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설교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어떻게 하면 신앙의 깊이를 담아내면서도 대중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크다. 그런데 신앙적 깊이와 대중성은 흡사 두 마리 토끼와 같아서 동시에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신앙의 깊이가 있는 설교는 대중성이 떨어지고, 대중성이 강한 설교는 신앙의 깊이가 없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진 않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이 두 요소를 무조건 대립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기독교의 복음이 진리라고 한다면 이 두 요소가 만날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지 않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그 지점은 기독교 영성이다. 설교자가 기독교 영성의 깊이로 들어간다면 그의 설교는 신앙의 깊이를 담는 것은 물론이고, 상당한 정도의 대중성까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삶에서만 참된 만족을 얻는다는 데에 있다. 많은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가 당연히 영성에 토대한다고 주장하겠지만 과연 자신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 들어갔으며, 또한 그것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한다. 겉으로 기독교적인 형식을 따르고 성서 언어를 전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설교자가 영성의 깊이에서 설교한다는 사실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오늘 필자는 바로 이 문제, 즉 영성이 깊은 설교가 무엇인지, 거꾸로 영성이 없는 설교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영성이 별로 깊지 못한 필자에게 이 작업이 너무 과중할지 모르겠으나 힘닿는 데까지 가볼 생각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이하 ‘김 목사’)의 설교보다 더 적합한 설교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그 이유를 몇 가지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기도의 사람
첫째, 김 목사는 오랫동안 기도에 천착한 사람이다. 기독교 영성을 언급할 때 기도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없는 것 아닌가. 김 목사가 펴낸 <사귐의 기도>(2002년,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이하 ‘사귐’)는 그의 기도 영성이 얼마나 진지하고 체험적이고 실질적인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는 모태신앙으로 살아왔다. 어릴 때부터 주일을 지키지 않은 적이 한 번밖에 없을 정도로 모범적인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결국 목사가 되어 설교하고, 신학자가 되어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을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채워지지 않는 ‘무엇’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곧 자신에게 부족한 영성생활이었으며, 그리고 영성생활의 핵심은 기도였다.

유학 시절부터 영성은 내 연구의 주요 주제로 자리 잡았다. 특히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위대한 영성가들의 글이나 전기를 읽으며 해답을 찾았다. 나는 영성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기도에 천착했다. 수십 년 동안 한다고 해 보았지만 나는 언제나 기도가 어려웠다. 그래서 기도의 대가들이 기록한 책을 읽으면서 길을 찾았다.(사귐 10)

목사의 삶이라는 게 원래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데, 김 목사의 기도생활만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필자는 기도행위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영성을 말하는 중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도생활과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려는 김 목사의 기도생활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말 그대로 기도행위라고 한다면 후자는 기도영성이다. 이러한 기도영성이 열매를 맺어 김 목사는 2004년에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직접 읽고 묵상할 수 있는 <사귐의 기도를 위한 기도선집>(한국기독학생출판부)을 묶어 냈다. 그 책은 동서고금을 망라한 여러 영성가들의 주옥같은 기도문을 무려 623쪽에 빼곡히 담고 있다. 필자는 위의 두 책을 읽으면서 기도를 향한 김 목사의 신앙적 진정성을 흠뻑 맛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영성의 진수가 아니고 무엇이리요.
둘째, 김 목사가 제시하는 기독교 영성은 신학적 통찰력에 근거한다. 이것이 영성과 설교의 관계를 설명해야 할 필자가 김 목사의 설교를 다루게 된 핵심 요소이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영성을 신학과는 별개의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큰 착각이다. 이런 착각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신학자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그들은 영성은 실천적이고 신비적인 반면에 신학은 이론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다. 영성은 기본적으로 영적 현실성(spiritual reality)과 일치하는 경험이나 능력이라는 점에서 설교와 신학의 동일한 토대이다. 영적 현실성을 경험하지 못한 신학자는 신학의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에 불과하며, 마찬가지로 영적 현실성을 경험하지 못한 목회자와 설교자는 신앙의 정보를 선전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김 목사는 한국교회의 이런 이원론적 시각과 그 한계를 넘어서 신학과 신앙의 일치를 견인하는 설교자이다. 아래와 같은 진술에 귀를 기울어보시라.

