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교(서울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1)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 설교에 손을 대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설교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까지 교회는 설교를 성역으로 여기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설교를 거론해 온 게 사실이다. 당장 담임목사를 청빙할 때 후보자들의 선정 기준에 설교평가가 포함되었고 신학적 논쟁을 할 경우에도 설교는 중요한 공격과 변증의 자료가 되었다. 또 한국의 교회를 진단할 때에는 항상 설교의 건강성 문제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논자가 여기서 표현하는 ‘설교에 손을 댄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이런 양상들과는 전혀 다른 흐름이 감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청빙에서 심사되는 설교는 밀폐된 심사의 종결과 더불어 그 안에서 용도가 폐기되었고 한국강단을 염려하는 쓴 소리들은 강단의 전반적인 현상을 진단하는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설교자의 일반화가 포장지로 사용되곤 했다면, 이것은 기존의 양태와 달리 특정한 설교자의 설교가 공개적으로 해부되고 비평되는 신지평이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손을 댄다든지 손을 탄다든지 하는 표현이 뉘앙스 상 부정적으로 들리는 게 사실이지만 애초부터 그런 예단을 가질 필요는 없으며 논자 역시 그런 의도를 전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표현이 좀 거칠고 평범한 흐름이 깨지는 어떤 당혹감을 안겨주는 것처럼, 최근의 현상들이 우리에게는 선뜻 기뻐하기 힘든 당황으로 여겨지는 것은 사실이다. 왜 이것이 충격처럼 느껴지는가는 그동안 우리가 가져온 설교에 대한 이해를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주지하는 것처럼 한국교회에서 설교는 타부의 영역이자 거론불가의 성역이었다. 2007년 봄 <목회와 신학>에서 전국의 교역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8.7%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 선포하는 것”이라고 대답했고, 75.5%가 과거에 비해 목회사역에서 설교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고 대답했다. 또 98.3%는 설교가 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런 수치들은 적어도 한국 강단에서 설교의 위상과 중요성이 매우 공고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목회자들의 설교에 대한 이해나 목회사역에서의 중요성보다 더 원론적인 설교의 위치를 천명한 것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삼중적 양태를 설명하면서 성육신된 하나님 말씀(Geoffenbartes Wort Gottes)인 예수 그리스도, 기록된 계시의 말씀(Geschriebenes Wort Gottes)인 성서와 더불어 설교를 선포된 하나님 말씀(Verkuendigtes Wort Gottes)으로 자리매김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 엄청난 선언 위에 오늘의 개신교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문자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린다는 것이 어찌 충격으로 느껴지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에 대한 비평은 피할 수 없는 당위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설교가 가진 속성상 반드시 필요하다. 칼 바르트(K. Barth)가 잘 요약한 것처럼 설교는 행동 중에 있는 하나님이다.(Predigt ist Gott in Aktion)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 우리 인간들에게 말을 걸어오시며(Deus loquens) 인간을 위해 봉사(Dienst am Menschen)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봉사와 개입, 그리고 설교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말해야 한다(Rede von Gott)는 사실은 설교가 가진 신적 차원(Goettliche Dimension)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더욱이 설교가운데 현존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인간을 치유하시고 변화시키심으로 설교를 사건으로 만드신다. 성령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비평을 넘어서는 영역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는 설교자라는 매개와 통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즉 하나님의 온전하신 말씀과 그것을 듣는 불완전한 인간 사이에 하나의 매개와 통로로 설교자가 위치한다. 이 설교자는 마르틴 루터가 주장하는 것처럼 말씀의 사역자로 부름 받았다는 내적 소명(vocatio interna)과 일정기간 신학수업과 안수를 통해 내적 소명을 객관화한 외적 소명(vocatio externa) 그리고 교회를 통한 부름이라는 간접적 소명(vocatio mediata)을 받은 자이다. 그러나 이런 소명과 준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설교자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당장 필립스 부룩스(P. Brooks)가 말한 것처럼 인격을 통한 전달로서의 설교에서 설교자의 인격이 문제가 된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핵심적인 능력, 세계를 보는 통찰력과 예언자적인 성찰, 복음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 언어를 통한 전달이라는 차원에서의 언어이해와 구사력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동일한 성경본문을 가지고 설교한다 하더라도 설교자가 가진 신학과 신앙 가치관과 세계관 정신세계 사고능력 등에 따라 매우 다른 설교가 나온다. 말씀은 동일하지만 그 말씀이 통과하는 관으로서의 설교자는 다르다. 바로 이 ‘다름’으로서의 설교자, ‘불완전하고 상대적인 존재’로서의 설교자는 설교가 지닌 인간적 차원의 중심이다.
이러한 완전치 않은 설교자에게 말씀을 맡겨놓고 아무런 통제나 조정의 노력이 없다면 그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실로 심각한 게 사실이다. 이미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John Calvin)이 미리 내다본 것처럼 자칫하면 자기가 이야기해놓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개혁교회 목사는 자기 말의 완전성과 무오성을 주장하는 가톨릭의 교황보다 더 패역한 자가 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우려는 한국교회에서 어느덧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어 있다. 좀 듣기 민망하지만 <기독교사상>에서 설교심포지엄 광고를 내면서 한국교회 강단을 지적한 쓴 소리가 마냥 과대포장된 것만은 아니다.

한국교회 강단은 거의 ‘폐쇄된 성역화’였습니다. 이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설교자 개인의 욕망을 채우려 들거나 교권적 군림을 꾀한다든지, 삶과 시대적 상황으로부터의 유리, 설교로 포장된 신변잡기적 잡담, 설교로 포장된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적 이기심을 포장하는 경우와 오도된 역사인식을 주입시키는 사례들은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1)

이런 문제가 개교회 문제나 한국교회 문제로 그치지 않고 사회를 올바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함으로 교회와 기독교인이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는 유경재의 지적도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설교비평이 정당하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원론적 이유와 이에 덧붙여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의 심각성으로 인해 더욱 힘을 얻는다. 이런 맥락에서 설교비평의 당위성에 대한 루돌프 보렌(R. Bohren)의 지적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약속 밑에서 행해진다고 하면, 설교비평은 설교하는 자가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사실이 표적이 된다. 설교자가 비평을 피하려고 하면 그것은 그의 죄로의 타락인 것이다. … 비평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설교자는 마찬가지로 회중으로부터도 설교의 평가로부터도 몸을 피하는 것이다. 설교비평은 듣는 자의 듣는 일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설교자의 설교에 도움이 된다. 즉 청중을 위해 말하고 본문의 변호를 맡는 일로 인하여 설교자에 대한 봉사를 하는 것이다.2)

결국 한국교회에 불기 시작한 설교비평은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차원을 전제한다. 즉 설교자라는 인간적 차원에 대해 손댈 수 있다는 확신과, 현실 설교에 대한 부정적 판단이 그것이다. 그래서 2004년 신학심포지엄을 통해 한국교회 설교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시동을 건 <기독교사상>의 편집주간 한종호가 설파한 설교비평의 의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정신을 좌우하는 작업들에 대한 비평작업은 그 자체로서 사회의 정신적 역량을 기르는 막중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에 깊숙이 닿아 변화를 이룩해 가는 설교야 말로 가장 우수한 비평작업이 받쳐주어야 심도 있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비평이란 설교에 담겨있는 오류를 지적하고 그 근거를 제시하면서 논점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기르고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촉구한다.3)

2.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흐름과 양상
사실 한국교회에서 설교에 대한 평가는 그것이 본격적인 설교비평이든 아니든 오늘에 갑자기 등장한 이야기는 아니다. 광의적으로 한국교회의 설교를 총체적으로 진단하는 작업은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시도되어 왔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설교를 구체적으로 거론하기 보다는 설교라는 주제를 총체적으로 진단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관심하는 설교비평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설교에 대한 광범위하고 두루뭉술한 평가와 달리 설교자 개개인을 평가하는 작업 역시 꽤 오래전부터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작업은 그 성격상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칭송과 헌사
설교를 언급하는 책자가 등장하면서 우선 눈에 띠는 것은 비평이나 비판이 아닌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순수칭송과 헌사이다. 한순진이 편집한 『왜 청중들은 그들의 설교에 매료되는가?』라는 책은 이동원, 박종순, 곽선희, 박성근, 이복렬, 김동호, 정근두, 박정근, 방선기, 조봉희의 설교를 다루면서 이들을 공통적으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일관되게 수행하는 능력을 가진 분들, 실천신학 이론에서 취급될 수 없는 이론들을 나름대로 잘 정립하여 그것으로 능력 있는 설교, 능력 있는 사역을 하는 분들로 요약한다.4)
여기서 설교자를 평가하는 양상을 이동원 목사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이동원 목사 그는 현대 강단의 위기상황을 기회로 바꿔가는 설교가이다. 오늘날과 같이 설교하기 힘든 때, 그는 어쩌면 설교제조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 그는 만인이 알고 있는 뛰어난 설교가이다. 강의하는 듯한 자연스러움과 완벽하면서도 아름다운 언어구사, 억양과 제스처,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유머사용… 이런 특유의 감각으로 다듬어진 그의 강해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 설교의 미학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아 저렇게도 설교할 수 있구나!’ 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는 설교작성(준비)에서부터 전달(커뮤니케이션)까지 설교자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다.5)

