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강단, 세울 것인가 허물 것인가

-정인교 박사의 <설교자여 승부수를 던져라>를 읽고-

 

스타 설교자의 함정

서울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이며 한국설교학회 회장인 정인교 박사(이후 ‘정 박사’로 약함)의 최근작 <설교자여 승부수를 던져라>를 읽었다. 두 번 읽었다. 첫 번은 책의 성격을 파악하려는 생각으로 주마간산 격으로 읽었다. 앞표지 디자인이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안성맞춤이다. ‘탁월한 설교를 향한 16가지 승부 전략’이라는 부제가 돋보였다. 하단에 선정적인 카피가 달렸다. 설교 하나만 잘해도 교회는 부흥한다! 한국교회 최고 설교자 16인의 설교비법 완전 분석! 뒤표지에는 이 책의 서문 격인 ‘연구를 시작하며’에서 인용한 글이 바탕에 깔렸다. ‘설교는 ... 전쟁이다!’는 큰 폰트의 구호가 두드러졌다. 하단에도 앞표지와 마찬가지로 선정적인 카피가 달렸다. 성도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설교의 비밀, 평범한 설교자를 비범하게 만드는 최강의 설교 노하우·테크닉 대공개! 기분이 찜찜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에 대해서 ‘비법’이라니, 낯 뜨거웠다. 마치 수능 족집게 학습 참고서를 선전하는 문구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랴. 그것만 갖고 시비를 걸 일은 아니다. 아무리 진리와 벗하는 학자의 글이라 하더라도 튀어야 살아남는 요즘과 같은 세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내용만 충실하다면 표지는 아무 문제도 아니다.

두 번째 읽기는 정독이었다. 16명의 설교자들이 거론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설교자들이었다. 이들의 설교에 대한 분석을 382 쪽의 분량으로 담았다. 각주까지 일일이 붙였다. 여기에 들어간 정 박사의 수고가 얼마나 컸을지는 긴 말이 필요 없다. 개별 설교자들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한 설교자를 다루기 위해서 백 편 이상의 설교를 검토의 대상으로 삼은 경우도 있다. 평균 50편만 잡아도 물경 800 편의 설교라는 말이 된다. 노작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그 사실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설교학 전문가답게 16명의 설교자에게 드러나는 설교의 특징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이 책에는 16종류의 설교 ‘승부수’가 담겨 있다. 파트 별로 4명 씩의 설교자를 묶었다. Part1에서는 아래의 승부수가 제시되었다. 차례에 나온 그대로 여기에 인용한다. 1) 곰국 끓이듯 묵상과 기도로 메시지를 푹~ 고아라!(꿈꾸는 설교자: 강준민) 2) 대도시에서 승부하기: 도시의 지성을 파악하라, 맛깔나게 설교하라!(지성인을 위한 복음: 곽선희) 3) 치열한 신학과 교리로 승부하기: 눈물의 열심에 치열한 교리를 심어라!(눈물의 열심: 김남준) 4) 상식을 뒤집는 발상의 전환으로 승부하라!(패러독스의 복음: 김동호)

Part2는 아래의 설교자들이 거명된다. 5)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회중의 기본 심리를 자극하라!(부드러운 강함: 김삼환) 6) ‘할 수 있다’는 긍정적 복음으로 승부하라!(적극적인 신앙으로 만든 뷔페식 설교: 김선도) 7) 체험을 통과한 복음으로 승부하라!(체험에 실린 ‘느림’의 복음: 김진홍) 8) 거침없는 직설에 거룩함을 실어라!(성화로의 거침없는 하이킥: 박영선)

Part3은 아래와 같다. 9) 전통적 진중함으로 승부하라!(설교의 모범 답안: 옥한흠) 10) 훈련된 능변으로 승부하라!(웅변을 넘어서는 설교: 이동원) 11) 철저한 강해설교로 승부하라!(설교이전의 설교: 이재철) 12) 부드러운 목회적 감각으로 승부하라!(소박한 세련: 이정익)

