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해석학적 요청
-후암백합교회 김세진 목사-

설교자의 균형감각
설교자에게 어울리는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필자가 후암백합교회 김세진 목사님(이하 ‘김 목사’)의 설교 동영상을 접한 첫 인상은 “착한 사람이군!”이었다. 화려한 언변이나 현란한 제스처, 번뜩이는 신학적 사유나 문학적 상상력이 돋보이기보다는 청중의 영혼을 세세하게 보살피는 목회적 영성이 훨씬 도드라져 보였다는 말이다. 앞의 요소들은 훈련을 통해서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목회적 영성은 그 사람의 성품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목사에게는 매우 본질적인 은사라 할 수 있다.  
밖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어떤 능력과 달리 착한 성품이라는 특징은 막연한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요소는 아무에게나 허락된 은사가 아니다. 예컨대 사도행전이 전하고 있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 11:24)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다소에 은둔하고 있던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온 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안디옥 공동체를 바울과 함께 꾸린 바나바는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배후 인물이었다. 김 목사의 설교하는 모습에서 바나바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겠다. 그 과정을 통해서 김 목사의 설교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우선 김 목사의 설교에는 다른 설교자들에게서 자주 표출되는 과장과 자기현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투가 침착하고 설교의 톤도 안정적이다. 그의 설교 스타일은 청중들을 감정적으로 사로잡으려고 오버하는 웅변과는 거리가 멀다. 어떻게 보면 세련미가 조금 부족한 게 아닌가 할 정도로 그의 설교는 꾸밈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감이 결여되었다는 건 결코 아니다. 발음도 정확하고 필요 적절하게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꾸밈이 없이 있는 그대로 말씀을 전하는 스타일의 설교가 필자의 귀에는 잘 들린다. 왜냐하면 이런 설교에서 설교자의 인격적 진실성과 복음의 진정성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를 통해서 전달되는 이런 진실성과 진정성은 곧 그가 착한 목회자요, 설교자라는 사실을 보증한다.
김 목사의 설교에서 진실성이 전달된다는 사실을 지금 이 자리에서 독자들에게 객관적으로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이건 필자의 주관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필자의 이런 진술은 진실하지 않은 설교자들도 있다는 말이냐, 하는 반론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아주 미묘한 문제이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들지만,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까 필자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아야겠다.
김 목사의 설교가 필자에게 잘 들어오는 이유는, 그리고 거기서 진실성이 전달된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의 설교가 공격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설교의 태도와 그 내용에서 모두 그렇다. 이 말은 적지 않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공격적으로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말씀 선포의 열정과 구원의 확신과 시급성이 설교자를 그렇게 몰고 가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공격적인 설교 앞에서 필자의 마음은 불편하다. 청중들을 지나치게 책망하고, 주눅 들게 하고, 또는 반대로 자만심에 빠질 정도로 추켜올리거나 종교적 욕망에 도취하게 만듦으로써 어떤 설교의 효과를 얻어내려는 작위성이 그런 이들에게서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격적인 설교에서 진실성을 느끼기는 힘들다.
설교의 공격성은 기본적으로 청중의 대상화에 근거한다. 그것은 곧 청중의 도구화이다. 필자가 보기에 설교자가 청중을 대상으로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생각과 태도는 착각이고, 어떻게 보면 교만이다. 설교자는 청중을 결코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원칙적으로 설교자는 청중을 향해서 설교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청중과 더불어서 말씀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비록 형식적으로는 청중을 마주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청중에게 등을 보인 채 청중과 같은 방향으로 영적인 시각을 놓아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청중들과 말씀의 참된 만남이 설교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성령의 일이라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설교자도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설교로 청중들이 은혜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한 설교자일수록 한편으로는 종교적 교언영색에 빠지고, 다른 한편으로 청중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설교를 한다. 양자 모두 청중을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공격적인 설교이다.