이 책은 이어 이동원 목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다루는데 주로 이목사의 설교 작성요령, 노하우 등에 관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이동원목사의 설교한편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성격의 책으로는 이근미가 편저한 『사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곽선희를 비롯 25인의 설교자를 선정하여 설교자의 소개, 설교적 특징 그리고 대표적인 한편의 설교 소개를 하고 있다. 가령 설교자 곽선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의 설교는 같은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감리교 신학대학 김홍기 교수는 “한국교회 역사상 이렇게 깊이 있는 신학적 통찰을 갖고 설교한 설교가들이 드물다. 21세기 정보화 전문화 시대에는 평신도들의 지적 신학적 수준이 높아져 갈 텐데 곽선희 목사의 스타일을 한국교회 설교가들이 배워서 신학적인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6)

이상에서 소개한 두 권의 책은 유명한 설교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설교자로서의 위치와 긍정적 기능 및 영향 그리고 설교의 주요 특징을 설명한다. 그 기조는 설교자의 단점을 지적하기 보다는 설교의 장점과 긍정적인 영향을 설파하는데 놓여있다. 따라서 이런 접근은 설교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는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칭송과 헌사라고 특징지울 수 있겠다.

2) 설교자 및 설교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해석
한국교회사학 연구원에서 1995년부터 시도한 한국교회 설교가 연구는 한 사람의 설교자와 그의 설교를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고 연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용기 목사에 대한 연구는 여러 명의 학자에 의해 각기 다른 방식을 조명하는 방식으로 시도되었다.
박명수는 오순절 운동과의 연관 하에서 조 목사의 오중 복음과 삼박자 축복을 조명하면서, 조 목사의 신학이 복음을 근대사회에 적용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신학으로 그의 메시지는 성서를 영육의 이원론의 구조에서 해방시켜 영육의 구조를 넘어서서 통전적인 자세로 성서를 보게 하고 그것이 한국 민중에게 잘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고 결론짓는다.7)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맥락에서 서정민은 조용기의 설교를 모성적 민중 성령운동으로 명명하고 그의 설교의 대상이 민중이며 방법이 모성적 치유에 있으며 민중의 고난이 극복되는 데에만 주안점이 주어질 경우 희생적 신앙이나 십자가가 망각되는 불균형이 초래될 수 있지만 조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고뇌 십자가 주의 이름으로 핍박받음을 먼저 강조함으로 그것을 통한 영혼의 잘됨, 그 신앙의 성숙 다음에 소망하는 범사의 축복이 모성애적 칭설교의 기맥을 타고 흐른다고 주장 한다.8)
기독교 전통 교리와 신학의 입장에서 조용기의 신학을 연구한 임승안은 결론적으로 조 목사의 설교를 다음과 같이 평가 한다.

조용기 목사의 신학은 세계교회의 어느 특정한 한 전통에 국한되지 않되, 기독교의 공인된 교리와 역사적인 신앙운동의 맥락 가운데 서 있다.… 그의 신학은 서방과 동방이 만날 수 있고 어거스틴과 다마스커스의 요한이 만날 수 있고, 칼빈과 웨슬리가 만날 수 있는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이며 종합적인 신학이며 역동적인 신학이다.9)

조용기 목사의 설교에 대한 목회학 입장에서의 평가를 맡은 이호열은 조 목사 설교의 주제변천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청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설교, 치유목회의 장으로서의 설교, 승리체험으로서의 설교, 설교의 대주제로서의 성령충만, 설교주제의 대전환(나눔의 장으로서의 설교)등으로 분류하고 그의 장점을 정체성 위기와 경제적 곤란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 정체성의 위기와 곤란 중에 접촉점을 찾은 것으로 진단한다.10)
이상의 인용에서 볼 수 있듯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이 시도한 설교평가는 유명설교자의 설교를 직접 평가/분석하기 보다는 설교를 통해 해당 설교자의 사상과 신학을 연구자의 전공분야의 시각에서 조명한다는 점에서 독특성이 있다. 여기서 설교자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은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각 전공분야의 전문가들이 각각의 입장에서 연구대상자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틀을 잡아주는 것이 주된 방향이다. 따라서 설교자체보다는 설교자의 신학과 사상을 분석해 그만의 특징을 구형해 준다는 점에서 헌사적인 성격이 강하다.

