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기독교적 모더니스트의 신학적 영성

김종두


정용섭 목사의 설교집 『그날이 오면』(다비아책/이후 바로 면수를 표기함)이 나왔다. 목회하고 있는 샘터교회에서 샘터교회 성도들을 청중으로 한 주일공동예배 설교이고 본래 철두철미 원고설교하는 분이니 설교집에 실린 설교 한편 한편을 현장설교로 읽어 무리가 없을 듯싶다. 우선 책의 형식이 교회력에 따른 52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고 교회력의 기준은 성자, 성령, 성부의 삼위일체론에 의해 분류되어 있다. 굳이 교회력에 따른 설교집을 견지하는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주일공동예배에서 교회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교회력을 무시하고 있다는 건 설교자 자신만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영성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입니다. 편식이 건강을 해치듯이 교회력을 벗어나 설교자 구미에 맞는 성서본문에 치우치는 것 역시 영적 건강을 해치는 게 아닐는지요.(머리말)
적어도 그에게 교회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쉽게 생각하는 ‘형식적인 틀’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 내용이다. 설교의 내용은 철두철미 본문 자체에 집중하는 본문설교이고 설교의 주대상을 ‘무언가를 알고 믿으려는 사람들’(109쪽)과 ‘현대지성인들’(182쪽) 혹은 ‘생각이 있는 사람들’(126쪽)로 분류한다는 점에서 소위 지성적 설교로 분류할 수 있겠는데, 그런 유형의 설교들이 흔히 빠져드는 현학적이거나 수사학적 비틀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설교의 완성도가 높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고 또 철저히 길들여져 있는 이 시대의 설교자들을 깨우는 죽비소리로 읽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52편의 설교가 언제나 “본문-해석-의미”라는 기본틀에 시종일관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범적인 설교의 전형으로 강추하고 싶다.

깊이와 열림의 영성

필자는 정 목사의 설교집의 핵심을 철두철미 “케리그마를 겨냥하는 깊이와 열림의 해석학”으로 규정하고 싶다. 그는 머리말에서 “문제는 우리가 성령으로 감동된 성서텍스트의 놀라운 세계로 얼마나 깊이 들어갔느냐에 있습니다.”라고 선언한다. 또 그는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어떤 사람은 말씀에 대한 열정은 있지만 깊이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매일 성경을 품에 안고 다니기만 하지, 실제로는 마음을 열고 읽지 않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말씀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게 됩니다. 학생들이 모르던 수학문제를 풀어가면서 수학의 깊이로 들어가듯이, 우리도 모르던 말씀의 깊이를 알아 가면서 성령과 더욱 깊은 관계로 들어갑니다.(227쪽)

그는 이미 “한국교회 설교를 말한다”에서 이동원, 하용조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그들의 설교현장만 놓고 볼 때 그들이 성서를 심도있게 해석할 줄 모른다는 게 내 대답이다. …때문에 그들의 설교는 하나님 존재의 신비와 그 말씀의 깊이를 구도자처럼 천착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을 단순히 절대적 규범으로만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청중들의 영성을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황폐화하는 방향으로 나갈 뿐이다.”1)라고 진단함으로써 “깊이(와 신비)”의 영성을 천명한 바 있다.
그 깊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설교의 근본적인 방향전환, 소위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야 한다. 그는 이러한 깊이의 영성을 위해 설교자의 관심이 청중으로부터 성서 텍스트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패러다임 쉬프트를 그는 ‘회심’(혹은 전회/conversion)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본질적일 뿐 아니라 어렵다는 뜻이겠다. 그러기에 그는 예언자들의 신탁과 동일한 경험이 설교자들에게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패러다임 쉬프트는 테크닉이 아니라 설교 행위의 본질이며 설교자의 자기 정체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이라는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두려움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맛 본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시나요? 그 깊이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깊습니다. 그의 사랑도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그의 구원행위도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252쪽)

