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설계하는 설교의 미래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는 예배실황을 홈페이지에 올린다. 평자가 접속했을 때 마침 2006년 2월26일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진행된 그 예배는 그동안 평자가 경험한 그 어떤 예배보다 훨씬 신선했으며, 따라서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예배의 전주는 은은한 종소리였다. 전주에 이어 박혜성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여자 목사의 사회로 진행되는 주일공동예배는 모성애적 영성이 그윽해서 좋았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미래 지향적인 연동 교회의 모습을 이런 데서도 엿볼 수 있었다. 송영, 기원, (침묵)참회기도가 이어졌고, 교독과 회중찬송이 끝난 다음,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여자 권사가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각각 읽었다. 다음은 대표기도 순서였다. 이번에도 역시 여자 장로가 기도를 드렸다. 기도드리는 분위기를 보아 추측컨대 기도문을 준비하신 것 같다.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천편일률적인 기도 언어에 빠지지 않은 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기도드리는 모습이 비록 인터넷을 통한 예배였지만 평자도 함께 기도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 했다.
그러고 보니 설교자만 빼고 나머지 중요한 순서를 맡은 분들이 모두 여자 일색이었다. 순서를 돌아가면서 맡다보니 우연하게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연동교회가 한국의 가부장적 질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좀처럼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연동교회는 이미 6명의 여자 장로를 세웠으며, 현재 4명의 여자 장로가 시무 중이라고 한다. 이런 추세라고 한다면 연동교회가 언젠가는 여자 목사를 당회장으로 청빙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 ‘언젠가’는 바로 한국교회의 역사가 새롭게 기록되는 순간이 아닐는지.
예배 순서자들만이 아니라 예배가 진행되는 강단의 분위기도 전체적으로 열려 있었다. 회중석과 강단 사이가 거의 수평적인 구도로 되어 있었으며, 모든 순서 담당자들도 강단에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요즘에는 많은 교회당들이 이런 콘셒으로 건축되고 있지만 주일 공동예배에서 성경봉독자까지 설교자와 같은 강단에 자리함으로써 열림과 평등의 영성을 현실화해나가는 교회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한 마디로 연동교회의 주일공동예배는 21세기 한국교회가 모범을 삼아도 될 만큼 맛깔스러웠다. 만약 평자가 평신도로 서울에 살고 있다면 그 맛에 취해서 연동교회의 예배에 자주 참석했을 것 같다.
감동적인 예배실황에 마음을 빼앗긴 평자는 이 목사의 설교를 빨리 듣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렇게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세련된 예배를 이끌어낼 수 있는 목사의 설교라고 한다면 당연히 영적으로 풍요롭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런 기대와 예감은 단지 예배에서만 비롯된 건 아니다. 이 목사가 2003년 말에 출판한 한 권의 책이 훨씬 더 결정적이었을지 모른다.  

수도원 영성의 향기
이 목사의 중요한 저서는 다음과 같다. 교회행정학(1994년), 미래사회와 미래교회(1996년), 미래목회 대예언(1998년), 밀레니엄목회 리포트(1999년), 디지털목회 리더십(2000년), 디지털 목회와 팀(2004년). 이상은 주로 교회 행정과 목회에 관한 것들이다. 이런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목사는 인문학적 소양과 시대정신 읽기 능력이 탁월한 분이시다. 1990년대 초에 매 년마다 한권씩 시리즈 형태로 나온 설교집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의 비유, 예수님의 기적, 예수님의 설교가 있다. 아마 수요일 기도회 때 행한 강해설교의 묶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이한 것은 어린이 설교집이 3권이나 되며, 어린이 성경을 번역했고, 어린이 성경교육을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에게서 이렇게 다양한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의 다양한 글쓰기는 <수도원 영성의 향기>에서 극치를 이룬다. 주로 미래학과 교회행정에 관심이 쏠려 있는 사람에게서 수도원 영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는 건 예상 밖이었다. 연동교회 시무 13년이 지난 두 번째 안식년에 이집트 사막 지대에 있는 ‘성 마카리우스’ 수도원을 방문, 그곳에서 수도사들과 함께 생활하며 느낀 단상을 담담하게 풀어쓴 이 책에서 이 목사는 자신이 관심을 기울인 미래학과 영성의 관계를 이렇게 피력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미래에 관한 공부를 제법 열심히 했습니다. 21세기는 교회가 쇠퇴하고 교인 수가 감소할 것이라는 일반적 예측 때문이었습니다. 미래 사회를 연구하면 분명 이런 현상에 대한 대처 방안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미래를 공부해도 거기에 해답은 없었습니다. 인문학적 방법론으로 전개되는 미래학은 진단을 위한 학문일 뿐입니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 고심하다가 발견한 것이 영성학입니다. 미래 사회에 대한 모든 해답은 영성에서 귀결됩니다. 영성학은 처방이며 해답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영성학이 아니라 영성이 처방이며 해답입니다.(수도원 영성의 향기, 두란노, 2003년, 10쪽. 이하 ‘영성’).

