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림과 닫힘의 이중성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

현재 남서울은혜교회에서 시무하시는 홍정길 목사님(이하 ‘홍 목사’)의 신앙여정에는 두 번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65년 7월24일에 일어난 ‘예수 영접’ 사건이다. 이는 마치 기원후 386년 어느 날 당시 서른세 살이었던 어거스틴이 동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를 “들고 읽어라.”는 소리로 알아듣고 로마서 13:13,14절을 읽은 후에 존재론적 변화에 이른 사건, 또는 1510년 어느 날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던 마틴 루터가 수도원 업무 차 들렸던 로마에서 스칼라 상타 28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던 중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깨달음에 이른 사건, 또는 1738년 5월24일 그 당시 서른다섯 살이었던 존 웨슬리가 북아메리카 선교활동에서의 좌절 끝에 올더스게이트에서 열리는 앵글리칸 단체의 집회에 참석하여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듣고 성령 충만을 경험한 사건과 마찬가지로 홍 목사의 운명을 바꾼 대오(大悟) 사건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1942년 2월3일 생) 스물세 살이었다. 그로부터 7년 뒤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다시 3년 뒤에 한국교회 역사에 한 획을 남긴 남서울교회를 개척했다. 회심 이후 지금까지 40여년에 이르는 그의 사역은 바로 이 “예수 영접” 사건에서 그 영적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늘 그 당시의 체험을 회상하고 있다.

결국 1965년 7월24일 내게 친히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외할머님의 지극한 기도와 한시도 쉬지 않고 눈물로 기도하신 부모님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하나님의 은혜 나의 사명>, 36, 47, 88, 108, 201 쪽. 이하 ‘은혜’)
1965년 7월24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다음 제가 제일 처음 느꼈던 감정 중에 하나는 평안함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평안을 빼앗길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 순간에는 더 아름다운 평화가 내 마음에 기둥처럼 솟아오르는 것을 느낍니다.(빌립보서 강해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 21쪽. 이하 ‘기쁨’)

두 번째는 1996년 3월, 지난 20년 9개월 동안 전심전력으로 목회하던 남서울 담임 목사직을 사퇴한 사건이다. 그 당시 남서울교회는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더 이상의 모범적인 교회가 없을 정도로 한국의 모든 교회로부터 칭찬을 듣고 있었다. 그가 교회를 사퇴하게 된 배경은 예상 외로 단순했다. 그 당시에 홍 목사는 남서울교회와 남서울교회가 개척한 남서울은혜교회(구 중동교회)를 동시에 섬기면서, 특히 정서장애인을 위한 밀알학교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건축허가 과정에서 불거진 법적인 문제들이 대체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실제 건축을 위한 어려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때였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자신이 무언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한 주간의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마지막 금요일 새벽에 비몽사몽간에 주님께서 “네가 그 아름다운 꿈을 위해서 지불할 대가가 무엇이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그는 일 년 연봉을 바치겠다고 대답했다. 그것으로 되겠느냐 하는 음성을 듣고 자신의 이름으로 아무 재산이 없었던 그는 불현듯 퇴직금이 생각났다. “주님, 저의 퇴직금을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그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이 교회를 제가 떠나겠습니다.” 하자 그때서야 저에게 평안이 왔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의논하지 않고 주일 당회 때 이 사실을 통고하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인간적으로도 도저히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가겠다고 하는 것이니 저를 보내주십시오.(은혜 234)

이렇게 홍 목사는 개척 20년 9개월 만에 남서울교회를 떠났다. 목사가 교회를 떠나는 일이야 흔하기도 하고, 또는 모든 목사들의 경우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홍 목사에게는 유별나다. 그는 이 순간에 전통적 의미에서 말하는 목회로부터 새로운 목회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목회적인 차원의 패러다임 쉬프트이다. 정서장애인을 위한 밀알학교를 중심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를 시작한 것이다. 그는 남서울교회에서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사랑하는 주님 때문에 이제는 임지를 바꾸어서 정서장애인 학교를 짓는 일에 전념을 해야 하고, 또 그곳에 개척된 은혜교회에서 장년 성경공부의 정착을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보내주시기로 결정해 주시니 무척 감사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가십시다.(은혜 252)

