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 설교와 미몽의 길  
-신촌성결교회 이정익 목사-

평범의 미학

신촌성결교회 이정익 목사님(이하 ‘이 목사’)의 설교 장면을 인터넷으로 처음 대했을 때 평자는 대도시 중대형 교회의 설교자치고는 지나치게 평범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충청도 사투리가 여전히 살아있는 그의 어투는 청중들의 영혼을 한 손에 쥐락펴락하는 웅변가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몸동작도 그렇게 유별나지 않았으며, 청중들의 종교적 관심을 끌기 위해서 기복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거나 불치병이 순식간에 치료되었다는 식의 화끈한 이야기에 치우치는 일도 없었다. 신자들의 죄책감을 도에 넘치게 자극한다거나 끈끈한 감정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신비한 체험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고, 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당을 짓자는 말로 신자들을 선동하는 법도 없다. 청중들의 눈물을 짜내거나 헤픈 웃음보따리를 늘어놓는다거나, 무언가 속 시원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애를 쓰지도 않는다. 아멘과 할렐루야, 또는 “믿습니까?”라든지 “축복합니다!”는 멘트의 남발도 없다. 그는 대중설교자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그런 특징 없이 아주 평범하게 설교를 끌어 나갔다. 청중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하는가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의 설교는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목사가 성결교회에서 가장 성공적인 목회자일 뿐만 아니라 성결교회를 대표하는 설교자로 손꼽히고 있다는 건 무얼 의미할까? 작년 12월10일 한국조직신학회가 선정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9인 설교자에 이 목사가 포함되었다는 건 목회자와 설교자로서 그의 위상이 뚜렷하다는 증거이다. 평범하지만 그 내면에 비범한 힘을 확보하고 있는 이런 설교의 특징을 평자는 ‘평범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 피력한 적이 있다.

     평범한 것이 좋습니다. 저는 평범을 참 좋아합니다. 특별하지도 않고 특별나지도 않으며 지나치게
     똑똑하지도 않고 약삭빠르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인생, 얼마나 좋습니까? 아주 예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못 생기지도 않은 모습, 너무 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은 삶,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이 좋은 인생입니다.(예수를 깨운 사람들, 124쪽. 이하 ‘예수’).

그의 설교 전체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평범의 미학’은 그의 성품과 연관되는 것 같다. 그는 어려서부터 싸울 줄 몰랐다고 한다.(그런즉 깨어 있으라, 239쪽. 이하 ‘깨어’). 그가 지금까지 가장 크게 혼난 일은 아주 어렸을 때 교회에 가지 않고 스케이트 타러 갔다가 들켜서 얻어맞은 것이라고 회상할 정도니까(예수 277) 그의 성품을 알만 하다. 목회의 여정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본인 스스로의 말을 빌리면 30 여년의 목회생활에서 스스로 교회를 개척한 일도 없고, 교회당을 건축한 일도 없다고 한다. 이 목사는 일찌감치 신촌성결교회 정진경 목사님의 후임으로 발탁되어 순조로운 목회생활을 했다. 원만한 성품, 원만한 삶, 원만한 목회는 그의 설교를 평범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여기서 이 목사의 설교가 평범하다는 말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의 설교가 무미건조하다거나, 설교에 대한 주관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런 평범의 미학은 설교의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가지 점에서 분명한 특징을 드러낸다. 첫째, 내용적인 면에서 이 목사는 기본적으로 엘리트주의와 승리주의를 거부한다. 그는 예수 믿고 반드시 출세해야 한다거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이 당하는 그런 고난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게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이 목사는 가시가 자기를 찌르고 있다는 바울의 고백을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면서 먼저 한 가지 이해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통만 축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병을 고침 받고 건강해지고 부해지고 잘사는 것만 축복이 아닙니다. 때로는 내가 병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고 또 어떤 때는 내가 약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깨어 47).

