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열식 설교의 문제점과 그 극복 방안

-이동원 목사의 설교집 <지금은 다르게 살 때입니다>를 중심으로-



벌써 오래 전부터 이동원 목사(이하 '이 목사'로 약함)의 설교와 성서강해, 또는 목회의 탁월성에 대해서 소문을 듣고 있었지만 직접 그의 설교를 대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번에 저는 우리의 설교공부를 위해서 그의 설교집 <지금은 다르게 살 때입니다>(이하 '지금은')를 비교적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읽기가 끝난 다음 가장 강하게 다가온 인상은, 본인에게 약간 미안한 말이지만 "이 분이 한국 목사인가, 아니면 미국 선교사인가?"였습니다. 이 설교집은 온통 미국에서 일어난 예화로 도배되다시피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5편의 설교 중에서 11편이나 서양에서 일어난 예화로 시작됩니다. 뉴욕 맨해턴 이야기, 1800년대초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일어난 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의 영국황실과 처칠 수상, 프랑스 영화, 리더십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연설가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코비 박사에 관한 이야기, 미국의 제재소 직원이 해고당한 이야기, 오 헨리의 단편 소설 '20년 후', 등등입니다. 설교 본문 안에도 이런 유의 예화는 거듭되고 있습니다. 이 설교집에 등장하는 예화만 따로 편집하면 또 한 권의 책이 될 법합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한국 교회 강단의 일반적인 특징이긴 한데, 저는 이 목사처럼 거의 미국 일변도의 예화를 설교 전체에 쭉 깔아놓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이 아무리 설교의 효과를 제고시킨다고 하더라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예화의 과잉 현상은 곧 설교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게 된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한 설교자가 바르트의 표현대로 '성서의 놀라운 세계'에 접근할 수만 있다면 구태여 구질구질하고 너무나 뻔한, 흡사 티브이 멜로 드라마처럼 진부한 예화에 매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화가 음식의 양념처럼 설교의 맛을 돋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 반, 고기 반' 식으로 예화가 범람하는 현상을 지적하려는 것뿐입니다. 설교가 예화 중심으로 치우치는 이 현상은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나열식' 설교 현상과 맥을 같이 합니다. 즉 예화의 과잉과 마찬가지로 나열식 설교는 성서의 깊이에 천착하지 못함으로써 설교를 가벼운 담소거리로 끌어내리고 있는 설교자들의 도피처라는 말입니다.



나열식 설교의 전형

제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몇 권의 설교집 중에서 가장 문제가 심각한 나열식 설교의 전형은 김홍도 목사의 '불기둥' 연작 설교집에 실려 있는 설교들입니다. 제19권에는 43편의 설교가 실려 있는데, 한결같이 첫째, 둘째, 셋째 ... 이런 나열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몇 대목만 들여다볼까요? "성도의 영원한 보장"(롬 8:31-39)은 우리에게 영원하게 보장된 것을 셋으로 나열합니다. 1) 영생의 보장입니다. 2) 영원한 사랑의 보장입니다. 3) 영원한 집의 보장입니다. 이런 세 단락에 적당한 성구와 예화를 연결시키는 형식으로 설교가 진행됩니다. "깨어짐의 원리"(창 32:22-32)에서 설교자는 우리가 깨어질 때 다음과 같은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고 증언합니다. 1) 새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요 12:24). 2) 축복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창 32:25-29). 3) 향기가 나타납니다(요 12:3). 4) 승리하게 됩니다(삿 7:16). 5) 귀한 그릇이 됩니다(출 3:11,12). 저는 김홍도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볼 때 이런 설교는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의존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해명해야하는 설교의 근본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의 작은 경험을 절대적인 잣대로 내세운 말장난에 훨씬 가깝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이유는 뒤에서 이동원 목사의 설교를 다룰 때 자연스럽게 설명될 것입니다.

김홍도 목사 이외에 다른 분들에게도 이런 나열식 설교의 특징이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저는 오늘 이동원 목사의 설교집 '지금은'을 집중적으로 검토하면서 우리에게 만연해 있는 나열식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그의 설교에서 이런 구조가 얼마나 분명하게 나타나는지 우선 세 편만 인용해보겠습니다.

