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주의로 치장한 근본주의의 독단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의 설교 비평-

설교의 일관성
성서를 스스로 해석하기보다는 다소간 다른 설교자들의 도움에 의존함으로써 일관성이 떨어지는 일반 설교자들과 달리 하용조 목사의 성서해석에는 그 분만의 놀라운 일관성이 있다. 나는 이번에 이 목사의 설교집인 로마서 강해서 <로마서의 축복>(1998, 두란노, 이하 ‘축복’)과 <로마서의 비전>(1998, 두란노, 이하 ‘비전’), 마태복음 강해 제11권 <참된 지도자>(1996, 두란노), 성령을 주제로 한 <바람처럼 불처럼>(2003, 두란노),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최근의 설교 몇 편을 읽었는데, 모든 설교가 하 목사 고유의 정서와 독특한 성서해석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었다. 이렇듯 어느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일관성 하나만으로도 후학들은 하 목사에게서 배울 게 적지 않다고 본다. 그 일관성을 두 가지로 간추려보자.
잘 알려져 있듯이 하 목사는 강해설교의 강점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소화하고 있다. 그의 설교는 오직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목회적으로는 필요하지만 신앙의 본질에서 불필요한 요소들이 철저하게 제거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도 매우 충실한 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보다는 흡사 시어머니의 잔소리 비슷한 설교가 만연한 이 시대에 오직 말씀 자체에 집중하는 설교자를 만난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이런 선명성이 약간 퇴조하는 조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하 목사만큼 강해설교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설교자도 흔하지 않다.  
하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일관성은 가부장적 권위에 의지하는 설교자들과 달리 그의 설교가 모성적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설교 전반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이런 모성애적 보살핌이 청중들을 끌어 모으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온누리 교회 신자들 중에서 하 목사의 성품이나 그의 설교 스타일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떠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옥에도 티가 있다고 하지 않은가. 부드러운 천으로 가볍게 닦아서 해결할 수 있는 티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다시 연마해야만 할 흠집일지도 모른다. 더 나쁜 경우라면 연마로도 해결이 안 되는 심각한 흠집일 수도 있다. 과연 하 목사의 설교에 있는 흠집은 무엇이며, 그 크기는 어떤가? 오늘 그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이런 문제를 비평하는 작업이 중심을 잃지 않기를 바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 비평을 추후에 취소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하 목사의 설교에 묻은 흠집이 그저 가벼운 먼지에 불과하기를 바란다. 이런 사태를 누가 결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여, 우리의 약함을 도우소서.

