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신학
-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 대한 신학적 단상-

  정용섭 교수의 설교비평에는 한국 교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의 설교가 인간적 욕망을 부추기고 자극하며, 복음을 인간의 필요나 채워주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정 교수께서는 한국 교회에서 지금 복음이 설교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설교를 통해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며 설명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문제 제기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로 여기에서 정 교수의 설교비평과 관련하여 더 생각해 보아야할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 복음, 혹은 기독교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느냐 하는 물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이 무엇이며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납득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신앙은 무엇이며 신학적 과제란 무엇인가에 대해 같은 입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정 교수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만일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면, 정 교수의 설교비평에 우리가 아무리 많이 공감하고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상 피상적인 수준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신학 전통
  그간의 설교비평을 읽으면서 정 교수께서 갖고 계신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정 교수께서는 설교비평을 할 때 자주, 이런 설교자들이 있는 줄 여태까지 잘 몰랐으며, 그래서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그 설교자들을 대한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제게는 익숙한 설교자들을 정 교수께서는 처음 대하시는 걸 보면, 정 교수와 저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이런 형편은 그동안 한국 교회를 크게 양분(兩分)해온 신학적 전통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통해서 신앙과 신학에 대한, 저와는 다른 입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 교수의 설교에 대한 비평에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정 교수와 저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정 교수께서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 ―많은 설교들에서 설명되는 것과는 대비되는― 라고 제시하는 입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따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 발견한 것은 정 교수와 제가 어떤 설교를 대하여 거기에서 같은 문제점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같은 기준에 입각해 발견된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점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정 교수와 저는 실상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차차 얘기되겠지만, 제게 있어서, 신학은 그 무게를 ‘신’(神)께 두고 신께서 의지적으로 보여주시는 계시만을 그 원리로 삼고 있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 이른바 ‘학문’에 무게중심을 두고 신학을 해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제가 인간의 근본적 특성을 죄인 됨에서 찾는다고 한다면, 정 교수께서는 인간에게 보다 적극적 의미에서의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비점들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빚어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학적 차이가 설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차이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교비평 작업에서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진 설교자들을 정 교수의 신학이해에 따라 평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만일 실제로 정 교수의 설교비평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설교비평은 원래의 의도하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다른 관점과 기준을 가진 사람의 행동을 평가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평가는 단지 오해만을 불러올 뿐입니다. 먼저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공통된 기반이 마련되어야 비로소 설교의 목적과 내용에 대해서도 동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전제가 있어야 실질적으로 유익한 설교비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복음에 대한 이해라든가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정 교수와 저 사이의 차이점을 검토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면서 크게 의문이 든 것은 두 가지 문제에서였습니다. 첫째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고, 둘째는 여러 신학적 문제들과 직결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관한 문제입니다.

판넨베르크 신학
  정 교수의 신학을 살펴보기 위해 저는 먼저 판넨베르크 신학에 대해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나중에 더 분명히 발견한 사실이지만, 정 교수께서 제시하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판넨베르크의 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에 대해 책을 쓰시기도 했고(정용섭,《말씀신학과 역사신학―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을 중심으로》), 《신학과 철학》, 《조직신학》과 설교집들을 비롯한, 판넨베르크의 여러 책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저는 판넨베르크 신학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의 신학의 특징으로 크게 두 가지가 지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학의 두 가지 특징은 제가 정 교수와의 차이점으로 확인한 두 가지 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판넨베르크 신학의 독창적 개념은 ‘보편사’와 ‘미래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사 개념을 통해 신학은 역사와 연결되며, 미래성 개념을 통해 신학은 종말론적 특징을 지니게 됩니다.
  첫째 특징은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보는 ‘보편사’ 개념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 진리의 보편적 타당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신학이 보편사의 지평 안에서 통용되는 합리성이라는 기준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강조는 신학을 계시에 매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판넨베르크는 “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처럼 신학이 계시라는 폐쇄되고 권위주의적인 개념에만 매달리게 될 때 신학은 보편성을 결여한 초라한 특수 학문이 되어 버리고 만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그’,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196쪽). 그는 신학이 보편성을 띤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배타적인 계시와의 관련성을 끊어야 한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정 교수도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말씀의 신학을 극복하여 전체 역사 가운데서 신학의 보편성을 찾고자 한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48쪽).
  둘째는 미래를 강조하는 종말론적 신학의 특성입니다. 판넨베르크는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과거와 현재를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미래의 존재론적 우위성”입니다. 미래는 현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힘이라는 의미에서 창조적 성격을 띱니다. 결과적으로, 세계는 불변적으로 지속되는 질서가 아니라 열린 과정으로 파악됩니다.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열린 미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특징들은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강조하는 것과, 또 과거보다는 미래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판넨베르크 신학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교회 전체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구속사 대신에 보편사, 맹목적 신앙보다는 이성적 통찰, 개인적 결단보다는 역사적 전승을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 진리의 합리성을 위하여 이성의 비판을 강조하는 이성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김영한, ‘볼파르트 판넨베르크’,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217쪽)