남서울은혜교회와 밀알학교는 이제 10주년을 넘었다. 그가 처음에 기도하고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결실을 맺는 중이다. 이에 대해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남서울은혜교회 10주년 특별위원회에서 펴낸 <하나님의 두툼한 손>(생명의 말씀사, 2006년)을 참고하기 바란다. 모르긴 해도 남서울은혜교회와 밀알학교는 한국교회사에 또렷한 족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새로운 교회모델로 자리를 잡지 않을는지. 학교와 교회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모델 말이다. 그 당시 홍 목사의 남서울교회 사임과 밀알학교에 관해 보도된 일반 매스컴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홍 목사는 체중 85㎏의 거구이면서 소형 프라이드를 타고 다니는 검소한 목회자로 소문나 있다. 또 “교회 예산의 70%는 교회 밖의 구제와 선교에 써야한다.”는 목회관을 고수해 오면서 자기 명의의 재산을 한 푼도 만들지 않은 목회자이기도 하다. (1996. 3.31. 동아일보)

세상을 향해!
필자는 지금 홍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겠다고 나섰으나 그의 삶과 목회 여정을 따라가면서 굳이 설교비평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남서울교회나 남서울은혜교회에서 펼쳐졌거나 진행 중인 목회 분야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섬김과 봉사 분야에서도 더 이상 요구할 게 없을 정도로 풍성한 결실을 맺고 있는 마당에 설교비평이라니, 초라한 일 아닌가.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홍 목사의 설교는 이미 검증이 끝난 거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홍 목사는 강해설교에서도 일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목회의 열매와 별개로 설교를 분석하는 일은 나름으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는 1984년 3개월간 영국에 머무는 동안 당시 복음주의 설교자들의 좌장격이었던 존 스토트가 설교하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와 개인적인 친교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설교의 차원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런 점들도 설교자로서의 홍 목사를 언급할만한 이유가 될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설교의 능력을 빼놓고 그의 목회적인 업적을 해명하기 힘들다는 사실이 필자가 그의 설교를 힘겹게나마 비평하는 이유이다.
위에서 필자는 홍 목사의 신앙적 삶을 결정하는 두 가지 사건을 짚었는데, 그의 설교도 역시 큰 틀에서 볼 때 두 가지 특징을 보인다. 앞의 사건이 설교행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으나 어느 정도 연관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연관성은 이 글이 진행되면서 시나브로 밝혀질 테니까 접어두고, 일단 홍 목사의 설교를 이해하는데 일종의 키워드라 할 그 특징을 검토해야겠다.
첫째, 그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그가 자신의 분신이라 해도 좋은 남서울교회를 사임하면서까지 밀알학교 건립에 매달린 이유는 교회가 세상을 향한 섬김에서 그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신학에 놓여 있다. 그는 늘 교회 밖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원래부터 가졌던 교회 건물을 넓히기 위해 안으로 투자하기보다는 밖으로 내어주는 교회가 되자는 원칙”이 그에게 중요했다. 남서울교회는 홍 목사가 목회하는 동안에 넘치는 교우들을 감당할 수 없어 여러 번에 걸쳐서 분리 개척을 했으며, 결국에는 중동학교의 강단을 주일만 빌려 쓰는 방식으로 중동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홍 목사 개인도 그렇고 그가 목회하는 교회도 역시, 본회퍼의 신학개념으로 말해서 ‘타자를 위한 존재’를 지향한 셈이다.
그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이런 신학을 조금 더 실질적으로 이해하려면 그가 남서울교회에 시무하면서 추진한 일들을 따라가는 것도 좋으리라. (홍 목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에서 가장 좋은 신학교 중의 하나인 합동신학교가 남서울교회 지하 예배실에서 태동했지만 남서울교회의 것이 아니며, 전도폭발훈련이 남서울교회에서 자랐지만 개교회의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해외선교회(GMF)가 남서울교회에서 자랐고, 어린이를 위한 양서보급단체인 파이디온선교회가 남서울교회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유명한 KOSTA(유학생수련회)도 역시 남서울교회로부터 시작되었고, 학원복음화협의회를 뒷받침한 교회도 남서울교회이다. 남북나눔의 모임이 남서울교회의 후원으로 자랐고, 밀알교회는 남서울교회와 남서울은혜교회가 함께 이루었다. 이런 일련의 사회선교 내지는 연합활동에 홍 목사가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그런데도 홍 목사는 이런 업적들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기쁨 204)
