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향한 과도한 욕망의 끝자락
-기쁜소식 강남교회 박옥수 목사-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박옥수 목사님(이하 ‘박 목사’)의 설교집 표지 날개에 실린 소개글과 설교를 통해서 발설된 그분의 이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박 목사는 1944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했고, 열여덟 살이었던 1962년 10월7일에 거듭났으며, 1968년 6월8일 군에서 제대했고, 딕 욕(Dick York) 선교사를 비롯한 몇몇 외국인 선교사에게 신앙 훈련을 받았다. 1976년 한국복음선교학교를 설립했으며, 1985년 아세아 방송에서 ‘창세기 강해’를 맡았고, 1990년 이후 미국의 주요 도시와 중남미에서 티브이 및 라디오 설교를 진행했고, 국내외에서 수차례에 걸쳐 복음전도 대중집회를 개최한 바 있다. 현재는 서울 기쁜소식 강남교회의 담임 목사로 시무 중이다. 그의 이력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거듭난 일시를 적시한다는 사실과 공식적으로 신학을 공부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교파의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약간 특이한 과정을 통해서 설교자가 된 박 목사의 활동은 요즘도 매우 역동적이다. 지난 1월 하순 하와이에서 열린 IYF(International Youth Fellowship)의 ‘글로벌 캠프’(Global Camp)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공식 참가자만 1850명이었다. 이 기간 동안 박 목사는 하와이 대법원장, 시장, 상원의원들과 긴밀한 유대를 맺었으며, 이 대회를 통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거듭났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었다. 이 글로벌 캠프에 관한 뉴스는 동아일보와 세계일보가 다루었으며, 그 이전에도 박 목사의 활동에 관해 월간중앙(2001년 4월)과 중앙일보(2005년1월7일)가 보도한 바 있다. 국내외에서 열리는 박 목사의 대중집회는 현수막이나 포스터만이 아니라 신문과 티브이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서 대대적으로 광고되는 일이 흔하다. 오늘 평자는 그의 독특한 이력과 복음전달 방식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그의 설교가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일 생각이다.
박 목사는 마흔 두 살이던 1986년에 부산 무궁화 회관에서 대중집회를 열고, 그때 행한 설교를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1권>(이하 ‘죄사함’)이라는 책으로 묶어 낸바 있다. 같은 제목의 2권은 1991년에, 3권은 1992년에 출판되었다. 60세가 되던 해인 2004년 광주 구동체육관에서 개최한 대중집회의 설교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하 ‘예수’)라는 제목으로 묶여 나왔다. 근 20년의 간격을 두고 나온 설교집이 고집스럽게 오직 한 가지 주제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일단 놀라웠다.
박 목사가 바로 이 순간까지 무모하다싶을 정도로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구원’의 확실성이다. 그는 지난 40년 이상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설파하는 일에 매진했다. 이런 태도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일단 높이 평가될 수 있다. 그의 설교와 목회가 실제로 그렇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뚫고 들어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로 치고, 현상적으로 그런 길을 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선 구원 문제에서 인간의 역할이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박 목사의 주장을 들어보자.

저주와 멸망과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잘 한다고 죄가 더 많이 씻어지고, 덜 한다고 적게 씻어지고, 주일을 잘 지키면 죄가 씻어지고 잘못 지키면 그만큼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값없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셔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다는 것입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2권, 231쪽. 이하 ‘거듭남’).

비록 거칠게 표현되긴 했지만 하나님의 구원 행위 앞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박 목사의 주장은 옳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평소에 소극적인 목회와 소극적 설교를 주창하던 평자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물론 다른 설교자들도 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박 목사처럼 거의 외골수로, 오직 그 하나의 사실에 매달리듯이 선포하는 설교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오히려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겠다거나, 심지어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에 순종한다는 명분으로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부각시키는 설교가 흔한 편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 문제를 설교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사실과 구원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선포하려는 박 목사의 확고한 태도는 높이 살만하다.