즉 그는 성서 텍스트를 통해 하나님 경험이 일어나야 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고 이러한 하나님 경험의 본성을 하나님 경외로 읽는 것인데 그에게 있어 하나님 경외(敬畏)는 곧 하나님의 깊이를 경험하는 것이다.(252쪽) 그에게 “깊이”는 곧, 하나님 사랑이고 하나님의 구원행위이자 더 근원적으로 하나님 나라이고 마침내 하나님 그분으로 구체화된다. 이것을 그는 “신비” 혹은 “성서언어가 가리키는 근원적 생명의 세계”라고 부른다. 설교자들이 이 깊이에 한 번 눈이 열리면 “하나님 경외”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자들에게 이러한 깊이에 대한 경험은 성서 텍스트를 매개로 이루어지며 이때 깊이는 언제나 성서본문의 ‘원의미(源意味)’이자 ‘진리’로 드러나는 것이다. 당연히 설교자들은 성서 본문의 깊이를 열어가기 위해 성서 텍스트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깊이의 해석학(解釋學)을 위해 설교자들이 유의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그는 “누가 내 어머니인가?”라는 설교에서 “성서 텍스트의 깊이를 포착하려면 우리는 본문을 더 포괄적으로 읽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성서를 더 포괄적으로 읽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성서를 읽는 것일까? 그는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라는 설교에서 “성서본문이 말하려는 핵심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는 영성”을 말한다. 또 그는 “마리아의 영성”이라는 설교를 통해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문절에서 ‘숨어있는 영적인 세계에 집중할 줄 아는 영성’을 기독교 영성의 핵심으로 지적한다. 숨어있는 영적인 세계는 곧 ‘인간의 궁극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아무도 이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합니다. 거꾸로 그이외의 것은 모두 빼앗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젊음도 사회적 업적도, 가족도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마리아처럼 그 누구든 그 어떤 힘이든 빼앗기지 않는 영적인 현실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306-307쪽)라고 결론 내린다.
그에게 있어 ‘영성 혹은 영적’이란 말은 “단순히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것”(79쪽)이다. 이러한 영성을 그는 “열림의 사건”으로 표현하는 데 “열림”은 크게 두 부분으로 설명한다. 첫째, 진리 혹은 신비 자체가 “닫힘과 열림”의 변증을 통해 설교자와 관계를 맺으며(이 사태를 그는 설교자의 하나님 경험이라고 부른다) 둘째, 설교자는 성서 본문(텍스트)을 포괄적으로 읽어 본문의 핵심 메시지를 포착해 설교를 통해 청중에게 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주 설교를 통해 본문이 열려져야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깊이를 열어주는 작업”을 그는 “해석”이라고 부른다. 그는 “말씀을 수호하라”는 설교를 통해 이 대목을 이렇게 설파한다.

성경을 깊이 아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이 대목을 약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성경을 어렸을 때부터 읽어 왔는데 왜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깊이에 무조건 도달하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도 성경박사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정도로 유식한 사람들이었지만 성경의 중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바르게 알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해석의 힘은 곧 기독교 교리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 교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432-433쪽)
문제는 그의 해석이 “교리의 중심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서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사태를 그는 “케리그마”(209쪽)라고 부른다. 그에게 해석이란 청중들로 하여금 성서텍스트라는 언어사건을 통해 그 언어체계가 지시하는 실재(實在/reality)인 하나님 그분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이미 그의 설교비평을 통하여 한국강단의 가장 큰 오류를 성서가 ‘해석되지 않는’것으로 규정하고 성서읽기의 아마추어리즘과 성서의 도구화를 질타했다.

해석학의 방법론-질문하기

그의 성서해석의 출발점(단초)은 ‘질문하기’이다. 그는 “누가 내 어머니인가?”라는 설교에서 “설교는 예수님에게서 발생한 하나님나라를 주제로 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케리그마라고 한다.”라고 명시한 후 그의 방법론과 관련하여 “말씀을 읽고 공부한다는 건, 바로 텍스트에 대해서 정확하게 질문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과 같다”고 밝혀 준다.(“성령이 함께 하십니다”/221쪽) 또 그는 “실패의 길을 가자”라는 설교에서 질문의 중요성을 이렇게 요약한다.