평자는 이 책을 한 호흡으로 읽었다. 아무리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 하더라도 생각이 담기지 않은 글들은 대번에 표시가 난다. 그런데 이 책은 이 목사의 영혼이 얼마나 순전한가를, 그의 영적인 내공이 얼마나 탄탄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게 준비되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사막의 수도원을 찾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흡사 고승이 제자에게 화두를 던지는 듯한 이런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의 큰 순서는 이렇다. 1부: 비움의 영성, 2부: 투쟁의 영성, 3부: 단순함의 영성, 4부: 향기의 영성. 1부와 3부의 내용 중에서 몇 대목만 간추려보겠다.
이 목사는 “1부 비움의 영성”에서 성 마카리우스 수도원의 건물형태를 중심으로 다섯 주제를 설정한다. 좁은 문, 작은 방, 빈 의자, 마음의 창, 생명의 바람이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단지 사물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이 목사는 여기서 인간 삶과 신앙의 신비를 시냇물 흘러가듯 아주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셀’이라고 불리는 작은 방에서 생활한다. 이 목사도 역시 다른 수도사들과 마찬가지로 한 셀에서 생활했다. 그는 그 방 한 귀퉁이에 놓여 있는 의자를 보면서 신앙적 상상력을 펼쳤다.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의자에 앉아있는 왕의 권위를 나타낸다. 땅바닥에 앉아 지내던 평민들이 아니라 왕족을 위한 용품이 바로 의자였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외적인 권위가 아니라 의인이 앉아야 할 자리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이 목사는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 수도원 셀에 놓인 초라한 의자와 연결시키면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사람은 누구나 의자의 영원한 주인이 아닙니다. 내 의자를 언젠가는 다른 사람이 앉게 됩니다.”(영성 49). 이 말은 아마 목사라는 직책에도 해당될 것이다. 담임 목사의 정년을 아무리 합법적으로 늘린다고 하더라도, 담임 목사직의 세습을 아무리 정당화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자리를 떠나야 할 때가 온다. 이런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자기를 비우는 것이야말로 영성의 근본이 아닐는지. 이 목사는 그 대목을 이렇게 정리했다.

작은 방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빈 의자는 주님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수도원 작은 셀의 빈 의자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잠시 그 의자에 앉을 때마다 이 의자의 주인이 내가 아니기를 다짐했습니다. 수도원 작은 방의 빈 의자는 주님의 자리입니다. 내 마음 작은 방의 빈 의자는 주님의 자리입니다. 내 마음 빈 의자의 주인은 영원히 주님입니다.(영성 50).

이 목사는 “3부 단순함의 영성”에서 수도원의 단순한 생활에 기대서 이렇게 다섯 가지의 영적인 가르침을 풀어냈다. 묵상하는 시간을 떼어놓으십시오. 절제된 식탁이 아름답습니다. 사치스러운 옷을 버리십시오. 노동으로 기도하십시오. 단순함을 사랑하십시오. 소유와 명예가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삶에서 참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가능하다는 삶의 신비를 들여다볼 줄 안다는 것은 설교자로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이런 신비와 영성을 자기 삶의 토대로 삼는 설교자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평자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목사는 영성의 향기를 아는 설교자이다. 그는 이렇게 글쓰기를 끝낸다.

사막의 향기는 주님의 다스림입니다. 사막의 향기는 훗날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사막의 향기로 가득한 수도원은 이미 하나님이 다스리는 작은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작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향기롭게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 작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이 작은 하나님의 나라를 살았습니다. 사막의 향기를 가슴에 빼곡하게 채워 다시 작은 문을 통해 집으로 왔습니다. 아직도 사막의 향기는 내 코를 진동하고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영성 230).