무(無)율법주의
그의 이러한 태도는 어떤 신학적 성찰이 아니라 교회 현장 경험에서 형성되었다. 그 현장은 곧 그가 처참한 경험이었다고 자주 회상하고 있는 기성교회의 율법적 신앙생활이다. 그는 한국 교회가 철저하게 율법의 수렁에 빠져있다고 진단한다. 이름을 밝히는 헌금 행위의 문제점(죄사함 78)을 비롯해서 일반적인 신앙생활 전반에 걸친 율법적인 문제점들을 그는 매우 적나라하게 꼬집는다. 다음과 같은 진술은 분명히 기성교회 지도자들의 귀를 따갑게 할 것이다.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고, 새벽기도를 다니고,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그렇게 됩니까? 아니면 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붙잡고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통곡하면 됩니까? 성경책을 끼고 교회에 왔다 갔다 하면 예수 믿는 것입니까? 불을 받으면, 방언을 받으면 예수 믿는 것입니까?(거듭남 11).

기성교회를 향한 이런 비판은 그의 설교에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박 목사의 설교가 나름으로 대중성을 확보하는 이유는 이런 문제점들을 비교적 정확하게 짚어낸다는 데에 있다. 물론 그의 비판이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일부의 문제점들을, 혹은 일반적이지만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들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천만 원을 연보해서 아프리카 선교사를 도와라 하시면, ‘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하시겠구나’ 하고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서 하면” 된다고(예수 184) 은연중에 헌금을 강조하는 박 목사도 역시 자기가 비판하고 있는 그런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
그렇지만 비판받을만한 꼬투리를 일반교회가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21세기의 대명천지에 일천번제와 별미헌금이 무슨 말인가? 그런 일들이 아직도 우리주변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길은 없다. 또한 박 목사가 명분으로나마 그런 율법 신앙을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이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노장(老莊)사상의 무위 개념과 유사하게 들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발언을 들어보라.

처음에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고 일하실 기회를 만들어 드리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뒤로 밀어내 놓고 우리가 지키거나 해야 할 규범만 눈에 띈다는 것입니다. <중략> 모르긴 합니다만, 아직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 중에서도 아직까지도 ‘내가 무얼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관념 속에 젖어 있는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거듭남, 죄사함의 비밀, 3권, 20쪽, 이하 ‘비밀’).

율법신앙을 극복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신약성서는 우리에게 율법이 아니라 복음 지향적 삶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 박 목사는 기본적으로 복음과 율법의 변증법적 관계를, 그 긴장 관계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예수는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존재론적 근거일 뿐만 아니라 좋은 열매가 바로 좋은 나무의 인식론적 토대라는 사실을 통해서 존재와 행위의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셨다.(마 7:15-20). 또한 요한계시록 기자는 율법을 완전히 부정하고 영육 이원론에 기울어졌던 니골라당을 엄하게 질책했다.(계 2:6,15). 어느 쪽이든지 극단은 위험한 법이다. 율법주의가 극우라고 한다면 무율법주의는 극좌다. 박 목사는 혹시 오늘의 니골라당은 아닐까?  

사죄기도 무용론
기성교회의 율법 신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박 목사는 이제 자신의 고유한 신앙적 브랜드라 할 수 있는 ‘죄사함’의 논리를 제시한다. 율법신앙은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지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면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기복적인 생각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평화 안에서 신앙 생활할 수 있는 단초는 곧 죄 사함이다. 이 죄 사함이야말로 인간의 의로부터 예수의 의로 자리 이동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1986년 부산집회의 설교에서 박 목사는 그 당시 여중학교 3년이던 딸이 죄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학교에서 일어난 사고로 다친 딸을 통학시켜주면서 죄 사함의 말씀을 전했더니 딸이 승용차 안에서 확실히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제 딸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가 눈처럼 희게 되는 놀라운 기쁨을 저와 딸아이가 함께 맛볼 수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날부터 우리 집 아이가 변화되어가더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달라지고, 말씀 읽는 것이 달라지고, 생활하는 것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더라고요.(죄사함 151).