시간이 흐른 후, 교회 지도자들이 신학 이론을 정립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이름을 알지 못할 보통 사람들의 일치된 고백을 자료로 삼아 정리했을 뿐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신학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과 고백이 먼저 옵니다. 신학은 체험과 고백을 해석하고 정리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이 신앙의 현장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험해지는 것입니다.(2006년 5월14일 설교 중에서. 이하 월일만 기재하며, 특별한 단서가 없으면 모두 2006년을 가리킨다.)

조직신학을 공부한 필자는 성서신학자인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기독교 교리와 신조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출현한 게 아니라 신앙 경험으로부터 교리가 나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컨대 바울은 부활의 예수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론을 전개했지, 부활론으로부터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리와 신조가 무의미하다는 게 결코 아니다. 그 교리와 신조가 신앙경험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며 진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제 다시 오늘의 신앙경험을 해석하는 준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신앙경험과 신학은 해석학적으로 순환한다. 이런 순환의 중심에는 바로 기독교 영성이 자리한다. 건강한 영성은 신학적 사유 안에 한정되지 않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신학적 조명을 받아야 한다.    
셋째, 필자는 김 목사의 삶과 신앙에서 깊은 파토스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곧 그의 영성이 온 몸을 던지는 실존적 투쟁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따라가기 힘든 김 목사의 높은 영적 경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약관의 나이로 1992년부터 협성대학교 신약신학 교수로 10년 동안 재직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그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그는 2003년에 미국인들로 구성된 뉴저리 벨마 연합감리교회 담임 목사로 갔다. 지금은 2005년 7월부터 와싱톤한인교회 담임 목사로 있다. 그는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일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다.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자신의 몸을 쳐 복종케 한 바울처럼(고전 9:27) 그는 끊임없이 자기 영혼을 다그치고 있다. 목사가 연봉에 연연해하지 말아야한다는 아래와 같은 그의 진술은 빈말이 아니리라.

선한 목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연봉을 따라 직장을 전전하고, 그 돈값의 차이에 따라 일희일비하고, 오직 돈을 많이 버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위해 일한다면 그리고 그 사례비를 따라 교회를 전전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교회에서 일하면서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을 바라거나 혹은 권력이나 감투를 얻을 요량으로 일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3월26일)

위와 같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문제는 ‘누가’ 하는가에 따라서 그 무게가 달라진다. 필자는 김 목사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위의 말은 우주와 같은 무게를 담고 있다고 본다. 그는 이미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2003년,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에서 교회 안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천박한 자본주의와 일전을 치룬 적이 있다. 그는 ‘깨끗한 부자’를 어불성설로 보고, 청부론자들의 주장을 배격했다. 이런 대목에서 그는 래디컬하다. 겉으로 조용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의 내면은 용암처럼 끓고 있다. 이런 파토스는 영적 설교의 동력이다.

영성목회
넷째, 위에서 필자가 열거한 세 가지 요소들은 이제 그의 목회에 그대로 녹아든다. 그는 자신의 목회를 ‘영성목회’라 이름을 붙였다. 전업 목회자로 나선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그는 지금 실험적인 목회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어떤 목회에선들 영성이 없으랴마는 김 목사는 좌고우면 없이 한 가지 길을 간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가 생각하는 영성 목회가 무엇인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2006년 12월31일 주일 설교에서 그는 2007년 목회 방향을 제시하면서 영성목회(contemplative ministry)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약간 길지만 김 목사의 목회와 설교의 영적 차원을 이해하는데 놓쳐서는 안 될 대목으로 보고, 여기 발췌 방식으로 인용한다.