  이와 같은 특징은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제가 배워온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첫째, 제가 배운 바로는, 신학적 작업은 계시에 의존해서 이루어집니다. 신학의 계시 의존성이란, 신앙의 내용과 신학적 물음이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계시와, 인간 역사 속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초월적 하나님과 관계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철학이 신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도 인정됩니다. 인식하는 이성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패커의 다음과 같은 의문에 공감합니다. “나는 조직신학의 주제를 하나님에 관해 계시된 진리로 개념화 시키는 일이 적절한지 의문이 간다. … 이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진정한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를 이간시키는 것이다”(J. I. Packer,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Spirituality, pp. 2, 8.).
  둘째, 역사, 더 구체적으로 ‘미래’에 대해서도 저는 다르게 이해합니다. 역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으며, 미래, 곧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성취된다고 생각합니다. 판넨베르크가 역사를 “열린 과정”이라고 말한다면, 제가 배운 신학은 역사는 하나님의 뜻하심에 따라 정해져 있다고 여깁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한 통치를 계속하시며 결국에는 당신께서 정하신 바대로 역사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즉 신(神)이라는 존재가 인격적이고 전능하다면 정당한 목표와 그것을 이룰 능력과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역사를 보며 신앙인이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시라는 점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실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과 씨름을 벌이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사상들과의 씨름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과의 씨름 말이다”(알리스터 맥그래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 88쪽).

신학적 인식론
  이제 정 교수의 신학에 대해 몇 가지 점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정 교수의 신학적 이해에 관해 갖게 되는 의문은 계시와 관련된 것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신학적 인식론의 문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논의라고 하면, 대체 하나님에 대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은 인간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일 것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종교라는 점을 전제할 때, ‘계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은 이후 모든 신학적 논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어떤 경로로 우리에게 도달하는지에 대해 정 교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계는 곧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하는 길이다. 이런 방식 말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도달하겠는가? 진리에 도달해 보려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사실 이런 인식론적 근거에서 이루어진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192쪽)

앞서 살펴본 판넨베르크의 ‘보편사’에 대한 강조와 맥을 같이하는 설명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란 세계를 통해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의 창조자이시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우리는 이에 주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앎은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본질을 노출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앎’의 문제”라고 덧붙여 설명됩니다(정용섭, 《말씀신학과 역사신학》, 192쪽). 인간이 자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명을 따라가면서, 정 교수의 계시 이해가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 여기는 기독교의 전통적 이해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 교수의 이 같은 입장에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을 역사적 주관적 신앙고백 문서로만 받아들이려고 한 계몽주의 이후 학문의 결론이 그대로 전제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저는 성경이야말로 계시의 외적 인식원리라는 전통적 입장을 따릅니다(Louis Berkhof,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96.). 성경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주신 특별한 계시라고 이해합니다. 성경에 담긴 내용이, 인간 쪽의 반응이 있기 전에, 인간에게 나타나시고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이며, 인간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물론 저도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고 있으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이 그의 창조세계에 분명히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롬1:20).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중단하실 수 없으며, 그분이 지으신 세계를 그분의 역사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시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큰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과 분리되었다고 천명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져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져, 해가 빛나고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세계만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기란 더더욱 어려워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 편에서 온 보다 명확한 계시의 필요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왜 정 교수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신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근대성에 대한 요즘의 연구들이 보여주듯, 인간 이성을 최종적 판단자로 여긴 계몽주의적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이 객관적 계시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합리적 인식론에 따른 결과입니다. 합리적 인식론이란 결국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판단되어 수용될 수 있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은 인간 고유의 인식 수단일 뿐, 진리의 원천이나 진리 판별의 절대적 기준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성에게 궁극적 판단 규범의 자리를 허락한 근대의 과학적 방법도 역시 진리를 찾아내는 유일하거나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슬리 뉴비긴의 논평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성과 계시의 역할에 관한 논쟁에서의 문제점은 어떻게 경험된 자료를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건들을 과연 전적으로 지금 세속적인 역사 기술에서 사용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학적인 범주를 가지고 이해해야 하는가의 논쟁과, 이런 범주들의 유용성이나 적절함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를 상술된 모든 사건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의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들이다. 이성은 사물의 진상에 관한 독자적인 정보의 출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활동의 한 단면이다. 이성과 계시에 관한 오랜 논쟁에서 나타난 두 가지의 차이점은 각기 다른 정보의 출처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29-30쪽)

