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모범생 콤플렉스에 의한 복음의 훼손
-대구동부교회 김서택 목사-

설교와 잔소리
천안대학교 설교학 교수 이승진은 김서택 목사(이하 김 목사)의 설교를 분석, 비판하는 글 “강해설교,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설교의 형태와 구조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예화나 현학적인 자료로 청중의 관심사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계속해서 성서 본문의 논리와 그 본문이 오늘의 청중에게 던지는 영적인 도전에 집중하도록 유도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러한 주목할 만한 장점을 지닌 김서택 목사의 강해설교를 통해 잃어버린 많은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대한기독교서회,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 2004, 275쪽)

이승진은 김 목사의 설교를 일단 바르게 보았다. 김 목사의 강해설교는 노련한 사냥꾼처럼 집요하게 성서 본문을 물고 늘어지면서 그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청중의 영적인 상태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요소들은 별로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한다. 웬만하면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성서 본문에서 약간 곁길로 나갈 수 있으련만 김 목사는 짝사랑하듯 전적으로 본문에 매달리고 있다. 여기에는 복음의 긴박성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아울러 본문 강해만으로 얼마든지 설교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함께 작용하는 것 같다. 필자도 평소에 예화 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던 터라 공연한 것에 시간을 뺏기지 않고 청중으로 하여금 말씀에 직면하게 하는 김 목사의 이런 설교 태도에 마음이 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다. 성서 텍스트에 대한 고도의 집중력을 담지하고 있는 김 목사의 설교가 나에게는 약간 점잖은 종교적 ‘잔소리’로 들렸다는 사실이 말이다. 다른 목사들의 설교도 한국의 어머니들이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욕망을 자식들에게 투사시키면서 끊임없이 쏟아놓는 잔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형편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김 목사만을 탓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평범한 목사들의 설교는 노골적으로 잔소리라는 게 확연히 드러나지만 나름의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진정성을 담고 있는 김 목사의 설교는 그 속내가 쉽사리 포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미 눈치 채고 있는 분들이 있겠지만, 설교와 잔소리 사이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 밖에 없기 때문에 설교자가 서커스에서 외줄 타는 피에로의 중심잡기 능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할 경우에 그의 설교는 아주 쉽게 잔소리로 전락할 위험에 노출된다. 설교가 잔소리로 떨어지는 이유는 각각 다른데, 내 생각에 김 목사의 경우에는 그가 교양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도시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좋은 뜻으로 일종의 ‘모범생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종교적인 모범생을 목표로 하는 이런 설교는 아무리 세련되어 보이고, 또한 청중들의 호응을 견인해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복음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불량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설교학 교수가 김 목사의 설교를 전반적으로 상찬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몹시 당혹스럽다. 나의 영적인 시야가 이렇게 무디다는 것인지, 비틀려 있다는 것인지!  
나는 이제 이런 당혹감을 시나브로 풀어나가야 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을 피하고, 공연한 덕담으로 지면을 메울 생각 말며, 고담준론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진리와 자유의 영에 사로잡혀 이 비평의 항해를 시작하려 한다. 이 글의 제목과 연관해서 미리 한 마디 한다면, ‘종교적 모범생 콤플렉스’라는 대목보다는 주로 ‘복음의 훼손’ 현상에 주목할 생각이다. 한 번도 갈지 않은 칼 한 자루로 평생 소를 잡아왔지만 칼날이 여전히 시퍼렇다는 백정의 그 도(道)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왜 아모스 예언자인가?
이 비평 작업을 위해서 10권으로 출판된 창세기 강해설교 중에서 몇 권을 선별해서 정성껏 읽었고, 요즘 대구동부교회에서 강해설교하고 있는 누가복음에 관한 설교 중에서 몇 편을(9월12일, 19일, 10월24일, 10월31일, 11월7일) 꼼꼼히 새겨들은 끝에 그의 강해설교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길은 한권의 설교집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방법도 괜찮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의 저서가 60권이 넘는다는 사실 앞에서 기가 죽기도 했지만 대개의 내용이 동어반복 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쨌든지 이 글은 그의 모든 설교집을 검토하지 못했다는 약점이 있다.  
