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 설교의 빛과 그림자
-동대전성결교회 허상봉 목사-

설교의 세련미
동대전교회 허상봉 목사님(이하 ‘허 목사’)의 설교하는 모습에서 필자가 받은 전체적인 인상은 우선 동영상에 잡힌 그의 외모가 청중들에게 신뢰감을 준다는 사실이었다. 서글서글한 그의 얼굴이 청중들에게 친근감과 신뢰감을 주기에 ‘딱’이었다. 생면부지인 필자에게도 그는 왠지 좋고 옳은 말만 할 것 같았으며, 따라서 그의 설교에는 무언가 진정성이 담겨 있을 것 같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는 전반적으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아무 것도 거칠 게 없다는 듯이 청중들을 복음의 세계로 끌어가는 그의 설교에는 흡사 밀림 속을 헤쳐 나가는 노련한 탐험가의 힘이 엿보였다. 이러한 자신감은 자칫 상대방의 기를 압박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지만, 허 목사에게는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면적으로 겸손한 사람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그런 묘한 ‘겸손한 자신감’이 그의 설교 행위에서 솟아난다는 게 신기했다. 그를 직접적으로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필자가 단정적으로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의 시련을 통해서 얻은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복음전도의 열정, 그리고 기본적으로 겸손한 인격이 서로 맞물려 이런 허 목사만의 독특한 캐릭터가 형성된 게 아닐까 생각된다.
호감이 가는 인상과 겸손한 자신감이 한데 어우러진 허 목사의 설교는 필자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곧 설교에서 세련미를 맛보았다는 뜻인데,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겠다. 이것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시각적인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청각적인 부분이다.
우선 시각적인 부분에서 볼 때, 그의 설교하는 태도는 전체적으로 안정적이기 때문에 청중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간다. 그는 시선을 한 군데에 고정시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중이 불안하게 할 정도로 자주 바꾸지도 않는다. 설교자의 시선이 안정적이라는 건 청중들로 하여금 말씀을 편안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그의 얼굴표정도 역시 안정적이다. 어색하지도 않고, 헤픈 웃음으로 흩어지지도 않고, 변화가 심하지도 않으며, 전체적으로 단호하면서도 부드럽다. 시선과 표정이 안정적일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 설교자의 태도에서 훨씬 중요한 전체적인 몸가짐이 매우 안정적이라는 사실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설교하는 과정에서 자기감정에 도취되어 쓸데없이 손을 흔들어대는데, 허 목사에게는 그런 일이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결혼식장의 주례자처럼 그냥 점잖게만 서 있는 게 아니라 필요적절하게 움직일 줄도 안다. 이런 건 억지로 배우거나 남 흉내를 내서 되는 게 아니다. 속되게 말하면 ‘끼’를 타고나야 하며, 신앙적인 용어로 ‘영’에 온전히 감동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청각적인 관점에서 볼 때, 허 목사의 스피치는 놀라울 정도로 호소력이 있었다. 필자는 강단에서 이렇게 말을 멋있게, 맛있게 잘하는 설교자가 또 있을까 하고 놀랐다. 이건 단지 그의 입담이 좋다는 뜻만이 아니다. 대중적인 설교자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그런 전형적인 입담이 아니라 훨씬 고급의 스피치 능력이 그의 설교에서 발견되었다. 우선 발음에 흐트러짐이 전혀 없었다. 좋은 목소리를 갖고 태어났다는 건 그렇다 하고, 한 문장을 발음하는데 어느 한 순간에도 쓸데없는 소리가 나지 않다는 건 아나운서나 연극배우처럼 고도의 스피치 훈련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필자의 설교에는 잡소리가 적지 않게 나온다. 예컨대 ‘음 -’, ‘에 -’ 하거나 ‘그러니까’를 반복하고, 또는 약간 더듬거릴 때도 있다. 그런데 허 목사의 설교는 라디오 뉴스나 성악가의 가곡처럼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의 스피치는 단순히 깨끗한 발음에만 그 특징이 있는 건 아니다. 한편의 설교에서 여러 색깔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건 그의 스피치가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섰다는 증거이다. 스피치의 강과 약, 빠름과 느림, 높음과 낮음, 밈과 당김, 조임과 품, 강요와 설득, 호소와 속삭임이 그의 설교에서 흡사 무림고수의 칼솜씨처럼 현란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정도의 스피치 능력을 갖춘 설교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설교 전달에 관심이 있는 신학생과 젊은 목사들은 허 목사에게 배울 게 적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그런 요소만이 아니라 허 목사의 언어구사력도 아주 뛰어났다. 허 목사는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능력이 특출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내용을 전하더라도 그것을 어떤 언어로 구성하는가에 따라서 전달 효과의 강도가 달라지듯이 허 목사는 말을 맛있게 만들어 전달할 줄 아는 설교자이다. 그의 설교가 전반적으로 물 흐르듯이 앞으로 나가는 이유도 바로 이런 언어구사력에 있다. 2006년 3월26일 설교에서 한 대목을 인용하겠다.