그 이외에도 그는 이런 죄 사함 문제를 명시적으로 언급할 때가 많다. 우리는 그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례예식에서 죄와 사죄가 분명하게 신앙고백 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죄 사함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것은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동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기본 틀이다. 이런 점에서 박 목사가 죄 사함을 강조한다는 사실 자체는 하등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박 목사는 바로 이 대목에서 한발자국도 꼼짝하지 않는다. 그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청년들에게나 노인들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오직 이 한 가지 사실에 거의 편집증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기독교 계통의 여러 이단들의 문제는 바로 이런 데서 시작된다. 기독교 신앙은 창조부터 종말, 칭의, 성화, 교회, 인간, 성령, 성례 등등, 여러 가르침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한 가지 도그마만 잘라내는 경우에 왜곡의 길을 피할 수 없다. 기독교의 매우 중요한 교리인 사죄론이 박 목사의 설교에서 어떻게 비틀거리고 있는지 천천히 따라가자.
죄 사함의 원리에서 박 목사의 주장은 아주 단순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씻었기 때문에 한번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영원히 용서받은 것이며, 따라서 다시는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에게는 애초부터 사죄기도는 무의미하다. 예수가 이미 그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 그는 신자들을 향해서 사죄 기도를 드리지 말라고 강요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실패했다’는 말은 안 하지만 “내 죄를 사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실패했다고 믿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에 실패하시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의 죄는 씻겨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목 박혀 죽으셔서 죄를 사하는 일에 성공하셨는데도, 죄가 그냥 남아 있다고 한다면 실패한 것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까?(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3권, 232쪽. 이하 ‘비밀’).

일반 신자들은 이런 박 목사의 주장이 아리송하게 들릴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모든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다는 말에는 수긍이 가지만, 우리가 죄 용서를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전자는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주론적인 사건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며, 후자는 기독교인의 현실이 끊임없이 죄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박 목사는 전자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설교자이다.
그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박 목사에 따르면 죄 문제의 해결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일어나야 한다. 하나는 하늘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차원이다. 하늘에서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완전히 해결되었지만, 인간의 마음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우리 마음의 해결은 죄가 씻겼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믿는 데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장부인 제단뿔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칠함으로 하나님이 보실 때 죄가 씻어지고, 우리 마음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씻었다. 하나님 편에서도 씻었다고 하신다.’는 복음이 들어와서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죄가 다 씻어진다는 겁니다.(거듭남 211).

평자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신자들의 마음을 훨씬 근원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위로하고 평화로운 영성으로 인도하려는 박 목사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없다. 그러나 그 동기가 아무리 순수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근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강조한다는 의미라고 하더라도 신자들이 사죄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지독한 난센스다. 박 목사의 사죄 무용론은 기본적으로 ‘주기도’에서 그 효용성을 잃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마 6:12).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신앙의 모범을 보인 모든 영성의 대가들과 신학의 대가들, 특히 박 목사가 자주 언급하는 웨슬리와 루터 같은 신앙의 스승들은 죽을 때까지 참회 기도를 드린 분들이다. 사죄기도를 드리지 않으면서 기독교인의 영성이 어떻게 확보될 수 있다는 말인지 이해할 길이 없다. 그는 구체적인 삶을 완전히 초월하는 투명인간이라는 말인가?