나는 아모스서 강해설교인 <헐고 다시 세워라>(홍성사, 2002년)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대중 설교가인 김 목사가 아모스서를 강해했다는 사실이 적지 않게 놀라웠기 때문이다. (이번에 그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놀라는 일이 많다.) 군사독재와 돌진근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대한민국의 7,80년대에 민주화와 경제정의를 향한 역사변혁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진보적 기독교 인사들이 신앙적 토대로 삼았던 하나님 말씀이 바로 이 아모스서 아니었던가.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암 5:24)라는 바로 이 말씀은 오랫동안 내 심장과 머리에 음각처럼 각인된 말씀이 아닌가. 침침하고 우울했던 유신시대와 5,18 광주민주화 이후시대를 살아가면서 구원의 역사적 차원을 체현해보려고 절치부심하던 우리에게 계시의 빛으로 다가왔던 아모스 예언자의 아포리즘은 여전히 내 심장을 뛰게 한다. 이런 마당에 김 목사가 아모스서를 설교했다니 그 반가움이 어느 정도였을는지 말이 필요 없다.
독자들께서는 이런 반가움이 철저한 배신감으로 바뀌는 경험을 해보셨는지? 이미 나는 얼마 전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의 설교에서 이런 배신감을 맛본 적이 있었다. 이 목사의 설교도 역시 한국의 대중적인 설교자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개인 실존과 교회 범주에 한정될 뿐 역사의 차원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크던 차에 그가 누가복음 1장(47-55)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마리아 찬가’를 2000년 12월 세 주일에 걸쳐서 설교했다는 사실을 인터넷으로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역사를 외면하는 목사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라도 이 주제를 다룰 수밖에 없었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 설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52)는 말씀을 이 목사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으로 해체시키고 있었다. 이 세상의 정치권력과 경제적 힘은 하찮은 것이니까 그런 것에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만 잘 믿고 살면 된다는 그의 해석 앞에서 나는 할말을 잊었다. 권력과 물질적 힘이 인간을 궁극적으로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이 어디 있는가? 문제는 그런 힘들이 구조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이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이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대처해야하는가에 있다. 만약 이 목사의 논리를 따른다면 장애인들은 이 사회가 아무리 자신들을 소외시킨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의 권력은 하찮은 것이니까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구원의 역사적 지평을 개인의 실존 안으로 해체함으로써 아주 간단히 역사 허무주의에 빠져드는 한국의 대중 설교자들을 자주 보아온 탓에 김 목사의 아모스서 강해설교는 나에게 한편으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김 목사의 아모스서 강해설교를 읽고 나는 또 다시 당혹스러웠다. 예언자들이 단지 사회정의만을 선포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아모스를 다루면서 단 한차례도 죄와 악의 사회과학적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물론 그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북이스라엘의 시대적 상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다루고 있다. 가난과 부의 문제, 법과 관습의 악용이 부분적으로 언급되긴 했지만 그 모든 내용들이 결국은 개인의 실존적 차원으로 해소되면서 그 근본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말씀의 적용을 설교의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는 분이 우리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가난의 세습문제, 교육의 불평등,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이런 문제들은 거의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분석되고 대안이 모색되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회개하고 도덕적으로 바르게살기만 하면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것처럼 주장한다.  
내가 어리석었다. 2004년 9월19일 누가복음 13:1-9 말씀을 강해하면서 2002년 미국 장갑차에 깔려죽은 우리의 딸 미선, 효선 양을 추모하는 촛불 시위를 “초만 탈 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평가한 김 목사의 세계관을 일찌감치 알아보았어야 하는데, 공연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더니 내 꼴이 우습게 되었다. 그의 역사적 냉소주의에 따르면 일제 하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이나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전반핵 평화 시위, 또는 생태보존을 위한 평화시위도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의미한 일이다.