필자는 김 목사의 설교에서 위에서 설명한 그런 공격적인 모습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그의 설교는 청중들의 영성을 편안하게 만들고, 자유롭게 만드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그의 이러한 설교를 통해서 성령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청중들과 만날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설교는 바로 그의 착한 성품과 연결되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착한 성품이 청중을 대상화하지 않게 되고, 그것이 결국 공격적이지 않은 설교를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서 착하다는 말은 그의 인격과 설교에 대한 소극적인 표현인데, 적극적으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그는 균형감각을 갖춘 설교자이다. 극우와 극좌가 아니라, 그리고 극단적 관념에 떨어지거나 극단적 행동주의에 떨어지는 게 아니라 최대한 신앙의 중심을 잡는 설교자라는 말이다. 아래와 같은 진술에서 그의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너무 감정적인 데만 치우치다 보면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고 맹목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이단에 빠지기도 쉽습니다. 내가 신앙생활하면서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신앙에 치우치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내 마음에 독선적인 신앙이나 비판하려고 하는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새가 두 날개에 균형을 잘 이루기 때문에 높은 하늘을 잘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루어야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설교 ‘흔들림이 없는 삶’ 중에서, 이하 설교제목만 표기)

균형감각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는 그의 설교는 단지 설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실제적인 삶을 끌어가는 동력이다. 예컨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헌금으로 선뜻 바친 채 빈털터리로 목회자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신앙적 열정이 분명하다는 뜻이며, 어렸을 때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지금도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쓰는 습관은 삶의 성실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뜨거운 신앙과 삶의 성실성이 김 목사의 인격에서 균형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소극적으로는 착하다고 말할 수 있고, 적극적으로는 균형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김 목사의 설교가 청중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리라는 건 불문가지이다.

성서 텍스트의 해석학적 요청
착한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김 목사의 설교가 필자에게 편안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그가 조금 더 책임 있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 보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이런 부분들이 보충되지 않으면 김 목사의 설교는 어쩌면 ‘무난한’ 설교에 머무를지 모르겠다. 청중들의 영혼에 상처를 내지 않고 잘 감싸기는 하지만 영성의 심화에는 이르게 하지 못할 수도 있는 그런 무난한 설교를 넘어서기 위해 설교자는 성서 텍스트의 해석학적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그것은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설교의 해석학적 요청”을 의미한다. 해석학은 무엇이며, 그게 왜 설교자에게 중요하다는 것일까?
제우스의 사자인 헤르메스에게 연원하는 해석학(hermeneutics)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서 텍스트를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할 설교자에게 필수적인 작업이다. 해석학은 어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들에게 대신 전달하는 설교와 마찬가지로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 통역, 해석하는 행위이다. 이게 말은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아니,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신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가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헬라신화에서는 제우스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메신저인 헤르메스가 필요했다.
모든 설교자들은 이미 이런 해석학적 전통 안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성경이 이미 해석의 결과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우리말로 번역했다는 건 곧 해석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번역이 그 텍스트의 실체를 완전하게 전달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번역은 오역”이라거나 또는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이런 데 근거한다. 설령 번역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만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애물은 많다. 이런 장애물은 성서 텍스트가 두 가지 현실을 변증법적 방식으로 담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하나는 성서기자들이 살았던 구체적인 역사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뛰어넘는 원초적 계시경험이다. 성서 텍스트에는 역사와 계시, 차안과 피안, 내재와 초월이 변증법적으로 엮여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모세의 야훼 하나님 경험에 대한 진술인 출애굽기 3장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노예생활이라는 역사적 현실과 “나는 나다.”로 자신을 규정하는 초월적 하나님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역사와 하나님 경험이 교차하고 있는 성서 텍스트에서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기 위해서 설교자가 기울여야 할 해석학적 노력은 매우 엄정하다.