3) 장점과 단점의 균형 잡힌 비평
이상의 긍정일변도의 설교자 소개 차원과 달리 본격적인 설교자에 대한 분석과 비평은 국내의 여러 설교학자들에 의해 시도되어 왔다. 1997년 발간된 정장복 교수의 『설교의 분석과 비평』을 필두로 설교학자들에 의한 설교비평이 행해졌는데 대체로 이들 비평들은 설교의 장점과 단점을 세세한 영역에 걸쳐 균형 있게 다루었다. 간헐적이지만 간단없이 지속되어온 설교학자들에 의한 비평작업은 그러나 오늘의 화두가 된 설교비평을 이끌지 못하였고, 또 오늘의 설교비평만큼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만사에 때가 있다는 성경말씀으로 보면 설교전문가들의 설교비평은 설교비평이라는 ‘화두의 때’에서 한참 비켜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교회의 설교비평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설교전문가들이 아닌 인사들에 의해 설교비평이 시도되면서부터이다. 설교전문가들의 시각으로 볼 때 비전문가들에 의한 설교비평은 분명 우려되는 면이 한 둘이 아니지만 설교에 실망한 일반 성도들에게는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설교학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문가의 설교비평이 모두 그릇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설교비평을 본격적으로 연 것이 2004년 <기독교사상>에 의한 신학심포지엄이었다면 거기 참여한 설교비평자들 중 적지 않은 설교비전문가들이 매우 긍정적인 설교비평의 균형을 갖추고 있었다.
예를 들어, 차정식의 곽선희 설교비평은 긍정과 부정의 비평이 균형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곽 목사의 설교수사형식(언어사용, 문장의 길이, 어법과 문법 등), 성서해석(역동적이고 원근법적 조망, 헬라어 해석을 즐기는 경향성)등을 분석하면서, 강남의 회개한 부르주아를 양산한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반면 그는 현대시리즈라 할 만큼 일정한 소재로 경도된 설교주제의 경향성을 비판한다. 즉 곽 목사의 설교에는 현대인을 가감 없이 폭넓게 포함시키기 보다는 서구적 모델에 치우친 특정한 부류의 현대인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11)
차정식은 곽 목사의 설교가 행복에 대한 이해를 교양주의적 행복론으로 두루뭉술하게 풀고 있고 성서적 복의 개념과 어떻게 소통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고민이 엿보이지 않는 점, 개인주의적 내면주의적 차원인 주체적 신앙의 위험성(공동체의 총체적 관심사를 둔화시키고 낯선 타인의 얼굴을 향해 소통과 연대를 구축하려는 운동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음), 보수적 역사이해 즉 역사허무주의(역사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의로운 소수의 역할을 강조하는 영웅주의적 역사이해에 결부된 듯하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사후 영생의 희망으로 국한시키는 신학적 한계를 단점으로 지적한다.12)
차정식은 김진홍 목사 설교에 대해서도 긍정과 부정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즉 김 목사 설교의 장점으로 차정식은 말이 아닌 온 몸으로 절규하는 설교, 승화된 파토스의 경륜, 설교의 중심을 이루는 성서말씀(성서전반을 관통하는 기본 원리와 맥락에 충실, 상식과 상상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강해설교, 조화와 균형의 변증법적 강해설교), 설교의 긍정적 파장 등을 든다. 반면 김 목사 설교가 갖는 부정적인 면으로 차정식은 만담형식의 설교로 인한 방향상실 및 응집력 이완, 무리한 성서해석, 개량적 복음주의 안에서의 오락가락함, 위대한 자들을 과잉으로 빚는 거품 등을 든다.13)
비록 설교의 내용적인 면만을 설교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러한 설교비평의 균형은 이상훈의 옥한흠 설교비평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이상훈은 옥한흠 설교의 장점을 치유로서의 설교(그가 어떤 목회자보다 설교사역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설교에서 목회자는 상처받은 치유자로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설교(그리스도를 통한 개인인격의 변화가 개인 삶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옥 목사의 설교는 부패한 경제계와 정치계,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 구석구석에 빛과 소금으로 존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대한 촉구로 이어진다) 그리고 제자됨을 위한 설교 등으로 평가한다. 반면 이상훈은 지나친 논리정연함, 교회의 엘리트 의식, 타종교비하, 속어사용의 문제 등을 옥 목사 설교의 단점으로 지적한다.
모든 설교자는 장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설교비평이 설교자의 양 면을 균형 있게 다루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런 맥락에서 김세광의 조용기와 김선도 목사 설교 비평, 이상훈의 홍정길 설교 비평, 심광섭의 김홍도, 감삼환 설교 비평 그리고 김회권의 김동호와 오정현 설교 비평은 비록 설교를 종합적으로 다루지는 못하였지만 기본적인 설교비평의 원리는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설교비평’을 화두로 끌어 낸 비평
위에서 살펴본 설교비평의 양상과 다른 매우 충격적인 설교비평의 한 양상이 한국교회에 출현했다. 그 충격은 설교비평을 공론화하고 이슈화함으로 설교비평의 불모지인 한국교회에 고민의 전기를 마련할 만큼 강력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설교비평을 한국교회의 화두로 등장시킨 것은 설교학을 전공한 일단의 학자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차적으로 2001년에 출판된 한종호의 『전병욱 비판적 읽기: 설교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가 비판적 비평의 물꼬를 텄다면 설교비평을 본격적인 화두로 등장시킨 것은 정용섭이라는 판넨베르그를 전공한 한 조직신학도이다. 많은 설교학자들에 의해 시도된 설교비평이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반면 그에 의해 시도된 설교비평은 놀랄만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기독교사상>에 연재했던 비평들을 모아 출판한 설교비평집 『속빈 설교 꽉찬 설교』,『설교와 선동사이에서』는 단기간에 재판을 거듭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에 의해 시도된 설교비평은 적지 않은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박득훈(언덕교회 목사)은 “정용섭 목사의 『속빈 설교 꽉찬 설교』를 읽는 내내 기대와 설렘이 내 마음 한 구석에 흐르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설교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점점 넓어지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 책은 설교자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설교자를 하나님의 진리의 완벽한 매개자로 신격화하는 것은 결국 설교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는 위험한 일임을 깊이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교회 성도들이 베뢰아 성도들처럼 스스로 설교 비평가가 되어 설교 내용이 진리인가를 검증하기 위해 성서 텍스트의 세계로 깊이 들어갈 수 있길 바란다”는 말로 설교비평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14)
송기득 역시 정용섭의 설교비평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어쩌면 그렇게 비평 상대의 설교가 지닌 내용과 특징을 잘 밝혀내고, 그 설교의 문제점을 제대로 꼬집어서, 아주 건전하고 진지하게 평가하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것은 가히 천재적이라 할만하다. … 정 박사야말로 설교에 대해 비평다운 비평을 했다고 여겨진다. …나는 정 박사의 설교비평을 높이 평가한다. 그의 설교비평이 한국교회에서 ‘속빈 설교’가 사라지고 ‘알찬 설교’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그의 진정성을 보였다는 뜻에서도 그렇지만, 그의 설교비평은 한국 신학에 ‘설교비평학’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뜻에서도 그렇다.15)

민영진은 한걸음 더 나아가 정용섭에 의해 제기된 설교 비평의 공헌을 몇 년째 지난한 작업을 해오는 놀라운 정성, 비평과 치유의 조화, 용기 있는 비평, 종교개혁을 몰고 올 수 있는 힘을 소유한 비평, 설교비평의 방법과 용어개발, 설교비평의 한 장르를 형성, 평자의 진솔한 고백 등으로 정리한다.(<기독교 사상>, 2006년 5월호)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 달리 정용섭의 설교비평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당장 정용섭 목사에 의해 설교를 비평받은 당사자들의 반론에서 이런 흐름이 감지된다. 그 한 예로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는 자신을 향한 정용섭의 설교비평에 대해 “비평이 학문적 객관성을 상실하고 글 쓰는 이 주관에 따른 곧 비판을 위한 비평으로 보일 때, 그 대상자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는 법이다”라며 반론을 제기한다.16)

원문호(기독교이단사이비연구대책협회 상임회장)는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을 진리를 무시하는 속빈 평가로 평가절하 한다.

왜냐하면 영성신학을 신봉하는 바탕에서 설교해방 대안이 가톨릭의 전통 미사와 강론 귀환 모델을 제시한 흠모론 추종자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설교 비평을 의도한 설교해방의 대안이, 그럴싸하게 공감이 되는 비평의 부분이 있더라도, 이는 사단의 변론과 언쟁으로 떠버리는 글쟁이 간계인 사단의 참소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좇는 것이 아니다.17)

설교비평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한국적 현실에서 한사람의 설교비평에 대해 이러한 뜨거운 찬반양론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는 하나의 ‘사건’이다. 따라서 논자는 이 글에서 찬반의 중심에 선 정용섭의 설교비평에 초점을 모으려 한다. 전반적으로 정용섭에 의해 제기된 설교비평의 당위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큰 이의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우려가 잔존하는 것은 그의 비평이 보이는 파격성과 당혹성 때문이다. 지금까지 설교학 교수들에 의해 시도된 설교비평은 그 균형성에 비해 어떤 자극적, 도발적 표현을 쓰지 않았다. 설사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에도 최대한 예의를 갖춘 정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용섭의 설교비평에는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김기석, 박종화, 민영진 등 몇몇 설교자를 제외하고는 매우 공격적이고 곤혹스런 인격모독형 발언들이 전진 배치되어 있다.
당장 각 설교자의 설교를 비평하면서 내건 제목이 적잖이 섬뜩하다. 김서택의 설교는 “종교적 모범생 콤플렉스에 의한 복음의 훼손”, 이동원의 설교는“규범설교의 역사허무주의”로, 장경동의 설교는 “허무주의 영성”으로 전병욱의 설교는 “들리는 설교와 들리지 않는 설교”로, 정필도의 설교는 “기독교 신앙의 은폐된 폭력성”으로 그리고 릭 워렌의 설교는 “기독교 신앙의 도구화”로 각각 명명되었다.18)
또한 김남준의 설교에 대해서는 “청교도신앙의 영적 결벽증”, 김동호의 설교는 “예언과 선동의 갈림길에서”, 김진홍의 설교는 “영웅이야기에 밀려난 하나님 이야기” 그리고 박옥수의 설교에 대해서는 “구원을 향한 과도한 욕망의 끝자락” 등으로 명명되어 있다.19)
이러한 제목은 이미 비평내용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해당 설교자의 당혹과 충격을 상상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설교비평의 내용은 위의 제목보다 더 충격적이다. 일례로 김진홍에 대해서는 “생각 없는 목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망각에 노출되어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20)

기독교 신앙에서 변증법적으로 작용하는 존재와 행위의 내면적 깊이를 진술하는 본문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도그마로 단순화되고 말다니, 얼마나 허무한 설교인가? 청중들이 아무리 은혜를 받는 것처럼 느껴져도 근본적으로는 성서 텍스트를 죽이는 설교이다.… 텍스트의 깊이를 외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무의미한 설교가 되고 말았다.… 김 목사의 설교가 본문에 충실하지 않은 이유는 김 목사가 성서텍스트 안으로 들어갈 능력이 없으며 그럴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좀 더 냉정하게 말하면 김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는 듯하다.”21)

목회자들에 의해 가장 닮고 싶은 설교자로 뽑힌 이동원에 대한 평가 역시 곤혹스럽기 이를 데 없다.