실증주의적 구원론
평자는 오늘 매우 곤혹스러운 입장에 놓여 있다. 여호와의 증인에 속한 분들이나 통일교에 속한 분들과의 대화가 앞으로 진행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지금 평자와 박 목사 사이에는 이런 근본적인 소통불능의 틈이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죄와 구원이 어떤 신학적 지형에서 시작되고 발전되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이해 없이 순전히 개인적인 신앙경험에 근거해서 나름의 논리를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개인경험을 극단화하는 경우에 기독교 신앙은 결국 보편적인 진리의 지평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설교 비평 작업이 단순히 어떤 설교자의 설교를 비판하기보다는 이제 설교의 길을 가기 시작한 젊은 설교자들과의 신앙적 대화에 그 무게가 놓여 있기 때문에 비록 소통의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성급하게 예단하지 않고 박 목사의 설교에 끝까지 귀를 기울일 생각이다.
사죄기도 무용론은 앞에서 한번 짚은 대로 십자가를 통한 예수의 구원 사건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해결했다는 논리에 자리하고 있다. 박 목사가 죄론과 구원론에서 방향을 놓친 이유는 그가 구원을 실증적인 현상으로 오해한다는 데에 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아주 분명하고 명백하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하기야 구원의 증거를 일종의 기차표처럼(죄사함 138) 생각하고 있으니 할 말은 없다. 목사는 이제 신자들이 천당행 차표를 갖고 있는지만 확인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목자가 되려면 신자들이 양인지 염소인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까지 주장한다.(양과 염소, 62쪽).
이렇게 구원이 실증적인 차원에서 강조되기 때문에 박 목사에게 구원받은 날은 강조될 수밖에 없다. “언제 구원받으셨나요?” 이런 문제로 인해서 한국교회 안에서 박 목사의 이단 문제가 불거졌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는 듯하다.  

언제 거듭났느냐고 물으면 이단이라고 하는데, 성경에 거듭난 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날이 없이 구원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도 이단이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은 사람들도 다 예수님을 만난 날이 있거든요. 예수님은 분명히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이단의 괴수라면, 저도 이단이 되고 싶습니다.(비밀 263).

물론 예수의 제자들도 부름 받은 그 순간이 있으며, 박 목사가 몇 번이나 예로 든 웨슬리나 루터 같은 사람들에게도 크게 깨우치는 순간이 있었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비밀 96, 104, 115). 만약 박 목사가 기독교인의 변화가 순간적인가, 점진적인가 하는 문제를 파고드는 것이라면 그의 고민에 박수갈채를 보내야 할 것이다. 선불교에서도 돈점(頓漸) 논쟁은 진행형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궁극적인 문제를 도식화하려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그의 주장은 흡사 인간의 몸에 영혼이 어느 순간에 들어가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순간인지, 배아 14일째인지, 그 뒤로 며칠이 지난 때인지 그 생명의 신비를 누가 기계적으로 재단할 수 있을까? 이런 생명의 신비처럼 구원사건도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배타적으로 일어나는 궁극적 신비인데도 불구하고 박 목사는 그것의 증거를 확보했다고 외치는 중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증거를 보이라고 다그치고 있는 중이다.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한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그런 걸 요구하거나 확인하지 않았으며, 신비주의의 대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는 아마 성서기자들과 교부들과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신앙을 가르친 영적인 스승들보다 자신이 크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심리적 구원론
이제 우리는 한 발 더 물러서서, 박 목사의 주장이 크게 왜곡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동기의 순수성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이렇게 질문하자. 당신은 그런 구원의 실증을 어떻게 확인하시는가? 그에게 사죄와 구원의 실증은 거의 일방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죄 사함은 신자의 마음이 완전히 죄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한 사건이다.

여러분의 마음을 묶고 있는 것이 어떤 죄라도 성령이 임하실 때 그냥 풀려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씻었다’는 사실을 알면 죄 사함을 받는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은 영접기도만 하면 죄 사함을 받는 줄 압니다. 그것과는 다릅니다. 우리 마음이 죄에서 벗어나야 구원받는 것이며 거듭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죄에서 해방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죄사함 275).

