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문학이 만나는 자리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구원과 문학
설교만이 아니라 문학도 인간 구원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교자는 문학으로부터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의 작품들, 휄더린과 괴테의 시, 김은국의 <순교자>나 황석영의 <손님> 등등, 굳이 그리스도교 성격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일정한 단계에 오른 문학작품은 기본적으로 인간 구원의 문제를 주제로 삼는다. 구원 문제는 문학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창조적 활동의 주제이기도 하다. 음악, 미술, 건축, 과학, 더 나가서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자유와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구원론적이다. 젊은이들이 광장에 모여 밤새도록 월드컵 축구를 응원하는 열정도 역시 그걸 통해 나름으로 구원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특히 문학은 언어를 통해서 인간 구원을 해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교행위와 근친관계이면서 동시에 경쟁관계이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 설교가 구원에 가까운가, 아니면 문학이 가까운가? 설교의 언어가 구원의 리얼리티를 훨씬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아니면 문학의 언어가 그런가? 늘 설교 행위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이지만 평자는 여기서 정확한 대답을 내리기가 힘들다. 아무리 교회강단에서 종교적 권위의 외피를 쓰고 외치는 설교라고 하더라도 구원과 너무나 거리가 먼, 또는 사이비 구원에 가깝기도 하며, 거꾸로 세속적인 문학의 언어라고 하더라도 인간 구원 문제를 구도적 자제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교회의 설교 현장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담아내고 있는 이는 오늘 설교비평의 대상인 김기석 목사(이하 김 목사)이다. 평자는 그의 설교를 읽고 들으면서 아직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오랫동안 가깝게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런 느낌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이 지면을 채우고도 남을 것 같다. 그의 책읽기와 글쓰기, 그의 세계관과 인간이해, 그뿐만 아니라 낯을 가리는 성품 등등, 내가 그에게서 느끼는 동질감은 많았다. 그는 철저하게 원고설교를 고집하고 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30분이 채 안 되는 설교 길이도 비슷할 뿐만 아니라 스피치 톤에 큰 변화가 없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의 설교를 구성하고 있는 문학적 깊이와 삶의 열정을 평자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부분에서 그의 설교를 통해 적지 않은 도전을 받았다.  
평자는 김 목사가 2005년 일 년 동안 청파교회의 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 50편을 정독했다. 그리고 2006년의 설교는 부분적으로 ‘설교듣기’를 통해서 청취했다. 그의 설교 전문과 듣기는 모두 홈페이지에 올라있다. 그가 <기독교사상>에 2년 반 동안 연재한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는 평자가 애독하던 꼭지였다. 전체적인 느낌을 말한다면, 김 목사의 설교 한편 한편은 문학적으로 완성도 높은 신앙에세이였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문학이 그의 설교 무대에 함께 올라 신명나게 한바탕 춤추며 생명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외딴 방>의 작가 신경숙은 사춘기 시절 구로공단에서 공순이로 살아가면서도 짬짬이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대학노트에 축자적으로 받아 적으면서 소설쓰기를 공부했는데, 신학생들과 젊은 목사들도 그의 설교를 반복해서 듣고 읽으면서 신앙과 삶과 설교를 공부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찬사가 지나치다고 생각할 분들이 없지 않겠지만, 지나친지 아닌지는 그의 설교를 함께 따라가면서 천천히 생각해보자.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일반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상투성에 빠지지 않는 설교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존재론적 능력을 드러내기보다는 단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에 머문다. 구원, 성화, 기도, 예배, 회개 같은 용어들이 설교에서 스테레오타입으로 남발됨으로써 청중들은 신앙언어의 깊이로 들어가기보다는 흡사 중고등학생들이 영어 단어를 외우듯이 그런 용어의 표면에만 안주할 뿐이다. 이런 방식의 설교는 그리스도교 영성을 독단, 아니면 퇴행으로 만들기 쉽다.
이와 달리 김 목사는 빼어난 언어구사력을 통해서 설교의 구원론적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고 있다. 그의 설교 중에서 아무 거나 한편 손에 놓고 읽어보라. 전부 읽지 않아도 좋다. 한 단락만 읽어보라. 그의 설교는 깨끗한 용모에 단정한 화장을 곁들인 귀부인처럼 어느 한곳도 천박함이 묻어나지 않는다. 단어 하나, 쉼표 하나, 그것들이 엮어내는 문장 하나에 이르기 까지 그의 설교언어는 진지하면서도 수려하다.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설교의 도입부에서 김 목사는 ‘마음 닦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언제나 찾아가 마음을 쉴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몹시도 그리운 때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소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모난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화내고, 후회하고’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마음을 그냥 방치하고 맙니다. 그래서 마음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편협해집니다. 너무 늦기 전에 묵정밭을 일구듯 정성을 다해 마음을 닦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 닦음을 동양 사람들은 '심재'(心齋)라 했습니다.(2월6일 설교, 이하 월일만 표기)