반(半)복음, 반(反)복음
여기서 나의 비평이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관점에 치우친 것 같다고 오해할지도 모를 독자들을 위해서 한 마디 변명을 해야겠다. 나는 지금 설교자가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 또는 전통주의적인가 역사 변혁적인가 하는 관점에서만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나는 보수와 진보, 그리고 전통과 변혁이 하나님과 이 세계를 이해하고 교회의 교회다움을 세워나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양 날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수적인 입장 자체를 트집 잡는 게 아니다. 내가 여기서 제기하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김 목사의 설교가 본질적으로 복음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언필칭 복음주의자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반(半)복음을, 더 나아가서 반(反)복음을 전하고 있는 이 현상은 한국의 대다수 설교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김 목사의 설교가 때로는 반(半)복음으로, 때로는 반(反)복음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내 판단의 근거는 그가 청중들을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데에 있다. 기본적으로 복음은 기쁨의 소식이지 불안의 소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는 의도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잘 모르겠지만 청중들을 불안하게 만들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내가 최근에 듣고 읽은 설교에 의하면 그는 세 가지 방식으로 청중들의 의식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첫째, 그는 오늘의 시국을 사실 그 이상으로 불안한 상태라고 진단한다. 나는 오늘의 시국에 대해서 별로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그는 우리가 뜻하지 않은 질병과 사고 앞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좀 유치하게 나열함으로써 청중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나는 설교자가 건강보험 판매원처럼 이런 방식으로 청중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복음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셋째, 그는 청중들의 죄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나는 오늘 주로 이 세 번째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청중의 죄를 공격함으로써 죄책감에 휩싸이게 하는 이 설교 방식은 한국의 많은 설교자들이 이용하는 방식이며, 특히 김 목사의 설교에 구조적으로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은 불안정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영적인 긴장이 있습니다. 긴장하는 사람은 죄에 예민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죄에 대해 예민한 감각입니다. 그 감각을 놓치면 죄에 삼키운 바 되어 결국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헐고 다시 세워라, 홍성사, 209 쪽, 이하의 숫자는 이 책의 쪽수를 가리킴).

김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죄에 놓고 있다. 일견 매우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이런 주장이 과연 신학적으로 정당할까? 영적인 긴장이 있는 사람은 ‘죄’에 예민하다는 김 목사의 주장은 죄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친구처럼 지내셨던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라, 그 예수님을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사람으로 몰아붙였으며 스스로 죄를 지을까 노심초사하던  바리새인들의 율법처럼 들린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배 도중에 경찰에게 잡혀 갔다면, 그는 굉장히 무서운 죄를 지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웬만한 죄인이었다면 아무리 경찰이라고 해도 예배가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 줄 것입니다. 그만큼 예배는 신성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죄를 숨길 때에는 예배 중이라도 붙들려 가고, 기도 중이라고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오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303).

