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한신구약학회와 전주성경학당이 공동으로 주최한 '신년 목회자 세미나'-구약성서와 설교-에서 한신대학교 구약학교수 이영미 선생의 발제입니다. 이 모임에 저도 '성서적 설교란 무엇인가' 하는 제목으로 발제를 했습니다. 이명미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올리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십시오. 저의 설교비평 작업에 대한 그동안의 설교학 교수들로부터 받은 반응에 비해서 훨씬 정확하고 우호적인(?) 평가였습니다. 각주도 있는데, 인터넷으로는 기술적으로 올릴 수가 없습니다. 정용섭 주)

 

설교와 설교비평 사이

이영미 (한신대학교)

 

1. 들어가는 말

설교란 참으로 놀랍고도 두려운 일이다. 설교는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 행해지는 사건’이기에 놀랍고, 설교자는 하나님의 계시선포라는 명목 하에 편협한 사견만 늘어놓는 형세가 될까 늘 두렵다. 하물며 그런 설교를 비평하는 일은 어떠하랴? 정용섭 목사(이하 정목사)는 그 어려운 작업을 자진해서, 그것도 공개적으로 세 권의 책을 통해 과감하게 시작한 국내의 유일한 설교비평가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설교란 무엇인가에 관한 책을 선보였다. 이번 발제는 정목사의 설교이해에 대한 비평적 성찰을 통해 설교가 무엇인가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2.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진단

정목사는 설교란 무엇인가를 소개하기에 앞서 제 2강 "한국교회 강단,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가 실용적 요청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하나님의 존재론적 우위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설교강단을 질타한다. 그는 기복주의, 지나친 정치적 색깔보이기, 역사 허무주의, 성속 이원론, 가부장주의, 성서문자주의, 반지성주의 등의 문제가 있지만 이 중 세 가지, 예화과잉, 감상주의, 도덕주의를 한국설교의 주요 문제로 지적한다.

감상주의와 도덕주의에 치우친 설교에 대한 정목사의 우려는 귀기울여볼 대목이다. 그는

청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감상주의, 그 밑바탕에는 포퓰리즘이 있다고 말한다. 감상주의 설교가 만연하면 신자들은 신앙의 깊이에 천착하기 보다는 막연한 느낌에 의존하게 된다. 인간은 감정에 쉽게 휩싸이기 때문에 감상주의가 매우 뜨거워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기독교 신앙을 훼손시킨다. 감정 표현은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지만 하나님 나라와 그 통치에서는 무기력해지는데, 이런 경향은 사이비나 이단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요소다.

다른 한편에서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는 하나님 통치의 존재론적 능력보다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가치론적 판단이라 할 도덕과 윤리에 두는 도덕주의가 만연하다. 이러한 도덕주의는 두 가지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첫째, 도덕적 가치는 설교가 근거할 복음의 본질이 아닐 뿐 아니라 설교가 지향할 하나님 나라의 근본가치도 아니다. 둘째,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는 도덕적 가치를 케리그마의 중심에 놓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와 다를 게 없다. 도덕주의 설교는 신자들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다른 한편 율법적 신앙을 강화하여 부패한 세상과는 다르다는 도덕적 우월감에 빠지게 한다.

정목사는 예화, 감상, 도덕주의는 설교영성의 편식인데 이러한 편식의 결과가 성서 도구주의 낳았다고 지적한다. 성서도구주의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존재론적으로 담고 있는 성서가 신앙생활에서 도구로 이용되고, 더 나아가 소비된다는 뜻이다. 설교자는 성서를 정보를 알리거나 열거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속의 ‘놀라운 세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계시의 존재론적 우위성을 포착해야 한다. 그것이 곧 구약 예언자들의 신탁 사건이다(렘 1:9 참조). 정목사는 "구약의 예언자들은 오늘 설교자들의 정신적 뿌리라 할 수 있는데, 참된 예언자들은 대중에게 외면 받더라도 신탁에 집중"했으며 청중의 요구와 기호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였음을 강조한다.