그런데 여기서 설교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훨씬 근원적인 문제는 이런 성서 텍스트 자체가 이미 해석학적이라는 사실이다. “성서 텍스트는 해석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성서 텍스트는 신문기자의 현장 보도가 아니라 당시의 신학자라 할 수 있는 구약의 예언자, 또는 신약의 사도 및 속사도에 의해서 해석된, 그리고 전승된 텍스트이다. 우리가 그 성서 텍스트를 청중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성서 기자들의 신학을 알고 있어야 하며, 그것이 뿌리를 두고 있는 원천 계시 사건으로 소급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의 실질적 의미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흡사 심장수술 의사가 고도의 의학공부와 수련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설교자들도 역시 이런 전문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당신의 주장은 설교의 토대를 성령에 놓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학문에 놓는 거 아니냐, 하고 반론을 제기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로 사용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참여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기본적인 신론과 성령론과 인간론에 근거해서 볼 때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우리는 이런 해석학적 작업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이 자리에서 무엇이 성령에 의존하는 설교인지에 관한 논의로는 깊이 들어가지 말자. 성결교회 100주년을 앞두고 우리의 신학과 설교도 보편적 진리의 토대를 확실하게 담보해야 한다는 사실만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성령은 한 시대, 한 교파의 교리를 훨씬 뛰어넘는 보편적인 진리와 생명의 영이며, 창조와 종말의 영이 아니신가!
필자는 이제 설교의 해석학적 요청이 무엇인지를 김 목사의 설교에 근거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내야겠다. 좌로 우로 치우치지 않고, 건전한 인격으로부터 나오는 김 목사의 설교를 매도하는 것처럼 비칠지 몰라 약간 염려스럽다. 다른 한편으로는 필자가 건네받은 설교 텍스트와 동영상이 그의 설교를 종합적으로 다룰 만큼 충분한 양이 못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나마 이 글쓰기의 오류가 발견될지도 모른다. 이런 점, 두루두루 양해를 바란다.

성서 텍스트의 지평 속으로!
“고난을 받으라”는 제목의 설교는 딤후 1:8절을 본문으로 한다. 한 구절을 차례대로 명상 방식으로 공부하는 새벽기도회가 아니라 교회력에 따른 케리그마 중심의 주일공동예배라고 한다면 이렇게 한 구절만 따로 떼어서 본문으로 삼는 설교는 별로 추천할만한 방식이 아니다. 이런 방식은 제목설교로 떨어지기 쉬운데, 자칫 설교자의 주관적인 요소가 성서 텍스트를 재단해버릴 위험성이 크다. 어쨌든 그가 선택한 본문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김 목사는 이 본문의 한 단어 “고난”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이 설교에서 별로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설교였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설교자들이 걸려들기 쉬운 함정이 있다. 신앙적으로 좋은 이야기를 전하는 게 설교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설교는 신앙적 덕담이 아니요, 주례사는 더더욱 아니다. 설교는 성서 텍스트의 구체적인 지평으로 일단 들어가야만 한다. 신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생각 이전에 일단 성서 텍스트의 고유한 세계와 만나는 게 설교자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작업이다. 왜냐하면 성서 텍스트는 아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온 경험과 고백이며, 따라서 성서의 세계는 인간 삶과 그 역사가 다양하고 다채롭듯이 놀랍도록 다양하고 다채롭기 때문이다. 김 목사가 설교 주제로 삼은 “고난”에 대해서 성서는 한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말이다.
김 목사는 그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소주제를 제시했다. 첫째는 복음을 위해서 받는 고난은 나를 홀로 있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고난은 나를 주님께 가까이 하게 만든다. 셋째로 고난은 우리에게 큰 지혜를 가져다준다. 필자는 김 목사의 진실한 마음이 담긴 설교라는 점에서 고개를 끄떡이면서 들을 수 있었지만, 몇 가지 문제에 신경이 쓰였다.
약간 비판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 그 내용들이 과연 성서 본문이 말하려는 것인지 확신하기 힘들다. 성서 텍스트의 구체적인 자리가 아니라 설교자 자신의 일반적이고 주관적인 신앙경험에서 나온 설교처럼 들린다는 말이다. 만약 이런 식이라면 세 가지만이 아니라 훨씬 많은 소주제들이 열거될 수 있다. 고난은 기도하게 만든다. 고난은 찬양하게 만든다. 고난은 말씀을 읽게 만든다. 고난은 십자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고난은 성령과 교통하게 만든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 이어갈 수 있다. 이게 바로 신앙의 일반론이 파생시키는 설교의 진부성이다.