마음이 죄에서 해방 받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우리가 이해 못할 것은 없다.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들이 이 세상의 어떤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 박 목사의 생각은 하나님의 구원행위와 이에 따른 인간의 반응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영적 경험이라기보다는 단지 인간의 심리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확신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마음속에 거하면 마음이 더 이상 형편에 매이지 않는다거나(거듭남 156),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어떻게 사해 놓으셨는지 그 과정까지는 다 몰라도 돼요. 사했다면 ‘사해졌구나! 아멘.’ 하고 그 결과를 믿으면 되는데, 믿음이 없으니까 마음으로 ‘아멘’ 하기가 그렇게 어렵다구요.”(비밀 134) 라고 비현실적인 진술을 토로할 수 있겠는가. 급기야 현실적인 죄는 의미를 상실한다.

의인은 넘어져도 넘어진 의인이지,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인은 일어서도 일어선 죄인이지, 의인이 아닙니다. 이게 비밀입니다. 죄를 짓고 안 짓고에 상관없이 넘어져도 의인은 의인이에요.(비밀 134).

그뿐만 아니다. “말씀이 그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되면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시기심, 악한 마음이 다 없어집니다.”(비밀 192).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몇 명에게나 가능한가? 가족에게 이끌려 억지로 집회에 참석했던 알코올 중독자가 “한두 시간 말씀을 듣는 사이에 구원을 받아 그 자리에서 변해”버렸다고 한다.(예수 43). 박 목사에게는 일순간에 일어나는 이런 마음의 변화가 구원의 증거이며,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셈이다. 이 말은 곧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생명 사건인 구원이 인간의 심리작용으로 떨어져버렸다는 뜻이다.
사실 박 목사에게 나타나는 이런 심리학적 구원론은 약간 약화된 형태로 기성 교회에도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많은 설교자들이 아주 쉽게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다. 믿습니까?”라고 외친다. 작은 에피소드 한 토막을 소개하자. 5년 전에 판넨베르크 교수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판넨베르크가 참석한 작은 모임에서 아무개 신학교수가 판넨베르크 교수에게 개인적으로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 “박사님, 거듭나셨나요?” 당사자가 일종의 무용담처럼 내게 직접 들려준 실화다. 이런 데서 우리는 한국교회가 구원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개인의 심리적 차원으로 떨어뜨리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평자는 기독교의 구원론과 연관해서 박 목사에게서 발견되는 특징과 문제점들을 위에서 네 가지로 설명했다. 무율법주의, 사죄기도 무용론, 실증주의적 구원론, 심리적 구원론이라는 이 네 가지는 특징은 기본적으로는 구원론의 ‘완전주의’를 그 토대로 한다. 완전한 신앙, 완전한 사죄, 완전한 구원을 향한 갈망이 이런 극단적인 신앙의 옷을 입게 되었다. 그의 속마음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그것이 아닌 걸 어쩌겠나. 기독교 신앙은 이 완전주의를 경계한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적 실존을 이렇게 피력한 적이 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항하여 달려갈 뿐입니다.”(빌 3:13,14). 그는 율법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고전 9:21) 자기 몸을 사정없이 단련한다.(고전 9:27). 마틴 루터도 기독교인의 실존은 ‘simul iustus et peccator’(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보았다. 이 말은 곧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삶과 구원의 현실을 완전주의가 아니라 완전과 불완전의 변증법적 긴장 가운데서 해석한다는 뜻이다.  