‘영성 목회’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 계획 되고 추진되는 목회’(ministry planned and conducted to help the congregation grow spiritually)를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영성 목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일에 더 의식적으로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입니다. 영성 목회의 성패는 우리 교회에 속한 교우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성장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왜 영적인 성장이 목회의 초점이 되어야 하느냐?’고 묻고 싶으십니까?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본질이 영성(spirituality)에 있기 때문이며, 한 개인의 전인적인 변화가 영적 성장(spiritual formation)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 개인의 영적 성장은 곧 사회의 변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영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자는 말은 다른 모든 차원을 외면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영성 목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변화와 그로 인한 사회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총체적 변화의 출발점이 바로 개인의 영성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성 목회의 비전은 이렇게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큰 것을 이루고, 내면에서부터 시작하여 외면에 이르며, 예배와 기도로부터 시작하여 일상의 모든 삶에 이르고, 개인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 전체에 이르는 변화를 목표로 삼습니다. 그런 거대한 비전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 힘을 쏟는 것이 영성 목회입니다.

필자가 위에서 설명한 네 가지 요소는 독립적인 게 아니다. 기도, 신학적 통찰력, 신앙과 삶의 파토스, 영성목회는 김 목사의 신앙 안에서 서로 맞물려 있다. 기도는 신학적 통찰력을 가능하게 하며, 거기서 삶의 파토스가 발생하고, 그 결과로 그는 영성목회를 지향하게 된다. 영성목회는 다른 세 가지 요소들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이런 정도의 그림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설교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는 교회성장이나 신자들의 계몽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설교의 초점을 놓는다. 모든 설교자들이 그런 자세로 설교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옳은 것만도 아니다. 신자들의 영적 성장이 아니라 종교 기능인을 목표로 하는 설교도 많다. 이걸 구분하기는 쉽지 않지만, 전혀 구분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진짜 보석과 가짜 보석을 구분하는 능력을 키우려면 진짜 보석을 집중해서 보아야 한다는 말에 의지해서,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김 목사의 설교를 검토하겠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여, 잠시만이라도 필자에게 영분별의 은사를 허락해주소서.

성서의 말걸음
필자는 김 목사가 와싱턴한인교회에서 2006년 1월1일 주일부터 12월31일 주일까지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 47편을 꼼꼼히 읽었으며, 필요한 대목은 동영상으로 보고 들었다. 2007년 1월7일 주일부터 6월3일 주일까지의 설교는 필요한 곳만 선정해서 읽고 듣고 보았다. 앞에서 소개한 그의 세권의 저서도 참조했다. 이런 정도로 김 목사의 설교와 그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오늘 우리의 중심 주제는 영성과 설교이다. 모든 설교자들이 제각각으로 영성을 말하고 있는 마당에 한 설교자가 영성의 깊이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영성이 어떤 하나의 실증적인 형태나 사건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성령과의 관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데에 놓여 있다. 아무도 영성을 범주화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필자는 조심스럽게 어떤 관점을 가능한대로 정확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그것은 두 가지 관점인데, 하나는 영적인 통찰력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인 삶이다. 이를 다시 개념 용어로 정리한다면 전자는 영성의 존재론이며, 후자는 영성의 행위론이다. 이 두 가지는 구분되기는 하지만 나누일 수는 없다. 영성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한 사람은 당연히 영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며, 영적인 삶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성에 존재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관점에서 볼 때 김 목사의 설교는 어떤가?
김 목사의 설교를 따라가면서 필자는 많은 영적 통찰력을 배웠다. 그것을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다. 다만 김 목사가 성서텍스트와 영적인 대화의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에서 그의 영적인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서가 영적 깊이에서 말하는 걸 듣는 것이 설교자에게는 가장 중요하기도 하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눅 10:38-42)에 대한 김 목사의 설명에서도 이런 부분이 잘 드러난다.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마리아를 칭찬하고, 부엌일로 분주한 마르다를 책망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 목사는 말씀을 듣는 일과 봉사하는 일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 예수의 책망은 마르다가 말씀을 듣지 않고 봉사했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의 봉사를 내세우려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전심을 다해 그 일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경계하고, 그 마음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예배는 좋은 몫이고, 주차 봉사는 덜 좋은 몫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좋은 몫이고, 주방에서 음식 준비하는 것은 덜 좋은 몫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은 좋은 몫이고, 청소하는 것은 나쁜 몫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전심으로 섬기는 한, 모두가 다 ‘좋은 몫’이 됩니다.(9월3일)