김 목사는 좇고 쫓기는 ‘경찰과 도둑’이라는 교묘한 수사학으로 청중을 닦달하고 있다. 그의 설교에서 이런 방식으로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이 강조되고 있는 내용만 추려내도 충분히 몇 권의 책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곧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일어날 것처럼 청중들의 심리를 쫓기게 만드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의 설교가 특히 정서적으로 불안하거나 세계관이 미숙한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 같다.  그런데 청중들에게 이런 불안감을 주는 능력은 종교, 정치, 사회 문제를 선동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례로 1992년 다미 선교회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집단에 선동당한 사람들은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팔아야겠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김 목사를 비롯해서 한국의 많은 설교자들이 청중들을 자주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들이 기독교의 죄론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악한 자가 평생 잘되는 수도 많으며 반대로 무죄한 자가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하는 일도 허다하다.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기껏 권선징악의 원리쯤으로 선포한다면 사람의 불안 심리를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나름의 목회적 성과를 얻어낼지 모르지만 결코 복음의 근본에 충실한 설교라 할 수 없다.
물론 복음이 선포될 때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안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죄와 심판의 심층적 의미가 신비의 차원에서 폭로됨으로써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것이지, 김 목사에게서 볼 수 있듯이 청중의 죄의식을 심리적으로 압박함으로써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지평이 다르다. 이를 루돌프 오토의 <거룩>(Das Heilige)에서 제시되고 있는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누멘’ 경험, 즉 거룩한 두려움이다.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되는 경험과 거룩한 두려움에 대한 경험 사이의 차이를 설교자들이 예민하게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강단에서 죄와 심판의 문제가 자주 왜곡된다. 이는 곧 설교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이비로 빠지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무식은 죄다.
설교자들이 무의식중에 청중들의 죄의식을 자극함으로써 불안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으로 설교자의 권위를 확보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숨어있는 진실이리라. 청중들이 죄의식으로 인해 불안해할 경우에 목사의 말발은 아주 쉽게 먹히게 마련이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사이비 이단의 교주들에게서 자주 발견하는데, 안타깝지만 정통교회의 설교자들에게도 흔히 나타난다. 나도 내 딸들이 어렸을 때 이런 방법을 몇 번 썼다.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싶으면 좀 과장해서 ‘무서운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해주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그때부터 얼마나 공손해지는지, 참으로 신기했다. 어느 사이에 딸들이 훌쩍 커버려 이제는 이런 방법도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게 못내 아쉬울 뿐이다.

죄의 복음?  
김 목사가 이 ‘죄의 복음’을 얼마나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는지 조금 더 따라가 보자. 설교자의 사명을 청중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김 목사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죄를 책망하는 설교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라”고 역설한다.

이스라엘이 치료받을 수 없었던 것은 책망하는 설교를 듣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축복의 설교만 듣기 좋아하고 죄 설교를 싫어합니다. 칭찬해주고 인정해주는 소리만 듣기 좋아하고 책망하는 소리를 싫어합니다. 교회는 죄를 책망하는 설교에 겸손히 귀를 기울여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79,80).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망하게 하는 영혼의 바이러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울 때에는 이런 설교에 귀를 기울이다가도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가고 나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181).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가 죄에 대한 설교의 실종이라는 김 목사의 절규를 이해 못할 바는 없다. 생활수준이 올라간 중산층 기독교인들이 죄에 대한 설교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인간적 가능성, 또는 낙관적 인생관을 부추기는 설교만 추종한다는 그의 진단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설교가 청중들의 죄를 지적하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라는 사실을 김 목사는 정말 모르고 있을까?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축복을 부추기는 설교만이 아니라 청중들을 죄의식의 노예가 되게 하는 설교가 바로 신자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양 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는 죄의식을 자극하는 설교가 청중들에게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터득하고, 그 ‘노하우’를 강해설교로 합리화하고 있는 중일까?
김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흡사 회초리를 들고 학생들을 닦달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옳고 그름의 전범을 한 손에 든 포청천처럼 “네 죄를 네가 알렷다!” 하고 윽박지르고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 김 목사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설교자들이 신자들을 죄인 취급하는 설교에 길들여져 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어릴 때부터 ‘죄인’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은 명백하고 실증적인 사실이다.    
어릴 때 부모나 스승으로부터 반복적으로 꾸중만 듣고 자란 사람은 어른이 되어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죄에 대한 설교를 반복적으로 듣고 그런 설교에 세뇌당한 기독교인들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종속적이고 위선적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프리드리히 니체가 충분히 해명했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 되풀이할 생각은 없고, 하나의 예만 들자. 구원의 신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습관적으로 죄의식이 발동해서 눈물을 흘리는 게 바로 우리의 신앙정서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죄에 대한 공격적인 설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하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새벽기도회에 한번 빠진 것 때문에 불안하게 하루를 보내는 신자들이 있을 정도이다.
아마 어떤 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늘 회개하는 마음으로 사는 게 바로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함정이 있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실존을 죄로 규정한다는 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런 죄의 세력이 허물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신앙고백적 ‘술어’(述語)이지 기독교인이 죄의식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도그마’는 결코 아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청중의 죄를 공격적으로 지적함으로써 죄의식에 빠지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죄의 세력이 허물어진 근본적 사태를 해명함으로써 청중으로 하여금 참된 자유, 평화, 정의, 기쁨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아무리 의도가 순수하더라도 청중들을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하는 설교는 생명이 아니라 반(反)생명으로 나가게 할 뿐이다. 이 반생명은 곧 복음의 훼손이다.  