배움은 축복을 받는 시발점입니다. 동터오는 새벽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여 놓으신 축복의 향연에 믿음으로 발걸음을 옮겨, 새벽이슬의 은혜를 기대하며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새날을 열어보십시오.  

한 설교자가 한 가지의 능력을 보이기도 쉽지 않는데, 허 목사는 설교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볼 때 거의 모든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감칠맛 나는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누구에게나 한 수 배우라고 추천할 만큼 탁월한 스피치 능력을 갖춘 허 목사의 설교에 그에 상응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해야겠다.      

긍정적인 설교
필자가 허 목사로부터 건네받은 설교 15편의 제목과 본문은 다음과 같다. 주로 2005년과 2006년의 주일에 행한 설교인데, 순서 없이 소개하겠다. 1)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2-9). 2) 최선의 삶을 위한 믿음(민 13:30-14:10). 3)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창 21:1-7). 4) 고난의 역사를 가르치라!(신 25:17-19). 5)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막 16:17-20). 6) 믿음의 후손이 받을 축복(신 1:5-11). 7)우리의 생활에 풍성함을 주시는 하나님(신 8:6-10). 8) 건전한 믿음과 신뢰의 고백(시 73:23-28). 9) 어머니의 기도(삼상 1:20-28). 10)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고전 1:4-9). 11) 영혼의 도성을 지키라!(잠 4:20-27). 12) 훌륭한 인생을 가늠하는 척도(잠 22:6). 13) 상급 받는 인생(고후 5:8-10). 14)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레 1:1,2, 요 4:23,24). 15) 기적을 경험하는 영성(시 143:7,8, 46:1-7).
위에 제시된 15편의 설교 제목에서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듯이 그의 설교는 주로 신자들의 풍성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허 목사는 2005년 5월15일 설교 “네가 낫고자 하느냐?”에서 설교 후 기도를 한 문장으로 끝냈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들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세련된 기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허 목사는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의 신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온 영혼을 기울여 설교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대전교회의 홈페이지에서 확인 바로는 금년 1월1일부터 5월14일 주일까지 허 목사가 선택한 설교 본문 스무 곳 중에서 열두 편이 구약이었다는 사실은 바로 그가 구약의 축복을 설교의 중심 주제로 삼는다는 간접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필자는 여기서 그가 이 축복 문제를 설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주제로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는 길게 끌지 않겠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영혼과 실제 삶을 귀하게 생각하는 설교자치고 축복을 설교하지 않는 설교자가 없으며, 특히 오늘날은 이런 주제가 거의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신 허 목사의 축복 설교가 다른 설교들과 구별될만한 요소가 있는가, 하는 점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허 목사의 축복지향 설교가 다른 이들의 이런 설교와 구분되는 요소는 축복을 무조건 기복적으로 선포하기보다는 신자들의 긍정적인 삶의 태도와 밀접하게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위에서 필자가 허 목사의 설교를 자신감과 연결시켰는데, 그 자신감이 바로 허 목사가 설교를 통해서 신자들에게도 요청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허 목사는 청중들을 끊임없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신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2005년 7월17일 설교 “최선의 삶을 위한 믿음”은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고민하던 후배에게 조언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그는 후배에게 기도할 것과 학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 등, 몇 가지 구체적인 준비를 제안했는데, 그 뒤로 그 후배는 대학교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허 목사는 그 대목을 이렇게 정리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긍정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희망적인 생각과 진취적인 용기와 슬기로움으로 세상을 도전하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앞으로의 인생이 새로워지기를 기대하며, 지금보다 희망적인 생각을 품고 긍정적인 인생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위의 인용문은 허 목사의 설교에서 가장 자주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인 진술이다. 