의심의 해석학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생명을 드리는 마음으로 함께 참여하는 것이지 제3자로서 관망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설교는 그것을 듣는 현장의 청중들에게 선포된 것이지 이렇게 뒤늦게 비평적인 태도로 임하는 사람에게 선포된 게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찜찜하긴 했지만 그래도 하 목사의 설교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지난 5월23일과 6월20일 온누리 교회의 11시 주일공동예배를 인터넷으로 참관했다. 각각 1시간 30분가량의 예배는 흡사 고객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골고루 장만해 놓은 뷔페식당처럼 다양하고 세련되게 진행되었다.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 온누리 교회의 예배에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예배 전체에 깔려 있는 음악적 분위기, 멀티미디어의 적극적인 활용, 설교자와 청중들의 신앙적 열정. 조금 더 깊이 예배 안으로 들어가 보자.      
주일공동예배는 나도 신학대학교 다닐 때, 그리고 풋내기 전도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즐겨 불렀던 소위 복음찬송으로 시작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언제 예배가 시작되었는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명의 주, 보조 진행자들이 자연스럽게 예배를 끌어나갔다. 아마 이런 형식을 그들은 ‘열린예배’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현악기와 타악기, 피아노, 디지털 건반악기의 세련된 반주, 거기다가 무대 중앙과 한쪽 편에 나뉘어 설치된 대형 동영상 화면, 틀에 박힌 가운을 벗어 던지고 자연스럽게 평상복을 입은 성가대원들과 온 회중이 마주보며 부르는 찬양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다만 찬양 인도자의 판에 박힌 멘트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을 듯 했다. 어쨌든지 예배 도중에도 계속되는 이런 열기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열린 음악회나 어떤 유명 가수의 라이브 콘서트 장에 모인 소위 ‘오빠부대’의 열광과 온누리 교회의 종교적 열정이 약간 다른 모습이지만 그 속내는 비슷하다는 착각 아닌 착각을 하게 되었다. 내 큰딸이 어렸을 때 확인한 바이지만 오빠부대로 몰려다니는 소녀들에게는 가수의 가창력보다 그녀들의 감수성을 채워줄 수 있는 분위기만 중요한 것처럼 온누리 교회의 찬양 예배도 역시 그런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복음찬송으로 예배 분위기를 ‘업’시킨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뒤로 모든 순서가 그런 식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한다. 복음찬송의 감동과 열정으로부터 시작해서 1만인 선교사 파송 세리모니, 다양한 교회 행사 및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인공위성 선교 프로젝트 동영상 감상에 이르기까지, 온누리 교회의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은 설교를 듣기 전에 이미 자신들이 글로벌 선교의 전선(戰線)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른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다. 이미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장의 한 복판에 들어온 병사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뿐이지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하 목사의 설교는 시작된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그 자리에서 누가 은혜를 배척할 수 있겠는가? 누가 은혜를 받는 척이라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니 실제로 모든 청중은 하 목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을 무조건 은혜로운 말씀으로 화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 됐지 무엇이 문제라고 내가 이렇게 떠벌리는 것일까? 나는 다만 의심해 볼뿐이다. 신학과 신앙은 순종과 믿음이면서 동시에 항거와 의심이라는 원칙 때문에, 또는 학자 연 하는 내 태도 때문에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무려 네 권에 이르는 하 목사의 설교집과 인터넷을 통한 여러 편의 설교를 정독했으며, 온누리 교회 예배를 인터넷으로 참관하느라고 세 시간이나 투자했을 뿐만 아니라, 위에서 지적한대로 하 목사에게는 설교자로서 뛰어난 자질이 특출하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별로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이 참담한 결과를 해명하기 위해서 의심한다.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어서 하 목사의 설교가 내게 소통되지 않는 것일까? 일단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의 설교는 나의 감수성만 자극하려고 했지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더 나아가 예배의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서 청중들의 감정을 한껏 고조시킴으로써 자신의 감상주의적 설교가 안고 있는 한계를 은폐시키려는 음모까지 엿보여서 좀 불쾌했다. 내 판단에 근거가 있는가?