결국 이 목사의 설교를 듣고 난 뒤의 내 마음은 은혜 없음 정도가 아니라 분노라는 것이 더 솔직한 것 같다. 하나님의 신비는 오간데 없이 인간의 심리만 넘쳐나서 답답하고 동성애자들에게 퍼붓는 독설이 마치 내게 말하는 듯하여 심히 섭섭하고 북한을 향한 조롱도 철없는 내 동생에게 한 듯하여 분하고 미국을 향한 사대주의적 아첨을 보고 얼굴이 화끈거렸다.22)

이러한 표현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가 손댄 모든 설교자들에 대한 비평에서 예외 없이 발견된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설교비평의 본질을 훼손하고 오도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 적당한 독이 치료에 쓰이는 반면 적정선을 넘는 독은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것처럼 작금의 설교비평은 이런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서상 분석대상자에게 치사량처럼 느껴질 수 있는 이러한 맹독성이 설교비평을 이 땅의 화두로 끌어 올린 결정적인 동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비평을 넘어 비난의 선을 넘나드는 이러한 비평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긍정적으로 보면 이렇게 해서라도 설교자들을 토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설교비평의 문제를 공론화시킴으로 ‘생명 없는 성역’이 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설교를 일깨워보려는 충정이든지, 아니면 김종두가 진단한 것처럼 <기독교사상>이 2004년 10월호 이래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보수적=반개혁적=반역사적 등식의 권력담론을 지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23)

3.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항목과 기준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교회에 설교비평이 어떤 흐름과 양태를 띠어 왔는가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흥미 있는 것은 비평의 대부분이 비평자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과 기준에 의존하고 있기에 설교비평의 기준과 항목들 역시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우선 눈에 띠는 것은 설교자의 핵심적인 특징(신학적, 사상적)을 초점으로 설교를 분석하는 경향이다. 즉 어느 한 설교자에게 붙어 다니는 독특한 특징을 설교비평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설교비평은 설교 전반에 대한 분석보다는 설교자의 특징이 기준이 된 설교내용에 대한 분석으로만 국한된다. 예를 들어 김남준의 설교는 그의 청교도적 영성이 설교비평의 전체 주제로 등장하고, 윤석전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설교비평의 핵심 주제로 다뤄진다. 박영선의 경우는 그의 성화라는 교리적 주제를 설교평가와 비판의 중심으로 삼는다.
둘째, 설교비평의 항목으로 발견되는 것이 설교자의 성경해석이다. 멜랑히톤이 ‘해석과 적용’(explicatio et applicatio)이라는 설교의 공리를 제창 한 이래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설교의 기본이자 핵심이 되어 왔다. 설교자의 첫 번째 임무가 말씀의 해석임을 염두에 둔다면 설교비평이 성경 해석을 중요한 비평항목으로 취급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셋째 설교의 언어사용 문제가 비평의 항목으로 취급되고 있다. 설교가 ‘말’임을 염두에 둘 때 설교자의 언어사용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심광섭은 김삼환의 설교를 분석하면서 그의 언어사용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분석한다. 즉 김 목사가 설교를 다양한 문장으로 시작함으로 회중을 집중시킨 것, 새로운 명제 제기, 어떤 문제에 대한 분명한 호불호를 통한 감성적 접근, 리듬감 있는 말의 사용한다는 것을 평가한다. 특히 명령형을 사용함으로 회중에게 압도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들리게 하고, 청유형을 통해 회중의 자발성 유도, 고백형사용을 통해 말씀의 인격성 높임, 대조법사용을 통해 스스로 자각 유도, 앞의 부정과 뒤의 강한 긍정을 통해 말씀의 초점을 하나로 모으는 것 그리고 역설과 반문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 들을 높이 평가한다.24) 하지만 놀랍게도 이 문제를 비평항목으로 취급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넷째, 일부 비평자들 만이 주목한 아쉬움이 있지만 설교에서 사용된 수사형식도 중요한 설교비평의 항목으로 취급되었다.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연설로서의 설교훈련이 부족하기에 설교의 수사적 치장에 소홀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설교비평에서도 이 문제는 거의 취급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다만 설교학자들이나 차정식 등 일부 비평자들 만이 이 문제를 거론할 뿐이다.2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까지 한국교회 설교비평은 설교라는 독특한 장르를 전체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설교의 구성요소 중 어느 일부분에 국한되어 온 경향이 강하다. 특히 설교비평의 물꼬를 연 최근의 설교비평은 주로 설교의 내용에만 치중하고 있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면 이러한 설교비평은 어떤 기준에 의해 행해져 왔는가? 비평의 기준은 곧바로 비평의 결과를 결정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고 비평작업의 핵심을 이룬다. 설교비평을 세간의 화두로 등장시킨 최근의 설교비평으로 우리의 논의를 국한시킬 경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첫째, 설교비평자의 설교이해가 설교비평의 기준으로 등장한다. 설교비평을 이끈 비평자의 설교이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26)

하나님 나라와 그의 통치와 그의 미래와 그 완성을 성서와 2000년 기독교 역사, 그리고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서 풍부하게 제시하기만 하면 설교자와 신학자로서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145)…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는 필요에 따라서 평화 생태,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설교는 그것 너머에서. 또는 그것에 내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신비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바로 2000년 전에 이미 역사 안에서 발생했지만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그 계시사건에 집중해야 한다. 성서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으며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의 흔적인 신학도 역시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58)

둘째, 설교비평자의 ‘설교적 취향’이 설교비평의 기준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이 기준은 김기석의 설교를 다음과 같은 평가로 이끈다.

필자는 그의 설교를 들으며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오랫동안 가깝게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런 느낌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이 지면을 채우고도 남을 것 같다. 그의 책읽기와 글쓰기, 그의 세계관과 인간이해, 그뿐 아니라 낯을 가리는 성품 등등 내가 그에게서 느끼는 동질감은 많았다. 그는 철저히 원고설교를 고집하고 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30분이 채 안되는 설교길이도 비슷할 아니라 스피치 톤에도 큰 변화가 없다는 점도 비슷하다.27)

이런 평가가 내려질 경우 대개는 설교자에 대한 찬사가 주종을 이루기 마련이다.

그의 설교 중에서 어느 것이든 아무 것이나 한 편 손에 놓고 읽어보라 전부 읽지 않아도 좋다. 한 단락만 읽어보라 그의 설교는 깨끗한 용모에 단정한 화장을 곁들인 귀부인처럼 어느 한 곳도 천박함이 묻어나오지 않는다.28)

셋째, 비평자의 신학적 경향이 비평의 기준으로 등장 한다. 비평자가 “십자가의 리얼리티와 그 의미가 해석되어야 하고 부활의 리얼리티와 그 의미가 종말론적 지평과 실존적인 지평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신학적 입장을 견지할 경우 동일한 신학적 색깔을 드러내는 박종화의 설교는 기독론적 해석학이 살아있는 설교이자 그가 강조하는 실천 역시 단순한 행동주의가 아닌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구원론으로의 승화로 칭송받는다.29)
비평자가 “오시는 하나님의 그 시간은 가난한 자, 억눌린 자, 포로로 잡힌 자들이 해방을 맞도록 우리가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는 순간이다. 이런 점에서 성탄은 낭만적인 즐거움에 몰두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오시는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도전의 시간이요 위기의 시간이기도 하다”는 소위 민중 사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면30) 설교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하는 기준은 설교자가 비평자와 동일한 입장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탄을 가리켜 “성탄은 무서운 도전입니다. 불의한 사이에 예수님이 오시면 불의를 고친다는데 불의에 희희낙락할 사람이 왜 메시야를 좋아합니까”라고 설교한 박종화에 대해서는 실존적 성격이 강한 종말론적 해석학으로 칭송하지만, 청부론을 주창한 김동호의 설교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와 그 통치가 어떻게 역사내재와 역사초월의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주관적 자기이야기의 관점 즉 믿음 지상주의적 관점에서 회중을 선동한다고 비판한다.31)
넷째, 비평의 기준으로 등장하는 것이 비평자의 성서관이다. 만일 비평자가 “성서는 하나님 이야기이지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갖고 있다면, 어떤 설교자가 요셉 설화를 본문으로 “요셉처럼 꿈과 비전을 갖자!“라고 설교할 경우 그는 성서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으로 규정된다.32)
다섯째, 비평자는 자신의 정치관을 중요한 설교비평의 기준으로 사용한다. 가령 김진홍의 설교를 비평함에 있어 상당 부분이 김 목사의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공격하는 데 할애하고 있는데 이는 곧 비평자의 정치사상이 김 목사와 다르기 때문이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하는데, 김 목사는 무슨 근거로 노 정권을 좌파라고 주장하는 걸까?… 좌파는커녕 유럽의 온당한 사회당에도 미치지 못한다.