"지금은 큰 믿음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이하 '큰 믿음')의 본문은 마태복음 17:14-21입니다. 예수님이 측근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오르셨다가 내려 오셨을 때 간질 병 들린 아들을 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책망하시고 그 유명한 '겨자씨 만한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목사는 이 본문에서 아이엠에프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는 믿음의 회복이라는 매우 원칙적인 주장을 피력하면서 그 믿음을 회복하기 위한 우리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예수께 문제를 가져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믿음을 회복하려면 예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셋째, 기도와 금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은 주의 인도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이하 '주의 인도')의 본문은 그 유명한 동방박사 이야기인 마태복음 2:1-11절입니다. 이 목사는 "고통스러운 이 시대에서 우리가 주의 인도를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고 묻습니다. 첫째, 우리는 주의 비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주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할 때입니다"(이하 '우선 순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본문(마 6:25-34)에 관한 설교입니다. 이 목사는 이 본문에서 삶의 우선 순위를 구분할 줄 알아야 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세 단락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염려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셋째, 먼저 구할 것을 구하십시오.

위에서 예로 든 세 편 이외에도 거의 모든 설교가 이런 나열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거론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분적으로 그런 색깔이 옅어지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의 설교는 앞서 언급한 김홍도 목사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나열식 설교의 전형을 보이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한 수 윗길입니다. 김홍도 목사는 성서 본문에서 제목만 발췌하듯이 따와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거의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반면에 이 목사는 가능한 성서 본문에 충실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차이는 보기에 따라서 별 게 아닐 수도 있지만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 분은 자기 생각에 머물러 있지만, 다른 한 분은 성서에 기대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김홍도 목사의 설교는 약간의 인문학적 식견만 있으면 그 조잡성이 쉽게 포착되지만 이 목사의 설교는 나름대로 진정성과 세련미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청중들이 그 설교의 함정을 눈치채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김홍도 목사의 설교는 제쳐놓고 이 목사의 설교만 물고늘어지려고 합니다. 우선 나열식 설교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이 목사의 설교를 중심으로 풀어보겠습니다.



긴장감의 훼손

먼저 '나열식' 설교는 그 용어 자체로만 본다면 하나, 둘, 셋 ... 이렇게 소주제를 늘어놓는 형식을 뜻하는데, 설교가 이런 형식으로 전개되면 절대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설교의 주제와 본문에 따라서 이런 나열 방식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확인한 나열식 설교의 대부분은 그런 논리적 필요나 당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단순히 설교의 편이주의에 부응하기 위해 전개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성서에 담긴 고유한 영적 세계에 들어가서 그 세계를 풀어내는 설교의 고된 작업을 거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설교의 지평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작업 자체를 귀찮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나열식 설교에서는 그 주제가 산만하게 분산되고, 나열된 소주제 사이에 당연히 있어야 할 그 긴장감이 훼손되고 맙니다.

위에서 예로 든 설교 '큰 믿음'에서 이 목사는 간질병에 걸린 아이의 치유 사건을 통해 믿음이 회복될 수 있는 방식을 세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물론 이 목사가 제시한 세 가지 소주제는 나름대로 신자들의 신앙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성서 안에서 찾아내야 할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는 본문의 진행에 따라서 아주 쉬운 답변을 열거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문제를 예수님에게 가져오자. 예수님만을 신뢰하자. 기도와 금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자.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제목을 해명하기 위해 제시된 세 가지 작은 주제는 설교 제목과 거의 맞먹는 각각의 무게를 갖고 있습니다. 약간 요령이 있는 설교자라면 이 세 가지만이 아니라 "주님에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자", 또는 "예수님께 꿇어 엎드리자" 등등, 이런 식으로 무한정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설교는 하나의 핵심 주제가 심화되지 못하고 설교자 개인의 신앙적 취향에 따라서 흡사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늘어놓듯이 옆으로 확산되기만 합니다. 심화 없는 전개와 확대는 청중들의 영적 감수성을 유치하게 만드는 지름길입니다.