마지막으로 Part4는 다음과 같다. 13) 다양한 정보로 승부하라!(설교의 특성화: 전병욱) 14) 강력한 성령의 힘으로 승부하라!(축복을 전하는 영적 설교: 조용기) 15) 맛깔나는 전달로 승부하라!(순교의 열정: 하용조) 16) 겸손과 성숙한 인격의 삶으로 승부하라!(인격으로 전하는 복음: 홍정길)

위의 소제목만으로도 정 박사가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열 여섯 가지의 비법을 다시 각각 한 단어로 정리하면 묵상, 지성, 눈물, 역설, 심리, 긍정, 체험, 직설, 모범, 능변, 강해, 소박, 정보, 성령, 열정, 인격이다. 정 박사는 여기서 설교자의 성품, 영성, 스피치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의 글쓰기 방식은 세 단계로 이뤄진다. 첫 단계는 승부수에 대한 간략한 개념 정리이다. 둘째 단계는 승부수를 익히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고, 셋째 단계는 해당 설교의 특징과 문제점 제시이다. 한 설교자가 여기에 제시된 특징을 모두 배울 수는 없다. 가능한대로 몇 개를 소화할 수 있으면 좋고, 아니면 그중에 자신에게 맞은 것을 하나만 고르면 될 것이다.

정독한 뒤의 느낌은 별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한 해명이 바로 이 글의 목표다. 설교학 전문가의 노작을 이렇게 한 마디로 폄훼한다는 건 인간적인 예의에도 어긋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는 게 낫지 굳이 문제를 들춰낼 필요가 있나, 하고 염려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닌 것을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 박사에게는 미안한 일이겠지만 지금 나는 내 눈에 들어온 실체를 그대로 말해야겠다. 잘못 본 부분이 있으면 누구라도 지적해주기 바란다.

정 박사가 다룬 열여섯 명의 설교자 중에서 두 명만 제외하면 필자의 설교비평 작업에서 다룬 이들과 겹친다.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바로 이 부분에 호기심이 갔다. 내가 다룬 설교자를 설교학 전문가는 어떤 평을 내리는지 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욕을 먹을 각오로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실망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젊은 설교자들이 따라가면 안 될 설교자로 필자가 생각한 이들까지 정 박사는 치켜세웠다. 설교에 대한 정 박사의 시각이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선 다음과 같다. 그는 설교행위 전반을 다룬다면 나는 주로 설교 내용을 다룬다. 이것이 완전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그는 설교 행위의 성과에 비중을 두지만 나는 그것을 낮게 본다. 더 근본적으로 그는 각각 설교자의 특징을 드러내는 작업을 했다면 나는 비평적으로 읽는 작업을 했다. 그는 목회의 차원에 설교를 다뤘다면 나는 해석학적인 차원에서 다뤘다. 그는 실용적인 관점을 높이 샀지만 필자는 인문학적 가치를 높이 샀다. 이런 차이는 전공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차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최소한 “설교란 무엇인가?” 하는 관점은, 또는 “복음은 무엇인가?” 하는 관점은 서로 공유되는 게 있어야만 했다. 그게 없었다. 자잘한 것은 있었지만 큰 것은 없었다. 필자가 체면불고하고 젊은 목사들이 따라가지 말아야 할 설교자로 거론한 이들을 정 박사는 모범적인 설교자에 속하는 이들로 선정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건 단지 시각의 차이로만 내버려둘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 강단을 세우는가 허무는가에 달린 문제이며, 교회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다.