이런 대목에서 우리는 고도의 글쓰기 경지에 이른 어느 수필가의 글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묵정밭을 일구라는 이 한 마디로 청중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면적인 태도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표현들은 그의 설교에 지천이다. “영혼의 장인(匠人)”에서 김 목사는 베드로라는 이름과 연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주님은 시몬의 깊은 속에 숨겨진 게바 곧 '반석'을 끄집어내십니다. 장인(匠人)은 돌덩이 속에 숨은 옥을 결을 따라 다듬고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갈아서 광택을 내면서 제 빛깔을 드러냅니다. 그 과정에서 들이는 공과 품이 보통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이끌어내는 영혼의 장인이십니다.(2월27일)

예수님이 영혼의 장인이라고 한다면, 김 목사는 언어의 장인인지 모르겠다. 그는 신앙적 용어들을 “갈아서 광택을” 낼 줄 아는 설교자이다. 그의 설교에서 광택을 내는 언어들은 단지 문학적 수사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신앙의 심층을 파고들어가는 존재론적인 힘을 갖고 있다. 신앙의 새로운 층과 만날 수 있는 통로를 그가 언어로 제시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설교 언어는 회화(繪畫)이며 시(詩)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들린 하나님의 진노의 팔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5월1일)
새들에게 내려앉을 대지가 필요하듯이, 세상살이에 지쳐 비틀거리는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12월4일)

“하나님의 진노의 팔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위대한 화가의 그림을 연상시키고, “새들에게 내려앉을 대지가 필요”하다는 말은 시인의 감수성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 그의 설교 언어가 그렇게 빛을 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의 삶에 시와 소설 및 동서고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책읽기를 통한, 그리고 그리스도교 영성의 깊이를 통한 내공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단단하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번 글쓰기의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김 목사의 설교가 얼마나 문학적인지, 그리고 그의 설교에서 언어의 존재론적 힘들이 얼마나 강력하게 드러나는지 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그 대신 주로 설교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을 독자들을 위해서 예화 문제를 한번 짚는 것으로 이 문제를 보충하겠다.  
김 목사의 예화 적용은 기본적으로 실존적이고 일상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 말은 그가 예화집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거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상관없는 예화를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2월13일 어린이와 함께 드리는 예배에서 그는 “헨리에타의 겨울”이라는 동화 한편을 잔잔하게 읽어주었다. 2월20일 “예언자”라는 설교에서 크레바스에 빠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두 사람의 산악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자기 초월을 설명했다. 5월8일 어버이 주일 “징검다리”라는 설교에서 이청준의 소설 <야윈 젖가슴>을 인용했다. 이처럼 그의 예화는 리얼리즘 문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설교에서 그는 그림 한편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막스 에른스트라는 화가의 그림 중에는 <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어린 예수를 징계하는 젊은 아낙>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몹시 화가 난 여인이 벌거벗은 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내리치려 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엉덩이에는 벌써 벌건 자국이 나 있습니다. 창 밖에 있는 세 사람은 짐짓 모른 척하며 다른 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경건한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겠지만, 화가는 예수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했음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4월10일)