“구원이 뭐꼬?”
이 대목에서 내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약간 늘어놓는 걸 용서하시라. 목사 경력 26년째로 접어든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아주 또렷해야 하겠거늘, 평자는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그게 더욱 아득해진다. 예수에 대한 사랑과 인식과 신뢰는 돈독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말과 그의 운명이 이전에 비해 훨씬 사실적으로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세상의 이치가 어느 정도 손에 잡히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구원 자체에 대한 확신은 별로 탄탄해지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믿음이 부족한 탓인가? 이제라도 구원의 확신을 달라고 부르짖어야만 할까?
나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나는 구원 문제에서 믿음이 유일한 근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짝사랑이나 황우석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어떤 계기가 주어지기만 하면 여지없이 합리성을 상실한 열광의 사태 속으로 빠져든다. 기독교의 믿음도 이럴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나 자신의 믿음도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
성서는 이 믿음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가르치고 있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거나,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도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예수는 마지막 때에는 믿는 자를 보기 힘들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고, 중풍병자 사건에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신 적도 있다.(누가 5:20).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을 통한 의와 구원을 가르쳤다.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도 역시 이런 구도와 동일하다. 모두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설교자들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모든 말씀들은 기본적으로 예수라는 대상에 의해서만 그 근거가 확보된다.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의 말하는 믿음도 율법과의 대립적인, 또는 변증법적인 관계 안에서 그 의미를 확보하는 것이지 독립적인 것은 아니다. 구약성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알을 향한 열정도 믿음이라면 믿음이다. 그 대상이 전혀 믿을만하지 않기 때문에 구약성서는 그런 믿음을 악하다고 단죄한다. 평자가 보기에 성서는 어느 한군데에도 인간의 믿음 자체를 독립적으로 높이 평가한 적이 없다. 오히려 바울은 믿음을 상대화한 적도 있었다.(고전 13:2). 오해는 마시라.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믿음은 그것 자체 내부에 존재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게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목회와 설교행위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믿음만 강조했던 분들에게 평자의 주장은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도대체 믿음 말고 무엇을 선포해야한다는 말인가? 설교행위는 청중들을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아직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 안으로 초청하는 것이다. 그 열려있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조금이라도 엿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원 현상을 몇 가지 범주로 제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박 목사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심리적 확신에 매달리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야겠다. 성서가 진술하고 있는 수많은 구원 사건들은 이 세상살이가 다양한 것만큼 다양하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처럼 정치적인 사건으로부터 질병 치유나 위기 극복처럼 개인적인 사건, 그리고 묵시 사상의 새로운 에온 표상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구원의 유형이 구약성서에 등장한다. 예수의 공생애에서도 구원은 매우 다층적이다. 죄의 용서, 병의 치유, 가난한 사람과 우는 사람을 비롯한 소외된 사람들에게 임하는 복, 평화와 기쁨, 자유와 해방 등, 여러 유형의 구원론적 사건과 표상들이 예수에게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모든 구원 표상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그 현실성이 확보된다. 여기서 구원 표상이 다양하다는 말은 구원이 폐쇄된 사건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열려진 사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 종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통치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열린 마음으로 통찰하고 해석하고 참여하고,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현재 우리가 예상하거나 확신하고 있는 그런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고유한 방식으로 최종적인 구원 사건이 일어난다는 그 가능성을 열어놓는 게 기독교 신앙에 훨씬 가까울 것이다.(마 25:31-46 참조).

알레고리칼 성서해석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위에서 평자는 박 목사의 실증주의적 구원론이 결국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행위를 개인의 심리현상 안으로 축소시켰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박 목사도 자신의 그런 주장에 논리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따금 성서의 가르침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일관성이 있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 신앙적 인식론의 토대가 인간의 마음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는 결코 변함이 없다. 아주 드믄 경우이긴 하지만 그가 다음과 같이 성서를 죄 씻음의 준거라고 발언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논의에서 소중한 단서다.

아무리 여러분의 죄가 씻어졌다고 믿어도, 성경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여러분의 생각대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거듭남 44).