인간이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성경을 계시로 인정하길 거부한 것은 이성의 역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성의 판단을 근거로 하여 계시의 진리성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초월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계시를 주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크게 생각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한편, 만일 하나님께서 의지를 갖고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다면, 그 계시는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해 구속력을 띠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 교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과학은 과학이다. 진화론은 과학적 현상적으로 진리일 뿐이고 기독교 신앙은 다른 지평에서 영적인 진리를 말한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지 독단론에 빠지지 말고 서로가 진리의 지평을 넓혀 가면 충분하다. (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15쪽)

정 교수께서는 신앙과 과학의 영역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과학과는 다른 지평의 영적 진리와만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칸트 이후의 계몽주의적 사고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신앙고백이라는 생각 자체가 외부적인 객관적 기준틀인 진리에서 내적이며 주관적인 직관으로 바뀌어 버렸다. 또한 칸트 이후,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할 내용을 정의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권위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다”(데이비드 웰즈, 《신학 실종》, 181쪽).
  계몽주의의 영향 속에서 신학에서마저도 믿음은 배제되고 이성만이 절대적 판단기준으로 인정됩니다. 신학은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인데, 이제 계시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신학의 논의에서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성적 판단을 근거로 신학적 작업이 이루어지고, 성경에 기록된 초월자 하나님의 역사는 신화적 세계관에 근거한 진술일 뿐 현실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을 따라 신앙을 설명하려는 인간의 해석마저도 자의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적 판단에 대한 강조 역시 시대적 환경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터 버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각자 나름의 “타당성 구조”에 따라 판단합니다. 어떤 일이 타당한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전제되고 있는 어떤 사고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성적 판단을 최종적 기준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근대 이후 계몽주의의 전제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합리적 인식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전제 자체가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인식과 이해의 방법이 주로 합리성에 근거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성과 이성이 파악하는 자연의 질서가 모두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성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된 선물이라고 말해야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이성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성을 절대적 기준이신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종교 개혁의 후예들은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를 탐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전통에서는 자연과 은혜 모두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영역이다. 종교 개혁 전통이 자연을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 운동의 후예들에 의해서 근대 과학이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예들은 소위 ‘하나님의 두 번째 책’(자연)을 연구해서 자연의 저자와 그 분의 창조 세계를 더 잘 이해하려고 시도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이 ‘어떻게’라는 물음들에 대한 답변들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첫 번째 책인 성경은 ‘왜’라는 물음들에 대해서 대답을 제공해 주었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1쪽)