둘째, 설교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이 목사는 설교 행위의 테크닉을 거부한다. 현대의 많은 스타 설교자들은 한편으로 청중과의 호흡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청중들을 선동하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테크닉을 구사한다. 과연 설교 행위에서 이런 테크닉이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점은 입장에 따라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가타부타 말하지는 않겠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만은 분명히 짚어야겠다. 테크닉이 설교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될 경우에 설교 행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설교자가 중심축으로 작용할 위험성이 크다. 이 말은 곧 말씀과 청중과의 참된 만남은 설교자의 영역이 아니라 성서 텍스트의 존재론적 능력, 또는 성령의 자유로운 능력에 속한다는 뜻이다. 이 목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내기 위한 기술을 거부하고, 듣기에 따라서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평범한 방식과 평범한 내용으로 설교한다.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그의 설교관이 그대로 묻어난다.

     설교가 청중의 기호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말재주와 마사여구로 꾸며진다면 그 설교는 이미 생명력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지나치게 청중을 의식하고 다수의
     기호에 포인트를 두는 것은 기호에 맞는 설교를 찾아 옮겨 다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까다로운
     입맛 때문일 것이다.(깨어, 서문 3).

청중의 기호를 따르지 않겠다는 이 목사의 입장은 청중의 영적인 욕구에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설교자의 독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온전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작위적인 테크닉을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평범한 설교는 자연스러워야 하며, 자연스러운 설교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설교라는 게 곧 그의 지론인 셈이다. 결국 이 목사는 평범한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아주 평범한 방식으로 평범한 내용을 설교하는 사람이다.

계몽적 설교
그런데 서울의 대학촌인 신촌 로터리 부근에 자리하고 있는 신촌성결교회를 평범한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형적인 대도시 중산층으로 구성되었을 신촌성결교회 신자들에게 그의 평범한 설교가 어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교회 부흥과 설교를 직결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따를지 모르지만 설교가 청중들에게 어필하지 않는 교회가 부흥할 수 없다는 기본 원리에서 본다면 이 목사의 설교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리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기는 신촌성결교회의 부흥과 이 목사의 목회 전반에 관해서 논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것은 접어두고 그의 설교에 한정해서만 본다면, 이 목사의 설교가 기본적으로 ‘계몽적’이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박하고 진실한 목회자에게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은 계몽적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그 설교가 극히 화려하거나 감동의 물결이 넘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시나브로 영적인 이끌림을 받기 마련이다. 이 목사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계몽적 성격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집안뿐이 아니고 민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민족에게 복음이 들어오면서부터
     우리민족이 얼마나 변화되었습니까. 120년 전 우리나라의 형편은 얼마나 암담했었습니까.
     우리나라가  세상 물정 모르고 문을 걸어 잠그고 쇄국 정치할 때 일찍이 복음의 맛을 느낀 서구의
     사람들은 세계를 주름잡고 돌아다녔습니다. 그 넓은 바다와 그 넓은 세상의 구속구석 어디든
     돌아다니며 활보하고 다녔습니다. 그때 일본만 해도 이미 명치유신이라는 혁명을 일으켜 선진화를
     꾀했고 세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내 나라 밖을 모르고 볼 줄도 모르고
     오직 울안에서만 살았습니다. 그때 이 땅에 서양인들이 찾아와 복음을 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지금부터 불과 120년 전의 일입니다.(2005년 12월4일 주일 설교, “지상 최대의 비전” 중에서).

이런 계몽적 성격은 그의 설교 전반을 지배한다. ‘교훈’을 찾는다는 식의 언급이 그의 설교에 자주 등장한다는 데서 일단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몇 군데만 직접 인용해보자.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의 교훈을 받게 됩니다.”(최상의 은혜, 194쪽. 이하 ‘최상’). “그래서 이 시간에는 사도 바울의 신앙의 핵심을 교훈 삼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최상 215). “이 시간에 6.25를 상기하면서 성경이 주시는 교훈을 되새겨 보았습니다.”(최상 305). “우리는 여기 이 소경의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깨어 76). “여기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해 주는 교훈이 많습니다.”(깨어 337). 구체적으로 교훈을 찾겠다는 언급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설교가 신자들에게 신앙적인 교훈을 주기 위한 방식과 내용으로 진행된다. 이제 직접 그의 설교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 목사는 1999년 3.1절 기념예배에서 “3.1절과 기독교”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본문은 예루살렘 성을 보고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누가복음 19:41-44절 말씀이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80년 전을 회고하면서 IMF를 맞은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 다음과 같다고 역설했다. 첫째, 그 사회에 희망을 주는 모임이 되어야 한다. 둘째, 국민의 의식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셋째, 자주 정신을 길러주어야 한다. 이 목사는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설교를 마쳤다.

