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메타노이아
-판넨베르크 박사, 뮌헨대학교 원로교수-

두려움과 암흑 가운데서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박사는 지금까지 두 권의 설교집을 냈다. 한권은 1973년에 출판된 <Gegenwart Gottes>(여기 계신 하나님)이며, 다른 한권은 2001년에 출판된 <Freude des Glaubens>(믿음의 기쁨)이다. 필자는 이 두 권의 설교집을 한 권으로 묶어 2007년 초에 출판했다. 독자 여러분의 일독을 바란다. 현재 생존해 있는 개신교 조직신학자 중에서 최고의 석학으로 인정받고 있는 판넨베르크가 어떤 설교를 했는지, 또한 주로 독일 지성인들을 대상으로 행한 그의 설교가 한국교회의 현장에서도 설득력이 있는지 자못 궁금하지 않는가. 독자들은 한편으로 한국교회에서 버린 자식 취급을 받는 조직신학이 그의 설교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희열을 느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역설적이지만 한국교회 강단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걸 발견하고 부끄러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우선 그가 한창 젊은 시절(서른한 살) 부퍼탈 신학교 아침기도회 때 행한 짧은 설교 전문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제목은 “아브라함의 믿음”(창 15:1-21, 1959년 6월18일)이다.

오늘 성서 본문의 첫 단락은 믿음에 대한 성서의 여러 언급 중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야훼를 믿었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원형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태도와 연관되어 있는 상황은 인간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거나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규정됩니다. 이 문제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거나 기대하는 것과 다르게 제시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안티테제(반명제)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믿음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와 관련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바빌로니아의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는 사실을 믿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역시 믿음은 결코 예수님의 과거 역사일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역사 안에 들어있는 그리스도 사건을 그 내용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 과거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한 전제이지 믿음의 내용 그 자체는 아닙니다. 신학은 물론 믿음의 이 전제를 지향해야만 합니다. 믿음이 이런 전제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 그 기초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믿음의 기초가 말하려는 내용들을 단순히 ‘믿음’의 차원으로만 밀어놓음으로써, 또는 믿음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설명함으로써 이러한 노력을 등한히 하면 안 됩니다. 믿음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그것에 포함되어 나타난 미래를 향한 약속의 기초와 부단히 연관됩니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이 약속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우리에게 이 약속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역사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가 아니라 부활에 참여한 자로서 새로운 생명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와 거의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역시 아브라함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었던 기초로서의 그 신앙이 전제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이것은 가나안 땅과 후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약속이 그리스도 사건 가운데서 주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은 고대의 희생 표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앞의 내용에 대한 일종의 해설로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와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대답입니다. 이 계약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 믿음은 하나님의 행위에 아무 것도 부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홀로 우리와 자신의 계약을 맺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희생 제물을 받고 그의 꿈속에서 약속의 땅을 지시하려고 오셨을 때 아브라함은 깊은 잠 속에 빠져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희생 제물의 자리는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 희생 제물의 쪼개진 틈 사이에서 하나님은 삼키는 불로 이러 저리 임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믿음의 기초라 할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와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분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일종의 불길처럼 불(不)가시적인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두려움과 암흑’ 가운데서만 지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흡사 아브라함이 느꼈던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두려움과 암흑 가운데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의 약속을 말입니다.(믿음의 기쁨, 대구성서아카데미, 6,7쪽. 이하 쪽수만 표기하는 경우에 이 설교집을 가리킨다.)

위의 설교에서 기독교 신앙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는 설교자와 청중들의 영적인 깊이가 지나치게 차이가 나거나, 또는 설교의 논리성이 형편없이 떨어질 때이다. 판넨베르크의 설교가 쉽게 들어오지 않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형식이나 내용의 차원에서 그의 설교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데에 놓여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위의 설교에서 아브라함처럼 굳센 믿음으로 복을 받자고 외치지 않았으며,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청중들에게 어떤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는 한국강단의 일반적인 설교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에 판넨베르크의 설교는 지나치게 신학적이고, 관념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신앙적 실용성으로만 보는 고정관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조금 거칠게 말하는 걸 용서하시라. 위의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분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깊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평생 전업 설교자로 살았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가 섬기는 교회가 상당한 업적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위의 설교는 오늘 모든 설교자들이 천착해야 할 기독교 영성과 신학의 진수를 그대로 담고 있다.