그가 어떤 성서 텍스트로 설교를 하든지 하나님 안에서 삶을 긍정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그 중심축으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이런 설교의 기조는 기본적으로 ‘긍정의 힘’에 대한 신뢰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은 현재 자신의 처지가 어떻든지 상관없이 삶을 긍정할 수 있고,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허 목사는 가정생활에서도 자녀들과 아내에게 ‘하지마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고, ‘하라’는 말만 할 정도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불안한 삶의 실존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자신의 삶을 크게 긍정해야 한다는 허 목사의 주장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의 설교가 저변에 깔고 있듯이 성서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마 동대전교회 신자들은 이런 설교에서 실제적으로 큰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이런 특징이 곧 긍정적 설교의 ‘빛’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
그런데 그의 설교에 심취해서 설교 텍스트를 읽고, 동영상으로 시청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에 근거한 긍정적인 삶의 태도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배웠지만, 과연 그것이 설교자가 가장 큰 관심을 보여야할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일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필자는 축복 일원론적 사고방식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에 치우치기보다는 불행한 삶과 소극적인 사고방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담아낼 수 있는 변증법적 삶의 태도가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 가깝다고 보기에 하는 말이다. 일례로,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일체의 좋은 조건들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빌 3:8) 하지 않았는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삶에서 자신감을 회복하게 하는 설교가 무슨 문제라고 그렇게 시비를 거는가, 하고 걱정하실 분이 있을 것이다. 오해는 마시라. 필자는 그리스도인이 열등감, 자책, 자학에 빠지는 걸 좋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며, 더구나 도사 연하면서 ‘가난의 미학’을 읊조리는 것도 아니다. 자발적 가난을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삶으로 제시하는 분들도 있지만 필자는 그런 삶의 실천을 도저히 따라갈 자신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필자의 관심은 소위 청부론이나 청빈론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리자는 것이라기보다는 설교자가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허 목사도 여기에 연관된 사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2006년 4월2일 설교 “우리의 생활에 풍성함을 주시는 하나님”에서 그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번영을 주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정열적으로 선포했다. 베니 힌 목사의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적으로 복 받는 길을 따라가십시오.”라는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물질적인 축복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 설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단서를 붙였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부요함이 믿음의 핵심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핍절함이 없는 생활을 하기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셨습니다. 먹지 못한 쓴물을 마실 수 있는 단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셨습니다.

여기서 허 목사는 분명히 “물질적인 부요함이 믿음의 핵심은 아니지만”이라고 진술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축복을 선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까지 원하셨다는 데에 놓여 있다. 그가 자주 인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물질적인 축복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훨씬 진지한 신학적인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깊이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 필자의 생각에 성서 기자들이 비록 그 당시에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지만, 그런 진술의 핵심은 외면적인 축복이 아니라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통치였다. 자신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역사 안으로 개입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구원론적 통치에 대한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홍해사건,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전쟁 승리가 보도되었다는 말이다. 백번 양보해서 구약성서가 물질적인 축복을 명시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허 목사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본질은 아니다.