     우리의 앞날에 이런 불행한 일이 없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참으로 지혜 있는 백성은 지난날의
     과오를 다시는 범하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우리도 나라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방종 하는 생활을
     극복해야 합니다. 더 절제하고 더 기도하며 하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민족 수난의
     절기를 맞을 때마다 우리들이 생각해 봐야 하고 가슴에 새겨야 하는 교훈입니다.(예수 58).

이렇듯 이 목사는 무슨 설교를 하든지 신자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애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설교에는 바람직한 가정, 교육, 노인공경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제법 많다. 심지어 노인주일까지 지키는 걸 보면(2005년 10월2일 “인생의 겨울준비”), 그의 설교가 얼마나 교훈 중심적인지 알 수 있다.  
한편의 설교를 더 찾아보자. “눈먼 소경이 주는 교훈”이라는 설교는 선천적 시각장애인 이야기를 본문으로(요 9:1-8) 한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다고 설교했다. 첫 번째는 과연 누가 불쌍하냐 하는 문제이다. 두 번째는 순종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게 된다. 이 목사는 이 세 가지의 교훈을 강조한 다음 이렇게 설교를 마쳤다. “신앙인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엄청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존재를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소경의 모습을 통해서 깊은 교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깨어 82). 더 이상 다른 설교를 인용할 필요가 없다. 이 목사는 신자들을 바르게 생각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줄기차게 계몽적인 설교를 한다.

앞서 말한 한국조직신학회의 연구발표에서 서울신학대학교 황덕형 교수는 이 목사의 이런 계몽적인 설교를 ‘지혜의 설교’라고 규정했다. “그의 설교는 평범함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주며 삶속에서 바른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 지혜의 설교다. 그의 설교는 복음의 핵심을 상징화해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청중이 일반적으로 동감하면서 찾을 수 있는 것 가운데 바른 것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려고 한다.”(국민일보 참조). 옳은 말이다. 이런 설교는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또한 기복주의에 대한 경고나(깨어 318), 장애 시설을 반대하는 것에 대한 책망(예수 251) 같은 데서 우리는 이 목사의 생각이 계몽적일 뿐만 아니라 개혁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수영 못하는 수영코치
평자는 기본적으로 신자들을 신앙적으로 계몽하는 그의 설교를 건전하다고 생각한다. 종교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극단적 신비주의도 아니며, 성속이원론도 아닌 모범적 신앙과 삶을 가르치는 설교는 누가보아도 인정할 만하다. 설교를 전달하는 방식에서도 청중들을 닦달하는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설득하고 권면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의 설교를 듣는 일반 신자들도 대개 평자와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당신, 앞으로 이 목사의 설교를 계속 듣고 싶어?” 하고 묻는다면 “그렇소!”라는 말이 흔쾌하게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에서 딱 꼬집어 “저게 문제야!” 하고 말할만한 게 크게 눈에 뜨이지는 않지만, 동시에 “그래, 바로 저 설교야!” 할 만한 것도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평자에게 비친 계몽설교의 한계이다. 맞선을 본 남자가 호감은 가지만 뭔가 깊이 사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은 여자의 심정이랄까. 오늘 평자는 이런 미묘한 기분을 해명해야 할 숙제를 안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이 목사의 설교가 문제인가, 아니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설교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 내 무감각이 문제인가? 일단 평자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아야겠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목사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게 이 어정쩡한 사태의 실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표면을 매우 조심스럽게 툭툭 건드리는 방식으로 설교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잘못된 것도 눈에 뜨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된 것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조금 비유적으로 설명한다면, 그는 아직 물속으로 들어가지 못(안)한 수영 코치다. 그는 물 밖에서 손동작과 발동작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가 실제로 물속에서 수영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수영을 실제로 잘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간하기는 쉽지 않다. 이게 문제였다. 그럴듯한 수영 강습을 하고 있기는 한데, 그게 실제적인 수영경험에 나온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 이 목사는 여전히 상대적으로는 좋은 코치일 수도 있다. 억지를 피운다거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수영 코치를 만나는 일도 우리에게는 흔하디흔한 일이니까 말이다. 또는 인간이 돌고래와 똑같이 수영할 수 있는 신기술을 발견한 것처럼 떠벌리는 코치도 많은 법이니 말이다. ‘황우석, 남의 얘기 아니지 않은가.’