이런 질문을 왜 하냐고, 그냥 믿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예, 그냥 믿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질문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런 질문은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훨씬 깊은 곳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126쪽)

그의 설교에서 ‘질문하기’는 설교의 진행, 즉 청중과의 소통방식일 뿐 아니라 그의 해석학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핵심어가 된다. 그는 본문을 통해 먼저 일상적 해석을 거친 일상적 의미를 제시한다. 그리고 ‘질문’을 통해 그 제시된 의미를 해체(deconstruction)한 후 더 심층적 질문을 통해 본문 자체의 의미를 해명해 나가는 방식(본문이 열리는 길)을 반복한다. ‘질문하기’는 그에게 있어 마치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해석학의 방법(Methode)으로 기능한다. 말 그대로 Methode는 희랍어 meta+hodos,즉 ‘길 따르기’라고 볼 때 그의 ‘질문하기’는 기존의 본문을 해체하는 무기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고유한 ‘성서해석학’ 즉, 성서언어가 지시하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하나님 나라’,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을(에게로) 지시하는(안내하는), 신비를 드러내는 손가락이 되고 있다. 당연히 그의 손가락이 지시하는 내용은 그의 해석학의 구조인 ‘역사비평과 조직신학, 인문학’ 혹은 “인문학적 성서읽기”이다. (필자는 이미 그의 해석학의 구조를 ‘기독교적 모더니즘’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2))

신학적 영성은 곧 신학함(theologieren)의 영성

이것을 그는 “신학적 영성(神學的 靈性)”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그의 “신학적”영성의 의미를 새겨둘 필요가 있다. 이미 우리는 그가 ‘숨어있는 영적인 세계에 집중하는 것이 기독교 영성’이라고 규정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에게 ‘영성’이란 ‘숨어있는 세계를 (숨어있지 않게) 드러내는 것이 된다. 문제는 이처럼 숨겨져 있는 세계는 ‘성서언어체계’라는 성서 텍스트에 의해 은폐되기도 하고 때로는 노출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작업 자체가 바로 이러한 숨겨진 세계를 드러내는 과정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그는 이미 “단순한 신학공부나 성서읽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언자들과 같은 근원적 하나님 경험”을 설교자의 정체성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또한 그는 “(하나님 말씀을) 단순히 절대적 규범으로만 받아들이는 해석자들과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존재의 신비와 그 말씀의 깊이를 구도자처럼 천착하는 해석자들”을 날카롭게 구별하고 있다. ‘예언자들과 같은 근원적 하나님 경험’과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존재의 신비와 그 말씀의 깊이를 구도자처럼 천착하는 ‘설교자의 신학적 영성’을 필자는 ‘신학함’(theologieren)으로 이해한다. 필자가 굳이 그의 ‘신학적 영성’을 ‘신학’(Theology) 혹은 ‘신학을 학습함’(theologisieren)이 아니라 ‘신학함’이라고 표기하는 까닭은 너무 분명하다. ‘신학’(Theology)이란 말 그대로 신(神/Theo)에 관한 학(學/Logos)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신(神)이란 언제나 방편적 표상이기에 신학이란 자칫 표상할 수없는 그 분에 대한 인간의 표상체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존의 설교자들은 신학을 ‘신(神)에 대한 완결된 지식체계’로 표상한다. 이러한 사태를 그는 “하나님 말씀을 절대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깊이를 아예 ‘눈치채지도 못하는’(81쪽)어리석은 사람들 혹은 성서읽기의 아마추어들이다. 하지만 ‘신학함’이란 ‘성서언어 혹은 신학’이라는 언어(지식)체계를 넘어 “지금 이 자리, 바로 나자신에 의해 지속되는 신학적 수행”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형이상학 입문』에서 “철학은 우리가 철학할 경우에만 있다. 철학은 철학함(philosopieren)이다”라고 규정했고 그의 충실한 해석자였던 ‘오이겐 핑크’(Eugen Fink)는 그의 『유고(遺稿)』에서 다음과 같이 철학의 정체성을 해명한다.

