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파는 행복한 설교자
-서초교회 김석년 목사-
  

설교의 여운
설교는 역시 글보다는 설교 현장에서 직접 들어야 그 맛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필자는 이번에 서초교회 김석년 목사님(이하 ‘김 목사’)의 설교를 대하면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의 손에 들어온 설교집 <하늘 꿈을 이루려는 사람아, 마태복음 강해 1, 2002년, 이하 ‘하늘’),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아, 마태복음 강해 2, 2002년, 이하 ‘세상’), <절망, 그러나 희망, 로마서 강해, 2004년, 이하 ‘희망’)과 이메일로 받은 설교 원고 14편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서초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김 목사의 동영상 설교를 직접 접했을 때의 감동이 달랐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문자로는 불가능한 설교 현장의 역동성이 동영상에서는 여실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김 목사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필자가 보기에 글보다는 말에서, 컴퓨터 앞보다는 설교단에서, 서재보다는 예배당에서 김 목사의 진가가 돋보이는 것 같았다.
김 목사의 설교행위에서 글보다 말이 낫다고 해서 그의 설교문이 조잡하다거나, 거꾸로 그의 말이 현란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김 목사는 말을 썩 잘하는 편에 속하지 않는다. 그의 설교가 전반적으로는 호소력이 있었지만, 때에 따라서 발음이 정확하지 않기도 하고, 설교의 맥이 약간씩 끊기기도 했으며, 어떤 한 구석에 촌티(?)가 난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한 마디로 김 목사는 한국의 설교 명망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세련미가 완벽하게 확보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필자는 그런 설교 명망가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설교의 여운을 김 목사에게서 발견했다. 교언영색으로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만 하는 것이 아니며, 목사의 권위로 신자들을 주눅 들게 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 별난 세상을 살고 있듯이 청중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도 아닌, 때로는 서툴게도 보이는 김 목사의 설교에서 풍기는 이 여운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어느 시인의 노래말이 여기에 해당되는지 모르겠지만 김 목사의 설교에서 김석년이라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는 게 대답이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표현은 그렇게 적당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평범하게 김 목사는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여기서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는 진실, 성실, 지혜, 겸손 같은 의미들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설교와 좋은 사람이라는 게 무슨 상관이 있냐, 더 나아가서 김 목사가 좋은 사람인지 어떻게 아냐, 하고 묻고 싶은 분들이 계실 것이다. 지금 필자는 어떤 한 사람의 인물평을 덕담 차원에서 늘어놓는 게 아니며, 더구나 김 목사의 인격과 신앙과 내면세계를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김 목사의 설교행위에서 그 대목이 유난히 빛나고 있기 때문에 그걸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이 대목은 논리라기보다는 필자의 직관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래도 조금 더 구체적인 용어로 바꿔야겠다. 설교자로서 김 목사가 필자의 눈에 좋은 사람으로 비친 이유는 그가 청중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다는 걸 그의 설교에서 발견했다는 데에 있다. 김 목사의 설교는 신자들이 행복한 삶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1세기를 향한 서초교회의 여섯 비전 중에서 첫 번째가 “영적 행복감을 체험하는 교회”였다는 사실(세상 95)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설교 전반은 바로 신자들의 행복에 토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행복의 문제가 그의 설교에서 얼마나 자주 언급되고 있는지는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다. 한군데만 인용하자.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지만 정작 행복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행복의 길을 알면서도 실제로는 그 행복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하늘 240; 269, 395, 세상 27 참조).

설교자 치고 신자들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김 목사처럼 그렇게 순수하게 그 중심으로부터 그걸 바라는 설교자는 흔하지 않다. 서초교회 신자도 아닌 필자가 그의 설교를 읽고 들으면서, 속된 표현으로 기분 ‘짱’이었다고 한다면 더 긴말 필요 없는 게 아닐까. 이건 행복감을 느꼈다는 의미이다. 남을 행복하게 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행복해야 하는데, 김 목사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목회라고 자처하며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신앙’을 일구는 행복 프로듀서가 되려고 한다.(‘희망’ 앞표지 날개). 그래서 그런지 설교하는 그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가득하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좋은 설교자에게서 복음의 능력이 가득한 설교를 듣고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는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는 부흥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1994년 6월5일 서초동의 한 건물 지하에서 12명의 신자로 시작한 서초교회가 이제 천이백여 명의 교세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게 우연만은 아니다.