세상을 향한 그의 열린 자세는 통일문제에서 두드러진다. 홍 목사는 1992년부터 남북나눔운동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로 에큐메니칼 쪽 인사들로 전개되던 북한돕기운동이 홍 목사에 의해서 복음주의 영역으로 확장된 셈이다. 그에게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는 사회과학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영성과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속한다. 여기에 근거해서 그는 통일문제에서도 남한교회의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통일문제에서 그가 제시하는 한국기독교가 취해야 할 세 가지 태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사랑의 표현이며, 둘째는 ‘사랑의 쌀’ 보내기 운동이며, 셋째는 북한 재산권에 대한 무효화 선언이다.(<한국교회는 이 민족을 책임질 수 있는가>, 1995년. 이하 ‘민족’)
필자는 복음주의 설교자 중에서 홍 목사만큼 통일문제에 대해 전진적으로 생각하는 분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그가 이렇게 통일지향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근거가 무엇인가? 그가 성장한 신학적 배경만으로 본다면 그의 이런 입장은 뜻밖이다. 위에서 짚은 대로 1965년 7월24일 그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경험은, 앞뒤 정황을 살펴보건대 대학생선교회(CCC)의 김준곤 목사님이 인도한 집회에서 일어난 것 같다. 그 일 이후 그는 7년 동안 그 단체에서 대학생들을 지도했다. 원래 그는 그 일을 평생의 사명으로 생각했는데, 타의에 의해서 그 일을 그만 두고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 내막에 대해서 그는 별 말이 없다. 그 당시 사회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주로 <사영리> 소책자와 ‘순’모임을 통해서 대학생들의 사회적 책임과는 전혀 달리 교리적인 개인구원에만 몰두하고 있던 그 단체 출신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통일문제를 비롯한 사회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복음주의 계열에서 가장 돋보이는 북한전문가가 됐다.
필자의 생각에 세상을 향한 열린 태도는 그가 신앙을 배운 선교단체나 신학교에서의 공부보다는 오히려 그 이전에 형성된 세계관이나 통찰력에 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통찰력은 어떤 노선에서 신학공부를 했느냐와 상관없이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이기도 하다. 그의 설교에서 수시로 발견되는 날카로운 신앙적 진술도 역시 이런 통찰력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는 한국교회의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신앙현상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의 충만이 아닙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기쁨 124) 그에게 믿음은 추상이 아니라 구체이다. 신앙과 삶의 일치를 위해서 예수를 믿고 구체적으로 달라진 게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기쁨 303)  

요즘 믿음을 말할 때 이렇게 믿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은 참으로 중요하고 귀한 것이다. 내가 열심히 믿고 간절히 바라던 것이 이루어졌다. 믿는 대로 되리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이런 몇 구절을 따서 우리의 믿음을 계속 강조하는 주장이 있습니다.(<믿음의 사람들>, 12. 이하 ‘믿음’)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의지할 때에 생깁니다. 믿음 자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곧 능력이고 그 말씀이 능력입니다.(믿음 25)

더 나아가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는 교훈의 종교가 아니다.(기쁨 47) 또한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되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종교입니다.”(은혜 195) 그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아주 분명한 인식과 통찰력을 확보한 사람이다. 이런 통찰력에 의해서 그는 자연스럽게 세상을 향해서도 열린 시각을 유지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배려하고(기쁨 203), 기업소득의 30%를 세계선교 기금으로 바치겠다는 사람에게 그런 생각보다는 노동자들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기업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권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은혜 177) 필자는 홍 목사의 설교에서 기독교인들을 단지 교회성장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목회 공학적 관심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섬길 수 있는 신자들로 성숙시키려는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의지가 최종적으로 밀알학교로 승화한 게 아니겠는가.