  버스에 탄 사람이 버스를 밀 수 없듯이, 우리는 우리를 떠받치는 근거를 들여다보거나 조작할 수 없습니다. 욥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초월적 근거를 다 이해할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욥은 이 물음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정 교수께서 주장하시는 신학적 인식론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계시로서보다는, 주관적 수준의 ‘신앙고백’이라고 여겨집니다. 성경을 보편사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접근해간 사건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은 사실에 대한 증언으로서 갖는 객관성을 잃고, 인간의 주관적 산물로 격하되고 맙니다. 성경을 가변적인 ‘신앙고백’으로 취급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재(實在)에 뿌리 내리지 못한, 주관적 의견만을 갖게 될 뿐입니다. 저는 이런 결론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성경이 재단(裁斷)될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과연 알 수 있겠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설교비평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정 교수께서는 왜 성경을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고 묻게 됩니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과 꾸짖음을 담고 있으며, 성육신으로 절정을 이루는 신적 계시라고 여깁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가 필요하며, 설교는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면밀히 이해하는 일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이 변론하고자 했던 기독교라는 종교는 신과 자연과 인간에 관한 영원한 형이상학적 진리의 체계였다. 성경은 자연의 직접적인 관찰이나 내적인 인간의 관념들에 대한 성찰에 의해 발견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에 관한 정보의 출처다.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사회에서의 복음》, 32쪽)  


인간 이해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성경관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재연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계시에 대한 입장 차이는 신앙과 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 큰 차이를 빚어내는 두 번째 주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에 외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인간관(人間觀)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종교를 성립시키는 세 가지 요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는, 첫째, 그 종교의 주인이 되는 신(神)의 자기 설명, 둘째, 그 신과 인간과의 관계, 셋째, 세계와 역사의 목적에 대한 설명이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샤머니즘이 되거나, 주술과 주문만이 있는 미신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세 가지 요건을 갖고 기독교 신앙을 다시 진술한다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구원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신(神)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둘째, 그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구원자로 나타나십니다. 셋째, 모든 인간은, 그리고 이 세계와 역사는 종국에 가서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구도를 통해 생각해보면, 정 교수와 제가 인간을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는지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께서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저는 구속주 하나님을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서로 다른 인간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죄(罪)에 대한 이해에 따라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 귀결된다고 하겠습니다. 인간관에 있어서의 차이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전망에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 신앙고백의 핵심은 구원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구원주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속죄를 위해 성육신하셔서 인간으로서 생애를 보내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하나님 계시의 핵심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계시의 내용은 인간의 문제적 상태, 곧 죄(罪)를 심각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따르자면, 인간은 죄로 인해 야기된 죽음의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새로 태어나야 했고, 이를 위해 구원주 하나님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할 때,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고 그분의 살아나심과 연합하는 데에 있습니다(롬 6). 세례와 성찬이 보여주듯,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1). 이렇게 성경에서 발견하는 우리 신앙의 출발점은 인간이 구원주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형편에 처해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복음은 ‘죄’라고 불리는 심각한 현실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갖는 심각성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구원주로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사실에도 이미 내포되어 있지만, 인류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데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특별한 은총이며, 이 사건에 대한 계시는 특별한 계시라고 여겨져야 합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 인간은 눈을 뜨게 되며, 그에게 생명이 회복됩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기에, 구원의 은총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도 감지하지도 못합니다.
  이 특별한 은총을 통해 주어지며 특별한 계시를 통해 알려지는 구원으로, 인간은 구원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인간이 세계를 통해 주신 계시와 창조 속에서 드러난 은총 속의 하나님, 곧 창조하시고 지금도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물을 자기 앞에 세우실 심판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한편, 정 교수께서 보여주는 인간 이해에 인간의 심각한 형편, 곧 죄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설교에 대한 비평에서도 그러했듯, 정 교수께서는 기독교적 삶에서 죄가 강조되는데 대해 우려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의식에 묶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투쟁하고, 용서하고, 변혁해 나가도록 돕는다. 이 사실이 복음의 핵심이다”(정용섭, 《기독교를 말한다》, 229쪽).
  인간의 죄(罪)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을 때,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떻게 이해될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경우에는, 위에서 말한 세 요건으로 말해보자면, 강조점이 구원주 하나님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라는 근본적 뒤틀림이 있다는 점을 그다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펼치신 은혜, 곧 이른바 ‘일반 은총’의 측면만을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창조 때 주어진 은총과 그 창조로부터 알려진 하나님에 대한 계시에 주목할 때,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이해 역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정 교수께서 취하시는 신학적 입장은 바로 이런 경향을 띠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 교수께서 인문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저는 기독교의 복음을 판넨베르크처럼 인간 보편의 진리로서 이해하려는 의도를 읽게 됩니다. 물론, 복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제시하는 새로운 삶이 인간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일까요? 성경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열어놓는 새로운 인간상이 죄라는 근본적 문제 상황을 해결 받은 인간에게나 적용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해 탐구해온 그간의 인문학적 발견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 작업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 백성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있어, 성경이 진단하듯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이해는 피상적인 것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하나님의 창조로 베풀어진 은총을 받은 존재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누구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와 연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은총의 개입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인 이 특별한 은총은 인간 사이에 절대적 불연속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는 그들 양자를 공통적으로 묶어낼 수 없는 근본적 차이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굳이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공통점을 찾자면, 그것은 죄가 주도권을 잡은 세상에 속한 죄인 된 본성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 이해의 차이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점에 영향을 끼칩니다. 만일 죄에 대한 심각한 고려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역사와 사회도 창조라는 일반적 은총에 입각해 이해될 것입니다. 정 교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변증법적 과정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때 인간의 죄인 됨이라는 특징이 중요한 변수로 고려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정 교수께서는 미래의 종말의 향방은 인간의 역할에 따라 열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과정에 죄인인 인간이 과연 어떤 적극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정 교수의,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사명에 대한 이해에 있어 이런 인간 이해가 그대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정 교수께서는, 한 설교비평문에서, 성서가 억울한 약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런데 저는 과연 성경의 핵심적 문제 제기가 그런 것인가 묻게 됩니다. 그것이 혹시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을 대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여성이나 소수 인종의 인권 문제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 혹 환경과 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들이 각각 우리의 삶에 중요한 문제들이라는 점을 수긍하면서도,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강조가 기독교가 전하는 특별 은총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이슈들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담아내는 근본적 주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데이비드 웰스는 이런 요즘의 추세가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고백”이 사라진 데서 유래한다고 진단합니다.