평자는 간혹 이런 생각을 한다. 설교자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입만 열었다 하면 “구원받으라!”고 외치고 있지만 그 구원의 지평이 얼마나 중층적이고 다층적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설교자들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다. 성령이 곧 그리스도의 영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생명의 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될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아들로서의 하나님이 서로 의존적이면서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단지 교리로서가 아니라 세계 현실성에 대한 인식과 해석의 토대로 풀어낼 수 있는 설교자들이 얼마나 될까? 하나님의 창조가 처음의 창조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적인 창조와 종말의 창조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따라서 결국 창조는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며, 결국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설교자들이 얼마나 될까?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예수님의 부활 현실성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설교자들이 얼마나 될까? 부활한다는 목소리는 높지만 아직 은폐된, 그러나 이미 예수 사건에서 선취된 그 궁극적 생명인 부활의 실질로 치고 들어가는 설교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기독교의 근본을 모른 채 설교한다는 것은 곧 신학 없이 설교한다는 의미이다. 성서와 기독교의 근본을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설교자와, 그리고 그런 설교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청중들의 결탁이 바로 우리가 처한 설교현장의 실상이며 동시에 비극이다. 성서와 신학과 설교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위에서 언급한 수영과 연관해서 한 마디 보태야겠다. 여기 수영교본이 있다. 바른 수영 코치라고 한다면 그는 이미 이 수영교본이 설명하고 있는 그 수영의 근본을 깨우치고 있어야 한다. 교본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순간에 코치는 몸으로 물의 느낌을 따라가야 한다. 그 교본과 그것에 따른 물의 느낌이 일치될 때 코치는 실제로 수영을 가르칠 수 있다. 신학의 역할은 곧 이것이다. 수영교본이라 할 성서 텍스트와 그것을 읽을 때 따라오는 영과의 일치 말이다. 만약에 수영교본만 읽어도 당장 수영할 수 있다면 수영 강습이 필요 없듯이, 성서 텍스트를 읽기만 해도 영과의 일치가 자동적으로 일어난다면 신학은 불필요하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적 현실은 이 세계가 열리는 것만큼,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만큼, 혹은 그것과 비례해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영의 현실인 성령이 그만큼 제한적이라는 게 아니라 그 영을 인식해야 할 인간이 이 세상에 철저하게 의존해(던져져)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물의 경험 없이 수영교본만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영코치가 있듯이 성서와 영의 일치 경험 없이 설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평자의 눈에는 이 목사의 설교에서 성서 텍스트와 영의 일치가 별로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이 말은 곧 그가 성서 텍스트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않고 늘 변죽을 울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인 증거를 찾아보자.

변죽을 울리는 설교
“사랑의 길(2)”이라는 제목의 설교는 바울의 편지 고린도전서 13:4-7절을 본문으로 한다. 이 목사는 이 본문에 근거해서 사랑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설명한다. 오래 참는 것, 온유한 것, 투기하지 않는 것, 교만하지 않는 것, 무례히 행치 않는 것,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 성내지 않는 것,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 이 목사는 설교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우리는 주께로부터 더 큰 은혜를 힘입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아름다움을 간직한 신앙인으로 살아야겠습니다.”(예수 156). 성서 텍스트에서 늘 교훈을 찾아내려는 이 목사의 설교 방식이 여기서도 그대로 적중되고 있다. 이런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자신들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사는 것에 대해서 반성하면서 “아름다움을 간직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방식으로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곧 설교자의 임무라고 주장한다면 평자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설교는 굳이 신학을 전공한 목사가 아니라 주일학교 교사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미 성서에 보도되고 있는 몇 가지 정보를 스피치 원리에 기대서 전달하는 걸 설교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물론 성서 텍스트에 따라서 그런 정보만으로도 충분한 설교가 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 이유를 이 목사가 사랑의 속성으로 열거한 그 내용으로 들어가서 확인해보자.

