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1
설교비평의 변
정용섭


(아래의 글은 <활천> 9월호의 특집 "설교비평을 비평한다"에
제가 기고한 '설교비평의 변'입니다. 활천사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올립니다.
다음 꼭지로 실린 다른 분들의 글도 역시 이 특집의 한 대목들입니다. 정용섭)

프로 기사들의 공식적인 기전(棋戰)은 일반적으로 기보(棋譜)로 기록된다. 흑은 홀수, 백은 짝수로 매겨진 돌들이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각각 교차점마다 차례대로 놓인 기보는 한판의 바둑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기보에는 겉으로 드러난 수만이 아니라 숨긴 수가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여기 이세돌 기사가 둔 바둑의 기보에서 79번의 흑이 있다고 하자. 79번의 돌이 그 자리에 놓이기 전까지 이세돌은 수많은 다른 가능한 수를 생각했지만, 그 수는 기보에 나타나지 않는다. 기보를 해설하는 사람이 이세돌 정도의 실력자이거나 앞선 실력자라고 한다면 그 모든 은폐된 수를 청중들에게 설명하겠지만, 실력이 아주 처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조금 흉내를 내다가 말 것이다. 기보는 성서와 비교될 수 있으며, 기보 해설자는 설교자와 비교될 수 있다.

성서는 그 안에 어떤 은폐된 세계를 담고 있다. 그걸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통치라고 부르는데, 설교자는 단지 성서의 표면에 나타나는 사실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은폐된 사건들까지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설교비평은 설교자의 이런 작업이 얼마나 정확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작업이다.

또 하나의 다른 예를 들겠다. 여기 바흐의 피아노곡 파르티타 악보가 있다 하자. 그 악보를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본들 보통 사람의 귀에 소리가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악보는 소리가 아니라 소리를 담고 있는 기호이다. 바흐는 소리의 원초적 경험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악보로 표기했을 뿐이다. 소리는 악보 안에 은폐되어 있다. 오늘 그것을 연주해야 할 피아니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악보를 뚫고 바흐의 은폐된 음악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작업은 창조적인 영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오늘 컴퓨터의 재연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죽은 것이기 때문에 창조적인 연주라고 할 수 없다. 바흐의 악보를 성서에 비유한다면 피아니스트는 설교자라 말할 수 있다. 설교비평은 설교자가 일종의 악보인 성서의 표면에 머물지않고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작업이다.

아마 어떤 분들은 필자와 관점을 달리할 것이다. 설교는 바둑의 기보해설이나 피아노 연주와 같은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役事)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성서해석에서 우선하는 것은 성령의 조명이라는 칼빈의 주장처럼, 더 원래적으로 성서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성서 자체의 진술처럼, 성서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해석해내는 설교는 분명히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성령이 누구, 또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성령의 어원이라 할 수 있는 히브리어 루아흐과 헬라어 프뉴마는 영, 바람이라는 의미를 담는 고어이다. 영과 바람은 고대인들에게 생명의 본질로 이해되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도 하다. 생명, 진리, 사랑에 근거한 설교가 곧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위에서 예로 든 기보와 기보 해설자, 악보와 피아니스트의 관계는 설교를 바둑과 피아노 연주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려는 게 아니라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 할 설교자의 진리론적이고 해석학적인 자리를 강조한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해석학적이고 인식론적 과정에 함께 하시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의 비평작업은 해석학인 지평에서 전개된다. 이를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설교자가 성서 텍스트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설교자가 텍스트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무슨 이유로 거론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당연한 현상이 아니다. 텍스트는 형식적으로 던져 놓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설교자들도 많다. 의도적으로 성서를 외면하는 분들도 있고, 텍스트의 영적 깊이를 파고들어갈 만한 내공이 없어서 외면하는 분들도 있다. 텍스트와 하나가 되지 못하는 설교자는 어쩔 수 없이 예화나 간증, 또는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에 치우치는 설교를 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설교자가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텍스트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설교자들 중에서도 해석의 단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설교는 해석이 아니라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거나 또는 단지 주석에 머물면서도 자신의 설교를 해
석이라고 주장하는 설교자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이들이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설교자들이다. 소위 강해설교자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텍스트에 집중하면서 그것을 자잘하게 풀어간다. 비록 이들이 텍스트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그것마저 없는 설교자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건강하
다고 볼 수 있긴 하지만 해석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해석’(hermeneutics)은 위에서 기보와 악보를 예로 들면서 암시했듯이 성서 텍스트의 은폐된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만 일어날 수 있는 언어사건이며 계시사건이다. 성서의 은폐된 세계는 성서의 종말론적 지평을 가리킨다. 성서의 종말론적 지평인 그 은폐된 세계는“아는 것
만큼 보인다.”는 경구가 가리키듯이, 설교자가 들어간 종말론적 깊이만큼 열린다. 이럴 때 설교는 창조적일 수 있다. 악보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 들어간 피아니스트만이 창조적으로 연주할 수 있듯이 말이다.

우리 주변에서 창조적인 설교를 찾기가 쉽지 않으며, 신자들도 설교에 대한 기대를 접은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은 설교자 자신이 가장 예민하게 느낀다. 실제로 많은 설교자들이 매주일 설교준비에 힘들어하는 이유도 성서해석의 창조성이 없다는 데에 있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설교 준비가 쉬워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설교 매너리즘에 의한 설교 영성의 형해화(形骸化)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사태에서 설교자와 신자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비틀어진 대안은 교회를 이벤트 중심으로 끌어나가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행사에 매달림으로써 말씀의 무게로부터 살짝 벗어나는 것이다. 교회 행사의 과부하가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지치게 만드는지 알 만한 분들은
모두 알고 있으리라. 이것은 길, 진리, 생명이 아니다.(요 14:6)

위에서 필자는 설교비평의 기준을 두 가지로 설명했다. 설교자가 성서 텍스트에 집중하고 있는가, 그리고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두 질문은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킨다. 성서의 도구화! 오늘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서는 철저하게 도구화된다. 설교의 목적은 청중들이 은혜를 받고, 더 나아가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생각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교회 현장이 중요하다는 관점으로는 옳지만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관점에서는 옳지 않다. 하나님의 구원론적 통치를 존재론적으로 담고 있는 그 말씀은 우리의 작은 주관에 묶이지 않고 스스로 진리의 길을 간다. 설교행위에서 은혜와 교회부흥은 두 번째 문제이다. 오늘 설교자들의 몫은 하나님의 계시사건인 성서가 실제로 종말론적 구원사건으로 계시될 수 있도록 작은 길을 내는 것뿐이다. 필자의 설교비평은 성서의 도구화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지난 2년 동안 우리 성결교회 설교자들 열 분의 설교를 필자 나름의 시각으로 비평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필자의 어설픈 비평으로 인해서 당사자들에게 불편한 일이 일어났다면,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우리 모두에게 말씀의 영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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