현대라는 시기에, 하나님의 객관적인 진리와 시공간의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것에 대한 공적인 고백이라는 신앙고백은 학문 세계에서 매우 어색한 것이 되었다. … 이와 같이 일단 신앙고백이 사라져 버리자, 신학적 성찰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신학적 성찰이 하나님 말씀의 연구라는 분야를 상실하게 되자, 동양적 영성에서 급진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에서 환경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신학 성찰의 주제를 찾게 되었다. 더욱이 계급적인 관심사가 교회와 학문 세계에 끼어들어서 그 간격을 벌려 놓았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6쪽)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사회나 역사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문제 제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고려 없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방식도 성공적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역사와 실존은 모두 죄로 인한 왜곡, 오염, 부패를 증언할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으로, 죄로 인한 절망과 파멸의 현실을 깨고 재창조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돌연한 은혜와 초월적 기적의 개입으로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며, 새롭게 태어남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파멸의 운명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식으로 세상과 역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구원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그 인간 개인이 이웃 곧 사회와 역사에 새롭게 관련되기 시작합니다. 죄인 됨으로부터의 해방이 개인에게 이루어질 때에야, 그에게 사회와 역사에서의 적극적 역할이 주어집니다. 저는 이런 역할을 ‘성화’라는 전통적 신학 개념 속에서 이해합니다. 성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그 존재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존재가 삶의 현장에서 이웃, 곧 사회와 역사 앞에 지는 책임이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로 비유되는 심판의 현장은 바로 이런 측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신앙적 실천적 책임은 구원에서 비롯된 불신자와의 다름, 곧 ‘죄’라는 측면에서의 다름인 ‘거룩’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죄인이란 하나님과 분리된 자이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그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었을 때, 산상설교가 가르치는 “빛과 소금”, “생명”, “진리”, “착한 행실”의 정의가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43 이하에서 설명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 보이는 신앙 인격적 정체성은 바로 이런 사람들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펼쳐진 삶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도 완성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셨지만, 우리 인간은 아직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그분의 성취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 이런 긴장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의 전적인 예비하심에 맡겨져 있고, 때가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허락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기다림의 시간을 두시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는 성도들을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그 충만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구원사역을 연장해나갈 시간이, 그리고 부름 받은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는 훈련과 완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에베소서 2:22에서 “너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부부 사이의 관계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연합을 비교하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소유하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쓰임 받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 하시는 질서에 있어,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완성에 있어, 교회는 독특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엡 4:13-16). 교회는 잘못 판단하고 세상에 타협하기도 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야말로 “진리를 함께 찾아가는 일을 인도함에 있어, 사고와 행위 모두에서 우리가 어디를 향해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를 안다”(뉴비긴, 263쪽)고 믿습니다.  