그의 설교에서 예화는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설교의 구성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상당수의 설교자들은 예화를 단지 장식품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예화라는 것도 카네기, 록펠러, 나폴레옹, 에디슨, 이순신, 백범,  등등, 예화집이나 리더스 다이제스트 수준을 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다. 그 선정성과 진부성이라니, 황색잡지 ‘저리가라’이다.
평자가 김 목사의 설교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고도의 문학적인 완성도를 성취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단순한 언어 기술자가 아니라 삶의 구도자이다. 언어와 삶의 일치를 통해서 일상의 신비를 뚫어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고단한 일상의 무게를 함께 나누려는 구도자적 치열성이 그의 설교를 끌어가는 동력이라는 말이다.

일상의 신비
영혼구원, 한국의 복음화, 세계선교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는 설교자들과 달리 김 목사는 일상에 목회와 설교의 중심을 두고 있다. 그에게서 일상과 유리된 신앙은 기대할 수는 없다. 흡사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이 한뜸한뜸 바느질을 하듯이 그는 일상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수놓는 사람이다. 그는 한 젊은이에게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다음에 자신의 아내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아내에게 물었더니 대뜸 함께 산책을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졌습니다. 주님과 오솔길을 따라 느릿느릿 침묵 속에 걷노라면 마음을 괴롭히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내게는 예수님의 식탁에서 밥을 먹어보고픈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곁에 있으면 제대로 먹는 게 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배우기만 해도 우리는 지금보다는 한결 좋은 사람이 될 터이니 말입니다.(10월2일)

그에게 예수는 함께 먹고, 마시고, 대화하는 그런 친구와 같다. 이렇게 일상에서 예수를 친구로 느낄 줄 아는 사람의 설교는 다정한 친구와의 허물없는 대화이며, 이런 이의 목회는 신자들과의 영적인 산책이리라.
김 목사의 설교가 일상에 전폭적인 무게를 둘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이 세상의 생명세계가 얼마나 신비로운지 알고 있다는 데에 놓여 있다. “그렇지요. 우리가 먹는 것은 모두 온 우주가 동참하여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음식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겠습니까?”(10월2일) 장일순 선생의 말처럼 나락 한 알이 우주론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생명의 본질과 구원의 실질에 접근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숨결이 닿지 않은 생명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것은 다 거룩합니다.”(4월24일) 이미 우리의 일상에 가득한 은총과 삶의 거룩함을 아는 설교자는 신자들과 그것을 나누는 일에 자신의 운명을 건다.  
평자는 김 목사의 설교를 읽으면서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기억났다. 목동 ‘산티아고’가 자기신화를 찾기 위해서 길을 떠난 다음에 겪게 된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그는 이집트 피라미드 부근에서 큰 보물을 발견하게 될 거라는 예언자의 신탁을 믿고 자신의 전 재산인 양을 팔아 바다를 건너 거상들과 함께 이집트로 간다. 긴 여행 끝에 오아시스에서 연금술사를 만난다. 연금술사는 산티아고에게 말한다. 모든 물질은 자기의 시간이 있다. 금의 시간도 있고, 납의 시간도 있다. 모든 물질은 자기 시간을 채운 다음 다른 물질로 진화한다. 납이 금이 되기도 하고, 금이 납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진정한 연금술사는 모든 사물을 거룩하게 본다. “한 알의 모래가 곧 우주다!” 산티아고가 연금술가에게서 배운 가장 중요한 건 모든 사물과 대화할 수 있는 보편언어였다. 미물도 우주와 같은 무게를 안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김 목사는 산티아고와 같이 사물과 대화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참된 시인은 누구나 그런 보편언어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나무, 바람, 구름, 돌과 대화한다. 우리 설교자들에게도 바로 이런 보편언어가 필수적이다. 그런 영적인 눈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사랑, 생명, 평화, 시간을 말할 수 없다. 겉으로 삭막하거나 광적으로 보이는 우리의 표면적인 일상이 아니라 그 내면을, 그 이면을, 혹은 그 너머를 응시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은폐의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에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신비와 생명의 신비를 설교할 수 있단 말인가. 김 목사는 그 신비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고요해진 사람의 눈에는 풀 한 포기도, 풀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 한 마리도 소중합니다. <중략> 어느 시인은 유자차를 마시다가 문득 자기가 마시는 것이 “지난여름 어느 날/ 아무도 몰래/ 어느 유자나무 위로/ 내려앉은 햇살”임을 자각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면 외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가 만나는 모든 것들이 다 이웃이니 말입니다.(6월19일)