독자들은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자가 성서를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알레고리로 해석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영적인 해석은 신학적인 해석이다. 영적인 통찰력은 곧 신학적 통찰력이다. 이런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는 창조적인 해석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으며, 동시에 그런 해석은 당연히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것은 곧 시인이 언어가 말거는 것을 경험하는 것처럼 설교자가 성서의 말걸음(Anrede)을 경험하는 사건이다. 이런 경험이 주어진 사람은 종교적 권위에 의존하거나 과도한 수사학에 기울어지지 않고, 세상을 창조한 ‘다바르’, 그리고 역사 이전의 태초로부터 존재한 ‘로고스’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잠시 오늘의 설교학에 관해 한마디 하는 걸 용서하시라. 오늘의 설교학은 설교자와 청중의 소통에만 너무 기울어진 게 아닐는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데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게 아닌지. 내러티브, 스토리텔링, 청중중심, 소비자중심, 눈높이 등등, 이런 용어들은 모두 설교자와 청중의 소통만을 문제 삼는 것들이다. 필자의 생각에 그것보다 더 시급하고 본질적인 것은 설교자와 텍스트와의 소통이다. 성서텍스트와 대화할 줄 모르는 설교자에게 청중과의 대화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텍스트와의 소통이 일어난다면 내러티브, 스토리텔링 같은 방법은 아예 필요조차 없다. 그래도 대중 전달방법을 잘 알면 좋지 않으냐 하고 주장할 분들이 있겠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설교자가 전달방법에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성서텍스트와의 소통에는 마음을 닫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몇 가지 대중전달 기술로 청중들의 영혼이 쉽게 움직이는 마당에 굳이 성서텍스트의 놀라운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고된 일에 나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서텍스트를 해석하는 행위인 설교는 진리의 차원이지 방법의 차원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김 목사가 어느 특정한 성서본문을 나름의 영적 시각으로 독특하게 해석할 줄 안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청중들을 성서텍스트의 깊이로 끌어들일 줄 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건 대중전달의 수사학이 아니라 성서텍스트의 영적인 깊이로 들어간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존재론적 능력이다. 김 목사의 설교 한편을 선택해서 구체적으로 따라가 보자.

“대야와 수건”
8월27일에 행한 “대야와 수건”이라는 제목의 설교는 예수가 유월절 전날 저녁에 제자들의 발을 씻긴 다음에 주신 말씀인 요한복음 13:12-20절을 본문으로 한다. 김 목사는 설교 초입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받아들인 십자가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은 그 사형의 끔찍스러움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하는 질문으로 인해서 지적인 충격까지 주었다고 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말은 일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요청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에서 그렇게 순교하지는 못한다. 십자가의 일상화는 ‘대야와 수건’이라는 상징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나누던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 위해 사용했던 대야와 수건은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전하는 상징이기는 하지만, 십자가보다 훨씬 일상적이고 사소하고 친근해 보입니다. 십자가는 한 번 지고 죽으면 끝나는 것이지만, 대야와 수건은 매일같이 필요한 물건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에, 대야와 수건은 안성맞춤입니다.

김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대야와 수건’이라는 메타포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흑백논리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수도사가 되든가, 아니면 세속주의자가 되든가, 두 가지 대안밖에 모른다. 그들은 ‘시장 통의 수도자’로 사는 가능성을 내다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가려면 매일, 매순간 고민하고 기도하고 반성하고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야와 수건’은 교묘한 자기합리화로 복음의 요청을 피하려는 이런 흑백논리를 무너뜨린다.