평자는 이 목사의 이 진술을 이심전심으로 받아들였다. 바로 여기에 설교의 영성도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흡사 사막의 수도사처럼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리로 청중들을 끌어가는 사람이 아닐까? 고독과 불편한 삶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 사막에서 놀라운 생명의 신비가 향기처럼 우리를 사로잡는다는 비밀을 청중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아닐까? 오늘 한국교회에 가장 절실한 부분이 바로 이런 사막 수도원 영성이리라. 아니, 가장 절실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가 바로 이것이리라. 설교 행위의 존재론적 능력도 역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영성은 결코 방법론이 아니다. 그것의 원초적 근본은 바로 이 목사가 수도원 생활에서 발견한 생명의 존재론적 능력과의 일치이다. 모든 주변적인 것을 일체 털어내고 생명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온전한 만남이다. 이것 말고 설교자가 신경을 써야 할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설교자는 청중들을 도덕적으로 계도하거나 교회를 성장시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적인 촉수를 맞추고 살아가는 사막의 수도사들처럼 하나님만을 설교해야 한다.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에게는 서로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하루 스물 네 시간이 모자란 것처럼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의 영적인 사랑에 빠지기만 하면 그분에 대한 설교만으로도 우리의 시간은 빠듯할 것이다.

‘필’이 꽂히지 않는 이유
<수도원 영성의 향기>는 바로 이 목사의 설교에 대한 평자의 기대감을 한껏 부풀린 셈이다. 오랜 만에 한 설교자의 영적인 심층으로부터 깊은 산속의 옹달샘 같은 설교를 듣게 될 것이라는 작은 흥분을 안고 이 목사의 설교집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앞에서 언급한 예수 시리즈 중에서 3권을 꼼꼼히 읽었고, 인터넷을 통해 2005년 10월2일부터 2006년 2월26일까지 연동교회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 20 여 편의 설교문을 읽기도 했고 동영상으로 시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뭔가 ‘필’이 꽂히는 게 없었다. 기대가 너무 큰 탓이었는지, 사막의 영성을 알알이 살아있는 언어로 엮어내는 분이기에 그에게서 무언가 다른 영적 감동을 주는 설교를 들을 수 있으려니 하고 기대했는데, 그게 채워지지 못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라는 말인가? 그의 설교에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빠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평자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참으로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여기서 한국을 대표하는 목회자요 설교자인 원로급 목사의 설교를 공연히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또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넘어갈 생각도 없다.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고, 무심(無心)의 자세로 그의 설교와 대면할 생각이다.
마음이 급한 분들을 위해서 우선 잠정적인 결론부터 내리겠다. 이 목사의 설교는 전반적으로 ‘나이브’하다. 이 말은 곧 이 목사의 설교가 성서 텍스트의 영적인 세계로 뛰어 들어가려는 치열성이 부족하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의 복”은 팔복의 첫 명제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막 5:1-3)를 본문으로 한다. 이 설교에서 이 목사는 두 가지 관점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첫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누군가? 이 목사는 병행구인 누가복음 6:20절의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를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마 11:29)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가 가르치는 것은 마음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람들의 형식주의적인 종교를 배타하시고 마음의 종교를 말씀하고 계십니다.”(예수님의 설교, 26쪽, 이하 ‘설교’). 이 땅에서 물질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이 그것의 철저한 전복인 하나님 나라를 사모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이 목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둘째,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방법이 무엇인가? 이 목사는 자신을 비우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마음속의 욕심을 비우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부족함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목사의 이런 주장은 원론적으로만 본다면 잘못된 게 하나도 없지만, 너무나 지당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그 설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또한 우리 마음이 가난해지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티끌만한 작은 잘못이 있다면 이는 우리들의 마음이 가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심령이 가난해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천국을 이미 이 땅에서 소유하는 천국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설교 33).

마음이 가난해지기 위해서 회개해야 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가난과 회개는 각각 인류 역사 전체를 담고 있을 정도로 복합적인 주제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나 쉽게 마음의 가난과 회개를 연결시키고 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영적인 현상을 심층적으로 풀어내지 않고 당위적으로만 언급한다는 말이다. 이는 흡사 결혼식장에서 “서로 사랑하세요. 그러면 행복합니다.” 하고 덕담을 주는 주례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신, 설교의 전후 맥락을 무시하고 몇 구절만 인용해서 딴지거는 거 아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 목사의 설교집을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조금 더 천천히 그의 설교를 따라가보자.