어린 소녀의 연애일기
그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감상주의는 일명 경건주의라고도 일컬어질 수 있는 하나의 신앙적 성향으로서 합리성과 이성보다는 감정과 낭만적 요소를 모든 인식론적 토대로 삼는 사조이다. 하 목사가 직접적으로 ‘이성’을 의지하지 말라고 당당히 강조하고 있으며, 오늘날 거의 모든 학문의 세계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진화론 자체를 부정한다거나 인간 삶의 역사적 차원을 간과할 뿐만 아니라 성서의 깊이에 들어가기보다는 성서에서 주어진 간단한 대답을 인간의 감수성에 호소하는 설교 스타일이 ‘센티멘털리즘’의 특징을 빼박았다. 그의 설교에서 기독교 신앙은 흡사 어린 소녀가 ‘마마보이’ 끼가 있는 노총각 선생을 짝사랑하면서 느끼는 심리 상태와 비슷하다. 아주 평범한, 오히려 독립심이 없는 노총각 선생이 이 소녀에게는 우주 전체와 같다. 이 소녀는 흥분한 상태에서 황홀해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데렐라가 된 것처럼 착각한다.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일기를 쓰면서 이 소녀는 남몰래 ‘희희’ 거린다. 나는 하 목사의 설교가 이런 소녀의 연애일기 같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그에게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이런 감정의 차원에 속한다.
우리의 사랑은 감정적인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에는 아무 능력도 열매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겪은 고통은 교회를 위하여 흘리는 자신의 눈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전도한 그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교회를 세워 놓고 그 교회를 생각하며 밤잠을 자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하고 교회 때문에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죽고 싶은 것입니다. 다 주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죽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비전 271).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죽고 싶다”는 표현은 어디선가 들은 듯하지 않은가? 가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동반 자살했다는 뉴스의 주인공들에게서, 또는 “이수일과 심순애” 같은 창극에서, 일본 소녀들과 젊은 아줌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배용준의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들을만한 신파조 대사 같다. 약간 다른 상황이지만,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한 북한 응원단 여자 청년들이 비에 젖는 김정일의 현수막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통분해 하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하 목사의 감상주의적 어투만 갖고 문제를 제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것은 온누리 교회가 복음 찬송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하 목사의 취향에 속하기 때문에 내 관심 밖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말씀의 깊이가 묻히거나 왜곡된다는 사실만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다.
대개의 설교가 비슷하니까 대표적으로 2004년 5월23일 11시 예배에서 행한 설교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1-4)을 잠시 보자. 이 설교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 목사는 앞부분에서 걱정과 근심에 휩싸여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사태를 때로는 그럴듯하게 때로는 별 근거 없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의 상당 부분을 까먹었다. 본인 스스로 앞부분의 이야기를 끝내면서 여기까지는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도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고 지적하는 걸 보면 그런 이야기가 군더더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정도의 생각이 진작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부분을 과감하게 줄이고 본문으로 직접 치고 들어가는 게 마땅하지 그 귀중한 설교 시간을 그런 이야기로 허비한다는 것은 좀 무책임한 일이다. 우리도 흔히 범하는 잘못이지만, 성서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지 못한 설교자들은 변죽을 울리는 특징이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가 설교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선포한 후반부에서 우리는 감상주의적 설교의 전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성서 말씀에 있는 그대로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천국이 있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천국을 준비하셨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 목사는 이 세 가지 주제를 적당한 양념을 곁들여서 신자들에게 맛있는 영적인 음식이라고 내 놓았다.
하 목사가 첫 번째 이유로 제시한 하나님과 두 번째 이유로 제시한 천국은 그렇게 나누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천국을 두 가지 이유로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세 번째로 제시된 천국 준비라는 것도 그렇게 또 하나의 주제로 제시될 만큼 큰 차이가 있는 게 전혀 아니다. 이렇듯 하나의 주제에 불과한 문제를 세 가지로 나열하는 것으로 설교 시간을 때우는 이유는 하 목사가 의도적으로 불성실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성서 말씀의 깊이로 들어갈 만한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진 결과이다.
이 설교의 본문인 요한복음 14장은 근본적으로는 ‘기독론’에 해당된다. 좀더 큰 틀에서 보면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될 수 있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역사적 예수가 역사 초월적인 하나님과 어떻게 하나일 수 있는가에 대한 요한의 신앙고백이 여기에 담겨 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천국이 있기 때문에, 그 천국을 예수님이 준비했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것은 요한 신학의 근본에서 벗어나서 대신 주변적인 것에 매달리는 격이다. 우리가 역사적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명제를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이런 중심 문제를 안고 가야지, 하 목사처럼 겉으로 진술된 몇 가지 현상에 치우쳐서 신자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나가면 기독교 신앙은 시간이 갈수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빠지고 만다.
이런 말을 들으면 본인은 매우 억울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하 목사가 나름대로 말씀에 대한 열정을 갖고 대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자신에게는 경천동지 할 문제인데,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사태 말이다. 솜털보다 가벼운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서 별것 아닌 것으로 울고불고 하는 소녀들의 센티멘털리즘적인 요소가 그의 설교에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설교를 듣고 난 다음에 그의 진정성에 이끌리어 약간의 감동이 오는 듯하다가 ‘속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 마음은 왜 이리 무감각한 걸까?

자학과 가학
백 번 양보해서 약간 유치하더라도 이런 감수성을 토대로 인간과 세계와 역사의 의미에 심층적으로 접근하고 건강한 인간다움을 회복해나간다면 좋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녀 취향적 센티멘털리즘은 비현실적인 자기 연민에 심취해 있으면서 동시에 심한 열등감에 빠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앞의 심리적 현상이 자기연민(나르시시즘)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현상은 자학(매조키즘)인데, 이 매조키즘은 기독교의 죄론이 왜곡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의 죄책감을 공격함으로써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게 만들었던 이런 신앙 형태는 지난 중세기의 유럽 기독교와 19세기 말 우리에게 기독교를 전해준 미국 선교사들에게서 볼 수 있던 특징이다. 이런 신앙 형태는 일종의 노예근성(니체), 또는 집단적 노이로제(프로이트) 현상일지 모른다.
한국 강단에서 선포되는 죄에 대한 설교는 신학적 인간론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데, 하나는 죄의 숙명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그 죄의 추상화이다. 이런 식으로 죄를 다루게 될 경우에 기독교인의 정신세계는 시나브로 황폐화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한국 교회 안에 만연한 죄 숙명주의 현상에 대해서는 약간의 통찰력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보이는 병적 현상이니까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죄 숙명주의에 빠져 있는 기독교 신앙이 정작 구체적인 죄 앞에서는 아주 무기력하다는 게 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런 죄의 숙명주의와 추상화에서 하 목사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하 목사는 천성적으로 남을 공격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죄에 대한 설교에서만은 왜 그렇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가 말하는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교도들이 생각하는 구체적인 부도덕성인지, 어거스틴이 말하는 ‘휘브리스’(교만)인지,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아모르 수이’(자기 사랑)인지, 이런 모든 것을 포함한 그 무엇인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 목사가 이렇게 죄를 추상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이유는 죄를 감상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탓이리라.