 

3. 설교란 무엇인가

한국교회 강단 설교의 진단을 통해 정목사는 설교의 본질적인 과제가 감상주의와 도덕주의를 넘어서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 하나님의 계시의 존재론적 우위성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성서를 정확하게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고, 2000년 간 계속된 신학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하고,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을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나름으로 고도의 글쓰기 훈련이 병행”함으로써 탄탄한 구성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한다. 설교자는 성서주석을 위한 기초지식과 역사비평적 주석능력, 그리고 조직신학, 인문학적 안목을 갖추어 설교의 주제를 가볍게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를 논리적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논조를 깊은 쪽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나열식 설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나열식 설교는 인간 구원이라는 우주론적 주제를 다루어야 할 설교가 삶의 요령을 가르치는 교양 강좌로 떨어뜨리고 있다. 시인이 시어를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내게 왔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설교자 역시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계시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설교는 우리의 능력, 기술적인 행위가 아니라 철저한 성령의 의존성을 통한 계시의 존재론적 능력이다. 이처럼 설교란 성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구원통치이며 그의 계시, 곧 하나님의 존재 신비에로 이끄는 것이며 설교자는 이를 철학적, 신학적 사유를 통해 설교의 구성력을 탄탄하게 하고 주제를 심화시켜 풀어내야 한다. 이러한 설교이해가 정목사가 설교를 준비하고 또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를 비평하는 준거점이다.

 

4. 정용섭의 설교이해에 대한 비평

『설교란 무엇인가』후반부에서 소개한 정목사 자신의 설교 이해를 읽으면서 많은 부분 공감하고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소신을 그의 글들을 통해 다시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했다. 특별히 그가 한국교회 설교가 그리스도 일원론적 영성에서 삼위일체론적 영성으로의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하는 대목과 설교의 영성이 생명에 초점을 맞춰야한다고 말한 대목은 전적으로 공감한다. 다양한 이웃종교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국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이해에 대한 폭을 넓히고 기독교 중심의 독선을 넘어 이웃종교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늘 성서에 질문하지 않으면 성서는 침묵한다고 말하면서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정목사 역시 설교를 준비하고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기에 기뻤다. 그럼에도 신학적 입장의 차이로 인해 정목사의 설교와 설교비평에 대한 몇 가지 이견이 생길 수 밖에 없음을 발견하였다.

 

1) 다양한 설교관에 대한 포용성

『설교란 무엇인가』에서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있는 그의 설교이해를 읽고 나니 앞서 출판한 세 권의 비평서를 통해 펼친 그의 설교비평이 자신의 설교관에 충실한 비평이었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책의 말미에 자신의 설교준비와 사례들을 소개할 때도 자신의 설교관이 잘 녹아있다. 다른 설교자들을 비평할 때도 자신에게도 동일한 설교관을 적용하는 그의 모습에서 일관성이 있음을 보았다. 명확한 기준제시와 일관성은 비평가에게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그러나 일관성이 비평의 형평성까지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정목사의 설교비평은 자신의 설교관이 너무 강하게 주장하다보니 설교의 다른 이해를 수용할 틈이 별로 안 보인다. 한 가지 예로 정목사는 윤리적 설교에 대해 혹평한다. 물론 도덕주의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설교의 케리그마와 함께 디다케적 요소-깨우치고(awaken), 가르치고(teaching), 교훈하는(instructing) 요소-를 강조하는 입장도 있다. 설교는 케리그마적인 메시지를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할 뿐 아니라 디다케적인 메시지로 그들을 자라게 하고 완전하게 한다는 입장을 고려한다면 설교의 윤리적 측면은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설교는 설교비평가의 신학적 견지에서가 아니라 설교자 자신의 신학적, 목회적 소신의 견지에서 우선 평가될 필요가 있으며 그 후에야 제 3자의 입장에서 설교자의 신학이나 목회방향을 비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설교비평을 받는 이의 입장에서는 공평하지 못하다. 주성호는 한국기독교에서 설교의 신학적 유형을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진보적 사회참여의 신학,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으로 나누어 대표적 설교자들로 박형용, 김재준, 정경옥을 소개하기도 했다. 설교비평가가 한 설교자의 신학적 입장을 동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의 신학적 입장을 존중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2) 관념적 용어사용으로 인한 의미의 모호성

앞서 말한 것처럼 성서학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나의 입장에서 설교는 “성서의 세계에 들어가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입장에 동의하는데,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 신비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는 “설교의 본질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이며, 그의 계시이다. 곧 하나님의 존재신비를 말한다.” 그리고 “성서의 세계가 드러내는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를 드러내고 이를 맛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설교자의 본분이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설명은 관념적이고 지성적이다.