설교의 가현설
“죄사함의 삶”(마 6:12)은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라 할 이웃사랑, 원수사랑, 그리고 용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설교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대목을 이 목사는 세 단락으로 설명했다. 첫째, 우리는 먼저 우리가 빚 진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 사람들에 대한 죄의식도 중요하다. 셋째, 용서를 원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이 목사가 여기서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다음의 진술에 들어있다. “우리가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이미 용서 받았기에 세상에 나가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삶입니다.”(예수님의 기도, 85쪽. 이하 ‘기도’). 물론 이 목사는 나름으로 최선을 다 해 그 논리를 해명하고 있었으며, 또한 크게 틀린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설교의 영적 긴장감이 크게 훼손되고 있었다. 그는 그 설교를 이렇게 끝냈다.

용서가 필요한 이 사회에 나가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며 사랑해 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여 줄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암송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 실천하며 용서 받은 자답게 날마다 용서해 주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기도, 85).

우리가 사랑받았으니까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거나, 우리가 용서받았으니까 용서해야 한다는, 또는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해야 한다는 설교는 오늘의 구체적인 삶에서 매우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이런 설교는 아무리 들어도 우리의 영성을 별로 자극하지 못한다. 무슨 말인가? 신자들이 이 설교를 듣고 겉으로는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척 할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그게 잘 안 되는데요?” 할 것이다. 설교와 삶의 불일치를 극복하기 위해서 설교자들은 아주 자극적인, 또는 매우 선정적인 예화를 들 수밖에 없다. 그 중의 하나가 자기 자식을 살해한 공산당원을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 이야기다. 이런 예화를 듣는 청중들은 기가 죽겠지만 그런 현상이 반드시 은혜와 일치하는 건 아니다. 어떤 특별한 경우에 가능했던 신앙적 태도를 일반화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사실 그렇게 용서하라고, 사랑하라고 열을 올리는 목사들도 실제 삶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요즘 북한 인권법 운운하면서 김정일 체제를 비난하는 목사들에게 김정일을 용서하라는 말이 먹힐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용서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기독교인의 사랑이라는 게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서 달라진다면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가. 평자의 말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랑과 용서의 기독교적인 가치를 무력화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옳은 주장이라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은 그런 당위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중층적이고 구체적인 삶 앞에서 매번 새롭게 고민하고 결단하는 삶의 태도라는 의미이다. 현실성과 적실성이 없는 설교는 결국 가현설에 빠지게 마련이다.
헬무트 틸리케는 이미 오래 전에 <현대교회의 고민과 설교>에서 가현설적 설교의 한 전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어떤 설교자가 기독교인의 삶은 사랑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외로운 노인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인도의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구호금을 보내야 한다고 설교했다. 그 예배에 참석한 한 사업가는 설교가 끝난 다음에 설교자를 찾아와 이렇게 호소했다. 자기는 이미 이웃에 있는 노인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정기적으로 장애자들을 방문한다는 것이다. 이건 신앙과 상관없이 휴머니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사업가의 실제적인 고민은 자기와 경쟁하고 있는 상대 사업가와의 관계에 있었다. 적자생존이라는 살벌한 경쟁 관계에 놓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이 사람에게 절실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용서의 당위성만 강조하는 이 목사의 설교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리얼리티가 없는, 혹은 그게 크게 떨어지는 설교인 셈이다.
평자가 보기에 이렇게 당위론에 떨어진, 그래서 결국 삶의 실질과는 틈을 보이는 설교 앞에서 신자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한쪽의 신자들은 “설교하고 있네!” 같은 냉소를 보이고, 다른 한쪽의 신자들은 자신들이 흡사 천사처럼 살아야겠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낄 것이다. 후자의 신자들을 더 세분하면 원수 사랑과 무조건적인 용서를 무거운 멍에로 생각하는 이들과 그것을 철저하게 관념화함으로써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교회와 목사의 신뢰도가 어느 정도인가를 살펴보면 오늘의 설교가 현실 삶과 심각하게 유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이 목사가 이 글을 읽는다면 바로 이 대목에서 연동교회가 지역사회를 향해서 설계하고 있는 복지 프로그램이야말로 신앙과 삶의 일치이며, 동시에 교회에 대한 사회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길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이 문제는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거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목사의 설교가 일반론과 당위론에 떨어짐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고유한 영성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으로 넘어가자.