김 목사는 위의 설교에서 복음에 의한 고난과 자신의 잘못에 의한 고난을 구별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고난은 이런 고생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고난은 믿음으로 인하여 내가 감당해 나가야 할 소명, 믿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소명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난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난이라는 김 목사의 주장은 옳은가? 물론 일반론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믿음의 고난과 삶의 고난이라는 게 그렇게 딱 부러지는 게 아니다. 트집 잡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설교자들은 인간 삶의 깊이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앙적으로 덕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설교의 임무를 끝냈다고 생각하지 말고, 성서 텍스트의 역사적 지평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김 목사가 내린 결론도 역시 이런 일반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저는 이런 믿음에 대해,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왜 힘들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주보칼럼에 실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힘들게 살 때 내 가족이 편하여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는 그런 지혜가 여러분에게 함께 하셔서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승리하는 귀한 성도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일반적인 내용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서 텍스트의 구체성을 전제할 때만 유효하다. 더구나 이런 일반론은 신학적으로 충분한 성찰을 거쳐야 한다. 지금 김 목사가 주제로 다룬 “고난”은 매우 오래된 신학적 문제이다. 이미 욥기는 “무죄한 자의 고난”을 실존적 깊이와 우주론적 넓이에서 다루고 있다. 우리 인간 삶에는 알 수 없는 고난과 불행과 좌절이 넘친다. 우리는 그런 고난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아파해주고, 연대하고, 함께 투쟁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물론 신앙적으로 위로할 수도 있으며, 그래야만 하겠지만, 그런 경우에도 구체성을 갖지 않으면 정말 “설교하고 있네!”라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읍참마속
김 목사는 “힘써 살리라”(호 6:1-3)는 설교에서 “하나님의 눈앞에서 살아야 합니다.”라는 소주제를 다루면서 아간을 예로 들었다.

애인을 위해서 외투를 감추고 금을 감추었던 아간을 사람들은 다 속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리고를 점령하고 많은 전리품가운데서 아무것도 손에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간은 사랑하는 애인을 위해서 외투 한 벌과 금을 감추어두었습니다. <중략> 작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낱낱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김 목사는 이 단락에서 아간 외에도 요나와 베드로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눈앞에서 아무도 자신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해석은 호세아 본문의 오독(誤讀)이다.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개역) “사흘이 멀다 하고 다시 일으켜 주시리니, 우리 다 그분 앞에서 복되게 살리라.”(공동번역) “Er wird uns am dritten Tage aufrichten, daß wir vor ihm leben werden.”(루터 번역) 모든 번역본들의 해당구절을 보거나, 또는 1-3절 전체 문맥을 놓고 볼 때 이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눈앞에서 잘못을 감출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에 무게가 있다.  
하나님의 날카로운 눈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로 든 아간 이야기를 김 목사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일단 그는 성서 본문의 사실관계에 상당히 소홀한 것 같다. 이런 문제는 다른 설교에서도 곧잘 발견된다. 본인은 그걸 단지 옥의 티 정도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청중들에게는 설교 자체의 신뢰성 문제로 다가갈 것이다. 김 목사는 위의 대목에서 아간이 ‘애인’을 위해서 외투를 감추었다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했지만, 성서 본문에는 그런 이야기가 일절 없을 뿐만 아니라 그걸 암시하는 말도 없고, 그렇게 해석될 여지도 없다. 성서기자는 이 사건을 가능한 최대한으로 감정을 절제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서술할 뿐이다. 여호수아의 추상같은 호령에 아간은 자신의 잘못을 이실직고한다. 아름다운 외투 한 벌, 은 이백 세겔, 금 오십 세겔을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다고 말이다.(수 7:21)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간과 아들과 딸들, 그리고 모든 가축과 재산을 돌로 치고 돌무더기를 쌓았다. 성서기자는 이 사건의 마지막을 이렇게 정리한다.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아골 골짜기에 연관된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기억했을까?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이 끝나고 모세가 죽은 다음, 이들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에 나선 여호수아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지도력 확보였다. 그 지도력 문제는 단지 여호수아라는 자연인에게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운명과 연관된 것이었다. 그는 광야시절을 함께 견뎌낸 아간의 전리품 절도사건 앞에서 고뇌했을 것이다. 정상을 참작할 것인가, 아니면 일벌백계인가? 여호수아는 후자를 택한다. 그는 아간만이 아니라 연좌제를 적용해서 가족 전체를 몰살시킨다. 인간의 정리(情理)보다는 내부결속을 통해서 가나안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게 훨씬 시급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이 비참한 사건 앞에서 그들은 그곳을 ‘괴로움’이라는 뜻의 아골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아간만이 아니라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전리품을 챙겼을 개연성이 높다. 이 아간 전승의 핵심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가 드러난다는 사실이나 제비뽑기의 주술적 능력이 아니라 일종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그런 방식으로 가나안 정복의 서장(序章)을 굳건히 다질 수 있었으며, 그 뒤로도 소위 ‘제로, 섬’ 논리가 작동하는 고대, 특히 수많은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적이고 신앙적인 정체성을 유지해낼 수 있었다.