본문 창세기 15;1-21절은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셀 수 없는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다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말씀이다. 아브라함은 이 야훼의 약속을 믿었으며, 그러자 야훼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셨다. 야훼의 명령에 따라서 아브라함은 암소와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제단에 올려놓고 잠들었으며,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했다고 한다. 야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집트 노예생활과 해방을 예고하셨으며, 타는 횃불이 제단의 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이어서 야훼는 다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다.
판넨베르크는 이 본문에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거나 기대하는 것과 다르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바른 태도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 구원이 무엇인지는 말할 줄 모른다. 이것은 곧 구원마저 우리의 기대와 욕망의 충족으로 떨어졌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우리 자식들이 좋은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는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한 좋은 것들에 불과하다. 우리 믿음의 토대인 하나님의 약속은 그런 경험들을 넘어선다. 그 약속은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것의 반복이 아니라 아직 우리에게 닥치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이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에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한 것처럼 오늘 우리 기독교인에게도 여전히 믿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아브라함처럼 땅과 후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약속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인 희생 표상에 대한 해명에서 믿음의 본질을 한 꺼풀 더 벗겨낸다. 아브라함이 제물을 제단에 올려놓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기다려야 할 바로 그 귀중한 순간에 잠들었지만 계약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계약의 주도권을 행사하시기 때문이다. 희생제물의 쪼개진 틈 사이에서 하나님이 삼키는 불로 임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계약이 이루어졌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오늘 본문에서 묘사되는 하나님의 불길이다. 그것은 ‘두려움과 암흑’이다. 이 두려움과 암흑 가운데서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는데, 그 약속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의 약속이다.
이 설교를 한 줄기로 정리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인간 경험을 넘어서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에 토대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경험과 기대를 넘어서는 부활의 약속에 중심을 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약속은 ‘두려움과 암흑’에서 주어진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다. 그것은 단지 교리에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삶의 현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두려움과 암흑에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인 부활이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졌다.

베르디의 <레퀴엠>

위의 설명을 듣고, 별 게 아니군,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가 늘 설교하는 게 아니냐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온갖 신앙적 처세술이 기승을 부리는 한국교회 강단에서 여전히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하는 설교자가 있다는 건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정당한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판넨베르크의 설교가 놓인 영적 지평을 설명해야겠다. 단지 들은 풍월로만 아는 것과 실제로 깨우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드는 것으로 시작하자.  
필자는 얼마 전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한 베르디의 <레퀴엠>을 디브이디로 보았다. 2001년에 녹화된 스웨덴 라디오 합창단과 베를린 필하모니의 연주 실황이었다. 일반적으로 교향악 연주는 곡과 곡 사이에 지휘자가 무대 뒤로 들어가 잠시 쉬고, 또한 중간 휴식 시간에는 좀더 길게 쉰다. 그런데 베르디의 <레퀴엠>은 단 한 순간도 쉴 새 없이 84분 동안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의 한 장면에서 필자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그렇게 격정적으로 지휘하던 아바도가 갑자기 30초 동안 꼼짝 않고 지휘자 석에 그대로 서 있는 게 아닌가. 갑자기 호흡 곤란 증세를 느끼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무언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휘자들은 연주가 끝나면 대원들을 일으켜 세우고, 박수를 치는 청중들을 향해 인사를 하는 게 보통인데, 이날의 장면은 필자에게 전혀 뜻밖이었다. 지휘자만이 아니라 청중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그대로 멈춰라!’ 하는 마법에 걸린 듯 지휘자, 연주자, 청중들이 아무 동작도 없이 숨죽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말인지! 그 긴 침묵이 끝나고 아바도가 손으로 윗도리를 살짝 잡아당기며 옷매무새를 고치자 청중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기 시작했다.