정 박사는 16명을 모범적인 설교자로 선정했다. 물론 16명이 모두 완벽한 설교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의 입장은 이렇다. 이들 16명의 설교자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 장점을 배우고, 단점은 반면교사로 삼자는 말이다. 옳은 말이긴 하나, 하나마나한 말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모든 설교자가 모범 설교자가 될 수 있다. 그들의 많은 단점을 반면교사로 삼고, 적은 장점을 배우면 되니 말이다. 그는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완벽한 설교는 없다는 말로 자신이 추천한 설교자들의 문제를 변호하고 있다. 그는 16명을 선정한 이유를 네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설교의 뚜렷한 성과, 둘째는 일반 목회를 하는 설교자, 셋째는 복음주의 설교자, 넷째는 연설적 능력이 탁월한 설교자이다. 말하자면 정 박사가 모범적인 설교자로 추천한 이들은 복음주의에 속하면서 대중성을 얻은 이들인 셈이다. 더 줄이면 개신교 스타 설교자들이다.

그의 선정 기준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나름으로 필요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타 설교자들을 내세워서 신학생들이나 젊은 목사들이 따라가도록 하는 발상 자체가 내 입장에서는 불편하다. 제2의 조용기, 제2의 강준만, 제2의 전병욱을 키우는 게 설교학자의 사명이라는 말인가? 정 박사에게는 뜬금없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나 한국개신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스타 설교자의 출몰이다. 교회도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스타에 목을 매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스타 설교자가 아니라 전체 교회의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로마가톨릭교회에는 스타 강론자가 없다. 고만고만한 강론자들이 고만고만하게 사목을 하고 있지만 가톨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 반면에 스타 설교자가 즐비한 개신교회는 총체적으로 뒷걸음을 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스타 설교자가 설교하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자들의 쏠림현상이 이에 일조하고 있다. 일조가 아니라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반론이 가능하다. 이런 책임을 대중적인 스타 설교자들에게만 돌릴 수 없다고 말이다. 이 자리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설교의 대중성을 확보한 설교자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난다고 해서 한국의 개신교 전체가 성장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설교학자는 스타 설교자를 배출하는 것보다는 바른 설교자를 배출하는 일에 관심을 보여야 하는 게 아닐는지. 승부수를 던지는 기술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진득하게 천착하는 설교자를 추천해야 하는 게 아닐는지.

 

논리적 모순

정 박사는 대중성이 있는 설교자라고 하더라도 “얄팍한 인식의 이면을 설교의 핵심으로 삼고 성경은 단지 하나의 치장으로 전락시키는 설교자는 퇴출되어야 할 대상”(14 쪽)이라고 옳게 주장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정 박사는 곽선희 목사의 설교에서 배워야할 점과 본받지 말아야 할 점을 나눴다. 먼저 배울만한 점은 청중의 수준에 맞추는 설교, 교양적 문화도시인에 초점을 맞춘 진행, 다양한 보조자료를 통한 들을거리가 있는 설교, 청중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설득적 접근, 화려한 수사적 기법과 강단을 장악하는 설교 매너, 설교 내용에 대한 완벽한 소화와 암기, 매력적인 설교 제목 등이다. 이런 요소들은 설교의 중심이 아니다. 그야말로 설교의 치장에 속한다. 이런 것들을 본받아야 할 점으로 제시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 박사가 곽 목사의 설교를 정확하게 보았다는 뜻이다. 곽 목사의 설교가 설교의 중심이 아니라 치장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는가. 본받지 말아야 할 점은 네 가지가 거론되었는데,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으니 첫째만 인용하겠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 귀는 즐거운데 영적 갈급함은 해소되지 않는다.”(58 쪽)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진정한 메시지가 성경의 깊이보다는 들을 만한 어떤 보조자료에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설교자들은 성경을 깊이 있게 다루는 ‘설교적 관찰’과 성령에 의지하는 ‘기도생활’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이 말은 곧 곽 목사가 성경을 깊이 있게 관찰하지 않고, 기도생활에도 시원치 않다는 뜻이 아닌가. 혹독한 비판이다.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귀만 즐겁게 설교하는 곽 목사는 정 박사 말대로 퇴출 대상이다. 그런데 글 마무리에서 “곽선희 목사와 같은 설교자들이 많이 나오길 소망한다.”고 했다. 정 박사는 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시는지.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궁금하다. 정 박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곽 목사의 설교에 나타난 문제점은 장점과 비교할 때 심각한 게 아니라고 말이다. 과연 그런가? 청중을 부릴 줄 아는 능력만 있다면 성경이 침묵하는 설교도 괜찮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선정적인 방식으로 청중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사이비 이단 교주들의 설교를 모범으로 삼아도 좋으리라. 지금 필자가 트집 잡기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말하는 이유는 그의 논리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설교의 본질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짐은 이미 머리글에서부터 노골화되어 있다. 그는 설교 행위를 전쟁으로 비유한다. “설교는 곧 영적 전쟁인 동시에 회중의 성숙과 교회의 성장이 걸린 실제적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설교자는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11 쪽) 전쟁은 상대가 있어야 한다. 상대는 누구인가? 자기 자신인가, 청중인가, 성장이 멈춘 교회 현상인가? 그가 추천한 설교자들의 면모를 보면 답이 나온다. 모두가 설교를 통해서 교회를 키운 이들이다. 이들이 설교하는 교회로 몰려간 청중들은 또 다른 교회의 신자들이었다. 이 사실을 정 박사도 모르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설교자의 적은 바로 다른 설교자라는 말이 된다. 다른 설교자들과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승부수를 배우라고 선동한 것이다. 필자의 오해였다면 해명을 바란다.