여섯째, 지엽적이기는 하지만 교회력에 대한 이해 역시 설교비평의 한 기준으로 등장한다. 비평자가 교회력 옹호자인 경우 즉 교회력에 대한 입장이 “교회력에 의한 설교를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이 곧 개교회와 개인설교자를 초월시 하시는 성령을 의존하는 태도이며 그것이 곧 교회와 설교자가 사는 길33)일 경우 교회력에 바탕한 설교를 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설교의 긍정과 부정이 갈린다.34)

4. 설교비평에 담긴 문제
설교비평은 설교의 성격상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다. 비록 설교비평의 대상이 된 설교자들 이나 보수적 신앙을 가진 성도들 중에는 설교비평 자체를 당혹스럽고 불경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120년 한국기독교 역사로 볼 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문제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 설교비평이 과연 그 당위성에 합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제 막 시작된 설교비평을 향해 완성도를 따져 묻는 것은 때 이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지금이야 말로 제대로 된 설교비평의 터를 닦는 절호의 기회이다. 이 작업은 지금까지 제기된 설교비평이 과연 제 길을 가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우선 비평자들의 기본적인 시각과 태도가 부정적 비판일변도인 것이 문제이다. 비평자의 눈에 비친 교회는 “예수 없이도 운영될 수 있는 조직으로서의 교회, 결국 정작 예수와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대신 자신들의 종교적 능력만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이다. 설교 역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설교의 근본이 약화되고 대신 감성적이거나 도덕적 가치와 심지어는 주술적인 욕망이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으며 따라서 “오늘 우리의 예배와 설교는 하나님 망각현상”이다.
이러한 태도는 비평이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는 일반론에서 보면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근본은 율법의 시시비비를 넘어선 하나님의 은혜이다. 기독교인 됨이 ‘근본’에 대한 인식과 참여를 포괄하는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근본이 결여된 비평은 비난으로 달리는 지름길일 수밖에 없다.
둘째, 작금의 설교비평은 지나치리 만큼 설교의 내용에만 치중함으로 설교를 전체적으로 조명하지 않는다. 물론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이지만 설교는 이것 이상이다. 설교비평이 설교의 내용에 집중하는 것은 설교학에서 오랜 기간 계속되어온 설교를 이해하는 두 가지 입장 즉 교의학적 입장과 실천적 입장 가운데 전자에 가까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칼 바르트를 비롯한 교의학자들로 대변되는 교의학적 설교이해는 설교를 원론적 이론적으로 이해한다는 강점이 있다. 반면 에른스트 랑게(Ernst Lange)를 비롯 설교학자들로 대변되는 실천적 설교이해는 설교의 실제적 실천적 차원에 주안점을 둠으로 설교의 실행적 차원을 강화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그 자체로 완전성을 보장받지는 못하기에 양자의 조화와 균형은 필수적이다. 어느 하나만으로 고집하는 것은 독선이자 결핍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설교가 갖는 다차원의 복합성을 전체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설교비평은 그 자체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셋째, 설교비평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일차적으로 비평은 정오(正誤)의 문제에 주목하는 작업이다. 즉 옳고 그름, 잘되고 잘못 됨, 바람직함과 바람직하지 않음을 가리는 작업이다. 따라서 이런 차원이 아닌 선택의 문제는 비평의 기준으로 상정할 수 없다. 가령 신학적 입장이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 정치적 견해가 보수인가 진보인가, 친북인가 친미인가 하는 것 등은 비평의 기준이 될 수 없는 선택의 문제이다. 설교에 대한 이해 역시 교파와 신학에 따라 그 폭이 넓다. 작금의 설교비평이 지닌 문제는 바로 이러한 설교비평의 기준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과, 신학적 정치적으로 진보적 입장에 서서 반대 입장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37)
넷째 동일한 맥락에서 비평자의 입장이 설교비평의 절대 기준이 되어 선택의 문제를 당위의 문제로 몰고 가는 것 역시 설교비평을 왜곡시킬 수 있다. 이것은 사상적인 문제와 더불어 특히 성서해석에서 심각한 갈등을 야기 시킬 수 있다. 비평자가 신학의 한 극단에 서서 다른 쪽을 매도하는 것이라든지, 충분치 않은 성서의 지식을 가지고 개연성에 근거한 성서해석을 마치 진리인양 밀어 붙이는 것은 건전한 비평의 자리매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금의 설교비평에서는 이런 문제가 매우 빈번하게 나타난다.
1)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이나 차이를 두지 않고 똑같이 하루 일당을 주는 게 바로 과수원주인의 뜻이라는 예수의 비유를(마 20:1-16)를 굳이 들이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쟁력보다는 생존권에 기초한 평등사회가 곧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118)는 견해는 마태복음 20장의 기본적인 성격을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2) “한 설교자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치려했던 텍스트를 중심으로 설교한다고 치자…모리아 산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높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인신 제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인지 모른다. 근동의 여러 종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듯이, 생존에 불안을 느낀 아브라함은 어느 한 순간에 야웨 하나님이 인간의 피까지 원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지 모르며 성서기자는 그런 어리석음을 지적했다는 말이다”(181)라는 주장은 객관적인 진실을 일개 학문적 가설로 대치하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성령의 능력으로만 각성될 수 있는 그 죄라는 게 미움과 포악하고 무자비한 성품이라는 말인가? 만약 복음이 이런 인격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이런 것들은 다른 종교인들이나 약간만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여겨본다는 점에서 복음의 차원이 아니라 교양의 차원에 속한다… 내가 예수에게서 배운 바에 의하면 이 세상으로부터 교회에 돌아오게 하는 게 또는 미움과 포악한 마음을 버리고 교양인이 되는 게 회심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실행할 수 있는 사건을 자기가 성취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바로 회심이다”(68-9)라는 주장은 복음이 교양은 아니지만 동시에 교양적인 요소를 함유한다는 성서의 정언(성령의 열매가 지지는 윤리적 차원, 고전 13장의 사랑의 15개 특징이 갖는 윤리적 차원 등)을 배반하는 것이다.
4) “그는(김남준) 자신이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여름 성경학교 설교시간에 초등학교 2, 3학년 학생들에게 십자가에 관해 설교했을 때 “비닐 장판을 깐 기도실 바닥이 눈물로 질퍽질퍽할 정도”로 눈물 바다가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 초등학생들에게 일어난 이런 현상은 기독교적 영성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작용에 불과하다”(71)는 질책은 복음의 영적 차원에 무지한 소치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극단적 순수주의라는 함정에 갇혀서 실패한 것처럼 도덕적 허무주의가 우리 사회를 혼란케 하거나 개인의 인격을 파괴할 수도 있지만 청교도의 도덕적 순수주의도 이에 못지않은 위험성이 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2-3세기 전에 이미 영미사회에 일시적으로 필요했던 신앙적 정서에 불과한 청교도들의 영적 결벽증을 나사렛 예수의 복음과 연결시킨다는 것은 언어도단”(76)이라는 지적은 비평자가 시대를 초월해 항상 요구되는 신앙적 정서의 본질을 간과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5) “만약 김 목사(김상복)가 확신하고 있듯 에덴동산이 신화적 설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라면 그곳이 어디인지 찾아가라고 권면하고 싶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구름에 쌓여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하는데 그 하늘이 곧 우주의 어느 한 공간을 가리킨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갈릴레이 이전 사람이거나 1992년 다미선교회 소동을 일으킨 광신자 중의 하나가 아닐까?”(『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0)라는 비평자의 주장은 성경을 말씀 그대로 믿고 사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모독이다.
다섯째,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문제는 비평자의 독선적 무례함이다. 비평의 기본정신은 ‘대상의 학살이 아닌 살림’이다. 비평은 궁극적으로는 설교자를 돕고 건강하게 하는 양약이지만 그것이 입에 와 닿을 때에는 쓰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근의 설교비평은 이런 경계선을 훌쩍 넘어버린 느낌이다. 비평은 일차적으로 내용의 문제이지만 그 비평의 최종 대상은 인격을 가진 인간이다. 더욱이 설교비평의 대상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내적 소명과(vocatio interna) 신학을 공부하고 공회 앞에서 안수 받은(vocatio externa) 목회자(목사) 아닌가? 그들은 명예와 긍지 자존감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그들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그들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이 그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까지 파급되기 마련이다. 설교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는 일반 성도들이 담임목회자의 설교에 대한 부정적인 비평을 접하게 될 경우 과연 그것이 목회에 어떤 부담과 악재로 작용할지에 대해서 비평자는 함께 고민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바로 이 설교비평의 태도에서 작금의 비평은 그 근본 선한 동기마저 의심받기에 충분할 정도의 무례를 범하고 있다.38)