필자의 생각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연주를 끝내고 고통스러워한 이유는 베르디의 <레퀴엠>이 지시하고 있는 세계 안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기 힘들었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아주 감동적인 책을 읽은 다음에 한 동안 멍한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하다. ‘영원한 안식’(Requiem aeternam)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로부터 시작해서 ‘주여, 저를 구원하소서.’(Libera me, Domine)로 끝나는 베르디의 <레퀴엠>은 주로 요한계시록의 묵시사상을 그 내용으로 한다. 영원한 안식, 진노와 눈물의 날, 하나님의 어린양, 거룩 등등의 신학 개념들이 교향악단과 합창 및 독창자들에 의해서 노래되었다. 그 세계는 분명히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과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무당의 신들림처럼 전혀 다른 음악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었던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연주회장의 현실로 돌아오려면 최소한 30초 동안의 여유는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성서의 세계는 바로 이와 같다. 그 세계는 고유하다. 여기서 고유하다는 말은 존재론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인 것처럼 성서의 세계는 우리가 도구적으로 다룰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니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성서의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목회를 위해서 성서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만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여기에는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없으며, 목회자가 인격자인가 아닌가 하는 차이도 없다. 음악의 고유한 세계로 들어간 경험이 없는 가수는 어쩔 수 없이 청중들의 인기에만 영합하듯이 성서의 낯선 세계에 들어간 경험이 없는 설교자는 어쩔 수 없이 목회전략에만 기울어진다. 설교자에게 지금 시급한 것은 베르디의 <레퀴엠>에 빠져들었다가 나오기 힘들어하던 아바도와 같은 영적인 경험이다. 판넨베르크는 바로 그런 세계를 신학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열어주는 영적인 스승이다. 그의 설교는 늘 성서와 그것의 해석인 신학의 고유하고 낯선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는 뜻이다.  
아마 어떤 분들은 판넨베르크가 영적인 스승이라는 필자의 표현에 동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라 할 수는 있어도 영성의 대가라 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이런 생각은 신학과 영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선입견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건 엄청난 오해다. 신학은 기본적으로 영적 현실에 대한 논리적 해명이지 그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적인 체험이 없으면 위대한 신학자가 될 수 없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서는 신학과 영성을 별 개로, 심지어 신학이 영성을 파괴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흡사 어떤 음악의 대가를 가리켜 위대한 작곡가이지만 소리에 대한 존재론적 체험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형국이다. 신학은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영성에 대한 합리적 해명이라는 점에서 판넨베르크의 설교는 그 어떤 설교자의 설교보다 훨씬 풍부한 영성을 담고 있으며, 우리를 그 세계로 끌어줄 수 있다.
필자는 위에서 맛보기 차원에서 판넨베르크의 짧은 설교를 제시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설교가 왜 다른 이들의 설교와 구분되는지, 그의 설교가 오늘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 더 나아가서 그의 설교가 우리의 병든 강단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인지 설명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그의 신학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직접 설교의 중심으로 치고 들어가자. 그 중심이 바로 오늘 필자가 말하고 싶은 주제인데, 그것 하나만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글쓰기의 수고가 헛되지는 않으리라. 판넨베르크의 설교 중심에는 무엇이 놓여 있나?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설교한다.”는 게 그 대답이다. 위의 설교 주제인 “아브라함의 믿음”에서도 판넨베르크는 아브라함의 믿음 자체에 무게를 놓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능한, 또는 그것의 전제인 하나님의 약속에 설교의 무게를 놓았다. 그 하나님의 약속이야말로 우리 믿음의 토대이다. 그 약속은 오늘 우리의 경험이나 기대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도적 사건이다. 이처럼 판넨베르크 설교의 상수는 늘 하나님이다. 1994년 뮌헨 마르쿠스교회에서 행한 설교 “광야를 건너”(신 8:11-20)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도 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키도록 부르심을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활동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를 죄와 죽음의 광야로부터,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의 광야로부터 구원합니다. 매일 찬양과 감사를 드리면서, 동시에 공동의 예배를 드리고, 특별히 성만찬을 거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고 그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때까지 광야를 여행하기 위해 필요한 노자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식 능력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아멘.(23쪽)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를 이 세상의 허무주의라는 광야로부터 구원한다는 판넨베르크의 이 설교를 상투적으로 들으면 곤란하다. 이 설교에서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오늘의 이 사태를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지적했다. 하나님 없이는 인간이 결코 평화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오늘의 시대가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자유를 신장시키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생산과 소비라는 악순환에서 생명의 갈증만 증폭시킬 뿐이다. “하나님의 통치만이 인간의 삶에 의미와 자유를” 보장해준다. 삶의 의미와 자유를 통한 평화의 나라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인간에게 오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오늘 우리에게 최선의 일은 하나님의 평화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58쪽)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을 설교한다.”는 건 당연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은 거의 설교되지 않는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을 설교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설교자들이 청중, 또는 교회에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태는 서로 맞물려 있다. 하나님을 모르면 어쩔 수 없이 사람에게 눈을 돌리기 마련이며, 사람에게만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영적인 눈을 향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의 이런 현상은 교회사의 차원에서 이미 숙명적이었던 것 같다.