그는 사랑의 네 번째 속성을 ‘교만하지 않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물론 그것은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바로 그 내용이다. 이 목사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암적 존재’가 교만이라고 지적하면서, 청중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 생각대로 비판하는 것이나, 그 설교를 자기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역시 영적 교만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목사는 그 대목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예수 152). 이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렇게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훈계의 방식으로 전하는 설교는 자격미달이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초등학생들에게 상투적인 방식으로 교훈을 주는 교장 선생님이 아니라 그 교훈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열어 보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교만’이 설교의 주제가 될 수는 있지만 단지 교만의 현상을 나이브하게 열거하고 “교만을 버리자!”라고 호소하는 건 좀 곤란하다는 말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설교는 인간과 세상의 현상을 설명하고 계도하는 게 아니라 그 현상의 내면에서 활동하는 영적인 현실에 집중하는 행위이다. 설교자는 인간이 왜 교만할 수밖에 없는지, 그것이 우리의 영혼과 어떻게 상호 연관되는지, 그것과 구원의 관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심층적으로 풀어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 목사는 우리의 영혼과 영적 현실의 심층적 상호작용을 추적하지 않는다.
그가 그 설교에서 제시한 나머지 주제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례히 행치 않아야 한다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영혼의 깊이에서 감동받는 청중들이 있을까? 이런 교훈 자체가 너무 뻔할 뿐만 아니라 여덟 가지로 제시된 작은 주제 사이에 아무런 긴장감도 발생하지 않는 설교에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지나치게 소박해서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거나, 아니면 단지 교양의 차원에서 믿는 시늉만 내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평자의 주장에 대해서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 이 목사가 제시한 여덟 가지 사랑의 속성은 바로 바울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 목사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이다. 물론 바울이 소위 ‘사랑예찬’에서 사랑의 속성을 열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목사가 설교한 것처럼 무례하지 마시오, 오래 참으시오, 하는 따위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 내면 세계에서 사랑의 능력으로 활동하는 영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사랑의 능력에 대해 진술하고 있는 중이다. 설교자들은 성서의 표층에 머물지 말고 심층으로 끊임없이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우리가 본을 삼고 따라야 할 어떤 윤리적 교훈이나 종교적 교훈이라기보다는 그것 너머에서, 또는 그것 내면에서 활동하는 영적인 현실에 대한 ‘손가락질’이기 때문이다.

다른 설교 한 편을 더 검토해보자. 이 목사는 “예수의 사역 준비”(막 1:9-15)라는 설교에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네 가지를 준비하셨다고 설명한다. 첫째, 세례를 받으셨다. 둘째, 금식을 하셨다. 셋째,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다. 넷째, 제자들을 택하셨다.(예수 67 이하). 이 목사가 선택한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기 전에 이미 공생애를 시작하셨으며, 또한 40일 광야생활에서 금식하셨다는 보도도 분명한 게 아니다. 이런 문제는 그렇게 본질적인 게 아니니까 접어두기로 하고, 그가 제시한 네 가지 준비라는 게 설교로서 정당한가에 대해서만 짚도록 하자. 평자는 이 목사가 왜 이렇게 심각한 주제를 한가하게 다루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예수의 세례 사건만 하더라도 생각해야 할 내용들이 끝없이 많은데, 그는 수박겉핥기 식으로 지나가고 만다. “세례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입니다.”(예수 68)는 그의 진술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는 분이기에 세례를 통해서 그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한다는 말일까? 이 목사는 ‘왜’에 대한 해명은 없이 일방적으로 ‘어떻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 근본을 마치 낱말풀이 정도의 수준에서 ‘소프트 터치’하고 만다. 이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진지하게 인생을 준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함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자세에서 배우게 됩니다.(예수 74).

예수님의 삶의 자세에서 세상살이를 배운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될까? 물론 우리가 예수를 뒤따라 산다는 말은 옳다.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말도 옳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가 곧 길과 진리와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지 그 삶의 태도를 닮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받을만한 교사로 전락하고 만다. 이 목사는 성서 텍스트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아니라 주변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셈이다.  

평자가 지금 이 목사의 설교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거나 일부러 트집 잡으려는 건 아니다. 그의 설교에 은혜 받는 신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작년 11월27일 대강절 첫 주일에는 신촌성결교회 신자 3천 명 중에서 1천5백14명이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목사의 계몽적 설교와 목회가 신자들을 건전하게 육성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러나 아무리 바람직한 열매가 열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설교의 정당성을 무조건 담보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열매들은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나 사회단체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설교의 정당성 여부는 결국 성서와 기독교의 근본 안으로 들어갔는가에 의해서 식별되어야 한다.  

