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최영기 목사님의 반론입니다. 당사자께서 관심을 갖고 반론을 제시하신 분은 처음입니다. 최 목사님에게 중심으로 감사드리고, 먼 이국 땅에서의 사역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정용섭 주)

정용섭 교수님, 제 설교 비평 감사드립니다. 잘 하는 설교도 아닌데 꼼꼼히 읽어주시고, 상세한 평가까지 해주셔서 송구스러웠습니다. 설교자의 인격을 문제 삼지도 않았고, 설교를 무조건 폄하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고마웠습니다.

설교를 한다고 하면서 성경 구절을 빌어서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정당화하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대신에 교양 강좌를 제공하기 쉬운 이 시대에, 이런 위험을 경고하는 정용섭 교수님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제 설교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제가 설교자인 자신을 하나님의 스피커로만 생각하고,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전하는 것을 설교 목적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 교수님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제가 생활적용에 집중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설교를 정 교수님은 ‘큐티 식 설교’라고 부르셨습니다.

생활 적용 중심의 설교가 좋다 나쁘다 를 갖고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 교수님 설교 비평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제가 왜 적용 중심의 설교를 하는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주일 설교 시간은 한정되어있습니다. 설교 본문과 적용을 둘 다 말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물론 한 주일에 서너 절만 상고하면 되겠지만, 저는 우리 교인들이 성경 전체를 통해 균형 잡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1-5장 씩 많이 잡고 금요일에 있는 가정 교회 모임에서 성경 본문을 공부하고, 주일 설교 시에 설교를 통하여 생활 적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참고로, 저희 교회에서는 금요일 성경 공부 외에 화요일에 성경 공부 클래스를 여러 개 제공하여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수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 교수님은 설교 시간에는 본문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만 선포하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자동적으로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온다고 믿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경험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기 전에는, 교인들의 성경 지식은 증가할지 몰라도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예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하고,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서신 전반에서는 영적인 진리를 말하고, 후반에서는 생활 적용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제가 성경의 오묘한 진리에서 너무나도 일상적인 (어쩌면 본문과 상관도 없는) 적용을 뽑아낸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삶의 적용이 너무 일상적이지 않은가는 생각을 종종 해 봅니다. 그러나 온전한 설교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만, 설교자는 이런 목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만을 위하여 설교를 합니다. 교회 홈페이지에 영상 설교를 올리지 않는 이유도, 우리 교인들을 위한 설교를 다른 교인들이 듣는 것이 탐탁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설교 대상은 휴스턴에서 언어 소통의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이런 저런 다양한 문제를 안고, 힘겹게 사는 한인 성도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다음 주일 세상에 나가 하나님을 뜻을 받들어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일상적인 생활 적용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저는 예수를 아직 안 믿거나 새로 믿는 분들을 위하여 설교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매주일 3-4명의 불신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지식적인 하나님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 가운데에 체험되는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옳다는 것도 아니고, 제가 잘하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제가 왜 적용 중심의 설교를 하는지 이유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정 교수님의 비평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는 의도에서 정 교수님이 설교 비평을 할 때에 어떤 잣대를 갖고 재시는지를 나름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정 교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대해 신비감이라고 할 정도의 강한 경외심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극히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묘하심에 심취하다 보니까 복음에 대해 자신감이 있어 보이거나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정 교수님은 릭 워렌 목사님 설교를 비평하시면서 이렇게까지 쓰셨습니다. “워렌 목사의 이런 넘치는 확신 앞에서 나는 주눅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이 세상과 하나님에 관해서 모르는 게 훨씬 많아진다는 사실이, 또한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의 몇 가지 종교적 규범과 명제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는 사실이 나에게 더욱 확연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워렌 목사가 나를 향해서 “당신, 오늘밤에 죽으면 천국에 갈 것으로 확신하시오?”하고 묻는다면, 나는 십중팔구 우물쭈물할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오하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애매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 못 할 심오한 부분도 있지만, 우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설교자가 확신과 자신을 갖고 선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또 정 목사님은 성경이 쓰인 시대와 상황이 현재와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의견에도 원칙적으로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조직 신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순한 구절에 심오한 진리가 숨어있을 수 있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번역판을 잘 선택하고, 당시 시대적인 상황만 이해하면, 성령님의 조명에 의하여 보통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직 신학을, 그것도 깊게 공부한 사람만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성경 해석권이 교회와 사제에게만 있다고 주장했던 종교 개혁 대상이었던 구교 사제들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 목사님은 또한 설교 시간에 본문 해석을 말하지 않으면 가치 없는 설교로 치부해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과의 씨름은 설교자들이 설교 준비 과정에서 하는 것이고, 주어진 짧은 설교 시간에 이런 해석 과정을 항상 청중과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에 해석 부분이 끼어있지 않으면 무조건 설교답지 않은 설교라고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은 경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착각을 경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면 좋은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반대로 예수를 믿거나 삶이 변하는 역사가 없으면 바른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이며 설교자인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궁극적으로는 사역의 열매로 평가받을 것입니다.

“(고전 3: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그리스도]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위 성경 구절도 잘못된 인용이라고 지적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

말을 맺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되기를 소원하는 정 교수님의 의도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런 선한 의도를 갖고 계속 설교 비평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성도도 설교자들도, 의식도 못하는 새에 세속화에 빠져들기 쉬운 이때에 (저 자신도 물론 그 대상입니다) 정 교수님 같은 분의 경고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어떻게 하면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여 성도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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