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섭 목사의 설교 비평에 답한다.


매월 정용섭 목사님(이하 ‘정목사’)의 설교 비평의 글을 읽는 일에 기쁨을 갖고 읽었던 독자가 바로 그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진보교회의 대표로 알려진 향린교회의 목사이니까 언젠가는 그 비평의 대상이 되긴 하겠지만 이민목회 20여년의 삶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온 햇수가 짧아 아직은 공개적인 비평의 대상이 되기에는 이르다고 보고 있었는데, 그 때가 도적같이 임하고 말았다!

비평이라고 하는 것은 비판적 안목에서 출발하는 것이니까 비평의 대상이 된 사람이 만족할 만한 비평은 사실상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자기 성찰에 힘써온 비판적 지성인으로 자각하고 있는 필자로서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비평에 동의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어차피 사람에 따라 보는 관점은 다른 것이니까 다르다는 것에 무슨 시비가 있을 수 있으랴. 그러나 그 비평이 학문적 객관성을 상실하고 글 쓰는 이 주관에 따른 곧 비판을 위한 비평으로 보일 때, 그 대상자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정목사의 설교 비평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이유이다.

조목사=독립투사?

우선 정목사는 필자의 설교에 비평을 하는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향린교회와 조목사가 2년 동안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운동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마치 독립운동에 나선 독립투사처럼 매우 결연한 태도로 이 문제에 맞서고 있다.” 물론 지금도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를 위한 현수막을 내걸고 있고 이에 관련하여 여러 집회에 참여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를 마치 평택문제에 목회의 생사를 건 ‘독립투사’로 묘사하는 것은 정목사가 오늘의 민족 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어떠한지 그리고 향린교회의 목회와 필자에 대한 편견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명의 목사가 행한 사회적 신앙 실천운동을 ‘독립투사’라고 표현한 것은 무슨 의도인가? 이는 대화와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21세기에 1930년대 일제 때의 운동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구시대적인 유물이라는 의미에서 하는 소리가 아닌가? 물론 정목사가 그렇게 느꼈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교회와 목사를 열린 시각을 갖고 접근하는가, 아니면 닫힌 시각을 갖고 접근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신앙인은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서에서 야훼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히브리 노예들의 소리를 듣고 인간을 찾아오신다. 바로 이렇게 애타하는 마음이 자궁을 뜻하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다. 지금 쓰라린 가슴을 안고 맨손으로 평생을 걸려 일구어온 땅을 미군기지로 내어주고 떠나야 했던(지난 백년 사이에 그들은 세 번이나 이렇게 쫓겨났다!) 수 백 명의 대추리 도두리 농부들의 아픔을 정 목사는 과연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지금 정목사는 다른 목사와는 달리 향린교회의 목회에까지 그 비평의 폭을 넓히고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 정목사는 향린교회의 개혁성이나 국악예배, 그리고 민중신학의 산실로서의 향린교회의 독보적 위치에 대해 칭찬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미 첫 문장에서부터 독자들에게 조목사는 독립투사로 그리고 향린교회는 그를 따르는 일제하의 전투적 부대로 암시를 준 다음 얘기를 진행하는 것이 과연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성령의 열림과 생명성을 매번 주장하는 목사로서 적절한 태도인가?

작금의 우리 사회의 보수적 이념성 그리고 사학법 재개정을 주장하고 성조기를 앞세워 시청 앞에서 집회를 여는 반사회적이고 반민족적인 교회의 행태가 가져온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정목사께서 이런 식으로 말문을 연다고 하는 것에 대해 실망스러움을 금치 못한다. 자칭 개혁적이라고 말하는 정목사가 설교의 지평을 떠나 굳이 향린교회 목회에 대해 언급을 하고자 했다면 오히려 이런 기회를 통해 이러한 개혁적인 교회가 더 많아져야 남한 교회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물론 정목사와 필자는 살아온 삶의 길이 다르고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는 눈이 다르고 통일에 향한 열정의 강도가 다르다. 이렇게 다른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정목사에게 주어진 공간 안에서 정당한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같은 얘기라 하더라도 근거를 제시한 다음 마지막에서 어떤 결론을 짓는 것과 아예 처음부터 어떤 결론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더구나 필자를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그리고 이미 백편이 넘는 설교 가운데 단지 두세 편만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비평하는 것으로 필자의 전부를 믿게 만드는 좁은 공간 안에서 ‘조목사=독립투사’라고 결론짓고 시작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비평방법인가?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그런 ‘투사’가 될 기질이 부족해서 항상 고민해 왔다. 평택문제만 하더라도 가톨릭의 문정현신부님을 뵈올 때마다 그분의 투철한 정의감과 열정 앞에서 언제나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 필자에게 ‘독립투사‘라니! 그건 너무나도 과분한 칭호이다. 정목사가 필자의 비겁함을 잘 몰라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필자는 그렇게 불릴 자격이 없다. 다만 오늘 예수님이 함께 했을 그런 사람들이 누구인지 고민하고 그들의 아픔에 동행 했을 따름이다.