박윤선 신학
둘째, 그의 설교는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추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걸 축자영감설로 규정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게 필자가 그의 설교를 따라가다가 어딘가 조금씩 불편하게 된 가장 핵심적인 원인이다.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홍 목사가 성서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닫혀 있었다는 말이다. 몇 군데 예를 들어보자.
홍 목사에 의하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요 14:3)는 말씀에서 이 처소는 맨션(mansion)이다. “입구에 큰 대문이 있고 그 대문을 지나 마차를 타고 한참 동안 들어가야 대저택이 보이는 집”이 바로 맨션이다.(기쁨 103)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이 아니라 통치라는 사실은 아주 초보적인 신학개념인데, 그는 순전히 공간적인 의미로 생각한다.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다는 바울의 진술에(빌 2:10) 근거에서 그는 “믿지 않는 사람은 그분의 능력 밖으로 나가 영원한 무저갱의 불타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과감하게 주장한다.(기쁨 159) 그는 묵시문학적 서술을 사실적인 서술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설령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한다는 의미였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한 사람이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된다는 진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충돌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만 했다.
설교자는 기독교 교리를 전할 때 그것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신중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기독교 교리는 표면적으로 정언적 명제로 진술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매우 복합적인 사유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서로 충돌하는 교리가 어떤 방식으로 기독교 영성을 열어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은 서로 모순이다. 창조가 완전하고 아름다웠다면 도대체 왜 심판이 필요한가? 이걸 해명하기 위해서 인간의 타락이 언급될 수밖에 없다. 이 타락도 물론 창조의 완전성과 충돌한다. 이런 충돌과 모순은 기독교 교리 안에 무수히 많다. 하나님은 유일하다는 명제와 예수님 역시 하나님이라는 명제도 그렇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부들은 삼위일체론이라는 신학 개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부활과 영혼불멸성도 역시 서로 충돌하지만 기독교 교리 안에 정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조직신학적 문제들을 다룰 때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는 기독교 교리의 유기적 연관성이다. 위에서 언급한 서로 충돌되는 주제만이 아니라 율법과 복음, 칭의와 성화, 창조와 종말도 모두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런 유기적인 연관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신학이며, 동시에 영성이다. 이런 연관성을 배제한 채 청중들을 향해서 한 주제만을 독립적으로 선포할 경우에 그 가르침은 독단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 교리의 잠정성이다. 조직신학의 모든 항목들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 인간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그의 통치와 그의 세계 완성을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신학명제도 이미 완료된 교리가 아니라 종말의 빛에서 늘 새롭게 조명 받아야 할 신학개념이다. 설교자는 성서와 신학의 역사가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의 신비를 유기적이고 잠정적으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깊이로 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홍 목사에게서 이런 신학적 영성을 찾기가 어려웠다.
홍 목사의 문자적 성서이해는 자연스럽게 유형론적 해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가인의 예물을 받지 않고 아벨의 예물을 받은 이유는 아벨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갈보리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믿음 26) 방주를 지은 노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 되심을 바라보았다고 한다.(믿음 170) 더 나아가 아브라함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모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한다.

모세는 그냥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제사법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제사 속에 숨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신명기를 기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면 영광스러운 일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일, 능욕을 당하는 일마저도 이 세상의 어떤 보배와 바꿀 수 없는 보배라는 말입니다.(믿음 170)