성서 텍스트와의 불협화음
평자는 <수도원 영성의 향기>의 저자와 위에서 몇 편 인용한 설교의 장본인이 같은 분이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느꼈던 영성의 향기는 흡사 돈을 주고 완전히 얼굴을 뜯어고친 성형미인의 그것과 비슷했다는 말일까? 마음이 뒤숭숭하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위에서 인용한 설교가 10 여 년 전에 행한 것이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최근의 설교를 검토했는데, 양자 모두 영성과의 분열 현상을 보인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다른 점을 찾는다면, 과거의 설교는 위에서 말한 대로 일반론에 떨어졌다면 오늘의 설교는 지나치게 목회 공학적인 성향을 강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이 목사에게는 분명히 기독교 영성에 관한 고유한 깨우침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왜 설교 현장에서 아무런 능력으로 작용하지 못하는가 말이다. 그 중심에는 평자가 다른 글에서도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그의 설교가 성서 텍스트와 따로 놀고 있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즉 이 목사의 영성이 성서 텍스트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는 말이다.
2006년 2월12일에 행한 설교 “굽고 삶고 간수하라”(출 16:22-24, 눅 11:27, 28)를 보자. 만나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출애굽기 16장23절은 이렇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이 텍스트를 놓고 이 목사는 이렇게 세 가지 소주제로 설교했다. 첫째, 굽는 것은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 삶는 것은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다. 셋째, 간수하는 것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을 특별한 방식으로 지키셨다는 신앙고백인 이 만나 사건을 오늘 말씀 이해, 말씀 해석, 말씀 묵상으로 풀어낸다는 건 이 목사에게 평자가 도저히 따갈 수 없는 성서해석학적 능력이 있든지, 아니면 이 목사가 설교자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작업인 성서 텍스트의 ‘삶의 자리’를 간과한다는 증거이다.
2006년 1월22일에 행한 설교 “새시대의 원텐 운동”(수 6:8-14, 딤전 4:15)은 연동교회의 비전을 담았다. 원텐(one-ten) 운동은 연동교회 신자들이 지켜야 할 행동 지침이다. 그 내용을 이 목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1분 더 기도, 1곡 더 찬송, 1장 더 성경, 1번 더 묵상, 1집 더 심방, 1일 더 훈련, 1손 더 교제, 1조 더 봉헌, 1인 더 전도, 1회 더 봉사.” 우리 모두가 작은 정성으로 큰 신앙을 이루는 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열 가지 하나 더 운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가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여리고 성 함락 보도는 홍해가 갈라진 사건이나 요단강이 갈라진 사건처럼 하나님의 배타적인 역사 개입에 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다. 그가 이 사건을 연동교회라는 한 교회의 신앙생활 프로그램과 연결시켰다는 게 놀랍고 신기하다. 그는 이렇게 두 단락으로 설교했다. 첫째, 작은 하나가 큰 성을 무너뜨린다. 둘째, 작은 하나에 전력하면 성숙함을 나타낸다. 첫 번째 단락을 설명하면서 이 목사는 느닷없이 사학법 반대 집회를 예로 들었다.