곁가지의 얘기이지만 정목사는 2006년도의 필자의 설교 횟수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2006년 한 해 동안 서른 번 남짓의 주일설교만 했다. 두 달간의 안식휴가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주일공동예배의 설교를 가장 적게 하면서도 제대로 된 연봉을 받는 설교자는 한국에서 조 목사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평신도설교를 비롯한 강단개방에 앞서가는 교회로 잘했다고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다른 뜻으로 말하는 것인지 필자로서는 의아스럽다. 설교 비평이라고 하는 것이 설교의 질을 논하자고 하는 것인데 설교의 양이 얘기되고 그리고 이에 연관하여 연봉이 등장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마도 땅값 비싼 명동에 위치한 교회이니까 향린 교인들은 모두 부자들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설교와 목회

정목사도 교회목회는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목사의 목회활동을 설교에 한정하여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필자는 남한의 교회 목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고 보고 있다. 그러기에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출석하여 설교를 듣는 것으로 신앙을 대체하는 뜨내기 교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나는 목사의 역할 중에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켜 사도로 보내셨듯이 교인들을 불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내어 보내는 것이 목회의 근본이다. 평신도 설교는 바로 그러한 목회 훈련의 한 과정이다. 혹 정목사는 평신도설교를 외부목사들에게 부탁하듯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평신도들에게 설교를 준비시키는 일은 목사에게 있어 한편의 설교를 만드는 일보다 더 많은 노력과 기도가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설교는 어떤 의미에서 교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일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평신도 설교의 효과는 얼마나 있을까? 필자의 경험으로는 수 십 번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한 번의 평신도 설교를 함으로써 더 큰 신앙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 목사님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강단을 개방하고 교인들에게 (특별 신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평신도라는 단어도 적절치 않다. 필자는 교회목회자와 생활목회자로 구분하고 있다.) 설교의 기회를 주고 믿음의 훈련을 시켰으면 좋겠다. 특별한 절기를 맞아 삶을 나누도록 하면 더욱 좋다.(장애인주일 등)

정목사는 필자를 평화 원리주의자 그리고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필자는 규정받는 것을 싫어하여 남을 규정하는 일을 피하려 하지만 정목사의 규정에 대해 일정부분 동의한다. 설교자가 원형으로 삼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원리주의자라는 말을 타협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이야 말로 원리주의자가 아니셨는가? 자신 앞에 십자가의 죽음이 놓여 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타협 없이 계속 걸으셨다면 예수님이야 말로 철저한 원리주의자이셨다는 것이 필자의 예수 이해이다. 또한 예수님은 당시의 지배자들을 비난하고 이런 지배체제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채찍을 들어 그 안을 헤집어 놓았으니 이분이야 말로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셨는가? 만약 현실을 감안하셨다면 그렇게 무모한 일을 하셨을까?

설교자는 예수님을 따라 평화의 원리에 입각해서 이상에 가까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성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자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고 이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로 요약된다. 설교자는 이 땅에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목회와 삶에서 그렇게 실천하면 된다. 목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근본 원리를 선포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각자의 삶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면 된다. 필자는 현재 남한의 설교자들이 30분의 짧은 설교 안에 원리와 적용 모두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그렇게 하니까 교인들의 주체적 사고를 가로막고 설교 내용은 깃털마냥 가벼워지고 윤리도덕적인 하나의 강령으로 결론짓고 신도들을 행복과 사랑이라는 모호한 환상의 심리의 세계로 인도하고 만다. 그리하여 결론에서 ‘주 안에서 능치 못함이 없다.’는 상투적 구호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본다면 전하고자 하는 하나의 신앙의 원리만 얘기하는데도 30분 이상이 걸린다.