신학의 근본 토대
  사실 하나님께 무슨 일반적 은총과 특별한 은총이라는 구분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시공의 세계에 갇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학적 성찰은 신앙을 그 대상으로 삼는 것인데, 신앙은 합리성을 넘어서는 대상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인간보다 크신, 초월적이신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성경에서 들으며, 그분을 신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 얼마나 의존적 존재인가 하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적 입장을 보면서 갖는 의문은, 정 교수께서 결국 하나님보다는 인간을 궁극적 기준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정 교수께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대해 여러 곳에서 재차 강조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신비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구성된 신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기독교 신앙이 인간으로는 넘볼 수 없는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우리의 차이가 빚어진 것일까요?
  제 관찰로는 정 교수께서 전제하시는 신학은 사실보다는 의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중대한 의미든 간에 그 의미가 발생한 터전인 사실이 견고할 때에만 비로소 그 사실에 의미가 담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되는 합리성이나 보편성의 이름으로, 사실을 재단하고 제한하며 배제하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신앙의 실제적 터전을 놓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 교수의 신학은 자신의 근거를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자기 확신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합리성에 따라 판단되실 존재일까요? 오히려 우리의 합리성이 하나님의 주권을 근거로 판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신학이 어떤 것인지는 데이비드 웰스의 설명으로 더 분명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소 긴 인용이지만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데이비드 웰스에 따르면, 신학은 세 가지 필수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1) 신앙고백적 요소(이 말은 성경을 ‘신앙고백’으로 여긴다고 말할 때처럼 ‘고백’으로서의 주관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2) 이 신앙고백에 대한 성찰, (3) 이 처음 두 요소에 기초한 영성입니다.

[첫째,] 신앙고백이란 교회가 믿는 내용이다. 신앙고백은 교리에 농축되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는 하나님이 영감 된 하나님 말씀을 통해 교회에 주신 진리를 고백한다. 어떤 주제라 해도 그 주제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느냐 또는 그 교훈을 어떤 식으로 엮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권위적인 진리가 기독교 생활과 실천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성경의 권위 아래 살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교회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핵심적인 신앙고백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슬로건이다. 이 지식이 없으면,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내용이 빠져 버리며, 믿음과 예배와 그 생명의 유지와 선포와 봉사의 수단을 잃게 된다. 신앙고백은 말 그대로 테올로기아(theologia), 즉 하나님 백성을 위해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서 모든 신학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
  신학의 두 번째 요소인 성찰에는 현대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인 싸움을 내포한다. 이런 성찰은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신학적 성찰에는 성경 안에 포함된 하나님의 계시 전체가 망라되어서 성경의 다양한 부분 사이의 연관성을 추구해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와 의지를 계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 성찰의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내용을 포괄적으로 이해해서 하나님의 생각이 교회의 생각 가운데 재현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 둘째로, 신학적 성찰에는 과거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신학적 성찰은 과거에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신 사실에서부터 현재의 폭풍우 가운데서 교회라는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는 무게 중심을 찾아야 한다. 과거의 영적인 부요를 모으며,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해 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반성적인 성찰이다. 현재는 언제나 인간 정신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고양되어 있는 순간(혹은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고 착각하는 태도를 버릴 필요가 있다. 이런 태도는 교만과 어리석음을 향해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신학적 성찰은 신앙으로 고백되는 내용과 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매우 중요한데, 어느 한 시대의 사상과 가정이 교회의 마음과 생각 속으로 아주 강하게 침투하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현대성이 ‘정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했다. 신학적 성찰이라는 특정한 맥락에서 말할 때, 교회는 현대성이 교회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지평에 교회의 생각을 맞추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현대성의 지평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라는 강력한 해독제, 즉 교정 수단을 갖다 주어야 한다. 비신화화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현대성이다.
  신학의 세 번째 요소에는 삶의 지혜, 즉 기독교적인 실천이 신앙고백의 기둥 위에 건설되고, 성찰의 발판에 둘러싸이도록 만드는 지혜를 구성하는 덕목을 계발하는 일이 포함된다. 이 말은 좀 단순하게 들린다. 내가 이 말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그 성격에 있어서 도덕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존재상으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영성은 기독교적인 실천, 기독교적인 삶을 우선적으로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 진실의 문제로 보는 영성이며, 생각과 실천을 분리시키지 않는, 이런 분리를 거부하는 영성이다. 이런 영성이 존재할 때에만 어떤 주어진 상황 가운데서도 기독교적이 된다는 것,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난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 실종》, 153-155쪽)

