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저 '설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실천신학대학원 이승진 박사의 서평. 이승진 박사는 설교학 교수이시고, 미국 스텔렌보위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여러 권의 설교학 저서와 번역서가 있다. 기독교 사상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게재함. 정용섭 주>

 

설교자의 한계와 불가능성, 그리고 그 너머

 

 

정용섭 목사는 한국교회에 설교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기독교사상>에 연재하여 책으로 출간된 『속 빈 설교 꽉찬 설교』와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설교의 절망과 희망』은 한국교회 설교비평에 관한 관심과 연구가 한 단계 발전하는데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해 주었고, 실제 설교 현장에서도 그동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만 했던 설교에 대한 진지한 비평과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정용섭 목사의 설교 비평 작업에 해당되었던 설교자들은 대부분 한국교회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목회자들이었고 그들의 설교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감히 비평의 도전장을 내밀지 못했지만, 정 목사의 비평을 계기로 비평 당사자 본인들뿐만 아니라, 어줍잖게라도 그들의 설교를 흉내 내고 싶어 했던 예비 설교자들, 그리고 그들의 설교를 무비판적으로 들었던 신자들 모두가,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과연 표명하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반성하고 성찰해 보게 되었다.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 작업을 계기로 그간 한국교회 안에서 하나의 견고한 성역처럼 철썩 같이 믿어왔던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 세계의 허상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이들은 “그렇다면 바람직한 설교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 질문들이 저자에게는 하나의 대안이나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했나보다. 그래서 이 책은 저자가 지난 수년 동안 (아마도 2002년 정도부터) 한국교회의 설교에 대해서 선지자적인 심정으로 비평 작업을 진행해 오면서 숱하게 들었던 “그 대안”을 묻는 질문들에 대한 저자의 대안이 실려 있다. 『설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은 언뜻 보기에 “설교는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저자의 당당한 설교 이정표를 기대함직 하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어본 입장에서 보자면, 저자로부터 “설교는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한 손에 쏙 들어 오는 어떤 매뉴얼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설교는 어떤데?”라는 제목이 달린 이 책의 뒷부분 15장에서도, 이것이 바로 내가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설교의 진면목이고 당신네들도 이렇게 설교해보라는 간단명료한 설교의 이정표나 설교학의 메뉴판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자는 “당신 설교는 어떤데?” 하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게 하나도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241쪽) 하지만 저자가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저자는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언어를 풀어 놓는 인간 설교자의 한계와 불가능성을 뼈저리게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와 하나님의 언어 사이에 가로 놓인 거대한 심연, 그 어떤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무한한 심연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위로 펼쳐진 별들의 세계에 감동하고 그 별을 노래할 수 있더라도, 위로 손을 내밀어 별을 따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쳐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조롱하기라도 하듯이, 강단 위에서 자기가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인생의 비밀을 다 꿰뚫고 있으며 자기 앞에 모여든 사람들을 당장이라도 뒤집어 변화시켜보겠노라고 나서는 설교자들의 치기어린 오만함과 방자함과 위선을 질책하고 있다. 너희가 텍스트(Text)와 컨텍스트(Context) 사이의 무한한 심연을 제대로 알고서나 그 사이를 훌쩍 건너 뛰어보겠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설교와 관련하여 일관성 있게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 몇 가지 다가온다. 첫째는 설교자에게 위임된 설교의 책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언어로는 하나님의 신비를 다 담아낼 수도 없고, 설령 보잘것없는 인간 설교자의 웅얼거림 속에서 이런 방식으로 저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묘사하더라도, 그것은 자칫 인간의 언어적인 유희나 조작에 불과할 뿐이고, 생명을 살리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현현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의식하는 설교의 가능성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성서 본문에 대한 철저한 주해 작업에서 조심스럽게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성령의 은혜와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비를 먼발치에서 힐끗 경험하기라도 하려면, 설교자는 성서의 세계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를 위해서 저자가 일관성 있게 강조하는 것이 조직신학적인 사상체계와 인문학적인 소양이다. 성서의 어느 본문을 통해서든 설교자가 담아내야 할 메시지의 핵심은, 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정하신 구원을 단계적으로 그리고 주권적으로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이고, 성서 본문으로부터 이 하나님의 세계를 올바로 포착해 내기 위해서는 본문을 디딤돌 삼아서 그 본문이 궁극적으로 지시하는 하나님의 세계 속으로, 말씀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구원 세계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는데, 이 작업을 위해서는 조직신학적인 사상체계의 안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부터 시작하여 인간론과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성령론, 종말론 등등의 조직신학적인 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설교자는 성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본문이 말하는 수많은 윤리적인 교훈이나 성공 비결의 숲 속에서 나아갈 길을 잃어버린 나머지, 설교 메시지가 종교적인 담화나 윤리적인 권면, 또는 아멘과 같은 단순한 외침만을 강요하는 소모적인 영성 집회로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설교자가 성서 본문의 미로 속에서 알레고리나 문자적인 해석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그 본문이 지시하는 하나님의 세계로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도록 유도해주는 항법장치와 같은 것이 바로 조직신학적인 사고 체계라는 것이다.