유자나무 위로 내려앉은 햇살을 생각하면서 유자차를 마신다는 어느 시인이나, 그 시인의 시를 읽은 김 목사나 모두 생명의 신비를 눈치 채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영적으로 배부른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과 마주앉아 있으면 우리도 덩달아 배부르리라.

‘괴물’
그렇다고 해서 김 목사를 단순한 자연주의자라거나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모순적인 존재인지, 그런 인간으로 구성된 이 세계가 얼마나 이중적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순백의 영혼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어둠과 빛이 혼재해 있고, 추한 욕망과 거룩한 욕망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쪽에 더 공을 들이는가가 우리의 생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신앙이란 가장 진부해 보이는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3월13일)

김 목사가 볼 때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세상에 선과 악은 뒤얽혀 있습니다. 선한 자가 고통 받고, 악한 자가 잘 되기도 합니다. 이게 적나라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욥이나 시편의 탄식시의 시인들이 직면했던 현실이 바로 이것입니다.”(6월26일)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시대를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꿰뚫어보고 앞길을 제시해야 할 설교자가 서 있는 자리는 이처럼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생명의 놀라운 기쁨과 환희를 현의 떨림처럼 온몸으로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내뿜는 추한 욕망의 숨결에 질식한다.  
지난 2월 레바논을 다녀온 김 목사는 “피조 세계의 신음소리에 무감각하고 세상의 고통에 민감하지 않는” 한국의 주류교회를 절망스런 눈으로 바라본다. “끝없이 타자를 상상하고 그들과의 차이를 부각시켜 그들을 배제시키면서 구원의 방주에 든 ‘우리’를 강조합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보지 못합니다.”(<기독교사상> 2006년 4월) 서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쓰나미 참상에 대한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설교는 김 목사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는 남아시아를 휩쓴 지진과 해일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피해를 본 그 지역은 모슬렘과 불교도들이 주를 이루고, 기독교를 박해했던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휴양지인 그곳은 또 사람들이 몰려와 향락과 마약을 즐기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치셨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 기사를 듣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심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만한 정신, 이미 괴물로 변해버린 사람의 말입니다. (1월16일)

오죽했으면 시인의 감수성으로 호흡하고 있는 김 목사가 설교 시간에 다른 이의 설교를 비판했겠는가? 평자도 김 목사의 주장에 동의한다. 김 목사의 지적처럼 오늘 한국교회는 ‘괴물’로 변했는지 모른다.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폐유를 먹고 자란 괴물이 아니라 독선과 자기의(義)를 먹고 자란, 그래서 자신의 괴력을 과시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괴물인지 모른다.
모르긴 해도 김 목사는 수시로 가슴앓이를 할 것 같다. 일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은총에 가슴이 뛰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 삶과 세계를 파괴하는 괴물 앞에서 가슴이 저릴 것이다. 두 세계를 동시에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진 숙명이 바로 그것이다. 괴물이 보이지 않으면 자신의 구원에 도취되어 흥겨운 노래만 부르면 되고, 은총이 보이지 않으면 머리끈 동여매고 괴물과 투쟁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두 눈 부릅뜬 채 직시하고 있는 김 목사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다 울다 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이런 혼란을 눈치 채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그런 아픔을 혼자의 가슴앓이로 숨겨둔 채, 오히려 의연한 태도로 이런 모순된 현실과 맞서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용맹정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낮은 자를 향한 극진한 관심과 배려이다.