대야와 수건을 항상 준비해 두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요청하시는 것은 그 대야와 수건으로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언제라도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여 발을 씻어 주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면 별로 어렵지 않게, 영웅적인 용기가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상에서 남을 섬기기 위한 대야와 수건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지식일 수 있고, 또는 권력이나 재능일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 무엇이나 이웃을 위한 대야와 수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대야와 수건’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초석인 십자가 신앙을 일상 안으로 끌어들였다. 기독론이 현실에서 거리가 먼 도그마에 머무는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삶에서 그 구체성을 얻게 된 셈이다. 성서텍스트와의 영적인 교감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설교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설교를 진행시키기 힘들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섬김과 봉사의 당위성만 강조할 뿐이지 성서와 신학의 깊이에서 해석해내지 못한다.
김 목사는 이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청중들의 결단을 요청한다. 믿음이 연약해서 섬김을 받을 수밖에 없거나 생활환경 때문에 봉사하기 힘들 분들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믿음의 단계에 올라선 사람들은 대야와 수건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한다. 그는 아래와 같이 강력한 메시지로 설교를 맺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니까? 식탁에 앉아 받아먹기만 하지 말고,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 대야를 들고, 다른 사람의 발치에 무릎을 꿇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니까? 혹시 이 말씀이 오늘, 바로 여러분을 향해 주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대야와 수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대야와 수건을 무엇에 쓰시렵니까?
  
“대야와 수건”이라는 설교의 신학적 착상도 착상이려니와 김 목사가 그 주제를 끌고나가는 힘이 필자에게 느껴졌다. 그는 청중들이 알아듣도록 설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기독교 신앙의 상식을 밋밋하게 읊조리거나, 또는 반대로 선정적으로 강요하는 게 아니라 청중들이 스스로에게 설득당할 수 있도록 설교한다는 말이다. 이런 힘은 단지 사람을 설득할 줄 아는 기술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성의 문제이다. 김 목사는 영적인 현실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사람답게 성서텍스트와 창조적인 차원에서 대화할 줄 알고, 그런 대화를 청중들과 다시 나누고 있다. 이건 누구에게서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 한분에게서만 배울 수 있을 뿐이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바로 그분이다. 그분은 창조의 영이기에 우리에게 창조적인 설교의 능력까지 허락하신다. 이런 능력을 필자는 김 목사의 설교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영적 현실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앞에서 설교자가 영성의 깊이에 들어갔는지 판단할 수 있는 관점을 두 가지로 살펴보겠다고 했다. 첫째는 영적 통찰력이며, 둘째는 영적 삶이다. 이제 두 번째의 관점을 검토할 차례이다. 이는 김 목사의 설교가 영적인 삶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김 목사는 영적인 현실을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경험한, 그리고 그렇게 되려고 절치부심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그런 경험을 설교에 담아내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에 희망을 두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결단까지 철저하게 부정하고 오직 예수의 영에 사로잡히는 삶을 추구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저를 좀 더 오래, 좀 더 깊이, 좀 더 넓게, 좀 더 철저하게 다스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 환경 안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데 제 의지는 사용되어야” 한다고 고백한다. 그래야만 주의 영에 의해서 변화되고, 변화되는 만큼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롭게 보인다는 것은 “육안(bodily eyes)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던 실체(reality)를 본다.”는 것이다. “마음의 눈(eyes of heart) 혹은 영안(spiritual eyes)으로 보아야만” 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고, 그럴 때 참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자신들도 김 목사가 설명하는 영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목회하고 설교하며, 그런 경험이 있다고 말이다. 그런 분들이 많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도 조금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사과를 맛있게 먹을 수는 있지만, 그 맛을 깊이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맛을 음미할 뿐만 아니라 사과라는 사물의 우주론적 깊이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더더구나 많지 않다. 한 알의 나락에서 우주의 신비를 깨닫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 영성에 관해서 누구나 말하지만 그것의 깊이로 치고 들어가서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김 목사가 영적 현실을 얼마나 심층적이고 실질적으로 인식하며 경험하고 있는지 전달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김 목사가 전하는 경험을 예로 들어야겠다. 2005년 성탄절에 김 목사는 자신이 담임으로 있는 교회의 장로부터 다음과 같은 부탁을 받았다. 친구의 딸이 8년 이상 뇌사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이제 의료장치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와서 기도해 줄 수 있느냐, 하는 부탁이었다. 그는 병원으로 가면서 그 아가씨가 비록 뇌사 상태에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영적 존재라면 육신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리라 보고 그는 “뇌사 상태에 빠져있는 환자에게 단순한 의식(mere ritual)을 치르러” 가는 게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영혼과 대화하러” 그곳에 간다고 다짐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저를 사용하시어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저를 도구로 사용하소서.” 병원에 도착한 김 목사는 눈을 감고 의료장치를 제거하기 직전의 환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Heather, 나는 당신이 지금 제 말을 듣고 있음을 압니다. 당신은 너무 오래 고생했습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놓고 가십시오. 당신의 뒤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그분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당신을 하나님께 던지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믿고 맡기십시오.