철학의 본질규정은 철학의 가장 고유하고 항구적인 주제이다. 철학은 철학자체의 규정에서 완성된다. 철학이 수행을 통하여 그 고유한 현실성을 실현했을 때에야 비로소 이러한 철학의 현실성의 본질을 개념적으로 파악해서 철학자체를 그 고유한 전체성에서 드러나게 하는 모험이 마침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세계내에 주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그 현실성을 철학적 수행을 통하여 비로소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작에서부터 철학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이 전통을 통하여 미리 주어져 있다 함>은 가장 위험한 가상이다. 역사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은 오직 철학설(Philosophem)일 뿐 철학 자체는 아니다. 제 아무리 고귀한 전통일지라도, 철학 전통이 철학적 모색을 통하여 철학의 본질을 일구어낸 철학 자체를 대체할 수 없고 또 그와 같은 작업을 면제할 수도 없는 법이다. 과거 철학의 위대한 뜻은 오직 어떤 고유한 철학의 생동적인 정신에서부터 과거철학을 부흥시키는 힘을 통해서만 생동적일 수 있다. 오직 우리 스스로 철학을 현실적이게 만들 때에만 우리는 과거의 철학학설들에서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3)

철학이 “세계내에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그 현실성을 철학적 수행을 통해 비로소 확보하는 것이기에, 어떤 고유한 생동적인 정신으로부터 철학을 생동적으로 만드는 과제는 오직 우리 스스로 철학을 현실적이게 만들 때 뿐”이라는 철학 규정(정체성 해명)은 단적으로 “철학의 원천은 본각(本覺)이며 철학적 사유의 목표는 본각을 가동시키는 시각(始覺)”이라는 뜻이다. 존재자 표상을 넘어 존재 사유 곧 진정한 형이상학만을 철학이라고 말하는 하이데거의 경구를, 계시사건을 단초로 하는 신학에 그대로 적용하긴 어렵다 해도 ‘철학함과 신학함’의 기본원리는 설교자들이 여전히 새겨들어야 할 지평일 것이다.
필자가 보는 견지에서 그의 신학적 영성은 성서 텍스트의 해석에 있어 단순히 언어세계와 사실(경험)세계의 이분법적 사유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세계의 관계를 원천적으로 주목하고 있다. 하여 그의 해석학 혹은 신학이 시종 “생명 혹은 구원”을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는 것과 기존의 신학이 전래의 형이상학적 전통 위에서 성서와 신학사이의 긴장을 표상적으로 쉽게 처리함으로써 신앙의 원사실성(성서시대의 성서언어체계를 창출해내었던 신앙인들의 생생한 삶 자체)을 상실(망각)해버린 것과 달리 언어와 신학(의 손가락)을 넘어 원래의 생생한 성서신앙의 세계를 드러내기(열기) 위해 집중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쉬운 이야기를 애써 어렵게 비틀고 있는 염려도 있다. 아니다. 이 문제는 정 목사에게 오직 “하나의 진리문제” 곧 케리그마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를 그는 ‘신비’라고 부른다. (기존의) 신학이란 언어체계의 세례를 받은 설교자들은 반성 없이 “구원”이란 문제조차 모종의 ‘주고받을 수 있는 무엇’으로 이해하곤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은 받았으니(소유했으니) 그 이후에는 순종하여 복을 받아야한다거나’, ‘구원론과 기독교윤리학의 이분법’ 혹은 ‘중생과 성결의 단계구분’ 같은, 그저 신학적 표상(表象)에 불과한 이데올로기를 지극히 자명한 것으로 이미 전제하고 설교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에게 오직 단 하나의 과제는 여전히 ‘구원(생명)’ 문제이다. 구원이란 개념을 ‘생명’으로 바꾸어 봐라. 생명이란 어떤 경우에도 주고받을 수 있는 무엇일 수 없으며 그러기에 그 생명은 종말에 나타날 궁극적 생명에 참여한 현재의 긴장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 강단의 모든 오류의 뿌리에 구원론의 오류, 즉 구원을 소유라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그의 진단은 그의 설교의 원류이다. 그는 이러한 구원론의 문제를 ‘구원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배타성 혹은 인간의(義)의 무력함’으로 설명하곤 한다.