“신에게 솔직히”
평자는 위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 목사의 설교가 성서 텍스트의 근본이 아니라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런 설교 행태는 가벼움을 즐기는 현대 교양인들에게 나름으로 어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영적인 심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설교와 영성의 심화 문제는 평자가 여기서 아무리 강조해도 기독교 신앙을 도그마나 종교적 교양으로 이해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무의미할 것이다. 평자는 한발 물러서서 좀 더 구체적인 문제를 짚겠다. 성서 텍스트와 기독교 신앙을 가볍게 처리하는 방식의 설교가 어떤 근원적인 함정에 빠지는지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이 목사는 현대 신학자들의 언급을 예시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바르트(최상 17, 109), 본훼퍼(최상 62, 예수 135, 323), 틸리히(예수 261)를 인용한다는 건 이 목사의 신앙과 신학이 그들과 약간 방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런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건 그가 신학적으로 열려 있다는 증거라는 점에서 좋게 평가한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하르낙과 불트만까지 인용하고 있었다. 그는 “부활이 없는 나 자신은 있을 수 없다.”(교회력에 맞춘 절기 설교 上, 177 쪽)는 하르낙의 말을 인용했다. 어쩌다가 한번이 아니라 같은 설교집 352, 383 쪽에도 인용했으며, <최상의 은혜>(211 쪽)에서도 인용했다. 하르낙이 누구인가? <기독교의 본질>을 집필한 가장 대표적인 자유주의 신학자이며, 구약을 기독교의 경전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 아닌가? 이 목사는 다음과 같은 불트만의 말을 인용했다. “기독교는 십자가에서가 아니라 부활에서 시작되었다.”(깨어 105). 불트만이 누군가? 부활의 역사를 단지 개인의 실존적 역사성으로 해체하고 있는, 소위 부활의 ‘탈신화화’를 주창한 신학자 아닌가? 그는 훨씬 전의 설교에서는 불트만이 사도신경을 믿지 않았다고 비판했다(최상 287).

평자는 지금 이 목사가 신학자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사실을 꼬집으려는 게 아니다. 신학자들을 모른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언급한다는 게 문제이다. 평자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이 목사가 성서 텍스트에 관해서도 이와 똑같은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불트만의 부활 신학이 무엇인지 모르고 인용하듯이 그는 성서 텍스트의 근본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어림짐작으로 설교하는 건 아닐까? 아니길 기대한다. 어쨌든지 교회에서는 목사가 모른 채 설교해도 그게 들통 나는 일은 별로 없다. 알맹이는 어떻든지 간에 설교의 외피는 늘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무늬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희화적으로까지 비칠 수 있는 이런 현상의 압권은 이 목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시 73:25-28)라는 제목의 설교 도입부에서 로빈슨의 책을 인용한 대목이다.

     존 로빈슨(John Robinson)이라는 신학자가 신에게 솔직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로빈슨은
     “하나님을 정직하게 이해하고 우리 모두 하나님께 솔직해 보자”고 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정직하게 이해하고, 그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른 신앙이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최상 160).

위의 인용구를 읽는 평신도들은 아무런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겠지만 약간의 신학 공부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처구니없다는 걸 알 것이다. 영국 성공회 주교였던 로빈슨이 집필한 이 책은 보수적이고 복음주의 계열에 속한 분들에게서 지독하게 욕먹은 바 있는, 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분서갱유(焚書坑儒)에 해당되는 책이며, 요즘과 연결해본다면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와 상응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평자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이 목사의 신학적 식견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라 내용과 상관없이 제목만 살짝 따오는 방식이 바로 그의 설교를 추동해나가는 기본 전략이라는 사실을 짚는 중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설교는 대개 ‘제목설교’였다. 성서 텍스트의 중심과 상관없이 제목만 짚어내는 방식의 설교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한국교회 명망가 설교자들에 의해서 얼마나 자주 애용되고 있는지 알만한 분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선용하는 삶”은 여인들이 예수님 일행을 돕는다는 본문(눅 8:1-3)을 배경으로  선포된 설교이다. 이 목사는 여기서 시간, 재물, 남은 인생을 선용해야 한다고 설교했다(최상 74 이하). 이 본문에서 선용 개념을 집어낸다는 것도 상당한 비약이기는 하지만,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본문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시간과 재물과 남은 인생을 열거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설교다. “다섯 가지 의무”라는 제목의 설교는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 3:13)를 본문으로 한다. 그는 여기서 신앙인들의 다섯 가지 의무를 이렇게 제시했다. 성수주일, 전도생활, 십일조생활, 목적 있는 생활, 영적생활(깨어 27 이하). 이런 식의 설교에서는 성서 텍스트가 거의 무용지물이며, 기껏해야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 심지어 “인생승리의 찬가”(딤후 4:6-8)에서 이 목사는 불치병 환자들이 죽음 앞에서 보이는 다섯 단계의 심리적 현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했다. 그날 이 목사는 설교가 아니라 교양강좌를 한 셈이다. 그것도 웬만큼 책읽기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모두 알고 있을 만한 내용을 말이다.