오리무중에 빠진 죄의 실체
백번 양보해서 김 목사가 청중들을 용서의 기쁨과 구원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죄와 심판을 강조했다고 인정하더라도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훨씬 본질적인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의 설교가 지적하고 있는 죄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의 아모스 강해설교를 꼼꼼히 읽었지만 아직도 죄가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당신들은 죄의 세력 안에 들어있다.”는 그의 고함소리는 내 귀에 쟁쟁한데 그 죄의 실체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진짜 무서운 죄가 바로 성적인 문둥병입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밤새워 인터넷 뒤지고 비디오 보고 성인용 프로그램을 찾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심판을 부르는 짓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굉장히 무서워해야 하며, 작정하고 끊어 내야 합니다. 음란한 내용이 실린 책들이 있으면 치워 버리십시오. 음란한 비디오테이프가 있으면 태워버리십시오. 아이가 위험한 사이트에 드나드는 것 같으면 컴퓨터를 없애 버리십시오. 컴퓨터에 좀 무식해지는 것이 영적인 문둥병에 걸리는 것보다 낫습니다.(120).

김 목사는 인간의 성적 방종에 대해서 진저리를 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성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 바로 그가 말하는 기독교의 죄라는 말인가? 성서를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는 목사라고 한다면 성적 문란 상태를 묵과할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목사는 청중들을 음란물로부터 보호해야 할 훈육 선생들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음란물을 치우라고 아무리 설교 시간에 외쳐봐야 별로 실효성도 없다. 서울의 S 교회 오 아무개 목사는 청소년을 위한 ‘라이즈업 코리아 2004’라는 집회에서 청소년들이 음란물의 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데, 이런 사실을 보면 설교자들의 인간 이해가 어느 정도로 가벼운가를 알만 한다. 설교를 복음의 차원으로부터 교양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면서도 그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채 대단히 복음적인 설교가인 양 착각하고 있는 이 현실 앞에서 나는 절망한다. (서울 S 교회, 왕년에 신학대학교수였다는 김 아무개 목사는 한술 더 떠서 주례사 같은 설교를 자주하시더군.) 한 대목 더 인용해보자.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 미안해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눈물 흘리는 것도 아닙니다. 눈물 흘리지 않아도 지금 잘못 살고 있는 것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물건을 치우는 것, 떼어먹은 돈을 돌려주는 것,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거래는 손해를 보더라도 끊어 버리는 것, 구조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직업이라면 포기하고 영광스러운 실업자로 사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313).

김 목사는 떼어먹은 돈을 돌려주는 것이 진정한 회개라고 한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물건”이 무엇인지 ‘족집게’처럼 알고 있다는 듯이 그것을 치우는 게 회개라고 자신 있게 설교한다. 파렴치하게 살지 말고 건전한 윤리의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 지당한 말씀을 내가 반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언급은 상식에 속한다는 사실만 지적하고 싶다. 이런 삶의 기준은 상식적인 판단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인문학적 토대도 전혀 없는 목사가 단지 자신의 주관적 신앙경험과 교양에 근거해서 주일 공동예배 때 선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한국 설교의 위기라 할 수 있다.