비신화화에서 성서적 리얼리즘에로

그런데 그의 신학적 영성은 그의 신학적 입장이 너무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우려를 갖게 한다. 이러한 성서해석 (혹은 설교비평)은 지지자의 결집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겠지만 “내 입장은 당신과 다르다”는 항변의 부메랑으로 되돌아 올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기 때문이다. 그는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의 신비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① 성서본문의 신화적 세계관을 뚫고 원래의 의미를 포착하는 힘의 결핍과 ② 청중(의 욕구에 )들에 대한 집중 때문으로 진단한다. 첫 번째 논제는 그의 해석학의 내용인 모더니즘적 성서해석의 본성과 관련되어있고, 소위 “비(탈)신화화작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두 번째 논제는 “성서본문과 하나님을 향한 집중”이라는 설교자의 전회가 원래의 의도와 달리 자칫 청중과의 소통경시 혹은 구체적인 인간의 소외로 귀결될 수 있다는 우려다. 그의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현대판 토미즘(토마스주의)의 경향을 보이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닌 듯싶다.
우선 첫 번째 논제부터 논의해 보자. 그는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이라는 설교에서 자신을 이신론자(理神論者)가 아니라고 주장한 후 “저는 성서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성서는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다만 저는 성서가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막 16:18)이라는 말씀을 사실로 믿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나인에 사는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공동묘지로 가는 중간에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살아났다는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 지 알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는 믿음이 아니라 바르게 믿는 게 믿음이니까요. 이건 성서를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서가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250쪽)라고 말한다.
또한 “성서기자들이 보도하는 기적이야기는 그야말로 ‘Sign’,즉 ‘표징’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중요한 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인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꾸 손가락에 매달립니다. 무슨 말을 하는 지 감이 잘 안 잡힌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성서가 말하는 걸 그대로 믿으면 되지 거기서 왜 손가락과 달이야기를 하는 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언어가 가리키는 근원적인 생명의 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으면 우리는 성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74쪽)라고 그의 고유한 모더니즘적 성서해석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성서읽기는 ‘신화(적인 것)의 재해석과 실존(본래)적 의미’를 중요시하는 해석구조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불트만의 ‘비신화화’를 차용한 것이라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그의 모더니즘적 해석학은 소위 ‘기적설화’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그 전모를 드러낸다. 그는 “다비다 쿰”이라는 설교에서 도르가의 소생을 심층적으로 질문하면서 “이런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믿어, 안 믿어?’ 하고 윽박지르지 말고 성서본문을 좀 더 깊이 이성적으로 해석해야만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진리라고 한다면 믿음만이 아니라 이성으로도 설득이 가능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도르가의 소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생 이야기를 통해 전달되는 다른 의미 즉 그런 능력의 예수님이 이제 이방인에게 주님으로 받아들여진 사실 자체가 중요하고 “오늘 이 시대의 언어로 하나님의 생명사건을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195쪽)고 주장한다.

성서의 기적이야기는 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데서 기인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성서를 기록하고 있는 사람이나 그것을 받아 볼 사람이나 모두 미숙한 고대인들의 세계관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하나님 나라를 고대인들의 관점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은 각종 질병의 치유, 축귀, 여러 종류의 초자연적 기적들,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 죽은 자의 소생입니다.(“다비다 쿰”/192-193쪽)

그러기에 그는 도르가의 소생을 “누가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하여 그 당시 신화적 세계관에서 출현한 도르가의 소생이라는 전승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결론내린다. 그가 이처럼 기적을 재해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 들어보자.

축귀, 병치유, 기적 사건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오늘의 현실 역사 앞에서 무기력합니다.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에 머물러 버림으로써 결국 탈역사주의에 빠져들고 맙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해서 어떤 아이가 이미 중학생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유치원 아이처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실제로 기다린다면 문제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194쪽)

그는 기적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주술적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 혹은 ‘탈역사적인 사람들’, 또 ‘유치원 아이 같은 유치한 사람들’로 규정한다. 이성의 계몽이 필요한 아직 미숙한 사람들이란 뜻이겠다. 이러한 유형의 해석은 그의 설교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야웨의 불”에서 그는 갈멜산의 기적을 ‘자연적인 번개’현상으로 설명하더니(240-241쪽) 광야 생활중 이스라엘이 먹었던 만나와 메추라기도 역시 자연의 선물로 해석한다.(242쪽)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서는 제자들의 변화산 경험을 실제적 사건이 아니라 예수의 공생애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메타포로 해석한다.(112쪽) 이러한 방식의 해석은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라는 설교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표적을 신화의 차용으로 해석하는 부분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기독교의 성서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이미 그리스 신화에도 나옵니다. C.K. 바레트의 설명에 따르면 디오니소스 신은 포도나무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기적들은 디오니소스 예배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기원 전 5세기의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이런 연구들이 나왔습니다. 요한복음공동체는 이런 신화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신앙하는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신화를 차용했다는 말입니다.(72쪽)