성서텍스트의 왜곡
극단적으로 제목설교에 치우치고, 성서 텍스트의 변죽에 머문다고 하더라도 이 목사가 크게 틀린 말을 하지 않으면 괜찮은 거 아니냐, 하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설교자들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자의 영성은 대충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틀리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생각은 결국 틀리는 길로 가는 지름길이다.

“너희는 자유하라”는 제목의 설교는 갈라디아 5:1절을 본문으로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목사는 참 자유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고 하면서, 세 가지의 자유를 피력했다. 주권적 자유, 정신적 자유, 영적인 자유가 그것이다. 이 설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제 53주년 광복절을 보내면서 본문에서 말하는 뜻을 새롭게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멍에를 메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유를 유지하는 것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인 영적 자유도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예수 211).

이런 대목에 이르면 평자는 이 목사가 성서 텍스트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헷갈린다. 지금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국가의 주권도 아니고, 정신적으로 고상해지는 자유도 아니고, 죽음을 극복하는 영적인 자유도 아니다. 이 자유는 기본적으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할례로부터 자유이다. 유대교적 기독교라 할 수 있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이 율법주의와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했는가? 자칫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질 개연성이 높은 상황에서 온몸을 던지는 바울의 반(反)율법적 투쟁을 통해서 이제 명실상부한 복음 공동체가 역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본문은 이런 투쟁을 전제한다. 광복절 기념예배였다고 하더라도 이 본문으로 설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우선 텍스트의 고유한 지평을 정확하게 제시해야만 한다. 이어서 율법주의로부터 탈출한 복음 공동체인 오늘의 교회에 율법적 요소가 얼마나 심각하게 작용하는지도 살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일종의 변형된 율법이라 할 국가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목사는 자유의 소중함에 대한 일반론에 떨어짐으로써 결국 율법과 할례를 말하는 성서 텍스트와 아무런 상관없는 설교를 하고 말았다. 평자의 생각에 이런 설교는 성서 텍스트의 모독에 가깝다.