또 이 책에서 바람직한 설교를 위하여 저자가 일관성 있게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인문학적인 소양이다. 문학과 역사, 철학으로 분류되는 인문학 속에는 이 세상과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의 흔적들이 퇴적되어 있다. 설교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동시에 그 하나님이 관여하고 개입하여 다스리시는 역사와 세상을 품어내려면, 당연히 역사와 세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퇴적물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설교에 대해서 고민하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인문학적인 소양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여기에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관한 깊이 있는 논의들을 다루는 일반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교육학, 심리학, 그리고 자연과학과 물리학까지라도 가능한 모든 학문 분야들의 기본적인 관심사나 동향 정도만이라도 포함시키고 싶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설교가 자꾸만 상식을 외면하고 자신들만의 언어를 고집하는 폐쇄적인 은둔 집단의 언어 놀이처럼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나 일반 학문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생겨나는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공해 주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설교 속에서 그 해답이 적실성 있게 들려질 수 있도록 하는 접촉점과 출발점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것들이 바로 이러한 인문학적인 소양이고, 강단에서 초월적인 하나님의 신비를 일상의 세계로 품어낼 때 그 메시지가 일상의 상식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인문학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아쉬움 한 가지가 있다. 이 책에는 매 주일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강단을 오르는 겸손하고도 진지한 설교자의 모습이 강하게 베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매 주일 강단에 오를 때마다 저자는 “어떤 절대적인 힘 앞에서 막막해진다.”(236쪽)라고 고백하는가 하면, “나만 모든 게 깜깜하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분명한 걸 찾아봐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236쪽)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막막함은 저자 혼자만 느끼는 비통한 심정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교회 10만여 명의 설교자들 중에서 마치 스스로를 “언어의 연금술사”나 “연설의 제왕”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설교 한 마디로 청중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마력을 지닌 사람인 양 거만함으로 설교단에 오르는 사람이 과연 현실적으로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실제로 그런 설교자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는 설교자들 중에 적지 않은 설교자들이 바로 이런 부류의 목회자라는 점에도 동의하고, 또 적지 않은 현직 설교자들이나 예비 설교자들이 이들의 언어적인 마력을 생명처럼 모방하려고 애쓰는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생기는 이견(異見) 한 가지는, 한국교회 안에 10여만 명의 설교자들 중에서 그토록 무지하고도 거만한 설교자들도 적지 않겠지만, 반대로 매 주일 하나님과 회중 앞에서 떨리는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강단을 오르는 설교자들 또한 결코 적지 않다는 생각이다. 저자만 그렇게 “절대적인 힘 앞에서 느끼는 철저한 무력감”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 땅의 적지 않은 설교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회중 앞에서 세상 앞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 특히 설교자로 부름 받은 이 놀랍고도 막중한 책무 앞에서 비장한 긴장감과 두려움을 품고서 매일 매일 강단을 오르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본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겉으로 보기에는 대중적인 기만술, 찰나의 피상적인 감동, 소비주의적이고 개인 이기주의적인 영성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터넷이나 기독교 방송에 비춰지는 유명설교자의 설교가 전부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기를 소망하는(사 1:9) 남은 자들(the remnants)을 통하여 지금도 한국교회 안에서 은밀하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교회의 역사가 그러하고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이 늘 그러하듯이, 인터넷과 TV, 또는 대형교회 안에서 인기를 끄는 인기 있는 설교자들의 설교가 한국교회를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런지 모르지만- 보잘 것 없는 질그릇이라도 들어 쓰셔서 자신의 신비로운 구원의 섭리를 이끌어 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들풀처럼 모질게 생명력을 이어가는 수많은 작은 교회들과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설교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구원을 비밀하고도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끌어가고 계시다. 우리가 이 점을 확신할 수 있다면, “나만 모든 게 캄캄하다”고 비통해 할 것이 아니라(왕상 19:10) 우리의 초점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이동하여, 그 주권 아래 있는 한국교회 설교에 대해서도 좀 더 긍정적인 담론을 펼쳐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끝으로 『설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깊은 성찰과 고민 속에서 생겨나는 해답 하나가 있다. 그것은 성서 텍스트의 창문을 열어젖히고서 대면하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세계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인간이 설교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이 신비로운 사건에 대한 체험과 감동이 없이 그저 맹목적인 자신감과 의무감의 늪에 빠져 있는 설교자들을 향한 저자의 선지자적인 각고(刻苦)의 메시지를 통해서 이 땅의 모든 설교자들이 설교의 본질을 새롭게 성찰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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