한국교회에 복음의 씨를 뿌린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적 뿌리는 청교도, 각성신학, 부흥운동에 연원해 있다. 이런 운동은 16세기 종교개혁 신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17,18세기 개신교 정통주의가 점차 신앙적 역동성을 잃었다는 역사적 배경에서 자랐다. 이 정통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럽대륙에서는 경건주의와 각성운동이, 영국에서는 청교도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교회의 전통이나 신학, 신조를 멀리하고, 개인의 신앙적 열정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개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은혜를 받고, 도덕적으로 변화하는 회심을 강조하였다. 이런 일련의 운동은 종교의 본질을 윤리에 둔 칸트 철학과 ‘절대의존 감정’에 두었던 쉴라이에르마허의 신학에 직간접적으로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이런 경건주의와 각성운동, 그리고 청교도 운동이 실제로 크게 꽃을 피운 나라는 유럽의 전통과 교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던 미국이었다. 미국은 세계 기독교의 역사적 지형에서 일종의 해방구였다. 제2차에 걸쳐서 미국에서 일어난 대 부흥운동은 유럽의 모든 신학적 전통과 담을 쌓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영성을 키웠다. 필자가 보기에 그들에게 나타나는 신앙적 특징은 세 가지이다. 신앙의 개인화, 회심의 도덕주의, 국내외 선교열정이 그것이다. 그들의 후예가 바로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에 복음을 들고 온 이들인데, 이들의 신앙 특징은 한국교회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한국교회는 지난 한 세기만에 엄청난 양적 팽창을 이뤄냈다. 이런 팽창에는 사회학적 요소들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각성운동과 부흥운동의 신앙적 특징이 핵심적인 모티브다. 오늘 한국교회 강단도 여기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설교가 바로 개인, 도덕성, 선교(전도)에 집중된다.
이 세 가지 신앙적 특징을 조금 더 압축적해서 말한다면 개인의 구원에 관한 매우 주관적인 ‘확신’의 강조이다. 이런 구원의 확신을 끌어내기 위해서 설교자들은 죄와 도덕적인 변화를 강조하며, 선정적인 예화와 간증을 남발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부터 30년 이상 한국교회에 정신적인 지주로 행세하신 빌리 그레함 목사의 18번 설교인 “탕자의 비유”가 한 전형이다. 이런 방식으로 술, 담배를 끊고, 도박에서 손을 씻고 새 사람 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앙적 정서와 설교로 인해서 “하나님을 설교한다.”는 차원이 근본적으로 망각되었다는 건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일반 청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설교자들도 하나님에 관해서 아예 관심이 없다. 그들은 구원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으며, 그 구원의 원천인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설교가 하나님에 관한 로고스인 신학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현상에 불과한 심리학의 포로가 되었다는 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설교한다는 말을 단순히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발설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많이 쏟아내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이는 흡사 사랑이 단지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사랑의 존재론적 세계와 연루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설교한다는 사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여기에 근거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설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판넨베르크의 설교를 구체적으로 다루어야겠다. 1957년1월27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예배에서 행한 설교 “여기 계신 하나님의 나라”(마 4:12-17)에서 한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그는 하나님, 즉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홀로 통치하신다는 것은 그의 통치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예언자의 예측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통치가 언제, 어떻게 현실적으로 이루어질는지 알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불빛을 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곳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겁니다. <중략> 유대인들도 이사야의 말대로 다윗 왕국을 다시 일으킬 한 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통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인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이렇게 선지자의 예언을 완전히 간접적으로 성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빛이 어디에서 우리의 삶을 관철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변방에서 우리를 만나주실 겁니다. 우리가 어둠만 볼 수 있지 빛이라고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곳 말입니다. 어쩌면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가 일 년 내도록 혼신을 다해 추구했던 목표보다 훨씬 중요하게 작용할지도 모릅니다.(61쪽)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짚는다. 그 말은 하나님이 인격으로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일한 인격이 아니라 하나님만의 배타적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그것은 또한 그의 자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창조자이며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성서의 진술도 결국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킨다. 이 세계를 마음대로 조작하려는 세계 전략가와 초국적 기업가들의 모략이나 야무진 꿈들이 철저하게 상대화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가슴 설레면서 두려운 일인가? 