사학법 개정을 반대하고 사학 수호를 위해 기독교가 뭉쳤습니다. 지난 19일 영락교회에서 사학수호를 위한 기도회가 모였는데 엄청나게 많이 모였습니다. 왜 개신교가 사학법 개정을 반대하는지 아십니까? 제가 이사장일 때 정신학원도 사학법이 통과되면 학교를 노회 허락을 얻어 폐쇄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중략> 개방형 이사 한 사람이 들어오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들어오면 사사건건 아무 것도 못하게 됩니다. 사학 비리 척결 외에 다른 의도가 있지 않으면 사학법 개정은 다시 재고되어야 합니다. 작은 하나가 큰 성을 무너뜨립니다. 한 사람이 얼마든지 큰 성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이 일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여리고성 함락 사건과 원텐 운동과 사학법 반대 투쟁이 무슨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평자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간다. 개방형 이사 한 사람만 들어오면 학교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그의 주장은 영혼의 심층에서 울려나오는 생명의 언어라기보다는 매우 정치적인 선동적 언어처럼 들린다. 여기서 사학법 문제에 대해 길게 끌고 싶지 않다. 개인적으로 사학법을 반대할 수도, 찬성할 수도 있긴 하지만 설교 시간에 이런 예민한 문제를 거론하려면 그것에 관한 충분한 성서적, 신학적 근거가 준비되어야 한다. 안타깝지만 이 목사의 설교에서 그걸 발견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이 얼마든지 큰 성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이 일에 반대하는 것입니다.”는 게 과연 설득력이 있는 주장일까?
이 목사는 2005년 11월20일 주일에 “하늘 감사를 드리는 사람들”(시 136:24-26, 롬 14:5,6)이라는 제목으로 두 가지 점을 강조했다. 첫째, 구원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 앞의 것은 24절 말씀에 근거한 것이고, 둘째 것은 1절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우선, 구원과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사실인데 무슨 이유로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이것은 곧 그가 하나님이 구원 사건과 구원 행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진술하고 있는 감사의 지평이 이스라엘 역사라는 사실을 읽을 수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이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는지를 해명해야 하며, 본문 25절에 언급되어 있는 ‘먹을거리’가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의 생존을 지켜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을 좀 더 심층적으로 해명하고, 따라서 생존을 위협하는 오늘의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와 양극화 같은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정리해야 할 것이다.

이드로는 누구인가?
만약 이 목사가 이 세상과 역사와 생명의 오묘함을 전혀 들여다볼 줄 모르는 분이라고 한다면 평자의 실망도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을,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내셔널 지오그라픽>이라는 잡지를 구독할 정도로 세계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가 짬짬이 밝히고 있는 세계관은 소위 복음주의자들과 달리 열려 있다. 예컨대 그는 한기총이 옹호하고 있는 사형제도의 불법성을 이미 오래 전부터 줄기차게 외치고 있었으며(기도 187, 설교 24, 예수님의 기적 184, 이하 ‘기적’), 십자군 전쟁을 거론하면서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저지른 범죄 행위를 눈여겨볼 줄 안다.(설교 95). 교회 종소리가 이웃에게 방해가 된다면 종을 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설교 101). 북한 문제에서도 교회 재건보다 화해와 용서가 우선한다고 생각하며(미래사회와 미래교회, 297),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기도대회를 거창하게 여는 것보다는 골방 기도가 더 필요하다고 역설한 적도 있다.(설교 182). 중소기업의 돈벌이까지 손을 뻗는 재벌의 문제도 지적할 줄 알고(기도 92), 미국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현재 미국 대통령의 아버지 부시가 일으킨 10 여 년 전의 걸프전에 대해서 이 목사는 아래와 같이 일갈했는데, 이번의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도 역시 이런 비판이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전쟁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다시금 미국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세계를 정복할까봐 저는 두려워합니다. 미국이 승리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승리자라는 것을 깨닫는 우리들이 되어야합니다. 어떤 개인이나, 어떤 나라가 세계를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라크가 그렇게 무참하게 폐허가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공존의 문제입니다.(기도 57).