구약성서의 기독론적인 해석은 필요하며 당연하기도 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유형론적 해석은 구약과 신약을 단지 기계적으로 접속시키는 것에 불과하지 신학적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학적 해석에서는 구약과 신약이 결합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지만, 유형론적(예표론적) 해석에서는 이미 결정된 지평이 그대로 고수될 뿐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제사법을 기록했다는 진술을 이해하기 힘들다.
홍 목사가 숭실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이 세상을 향해서는 열린 태도로 접근하면서 성서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필자는 조금 아쉽게 생각한다. 논리의 궁핍성이 흔히 드러난다는 사실은 곧 자신의 사유체계에 어떤 모순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 아니겠는가. 예컨대 성실하지 않으면서 기도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태도를 지적하면서 홍 목사는 “아무리 기도해도 물 위를 못 걸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물 위를 걸으라고 명령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님이 물 위를 걸으라고 말씀하시면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믿음 143)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가 말하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런 논리라고 한다면 성서는 2천 년 전 사람들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이니까 오늘 현대인들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말이 되고 만다.
지금 필자는 홍 목사의 설교를 트집 잡으려는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한 개방성이 왜 성서에서는 폐쇄성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해서 질문하는 것뿐이다. 혹시 1965년의 회심 사건 이후에 그에게 영향을 끼친 분들에 의해서 이런 혼란이 빚어진 것은 아닐는지. 이십대 중반에서 삼십대 초반의 나이는 삶의 깊이나 학문의 성숙에서도 매우 민감할 때 아닌가.

1965년 CCC에서 신앙생활하면서 김준곤 목사님으로부터 ‘어떻게 꿈을 갖는가, 그 꿈을 위해서는 어떤 헌신을 해야 하는가’ 등을 배웠습니다. 1966년에는 가나안 농군학교에 입소해서 김용기 장로님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는데,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말씀대로 어떻게 사는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1967년에는 신학교에 가서 박윤선 목사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이분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민족 252)

다시 정리하면, 홍 목사는 김준곤 목사로부터 예수를 영접한 사람의 신앙적 열정과 선교 비전을 배웠고, 김용기 장로로부터 민족과 사회를 향한 열린 태도를, 그리고 박윤선 목사로부터 성서 해석방법론을 배웠다. 김준곤, 김용기, 박윤선은 홍 목사의 신학과 설교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특히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그의 진술대로 박윤선 목사의 성서해석이 홍 목사에게 거의 그대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박윤선 신학을 논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대개의 윤곽은 드러나 있으니까 언급하지 않고 대신 홍 목사의 설교 한편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겠다. 필자가 보기에 이 설교는 세상을 향해 열린 태도를 취하는 홍 목사의 설교 영성이 그대로 담겨 있으면서도, 여전히 어떤 한계를 보이는 한 전형이다.

“구원이 이른 집”
홍 목사는 그 유명한 삭개오 이야기로 알려진 누가복음 19:1-10절을 본문으로 “구원이 이른 집”이라는 설교를 했다. 여리고 성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자기 집으로 모시는 기회를 얻게 되고, 회심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는 말씀을 들었다는 내용이다. 이 본문과 설교제목을 접한 청중들은 무슨 설교가 나오게 될지 이미 감을 잡을 것이다. 홍 목사의 설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이름과 실제 그 사람의 인격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큰 아들과 미주 한인교회 이름을 들어 간단히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의 문을 열었다. 삭개오라는 이름이 “순결하다, 순수하다, 정결하다.”는 뜻이지만 그는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로마의 식민 치하에서 시행되던 세무행정과 여리고 성의 지리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홍 목사는 삭개오가 돈과 권력의 재미를 즐기며 살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음의 공백을 느끼던 삭개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홍 목사는 예수님과 교제하는 삶을 아래와 같이 역설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와 구원의 감격을 맛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앞에 조그만 손해나 장애가 오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키 작은 장애 때문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하고 찾는 자를 주님은 만나 주시고 가까이 하십니다.(은혜 106)

바로 이런 대목에서 홍 목사의 설교가 빛을 발한다. “인생을 살면서 참 가치와 보람을 느끼며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고 요구한다. 뽕나무에 숨어 있던 삭개오를 부르신 주님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을 찾아내신 분이시다. 주님은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하고 외치는 홍 목사는 청중들을 향해서 이렇게 감동적으로 호소한다.