동방박사를 본문으로 삼은 '주의 인도'라는 설교를 볼까요? 동방박사와 같이 주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 가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시된 작은 주제인 주의 비전을 바라보는 것과 주의 말씀을 바라보는 것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동방박사들이 잠깐 별을 보긴 했지만 그 뒤로는 '말씀'에 의지해서 베들레헴까지 왔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또한 무엇일까요? 이 문제는 본문비평에서 다루어질 문제이니까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도 말씀을 의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것 하나만으로는 일리가 있긴 하지만 다른 소주제들과의 연관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설교의 긴장감을 훼손합니다. 그러니까 주의 인도를 받으려면 비전도 있어야 하고, 말씀도 의지해야하고, 예배도 드려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이 얼마나 엉성한 논리입니까?

'우선 순위'라는 설교도 잠깐 보겠습니다. 우리의 삶에 우선 순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염려하지 말자, 하나님을 신뢰하자, 먼저 구할 것을 구하자, 라고 이 목사는 주장했습니다. 각각의 소주제와 연결될만한 본문이 제시되기는 했지만 그 사이의 긴장감은 별로 없습니다. 이 설교를 읽다보면 '염려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우선 구할 것'은 거의 똑같은 이야기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 등장하는 예화만 다를 뿐입니다. 이런 설교에서는 소주제가 한편으로는 각각 따로 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리에 머물기 때문에 결국 중심 주제를 심층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해봅시다. 어느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조회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훈화를 했습니다. '모범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 첫째,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둘째,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셋째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거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와 비슷합니다. 단지 설교는 성서 본문을 기초로 한다는 점에서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만약 이 교장 선생님이 위인들의 어록을 참고한다면 설교와 거의 똑같은 이야기 방식이 됩니다. 모범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 나열된 세 가지 항목이 각각 따로 놀면서, 동시에 '그 말이 그 말'에 불과합니다. 이런 훈화를 듣는 어린이들은, 우리 딸들에게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잔소리'로 듣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 자체가 따분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나열된 세부 항목이 중심 주제를 깊은 세계로 끌어가는 긴장감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려면 이렇게 비슷비슷한 여러 항목을 나열할 게 아니라 한 가지로 집중해야 합니다. 모범적으로 행동한다는 게 근본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아야만 모범적인 어린이가 되는 것인지, 이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 답안만이 참된 가치인지, 등등, 이런 과정을 논리적으로 풀어 가는 작업이 있어야만 청중들의 생각을 깊은 세계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설교의 요령- 정보, 혹은 영성

설교자가 성서의 내면적 세계로 들어가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몇몇 진술을 요령 있게 나열한다는 말은 곧 성서를 인간 삶의 가장 깊은 차원인 '영성'이 아니라 가장 낮은 차원인 '정보'로서만 다룬다는 뜻입니다. 흡사 자동차의 성능과 구매의 조건에 대해서 엄청난 정보를 갖고 고객을 사로잡으려는 자동차 외판원처럼 설교자도 역시 설교를 정보처리 기술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열식 설교를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의 존재론적 영성을 확보한 설교자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나열식 설교는 그 속성상 정보 전달에 토대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설교가 어떤 방식을 통해서 구성되는지 그 요령을 확인해보면 이 이런 사실이 증명될 것입니다. 설교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분들은 이 대목을 주의해서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설교 준비가 얼마나 간편한 작업인지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천기누설의 죄를 범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대개 이름 난 설교자들의 설교라는 것이 결국 이런 요령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설교자들의 머리 속에는 매우 많은 성서와 신앙에 관한 용어와 개념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기도, 찬송, 믿음, 용서, 사랑, 염려, 전도, 충성, 기쁨, 감사 등등, 목회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훨씬 많은 성서와 신앙의 정보를 훤히 꿰뚫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용어와 개념의 쓰임새를 익히 알고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이런 용어를 적당하게 배열하는 방식으로 어떤 성서본문을 갖고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설교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일단 아무 제목이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을 본문에서 뽑아낸 다음에 첫째, 기도하는 사람, 둘째, 전도하는 사람, 셋째, 충성하는 사람, 대충 이런 방식으로 얼마든지 설교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현상은 '이' 설교에서 소주제로 쓰인 것이 '저' 설교의 중심 주제로 등장하고, 거꾸로 이 설교의 중심 주제가 다시 저 설교의 소주제로 떨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충성하자'라는 제목을 잡고, 충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 기도해야 한다, 둘째 사랑해야한다, 셋째, 감사해야 한다, 이런 식의 설교가 가능합니다. 또는 '감사의 삶'이라는 설교의 제목 아래, 첫째, 기도하자, 둘째, 충성하자, 셋째, 회개하자, 이런 구조를 짤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성서 본문에서 그런 세부 항목을 찾아내기도 하고, 더 많은 경우에는 본문과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대로 세부 항목을 설정한 다음에 그것에 맞는 성서구절을 다른 곳에서 인용하곤 합니다. 이런 방식의 설교라고 한다면 저는 매일 한 편이 아니라 열 편씩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예로 삼은 이 목사의 설교 세 편에 등장하는 성서 용어와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에게 가까이 옴, 신뢰, 기도와 금식, 비전, 말씀의지, 예배, 염려로부터의 해방, 하나님 신뢰, 먼저 구할 것.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용어와 개념들입니다. 참고적으로, 그 설교집에 실려 있는 다른 몇 편의 설교에 다음과 같은 소제목들이 들어있습니다. 부활체험, 하늘나라 기업, 유익, 시간선용, 주의 뜻 분별, 찬송, 감사, 복종, 집의 기초, 승리 등등. 자신의 오랜 신앙생활과 목회생활을 통해서 소유하게 된 이런 정보가 필요에 따라서 설교 안에 적당하게 나열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요령만 알게되면 설교는 참으로 쉽습니다.