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설교하는 박 목사가 성서의 권위를 제기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교회가 성경을 잘못 이해한다고 일갈한 적도 있다(비밀 246). 과연 박 목사 자신은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걸까? 그의 죄사함, 그의 거듭남, 궁극적으로 그의 구원론은 어떤 성서적 근거를 담고 있을까?
박 목사의 성서관은 기본적으로 축자영감설이다. 그는 성서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문자의 차원에서 따르고 있다. 아니 성서를 따른다기보다는 자신의 주관적 신앙경험을 증빙하기 위한 자료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이런 현상들은 한국의 기라성 같은 설교자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일이니까 여기서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부분만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자.
이삭이 장남인 에서가 아니라 둘째인 야곱을 축복한 본문(창 27장)을 박 목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버지 이삭은 하나님의 그림자이며, 리브가는 예수 그리스도, 에서는 율법주의자, 야곱은 예수의 은총을 따르는 사람의 그림자라고 한다.(죄사함, 66 이하, 76). 아마 에서는 기성교회 신자들을 가리키고, 야곱은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리라. 이집트의 감옥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요셉이 파라오의 두 대신인 술 맡은 사람과 떡 맡은 사람의 꿈을 풀이한 대목(창 40장)을 박 목사는 구원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를 알려주는 말씀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술 맡은 자의 꿈에 나오는 포도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파라오는 하나님이고, 떡 맡은 자의 꿈에 나오는 흰떡은 성찬식의 떡이고, 그것을 쪼아 먹은 새는 사단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적용은 전형적인 알레고리칼 해석이다.
그의 알레고리칼 성서 해석이 어디까지 발전하는지 하나의 예만 더 따라가 보자. 누가복음 10장25절 이하에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등장한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치료할 때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맸다. 박 목사는 사마리아 사람이 왜 포도주를 먼저 붓지 않고 나중에 부었는지에 대해서 자기가 깨달은 바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름은 성령을 가리키고, 포도주는 기쁨을 가리키니까 “기름과 포도주를 우리에게 붓는다는 것은 먼저 죄 사함을 받고 나면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고 그 뒤에 기쁨이”(죄사함 240) 따라오는 것이라고 한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짐승에 태웠다는 것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낮은 위치에서 주님이 짐승의 고삐를 잡았다는 의미이다. 급기야 박 목사는 사마리아 사람이 여관 주인에게 수고비로 준 두 데나리온을 예수의 재림과 연결시킨다.

사마리아인이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었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이 하루의 생활비이며 하루의 품삯이었습니다. 두 개는 이틀을 말합니다. 주님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약 2천 년 후에 주님이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죄사함 246).