깊은 밤에 외로이 홀로 흐느끼는 그 슬픔도 주님께서는 아시고 계십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아십니다. 내가 당하는 그 고통과 아픔을 아십니다. 내 근심과 염려를 아십니다. 삭개오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여러분도 낱낱이 아십니다.(은혜 107)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홍 목사는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 사건이 그에게도 실존적으로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리라.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그는 성경의 내용을 믿을 수 없어서 똑똑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들에게서 그는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1965년 7월24일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동안 가졌던 그 질문들에 대해 하나하나의 답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마치 봄이 되면 먼 산에 눈이 한꺼번에 녹아버리듯이 모든 질문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질문의 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가 없어져 버렸습니다.(은혜 108)

필자는 이 글머리에서 홍 목사의 삶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1965년의 회심사건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 사건은 그의 운명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라 성서해석과 설교행위에서도 역시 그렇다. 홍 목사에게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일이 모든 문제를 푸는 마스터키이다. 그가 젊은 시절 <사영리>에서 배운 신앙의 틀이 아니겠는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었다. 예수가 당신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1965년 7월24일 예수를 영접한 이후로 성서에 대한 그 많던 질문이 일시에 해결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경험은 홍 목사에게 신앙적 역동성으로 작용하면서 동시에 성서해석의 약점으로 작용한다. 질문이 없는 사람은 대답도 찾지 못하는 거 아닌가. 홍 목사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필자는 예수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질문이 더 많아진다. 나사렛 목수인 요셉의 아들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 더욱 궁금하다. 도대체 그런 명제의 현실(reality)은 무엇인가? 이렇게 궁금증이 많은 나는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인지.
홍 목사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필자가 몰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예수가 우리 삶을 실제로 해결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삭개오는 예수를 영접한 후에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집에 이르자마자 그의 좁은 마음이 넓어지고 악하던 마음이 선하게 바뀌었습니다.” 주님의 용서를 경험한 삭개오는 새로운 생애로 바뀌었다. 이것을 보시고 주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신다. 주님을 모신 사람은 이제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60평짜리 집에 살다가 교회에 나온 뒤로 15평으로 줄인 어떤 세무서 직원이야말로 “진짜 주님의 풍요가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주시는 풍요로운 인생으로 돌아오십시오. 주님 안에만 진정한 풍요가 있습니다.” 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홍 목사는 이날 은혜로운 설교를 하셨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의 삶이 그걸 받쳐주고 있으니 설득력이 높은 설교 아니겠는가. 그러나 은혜롭고 감동적이라고 해서 그게 무조건 좋은 설교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이렇게 묻는다. 삭개오 이야기는 홍 목사가 설교했듯이 예수 영접을 통해서 남에게 나눠주는 삶으로 변화되고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얻는다는 진리를 전하려는 것일까?
복음서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바탕에 깔고 삭개오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라.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는 곧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눅 19:10, 공동번역)고 말씀하셨다. 잃은 사람의 구원이 바로 이 사건의 중심이다. 잃은 사람은 바로 세리 삭개오였으며, 그는 죄인이었다. 누가는 7절에서 예수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이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며 못마땅해 했다고 전한다.(7절) 이 본문에는 두 세력이 대립하고 있다. 한쪽은 죄인 삭개오이며, 다른 쪽은 그를 죄인 취급하며 예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자칭 의인(바리새인들로 추정됨)이다. 여기서 예수는 죄인의 손을 들어준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본문에서 삭개오와 그의 행위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그와 대립해 있는, 궁극적으로 예수와 대립해 있는 무리들과 그들의 사고방식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자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의 선포가 어떤 실체적 내용을 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바리새적인 신앙관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예수 영접과 나눔의 삶은 여기서 부차적인 주제이다.
필자는 지금 홍 목사의 설교가 성서를 왜곡했다거나, 거꾸로 필자의 해석이 가장 정확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설득시키려는 게 아니다. 단지 예수 영접이라는 실존적 신앙경험에만 머물러 버림으로써 결국 성서텍스트가 해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이런 방식의 설교가 반복되면 성서텍스트의 심층으로 들어감으로써만 열리게 되는 설교자의 영성은 축소되며, 결국 설교자는 설교 외적인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설교 외적인 요소가 홍 목사에게는 밀알학교로 대표되는 사회봉사이다. 이런 봉사는 누구나 본받아야 할 일이지만 설교의 본질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도 역시 종속변수에 불과하다.