현실 인식의 차이

필자의 설교에 대한 정목사의 가장 주된 비평은 사회정치 현실에 대한 지나친 언급으로 보고 있다. 정치설교라는 표현을 쓰진 않았지만, 설교에 있어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반대 운동 국가보안법 철폐 그리고 한미FTA에 관한 시대적 이슈에 대해 빈도나 내용에 있어 설교가 지켜야 할 정도(正道)를 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교회와 정치라는 조직신학적 논쟁에 대해서는 이미 정목사께서 나의 설교 비평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필자는 솔직히 말하면 이 주제에 관련한 조직신학적 논쟁에는 자신도 없거니와 별 관심도 없다. 필자는 다만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그리고 24년의 미국에서의 소수자의 경험을 통해 민족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나라고 하는 한 개인의 삶은 결코 풀리지 않는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 이 역사인식에서 오늘 한국 민족의 최대 과제는 평화통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분단사고의 극복이 우선시 되어야 하고 이 극복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미군주둔이라고 하는 현실인식을 갖고 있다. 나는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 다 이러한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고 예수님도 그 폭은 다르지만 출발에서는 같다고 보고 있다.(“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마태 15장 24절)

게다가 정목사는 독일 유학생활을 통해 독일 국민들이 갖는 통일에 대한 기쁨과 자부심을 직접 맛보았을 것이다. 지난 2년여 동안 남한사회에서 가장 큰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바로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의 문제요 국가보안법 철폐요 한미FTA협정이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목사로서 이 민족사회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목사는 이러한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그 빈도와 속도에 대해 질문할 것이다. 이점에서 나이는 같지만 한국의 진보적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배경을 갖고 미국의 진보적이고 실증적인 성서신학을 전공한 필자와 보수적인 성결교단의 배경을 갖고 독일의 보수적이고 관념적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을 전공한 정목사와는 사회정치적 현안 문제에 대한 인식과 참여 방식에 있어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다.

정목사가 평택의 미군 기지를 직접 가서 본 적이 있는지는 몰라도 지난 3년 935일 동안 그곳에서는 몇 차례의 대형평화집회를 포함해서 주민들의 촛불집회가 하루도 빠짐없이 열렸다. 전국적으로 참석한 사람들의 총 숫자를 더하면 아마도 수 십 만 명에 이를 것이다. 이라크에서 아들을 잃고 평화운동가로 변신한 신디 헨 여사를 비롯한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의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의 사람들이 이곳에 직접 가서 평화를 기원했다. 주민들이 스스로 쌀을 거두어 세운 대추초등학교 건물이 경찰의 포크레인에 의해 부서지던 1년 전 그날! 국제평화회의에 참석한 세계교회협의회 각국 대표 50여명의 목사들 또한 그 대추리 입구에서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거리에 서서 기도집회를 가진 바 있다. 단연코 국내외적으로 제일 큰 사회적 이슈였다. 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관심하는 신앙인이라면 적어도 한 두 번은 이곳을 방문해서 추방의 아픔을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여야 옳았고 또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면서 이 땅의 평화의 문제를 고민하는 설교자라면 평택의 미군기지 얘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평택미군기지 확장의 부당함을 고발하기 위해 미군의 숫자가 줄어드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나는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없다. 그것도 원고지 70-80매의 분량의 설교 중 두세 줄로 언급하는 일이 비판을 받아야 되는지 필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말고 그냥 미군기지 확장반대를 외치라는 말인가? 아니면 그런 얘기 자체를 설교 중에는 언급하지 말라는 말인가? 정목사 자신 또한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일에 서명하였다고 말하는데, 그는 그러한 자신의 실체를 어떻게 보여주었는가? 사석의 자리에서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 것인가? 평화를 외치는 사람이 많아도 평화가 오지 않고 전쟁이 계속되는 것은 전쟁하는 사람은 목숨을 걸고 하는 반면에 평화를 외치는 사람은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어느 평화운동가의 뼈아픈 충고가 있다.