세계관만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이 목사는 참신한 발언을 자주 한다. 앞으로 100명 이하의 소형교회가 중심을 이룰 것이라고 보고, 그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경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밀레니엄 목회 리포트, 97).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하며(기적 60),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도 크고(기적 92), 성서의 기적은 기적 자체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이라고 정확하게 짚었다.(기적 151). 펄시 콜레의 <내가 본 천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분명하게 잡아냈으며, 하나님 나라와 땅의 나라를 이원론적으로 바라보지 않고(기도 89), 모든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기도 69).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발언을 밑줄 치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별로 의미 없거나 생각 없는 주장들이 툭툭 튀어나온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곧 그가 성서 텍스트와 밀착하고 있지 못하다는, 혹은 일관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는 간질병 아이를 고친 사건(막 9:14-29)에서 제자들이 이 아이를 고치지 못한 이유는 기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기도 142, 145). 예수에게서 메시아적 사건이 발생했다는 신앙고백을 단순히 기도유무에 의한 기적 발생 가능성 여부로 몰아간다는 건 그의 성서읽기가 변죽만 울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기도에 관한 본문인 누가복음 11:5-13절을 해석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듯이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강청하는 사람들에게 더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본문이 그걸 말하는 것일까? 이 목사에 따르면 오병이어 기적 사건에서(요 6:5-13) 무리들이 떼를 지어 모여 앉았다는 사실은 주님의 기적에서 질서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기적 73). 그는 성서 텍스트의 중심과 깊이로 들어가기보다는 표면과 주변에서 머뭇거림으로써 결국 성서 텍스트의 해석학적 지평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최근의 설교에서 이 목사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방인이었지만 야훼 종교의 제사장이었다고 언급했다.(2006년 2월19일). 출애굽기는 누차에 걸쳐서 이드로를 미디안 제사장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2:16, 3:1, 18:1) 이 목사가 무슨 이유로 이 사실을 못 본 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 목사는 출애굽 사건에 대한 모세의 설명을 들은 이드로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쳤다는 진술을 그 근거로 삼은 것 같다. 이런 성서해석이야말로 견강부회이다. 이 성서 텍스트는 광야의 한 곳, 즉 ‘하나님의 산’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서 출애굽의 이스라엘과 광야 민족인 미디안의 만남을 그 뿌리에 두고 있다. 모세는 이미 이드로의 데릴사위로 양을 치면서 이드로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산’에 가서 그 유명한 불붙는 가시떨기 사건을 경험한다. 이스라엘 민족도 나그네이며, 미디안도 나그네였다. 서로 다른 신을 섬기던 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산에서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지금 평자가 이 본문에 대한 역사비평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려는 건 아니다. 그럴 능력도 없으며, 그럴 여건도 아니다. 다만 미디안 제사장이었던 이드로를 이렇게 간단히 야훼 제사장이었다고 주장하는 이 목사의 성서읽기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드로가 훗날 야훼 신앙으로 돌아섰을 개연성까지 평자가 부정하는 건 아니다. 참고적으로 평자가 보기에 모세가 하나님의 산, 일명 호렙산에서 출애굽 소명을 받은 그 사건의 배후에는 분명히 미디안 제사장이었던 이드로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산은 원래 미디안 종교의 성지였다는 말이다.
독자들께서는 이드로에 관한 이 목사의 이런 언급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설교는 기본적으로 성서 텍스트의 지평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보다는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이며, 또한 이 목사의 언급이 설교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별로 크지 않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교자들이 일단 성서 텍스트의 지평으로 정확하게 들어가지 않으면 그 말씀을 들어야 할 독자들(컨텍스트)의 지평도 열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건 매우 중요한 사태이다. 생각해보시라. 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역사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는데, 텍스트의 역사적 지평 없이 어떻게 독자의 역사적 지평이 열리겠는가? 여기서 역사는 인간의 전체 삶이라고 보아도 좋다. 텍스트의 고유한 지평을 파고 들어갈 열정이 없는 설교자는 오늘 청중들의 삶에서 움직이고 있는 생명의 지평을 파고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단순한 종교적 감수성이나 도덕심, 또는 교회 조직이 설교와 목회를 장악하기 마련이다. 아마 이런 현상이 오늘 한국교회 강단과 교회 실존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만한 분들은 모두 알고 있으리라. 안타깝지만 사막의 영성을 경험하셨다는 이 목사의 설교와 목회에도 이런 조짐은 역력하다. 그것이 곧 목회의 연륜이라는 의미일까?  

복지목회의 미래
요즘 이 목사는 연동교회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 토대를 닦는 일에 바쁘시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연동교회가 지역사회를 향한 과감한 참여이다. 교회창립 111주년이었던 2005년에는 100일 특별새벽기도회를 개최했으며, 청계천 복원사업을 선교의 호기로 삼고 있다.(2006년 1월8일). 교회는 영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육적인 문제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탓인지(기적 91), 그리고 기본적으로 미래 교회가 오늘보다 훨씬 큰 사회적 사명이 있다는 분석 탓인지 이 목사는 지역주민을 위한 장례식장과 환경미화원들의 세탁과 휴식을 위한 공간, 그리고 어린이 놀이방과 청소년을 위한 농구장, 청년들을 위한 북카페, 노인들을 위한 노인정, 지방학생들을 위한 학사, 언제나 공연이 가능한 극장이 포함된 복합복지관 설립을 계획했다.(미래목회 대예언, 1998년, 361쪽). 연동교회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이런 미래 설계가 상당한 정도로 마무리되었으며, 그것의 콘텐츠를 채우기 위한 날갯짓이 활기찬 것 같다.
교회 부설기관으로 신용협동조합, 연동동산(공동묘지), 수양관, 유치원, 가나학교, 복지원이 있는데, 그 복지원 산하에 원로관, 연동어린이집, 누상어린이집, 작은 형제의 집, 실버아카데미가 꾸려져 있었다. 2006년 목회방침의 목표에는 ‘복지의 생활화’가 중요한 항목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며, 실천사항에도 역시 ‘복지타운 마스터플랜’이 자리하고 있었다.  