성서해석과 역사해석
홍 목사의 설교에서 성서가 해석되지 않는 이 사태는 성서해석에만 머물지 않고 나름으로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 역사해석에도 연루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필자는 홍 목사의 사유체계가 안고 있는 이중성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열려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닫혀 있다는 말이다. 열림과 닫힘이 변증법적으로 지양된다면 오죽이나 좋겠나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열림과 닫힘이 제각각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훗날 홍정길 평전을 쓸 사람은 바로 이 열림과 닫힘의 이중성, 또는 불협화음을 분석해주기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복음주의 노선에 있는 목회자로서는 역사를 매우 진취적으로 대한다. 남북나눔운동 사무총장을 십여 년 동안 맡고 있으며, 현재도 대북협력민간협력단체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기존의 보수우익에 속한 목사들의 친미적 경향과도 분명히 다른 입장을 취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문화는 재미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기쁨 43) 최근의 설교에서는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우리의 과거 역사를 비판할 정도로 보기에 따라서 진보적인 흔적을 보이기도 한다.
홍 목사의 사유체계가 열림과 닫힘의 변증법에 이르지 못했다는 필자의 주장은 그가 역사를 해석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몇 가지 예를 들겠다. 공산주의에 대해서 분노를 품는다는 사실은 그가 역사를 해석하지 않는 보수우익의 목사들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의미이다. 그는 요셉의 덕을 강조하면서 민중신학자들이 말하는 ‘한’의 신학을 부정하고,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정의는 “무서운 인류의 악”이라고 단정한다. 그는 요셉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존경심을 유발한다고 주장한다.(믿음 128) 필자가 보기에 요셉은 덕스러운 사람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매점매석을 통해서 이집트의 민중들을 농노로 추락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홍 목사는 2003년 6월22일에 “그리스도인의 자세”(롬 12:18-21)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인터넷 신문 뉴스앤조이 참조) 북한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6.25를 생각하면 빼앗긴 것이 많아서 이가 갈립니다. 전쟁의 무수한 고통을 우리가 당했습니다.” 필자가 알기로는 그 전쟁에서 남한보다 북한이 훨씬 처참하게 망가졌다.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평양에는 온전한 건물이 두 세 채도 남아있지 않았다. 급기야 홍 목사는 북한에 임한 홍수와 가뭄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북한에 관심을 가진 10년 동안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매년마다 물난리 아니면 한발로 온 땅이 황폐해졌다는 소식만 거듭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원수 갚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필자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움찔하고 놀랐다. 이런 글만으로 홍 목사가 무엇을 전하려고 했는지 그 뉘앙스를 정확하게 포착하기는 힘들지만, 일단 두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첫째, 북한의 수재와 한발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둘째, 원수 갚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일이 아니다. 어디에 설교의 방점이 있을까? 물론 후자이리라. 북한을 원수처럼 보고,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전히 기세를 올리는 가운데서도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자연재해 앞에서 왜 하나님의 심판 운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세상을 향해 열린 태도를 보이는 홍 목사가 역사해석에서는 다시 폐쇄적인 입장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앞서 말한 대로 성서해석과 연관된다. 성서의 역사적 지평을 뚫어보기 싫은 사람은 인류의 역사적 지평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법이다. 인격적으로 기품이 있고 예수 영접의 체험이 강하더라도 일단 눈을 감으면 성서와 역사의 깊이는 들어오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그는 성서와 역사가 중층적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박윤선 신학의 성서문자주의에 포로가 되어 해석을 포기한 것 같다. 필자가 잘못 보았다면 질정을 바란다.
사실 홍 목사도 설교에서 “해석이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긴 하다.(믿음 202) 홍해 사건을 설명하면서 기적은 “우리의 과학적 탐구로 마음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하고 정확하게 진술한다. 또한 베뢰아 성경공부를 비판하면서 “성경은 전체로 봐야 합니다.” 하고 주장했다. 옳은 지적이다. 그런데 자신은 성서를 전체적으로, 해석학적으로 보는 것 같지 않다.
최근의 설교에서 한 대목을 보자. 2007년 4월8일 “부활하신 주님”(눅 24:36-49)이라는 설교에서 그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건을 몇 가지 예로 들었다. 하나는 일반적인 소생이다. 홍 목사는 할머니로부터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고 한다. 그 할머니는 저승사자가 “아직 올 때도 안 되었는데 왜 왔어?”하는 말을 듣고 죽음에서 깨어났다고 한다. 의학박사 레몬 무디의 연구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이외에 홍 목사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야이로의 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를 거론했다. 이런 이들의 소생과 예수 부활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하고 그는 물었다. 필자는 무슨 대답이 나올지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일반 사람들의 소생과 예수 부활은 “다시 살아났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전자는 어쩌다 일어난 해프닝이고, 후자는 “성경대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조금 허탈한 답변이다. 그의 주장은 예수부활의 실질과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예수부활과 일반적인 소생 사건은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이다. 예수부활은 아직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유일회적인 생명사건으로서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형이며, 따라서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소생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한다.
지금 필자는 부활론을 강의하려는 게 아니며, 더구나 “성경대로”라는 주장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도 아니다. 문제는 홍 목사가 성서를 해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단지 예수가 부활했으니 우리도 부활한다는 명제만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의 부활 때문에 사도들이 위대한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고, 중국에도 1억 명이 예수를 믿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는 주장만 강조될 뿐이지, 부활 사건이 담지하고 있는 종말론적 생명의 신비는 별로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마지막 대목에서 그는 청중들과 서로 교창의 방식으로 이렇게 외쳤다. 홍 목사,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습니다.” 청중, “우리도 부활합니다.”