실존적 삶의 깊이
설교자가 아무리 청중들의 행복을 추구하고, 복음에 대한 열정이 뜨겁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삶의 깊이에서 체화되지 않으면 청중들의 영혼을 울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건 곧 설교의 진정성과 연관되는 문제이다. 필자가 보기에 김 목사는 자기가 모르는, 혹은 경험하지 못한 내용을 형식적으로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내면세계에서 충분하게 소화된 것을 정직하게 전하는 사람이다. 이 말은 곧 그가 실존적인 차원에서 신자들과 영적인 대화의 통로를 만들어낼 줄 안다는 의미이다. 이런 김 목사의 태도는 굳이 설교에서만이 아니라 삶 전체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김 목사가 40대 중반의 택시 기사와 나누었다는 대화의 한 토막이다.

목사: 휴일에는 무얼 하고 지내세요?
기사: 산에도 가고, 낚시하러 다니기도 합니다.
목사: 약주를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사: 마다하지 않죠. 춤 방이나 노래방도 가고 기분 좋게 마시며 삽니다.
목사: 간혹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으세요?
기사: 사실은 나도 나를 몰라 이러고 사는 것이죠.(하늘 401).

짧은 대화지만 이런 데서 사람들과의 대화를 실존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김 목사의 태도를 알 수 있다. 목사는 늘 그런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마땅히 신앙적인 깊이로 들어가야 할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현실을 우리는 자주 경험한다.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까 터놓고 물어보자. 교회 당회원들이 당회를 끝내거나 아니면 휴식 시간에 죽음과 하나님 나라와 계시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를 보셨는지? 주일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공과공부는 정성껏 준비하지만 자기들끼리 모였을 때 창조와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일들이 있을까? 목사들의 모임에서도 대개는 교회를 성장시킨 무용담이나 임지를 찾는 이야기가 대세를 이루지 종말, 성령, 존재와 인식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풍토는 아니다. 목사와 장로 가정에서는 이런 신앙적 주제들이 분명한 자리를 잡고 있을까? 설교를 하거나 들을 때만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할 뿐이지 일상에서 그런 주제들이 실종된 이유는 믿음의 내용들이 삶에서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이런 점에서 순진할 정도로 정직하게 일상과 신앙, 그리고 설교를 하나로 묶어내고, 그렇게 실제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필자가 보기에 김 목사의 이런 실존적인 깊이는 그가 실제로 겪었던 삶의 현장에서 주어진 게 아닐까 한다. 그의 지난 삶을 필자가 세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설교 중에 얼핏 비친 내용만으로도 어려운 사연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감이 든다. 그는 16살 때 큰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척추카리에스라는 병인데, “허리가 꼽추처럼 구부러지고 아파서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걸고 수술을 받기로 했다. 그는 그때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열여섯 살 나이에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요. 살려 주시면 생명 다하도록 주님의 종이 되겠습니다.”(하늘 327).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서 오늘까지 그런대로 건강하게 살았지만, 지금도 허리에 무리가 가면 아프다고 한다. 평생 육체의 가시를 안고 살았던 사도 바울의 심정을 김 목사는 몸으로 깨닫고 있으리라.
김 목사는 인생의 푸른 시절인 30대를 회색빛의 나라인 독일에서 보냈다. 모르긴 해도 그 당시에도 어려운 경험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신학공부, 아르바이트, 성경공부 지도나 목회, 집안 살림 도우미 등등, 마음고생만이 아니라 실제로 몸 고생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 성격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고, 그리고 몸도 부실한 사람이 그런 상황을 견뎌낸다는 건 보통 인내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다민족 국가인 미국이 아니라 배타적인 게르만 단일 민족 국가인 독일에서 극동의 작은 나라 출신으로 생활한다는 건 그야말로 살벌한 생존투쟁과 다를 게 없다. 그의 설교에서 독일생활이 그렇게 낭만적으로 자주 그려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반증이다.  
어쨌든지 김 목사는 젊었을 때의 고난을 통해서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깊이를 발견했으며, 그런 깊이에서 설교를 끌어가고 있다. 여기서 실존적 경험이 단지 철학적인 사유라기보다는 위에서 말한 대로 삶 자체에서 나왔다는 게 중요하다. 고난과 고통을 뚫고 건져 올린 실존적인 깊이를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실존적 깊이는 삶을 들여다보는 방식이고, 겸손은 그런 삶의 표현방식이다. 이는 곧 김 목사가 실존적으로 자기를 성찰할 줄 알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겸손하게 끌어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의 설교에는 이 겸손이 내재화하고 있다. 자신감 있게 외치는 중에서도,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언급하는 중에서도 그 밑바탕에는 겸손이 깔려 있다. 김 목사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파는 행복한 설교자라고 필자가 느끼게 된 건 바로 이것에 연유한다. 만약 그게 없었다면 그가 단순히 설교 잘하는 사람을 흉내 내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삶을 겸손한 자리에서 깊이 있게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설교는 신자들의 영혼에 바이올린 현의 떨림 같은 공명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신앙의 파토스
실존적인 통찰과 겸손한 인격이 김 목사의 설교를 떠받치고 있는 주춧돌이라고 한다면 시골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알맞은 생김새와 달리 열정적으로 솟아나는 그의 신앙적 파토스는 든든한 기둥이다. 그의 가슴에는 뜨거운 불이 들어 있는 듯하다.