죄론의 희화화
인간의 죄를 향한 김 목사의 매서운 공격은 급기야 기독교 죄론의 희화화(戱畵化)에 이른다. 흡사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면죄부를 팔면서 돈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죽은 조상의 영혼이 연옥에서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과장하는 것과 비슷한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일어난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간섭을 받을 때가 가장 안전할 때입니다. 이것도 못하게 하시고 저것도 못하게 하실 때가 가장 행복한 때에요. 죄짓고 싶은데 돈이 없고, 죄지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몸살이 나 버리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럴 때 돈 꿔 가면서 죄지으러 가고, 링거 맞아 가면서 죄지으러 가고, 하나님이 막으시는데도 담을 넘어서까지 죄지으러 가는 사람은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습니다.(343).

그가 말하는 “죄짓고 싶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홍등가로 달려간다는 것인지, 돈 떼먹으러 간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설교를 하는 김 목사의 머리 속에는 어떤 모습의 죄가 그려져 있을까? 주여, 내게 깨달음의 능력을 허하소서. 그는 기독교의 죄론을 ‘블랙 코미디’ 수준으로 추락시키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설교에 스스로 은혜 받는 날이면, 그는 출근하는 남편에게 아내가 와인 한 병 사오라고 부탁하는 텔레비전 광고까지 트집 잡아 이렇게 매섭게 질타한다.

남편이 밖에서 술 마시는 대신 와인 한 병 사 가지고 들어와 아름답게 차려 입은 아내와 한 잔 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거기에 분위기 있는 음악을 틀어 놓고 춤까지 우아하게 춘다면 그야말로 행복한 부부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산 암소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지금 너희가 와인을 찾을 때냐? 음악 틀어놓고 춤출 때냐?”고 책망하십니다.(131)

그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은 부부가 다정스럽게 와인 한 잔 나누어 마시는 것까지 책망하시는 분이라는 말인가? 만약에 내가 믿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면 정나미가 떨어질 것 같다. 이런 대목에서 김 목사의 설교가 결국 모범생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복음을 훼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 목사의 설교를 조금 더 냉철하게 분석하고, 그의 이력을 잠시 확인한 다음에야 나는 이런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기독교 신앙의 희화화는 그가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는 그 이력과 딱 맞아 떨어졌다. 한국 대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설교는 우스꽝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평범한 대학생인 내 큰 딸에게서 확인한 바이지만 그 또래의 청년들에게는 약간 모자란 듯하면서도 열정이 있는 설교가 제격이다. 그들은 자학적이거나 가학적인 웃음으로 뒤범벅이 된 시트콤이나 개그 쇼에 길들어져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도 그런 식이 아니면 먹히지 않는다. 합리성이나 주체성은 아무 의미가 없고 단지 감정적이거나 희화적인 현상에만 즉흥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김 목사가 아무리 비합리적이고 반생명적으로 설교하더라도 그들은 거기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이런 청년들의 감수성에 오랫동안 젖어든 김 목사는 자신도 모르게 신학적 반성은 전혀 없이 대신 적당하게 죄책감을 자극하고, 적당한 교양을 부추기고, 적당한 양심적 보상을 얻게 하는 설교의 요령을 체득한 것 같다. 이런 설교는 최소한 계몽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아니라 ‘잔소리’로 들릴 뿐이다. 여기서 김 목사는 “그래, 하나님의 책망을 잔소리로 듣는 게 바로 현대인의 심각한 문제이다.”라고 말할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설교읽기의 인내심
김 목사의 설교가 근본적으로 복음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나의 주장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일방적인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당신의 비평은 김 목사의 설교 중에서 일부만을 발췌해서 ‘비판을 위한 비판’에 흐른 게 아니냐? 김 목사의 설교는 이렇게 비판받을 부분보다 훨씬 복음적인 부분이 많다고 말이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근거에서 나의 이런 비평이 정당하다고 본다. 하나는 비록 김 목사의 모든 설교를 대상으로 삼지는 못했지만 결국 ‘부분’이 ‘전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비평을 통해서도 그의 설교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김 목사의 설교에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들이 부분적으로 담겨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 실체를 청중들이 분별하지 못하지만, 결국 그 전체적인 맥락이 내가 위에서 비평한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비평에 대해서 어떤 분이든지 논쟁에 참여해준다면 우리는 함께 김 목사의 설교를 좀더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면 관계상 김 목사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신학과 역사인식에 관한 문제를 충분하게 언급하지 못했다. 그가 어디에서 정보를 얻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에서를 향한 그의 가학적인 조롱(41,42),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마음에는 용서라는 것이 없다는 주장(56),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다음에 7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거나(99, 247) 사마리아에는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주장(103), 요셉의 고난이 이유 없었다거나(193),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지만 남유다는 하나님 품 안에 안겼다는 진술(348), 북한의 공산당은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단정(창세기 강해설교 3, 100), 하갈에게 쏟은 비아냥거림과 냉소(창세기 강해 3, 233) 등은 매우 섣부른 해석들이다.
그의 설교 안에는 상호 모순도 적지 않다. 잘 살거나 못사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예수 잘 믿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말씀대로 살면 사업이 잘된다고 부추긴다(118). “자기 힘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한때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그 자리가 그 자리인데, 세상적인 방법을 쓰지 않던 사람, 답답하게 하나님께만 자신을 맡겼던 사람은 눈부시게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266).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이 세상에서의 완전한 실패를 의미한다고 믿는 나에게 이런 주장은 코미디처럼 들린다.
그의 설교에서 이런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하면 거의 끝이 없을 것 같다. 나로 하여금 설교 읽기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한 이런 자가당착들은 그의 성서와 역사이해가 철저하게 이원론적이고 추상적일 뿐만 아니라 독단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이제 그만 두자. 내가 김 목사의 설교를 이렇게 거칠게 비평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내 말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고, 내 말에 동감하는 사람은 이미 이런 사태를 눈치 채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중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식별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각을 제공할 수나 있을는지.