이런 설교에 익숙한 설교자의 설교 행위는 깊은 영성에서 우러나오는 창조행위가 아니라 기존의 정보와 자료를 자신의 취향과 그 상황에 맞도록 적당하게 배열하는 일종의 '편집' 기술입니다. 이런 요령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설교자의 영성은 메말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우리의 삶과 존재의 깊이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에 대한 진술이지 어떤 신앙 지식과 정보의 축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영적 깊이와 충돌한 바리새인들이 신앙을 정보로 인식한 가장 전형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이 특강 첫머리에 이 목사의 설교에 예화가 지나치게 자주 사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별로 연관이 없는 몇몇 소품을 적당하게 배열하는 것만으로 설교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니까 대신 그럴듯한 예화로 포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설교는 설교자의 가벼운 경험이 성서 말씀을 압도함으로써 결국 성서 자체의 '세계'를 은폐시키고 맙니다.

물론 정보 자체가 우리의 설교를 가볍게 만드는 주범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정보가 설교자의 영성 안에 체화(體化)되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설교자가 '종말'에 관한 신학적 정보나 인문학적 정보를 자신의 영성 안에서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즉 큰 깨우침(돈오)으로 담아낼 수 있다면 그런 정보는 설교의 지평을 심화하는 작업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 설교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는 설교자들에 의해서 충분히 소화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의 일방적으로 목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도구로만 다루어지기 때문에 인간 구원이라는 우주론적 주제를 다루어야 할 설교가 교양강좌처럼 가벼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도식화

복음의 깊이에 들어가는 일 없이 수많은 아이디어와 정보를 늘어놓는 나열식 설교는 결국 신자들의 신앙을 도식화하고, 더 나아가 황폐화합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흡사 우리의 청소년들이 이씨조선의 왕들을 연대기적으로 외우는 것으로 역사 공부를 마친 것처럼 생각하듯이 우리의 설교가 온갖 신앙적 처세술을 가르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생명과 존재의 무게는 오간 데 없고 신앙의 도식만 난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교회에 신앙의 열정이 부족하다거나 다른 종교에 비해서 사회 봉사를 못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철야기도, 성서통독, 교회당 건축, 선교사 파송 등, 외면적으로 신앙의 열정들은 이 사회가 놀랄 만큼 강력하고 화려하게 나타나지만 실제로 성서의 영적 깊이에 침잠 하는 경우는 제가 볼 때 아주 드뭅니다. 교회 안으로는 극단의 분열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교회 밖으로는 우리의 신앙이 이 역사 변혁의 에너지로 분출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작은 예증입니다.