그러면서 그는 본문을 통해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는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레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또 그는 이어서 “첫 번째” 기적의 아르케를 ‘근원적인, 일차적인’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포도주 사건은 예수님이 공생애에서 첫 번째 행한 사건이라는 데 의미를 두기보다는 그것이 본질적인 사건이라는 데 의미를 두는 것으로 읽고 있다. 결국 이 본문의 핵심적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현시되었고 제자들이 믿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요한복음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대로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 중에서 요한의 신학(전승)에 적합한 7개의 이적을 배치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복음서이다. 요한복음 2장의 ‘포도주 이적’은 그 중 주님의 초기사역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이다. 정 목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를 믿게 된 동기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에 원초적 초점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지적이다. 하지만 요한공동체가 그 목적을 위해 사도적 전승이 아니라 희랍의 신화를 차용했다는 해석은 아무래도 도(度)가 지나쳤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론’과 연계된 희랍적 사유로 이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유형의 해석이 왜 없겠는가? 어디 C. K. 바레트뿐이겠는가? J. Estin Carpenter는 떨어진 포도주를 유대주의라는 오래된 포도주(the old wine of Judaism)라고 기적의 비유적 성격(the parabolic nature of miracle)을 주장했고, 불트만은 아예 “이 이야기는 ‘의심할 것 없이’(zweifellos) 이교신화에서 왔다”고 단언했다.4)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어디까지나 단지 하나의 가설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본문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식들 중에서 굳이 이러한 방식의 해석틀을 유일한 진리로 여기는 그의 해석구조가 문제라는 뜻이다.
이러한 해석 구조는 성서 텍스트 자체가 길을 열고 해석자는 고요히 그 길을 안내하는 자리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 해석자의 의도가 성서 텍스트의 길을 왜곡하는 자리에 올라가 있는 형국이다. 본문 중에서 정 목사도 “요한복음공동체는 이런 신화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가정한다. 그런 가정은 사실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어떤 논증도 없이 그 가정을 진리로 여기며 포도주 이적은 희랍신화의 차용이라고 단언해 버린다. 소위 선결문제요구의 오류(fallacy of begging the Question)이다. 필자는 기적 현상에만 심취하거나 오해 혹은 왜곡하는 것에 대한 그의 경고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기적 그 자체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73쪽)는 그의 생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또 “기적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주술적이며 탈역사적이고 고대의 미신적 세계관 속에 사는 계몽되지 않은 사람들”이란 주장도 터무니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정목사처럼 ‘이성’의 빛으로 성서를 합리적 소통의 틀로 읽어내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 그 본문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기적 혹은 상징 없이 인생의 궁극적 관심이자 사태인 종교, 혹은 신앙의 의미를 새길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이해’의 터 위에 세워진 신앙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존중하지만 그 길만이 유일한 (진리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람들이 진리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논리적 (이성적)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진리인식과 전달의 방법에는 “경험/ 이성/ 직관”의 3가지 길이 있었다. 특히 종교적 진리 문제에는 “언어를 통한 직관, 또는 언어화된 체험의 세계에 대한 직관”의 가능성 곧 “논리적 직관”5)을 중요하게 인정하기도 한다. 조금 더 부연한다면 관찰·응용·체험의 경험적 방법, 생각·추리·논리의 이성적 방법, 명상·기도·수행의 직관적 방법은 서로 협력하여 종합적인 진리판단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이다. 어느 한 가지 방식이 다른 방식에 대해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통전적으로 교통하는 것이다. 더욱이 인생의 궁극적 관심사로서의 형이상학 혹은 종교적 진리문제에 있어 ‘이성’의 틀이란 매우 허약한 것이다. 가령 하이데거가 프라이부르그대학 교수취임 강연에서 “형이상학(形而上學)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저 유명한 ‘무(無)의 형이상학’을 강연했을 때 카르납은 그의 ‘논리구문론(logical syntex)’의 관점에서 특히 하이데거의 “무(無)가 무화(無化)한다”(Das Nichts selbst nichtet)라는 문장이 논리적 형식을 위반하는 사이비문장이므로 무의미하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카르납은 하이데거의 “무의 형이상학”이 서있는 선험적 혹은 존재론적 지평이 실증주의 경험론의 형식논리법칙인 ‘동일률/모순률/배중률’의 틀로서는 애초 해명불가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지다. 또 불가(佛家)의 출세간적 제일의제(大道)는 이른바 “(세)속제. 제 2의제”의 차원 인 ‘4구분별(4句分別)’6)의 틀로는 애초 해명불가능하기에 ‘무문(無門)’이라는 역설적, 억지방편적 표현으로 언표(지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정 목사의 모더니즘적 성서해석은 첫째, 성서적 리얼리즘의 심각한 훼손이라는 점과 둘째, 하나님 경험의 지평을 ‘이성’이라는 틀 안으로 축소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오류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해와 진리인식에 있어 치명적인 결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깊이의 영성에서 넓이의 영성에로