생명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종교적인 이유로 외면한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달리 순전히 측은지심으로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단순한 언어유희에 근거해서 죄 사함과 재림의 논리적 근거로 해석한다는 것은 박 목사의 성서관이 얼마나 철저하게 주관적인가 하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안의 “구원파”
<기독교사상> 편집부로부터 박 목사의 설교를 다뤄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평자는 즉각 그러자고 대답했다. 평자가 관여하는 연구소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박 목사에 관한 논의가 잠시 불거졌던 차였기에 잘 됐다 싶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그의 설교를 접하면서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에는 언급할만한 내용이 지나치게 빈약했기 때문이다. 오직 죄 사함에만 집중하고 있는 설교에서, 극단적인 알레고리칼 성서해석에 기울어진 설교에서 무엇을 건져낸다는 말인가. 그의 설교는 성서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신학적 토대 없이 단지 개인의 경험에만 치우친 내용들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극단적으로 흘렀을 뿐이지 박 목사의 설교에 노출되어 있는 건강하지 못한 요소들이 우리에게도 쉽게 발견된다는 점에서 그 문제점들을 간추린 것만으로도 이 글쓰기의 소득은 충분한 게 아닐까 한다. 이제 시나브로 글쓰기를 정리하면서 앞에서 지적한 박 목사의 문제점들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감추어져 있는지를 짚겠다. 이것은 곧 우리 안의 “구원파”는 어떤 모습으로 출현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첫째, 박 목사의 무(無)율법주의는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기독교 윤리의 관념화와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외침은 우리에게서 강하게 울려나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인 이 세상에서의 책임은 매우 관념적이며, 따라서 그 실체가 묘연하다. 이라크 전쟁, 남북분단, 경제의 양극화, 생태계의 파괴,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 문제 앞에서 한국교회가 매우 무기력하며, 기껏해야 마지못한 시늉에 머문다는 사실은 복음과 율법의 유기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해체한 박 목사의 무율법주의와 다를 게 별로 없다.
둘째, 박 목사의 사죄기도 무용론은 우리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사죄기도 남용과 맥을 같이 한다. 무용과 남용은 표면적으로 상반된 현상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죄론의 극단화라는 점에서 동일한 병적 현상이다. 한쪽은 죄의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고 있으며, 다른 한쪽은 그것에 숙명적으로 묶여 있다. 전자는 죄 낭만주의이며, 후자는 죄 엄숙주의이다. 양쪽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죄 중심의 기독교 영성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라 할 창조와 생명의 영성을 훼손할 가능성이 높다.  
셋째, 박 목사의 구원 실증주의는 주로 근본주의 신앙에서 나타나는 ‘예수구원, 불신지옥’ 패러다임과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의 배타적인 구원 행위를 극단적으로 정형화하는 것은 여전히 열려있는 미래로부터 신비한 방식으로 다가오는 종말론적 구원 사건과 단절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질병 현상이다. 이런 실증적 구원론의 남발로 한국교회 안에서 구원 개념이 얼마나 진부해졌는지 알만한 분들은 모두 알고 있으리라.  
넷째, 박 목사의 심리적 구원론은 일반교회에서 자주 선포되는 이원론적 ‘영혼구원’과 맥을 같이 한다. 인간의 구원이 영혼뿐인가, 아니면 몸을 포함하는가의 문제, 영혼불멸인가 부활인가의 문제는 여기서 접어두자. 성서는 인간의 영과 몸이 신비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그것의 통전성이 확보되는 경우에만 인간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우리가 아직 영과 몸의 신비로운 관계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지만 그것이 이원론적으로 해체되는 경우에 우리의 모든 현실적인 삶이 파괴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구원론의 타락
박 목사의 설교에 등장하는 비틀린 모습과 한국교회의 왜곡된 모습이 흡사 붕어빵처럼 닮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평자의 기분은 별로 유쾌하지 못하다. 때 묻은 어떤 사람의 얼굴을 씻어주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갔던 그 얼굴에 바로 자신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 어떠하리라는 건 상상이 가지 않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평자는 박 목사에게 연민을 느낀다. 만약 충분한 신학공부가 주어졌다면 박 목사에게는 한국교회를 위해서 크게 공헌할 수 있을 만한 장점들이 적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구령의 열정과 휴머니즘과 인간적인 순수성은 다른 이들에게 비해 월등했다. 평자가 그를 직접 만나보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글과 인터넷을 통해서 느낀 바로는 그렇다. 그러나 지난 40 여년의 역사를 뒤로 돌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소신껏, 혹은 어쩔 수 없이 달려갈 것이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라는 중국 속담처럼 내려오고 싶어도 내려올 수 없는 그런 상황이 그가 처한 오늘의 현실일지 모른다. 이게 바로 평자가 그에게 느끼는 연민의 실체이다.
사태가 이렇게 꼬인 데에는 박 목사를 추종하는 청중들의 책임도 매우 크다. 청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는 설교자로 하여금 근본적인 자기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독(毒)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지금 우리 모두는 그 독을 마시겠다고 안간힘을 쏟는 건 아닐는지. 평자가 보기에 소위 ‘구원파’ 현상은 박 목사라는 한 인격체와 그를 추종하는 청중들이 함께 엮어낸, 씁쓸한 뒷맛을 자아내는 한편의 드라마다. 그는 바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그런 영웅은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일반교회 안에도 적지 않다.
평자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도대체 청중들은 박 목사에게서 무엇을 보고 그렇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는가? 박 목사의 구원론이 일종의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로 작용했다는 게 그 대답이다. 인간이 이 땅의 삶에서 감당해야 할 정신적, 육체적인 긴장과 불안을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단순한 구호로 해결해보려는 박 목사의 설교는 그것이 본인에게 아무리 절실하다 해도 종교적 여흥과 다를 게 없다. 그 여흥은 구원을 실증적으로 확인해보려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이 거둬들인 선악과이며, 그 끝자락에는 일반교회 안에서도 흔하게 발견되는 구원론의 타락이 꿈틀댄다. (기독교 사상 200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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