김 목사는 아가씨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성호를 세 번 긋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받아 주시기를 빌었다. 기도 후에 가족들은 환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이 병실을 나가는 동안 김 목사가 다시 아가씨 곁으로 다가가서 보니, 그 아가씨의 오른쪽 눈이 약간 열리고 눈물이 가득 고여 밖으로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는 “보십시오, Heather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고 외쳤다. 다른 사람은 그 장면을 못 보았지만 어느 권사 한분은 보았다. 그는 이 경험을 이렇게 맺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냉철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려고 힘썼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저는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제가 세상과 인간을 육안으로만 보고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제게 참된 실재를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뇌사 상태에 있는 사람의 영적 차원을 믿도록 은총을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만일 제가 육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고, 그곳에서 그냥 사무적으로(officially) 의식(ritual)을 집행하고 말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위의 체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김 목사는 우연하게 일어난 생리적인 현상을 영적인 현상으로 보는 극단적 신비주의자 아닐까, 하는 질문도 가능하다. 이러한 질문들은 여기서 무의미하다. 신비를 빼놓고는 기독교 영성을 말할 수 없다. 도대체 신비 아닌 생명현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 중에서 신비 아닌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필자는 김 목사가 삶의 표면에 머물지 않고 영적인 현실이라고 말하는 그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기 위해 용맹정진하고 있다고 본다. 위의 경험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생명을 깊은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영적 시각이 턱없이 부족하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처럼 표면적인 세계에만 갇힌 채 중층적인 영적 현실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거꾸로 어떤 이들은 영적 현실을 주술적으로만 받아들인다. 김 목사는 말짱한 정신으로 영적 현실의 존재론적 신비를 뚫어보며 실제의 삶에서 경험하면서, 그것을 청중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명실상부하게 영성 설교자로 불릴 만하다. 한국어를 쓰는 설교자들 중에서 영성 설교자로 불릴 분들이 많지 않은데, 그런 이들 중에서도 그는 독보적이다.  
이제 필자의 관심은 깊은 영적 통찰력과 체험을 함께 확보하고 있는 김 목사의 영성이 어떤 성격인가 하는 점이다. 영성이면 영성이지 거기에 성격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런 구분이 이상하면 영성을 신앙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생각하면 된다. 구원도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듯이 영성도 역시 여러 지평과 성격으로 구분될 수 있다. 아쉽지만 이 글은 김 목사의 영성 자체를 논하는 게 아니기도 하고, 이를 위해서는 또 하나의 다른 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밑그림으로만 말하겠다.
필자는 그의 설교를 접하면서 그의 깊은 영성을 맛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어느 쪽으론가 약간 치우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영성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현재적인 차원이 강하다. 전체적으로 실존적인 성격이 강하다. ‘일상의 영성’이라고 불러도 좋다. 창조, 칭의, 종말마저 거의 실존적 차원으로 떨어져버린다. 예컨대 종말도 현재적, 또는 실현된 종말의 시각만 강조될 뿐이지 우주론적이고 미래적인 종말은 약화된다. ‘지금 여기서’ 그것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5월28일)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사람답게 사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삶의 변화를 강력하게 요청한다. 물론 그 변화가 도덕적인 데 머무는 게 아니라 영적인 차원을 가리키겠지만 말이다. 나는 삶의 변화가 기독교 신앙에서 그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인지 약간 다르게 생각한다. 예수가 전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는 변화된 삶으로의 요청이라기보다는 무조건적인 수용과 초청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실존적인 변화보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가 상위라고 생각하는 나는 가능한 신자들의 변화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만 설교하려고 노력한다.  
영성의 성격에 관한 위의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트집잡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여건상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이 문제는 단순히 영성을 바라보는 신학적 차이에만 머물지 않고 설교구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영성의 신학적 성격과 연관해서 그의 설교형식에 드러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두 가지만 짚어야겠다.