정목사의 설교이해가 철학적이고 관념적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이유는 책 전체에서 자주 등장하는 “존재,” “00론적”이란 용어들에 대한 나의 이해부족에서 비롯된다. 가령, “성서 텍스트가 존재론적으로 담고 있는, 즉 종말론적으로 열고 있는 생명세계,” “성서와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형성된 고유한 진리론적 토대” “삶의 능력이라 할 영성은 ...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주어지는 능력,”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 “구원이라는 언어의 존재론적 함의” (246) 등에서 말하는 ‘존재론적’이란 말이 나에게는 잡히지 않는다. 또한 “성령론적 설교,” “그리스도 일원론적 영성,” “삼위일체론적 영성,” “종말론적 개방성,” “구원론적 설교,” 등 “론”이란 접미어를 자주 붙인다. 론(論)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이치를 일반화한 체계 혹은 주장이라고 한다면 앞의 단어들에 대한 고정화된 이론 혹은 교리를 전제할 수 밖에 없다.

종교는 명제화되면서 생명을 잃어가는 경우가 많다. 종교의 은유와 이론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나 형용사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정목사가 조직신학적 사유가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종교언어의 조직화, 혹은 명사화는 신앙이나 사상을 그 속에 갇히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점은 지성주의 경향으로 흐르기 쉽다. 지성주의 세계관은 정적이며, 범주 안에 갇히기 쉽다. 따라서 그 세계관의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 역시 동적이 아니라 정적인 분이 되신다. 역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시는 하나님이 무시간적 교리에 수동적으로 갇혀 계시는 분으로 인식되어 우리 역사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기 어렵게 만든다.

 

3)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침묵

정목사와 나 사이의 성서적 설교이해에서 가장 큰 간극 보이는 지점은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에 대한 이해에서 엿보인다. 정목사는 세상과 사람을 살리는 설교가 되어야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구원을 선포하는 설교는 생명을 지향하는 설교이고, 생명지향적 설교는 곧 영적인 설교다.”고 역설한다. 나아가 그는 설교의 영적골다공증과 형성의 주술화를 넘어서 기독교가 삼위일체론적 영성, 곧 생명의 영성을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삼위일체론적이라 함은 세상과 생명을 창조하셨으며, 유지하시고, 종말론적으로 완성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 이해에 근거한다. 생명살림의 평화세상을 신학의 화두로 삼고 있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운 대목이었다. 그런데 정목사가 말하는 ‘생명’의 신비는 나와는 강조점이 다름을 발견하였다.

성서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는 ‘존재’ 속에 정체되어 계시되지 않고 언제나 역사 혹은 사건을 통한 그 분의 구원행동을 통해 역동적으로 계시되었다. 설교자의 역할은 성서의 역사 속에서 생명을 살리신 영이신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들춰내고, 고통당하는 생명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보여주고, 자녀 혹은 제자 된 우리가 그 아픔에 함께 동참하며 이들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본다.

 

4) 사회과학적 소양과 설교자의 인성에 대한 강조 필요

정목사가 설교자가 갖춰야할 자질 중에서 성서적 설교를 위해 성서의 세계를 들춰낼 성서신학적 안목과 지식, 인문학적 소양, 조직신학적 지식을 강조하는데 빠진 부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청중의 현실을 분석하고 진단할 요소로서 사회(과)학적 소양이다. 설교는 지금, 여기에 있는 회중에게 선포되는 메시지이다. 성서와 신학적/교리적 유산들, 교회사적 전통이 설교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지금, 여기 있는 회중이 기독교 역사 속의 많은 다른 선배 회중들과의 공통된 신앙고백의 요소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경전과 전통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회중이 과거 신앙공동체의 고백과 그들에게 내린 계시가 절대적이거나 닫힌 계시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니며 그래서는 안된다. 설교가는 지금, 여기에서 증언되는 하나님의 계시의 선포가 엇나가거나 개인의 좁은 소견으로 포장되지 않기 위해 성서와 신학적 유산과 교회 전통의 힘에 의존하는 것일 뿐 한 발 더 나아가 지금여기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읽어내고 그에 따른 신앙공동체의 결단과 깨달음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찾아내고 선포해야 한다.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그의 말은 맞지만 그것이 성서의 세계를 아는 것 자체의 목적이 아니라 성서 세계의 신앙인들이 그 당시 자신들의 삶과 역사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했는가를 보면서 해석학적 유비를 통해 지금의 삶에 이를 적용하는 범례를 찾는 작업과정이다. 성서가 현재의 삶을 조명하고 그 속의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차리고 해석하며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매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해석학적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현실을 바라보고 분석할 수 있는 사회(과)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끝으로 짧게나마 언급하고 싶은 점은 정목사의 설교비평에서 설교자의 영성, 지성(인문학적 소양 강조)은 언급하지만 인성은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의 강단 설교에서 남자 목사들이 성희롱적 발언들을 서슴지 않고 하는 사례들이 적지 않으며 그 수위가 도를 넘어가 사회에 무리를 일으킨 사례도 있다. 다른 종교에 대한 폄하발언이나 조롱 역시 설교자로서의 인품을 드러내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뿐이다.