필자의 생각에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축복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축복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그런 주장 자체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사람들이다. 성서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원래 그것을 가르친다. 예컨대 구약의 예언자들이 풍년과 후손번식을 약속한 가나안의 바알 신앙을 우상숭배로 규정한 이유는 바알 신앙이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했다는 데에 놓여 있다. 예언자들은 인간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물적인 토대를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계산방식을 훨씬 뛰어넘는 방식으로 우리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자신들의 운명과 미래를 맡기는 신앙을 가르쳤다. 돈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거나,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을 추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완성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볼 때 설교가 늘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만 묶어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목사들도 기도와 말씀묵상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가족도 돌보고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듯이 설교도 역시 물질적인 축복을 주제로 삼을 수는 있다. 또한 목회가 구체적인 인간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목회 현장에서 요청되는 물질축복과 건강, 사업 확장 같은 요소를 외면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고 한다면 더 이상 그런 요소들이 설교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케리그마에 중심을 두어야 할 주일공동예배에서는 더욱 그렇다. 스스로 믿음의 핵심이 아니라고 말한 그것을 설교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곧 허 목사에게서 나타나는 긍정적 설교의 ‘그림자’이다.

“영성은 뭐꼬?”
필자의 생각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특권으로 주어진 출세와 풍요야말로(2005년 6월25일) 설교의 중심 주제로 부각되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온갖 어려움을 딛고 부자가 된 그리스도인들, 불치의 병을 신유의 은총으로 극복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에 근거한 영적인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는 이런 정도로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누가 옳고 그름은 접어두고라도, 패러다임 쉬프트는 혁명적인 방식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간접적인 논의로 이 글쓰기의 방향을 트는 게 좋겠다. 어떤 입장에 섰든지 설교와 신앙에서 공통의 토대가 “영성은 뭐꼬?”에 놓여 있다는 사실만은 인정할 것이다.  
21세기 한국 그리스도교의 화두라 할 ‘영성’(spirituality)은 바람, 또는 영으로 번역될 수 있는 히브리어 ‘루아흐’와 헬라어 ‘프뉴마’와 관계가 있다. 영성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존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삶에 대한 전반적인 경험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앨리스터 맥그레쓰는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진정으로 의미 있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대한 탐구이며,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개념들을 함께 묶어주어 삶과 연관시키는 것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범위와 규범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총체적인 경험이다.”(Alister E. McGrath, 기독교 영성 베이직, 대한기독교서회, 15쪽) 이런 논의는 자칫 현학적으로 흐를 염려가 있으니까 그냥 핵심적으로만 말하자. 루아흐와 프뉴마는 기본적으로 ‘생명의 영’이다. 따라서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인 생명의 현실과 그것의 신비에 눈을 뜬 사람들이며, 그것을 일상에서 누리는 사람들이다.
필자는 내 영혼의 심층을 자극하고 풍요롭게 하는 그런 설교를 듣고 싶다. 오직 하나님이 통치하는 그런 생명의 신비로 이끌어주는 설교에 목이 마르다. 이런 은혜가 물질적인 축복과 건강과 번영에 쏠려 있는 설교로는 불가능한 게 아닐는지. 물론 쪽방에서 살던 사람이 큰 집으로 이사하는 것, 비정규직 노동자가 고위 관리직으로 승진하는 것도 이런 생명의 깊이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이런 삶의 조건을 바꿔나가는 것들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오늘의 이데올로기가 이미 제공해 주었거나, 아니면 약속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삶의 조건을 바꿔나가는 것으로 인간의 삶이 영적으로 심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서의 가르침 이전에, 이미 오늘의 문명사회에서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통치로 인한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선포해야 할 설교자들이 이런 경제적 이념의 전도자로 머물러 있다는 건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그리스도교 본질에 대한 안이한 태도에 의한 귀결이다.
안타깝지만 오늘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며 토대인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삼는 설교자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교회에도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세계 ‘교회성장’ 운동의 지도자인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의 아래와 같은 진술을 들어보자.