‘끄트머리’
김 목사의 설교는 이 세상의 삶에서 아픔을 겪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소위 왕따 된 사람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집중된다. 그가 WTO 체제 하에서 겪는 농민의 아픔과 절망을, 그리고 노동자들의 생존권 위협을 거론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11월6일, 11월27일, 12월4일)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알았던 목자들의 이야기에서 그는 이렇게 언급했다. “땅의 사람들이야말로 하늘의 소리를 제일 민감하게 듣고, 세상의 변화를 가장 빨리 알아차리는 사람들입니다.”(11월13일) 80년대 초에 “가난한 자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는 말과 만났다고 고백하는 김 목사에게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나그네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한 시대의 온도계”다.(3월20일) 그들은 단지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과 계시의 초석이 되는 사람들이다.

주변부, 곧 끄트머리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실마리가 됩니다. '끄트머리'라는 단어는 맨 끝 부분을 뜻하지만, 동시에 일의 실마리 곧 단서(端緖)를 뜻하기도 합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둘을 연결하면 한 사회의 맨 끝 부분에 속한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10월9일)

그의 설교에 민중신학이라는 용어가 일절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사회과학적인 접근도 시도되지 않기 때문에 김 목사의 이런 입장을 민중신학으로 보아야 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위의 진술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가난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당파성(Parteilichkeit Gottes)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적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당파성 문제는 평자도 섣부르게 말하기 힘들 정도로 예민한 주제이다. 신구약성서가 전반적으로 나그네, 가난한 자, 과부, 고아 등등, 소외된 사람들에게 대한 지극한 관심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이 세상의 구원을 열어간다고 단정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고난과 가난으로 인해서 하늘의 소리를 먼저 인식하고 그 소리에 순종한다는 말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오늘 평자는 이런 문제를 언급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를 향한 김 목사의 짝사랑에 가까운 관심은 어떤 신학적 논쟁이 아니라 삶의 현실에서 나온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뜨거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그런 당파적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중신학의 보편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김 목사의 그런 시각은 일단 오늘의 한국교회라는 상황에서 볼 때 정당할 뿐만 아니라 훨씬 강조되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의 강단은 김 목사의 설교와는 전혀 다른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실정이다. 복음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성공’이 바로 한국교회 강단의 키워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개혁을 주장하는 김 아무개 목사의 고지론과 청부론도 결국 따지고 보면 성공주의이며, 주일성수와 십일조로 승부를 걸자는 전 아무개 목사의 주장도 역시 성공을 지고의 가치로 전제하고 있다. 얼마 전에 한국을 방문한 릭 원렌 목사의 설교 역시 성공과 부흥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닌가. 인간적으로 완전한 실패였던 예수의 십자가를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설교자들이 이렇듯 대놓고 성공신화에 기울어졌다는 건 결국 구원론의 타락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한국의 상황에서 김 목사의 ‘끄트머리’ 신앙은 철저한 반역이다. 그 반역의 길에서 그는 주님을 만난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계실까요?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식사를 거르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있는 곳, 가출청소년들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쪽방촌,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이야말로 주님이 머무시는 곳이며, 우리가 주님을 만나 뵐 곳입니다.(3월27일)