이제 우리는 두 번째 논제인 성서언어가 지시하는 근원적 생명세계를 은폐하는 또 하나의 기제인 “청중에의 집중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는 설교자가 성서본문이 아닌 청중에게 집중하는 행위를 ‘대중추수주의’(포퓰리즘)로 규정한다. 그는 “예레미야의 소명”이라는 설교에서 “제가 지난 몇 년 동안 진행한 설교비평 작업에서 젊은 설교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서텍스트에 충실한 설교를 하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대중추수주의(포퓰리즘)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퓰리즘은 바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90쪽)라고 주장하고 있니다. 맞는 말이다. 설교자가 청중의 욕망체계에 영합하는 것이나 청중을 두려워하는 것은 포퓰리즘을 넘어 ‘우상숭배’에 해당되는 것이다. 정 목사는 이미 ‘머리말’에서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깊이와 열림의 영성”을 위한 핵심으로 선언한 바 있다.

청중을 성서 텍스트와 만나게 하는 게 중요한데 어떻게 성서 텍스트에만 집중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서 텍스트가 바르게 선포되기만 한다면 자연히 청중과의 만남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존재가 행위를 규정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설교자의 영적 촉수는 청중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청중들의 흥미를 끌 수없다는 걱정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청중들과의 만남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몫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의 감동된 성서텍스트의 놀라운 세계로 얼마나 깊이 들어가느냐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기본적으로 예언자들의 신탁과 동일한 경험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성서 텍스트와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그의 명제는 너무도 공명이 커서 우리는 단지 이러한 원리를 이처럼 유려하게 표현해내는 그의 언어적 광휘 앞에 경의를 표하는 것 외에 할 말을 잊게 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명제의 진리성을 다시 검증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러한 유형의 주장들이 대개 사실적 진리이기보다 선언적 진리에 가깝더라는 경험적 방어센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 텍스트가 바르게 선포되기만 한다면 자연히 청중과의 만남은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또 청중들과의 만남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몫”이라는 그의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는 진리일까?
이 문제와 관련한 그의 대답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곧 존재가 행위를 규정한다.”이다. 과연 그런 것일까? 주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마 7:17; 눅 6:43))고 말씀하시지만 역으로 “열매로 그들을 안다”라고도 말씀하신다. ‘존재가 행위를 규정한다’라는 명제가 참이라면 꼭 같은 논리로 “행위가 존재를 규정한다”는 명제도 참이다. 순환논리라는 뜻이다. 오히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명제가 주님의 의도에 가까운 원의미일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주님은 ‘열매’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의 ‘외식’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순환논리의 한 면만을 인용해 ‘성서 텍스트와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그의 명제를 예증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애초 그의 사유구조가 ‘청중을 종속적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이다. 또 “성서 텍스트가 바르게 선포되기만 한다면”이란 가정 자체가 이미 ‘바른 선포’라는 모종의 가치를 전제하고 있는 데, 이 땅의 어떤 해석도 해석자의 주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해석학의 기본이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내가 너희를 젖먹이로 여긴다”고 고백했고 또 “내가 어릴 때는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다”고 회고했는데 청중(과 설교자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부지런히 살피는 것은 성서 텍스트에 대한 집중과 함께 설교자의 막중한 책무인 것이다. 즉 설교자는 그들의 욕구에 영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통과 섬김을 위하여 청중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 본문을 매개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과 청중에게 집중하는 것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배제할 수 없고, 또 할 수도 없는 양날개라는 뜻이다. 당연히 설교자에게는 예언자의 신탁경험과 함께 ‘사도적 전승과 교회(공동체)의 영성에 대한 정치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이러한 영성을 “넓이의 영성”으로 부르고 싶다.
