 어리석음이거나 아니면 목회의 효율성을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다.  
이런 어리석음과 거짓말이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횡행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포함한 인간 역사의 잠정성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데에 기인한다. 우리의 경험과 생각과 결단은 그것이 아무리 신앙적이고 인격적인 진정성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잠정성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모든 경험과 판단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종말이 이르러야 확정될 것이다. 그때까지 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의 진리성은 유보된다. 이런 사실은 그렇게 오묘한 현학(玄學)을 통해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날 주님의 뜻으로 확신했던 행위들이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역사적 실증들을 조금이라도 눈여겨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도그마도 역시 이런 잠정성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불확실하다는 말인가,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운명이, 곧 그의 부활이 종말에 일어나게 될 궁극적 생명 사건의 선취(先取)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의 완전한 성취(成就)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선취와 성취 사이의 현실인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성서 텍스트와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인 신학적 전통과, 그리고 삶의 리얼리티를 읽을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에 근거해서 우리의 선택과 결단이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부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갈 뿐이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소극적인 자세로, 의존적인 태도로, 즉 두려움과 떨림의 영성으로 말이다. 이것이 곧 자신의 신앙적 행위까지 상대적인 지평에 놓고 대신 하나님의 행위만을 절대적인 지평에 놓는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신앙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 채 자신이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선포한다는 것은, 그래서 신자들이 그 설교자의 주장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게 유도한다는 것은 영적인 교만이며, 또한 그것으로 인해서 형성된 종교적 아우라(aura)는 사이비 교주들에게서 발견되듯이 대중들의 영혼에 폭력적으로 행사될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런 폭력성이 노골적으로, 또는 은폐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목회와 설교 현장은 “벌거벗은 임금” 우화와 닮아있다. 설교자와 평신도 지도자와 일반 신자들, 그리고 신학교수들까지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벌거벗은 임금의 행차 앞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지 모른다. 또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일조할 수도 있다. 누가 이 사태를 직시하고 외칠 것인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네!”
지금도 자신의 신앙경험을 끊임없이 상대화하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만을 드러내는 설교에 온 영혼을 불사르고 있을 믿음의 동지들에게 평자의 이야기가 우울한 탄식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의 서곡으로 들려지기를 바라면서, 이미 오래 전 “아, 교회여, 내 순정의 샘터였던 곳이여!” 하고 한국교회를 향해 세레나데를 불렀던 한 인문학자의 고언을 이 설교비평의 갈무리로 삼겠다.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 주에 수천만 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 백 명 씩 한데 모여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간 원심력으로 찢겨진 마음을 한 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뜩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 붓고도 득의한 듯 히히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한일장신대 철학과 교수 김영민, 한겨레21, 1999.4.15.>
(기독교사상, 200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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