죄는 누가 쥐고 있습니까? 마귀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나타나면 마귀가 떠나가고 더러웠던 모든 부분이 청소되는 것입니다. 집안이 청소되면 기분이 좋고, 더러운 몸을 씻고 새옷으로 갈아입으면 기분이 좋듯이 보혈로 내 죄가 씻기면 나는 새로워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보혈로 씻기어 있습니까? 마음속에 여러 가지 죄악들이 보혈로 씻겼습니까? 찬송가 200장을 불러봅시다. (축복 216).

하 목사는 우리 안에 있는 “행위의 죄, 육신의 죄, 탐욕의 죄 등 모든 죄를 끊어버려야 한다”(축복 242)고 주장한다. 복음서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은 죄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도 하 목사는 이런 것을 끊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것 없이는 거룩의 길, 구원의 완성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급기야 회중 앞에서 담배 피운 죄를 드러내고 함께 기도함으로써 담배를 끊은 사람의 경우를 매우 비장한 어조로 설교한다(축복 243). “담배끊기로 선언하십시오. 그러면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담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담배’라고 대표되어 표현되는 나의 더러운 모습들, 내 안에 있는 변화되어야 할 모습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선포하고 그것을 끊어 버리겠다고 결정하십시오. 선언하십시오.”(축복 264).
이제 나는 하 목사의 죄론이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청교도들의 도덕주의가 바로 그가 주장하는 죄론의 실체였다. 30년 전 빌리 그레함이 우리나라에 와서 늘 ‘탕자의 비유’로 설교했듯이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회심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청교도의 도덕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모든 인간이 시뻘건 죄에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정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인데, 사회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죄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사회구조의 문제도 개개인이 변화되면 저절로 해결된다는 낭만적인 생각으로 접근할 뿐이다. 이런 청교도적 신앙의 논리에 의하면 담배를 피우지 않고 양심적으로 살며, 교회 생활만 잘하면 미국의 부시처럼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아도 믿음 좋은 사람으로 평가될 것이다. 청교도의 신앙적 유산을 물려받은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기독교 근본주의인 청교도적 도덕주의는 평소에는 온순한 양처럼 순진해 보여도 어떤 상황에 이르게 될 때 엄청난 폭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자학(自虐)과 가학(加虐)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의 독단
나는 하 목사에게서 기독교 근본주의의 독단을 보았다. 우리의 논리로 모두 해명해내기 힘든 인간 삶의 모순과 딜레마를 충분히 헤아릴만한 연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은혜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하 목사가 자기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단죄하는 대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웬만해서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하 목사가 동성애자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격렬하게 비난하는 소리를 들어보자.