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으며, 동시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속박당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위대한 계획과 업적도 하나님의 통치를 흉내 낼 수 없으며, 이 세상의 그 어떤 사소한 사건도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는 건 없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가 우리의 평생 목표보다 훨씬 중요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설교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영성의 중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필자는 오래 전에 판넨베르크의 이 설교를 읽고 이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성서의 세계를 이 세상에서 현실적으로(real)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별 것 아닌 사물, 사건, 사람을 하찮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으며, 아무리 대단한 것처럼 평가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크게 매달리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작은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무시하지 않게 되었으며, 목회에 크게 성공한 목사라 하더라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목회의 성공, 실패와 전혀 상관없이 그분의 의지대로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내 삶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말이다. 아마 웬만한 목사들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자신의 인격이나 세계관, 또는 심리적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인식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럴 때만 우리는 어떤 환경의 변화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향해서 기독교의 바른 영성을 변론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들에게 가장 귀중한 영성은 결국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조직신학적 성찰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 즉 그의 통치에 관한 인식의 지평이 확대된다면 우리의 설교는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토대로 청중들을 닦달하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웠다면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통치와 그 세계에만 온 영혼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영성이며, 곧 자유이다. 이런 자유가 없다면 그런 설교자는 아무리 청중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나름으로 설교와 목회에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불행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설교자의 영성은 청중들의 반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설교행위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을 수 있을 길을 무엇인가를 질문할 차례이다. 이 질문은 곧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가장 바른 길은 조직신학공부이다. 이것만이 유일한 공부라는 게 아니라 빼놓을 수 없는 공부라는 뜻이다. 조직신학 무용론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 강단을 감안한다면 이 대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단지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주장할 뿐이지 그 안에 담긴 창조 영성을 인식하거나 해명할 줄 모르며, 창조가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아예 관심도 없다. 그런 상태에서도 넘치는 자신감으로 설교한다는 것이 곧 설교자의 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죄를 가리키는 ‘하마르티아’는 과녁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판넨베르크는 설교행위에서 조직신학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피력한 바 있다.

조직신학 훈련에 정상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신학적인 판단의 근거를 그 무언가 다른 것으로 추가하려고 한다면 기독교 교리의 주제를 고유하게 판단해야 할 작업에서 영적인 자명성을 획득할 수 없다. 조직신학적 성찰이 없이 성서주석에서 직접 설교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이렇게 되면 해석학의 질문들은 단지 미학적 판단을 통해서만 해소되고 말 것이다. 결국 설교자들은 자신이 판단해야 할 난제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근본주의에 치우쳐 버리지 않으려다가 이 시대정신의 여러 유행에 휩쓸려버린다. 오늘 선포되는 설교가 조직신학적 과업을 소홀하게 취급한다는 것은 비극이다.(졸역, 신학과 철학, 14쪽)

그렇다. 창조, 삼위일체, 죄, 칭의, 세례, 성만찬, 종말, 부활 등등, 기독교 체계를 유기적으로 사유할 수 있어야만 우리는 성서가 실제로 담아내려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의 궁극적 생명의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다. 이런 훈련을 단지 세례문답을 공부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조금 더 나아가서 신대원에서 조직신학개론을 수강한 것으로 해결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동요를 배운 것으로 음악 공부를 모두 끝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다. 조직신학은 소리꾼으로 하여금 득음(得音)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고도의 소리훈련처럼 설교자에게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고도의 신학적 사유과정이다. 참된 소리꾼은 하나의 음에도 무한히 다양한 색깔의 소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느끼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소리를 구사할 줄 안다. 참된 설교자는 기독교의 작은 도그마 안에도 무한히 다른 영적 갈래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설교할 줄 안다.