그는 “하나님나라와 그리스도인”이라는 설교에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 스스로가 일으키는 하나님의 생명운동입니다.”(277쪽)라고 주장한다. 자명한 명제 같지만 이러한 진술도 ‘동어반복’(totology)이거나 분석판단에 불과하다. 만에 하나 이러한 명제가 의미가 있다 해도 이러한 명제는 ‘하나님나라의 역동성(dynamic)과 인간자유와 책임의 영역’을 현저히 훼손하는 비성서적 진술일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우선 이러한 진술이 도대체 우리의 일상언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지 우리는 전혀 검증할 수 없다. 그가 그처럼 중요하게 지시하는 깊이 (신비)자체가 무엇인지 전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러한 추상적 신비이해가 과연 우리 영성의 궁핍함을 풍성하게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떠한 가능성도 불분명하다. 대개의 경우 청중은 역사의 종말에 드러날 궁극적인 생명사건보다 ‘죽음 혹은 존재자의 무화(無化)’를 통해 내 삶으로 돌입해 들어오는 종말을 훨씬 생생하게 경험하는 법이다. 내 삶 자체가 역사이며 종말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지금 ‘기도하며 회개하라’는 설교에 응답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결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설교 어디에도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가 없는 것, 심지어 회개라는 말 자체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조금 거칠게 말한다면 그의 해석학에는 ‘눈앞의 구체적이며 생생한 인간’이 증발해버린 것으로 보인다. 불완전하고 또 구원(생명)사건에서 철저히 무력한 ‘바로 그 죄인’과 소통하기 위해 눈높이를 맞추어 친히 찾아오셨던 ‘바로 그 하나님’을 신비라는 추상 속으로 유폐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성서읽기에서 형이상학의 향기에로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존재가 행위를 규정한다”로 해독하는 그의 신학적 영성 곧 그의 신학함의 해석학은 결국 ‘존재와 행위’를 주객도식의 이분법으로 읽어내고 있다. 단지 존재를 행위의 상위개념으로 여길 뿐이다. 비록 그가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을 존재론적 변화로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75쪽) 그에게 있어 “존재론적” 혹은 “존재”개념은 여전히 ‘주/객도식’안에 머물러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주/객도식”이란 주관(Subject)이 객관(Object)을 소재로 인식하는 방식이다. 말 그대로 인식하는 내가 “내 아래로”(sub) 인식의 대상을 “던져넣는”(ject) 방식 혹은 인식하는 주체인 내가 “내 앞에”(Vor) 인식의 대상을 “세워놓는”(stellung) 방식이다. 표상(Vorstellung)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표상 혹은 표상체계를 우리는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하지만 ‘존재론적’이란 말은 ‘존재적’이란 말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가지는 말이다. ‘존재론적’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주/객, 생/사, 유/무, 심/신, 경험/선험》의 모든 구별(분별)이 사라진 세계(?)를 지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무(Nichts)의 형이상학이나, 조주의 무자화두는 바로 ‘존재론적’지평을 지시하고 있으며 이때 ‘무(無)’는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뛰어 내리는 것과 같은 ‘단절’없이는 결코 열리지 않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현상학적 존재론’ 혹은 ‘존재론적 현상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기존의 존재론(형이상학)과 전혀 다른 존재론, 하이데거 자신의 표현대로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존재자 표상이 아닌 존재사유 즉 진정한 형이상학인 것이다.
필자가 그의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소위 토미즘(토마스주의)의 현대판 아류로 보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인문학은 인문학 고유의 길이 있다. 인문학은 결코 인문학 외의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인문학의 궁극은 언제나 “존재론적 인간론”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그의 신학함의 영성이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넘어 진정한 형이상학의 향기로 가득 채워지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김종두 목사는 서울신대와 경북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Ph. D) 지금은 대구신학교와 경북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현재 대구 수성성결교회 담임 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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