성서텍스트 안으로 들어간 경험이 없는 사람은 스데반에 관한 본문을 놓고도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공과지도를 하듯 엘리야의 일대기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귀중한 설교시간을 허비하기 마련이다.”(116)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의(김동호) 설교내용이 비평의 대상이 될 만큼 충실하지 않다.… 그런데 그토록 확신에 찬 어조로 선포된 그 설교내용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빈약했다. 그의 설교에서는 신앙간증 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김 목사에게서 나타나는 선동의 성격은 본말을 뒤집는다는 것이며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 이런 내용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평범한 바클레이 주석만 잠시 펼쳐 보아도 간단히 드러나는 사실이다.”(91-5) “박 목사뿐 아니라 상당수 설교자들은 설교자의 고유한 자리를 놓치거나 오해함으로써 흔히 설교를 잔소리로 만든다. 차이가 있다면 좀 고급한 잔소리와 저질의 잔소리가 있다는 것 뿐이다.”(144) “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친 교수 출신 설교자의 이런 주장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81) “그러나 지금처럼 한국교회가 떵떵거리는 때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 목사(이수영)의 그런 주장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만한 엄살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혹세무민이다.”(238) “내가 어리석었다. 2004년 9월 19일 누가복음 13장 1-9말씀을 강해하면서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우리의 딸 미선 효선 양을 촛불 시위를 “초만 탈 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평가한 김 목사(김서택)의 세계관을 일찌감치 알아보았어야 하는데 공연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더니 내 꼴이 우습게 되었다. 김 목사는 쫓고 쫓기는 경찰과 도둑이라는 교묘한 수사학으로 청중을 닦달하고 있다.… 이런 삶의 기준은(떼먹은 돈을 갚으라) 상식적인 판단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잇는 것에 불과한데도, 인문학적인 토대가 전혀 없는 목사가 단지 자신의 주관적 신앙경험과 교양의 수준에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한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위기를 드러내는 것이다(41-49)(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41-49) “필자는 위에서 김 목사(김상복)가 프로의 옷을 입었으나 실제로는 아마추어인 이유를 두 가지로 짚은 셈이다. 하나는 그의 설교가 일종의 바알 숭배라고 할 수 있는 성공신화에 철저하게 경도되어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이데올로기를 신앙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성서를 도구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39)


설교비평의 태도가 예의를 수반해야 하는 것은 비단 비평 대상자인 설교자에 대한 고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설교비평은 동시에 회중에 대한 예의까지도 갖춰야 한다. 하지만 독선적 태도가 정화되지 않으면 이런 기대는 난망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한국 대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설교는 우스꽝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평범한 대학생인 내 큰 딸에게서 확인한 바지만 그 또래의 청년들에게는 약간 모자란 듯 하면서도 열정이 있는 설교가 제격이다.”40)
“그는(김서택) 지금 당장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일어날 것처럼 청중의 심리를 쫓기게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의 설교가 특히 정서적으로 불안하거나 세계관이 미숙한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 같다.”41)