필자가 보기에 정 박사는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 영성 없이 단순히 청중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설교를 본받아야 할 설교로 내세우는 게 아니겠는가. 김동호 목사의 설교를 분석하면서 “성경이 뒤로 밀려나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고 했다. 성경본문을 예화나 인용자료처럼 취급하는 설교가 대단히 많았다고도 한다. 결론은 아래와 같다. “지금까지 그는 이 설교로, 정확히 말하면 상식의 허를 찌르는 역설적인 설교로 재미(?)를 봤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설교는 생명력이 길지 않다. 개인의 아이디어가 아닌 성경의 깊이로 승부해야 할 당위는 김 목사에게도 해당된다. 그가 가진 영향력과 기대치가 높기에 더 더욱 그러하다.”(116 쪽) 무슨 말인가? 김동호 목사는 말재주로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뜻이다. 그런 설교는 길게 가지 못한다고 친절하게 충고했다. 그렇다면 김 목사의 설교는 후학들이 배워야 할 모범과는 거리가 멀다. 정 박사는 필자가 오해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은 완벽한 설교자를 추천한 게 아니라고 말이다. 그런 설교자는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연설적 성격’에서 모범적인 사례를 추천한 것이라고 말이다.(14 쪽) 연설적 성격이 그렇게 중요한가? 독자들은 설교의 내용과 연설적 성격을 구분해서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한국설교학회 회장이 추천한 설교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신학적인 내용도 충실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미 선정 기준에서 그는 “복음적인 입장에서 건전한 신학을 바탕으로 성경적 설교에 주력하는 설교자를 추천하였다.”(14 쪽) 밝혔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실제로는 성경을 뒤로 미루는 설교자를 추천했다. 앞뒤가 다르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사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말(글)로 먹고 사는 사람은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자기가 아는 말을 써야 한다. 목사와 학자가 그렇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성서언어와 신학언어, 영적 언어를 모르고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를 대중 설교자들에게서 흔히 경험한다. 정 박사의 책에 그것이 확연하게 나타난다. 모든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대충 아는 것과 실제로 아는 것은 다르다. 대충 알아도 뭔가를 말할 수는 있다. 설교자들이 성서와 영성에 대해서 대충 알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권위에 숨어서 얼마든지 설교하듯이 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무리 교언영색으로 자기가 대충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는 없다. 그의 글은 자신에게 충분히 소화되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언어 사용에서나 글의 논리에서 마찬가지이다. 글 읽기에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하다.