청파교회는 실제로 낮은 자의 삶과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를 보존하는 일에 깊숙이 동참한다. 사회복지시설이나 환경단체 등 7군데의 사회단체를 대상으로 ‘1인 1통장 갖기’ 운동을 펼치기도 하고,(홈페이지 교회 소개꼭지) 매수요일마다 걸인들에게 작은 돈을 제공한다.(8월21일) 어두운 현실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생명을 돌보는 일”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걸 신앙의 본질로 생각하는 그는 신자들에게 “조금만 불편하게 살기로 작정”하라고 권면하며, “욕심을 줄이면 그 빈자리에는 평안과 기쁨이 깃들게 마련”이라고 격려한다.(5월22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신비에 대한 통찰과 낮은 자에 대한 극진한 관심이 김 목사의 설교에서 마치 날줄과 씨줄처럼 오가면서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려가는 중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청중들에게 이런 변화를 요구하며, 강력하게 도전한다. 생명의 신비를 보고, 낮은 자의 삶에 참여하라고 말이다. 전자는 영성이며, 후자는 프락시스이다. 전자는 그리스도인의 내면세계이며, 후자는 구체적인 삶에의 참여이다. 전자를 통해서 우리는 마음의 영적인 여유를 맛보고, 후자를 통해서 이웃과의 일치를 경험한다.
삶의 신비를 알알이 풀어내며, 소외된 이웃과의 강력한 연대를 추구하는 설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김 목사처럼 진정성과 설득력을 담아내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의 전문적인 글쓰기가 설교의 깊은 맛을 더 해주고 있으니, 평자가 무슨 말을 여기서 더 보탤 수 있으랴.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가끔 생각을 한다. 저분은 왜 시인이 아니고, 문학평론가일까. 한올 거추장스러운 검불 없이 하나님 앞에서 서고자 애쓰는 참 시인인데...  목사님, 하고 부를 때마다 하나님 앞에 알몸으로 선 그를 느끼는 청파교회 신자로서 나는 늘 행복하다.”(홈페이지)는 소설가 이명행의 고백에 평자도 이심전심으로 동의한다. 그의 설교를 듣고 읽는 동안 내 영혼이 부쩍 맑아지고 훌쩍 자란 느낌이다.

행위와 존재
그런데 보기에 따라서 사소할 수도 있고, 심각할 수도 있는 작은 문제가 목구멍의 가시처럼 걸려있다. 그것은 마치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아들이 어머니가 손수 정성껏 차려주신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숭늉까지 마시고 난 뒤에 무언가를 아쉬워하는 형국이다. 아들은 닭찜, 불고기, 생선구이, 온갖 나물 등,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반찬을 한 번씩 맛보느라 결국 옛날 어릴 때 먹던 보리밥과 된장찌개의 원시적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없었다. 그런 느낌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이며, 근거가 있는 걸까?  
김 목사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평자는 그의 설교에 원초적 케리그마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이 약간 당혹스럽다. 그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의 재림이 왜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대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해명을 충분하게 따라가지 않는다. 양적으로도 그렇고 질적으로도 그렇다. 성서와 신학보다 동서고금의 다양한 문학과 삶의 경험을 훨씬 중요하게 다룰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신학적 깊이보다는 청중들의 변화된 삶을 훨씬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물론 케리그마가 그의 설교 전체에 내면화 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명시화되어 있지는 못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담지하고 있는 원초적인 구원 사건이 그의 설교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못내 궁금하다. 이것은 어쩌면 바로 위에서 설명한대로 김 목사의 설교가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고, 불의에 저항하며, 지속가능한 생태보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리운 어쩔 수 없는 그림자인지 모르겠다.
경솔하다는 말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노골적으로 질문해보자. 김 목사는 청파 교회에서 지난 10년 동안 줄기차게 삶의 변화를 외쳐왔을 텐데, 신자들의 삶이 변화되었을까? 평자의 생각에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지난 2천년동안 그리스도교가, 그리고 많은 종교와 정신적 스승들이 평화를 주창했어도 이 세계에 평화가 요원하다는 사실에서 이것은 실증적 사실이다. 그는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 교회가 변하면 이 땅은 하나님의 영광이 깃든 땅이 될 것”(12월4일)이라고 호소했지만, 평자가 보기에 “내가 변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으며, 그런 변화된 세계가 곧 하나님의 영광 자체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와 일치해서 살았던 예수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 처형을 당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청파교회 신자들이 실제로 변했다면, 그리고 변해간다면,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루두루 용서를 빈다.
삶의 변화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평자의 생각에 설교는 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알아듣게 설명하는 걸 목표로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도덕군자가 되거나, 누구나 본받고 싶어 하는 휴머니스트가 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모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되거나 마더 테레사가 될 수는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인간 개량을 통해서 실현되는 게 아니라 예수의 재림 표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이질적인 세계의 돌입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우리의 몸이 변화함으로써 일어나기 때문이다.(고전 15:51 이하)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설교를 통해서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예수는 누구인가? 그의 십자가와 부활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와 종말은 무엇인가? 창조가 어떻게 종말론적으로 완성된다는 말인가? 인류의 미래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가? 성령과 생명은 어떤 관계인가? 우리의 질문은 끝이 없다. 설교자는 이런 질문에 직면해서 자신의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설교의 내용은 바로 이런 질문 안에서 전개되고, 이런 질문으로 흡수되어야 한다.
이런 교리적인 질문들은 세례문답에서 모두 해결되었다든지, 아니면 신대원의 신학공부를 통해서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지난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교리는 어떤 신학자가 책상머리에 앉아 만들어낸 종교적 요설(饒舌)이 아니라 삶과 죽음, 생명과 시간의 궁극적인 의미를 확보하려는 해석학적 투쟁의 결실이다. 그런 투쟁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런데 김 목사는 신학을 조금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신학이라는 무덤을 찾아갑니다. 교리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수백억을 들여 화려하게 지은 교회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3월27일)