필자는 구약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간전승에 대한 위의 해석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자신할 수 없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성서 텍스트는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성서 텍스트는 매번 똑같이 적용되어도 될, 죽어있는 문서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시각을 가진 신학자와 설교자에 의해서 새롭게 열릴 수 있는, 살아있는 문서가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서를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또한 이미 창조 사건에도 함께 하셨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이끌어가는 성령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설교자들이 이 맥락을 놓치면 결국 성서는 영적인 진리가 아니라 신앙의 정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성서의 해석학적 요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성서를 단지 신앙정보로만 다루게 될 경우에 설교자들은 성서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과는 상관없이 단지 청중을 설득할 수 있는 기술에만 의존하게 될 것이다. 성서 언어가 존재의 차원의 아니라 기술의 차원에 머물고 만다는 뜻이다. 어쩌면 오늘의 설교가 이미 기술로 전락해버려서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닐까? 성서 텍스트의 영적인 깊이에 천착하는 설교자들은 설 자리를 잃고, 대신 설교의 기술에 능한 설교자들만 큰소리치는 실정은 아닐까? 성서 텍스트의 해석학적 요청에 진지한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설교자를 찾아보기 힘들어 하는 말이다.  

목회 패러다임 쉬프트
설교자는 어떻게 설교의 해석학적 요청에 부응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어떤 왕도가 없다. 성서 역사비평을 철저하게 공부해야 하고, 그 성서의 내용을 교리로 체계화한 조직신학적 사유를 훈련해야하며, 인간 삶의 흔적이라 할 인문학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이런 공부는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는다. 신학대학교의 신학과정은 사실 초보를 위한 개론에 불과하다. 설교자는 거기에 머물지 말고 평생 구도자처럼 성서와 신학과 삶을 붙들고 정진하는 수밖에 없다.
필자의 이런 주장은 목회자의 영성이 극도로 소진되고 있는 한국교회 현실에서 무의미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매 주일 예배참석자의 숫자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고, 헌금 액수도 역시 신경 써야하며, 각종 회의에 참석하고, 작은 교회의 경우에는 교회 청소와 승합차 기사역할까지, 심지어는 부부싸움을 말리러 다녀야 하는 상황에서 목사가 언제 이런 기본적인 공부와 영성의 심화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겠는가.
이제 한국의 개신교회도 가톨릭교회처럼 목사를 설교의 부담감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때가 왔는지 모르겠다. 가톨릭교회는 교구별로 주보를 제공하고, 전문가들에 의해서 준비된 설교의 기본 매뉴얼을 제공한다. 우리가 볼 때 그들의 예배(미사)가 형식적인 것 같지만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사제들의 영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지난 10년 간 가톨릭 교인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 원인도 교회 시스템과 성직자의 영성을 꾸준하게 관리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만시지탄이지만 이제라도 목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목사의 영성이 바르게 심화할 수 있는 목회 구조와 체계를 갖추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끝으로, 김 목사의 설교가 필자의 영혼 깊은 곳에 평안함을 주었다는 처음의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목회자에게는 설교의 내용보다 설교자의 품성과 태도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쪼록 김 목사의 목회를 통해서 후암백합교회에 속한 모든 형제자매들의 영혼이 풍요로워지기를 기도한다.  (성결교회 교단월간지 <활천> 200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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