아! 저도 예수처럼 불꽃처럼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불꽃으로 타오르고 싶습니다. 한 마디로 “나의 테마는 사람이요, 나의 프로젝트는 교회”입니다. 사람을 살려내어 교회다운 교회를 이루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제 자신을 불태우고자 합니다.(세상 68).

필자가 보기에 김 목사는 감수성이 매우 예민한 사람이다. 그의 파토스는 이 감수성에 연원하고 있다. 섬세한 감수성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설교에는 시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윤동주, 도종환을 비롯해서 무명의 시인들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예 그의 설교제목이 시처럼 나올 때도 많다. 2005년 1월16일의 설교는 “새소리를 들으며 작은 씨앗을 심어라.”였다. 필자가 섣부른 예측 하나 하자. 김 목사는 은퇴하기 전에 시집을 한 권 낼 것이다. 삶의 아픔을 아는 사람, 그것을 겸손한 인격으로 승화시킨 사람, 예수의 삶에 전율을 느끼는 사람이 시를 쓰지 않는다면 누가 쓰겠는가.
이제 삶과 신앙과 설교, 그리고 목회의 연륜이 깊어진 탓인지 요즘 김 목사는 설교할 때 자주 눈물을 흘린다. 아마 교인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기는 하겠지만 내면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마음대로 주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2005년 11월21일 “기도한대로 되어질 것이오.”라는 설교 앞부분에서 여지없이 눈물을 보였다. 교회 건축이 힘들기 때문이거나 세상살이가 힘들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필자는 김 목사의 눈물에 담긴 진정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전체 인격으로 예수를 만났을 때의 감격이 현재적으로 가슴 벅찬 사람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 진정성은 그가 다음과 같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을 가슴에 새겨두고 있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그 길이 고생이요, 사람이 보기엔 보잘 것 없을지라도 예수를 주로 믿고, 받은바 사명을 위하여 살고, 사명을 완수하다가, 사명을 위해 죽는다면 그야말로 가장 위대한 생애를 산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묘비는 이렇게 쓰이기를 원합니다. ‘사명을 위해 살다가 사명을 위해 죽은 하나님의 사람 여기 누워 부활의 그 아침을 기다리노라.’(하늘 379).

물론 웬만한 목사들도 대충 이런 식으로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김 목사는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거나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신앙적인 시늉을 내는 게 아니다. 그의 가슴은 실제로 이런 정열로 불타고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증명해보라고 필자에게 강요하지는 마시라. 이건 증명이 아니라 신뢰의 차원에 속한 문제이다. 그의 설교를 꼼꼼히 읽고 들은 사람으로서 그의 말에 사심이 없다는 그 신뢰가 바로 그의 이런 진술을 받아들이게 한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정리했기 때문에 이제 필자는 김 목사의 설교에 대한 논평을 더 이상 진행시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설교자가 실존적 깊이에서 겸손한 태도로 신앙적 파토스를 갖고 설교한다는 사실 이외에 우리가 한 설교자에게 더 이상 요구할 게 무엇인가? 그러나 필자는 행복 지향적인 김 목사의 설교가 빛을 발하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대목을 짚지 않을 수 없다. 김 목사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청중과의 호흡을 매우 정교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언어구사의 순발력
김 목사의 신앙은 여기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성결교회의 전통에 근거한 보수적인 색깔을 보인다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 형식은 진보를 추구한다.(하늘 321). 진보라기보다는 현대적, 또는 과학적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말씀을 전달하는 방식에서도 그런 진보성, 현대성, 과학적 태도를 유지한다. 김 목사의 설교행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언어구사의 순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우선 그는 종교적인 언어와 일상적인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용어를 음미해보시라. 전술 바로 배우기(하늘 410), 예수 농도 100%(세상 62), 미성숙의 참화(희망 67), 제로 포인트(희망 97). 또 하나의 다른 특징은 언어유희이다. ‘미인대칭’은 ‘미소짓고, 인사하고, 대화하고, 칭찬하는’ 것이라고 한다.(“상처, 별이 되라”). 영어를 통한 언어유희도 흔하게 등장한다. 겸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something-nothing, nothing-everything”이라는 대구방식의 영어표현을 제시함으로써 젊은 신자들의 생각 안으로 파고들 줄 안다. 대강절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재미있게 표현했다.