그리고 정목사의 부모님이 이 대추리의 한 주민이었다면 그건 정부가 하는 일이니 빨리 포기하고 주는 대로 보상받아 나오라고 얘기했을까? 난 지금도 빈손으로 평생을 일구어 온 자식 같은 땅을 미군들의 전쟁기지로 내어주고 떠나야만 했던 주민들의 눈물 젖은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예수님이 당시 경제적으로 차별받고 정치적으로 억압받던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 하면서 지도자들을 비난하였듯이 예수님을 따라 그렇게 살려하고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정목사는 오늘의 남한사회에서 갈릴리를 어디로 보고 있는지 묻고 싶다. 설교라고 하는 것은 오늘의 갈릴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오늘의 예수는 어떻게 행동 했을 것인지를 성서를 통해 묻고 이에 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정목사가 루터의 ‘두 왕국론’과 칼빈의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의 서로 다른 예를 들면서 “여기서 누가 옳은가 하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자신들의 신학에 근거해서,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길을 간 그들을 오늘의 관점으로 재단하거나 매도할 수 없다.”고 분명히 얘기해 놓고 왜 필자의 설교비평에서는 선을 넘었다고 ‘재단’하거나 독립투사라고 ‘매도’하는가? 가치판단은 유보한 채 비평을 전개할 수는 없었을까?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 누구나가 그러하듯이 정목사 또한 사회적 가치이념과 개인의 신념이 있을 것이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재단하거나 매도할 수 없다.’라는 얘기를 꺼내지 말든가. 하지 말자고 하면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와 정치

세간에서 흔히 묻듯이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어디까지가 정치이고 어디까지가 종교일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6일은 정치인으로 사는 것이고 하루는 종교인으로 사는 것일까? 아니 과연 정치와 종교의 차이가 있다면 그 경계선은 누가 긋는가? 아니 그 경계선이라는 것이 학문의 세계를 벗어나 실제의 삶 속에서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기도와 노동의 차이가 있는가? 교인들은 교회 문밖만 나서면 현실정치와 사회적 현안의 문제들을 갖고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데, 여기에 목사는 이런 논의들은 나라의 정치인들의 몫으로 넘기고 영혼의 문제에만 관심하자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물론 정목사를 포함한 대다수의 보수 신앙인들 또한 이러한 성속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교회와 신학의 잘못된 행태에 말로는 비판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 그리고 삶을 드러내는 설교에 있어 그가 얼마나 진실되느냐?는 실존적인 질문이 남아 있을 따름이고, 그가 생각하는 경계선과 내가 생각하는 경계선에 본질적인 차이가 남아 있을 따름이다.

구약성서에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예언자들은 입만 열면 왕과 나라들에 대해 비판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도 하는데 오늘 이 시대에서 이런 역할은 누가 담당해야 하는 것인가? 21세기 남한의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그런 예언자는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역할은 누가 감당해야 하는 것인가? 정치학자들의 몫인가? 정목사는 예언자의 역할을 한 문익환목사를 존경한다고 하는데 문익환목사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애쓰는 나를 향해서 잘한다고 박수는 치지 못해도 다름에 대한 배려는 지켜야 하지 않았을까? 설교는 정치연설도 아니고 신학강연과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누가 그 다름의 기준을 정하느냐에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벽을 허물라고 하셨는데, 이는 과연 정치적 발언인가 아니면 종교적인 발언인가? 궁전의 벽이 아니라고 했으니 종교적인 발언에 그치고 마는 것인가? 예수님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했는데, 바리새인들은 정치적인 발언으로 오해한 것인가?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종교와 정치의 이분법적 사고는 과연 가능했는가? 현재 노무현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로마 황제를 비판했다면 이는 정치적인 발언이자 동시에 종교적인 발언이었다. 왜냐하면 로마의 황제는 정치의 수장임과 동시에 종교적 숭배의 대상인 신이었기 때문이다. 성서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성서가 갖고 있는 그 시대적 사고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점에서 필자와 정목사는 성서이해에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정치와 종교의 경계에 대한 해묵은 논쟁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또 다른 문자주의의 위험

정목사는 바울의 로마서 13장을 언급하며 “예수는 로마 제국주의에 항거하라!고 선동하지 않으셨다.”고 단정한다. 물론 복음서 어디에도 이런 구절은 없다. 필자는 이러한 정목사의 단정적인 언사에 갑작스레 슬픔이 밀려온다. 정목사의 성서에 대한 이해가 이런 정도로 단선적이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전 대형교회 목사들을 향한 설교비평에서 성서의 문자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할 때, 정목사는 필자는 성서 이해의 방식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서 필자는 완전한 차이를 느낀다.