5. 한국교회를 위한 설교비평
루돌프 보렌의 설명처럼 “광의적으로 보면 설교에 대한 모든 반응행위는 그것이 설교를 수용하는 것이든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이든 설교비평에 속한다. 말씀에 대해 이러한 열정(Leidenschaft)이 표현되는 형식(form)을 가리켜 우리는 설교비평이라 부른다. 설교비평이라는 개념을 광의적으로 이해할 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설교비평이 어떤 설교의 부록이나 부수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설교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설교비평은 문자적으로 설교의 아멘이랄 수 있는 것으로 이것 없이 설교가 끝날 수 없다.”42) 계기가 어찌되었던 설교비평은 피할 수 없고 또 피해서도 안 되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되었다. 특히 작금의 설교비평은 적지 않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 설교비평에 대한 관심을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올바른 설교비평의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비평의 당위성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과연 설교비평의 필요충분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 그래서 설교를 설교되게 하는데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논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가장 시급한 것은 모든 설교비평은 비평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비평의 과제는 설교의 이해와 설교의 기쁨을 촉진하는 데 있고, 설교를 듣는 일에 도움을 주려 하는 것이다.(Hoerhilfe) 즉 설교비평은 살아있는 말씀의 생생함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와 같이 말씀에 봉사하는 것이다.(Dienst am Wort)43) 즉 보렌의 말처럼 설교자가 본문이 증언한 것의 증언자이어야 한다면 설교비평자는 설교자가 증언한 것의 증언자이어야 한다. 설교비평은 이러한 과제인식위에서 설교라는 ‘사건’에 대한 경외의 염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설교는 인간이 판단하는 것 이상이다. 비록 설교비평이 설교의 ‘인간적 차원’을 문제 삼지만 설교는 파악할 수 없는 신적 차원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설교비평의 추상같은 칼날에 난도질당하는 바로 그 설교를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분이다. 설교비평은 바로 이러한 ‘신비’에 대해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설교비평은 기본적으로 설교의 완벽하지 않음(Stueckwekcharakter der Predigt)을 상대하는 것이다. 완전한 하나님을 말하는 인간의 불완전성은 설교의 불완전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 불완전함을 비평하는 작업은 역시 동일하게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행해진다. 따라서 이러한 불완전함은 ‘줄임’의 대상은 될지 모르나 완전함으로의 전환은 불가능하다. 설교비평은 비평자와 피비평자 그리고 그의 설교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동시에 설교비평이 비평자의 주관에 의한 자유함의 산물이라면 설교를 만든 설교자의 자유함 역시 존중되어야 하며 그 궁극적인 목표는 죽임이 아닌 살림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인식위에 비평의 핵심인 무엇을 비평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객관적인 합의가 있어야 한다.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작금의 설교비평에 대해 적지 않은 우려가 야기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비평의 기준과 항목이 객관적이지 않고 작위적이라는 것이다. 설교가 성경본문을 판단(Lob)하듯 설교비평은 그 기본 성격이 설교를 판단하는 기예(Kunst zu loben)이다. 설교를 판단한다는 것은 설교에 담겨져 있는 여러 가능성들을 묻는 것이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해석(Predigtinterpretation)으로서의 설교비평은 설교의 기원과 형태 목적을 조사하는 설교분석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이 개념보다는 훨씬 큰 것이다. 본문만을 잘라내어 비평하는 것은 설교하는 일 자체, 설교를 듣는 일, 설교의 영향을 무시한 채 설교를 만드는 일 하나에만 매달리게 됨으로 설교의 가혹한 심판자로 등장한다. 설교에 대한 일종의 매장의 설교로 열중하게 된다.44)
분명한 것은 설교비평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비평자는 한 사람의 인간이며 한계가 있는 자이므로 자신의 문제 설정을 절대화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석/비평할 것인가? 설교가 특수한 영역이라면 그리고 설교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설교학이 가지는 특수성을 인정한다면 설교비평에 대한 합리적 기준 역시 이 분야의 견해가 존중되어야 한다. 설교학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개념들을 광의적으로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설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Was uns anspricht?)를 물어야 한다. 설교는 그 생명이 메시지이다. 설교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한다는 것은 곧 설교의 메시지를 파악한다는 의미이다. 전통적 개념으로 보면 이 메시지는 성경으로부터 나온다. 올바른 메시지의 전제는 성경본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따라서 설교자가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가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설교의 기본이 본문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면 메시지의 추출은 곧 해석의 문제를 말한다. 비평자는 이 부분에서 설교자가 보여주는 설교의 ‘창조성’(Creativitaet)과 설교를 ‘아하!사건“(Ah! Ereignis)으로 만드는 놀라운 통찰력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물론 이것들은 본문의 해석에 기저한 것인바, 이 해석은 해석자의 신학과 신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이 ‘다름’은 모든 설교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이 본문에 드러난 ‘객관적 사실의 보편적인 의미’를 넘어서고 있는가는 반드시 짚어보아야 한다. 즉 설교자가 본문을 압도하여 본문을 침묵시키고 설교자만이 해석이라는 명분하에 ‘자기 말’을 하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동시에 이 메시지를 전개해 나가는데 있어 동원되는 다양한 자료(예화, 인용 등)들의 적절성도 반드시 판단되어야 한다.
둘째, 설교비평은 설교된 내용의 조직신학적 배경(systematische Hintergrund der Aussagen)에 대해 물어야 한다. 이것은 설교에 해석되고 진술된 내용이 기독교 복음의 기본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는가,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이해에 비치되지 않는가, 다루는 내용이 전통 교의학적 흐름과 상충되지 않는가 등을 문제 삼는다. 비록 설교자가 올바른 성서 이해 위에 시도된 깊이 있는 해석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을 듣는 회중들에게 소위 은혜를 끼치는 설교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독교의 복음 및 보편적 정신과 상치한다면 그것은 바른 설교라 할 수 없다. 소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사로잡는 명연설의 실례를 히틀러에게서 그리고 수많은 사이비집단에게서 보아오지 않았는가? 위에서 말한 설교자의 창조성 역시 이러한 조직신학적인 점검에 의해 그 정당성을 평가받아야 한다.
셋째, 설교비평은 어떻게 설교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는 무엇을 말하는 것과 더불어 어떻게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설교는 신학적으로는 ‘일방적인 선포’ 이지만 실행적으로는 ‘종교적 연설’이다. 모든 연설은 일단 논리적으로 ‘말이 되어야 하며’ 지적 충족과 정적인 터치를 수반해야 한다. 특히 설교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는 새로운 설교학 이후 설교학계의 화두이기도 하다. 설교가 논리적인가? 설교의 형식은 본문의 문학적 성격, 회중의 인지능력 등을 고려할 때 적절한가? 등의 논리와 형식 문제를 살펴야 한다. 동시에 설교 언어의 문제를 짚어야 한다. 즉 설교가 글이 아닌 말이라는 사실에 입각한 구어체와 문어체, 단문과 장문, 능동태와 수동태의 조화를 보아야 한다. 또한 설교 전달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수사적 기법의 사용 여부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특히 설교는 일회적 사건이기에 일반 문학작품이 요구하는 글쓰기의 경제성과는 다소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부분과 함께, 설교자의 억양 인토네이션 클라이맥스의 처리 휴지(Pause) 기법, 제스처, 원고의 장악 등도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이 맥락에서 설교비평이 주목해야 할 것이 읽는 설교와 듣는 설교, 즉 써진 설교와 들려진 설교에 대한 이해이다. 설교가 활자화된 설교집을 통해 접한다는 것은 이미 과거의 설교를 접한다는 것이고 문자에 갇히고 제한된 설교의 부분을 접한다는 것이다. 특히 활자를 통한 설교분석은 말해지는 내용은 취급할 수 있으나 설교의 현장에 대한 생생함, 그리고 설교의 파트너이자 대상으로서의 회중과 설교자의 어울림과 분위기는 잡아낼 수 없다. 이 문제와 관련된 보렌의 지적은 모든 설교비평자들이 유의할 가치가 있다: “설교자는 언어만으로 말하는 게 아니고 그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말하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그가 표현하는 일부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인쇄된 설교는 벌써 문헌이다. 선포된 설교는(gesprochene Predigt)는 하나의 행위, 행동이며 나아가 하나의 사건이기 까지 하다. 인쇄된 설교는 이 사건에 대한 문서에 의한 증언이다. 하지만 이 경우 충분한 증언이 되지는 않는다. 설교비평은 그 설교사건을 되묻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되물음은 대개 추론적인 결론으로 나아갈 뿐이다.”45)
넷째, 설교비평은 누구에 의해 설교가 행해지는가를 물어야 한다. 한편의 설교는 한 사람의 설교자로부터 나온다. 목회설교를 전제로 할 때, 이 설교자는 한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이다. 따라서 그는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의 개체성과 동시에 회중의 대변자라는 공적인 성격을 갖기 마련이다. 설교는 바로 이런 두 차원사이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설교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이해(신학, 신앙, 사상, 정치 및 사회적 태도, 성격 및 인격 등)와 공동체 및 설교의 목회적 차원과 계획에 대해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갭이 보편적 상식이라면 교회와 목회현장 역시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완전한 복음이 불완전한 인간에게 전해진다는 이 기초상식과 간단치 않은 목회상황을 이론신학의 엄격함만으로 재단하는 것은 항상 신중함이 따른다.
다섯째, 설교비평은 설교가 위치하는 삶의 정황(Sitz im Leben)에 대해 물어야 한다. 설교는 진공 속에서 울려 퍼지는 독백이 아니다. 설교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구체적인 대상을 목표로 행해지는 구체적 연설이다. 따라서 설교는 교회와 시대와 사회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즉 여기서는 성경 본문과 그 해석이 청중의 상황과의 관련 하에서 검증받는 것이 핵심이다. 설교비평자는 적어도 그 설교가 행해진 대상으로서의 회중의 협의적 상황(개인적 공동체적) 그리고 광의적 상황(사회적 국가적)에 대한 파악을 선행하여야 한다.
여섯째, 설교비평은 설교의 결과를 물어야 한다. 어거스틴이 정의한 세 번째의 설교공리인 ‘영향을 주다’(flectere)는 설교가 회중과 공동체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는 설교가 끝나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설교비평은 설교가 그 공동체에 어떤 결과를 낳았나? 설교의 효력은 무엇인가? 설교가 살아있는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이바지하는 공동체를 만드는데 긍정적인가? 행동하는 양심, 지정의의 균형 잡힌 신앙인을 배출하고 있는가? 성도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나? 공동체 전체의 신앙적 성격이 어떻게 바뀌고 있나? 등등을 평가해야 한다. 나아가 설교의 정치문화적인 효과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 즉 그 설교가 사회에 대해 어떤 효과를 가지는 것인가? 설교는 청중의 비판적 정치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일깨울 수 있는가? 설교가 회중을 과거로부터 해방하여 미래로 향하도록 하는 지시를 주고 있는가?
제대로 된 설교는 반드시 건강한 교회와 건강한 성도라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물론 설교의 단편적 영향을 판단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러나 한 설교자가 지속적으로 설교하는 경우 시간을 두고 한 공동체와 성도 개인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일곱째, 같은 맥락에서 설교비평은 설교가 주로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버트릭(David Buttrick)은 현대 미국 교회 설교의 주된 경향을 20세기 세기 초 포사이드(P. T. Forsyth)에 의해 제기된 바르트에 영향 받은 성경적 설교(biblical preaching), 포스딕(Fosdick)의 영향이 지대한 치유적 설교(therapeutic preaching),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 및 말콤 엑스(Malcolm X)에 의해 편만해진 “사회비전 설교”(social vision preaching) 그리고 20세기 말 급격히 퍼진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위한 설교”(preaching the institution/ church management) 등의 네 가지로 분류했다.46)
버트릭의 분석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모든 교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 대부분의 교회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 가깝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 극단적으로 치우치게 되면 균형 잡힌 복음의 이해가 불가능하며 그 결과 불균형의 신앙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설교비평은 이 부분을 세밀하게 추적해야 한다. 특히 설교가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되고 있지 않은가를 감시해야 한다.