그래서 대강절은 이 사랑을 새롭게 회복하는 절기입니다. 불 꺼진 창문에 불을 밝히면서 간절히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5W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With Jesus, With Holiness, With Family, With Neighbor, With Mission. (“사랑 때문에”)

필자는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논술고사를 앞둔 학생들에게 글쓰는 요령을 가르치는 ‘족집게 과외선생’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성서의 메시지를 수용자 입장에서 이해하기 좋도록 정형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설교에는 요점정리식 발언이 자주 나온다. “예배성공이 신앙성공이고, 신앙성공이 인생성공이다.”(신앙인이 가야 하는 길, 2005년 7월3일 설교). “신앙생활의 행복은 세 가지를 누리는 것입니다. 관계의 평안을 누려라. 기도 응답의 은혜를 누려라! 고난 중에 영광을 누려라!”(희망 119). 물론 이런 방식의 설교가 빠져들 함정이 없지 않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늘 사지선다 형의 객관식 문제에 길들어지듯이 신자들이 스스로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고 목사로부터 대답을 바라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요점정리식의 신앙훈련이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바른 방향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효과적인 방법으로 기능할 것이다. 신학적으로 중심이 잡혀 있고, 나름으로 개혁적이며, 역사의식이 살아있는 김 목사에게 이 방법은 좋은 쪽으로 작용하리라 본다.
메시지 전달 방법에서 김 목사에게 두드러진 또 하나의 다른 부분은 예화 적용이다. 아시시의 프란시스(희망 83), 토마스 아 켐피스(희망 85), 에크하르트(하늘 415) 같은 영성의 대가들로부터 시작해서 간디, 링컨, 록펠러, 톨스토이, 베르디, 칼빈, 바르트, 본훼퍼, 부버, 하이덱거, 심지어 최근에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있는 <연금술사>의 저자 파울로 코엘료까지(“인생의 연금술을 배워라”) 등장한다. 단지 예화집 참고나 인터넷 서핑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그의 예화 사용과 그 적재적소성은 바로 그의 책읽기와 설교 준비의 성실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화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가 청중과 같은 템포로 호흡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김 목사의 메시지에 순발력이 작동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회과학 담론 줄이기
이 글쓰기를 끝내기 전에 만약 필자가 서초교회 신자라고 한다면 김 목사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하는 점을 생각해보았다. 어쩌다가 자기가 듣고 싶을 때 한번 듣는 게 아니라 매주일 최소한 한번, 또는 서너 번씩 그의 설교를 반복해서 들어야 할 입장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아쉬운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순전히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이제 그걸 한번 짚어야겠다.
필자가 보기에 김 목사는 사회과학적 담론을 좀 줄여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의 설교에는 심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분석에 쏠리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단적으로 그의 설교가 그런 것에 관한 논의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흔하다. 로마서 강해인 <절망, 그러나 희망>의 첫 설교 “오늘 이 시대가 찾는 사람”(롬 1:1-7)에서 김 목사는 사회 교육가이자 변호사인 켄트 키스 박사의 <역설적인 지도자의 십계명>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성숙한 신앙인의 자화상”(롬 2:17-29)에서는 네온 사울이라는 심리학자의 <정서적 성숙>이라는 책에 나온 성숙한 인간의 생활양식 8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확실한 성공 비결”(롬 4:18-25)에는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다니엘 골만의 감성지수에 관한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다. 그 이외에도 일종의 사회과학적 담론이라 할 이런 이야깃거리들이 그의 설교에 전천후로 제시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다양한 예화들도 사실은 이런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과학적 담론이 김 목사의 설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현상은 곧 김 목사의 설교가 과학적이고 분석적이라는 사실의 한 증빙일 뿐만 아니라 성서 텍스트를 구체적인 현실의 삶에서 풀어내려는 김 목사의 기본 발상에서 나온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설교는 인간학이 아니라 신학에 토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의 과도한 채용은 없느니만 못할 경우가 많다. 그의 설교에서 사회과학은 다른 설교자들이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현대적이고 선진적인데 반해서 신학적 착상의 심화는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설교는 분명히 사회과학의 과부하(過負荷)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김 목사가 이런 자료를 찾기 위해서 시간을 지나치게 많이 소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까지 든다. 필자의 판단에 따르면 설교자에게는 사회과학적 정보보다는 신학적 착상이 훨씬 중요하다.