예컨대 그는 ‘사건’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문맥적으로 정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설교의 위기를 조장하는 요인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설교가 설교자를 통해 발생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결국 그 위기는 설교자에게로 귀결된다.”(8 쪽)라거나, “이처럼 설교가 ‘사건’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할 수는 있으나 설교자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그 무엇인가를 내세워야 한다. 그것이 설교를 사건으로 만드는데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면 설교자는 그 ‘승부수’에 집중해야 한다.”(11 쪽)는 진술에서 ‘사건’이 무슨 의미인지 모호하다. 은혜를 받는다는 것인지, 구원이 임한다는 것인지 의미가 불확실하다. 현대신학에서 언어의 사건적 차원을 가장 중요하게 다룬 학자는 에벨링이다. 에벨링은 언어가 단지 어떤 사실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존재론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언어사건(Wortgeschehen)이라고 보았다. 여기에는 푹스, 불트만, 하이덱거 등의 사상이 연루되어 있다. 설교가 사건이라는 정 박사의 표현이 이런 신학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성경 언어의 해석학적 차원을 완전히 무시하고 말재주에 빠져 있는 대중설교자들을 모범적인 설교자로 내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그가 신학용어를 어림짐작으로 쓴다는 반증이다. 얻어들은 풍월로 쓴다고도 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이런 문제들이 그의 사유와 논리와 글쓰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작은 실수도 눈에 뜨인다. 체험적이고 실존적이고 주관적인 성서해석이 강한 학자는 칼 바르트가(53 쪽) 아니라 불트만이다. 이런 말이 안 되는 실수야 필자도 종종 하는 일이긴 하지만 정 박사의 경우에는 실수가 아닌 것 같다. 정통 보수신학의 곽선희 목사를 자유주의 신학자 불트만과 연결시킬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의 번역 투 글쓰기도 글을 따라가기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개념 자체가 모호할 수도 있고, 결과에 대한 자신이나 낙관을 가지기도 힘들다.”(11 쪽) 낙관을 가지기 힘들다는 표현은 우리말이 아니다. 그냥 ‘낙관할 수 없다.’ 정도로 말하면 된다. “가령 그는 예수를 이해함에 있어 전통적인...”(48 쪽) ‘... 함에 있어’도 우리말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함이 느껴지기보다는”(79 쪽)도 어색하다. 그냥 ‘자유’라고 하면 된다. “전문 설교자들에 대한 ‘방출 통보’(?)에 다름 아니다.”(10 쪽) ‘다르지 않다.’라거나 ‘다를 게 없다.’ 하면 될 것을 왜 ‘다름 아니다.’라고 표현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우리말이 비틀리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런 예는 그의 책에 부지기수다. 단순히 개인의 글쓰기 특징을 제삼자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학자의 글이기에 이렇게 시비 걸듯이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자연스럽지 못한 글들이 단순히 글쓰기 습관이나 특징에 머무는 게 아니라 사유와 논리에도 그대로 묻어난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자신이 진술하고 있는 것의 실체를 모른 채 말하다보니 논리가 뒤섞여버린 것이 아니냐, 하는 의심이다.

 

김남준과 전병욱

정 박사가 다루고 있는 16명의 설교자 중에서 두 명에 대해서만 구체적으로 검토하겠다. 한 사람은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이다. 필자는 그의 설교를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한 적이 있다. 감정의 과잉, 성서텍스트의 오해, 죄 콤플렉스, 기독교 패권주의 등등의 개념들이 김 목사의 설교를 해명하는 키워드였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에 의해 포위되었다.”고 진단했다. 이런 설교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청중들의 영혼은 병들기 마련이다. 김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으신가? 은혜를 받는다는 현상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게 좋다. 은혜는 도처에 널려 있다. 구원파 박옥수 목사나 귀신론의 김기동 목사에게 은혜를 받는 사람도 넘쳐난다. 문선명에게 은혜를 받는 사람도 많다. 히틀러의 연설에도 은혜를 받은 독일 사람들이 많았다. 설교에서 청중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핵심은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복음의 진수가 선포되는가의 여부가 핵심이지 않은가. 필자가 보기에 김 목사의 설교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춘기 청소년들의 감수성에 호소하고 있었다. 건강하지 못한 설교다.