성서에 씌어져 있는 문자 그대로 읽어내는 것이 문자주의의 위험성이라면 역으로 성서에 문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역사적 사실이 없거나 혹은 예수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 또한 문자주의이기 때문이다. 정목사는 나의 설교 ‘니고데모와 키에르케고르’를 길게 인용하면서 니고데모에 관한 성서구절 사이에 담긴 행간의 의도를 읽어내는 나의 해석에 깊이 감동받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정목사가 복음서의 다른 기록에서는 왜 이러한 행간의 의도를 읽어내려고 하지 않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예수는 로마 제국주의에 항거하라고 선동하지 않으셨다.’는 구절이 없으니까 그런 일이 없다고 단정한다면,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후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 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는 누가복음 22장 36절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는 폭력 혁명을 꾀했다는 말로 결론을 유출해 낸다면 어떤 반론을 제기할지 알 수 없다.

또 다른 성서의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인들은 거의 대부분 매 주일 사도신조를 고백하고 여기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를 죽인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다고 말하는 구절은 없다. 아마 이 얘기를 듣는 독자들은 모두 놀랄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하고. 만약 우리가 선입견 없이 빌라도에 관련된 복음서의 구절들을 읽어보면 복음서 저자들은 빌라도의 책임을 면제해주기 위해 매우 의도적인 노력들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마태복음을 보면 “빌라도는 그들이 시기하여 예수를 넘겨주었음을 알았다‘고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꿈 얘기를 하며 ‘당신은 그 옳은 사람에게 아무 관여도 하지 마세요.’라고 당부하는 얘기가 나오고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하고 말한다. 그러자 온 백성이 말하기를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라고 외친다. 누가복음 또한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내가 친히 심문하여 보았지만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했소. 이 사람은 사형을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라고 분명히 밝히고 놓아주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군중들이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를 놓아주시오!’하고 소리칠 때, 빌라도는 무려 세 번씩(!)이나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단 말이오?’ 라고 반론하며 예수를 놓아주고 싶어서 안달한다. 요한복음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묻는 진리추구자로 등장하고 유다 사람들 앞에 서서 ‘내가 그에게 아무런 혐의도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무죄선언을 하고 오히려 유월절의 관례에 따라 예수를 놓아줄 것을 제의한다. 19장 12절에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다.’고 증언한다. 이상 세복음서는 빌라도에게 매우 분명한 면죄부를 주고 있다. 다만 마가복음에서만 세복음서와 같은 분명한 면죄부를 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마가 또한 빌라도가 대제사장들이 시기한 나머지 예수를 자기에게까지 끌고 왔다는 것과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민란을 막기 위해서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분명히 복음서는 빌라도에게 예수 죽음에 책임이 없고 유대인들에게만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사도신조를 통해 지난 2,000년 동안 줄기차게 빌라도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가? 차라리 양쪽 다 책임이 있다고 말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니 문제이다. 복음서가 옳거나 사도신조가 옳거나 둘 중 하나이지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한쪽이 거짓이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이 알면서도 어떤 편의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필자의 해석은 빌라도에게 책임이 있었지만, 복음전파라는 현실적 목적을 위해 책임이 없는 것처럼 복음서 저자들이 각색을 했다는 것이다.