  한편, 정 교수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 결정론에 머물러 있는 한,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감수성은 어느 정도 확보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역동성을 상실한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추락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의 우연이다. 그는 이미 예정된 부활을 확신하고 십자가를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미래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자기에게 다가온 십자가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예수의 완전한 순종이 바로 십자가 구원의 역동성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이미 예정되고 결정된 수순의 진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술이고, 거꾸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절대적 순종과 신뢰의 결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이다.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결정된 길을 군말 없이 따라가는, 그래서 인간의 앙가주망이 근본적으로 차단된 숙명주의가 아니라 미래로 열린 길을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부단히 고뇌하고 결단하는 역사의식이다.
… <중략> …
  신비라는 말은 어떤 궁극적인 실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생명은 그 리얼리티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 신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의 신비는 역사의 신비에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주술은 형식으로만 신비이지 실제로는 인간이 역사의 신비에서 감수해야 할 불안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와 생명의 신비를 파괴하는 인간의 자기 전략이고 자기 숭배이다. 주술은 결국 신앙의 신비를 파괴할 뿐이다. (정용섭, 《설교비평1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29-30쪽)

  정 교수와 저 모두가 신비를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설명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신비가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정 교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마저도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실지 모른다는 차원에서 말하는 신비 같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역사가 초월적이라는데 그 신비가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종말적 현실에 그 은폐와 노출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는 예수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 신비이며 그래서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으로 확인되는 신비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보듯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신비인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으나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들어와 있는 탓입니다.
  기독교가 열어놓는 신비가 하나님 자신마저도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종말을 작정하셨다고 말하면, 그게 주술적인 말일까요? 정 교수께서는 인간이든 하나님이든 간에 누구도 미래를 확정해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미래가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를 정하셨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역동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과연 모순일까요?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가 결정된 수순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종과 신뢰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명시적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세례 요한에 의해 소개되었고, 예수 자신도 친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음을 공언했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이것 역시 주술에 빠진 후대의 해석일 뿐일까요?