2005년에 이루지 못했던 복지 타운 조성을 다음 해에 지속적으로 연구해 나갈 것이다. 우리 교회의 모든 복지 시설을 하나의 타운으로 하는 시설을 조성하도록 한다. 우리 교회의 미래와 새로운 10년을 내다보면서 장기적 비전으로 복지 타운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과 구체적인 마스터플랜을 만들어 실현 가능하도록 홍보하고 조성한다.(연동교회 홈페이지에서).

재미있는 것은 실천사항에 ‘출산장려운동’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아주 기발한 발상이긴 한데, 그리고 그게 무슨 뜻인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는 있지만, 이런 방법론까지 끌어들여 교회의 미래를 준비한다는 건 의외이다.  
어쨌든지 복지문제를 한국교회의 미래와 연결시키는 이 목사의 발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교계 안에서 인정받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복지는 교회가 아니라 정부의 몫이다. 교회는 정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예언자적 상상력을 제공해야 하는 데 치중해야 한다. 만약 교회가 이런 복지 문제로 정부나 시민단체와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 행위를 상대화하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착상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개신교 신학의 거장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교회의 사회적인 활동(복지시설, 보육원, 간호시설, 병원, 학교 등등)은 부차적이고 잠정적인 것이다. 교회는 정치 공동체의 대리인으로서 이런 일들을 하는 데 불과하다. 오히려 교회는 사회의 정치적 기구에 부합하는 이런 책임들을 국가가 인수하도록 준비시키고 또 그렇게 각성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교회가 국가와 대립적으로 이런 복지 활동을 독점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사명을 기묘하게 곡해하는 것이다. 교회는 정치 단체를 고무하여 그 책임을 인수하게 하는 일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사회적 공헌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의 궁극적 신비, 즉 영원한 하나님과 역사 안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목적에 직면하게 함으로써 인간 삶의 인격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판넨베르크, 이병섭 역, 대한기독교서회, 127 쪽. 문맥을 약간 손질했음).

물론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국가가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교회가 어쩔 수 없이 맡는 것까지 시비 걸 일은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탈북자들과 장기수의 복지가 이런 부분에 속할 것이다. 방법론적인 차원에서도 이 문제는 조금 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런 사업은 개교회가 아니라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추진하는 게, 혹은 그런 일에 전문적인 시민단체를 돕는 방식이 훨씬 바람직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의 대도시 중대형 교회가 경쟁적으로 펼치는 복지 사업이 불러오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는 불요불급한 복지활동에 교회의 물적 토대가 집중됨으로써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축소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미자립교회의 해결은 교회의 단일성이라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 재정적으로 교회일치를 이루지 못하면서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다시 한 번 더 밝혀두지만 평자가 모든 복지 활동을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복지를 설계하는 일에 교회의 미래를 건다는 건 교회의 본질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며, 결국 그런 목회와 그런 설교의 미래는 이 목사가 사막의 수도원에서 경험했던, 그리고 근본적으로 예수 부활 사건에서 선취된 종말론적 생명의 영성을 담지(擔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을 뿐이다. 미래는 우리의 설계로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 교회의 미래는 하나님의 존재가 완전히 드러나는 종말의 빛에서만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가 할 일은 그때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노자의 경구는 신학적으로도 옳은 게 아닐는지. 無爲以無不爲.
끝으로, 평자의 생각에 이 목사가 <수도원 영성의 향기>에 집중했으면 한다. 교회행정과 복지문제를 비롯한 제반 목회업무를 과감하게 줄이고 ‘성 마카리우스’ 수도원의 작은 문으로 들어가는 설교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에게는 그럴 능력도 있다. 이 목사 자신이 말했듯이 교회의 미래는 미래학이 아니라 사막의 영성에 달려있지 않은가!  (기독교사상, 2006년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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