‘인위적 실수’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목사의 설교에는 크고 작은 왜곡이 자주 일어난다. 이 목사는 “잘못된 선택”이라는 설교에서 나오미의 잘못을 이렇게 추궁했다. 나오미가 흉년이 들어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사 간 것은 잘못된 판단이며, 그것은 곧 현실만 본 것이기 때문에 잘못이고, 또한 불신앙이라는 것이다(예수 187). 다윗의 할아버지를 낳은 여자가 바로 모압 사람 룻이라는 사실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전승하고 있는 룻기서를 이런 방식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성서 텍스트의 왜곡이다. 모압 땅으로 이주한 것은 나오미가 아니라 남편인 엘리멜렉의 책임이었으며, 흉년이 들어 먹을 걸 찾아 이주하는 일은 그 당시 흔한 것이었고, 특히 성서는 어디서도 나오미를 책망하지 않는다. 그렇게 추정할만한 복잡한 국면도 룻기서에는 없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이 목사는 나오미의 없는 문제점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부풀리고 있다. 청중을 계몽하려는 생각이 강한 설교자들은 이런 식으로 성서 텍스트를 오용하는 일이 잣다. 중풍병자 이야기(막 2:1-12)에서 이 목사는 열심히 일하며 살자, 그래도 어려움은 있다, 때가 되면 거둔다고 설교했다(깨어 11 이하). 이 본문이 중풍병자나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아 문제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이 목사는 외면한다. 굳이 이들을 설교의 주제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예수님이 언급한 ‘믿음’의 실체에 집중해야만 했다. 복음이 계몽으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신학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에서도 그는 서툴게 접근한다. 이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근간을 세 가지로 규정했다. 하나는 동정녀 탄생, 둘째는 십자가의 죽음, 셋째는 부활이다(교회력에 맞춘 설교 上, 170 쪽 이하). 동정녀 탄생을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버금가는 가르침으로 주장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만약 동정녀 탄생 문제가 그렇게 본질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십자가와 부활에 자기의 모든 존재를 걸었던 바울이 그것에 대해서 침묵했을 까닭이 없다.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 신앙의 좋은 전승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과 상응하는 사건인 것처럼 주장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설교자의 계몽을 위하여!
지금 평자는 이 목사의 설교와 연관해서 상념이 많다. 이 목사는 인격적으로 본받을만한 분이시며, 한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폐해들을 뚫어볼 줄 아는 분이고, 비교적 역사의식도 살아있는 편이다. 미국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좋게 평가하면서도 인종차별과 연관해서 “이 미국 사람들은 참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미국 사람들의 친절하고 상냥한 겉모습만 보고 좋다고 보는데 그것은 참 위험한 생각입니다.”(깨어 343) 하고 정곡을 찌르기도 한다. 글머리에서 밝혔듯이 청중을 권위적으로 억압하거나 닦달하는 일도 없다. 가장 모범적인 목회자요 설교자인 이 목사가 정작 중요한 성서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는 일에는 매우 소홀했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목사의 많은 설교를 읽고 들었지만 성서 텍스트가 살아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하는 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다른 건 접어두고, 계몽이라는 그의 특징과 연관해서 가장 중요한 이유를 든다면 계몽의 출처가 설교자 자신이 아니라 성서 텍스트라는 사실을 이 목사가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목사가 물속에 들어가지 않은 수영코치 같다는 필자의 지적은 곧 이 사실을 의미한다. 그의 설교에서 성서 텍스트의 고유하고 새로운 지평들은 열리지 않고, 대신 성서가 일종의 ‘구구단 암기집’처럼 기능한다. 아마 평자에게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났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명분으로 신자들의 계몽에만 치우치다가 결국 성서 텍스트로부터 조명 받아야 할 자기의 계몽에는 소홀했다는 말이다.  

이 자기 계몽은 수행이며 공부이다. 우리의 목회 현장을 감안할 때 여름과 겨울철에 각각 세 달씩 하안거와 동안거에 들어가는 승려들과 비슷한 수준에서 자기수행에 나설 수 없다 하더라도 구도정진의 기본적인 자세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건 종교개혁자들이 경계했던 업적 의(義)가 아니라 성서 텍스트의 깊이에 들어가기 위한 영적인 훈련이며 자기 개혁과 갱신이다. 성서 텍스트가 심층에서 말을 걸 때 알아들을 수 있기 위해서 내면을 깨우치는 준비, 즉 계몽(啓蒙)이다. 설교에서 손을 놓을 때까지 이런 일에 철저하지 않으면 아무리 순수한 마음을 가진 설교자라 하더라도 목회의 연륜과 더불어 자기도 모르는 걸 가르치는 미몽(迷夢)의 길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에 빠진다.”(마 15:14)는 경구는 바로 이 사실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설교와 연관해서 구체적인 자기 계몽의 방법이 무엇인지 여기서 일일이 언급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이렇다 할 왕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니기도 하거니와 하루 이틀에 해결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젊은 설교자들을 위해서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 마디만 하자.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신학을 철저하게 학습하는 게 가장 바른 길이다. 이 신학공부에는 철학, 문학, 역사를 비롯한 인문학 전반이 포함된다. 설교가 단지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교회를 부흥시키거나 신자들의 삶을 모범적으로 끌어올리는 기능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생명의 영과 하나 되는 구도 행위라는 사실을 약간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설교가 지향하고 있는 인간 구원이 우주론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통전적으로 깨달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공부에 시간을 아끼지 않으리라! <기독교사상,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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