설교
  정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교회 강단은 본문 해석이 부실합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 전체의 수준이 낮은 탓이기도 하고 설교자의 개인적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속상하고 가슴 아픈, 우리 시대 한국 교회 설교자와 설교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설교자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고린도전서 1:26-31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자의 위상은 그가 갖고 있는 자질이나 능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쓰신다는 점에서 발견됩니다. 저는 설교자의 무능(無能)이 하나님을 분명히 드러내므로, 설교자는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자의 능력이나 열심은 이 무능함을 돕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설교자의 열심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께 설교자는 출애굽 사건의 모세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사용해 여러 기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지팡이로부터 기적이 나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팡이는 단지 들려서 쓰임 받을 뿐입니다. 모세의 역할이 이와 같습니다. 모세는 실은 하나님의 지팡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 기적을 일으키듯, 모세는 하나님께 들린 지팡이로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냅니다. 설교자 역시 모세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29에서 “자랑치 못한다”고 한 것은 설교자가 그를 통해 이루어진 일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21절의 “전도의 미련한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전도가 왜 미련한 것이냐 하면,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로마서 10:9-15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이 어디에서 시작하는가를 역(逆)추적해보면 하나님이 그 시작이요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선한 결과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가 철학, 소위 사람들의 판단에 부합하는 합리적 설명으로 이해될까봐 심히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증거가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통해서만 효과를 낳게 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고전 2:1-5).
  기독교 신앙은 지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생명과 진리의 역동성, 곧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이시고 은혜로우신 개입에 정초되어 있습니다. 설교자가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을 편들고 계신다는 점을 알고, 그 자신도 설교로써 그런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편들고 있다면, 그가 하는 설교는 기본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설교를 비평하자면, 설교에서 신학이 실종된 현실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는 신학에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지 못합니다. 설교가 성경이 가르치는 계시의 내용을 제대로 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계적이지 않으며, 이해관계에 매어있지 않으며, 인과율(因果律)을 넘어섭니다. 설교는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설교가 직면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는 ‘세속성’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걸어온 지난 모든 나날동안 끊임없이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해 온 것이 바로 세속성의 문제입니다. ‘세속성’이란 하나님이외의 것을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로 삼는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현대에 이 세속성은 절대를 부인하는 다원주의로, 개인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실용주의로, 값싼 보편성을 위한 대중성으로, 모양을 바꿔가며 우리를 시험하며 공격해 옵니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분의 명령을 좇으며 그분만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교회 안에서도 성경을 펴서 가르치되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딤후 3:2) 성경이 전해주는 계시를 거스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는 말씀을 통해, 돈으로 되는 것, 곧 세상의 무가치한 것을 목적으로 삼는데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인간의 필요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주의가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및 종교 개혁과 부흥, 선포와 회심에 고정시키는 대신에, 우리 자신과 우리 나라와 우리 세계와 우리의 시간과 공간과 우리의 순간에 고정시키고 있음이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의 크리스천 서점들과 강단들과 주일학교 커리큘럼과 방송과 종교적 담화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4쪽)

  교회의 설교는 교회가 성경에서 배워 전통으로 물려받은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그 고백에 대한 신학적 통찰과 종합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모든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제기하는 궁극적인 질문에 직면하여, 한 인간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게 될 때, 그의 곤고한 영혼은 비로소 평안과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소위 닦달과 나열 등의 유치한 설교 행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에 제일 많이 하는 것이 닦달과 잔소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수준 높고 훌륭한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이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우리가 늘 게으르고 무지하고 완악하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부모는 진정 자녀들을 사랑할 때 책망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설교는, 늘 죄와 싸우며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완성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청중들에게 죄와의 싸움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주인 삼으려는 ‘자기 의(義)’와의 싸움을 싸우도록 애써 독려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시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넘어집니까? 저는 다시금 마이클 호튼의 진단에 공감합니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증들’을 생각해 보라. 개인적인 체험들을 ‘나누는 일’이 공동 기도와 공동 성경연구, 예배와 증거를 대신하고 있다.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저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88쪽).


맺는말
  토론이나 논쟁으로 정 교수나 저의 신학적 입장에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 교수의 설교비평을 읽으며 우리 각자의 견해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 교수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참된 대화는 강요와 설득이라는 목적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 교수의 한국 교회 강단을 향한 비판이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출발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저는 가슴깊이 그 충정에 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 정 교수의 비평 속에서 범상치 않은 영적 통찰과 진정한 영성의 편린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서로 다른 전통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심과 목표는 같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영광과 자랑이 더 분명히 드러나고, 더 많은 영혼들에게 진리와 생명이 올바르게 증거 되며, 그럼으로써 한국 교회가 성숙해가는 데에 우리의 공통의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관점과 견해에 있어 많이 다르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 곧 ‘하나님과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근본적 목적에서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다름과 같음 모두를 사용하셔서 한국 교회 앞에 우리의 사명이 합력하여 선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기독교사상, 2007년 5월호)

박영선 목사는 한양대학교 졸업, 총신대학교 신대원 졸업, 미국 리버티 벱티스트 세미나리 명박, 현재 남포교회 담임 목사이며, 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 <구원의 완성 1,2>, <그제야 끝이 오리라>, <구원, 그 이후>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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