여자와 여자가 살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가정이 없어집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마귀의 방법입니다. 미국 사회는 동성연애를 합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정치적인 세력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인간의 숫자의 힘으로 바꾸어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주받은 사회입니다.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교회가 타락하니까 동성연애 하는 사람들끼리 교회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동성연애 하는 사람도 목사 안수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여자와 남자의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여자와 남자의 역할을 다 바꾸고는 그것을 평등이라고 부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축복 77).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아마 ‘에이즈’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개인의 도덕적 가치판단에 따라서 게이와 레즈비언의 성 윤리를 반대할 수는 있겠지만, 하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그들을 이렇게 넘치는 자신감으로 단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용기가 어디에서 왔을까? 동성애자들이 사회를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거나 폭력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면 그 구체적인 행위를 문제삼을 수 있지만 나는 그들이 이성애자들보다 더 반(反)사회적으로 행동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더구나 오늘의 시대는 이런 사회적 마이너리티의 인권을 보장하는 쪽으로 진행되고 추세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온 세계를 앞마당처럼 동분서주하는 하 목사는 자신의 단죄로 인해서 실족하였을 수많은 동성애자들의 영혼에 대해서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모성애적 치유의 마음으로 설교하는 하 목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또는 단지 자기와 성(性)적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동성애자들을 흡사 종교재판의 검사처럼 다그쳤을 까닭이 없다. 따라서 이런 사태에 대한 책임은 그에게 있는 게 아니라 로마서(1:26,27)를 쓴 바울에게 있다. 하 목사에게 책임이 있다면 로마 시대의 동성애자들을 향한 바울의 비난을 일종의 규범(norm)으로 받아들였다는 것뿐이다. 여기서 바울이 왜 동성애자들을 그렇게 책망했는지에 대해서는 한 권의 책을 써야 할 만큼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을 단지 애 낳는 기계쯤으로 여긴 로마 사람들은 아내가 성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혼외정사에 치중했다. 이런 풍조 속에서 이성애자들도 동성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상황이 바로 바울의 로마서가 쓰인 ‘삶의 자리’였다. 이런 성서 신학적 논의는 내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겠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분명하다. 로마라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 언급된 바울의 동성애자 비판을 오늘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시킨다는 것은 하 목사의 성서 읽기가 철저하게 근본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탈(脫)역사적 세계관
인격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온건하고 따뜻한 하 목사가 성서를 규범으로만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자기와 다른 사람을 단죄하게 된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내가 이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기에는 힘에 부친다. 지금의 추세대로 하 목사가 한국 교회에 큰 인물로 인생을 끝내게 되는 먼 훗날 누가 ‘하용조 목사 평전’을 쓰면 모를까 이 자리에서는 그만 두는 게 옳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방향만은 정리할 수 있다. 성서의 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세계,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의 무게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서와 기독교의 독단론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 독단론이 예의 감상주의에 내재해 있는 탈역사주의적 패러다임과 결합하면 흡사 악을 토벌하기 위해 나선 십자군처럼 ‘공격 앞으로!’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작년 연말에 어떤 교단의 총회장이 신학대학교 예배 시간에 “기저귀를 찬 여자가 강단에 설 수 없다”고 발언한 것도 역시 이런 맥락에 속한다. 어쨌든지 하 목사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이 대개 역사적 깊이와 연관되었다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다. 타종교, 진화론, 공산주의, 운동권 학생, 노조운동이 바로 그런 대상이었다.

구원은 ‘공의’가 아닙니다. 구원은 ‘사랑’입니다. 긍휼입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산 것이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앞에서는 살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공의’를 말한다고 세상이 공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사나워집니다. 운동권을 보십시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공의요, 정의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정의와 공의를 끊임없이 말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깨끗해지지 않았습니다. (비전 44).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이다. 인간이 주장하는 정의는 늘 상대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그 정의가 경우에 따라서 불의로 작동되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 수 없다는 말은 백 번 옳다. 그러나 하 목사 방식으로 이 세상과 역사를 해석하면 역사 허무주의에 빠질 뿐이다. 비록 역사 변혁을 향한 인간의 노력과 투쟁이 종말론적 관점에서 여전히 절대적인 정당성을 확보하진 못했지만 그것 자체를 부정한다면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선취(先取)적으로 확증해 나가야 할 우리의 복음 운동은 단순히 개인의 실존성에 귀착되고 말 것이다.
나는 여기서 사회구원과 개인구원이 하나님 나라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전개할 생각은 없다. 다만 정의보다는 은혜와 사랑을 강조하는 하 목사의 성서 해석이 빠져든 아전인수의 한 예를 지적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하 목사는 바로와 모세를 비교하면서 바로는 부정적인 일을 했으며 모세는 긍정적인 일을 했다고 설명한다(비전 48). 이런 단순 비교로만 보면 그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모세가 자기 동족을 하루에 3천명이나 처형한 사건까지 포괄적으로 보아야만 역사가 이해된다. 여호수아도 아간을 잔인하게 죽였을 뿐만 아니라 끔찍하게도 연좌제를 적용해서 그의 모든 가족까지 처형했다. 이처럼 인간 역사의 모순과 질곡은 우리가 도저히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깊이와 어둠과 신비를 담고 있는 대도 불구하고 하 목사는 자기가 편리한대로 성서를 인용하고 성서의 인물을 오용하는 우를 버젓이 범하고 있다.
이런 설교를 읽으면서 나는 하 목사가 CCC 출신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신학대학교에 다니던 70년 초는 온 나라를 ‘겨울공화국’으로 만든 유신 시대였다. 그 당시 생각이 있는 대학생들은 대개 유신철폐 시위에 나서거나 최소한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CCC에 속한 학생들은 그런 곳에 얼씬거리지 않은 채 ‘사영리’라는 소책자를 들고 전도만 하러 다녔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CCC 회관은 그 당시 박정희 정권의 고위 인사가 다리를 놓아 옛 러시아 공관으로 쓰던 건물을 정부로부터 값싸게 불하받은 것이다. 만약 하 목사가 젊은 시절 이런 분위기의 신앙생활을 했다는 게 옳다면 운동권과 노조운동을 매도하듯이 비판하는 자세는 매우 자연스럽다.