정 박사는 김남준 목사의 설교를 다루는 꼭지의 제목을 “치열한 신학과 교리로 승부하기: 눈물의 열심에 치열한 교리를 심어라!”로 잡았다. 정 박사에 따르면 김남준 목사는 청교도 설교자다. 정 박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설교 수사학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설교자다. 그래도 김 목사의 설교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깊은 성경강해, 복음에 대한 열정, 소박한 인격 탓이다. 설교의 특징을 여섯 가지로 나열한다. 첫째, 내용과 형식이 청교도적이다. 둘째, 강해와 교리라는 두 축으로 전개된다. 셋째,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다룬다. 넷째, 회중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방식의 설교다. 다섯째, 칼뱅주의를 신학적 토대로 한다. 여섯째, 회중에게 직설적으로 도전한다. 정 박사의 설명은 틀린 게 없다. 김남준 목사의 설교를 무난하게 분석했다. 무난한 분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대원 학생들이나 일반 평신도들이라고 하더라도 다 알만한 내용을 무색무취한 글쓰기 방식으로 진술했을 뿐이다. 전문가만이 포착할 수 있는 깊이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런 글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지 못한다. 마치 신학대학교 설교 실연 시간에 교수가 학생들의 설교를 간단히 코멘트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그렇다 치자. 문제는 그가 결론적으로 김남준 목사의 설교를 신앙적 성숙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는 사실이다. 필자의 입장과 완전히 다르다는 게 신기하다.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실체적 진실을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정 박사의 덕담은 다음과 같다.

 

김남준 목사는 독특한 설교자이다. 연설로서의 설교적 차원을 철저히 배반하면서도 오직 설교를 통해 회중을 모은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독특성을 넘어 김 목사의 설교가 보다 보편적인 대중성을 지향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의 강해적 깊이를 더 많은 사람들이 듣는다면 한국 성도들의 신앙적 성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있다.(79쪽)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의 설교를 다룬 졸고 “들리는 설교와 들리지 않는 설교”를 이번에 다시 읽어보았다. 거기서 필자는 그의 설교가 청중과의 소통에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과는 불통에 빠졌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전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허투루 다룬다. 그에게 성경은 청중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정보일 뿐이다. 그는 기독교가 성경을 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지에 대한 그 속사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설교자다. 성경은 단순한 신앙의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존재론적으로 견인해가는 언어사건이다. 성경을 정보로만 취하는 전병욱 목사의 설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 같다. 성경의 놀라운 세계로 들어가서 영혼의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의 처세술적인 설교를 치장하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를 필자는 위의 졸고에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결론은 이렇다. “어쨌든지 분명한 건 그의 ‘들리는 설교’가 모래 위에 세운 집이라는 사실이다.”