판넨베르크는 1972년 투트찡에서 행한 설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의 십자가”에서 십자가 사건의 현실성(reality)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본문(마 16:24, 25절)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의 고난에는 모든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켰다는 사실이 강조되는데, 이 십자가 사건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공해야 한다는 모든 압박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파멸이 최후의 승리에 이르는 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행위를 통한 모든 인간의 자기실현은 불확실해졌습니다. 행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실현해 볼 수 있는 선택과 가능성이 우리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이런 의도를 성공시켜야겠다는 강압과 그 투쟁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해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당한 실패가 곧 무(無)로 몰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자기실현의 잠정성과 허약성을 견뎌낼 수 있으며, 우리의 노력이 실패로 끝나는 모든 것들을 유효한 것으로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75쪽)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을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질병이나 궁핍이나 사회적 고립, 억압이나 박해, 그리고 합법을 가장한 불의한 사형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로는 국가의 판단이나 그 어떤 법정도 우리의 양심을 강제하는 마지막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고유한 혁명이며, 모든 지배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잠재력입니다.(76쪽)

필자는 예수 십자가 사건에 관해서 이보다 더 정확한 진술을 만나보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담지하고 있는 그 실질적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본문에서 이런 설교를 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대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으니까 구원받았다는 초보적 인식에 머물고 만다. 그 십자가의 신학적인, 영적인, 실질적인 세계를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단지 형식적인 교리만 전할 뿐이다. 이런 게 조직신학적인 성찰이 깊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 아니겠는가.
십자가와 아울러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활에 관한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보자. 판넨베르크의 설교는 끊임없이 부활 사건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나님을 설교하는 판넨베르크의 설교에 부활이 중심을 이루는 이유는 부활이 곧 “무로부터의 창조”를 행하신 하나님의 배타적인 생명사건이기 때문이다. 1998년 부활절에 행한 설교 “살아계신 주님”은 고전 15:1-11절을 본문으로 한다. 그는 본문을 주석하는 설교 전반부에서 세계 현실성과 생명과 부활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 세계 현실성은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비밀 가득한 것인데, 이미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신앙에서 언급된 것이다. 세계 현실성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서 이제 우리는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신뢰할 수 있다. 또한 예수부활을 신뢰하는 데서부터 세계 현실성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신앙의 눈으로 그는 부활을 이렇게 선포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서 세계 전환점은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죽을 운명의 마력은 파괴되었습니다. 우리의 세계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우리는 실제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까? 자연과학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조심스러워집니다. 자연에 대한 지식의 발전 자체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갑자기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자연 사건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지식 훨씬 너머에 모든 것을 창조한 분이 계십니다.(262쪽)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새로운 전망으로 끌어들이며, 현실성과 우리 삶에 대한 시각을 바꾼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생명형식에 묶여 있는 모든 것들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부활 사건에서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파괴된다는 두려움에서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으며, 생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지난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이제는 중요하지 않게 되며, 거꾸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중요하게” 된다. 더 이상 세상의 삶을 즐기려고 매달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앞으로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설교 끝마무리에 “할렐루야!”를 외친다. 그 단어의 뜻은 “우리 함께 노래하고 기뻐합시다.”이다.(263쪽)
윤리 문제를 말할 때도 그는 부활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앞에서 인용한 설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세계 전망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는 부활 없이 기독교인의 윤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라.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없는 한 기독교 윤리는 그 동기를 상실합니다. 왜냐하면 사랑도 역시 부활의 희망에서 솟아나는 그 능력이 없는 한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저런 방식으로 그의 고통을 줄여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 직면해야할 미래에 대한 불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만 합니까? 감옥에 갇히거나 박해를 당함으로써 겪는 괴로움, 혹은 우울증에 빠져버린 이들의 경우에 어떤 도움을 주어야만합니까? 이 모든 상황이 다시 좋아질 수 있다고 말해주면 됩니까? 그것보다는 확실한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행위가 중요합니다.(229쪽, 1962년2월18일, 마인쯔 대학예배)

그가 말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곧 영원한 생명인 부활에 대한 희망이다. 이 부활 생명으로 우리는 충만해져야 한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며, 우주론적 생명 세계에 대한 희망이다. 이 희망은 경우에 따라서 이웃을 향한 봉사로 그 흔적이 드러난다. 이런 희망에서 사랑의 행위가 동기화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런 종말론적인 희망은 “세상의 일이나 사물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즉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이 분명해진다. 이 설교의 결론에서 판넨베르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할 때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필요로 하고 우리가 실행해야 할 모든 것을 얻게 된다고(마 6:33) 선포했다.