이런 문제가 반드시 나열식 설교에만 책임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 제도, 신학의 미숙, 한국인의 개인주의적이고 기복적인 정서 등, 여러 요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전반적인 사태와 맞물려서 나열식 설교가 그런 현상에 끼친 책임이 작지 않습니다. 앞에서 거론했듯이 설교자의 신앙 정보를 적당하게 나열하는 방식의 설교에 익숙해짐으로써 신자들이 신앙의 요령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지 신앙의 깊이에 몰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인데, 이 문제는 설교자의 책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설교자와 청중이 구원과 생명과 존재에 함께 참여하는 설교 현장의 왜곡이라는 또 하나의 악순환을 생산합니다. 설교행위의 왜곡, 또는 설교 영성의 훼손은 이미 우리 교회 안에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간단히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나열식'인가?).

첫째로는 말 그대로 신자들이 담임 목사의 설교에 대해 전혀 기대가 없는 현상입니다. 권위 있는 기관에서 설문조사가 있었는지 제가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한에서만 보더라도 상당히 많은 신자들이 설교에 대한 기대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상당한 신앙의 연륜 속에서 성서에 대한 정보를 이미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나 마나'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건 설교자의 비극입니다.

둘째, 어떤 교회는 매우 열광적이기는 하지만 주술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기복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설교로 인해서 청중들의 반응이 뜨겁기는 하지만 설교의 인격적이고 역사적 영성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바람직한 형태는 아닙니다. 이건 설교자의 기만입니다.  

셋째, 위에서 거론한 두 가지 모습과는 좀 다른 또 하나의 설교는 도덕주의로 치장된 가벼움입니다. 주로 지식인 중산층으로 구성된 교회의 설교 행태라 할 수 있는 이 도덕주의는 설교의 무감각증과 주술적 미숙으로부터 벗어나서 나름의 역동성과 교양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성서의 영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 설교비평의 주요 대상으로 삼은 이 목사의 설교집 제목(지금은 다르게 살 때입니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의 생각과 의도를 뛰어넘어 바람처럼 자유롭게 생명의 세계를 일구어 가는 하나님의 활동과 그 계시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율법적) 자기 성취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설교자의 위선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현상이 늘 이런 식으로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서로 겹치기도 하고 한쪽으로 쏠리기도 하면서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왜곡된 설교 현장에서는 설교에 참여한 설교자나 회중이 더불어서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 관리나 도덕적 행위로 끌어내림으로써 신앙이 도식화하고 황폐화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유명 설교자는 인간의 '게으름'에 대해서 질타하는 설교를 하기도 하는데, 이게 그럴 듯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방식의 설교로 인해서 기독교 신앙은 질식합니다. 그들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성령이 사람에 따라서 부지런한 삶에도, 또는 게으른 삶에도 각양각색으로 활동하신다는 그 신비를 모르고 있습니다.

존재의 신비로!

이런 점에서 저는 성서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새롭게 열어내지 못하고 단지 기독교적인 신앙 연습에 머물게 하는 것은 살아있는 설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들의 작은 신학적 지식이나 신앙적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충분히, 또는 어느 정도는 인식한다고 생각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신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청중들을 하나님의 영에 직면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 안에 묶어 두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성서와 기독교 교리도 하나님의 신비를 아직 완전하게 드러내지 못한 마당에, 일개 설교자의 신앙 경험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최소한의 인문학적 성찰도 거치지 않은, 거의 설교자 개인의 주관성에 머물러 있는 그 알량한 경험으로 하나님의 영을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라니!