여기서 신학적 착상이라는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설교자가 현대신학의 사조에 민감해야 한다거나 설교가 현학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설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야 한다는 말이다. 신비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그 하나님의 계시는 이미 굳어진 체계(도그마)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말까지 열려져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구도정진의 태도로 그것을 포착할 수 있도록 자신의 영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이것이 곧 신학적 착상의 심화과정이다. 설교에서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청중들이 사회심리학적인 정보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성의 심화를 위해서 교회에 나오고 설교를 듣는다는 데에 있다. 더구나 김 목사가 제공하는 그런 사회과학적 정보는 약간의 책읽기가 준비된 평신도들이라고 한다면 대충 알고 있는 것들이다. 설령 평신도들이 세상살이에 바빠서 그런 정보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설교는 그것보다 훨씬 근원적인 것을 제시하는 작업으로 자리매김 되어야한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는 성서 텍스트 자체와의 씨름에 훨씬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할 것이다.
김 목사가 사회과학적 담론에 심취해 있다는 것은 그가 설교 테크닉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런 탓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설교 중에 청중들에게 ‘따라 하기’를 자주 요구한다. 이런 설교 행태는 다른 대중적인 설교자들에게서 흔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설교의 요점을 청중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또는 설교의 긴장감이 떨어질 때 ‘따라 하기’를 통해서 다시 집중력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효과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테크닉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제한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김 목사에게는 이런 것들이 남발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런 테크닉이 지양되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설교는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한글 읽는 연습을 시키는 게 아니라 생명의 영인 성령이 자유롭게 청중 개인을 만날 수 있도록 그 영적인 소통의 오솔길을 열어주는 행위이다. 예컨대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는 명제가 설교의 주제로 등장했다고 하자.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이 명제를 반복해서 따라 외치게 하겠지만, 설교자는 기도와 전도의 영적인 의미를 심층적으로 해명하는 데 승부를 건다.
둘째, 설교 전달의 효과라는 차원에서도 역시 이런 따라 하기는 별로 추천할 만하지 않다. 여기 사과가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사과가 맛있는 이유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 사과의 맛을 마음속으로 즐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사과를 설명한 그 사람이 느닷없이 “저를 따라해 보세요. ‘사과는 맛있다!’”라고 한다면 그 맛에 취해있던 사람들의 흥은 그 즉시 깨지고 말 것이다.
아마 김 목사는 이런 방식으로 신자들이 은혜 받는다는 걸 경험적으로 체득했는지 모른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경공부 시간이 아니라 주일공동예배의 설교 시간이라고 한다면 설교자는 이런 요령을 일체 접어두고 오직 성서 텍스트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 결과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책임지신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성령론적 설교이다. 필자가 보기에 ‘따라 하기’와 같은 테크닉을 과감하게 줄인다면 앞에서 언급한 김 목사의 장점이 훨씬 빛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글이 김 목사의 설교를 정확하게 짚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기껏 몇 권의 설교집과 인터넷을 통한 설교 열편 정도로 한 설교자의 진면목을 어떻게 몽땅 포착해낼 수 있단 말인가? 다만 필자는 김 목사의 설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가능한대로 편견 없이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했을 따름이다. 예민한 감수성과 겸손한 인격과 뜨거운 파토스라는 삼위일체의 구도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김 목사가 서초교회 신자들만이 아니라 성결교회와 나아가 한국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행복을 파는 행복한 설교자”로 기억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성결교회 교단지 '활천' 200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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