판넨베르크의 설교가 별 게 아니라고 여전히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필자의 서툰 글쓰기 탓이다. 판넨베르크의 설교와 우리의 설교가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다. 프로 9단 바둑 기사의 설명이 어찌 아마추어 5급의 설명과 똑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설교는 아마추어 바둑 기사들이 바둑의 새로운 수를 발견하면서 바둑의 깊이로 끌려들어가듯이 우리의 설교자들의 신학적 영성을 심화시킨다.

회개하라!

판넨베르크의 설교에 문제점은 없을까?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그것을 찾아낼만한 능력이 없다. 다만 판넨베르크와 다른 시각에서 나올만한 비판을 한 마디 짚을 수는 있다. 판넨베르크 설교는 역사를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해석할 뿐이지 변혁적이지 못하다는 게 그 비판의 핵심이다. 그 말은 일단 옳다. 그의 눈에는 이 세상의 여러 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프로그램이 별로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그에게는 역사는 진보라기보다는 개벽이며, 개량이라기보다는 질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상이 보다 정의로워지고 평화 지향적으로 변화되는 걸 그가 왜 무시하겠는가. 복지가 보장된 사회 시스템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할 까닭도 없다. 다만 그는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에게 발생한 부활생명은 우리의 업적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행위라는 사실에 모든 기독교적 영성의 뿌리를 두려는 것뿐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주일공동예배에 선포되어야 할 케리그마는 정치 경제의 민주화나 복지체제의 향상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우주론적 구원사건에 집중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크의 설교에 역사 변혁적 요소가 약하다는 비판은 크게 결격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세상의 사회복지나 계몽운동과 구별되어야 할 고유한 영적 공간을 확보해주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 고유한 공간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나라이며, 통치이다. 그것은 아직 우리에게 완전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에서 선취(先取)된 궁극적인 생명이다. 필자가 계속 주장했듯이 판넨베르크의 설교는 바로 이 사실 한 가지에 집중한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깊어지고 확장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과 이원론적으로 분리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 현실성으로 현재한다. 아쉽게도 필자는 지면 관계로 그의 설교를 충분하게 독자들에게 전하지 못했다. 이해를 바라면서, 마무리를 해야겠다.
이 글의 제목은 “설교의 메타노이아”였다. 지금 필자의 귀에는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의 일성이 울리고 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막 4:17) 독자들은 필자가 왜 이 구절을 인용했는지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땅으로부터 하늘나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 하늘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게 바로 예수님의 말씀선포였다. 오늘 설교자는 회개해야 한다.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로 마음의 중심을 이동시켜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의 설교자들은 진보이든 보수이든 불문하고 예수님이 전적으로 의존하셨던 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은 땅에 대한 관심이 너무 많다. 전자에 속한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정치 사회적 변화에, 후자에 속한 이들은 개인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변화에만 마음을 쏟는다. 필자는 지금 그런 일들과 그런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걸 주장하는 게 아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초월적인 세계에만 일방적으로 기울어져버린, 그래서 역사 해체론에 빠져버린 신앙이 옳다는 말이 아니라 종말론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우리 설교자들의 정체성에 관해서 질문하는 중이다. 우리는 누군가? 우리는 지난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혁명가들과 휴머니스트들과 도덕군자들을 흉내 내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는 사람이 아닌가! 바로 이 복음에 우리의 운명과 미래를 건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다. 이 세상의 군주와 사상가들이 제시하는 이 땅의 정의로운 사회 건설이나 모범적인 기독교인 양성, 또는 교회성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실현된, 그리고 실현되고 있으며,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설교자들은 마음을 돌려야 한다. 교회를 포함한 이 땅에서 행하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 잠정적이라는 엄연한 사실에 왜 눈을 감으려 하는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시오!” (기독교사상, 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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