옳은 말이다. 신학의 무덤, 교리의 무덤, 교회당에 부활의 주님이 계시는 건 아니다. 거기보다는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주님이 계시다는 그의 주장도 옳다. 그러나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를 그렇게 대립적인, 혹은 대안적인 요소로 보는지에 관해서 평자는 약간 의아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철저하게 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며, 소외된 자를 향한 열정을 뜨겁게 불태워야 한다. 전자는 존재이며, 후자는 행위이다. 전자는 칭의이고, 후자는 성화이다. 전자는 좋은 나무이며, 후자는 좋은 열매이다. 좋은 나무가 아니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여도 좋은 열매가 아니며, 좋은 열매를 보아서 나무의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가 존재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교했으니까 이제는 행위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평자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가 그리스도인 실존을 충분히 설교했고, 신자들이 그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까? 그래서 우리 설교자들은 존재 문제가 아니라 행위에만 집중해도 좋은 것일까? 이 문제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김 목사가 부활주일에 행한 “해가 막 돋은 때”(막16:1-8)라는 제목의 설교를 잠시 검토해야겠다.

신앙의 신비와 휴머니즘
본문은 몇 명의 여자들이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는 말로 시작된다. 흰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그녀들을 위로하면서 갈릴리로 가면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 사실을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전하라고 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무서워서 그 말을 제자들에게 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 목사는 이 본문에서 세 가지 소주제를 전했다. 첫째, 예수의 부활은 예기치 못한 소식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예수의 빈 무덤에서도 그걸 알아보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인간이 예기치 못한 하나님의 “절묘한 역전승”이다. 둘째, 무덤 문을 가로막고 있던 돌덩이가 이미 굴려진 것처럼 우리 앞에 많은 문제가 놓여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사랑과 용기를 갖고 직면하면 부활의 주님이 해결해주신다. 셋째, 부활의 주님을 만날 곳은 소외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갈릴리이다. 바로 이 대목에 설교의 포커스가 놓여 있다. 김 목사는 후배에게서 받은 부활절 카드에 적힌 이야기를 소개했다. 후배 목사는 말 못하는 구두닦이 아저씨에게서 구두를 닦았다고 한다. 5분30초 동안 1천 번 이상의 손길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광(光)은 땀흘림의 대가임을 눈앞에서 보았네요.” 하는 카드의 마지막 글귀에 근거해서 김 목사는 이렇게 설교를 마감했다.

막 돋은 부활의 해가 더욱 밝게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 합니다. 빛은 땀흘림의 대가이니 말입니다. 이 부활절에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그리고 우리들 공동의 삶의 터에 부활의 빛이 환하게 비쳐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3월27일)