나르시시즘
역사의 무게를 감상주의라는 구름을 타고 ‘낭만적으로’ 사뿐히 뛰어넘어 버린 하 목사의 신앙과 설교를 좋은 쪽으로 보고 싶은 생각도 없진 않다. 일종의 신앙 순수주의와 신앙 절대주의가 우리로 하여금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지탱할 수 있도록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곧 퀘이커교와 같은 기독교 소종파였다. 온누리 교회와 하 목사가 세속적인 가치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이런 소종파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철저하게 유지하기만 한다면 위에서 내가 지적한 오류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서 소중한 분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 형태는 매우 순수하게 보이지만 신앙의 내부를 견인해나가고 있는 힘은 그 어떤 교회보다 훨씬 세속적이며, 그 어떤 벤처 기업가보다 훨씬 기업적인 가치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 온누리 교회가 다른 지역교회의 반대에서 불구하고, 그리고 교회 일치라는 교회의 본질에도 위배되는 소위 지(枝)성전을 세워나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들리는 말로는 그것이 사도행전 29장의 역사를 일으키는 선교 프로그램의 일환인 것 같다. 하 목사는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함이라.”(롬 15:20)는 바울의 진술을 강해하면서 “남이 전도하지 않는 곳, 남이 만지지 않은 곳, 처녀지를 향해 가는 것이 복음입니다.”(비전 373)라고 일단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온누리 교회를 개척할 때 그 부근에 이미 충신교회, 영락교회, 사랑의 교회, 소망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지하게 고민하다 일년 만에 하나님에게서 다음과 같은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 의도하셨던 교회, 사도행전에서 보여 주었던 교회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가능한가.” 이런 논리에 따라서 지성전도 경쟁이 아니라 성서가 가르쳐주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결단으로 주장할 것 같다. 이것은 자신의 신앙이 순수한 것을 뛰어넘어 절대적이라는 독단이 만들어내는 자기 합리화이며, 혹은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
그 이외에도 나는 하 목사의 설교에서 많은 모순을 발견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점을 그렇게 절절하게 가르치면서도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가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말한다(비전 220). 설교의 분위기에 도취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새벽 4시에 새벽 기도회에 나온다”(비전 250)고 까지 ‘오버’하는 일이 잦다. 교회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왜 교회 부흥을 성령의 역사와 직결시키는가? 미국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강한 나라가 된 것은 믿음 때문이라는 대목에 이르면(비전 146) 내 귀와 내 눈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삶과 역사를 왜곡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하 목사의 신앙에서 달콤하고 슬픈 소녀 취향적 센티멘털리즘과 자기중심적이고 공격적인 근본주의가 결합됨으로써 결국 그는 이 세계와 역사의 깊이, 또는 어둠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하고 대신 자기의 주관적 열정에 빠져버린다는 사실에 있다. 이런 설교를 반복해서 듣는 청중들은 기독교 신앙을 감상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습관에 젖어듦으로써 결국 생명과 역사의 리얼리티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하 목사 수준의 설교를 비판한다면 도대체 설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군가, 비판은 쉽지만 대안이 있는가, 하는 반론을 제기할 분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따끔하게 받아들이면서, 다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구를 제시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지금은 그의 설교가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비어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의 현실만 놓고 본다면 그런 거품의 시대가 상당히 오래 지속될 것 같은 예감이 없지 않다.

후기: 온누리 교회의 예배와 하용조 목사의 설교에 관련된 정서적 요인에 대해서는 졸고 “열린 예배, 닫힌 하나님”(기독교사상 2004년 7월호 180-192)를 참조할 것.

<위의 글은 기독교 사상에서 출판한 "16인의 한국설교자를 말한다"에 실려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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