6. 나가는 말
설교 성역화의 잔치는 끝났다. 원래부터 없었어야 하는 울타리가 철옹성처럼 쌓여져 그 끝 갈 길을 몰랐는데 어찌 보면 아주 생각하지 않은, 그래서 조금은 어이없는(?) 방식으로 그 벽이 허물어졌다. 비평은 완전하지 않음을 전제하는 것이기에 이제 설교자는 자신이 메고 온 사이비 완전성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인 설교자에게 완전한 복음이 맡겨졌고 따라서 설교 역시 불완전할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가 노출됨으로 소극적으로는 설교자의 어깨는 한결 가벼워지게 되었다. 나아가 설교비평작업은 설교자들로 보다 철저하고 완성도 높은 설교를 촉진하는 촉매제가 되는 적극적인 기능을 할 것이다. 원론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부족함을 들어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기에 부족한 설교자를 쓰시는 분이시지만 인간의 준비를 철저하게 촉진하는 순기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강단의 건강함이 한국교회의 튼실함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이런 기대가 비단 설교자에게만 국한되겠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독재자이시지만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민주주의의 산실이다. 하지만 교회의 언로는 동맥경화상태에 빠진지 오래이고 길을 잃은 말들은 무성한 뒷말이 되어 교회를 얽어맨다. 특히 설교 앞에서 침묵해야 하는 불문율은 다른 곳에서 분화구가 되어 갈등과 불만의 용암들을 쏟아내 왔다. 설교비평이 막혔던 교회 내 언로의 물꼬를 트는 기능으로 작용한다면 이것 역시 모두가 듣고 싶어 하는 복음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설교학자들에게는 건전하고 균형 잡힌 설교비평의 틀을 구축하는 것이 당장 시급한 과제이다.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완성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치열한 분발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설교비평의 주체가 교회라면 성숙한 비평을 위한 성도의 철저한 훈련과 교육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영화나 미술, 문학 등 다른 분야의 비평이 전문성을 요구하는데 반해 설교비평은 누구나 건드릴 수 있는 분야처럼 인식되는 것도 곤혹스런 과제이다. 적어도 설교에 대한 전반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와 학습은 설교비평의 전제로 자리 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우려는 설교비평이 설교의 존엄성을 깎아 내리고 하나님 말씀의 지평을 폐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의 손에 들어간 것치고 이런 훼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설교비평이 피할 수 없는 당위라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즐겨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당위를 이야기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설교비평이 그리 만만치 않은 난제이기 때문이다.

편집자주/이 글은 지난 11월 2-3일까지 한일장신대에서 열린 제 6차 한국설교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한국교회를 위한 설교비평”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내용이다.




1) 유경재외 8인 지음,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12에서 재인용.
2) Rudolf Bohren, Predigtlehre, Chr. Kaiser Guetersloher Verlaghaus, 1971; 6. Aufl. 1993, s. 549.
3) 한종호, “개인주의적 ‘은혜론’과 ‘강청기도론’이 빠지는 함정”(강준민 목사의 설교세계), 유경재외 8인 공저,『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 277.
4) 한순진(편), 『왜 청중들은 그들의 설교에 매료되는가?』(서울: 베드로서원, 2000), 6.
5) 상게서, 14.
6) 이근미(편), 『사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우리 시대 최고의 목사 25인의 영혼을 울리는 설교)(서울: 월간조선사, 2002), 12-13.
7) 박명수, “오순절 운동과 조용기 목사의 신학”, 한국교회사학 연구원(편), 『한국교회 설교가 연구』(1)(서울: 한국교회사학연구원, 2000), 17-55.
8) 서정민,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설교사 이해”-모성적, 민중적 성령운동가 조용기의 설교를 중심으로- 상게서, 57-88.
9) 임승안, “역사신학적 입장에서 본 조용기 목사의 신학”, 상게서, 89-154.
10) 이호열, “조용기 목사의 설교에 대한 목회학적 입장에서의 평가”, 상게서, 155-187.
11) 차정식, “복음과 교양이 만나는 방정식”(곽선희 목사의 설교세계), 유경재외 8인 지음,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 31.
12) 상게서, 30-38.
13) 차정식, “개량된 복음주의의 행로”(김진홍 목사의 설교세계), 상게서, 39-57.
14) <기독교사상>, 2007년 2월호.
15) <기독교사상>, 2007년 2월호
16) <기독교사상>, 2007년 6월호
17) http://blog.naver.com/hodong0828/20036037741
18) 정용섭, 『설교와 선동사이에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19) 정용섭, 『속 빈 설교, 꽉찬 설교』(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20) 정용섭, “영웅 이야기에 밀려난 하나님 이야기”(두레마을 김진홍 목사),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113.
21) 상게서, 103-124.
22) 정용섭, “규범설교의 역사허무주의”(이동원 목사의 설교세계), 유경재외 8인 지음,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 160.
23) “굳이 푸코의 이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모든 담론은 그 자체가 권력담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논자는 최근의 설교비평이 어쩌면 한국교회에 만연한 소위 치유, 상담, 가정사역등과 유사한 또 하나의 종교상품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지울 수 없습니다”(김종두,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에 대한 비판적 이해”-기독교 모더니스트의 해체담론, <활천> 2007. 9, 31.
24) 심광섭,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설교와 신학”, 유경재외 8인 지음,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 185.
25) 차정식, “복음과 교양이 만나는 방정식”, 상게서, 25.
26) 정용섭, 『속 빈 설교 꽉찬 설교』.괄호안의 숫자는 본서의 페이지를 의미함.
27) 정용섭, “신앙과 문학이 만나는 자리”,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38.
28) 상게서, 39.
29) 정용섭, “설교의 두 기둥, 교회력과 해석학”, 상게서, 190.
30) 상게서, 186.
31) 정용섭, “예언과 선동의 갈림길에서”, 상게서, 100.
32) 상게서, 110.
33) 상게서, 176.
34) “박종화 목사의 설교는 교회력의 성서일과에 따라서 주어진 구약성서 서신서 복음서를 모두 설교 본문으로 삼는다. 아무리 교회력을 따르는 설교자라 하더라도 이렇게 세 본문을 설교구성의 확실한 근거로 삼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박 목사는 이런 점에서 매우 철저할 뿐 아니라 아주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박 목사의 설교에는… 신구약 전체의 통전성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였다. 설교학 수업시간에 박 목사를 특별강사로 초청하는 것도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듯싶다”(상게서, 177). 반대로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하지 않는 장경동의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성서와 복음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교회력을 놓치는 법이 없다”(『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214).
35)정용섭,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112.
36) 상게서, 111.
37) 작금의 설교비평은 정치적 진보주의를 그 기준으로 한다는 인상을 준다(이하의 내용은 정용섭의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서 인용함): “우선 북한 인권에 대한 정보는 대개 실체적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외국 기자들이인과 전하는 크고 작은 실증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대한민국 미국 독일 등 그 어디에도 인권문제가 없는 나라가 없다. 다른 하나의 관점은 인권문제를 그 나라가 처한 문화적 역사적 정황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반인권법의 대명사로 불리는 국가보안법을 분단체제라는 명분으로 유지하고 있듯 인권 문제 역시 하나의 잣대로 강요될 수는 없다고 본다. 최근 일부 개신 교회가 1970-80년대의 냉전체제로 돌아가는 것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우려된다. 심지어 서 아무개 목사는 평양의 봉수교회가 가짜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있으니 의식 있는 사람들에게 개신교회가 어떻게 비쳐질지 답답하다."(121)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외침은 우리에게서 강하게 울려나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인 이 세상에서의 책임은 매우 관념적이다. 따라서 그 실체가 묘연하다. 이라크 전쟁, 남북문제 경제의 양극화 생태계의 파괴,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 문제 앞에서 한국교회가 매우 무기력하며 기껏해야 마지못한 시늉에 머문다는 사실은 복음과 율법의 유기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해체한 박 목사의 무율법주의와 다를 바 없다."(167) “남북문제를 통일지향적으로 풀어가야 할 정부로 하여금 북한의 인권 문제를 지적하라는 요구는 북한과 대화하지 말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231) "노정권이 군사독재자들처럼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서서 확대 재생산 하지 않았을 뿐이지 친북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목사(이수영)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이 김정일과 그 도당들만 좋아하여 웃고 있을 일들을 골라서 해온 정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236). "꼭 히틀러와 김일성을 같은 유의 인간으로 설정해야만 하나? "만약 이목사가(이동원) 전형적인 레드컴플렉스에 빠질 정도로 사태와 사물에 대한 이해가 단선적인 사람이라면 아예 말을 않겠다."(유경재외 8인,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 152).
38) 이하에 인용한 내용은 『속 빈 설교 꽉찬 설교』로부터 발취한 것으로 괄호안의 숫자는 페이지를 의미한다
39) 정용섭, 『설교와 선동사이에서』, 27.
40) 정용섭, 『설교와 선동사이에서』, 51.
41) 상게서, 44.
42) Rudolf Bohren, Predigtlehre, Guetersloh 1971; 6. Aufl. 1993. s. 544.
43) 상게서, 546.
44) R. Bohren, 상게서, 549.
45) R. Bohren, 상게서, 548.
46) David Buttrick, "A Fearful Pulpit, a Wayward Land", Mike Graves(ed.), What's the Matter with Preaching Today? (Louisville·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4), 39.  

편집자주/이 글은 지난 11월 2-3일까지 한일장신대에서 열린 제 6차 한국설교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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