그리스도인이 된 지 30년인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를 왜 그렇게 듣지 못했는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을 읽으면 그에 대한 말씀이 분명 많이 나온다. ... 그러나 이제껏 내가 거쳤던 목사들 가운데 실제 하나님 나라를 설교한 사람은 솔직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 자신의 설교 노트를 들춰보니 나 역시 거기에 대해 설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Dallas Willard, 하나님의 모략, 100 쪽에서 재인용)

십자가와 부활로 돌아가자!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예수님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중심에 자리하지 못하는 설교는 곧 그리스도교 영성을 상실한 것이며, 거기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다스리는 생명의 신비가 열리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영성과 생명의 신비의 연관성은 우리 설교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의 단초라 할 그리스도론의 요체를 간단하게나마 해명하는 게 좋겠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본질은 우리가 매주일 공동의 신앙고백으로 드리는 사도신경에 명시적으로 진술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 생명의 토대로 삼는 태도이다. 여기서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의 완전한 실패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리꼈고, 헬라인들은 미련한 것으로 간주했다는(고전 1:23)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인간 삶의 완전한 실패였던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이제 하나님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단 한번뿐이었던 부활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는다. 바로 이것이, 즉 인간적인 실패와 하나님의 승리라는 엄정한 사실이 곧 그리스도교 신앙의 패러독스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론의 요체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그 어떤 인간적인 실패도 더 이상 완전한 실패로 끝나지 않게 되었다.”는 판넨베르크의 진술은 옳다. 만약 십자가와 부활의 이러한 신학적인 의미를 실제적으로 알고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더 이상 물질축복과 유사한 것들을 설교의 중심으로 삼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생명형식과 질적으로 다른 생명사건이기 때문이다. 그 부활생명은 공산주의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닌, 혁명도 아니고 수구도 아닌, 진보도 아니고 개량도 아닌, 오직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구원행위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발생하는 부활생명에 집중하도록 청중들을 이끌어가야 할 설교 행위는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듯한 ‘기다림의 영성’에 중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교회력이 대림절로 시작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또한 칭의의 영성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업적과 성취와 성공을 통한 의로움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통한 의로움에 우리가 철저하게 의존하는 삶을 가리킨다.
물론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의 설교 현장에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주제는 한 두 번의 설교로 끝날 뿐이다. 그건 엄청난 착각이며 오해이다. 이 주제는 우리가 평생 설교해도 끝나지 않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이다. 생명의 완성인 종말과 그것의 선취인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그 사이의 역사에서 살아가는 인간 삶의 심층을 성서 텍스트 안에서 풀어낼 수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자신의 전체 존재를 여기에 던질 것이다. 그것 말고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필자는 잘 모르겠다. 설교자는 재(財)태크나 행복론을 외치는 교양강좌 강사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운명과 사건이, 왜 약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은폐의 방식으로 현재화하는 궁극적인 생명의 토대인가를 해명하는 데 모든 걸 걸어둔 구도자 아닌가!
사족으로 한 마디, 십자가와 부활의 영성에 근거하는 한 우리의 목회에서 실패는 없다.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질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판단하는 목회의 실패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니며, 거꾸로 목회의 성공이 반드시 성공도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극복한 궁극적 생명 사건인 부활은 이런 인간의 실패와 성공이라는 범주를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극복하고, 초월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주장은 오직 한 가지이다. 십자가의 신학, 부활의 신학으로 돌아가자! 그것은 곧 고난의 영성이며, 희망의 영성이다. 그것은 곧 역사적 영성이며, 영광의 영성이다.
지면의 한계로 인해서 설교자로서 허 목사의 좋은 점들을 충분하게 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쉽게 생각한다. 예컨대 그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상식을 벗어나지 않으며, 선정적인 예화로 신자들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는 청중들에게 감성적으로 어필하려고 애를 쓰지도 않는다. 공연히 눈물을 보이거나 공연한 재담에 한눈팔지도 않고, 물 흐르듯이 진실한 태도로 청중들에게 호소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신자들을 열광주의로 몰아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필자에게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앞으로 허 목사에게 설교자로서의 좋은 점들이 더욱 빛날 날을 기대하며, 말씀선포의 길에 도반(道伴)으로 나선 우리 모두에게도 역시 진리의 영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린다. (활천 200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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