정 박사는 전병욱 목사의 설교를 다루는 꼭지의 제목을 “다양한 정보로 승부하라!”고 달았다. 전 목사의 설교 특징을 정확하게 짚었다. 그러나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문제이다. 필자가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정 박사는 자신이 한 말의 실체를 잘 모른다. 그 꼭지의 서론에서 성경적 설교의 핵심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전 목사의 설교를 성경적이라고 진단했다. 그것을 강해설교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의 설교가 전반적으로 성경적인 색채를 띤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312 쪽)는 것이다. 정 박사에 따르면 성경적 설교는 성경 본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이며, 이를 위해서 철저한 주석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전병욱 목사의 설교가 이런 주석 작업을 철저하게 수행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게 미흡하다는 말을 뒤집어서 비판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설교학의 교과서적인 d이야기인 것 같다. 그가 규정한 전 목사 설교의 특징인 다양한 정보와 그가 성경적 설교의 특징으로 거론한 주석 작업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다. 전병욱 목사는 주석서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 박사는 아시는지. 전 목사는 “주석을 봐야할 정도로 본문 해석이 안 되는 곳은 별로 없기”(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 300 쪽) 때문이라고 큰 소리를 치는 분이다. 당연하다. 성서가 다른 처세술과 비슷한 정보에 불과하다고 보는 분의 눈에는 성서의 가르침이 뻔할 수밖에 없다. 성서가 노출이면서 동시에 은폐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전병욱 목사의 독서와 정보라는 것도 왜곡의 가능성이 높다. 그는 삼일교회를 여성적인 교회가 아니라 남성적인 교회로 키우기 위해서 경제경영 서적을 가까이 하고, 심지어 중국병법서를 30,40 권이나 수집할 정도이다. 정 박사는 전병욱 목사의 어투에 문제가 있지만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 시대에 ‘모두가 새겨봄직한 선구적 모범’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처구니없는 평가다.

 

젊은이들만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들만 잡을 수 있다면 내일의 한국교회에는 희망이 있다. 어디 젊은이뿐이랴? 실버 세대나 어린이를 타킷으로 하는 설교와 목회도 우후죽순처럼 일어날 필요가 있다. 전병욱 목사만큼만 연구하고 노력하면 길이 보이지 않겠는가?(314 쪽)

 

필자가 바람직하지 못한 설교자로 거론한 김남준과 전병욱 목사를 정 박사는 따라야 할 모범으로 추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정 박사도 김남준과 전병욱 목사의 설교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특히 전병욱 목사의 설교에 대한 아무개 대학원 학생들의 반응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는 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말장난 같다. 남대문 시장 상인이 물건을 파는 것 같다. 경박스럽다. 정 박사는 이런 평가를 내린 학생들이 30대 중후반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런 문제를 단지 세대차이로 치부하고 있었다. 설교행위에 대한 시각이 안이하다. 안이하다 못해 무책임하다. 설교학자들의 이런 태도로 인해서 수많은 후학들이 설교의 바른 길을 찾지 못한다. 결국 이것은 매문(賣文) 행위 아닌가.

다시 묻자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앞에서 한번 언급한대로 정 박사는 그 대답을 설교학과 조직신학의 차이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설교학은 설교의 내용만 분석하는 조직신학과 달리 설득 기술과 청중의 반응까지를 포함한 설교행위 전반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과연 설교학과 조직신학은 큰 틀에서 동일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말인가?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설교학도 여전히 조직신학과 마찬가지로 신학의 한 분과일 뿐이다. 설교학도 신학이라는 기둥에 붙어 있으며, 조직신학도 그렇다. 똑같이 신학을 기둥으로 한다면 동일한 사태를 완전히 다르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차이는 전공이 다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와 신학에 대한 인식과 경험의 차이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에 신학대학교의 설교학은 조금 더 신학의 중심으로 가까이 오는 게 좋겠다. 전달기술과 목회의 효율성보다는 하나님(神-Theos)의 말씀(學-Logos)에 무게의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분과의 명칭을 설교학이 아니라 ‘설교신학’으로 바꾸는 게 어떨는지. 한국설교학회 회장이신 정 박사께 부탁을 드린다. 한국교회 강단을 주제로 설교학자와 조직신학자의 공동 심포지엄을 열었으면 한다. 마음만 먹으면 안 될 것도 없을 것이다. 몇 년 전에 한국설교학회에서 <설교비평>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다. 정 박사와 총신대학교 류응렬 박사의 발제가 있었다. 필자는 훗날 <기독교사상>에 실린 발제문을 읽었다. 이런 세미나도 설교학 전공자들만이 아니라 타 분과 전공자들이 함께 참석했다면, 요즘 학계의 대세인 간학문의 소통에도 상응하는 것 아니겠는가.(기독교사상, 201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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