이런 문제에서 이 목사의 설교 '큰 믿음'에 들어있는 함정이 무엇인지 살펴볼까요? 그는 변화산에서 내려온 예수님이 간질병 들린 아이를 고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1) 문제를 예수님에게 가져와야 한다, 2) 예수님만을 온전히 신뢰해야 한다, 3) 기도와 금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주장합니다. 이 본문에서 문제를 예수님에게 가져와야 한다거나 예수님만을 온전히 신뢰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성서의 세계를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는 소치로서, 제가 보기에 참으로 우스꽝스럽습니다. 기도와 금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이런 간질병이 치료될까요? 기도와 금식으로 우리의 믿음이 회복될까요? 성서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걸까요? 이 목사가 제시하는 그런 기본 명제 자체를 제가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를 이런 식으로 풀어내기 시작하면 모든 게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해석되는 위험성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청중들은 목사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하고, 또한 그 내용이 자신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니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더구나 이 목사처럼 나름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을 경우에는 청중들이 훨씬 쉽게 이런 설교의 가벼움과 유혹에 빠져듭니다. 본문의 내면적 현실성(reality)을 보지 못하고 그 외연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가벼움이며, 하나님의 존재 신비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태도에만 머물게 한다는 점에서 유혹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읽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마태복음 기자는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과 간질병 아이의 아버지에게 믿음을 가지라는 것보다는 예수의 믿음에 존재론적으로 담지된 메시야적 징표에 대한 두려움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질병 아이를 기적적으로 고칠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에게만 있는 그 믿음을, 그래서 간질병 아이가 치유될 정도의 능력이 그에게서 발현한다는 그 사실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믿음은 오직 예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만 가능한 그런 믿음이 곧 하나님의 존재 신비이며, 그런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론적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는 하나님과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지 인간의 일을 해명하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성서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감, 사회 정의를 위한 책임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러나 그런 예언의 선포도 결국은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인간이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지 인간 자체에 대한 어떤 가르침은 아닙니다. 따라서 설교는 우리의 종교적 업적, 도덕적 실천, 더 나아가서 직접적인 사회혁명을 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설계와 계획과 목표를 뛰어넘어 생명의 신비로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게 하는 작업입니다. 예컨대 '기도'에 대해서 설교한다고 할 때 설교자는 신자들에게 열심을 다해서 기도하거나 뜨겁게 기도하라거나, 통성기도와 합심기도로 이 세상을 확 뒤집어놓자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합니다. 오히려 기도의 신비에 대해서 성서가 말하는 것과 자신의 경험을 연결해서 설명하면 충분합니다. 청중들은 그런 기도의 신비에 직면하면 자기의 형편에 따라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의 모든 존재를 내던지듯 기도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타자를 위한 존재'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살려고 스스로 결단할 것입니다. 즉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생명과 존재의 신비에 직면하게 하는 것이지 어떤 처방전을 제시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이런 영적 시야를 제시하거나 해명할 준비가 없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청중들의 심리를 자극하거나 도덕적 실천을 끌어내는 것에 설교의 목표를 세우게 됩니다. 그 결과가 곧 나열식 설교입니다.      

설교의 다양성-에세이

생명과 존재의 신비에 직면하게 하는 기능으로서의 설교는 나열식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할까요? 이것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없습니다. 사람의 모양이 다르듯이, 생각도 다르고 삶의 경험도 다르듯이 오직 하나의 대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어떤 방향만은 제시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에세이' 방식이 가장 좋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에게 완전히 소화된 내용을 새로운 언어로 자연스럽게 표현해내는 글쓰기, 혹은 말하기 방식이 곧 에세이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 목사가 설교한 '큰 믿음'이라는 주제를 그렇게 '참을 수 없도록' 가볍게 나열 만할 게 아니라 본문을 중심으로 겨자씨 만한 믿음의 신비가 무엇인지 깊이 파고드는 게 좋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무도 첫째, 둘째, 이런 방식으로 전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에세이 식으로 설교가 전개되면 설교자의 영적인 깊이 만큼 성서의 세계가 풀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설교의 다양성을 위해서도 좋은 일입니다. 거의 모든 설교가 전혀 차별이 없는 이유는 성서의 주제에 대한 깊은 사유가 없고 들은 풍월로만 나열하기 때문인데, 만약 에세이를 쓰듯이 자신의 영적인 깊이에서 성서를 풀어낼 수 있다면 설교자의 숫자만큼 설교가 다층적으로 실행될 것입니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욕심인데, 좀 새로운 설교를 듣고 싶습니다. 새롭지는 않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향한 그런 새로움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설교를 듣고 싶습니다.

'에세이' 방식의 설교는 우리가 좀더 연구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목사의 존재론적 무게가 담겨야 할 설교는 신앙의 정보를 단지 '나열'하는 게 아니라 성서의 무한한 영적 깊이를 제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에세이 방식이 어울린다는 사실만 다시 한번 더 지적하는 것으로 오늘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참고적으로, 제가 보기에 <빈집의 위기>라는 설교집을 펴낸 임영수 목사의 설교가 비교적 이런 에세이 식 설교하기의 특징을 적절하게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04년 3월29일(월), 오후 2시, 제7회 대구성서 아카데미 설교공부 강의안으로 작성된 원고인데, 기독교 사상 2004년 5월호에도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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