 

5. 설교와 설교비평 사이: 행동하는 신앙공동체

글을 마무리하면서 설교와 설교비평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하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나에게는 설교와 설교비평 사이에 설교가 선포되는 신앙공동체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설교에 대한 비평은 설교자의 신학적 관점만 다루어서는 안되며 그 설교를 듣는 신앙공동체의 영적 건강상태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정목사의 설교비평은 설교(자)만 다루고 신앙공동체의 응답과 실천 여부가 빠져있다. 과거의 전통과 종말론적 미래의 제시는 강조되어 있지만 현재적 결단과 삶에 대한 강조는 빠져있다는 말이다.

설교의 목적은 설교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신비를 체험하는 것에만 있는가? 설교가 윤리적, 도덕적 가르침을 위한 것이 아닐 지라도 청중의 변화에 대한 기대 속에 선포되는 것이 아닌가? 설교란 특정 목사의 현학적인 신학연설도 아니고 개인적인 소견발표도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한다고 하면서도 그 계시가 무엇을 위한 계시인지 분명하게 하여야 한다. 예수의 첫 설교 역시 “회개하라”는 실천적 요구였다. 정장복의 말처럼, “성서적 설교는 지금(now)이라는 현재성에 초점을 두는 메시지를 전달해야하며 여기서(here)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실감하게 되어야 한다.” 설교 주제의 핵심이 신앙공동체의 삶의 자리에 접목되어 재해석되고 그 공동체를 향한 선교적 혹은 신학적 현재적 계시로 구체화되어야 계시의 현재성을 담보할 수 있다. 그러나 정목사의 설교비평의 어느 곳에서도 설교로 인한 변화와 이의 실천에 대한 강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결과로 정목사의 설교비평은 형이상학적 비평에 머문다. 설교는 설교가 선포되는 장(場)인 공동체(교회)의 목회적 비전과 혹은 신학과 어떤 지점에서 합치되어 설교의 케리그마로 그리고 목회적 실천으로 승화되는지를 함께 살펴야할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과 떨어져서 있을 수 없고 그 청중이라 함은 일시적으로 모인 무리가 아니라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상시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나가는 집단이기 때문에 그 공동체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신앙공동체에게 있어서 그 방향은 생명살림의 하나님의 의의 실현, 즉 구원과정에의 동참이라고 믿는 나로서는 설교와 설교비평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설교가 그 공동체의 삶의 실천에 어떻게 담보되고 있는가를 함께 고려해야한다고 본다. 이는 설교자의 교회나 실천의 장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6. 나가는 말

정목사가 주장하는 “청중을 죄책감으로 사로잡지 않고 해방시키는 설교, 남북분단의 분노와 대립이 아니라 남북 평화와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는 설교, 사회적 마이너리티를 소외시키는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설교, 생산과 소비를 자극함으로 생태계를 허무는 게 아니라 지속가능한 생태 살림으로 나아가는 설교,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극단적인 경쟁력 제고가 아니라 양극화를 극복하고 경제 정의에 근거한 정의로운 사회를 제시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설교자는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것이 잘 실천되지 못하는 것은 설교자의 의도와 생각과 목표가 너무 과도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설교자는 내가 어떻게 해보려는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정목사가 말하는 비움과 채움의 영성의 변증법을 떠올리게 된다. 자아를 버리고 성령에게 철저히 의존하는 설교자의 비움의 영성은 생명의 신비로 찾아오시는 성령님께 온전히 사로잡혀 말씀으로 채워지는 채움의 영성은 설교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도록 도울 것이다. 구원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의 동역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처럼 설교 역시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매개자인 설교자는 “주여 오소서, 내가 듣고 있나이다.”고 응답하며 그 대화에 참여하는 비움의 영성을 갖출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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