그 역사적 배경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예수 죽음 이후 30여년이 지나 서기 66년경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때 로마는 예루살렘 성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시킨다. 이때로부터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고향으로부터 쫓겨나는 디아스포라 유랑의 시대가 시작한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모아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할 때는 이렇게 로마의 유대인 탄압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이다. 예수는 유대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대부분의 유대 사람들 또한 로마에 적대적이라는 소문이 나면 복음전파는 끝장이다. 자신들이 쓴 복음문서가 로마 당국에 의해 정부를 비판하는 불온문서로 찍히면 예수께서 당부하신 하나님 나라 운동은 거기서 끝나고 만다. 일제가 우리의 선조들로 하여금 출애굽기나 요한계시록과 같이 해방이나 자유의 생각을 품게 하는 성경조차 공적으로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우리의 역사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운동을 위해 약간의 각색을 할 수 밖에 없다. 로마는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그리고 모든 책임은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 죽음의 정치성은 종교성으로 제한되고 만다. 또 많은 진보신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너무 개인 영성화하고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구속적 차원으로 변질시켰다고 말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것 또한 바울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실상 이런 변질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가? 그리고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는 세속 권력과의 밀착으로 기독교의 타락이 시작하는 시점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기독교의 세계화가 이루어졌고 동방에 사는 우리에게까지 예수 복음이 전해졌으니 역사가 갖는 역설이요 모순이기도 하다.

정목사는 복음서에 반로마적인 예수님의 말씀이 없는 이유를 이렇게 폭넓은 역사적 시각에서 접근할 수는 없었을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과연 가이사의 것이 어디에 있는가? 세상의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 않는가? 하는 역설을 읽어낼 수는 없었을까? 예수는 로마가 지배하던 식민지 시대에 직접 수탈을 당하는 한 유대백성으로 살았고 그리고 수탈을 당하며 살아가는 갈릴리의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과 함께 거하셨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갈릴리는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민중 폭동이 일어난 발원지라는 점에서 예수 또한 당연히 로마의 지배에 대해 비판적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는 없었을까? 폭력으로 대항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로마의 한 지방 통치자였던 헤롯을 여우에 비유하여 경멸하는 것을 보아서도 정치지배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역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의 십자가 처형은 분명히 자국민들에게는 행하지 않고 로마정부에 반역하는 정치범들을 처형하는 사형방법이었기에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분명히 옳다. 단지 종교적인 이유만이라면 스데반의 경우와 같이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일 수도 있었다. 따라서 예수죽음에는 반드시 빌라도의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복음서 글로는 그렇지 않지만, 전해 내려오는 얘기를 통해 이런 정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초대 교부들은 니케아 공의회 이후 사도신조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는 구절을 넣게 된 것이다. 초대교부들은 예수의 죽음이 정치적이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말하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광의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정목사는 정치라는 말을 협의적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 같다. 정목사는 말한다. “필자의 생각에 예수 사건은 오히려 정치경제, 사회문화적 차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혁명가가 아니라 바로 메시아이다. 정치적 혁명으로 생명사건이 완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내가 생명을 회복하려는 광의(廣意)의 의미에서 말하는 정치적인 발언을 협의(狹意)의 정치적 혁명으로 이해하고 있다. 정목사는 필자에게 묻는다. “그런데 그는 왜 교회강단에서 정치적인 문제에 발을 깊숙이 들여놓는가?” 그건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계가 (광의의) 정치세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당 정치인은 아니다. 법조문 하나하나를 관심하는 국회의 정치인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바름을 위해 애쓰는 정치인이다. 목사는 누구인가? 하늘의 정(正)을 이 땅에 치(治)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닌가? 이를 정치(政治)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의 정치적 발언은 다윗 왕을 견제하는 나단선지자의 역할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는 주님의 기도 속에서 나는 이러한 구체적인 부름을 듣고 있다.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 교인들이 고민하는 한미FTA에 관련하여 목사가 어떤 발언을 하는 것이 정치적인 일이 되는가? 사안을 따라 어떤 정치인을 선택하라는 얘기는 정치발언이 되겠지만, 한미FTA 협정 체결로 인한 양극화와 민중들이 당할 아픔에 대해 경고하는 것은 신앙의 범주에 속한 얘기이자, 목사의 책무이다. 교회 강단을 그렇게 협소하게 보는 정목사의 주장대로라면 예수의 나사렛 선언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경제학자의 일로 돌려야 할 것이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일은 군사령관의 일로 그리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는 일은 의사의 일로 돌려야 할 것이다. 나는 정목사가 다른 보수적인 목사들과 같이 이 나사렛 해방선언을 영해(靈解)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혁명(革命)이란 단어도 그 말 그대로 세상을 혁신(革新)하는 하늘의 명령(命令)이라고 폭넓게 이해할 수는 없을까? 남한의 기독교인들은 왜 혁명 그러면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을 떠올리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까? 75세의 아브라함의 고향 탈출도 혁명이고 히브리 노예들의 이집트 탈출도 혁명이다. 예수를 만나 거듭나는 믿음의 사건이란 결국 과거의 자기를 탈출하는 깨달음의 혁명 사건이 아닌가?