요한복음 연속설교에 관해서
우선 필자는 김 목사가 주일공동예배에서 요한복음을 본문으로 연속설교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교회에 부임할 때(2005년 7월)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요한복음을 본문으로 설교한다. 그는 전임자가 이미 요한복음 연속설교를 시작했기 때문에 신앙의 연속성을 위해서  요한복음을 설교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신학에서 나온 선택이다.
김 목사는 전체적으로 요한복음 연속설교를 진행하면서 부분적으로 또 다른 방식의 연속설교를 병행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4월23일 주일부터 “다빈치코드 제대로 보기”라는 제목으로 4회에 걸쳐서 연속설교를 했다. 앞에서 인용한 설교 “대야와 수건”은 6회로 이어졌다. 1월22일부터 5회에 걸쳐 “새해에 받은 말씀”이라는 씨리즈 설교를 했다. 2007년에도 1월7일부터 5회에 걸쳐서 “새해에 받은 말씀”으로 설교했으며, 5월13일부터 4회에 걸쳐서 “가정을 생각하다”는 설교를 했다. 이런 연속설교 형태에서 교회력은 파괴된다. 몇몇 중요한 교회력이 설교에서 언급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유명무실하다. 2005년 12월25일 성탄절에 김 목사는 요한복음 연속설교인 생명의 복음(40) “낮아져야 보인다.”는 제목으로 시각장애인 이야기(요 9:13-41)를 본문으로 설교했다. 물론 예수 탄생을 목격한 목자 이야기(눅 2:8-20)를 병행본문으로 삼고 있지만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2007년 5월27일 성령강림절에도 그는 가정을 주제로 연속설교를 했다.
김 목사가 교회력을 허물면서까지,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반복적으로 연속설교에 기울어지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그는 지금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다. 청중들을 하루빨리 자신과 같은 영적 경지에 오르게 하고 싶은 심정으로 요한복음을 집중적으로 설교하는 것 같다. 물론 다른 성서를 본문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김 목사의 영성이 그대로 드러나겠지만 요한복음은 이런 작업에서 훨씬 효율적이다. 나는 설교자 개인의 영성보다는 기독교 2천년의 역사적 영성에 의존하고 싶다. 나에게 중요한 것을 전하는 게 아니라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중요하다고 본 것을 전하고 싶다는 말이다. 기독교 영성의 역사성은 교회력과 긴밀히 연결된다.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건강한 영성을 확보하는데 최선의 영적 양식이 골고루 차려진 밥상이 곧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  아닌가. 거기에 의존할 때 설교자 자신도 미처 포착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청중들의 영성을 이끌어가지 않겠는가.
둘째, 김 목사에게는 어떤 본문을 택하든지 기독교 영성의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고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본문을 통해서 영적인 현실을 청중들에게 내놓는다. 그건 그의 탁월한 능력이다. 다만 그것이 필자에게는 지나쳐 보인다.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 영성의 깊이를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교회력에 의한 성서일과를 간과할 정도로 과도하다는 말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나도 마음만 먹는다면 요한복음 1장1절을 본문으로 기독교 영성의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은 설교를 52주 동안 계속할 수 있다. 필자가 주일공동예배에서 교회력에 따른 본문으로 설교하는 이유는 성서본문 자체가 내 설교보다 훨씬, 아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성서만을 수년에 걸쳐서 연속적으로 설교하는 것은 설교자가 아무리 중심을 잘 잡는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영적 편식이 아니겠는가.