김 목사의 부활절 설교는 본문이 말하는 부활 아침의 ‘햇살’과 구두닦이의 땀을 통한 구두의 ‘광’이 묘한 조화를 일으킴으로써 일상의 헌신에서 일어나야 할 부활의 의미를 그림의 한 장면처럼 실감나게 설명했다. 여기서 평자의 질문은 이것이다. 부활의 해가 더욱 밝게 빛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땀이 필요한 것일까? 부활의 생명은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서 배타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닌가? 김 목사는 왜 여자들이 두려워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그 부활 현상과 실체를 심층적으로 풀어낼 생각은 하지 않고 실천에 방점을 찍고 있을까? 그는 우리의 땀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현실화된다고 믿는 것일까? 평자가 보기에 인간의 실천은 그것이 아무리 고귀하다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대체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생명의 궁극적인 리얼리티인 부활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형식과는 전혀 다른, 예수에게서 유일회적으로 발생했지만 아직은 은폐되어 있는 하나님의 생명사건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손해가 뭔지 아십니까? 신비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 채 사는 것, 감동을 잃은 채 사는 것입니다. 길들여진다는 것, 이것처럼 슬픈 것이 없습니다.”(10월23일) 하고 생각하는 김 목사가 신학의 신비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혹시 그도 역시 기존의 신학에 이미 길들여져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하나님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신학의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걸 유보하는 건 아닌가?
김 목사가 성서 본문을 직접 치고 들어가서 마치 물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성서 안에 머물기보다는 그 이외의 이야깃거리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교 교리(신학)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않고, 그 대신 그리스도교 정신에 따라서 살아가야 할 삶의 이치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는 뜻이다. 예컨대 대강절 첫 주일의 설교 “생명은 소명이다”(11월27일)는 삼분의 일이 서론이었다. 김 목사는 쌀개방 반대운동을 펼치는 농민들 이야기, 초등학교 4학년 아이의 소설을 소개한 어느 칼럼, 하이데거의 ‘존재망각’ 개념, 쌍둥이를 낳은 유아부 교사 이야기를 소개했다. 구구절절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내용들이지만 평자가 보기에 과유불급이다. 그렇지만 아래와 같은 진술을 보면 이런 염려는 평자의 노파심일 가능성이 있으니까 접어두는 게 좋겠다. “웬 사설이 이리 긴가 염려하시는 분이 계실 것 같네요.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가야 할 길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10월23일)
김 목사가 성서 텍스트를 어떻게 대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대강절 설교를 조금 더 따라가자. 그는 본문인 요한복음 12:44-50절을 요한복음 전체와 연관해서 약간 나이브하게 그 중심 메시지를 설명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몸을 버리면서까지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내용이다. “표현은 다양하지만 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빛으로 왔다'는 말이 됩니다. 초가 자기 몸을 태움으로 빛을 발하듯이 주님은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인간의 등불을 밝히셨습니다.”(11월27일) 그는 마지막 대목에서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를 인용한 후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우리 가슴에 사랑과 평화의 샘물이 고이면 그것을 퍼다가 지친 영혼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소망합니다. 삶에 지친 이웃들이 우리 때문에 살맛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사랑이 있는 곳에서 삶은 축제가 됩니다. 우리가 이르는 곳마다 생명과 평화의 축제가 시작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11월27일)

김 목사의 설교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사랑과 평화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이기심과 자기연민만을 자극하는 흙탕물 같은 설교가 난무한 한국교회 강단에서 그의 설교는 연꽃처럼 빛을 낸다. 그러나 평자의 생각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인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를 휴머니즘으로 대체하고 말았다. 이게 바로 김 목사의 설교에서 평자가 느끼는 작은, 그러나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평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해는 마시라.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 청파교회 교우들의 사회봉사 활동에서 그 모범을 찾을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는 필요에 따라서 평화, 생태,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설교는 그것 너머에서, 또는 그것에 내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신비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바로 2천 년 전에 이미 역사 안에서 발생했지만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그 계시 사건에 집중해야 한다. 성서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으며, 지난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의 흔적인 신학도 역시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
평자는 오늘 어머니가 정성스레 차려준 밥을 푸짐하게 먹는 호사(豪奢)를 누리고도 생떼를 쓰는 아이처럼 김 목사의 설교에 공연한 투정을 부린 것 같다. 이건 삶의 열정이 턱없이 모자란 사람의 자기변명이다. 이해를 바란다. 김 목사의 설교를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는 평자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하나님, 세상, 인간, 문학, 예술, 사랑에 대해서 한 수 가르침을 받을만한 분과 동시대에 설교자와 글쟁이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평자는 중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기독교사상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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