설교자가 죽어야 성령이 산다
내가 생각하는 설교는 “자신의 주관적 신앙과 경험을 청중들에게 주입시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와 존재의 신비 앞에 직면하도록 안내하는 행위이다.” 기복주의나 도덕주의, 죄에 대한 공격, 세계 선교의 비전이 성서의 핵심적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서를 좀더 깊이 들여다보라고 권고하고 싶다. 김 목사의 경우처럼 아모스서를 읽은 목사가 청중들을 좀더 윤리적인 사람들이 되도록 설교해야한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처음부터 신학공부를 다시 해야만 한다. 아투르 바이저는 아모스서의 주제를 이렇게 설명했는데, 나는 그게 옳다고 본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예상을 넘어서 실현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신비를 가리킨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신비는 곧 역사와 존재의 신비이다. 성서를 통해서 그런 세계를 조금이라도 엿본 설교자는 가능한대로 실증적이고 공격적이고 선동적인 설교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극적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인식능력과 언어세계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에는 너무나 옹색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당위와 하나님을 말씀을 전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 사이에 설교자가 실존하고 있다는 칼 바르트의 가르침은 의미심장하다. 남녘교회 임의진 목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흥분하고 싶지 않았다. 그처럼 내 친구들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목회철학이다. 진정한 열망과 진정한 열광은, 그리고 진정한 신비주의는 편안한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피어난다.”(기상, 11월호에서).
김 목사를 비롯해서 우리 설교자들에게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해야겠다. “설교자가 죽어야 진리의 영인 성령이 산다.” 겨우 ‘큐티’ 수준의 성서읽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는 행위야말로 김 목사가 위협조로 주장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죄’(253) 아닐는지. 이 비평의 항해를 끝내면서, 대표적인 강해설교자의 설교가 복음을 훼손하는 종교적 잔소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내 마음은 불편하다. 이 글에 과격하게 표현된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김 목사만을 향한 게 아니었음을 김 목사도 충분히 헤아리시고, 너그럽게 받아주실 것으로 기대한다. (위의 글은 기독교 사상 12월호에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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