예화사용에 관해서
또 하나의 다른 문제는 예화에 관한 것이다. 김 목사도 한국교회 강단에서 예화의 남용이 몰고 오는 폐해를 잘 알 고 있을 것이다. 진부성, 선정성, 일반화의 오류는 심각하다. 이에 반해서 김 목사의 예화는 이런 문제점들로부터 분명히 자유롭다. 그가 설교에서 사용한 예화들은 영적 가치가 풍부하다. 그런데,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예화가 그의 설교에서 위험 요소로 작용할 개연성이 있다. 그의 예화가 빛나면 빛날수록 그의 설교에서 성서텍스트가 가려진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리 깊은 영성을 담았다고 하더라도 예화가 성서텍스트를 압도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 아니겠는가.
3월12일 설교에서 그는 세 아이를 모두 선천성 불치병으로 잃은 매리 매나치(Mary Manachi)라는 여자 이야기를 무려 200자 원고지 20매 분량으로 소개했다. 4월2일 설교에서는 젊은 시절에 예수 믿던 아내를 반대하다가 결국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와싱톤한인교회 정재성 장로 이야기가 상당히 자세하게 언급되었다. 6월4일에는 ‘사영리’로 직장상사를 전도한 이택수 집사의 간증을 7분짜리 동영상으로 보여주었다. 2007년 4월8일 부활절에 행한 34분짜리 설교에서 그는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에드워즈의 부인인 엘리사벳의 인터뷰를 5분 동안, 그 뒤로 이어지는 다른 예화까지 합해서 11분 동안 이야기 했으며, 설교 마지막까지 엘리사벳 이야기는 간간이 이어졌다. 그 다음 주일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신성인의 모범을 보인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 이야기를 비슷한 길이로 전했다.
필자의 생각에 설교에서 가능한 예화나 간증을 사용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라 한다면 가급적 간단하게 처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대로 그런 감동적인 예화들이 청중들의 영혼에 강렬한 영향을 끼치면 끼칠수록 성서텍스트의 세계는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투르나이젠의 충고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한다.

설교는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 행해지는 사건이다. 따라서 강단 위에서 다른 사람의 것이거나 자신의 것이거나 불문하고 생활체험이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 두자. 설교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인식, 하나님의 선포가 행해져야 한다.(Eduard Thurneysen, Die Aufgabe der Predigt, 102. 루돌프 보렌, 설교학실천론, 139에서 재인용, 필자가 문맥에 따라 조금 고쳐 적었음)
  
김 목사도 투르나이젠의 충고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리라 본다. 다만 자신이 소개하는 예화는 영성의 진수가 담겨 있기 때문에 성서텍스트의 주제를 훨씬 분명하게 드러내는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대목은 필자가 일방적으로 글을 쓰는 방식으로는 접점을 찾기 힘들 테니 이것으로 정리하는 게 낫겠다. 다른 한편으로 설교에 관한 김 목사의 아래와 같은 정확한 진술을 전제한다면 필자의 이런 지적은 사족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혜량을 바란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인양 설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설교자의 능력 부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서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설교자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겁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성경 말씀에 엮어 설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는, 그분의 이름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형국입니다. 그로 인해 교회는 날로 타락해 가고, 하나님의 영광은 날로 더렵혀지고 있습니다.(1월22일)

필자는 김 목사의 설교에서 많은 걸 배우기도 했고, 도전받기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준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았다. 정말 오랜만에 시간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으로 그의 설교를 접한 것 같다. 전업설교자로 나선지 채 4년이 안된 김 목사의 설교는 아직 완성된 게 아니긴 하지만 독자적인 영성설교의 길을 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일가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그의 설교는 젊은 설교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토마스 아 켐피스의 설교를 읽고 깊은 영성을 배우듯이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김 목사의 설교를 그렇게 읽을 날이 오리라 기대한다. (기독교사상, 7월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