통일한국의 중심에 서시기를!
독자들 중에서는 홍 목사의 설교와 목회를 통해서 새로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다는 증거들이 남서울은혜교회를 통해서 얼마나 강력하게 나타나는지 아는가, 하고 말씀하고 싶은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현상에 대해서는 필자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마더 테레사 수녀를 통해서 감동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듯이 홍 목사의 자기희생적인 삶과 진솔한 인격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지금 필자는 그런 신앙적 삶의 열매가 아니라 설교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설교는 누구에게나 감동을 줄만한 휴먼 드라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로운 통치로 인해서 일어나는 생명세계의 깊이를 여는 작업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는 걸 허락하시라. 감동적인 삶의 실천은 기독교 신앙과 설교에서 그렇게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아주 무기력하거나 몰상식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사건은 일어날 수 있으며, 예수님도 어떤 사람을 단지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치유하기도 했다. 우리의 모든 예측과 기대를 넘어서 바람처럼 자유롭게 자신의 나라를 펼쳐나가는 그 하나님의 통치 신비에 마음을 여는 것이 핵심이다.
이제 글쓰기를 마쳐야겠다.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홍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입장은 못 된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그 능력에 있다는 바울의 가르침처럼(고전 4:20), 고담준론에 허우적거리는 필자가 하나님 나라의 능력에 사로잡힌 홍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어찌 토를 달겠는가. 이런 대목이 필자가 이 글을 쓰면서 계속해서 감당해야 했던 불편한 심사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필자는 그의 설교를 접하면서 기쁨과 희망을 동시에 맛보았다. 그 이유는 홍 목사에게서 이제 한국교회의 고질병인 보수와 진보의 분열이 치유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했다는 데에 있다. 그의 신앙과 목회와 실천은 양쪽을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그 스펙트럼이 넓다. 특히 분단체제가 평화체제로, 더 나아가 명실상부한 통일한국으로 가는 이 길목에서 홍 목사의 역할을 대신 할 기독교 지도자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독일통일에서 동서독 교회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듯이 한국교회도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지 주님이 주시는 카이로스를 놓치지 말아야하지 않겠는가. 주님이 이 일에 홍 목사를 귀하게 쓰시리라 기대한다.  (기독교사상, 200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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