성서에서 사회정치역사적 상황을 빼고 문자 그대로 읽어낸다면 그야말로 성서는 모순투성이고 예수님의 행적은 아리송할 수밖에 없다. 보다 폭넓게 읽어나가야 한다. ‘예수는 로마에 항거하라’고 말했다는 구절이 없다는 논리를 펴는 정목사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나 헤롯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고 로마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일제시대에 친일파에는 적대적이었지만 일제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모순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된다.

흔히 성서주석을 할 때 말씀은 텍스트요 오늘의 현실은 컨텍스트라는 단순대비에 자주 빠지는데 크게 보아 정목사 또한 이런 단순 방식에 머물고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잘못된 가정을 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는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상관관계란 이런 것이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가 곧 오늘의 우리 상황에 대비시키는 텍스트가 아니라 성서의 문자와 그 문자를 둘러싸고 있는 당시의 사회적 정황과의 상관긴장관계가 바로 우리가 적용해야 할 텍스트인 것이다. 예를 들면 A라는 사회적 상황에서 B라는 성서의 구절이 나왔다면, A와 B 사이에 놓여 있는 C라는 상관긴장관계가 성서의 텍스트가 되어 오늘의 A+라는 새로운 상황에 적용할 때 B+라는 새로운 성서의 텍스트가 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설교자들이 해야 하는 성서주석의 작업이다.

무거운 은혜. 과연 그러한가?

그간 필자가 읽어온 대형교회 복음주의권 목사님들을 향한 정목사의 설교 비평은 대체로 그 내용이 너무 가볍다는 것이 주된 비판이었다. 그런데 ‘값싼 은혜, 무거운 은혜’라는 제목에서도 분명히 밝혔지만, 필자에 대한 설교는 반대로 무겁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가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에 비해 무겁다는 상대적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필자는 스스로 여전히 예수님의 설교에 비하면 너무나도 가볍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누가 자기 형제를 바보라 부른다고 해서 지옥에나 가라고 소리친 적도 없고, 잘못된 일을 했다고 해서 손을 자르거나 발을 자르라고 외친 적도 없고, 형제를 실족케 하였다고 해서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한 적도 없다. 평화가 아니라 불을 던지러 왔고 가족 사이에 분쟁을 가져오기 위해 오셨다는 예수님의 설교야 말로 너무너무 무거운 것이 아닌가?

정목사는 결론에서 마태복음의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빗대어 복음이란 바로 이렇게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는 ‘값비싼’ 초청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난 도대체 헷갈린다. 이 성서구절을 반복적으로 외치는 복음주의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를 비판해온 정목사가 나의 설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다시금 이 구절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 구절 또한 그리 간단하게 해석되는 구절이 아니다. 이 마태복음 구절에서 정작 중요한 단어는 이 ‘다 내게로 오라’는 초청에 이어지는 ‘나의 멍에를 함께 메고 가자’는 문구에 있다고 본다.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끌어야 하는 팔레스타인의 농사에서 한 마리는 다른 한 마리가 이끄는 대로 가야 한다. 자기 힘을 빼야 한다. 그래야만 하루의 일을 보다 쉽게 마칠 수 있다. 힘이 센 자 앞에서 버티면 결국 자기 손해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거운 짐을 벗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목에 메어진 멍에를 벗어 던지라는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혼자 지던 멍에를 벗는 대신 예수님의 멍에를 함께 메는 자기 포기와 헌신을 의미한다. 곧 십자가 순종의 삶에 대한 초청이다. 정목사는 이 함께 멍에를 메자고 하는 십자가의 초청을 가볍게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여전히 무겁다. 구원을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가르쳤던 사도 바울 또한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라고 한탄하고 있다. 구원에는 감사의 기쁨도 있지만, 동시에 무거움의 실천도 있다. 갈라디아서가 가르치는바 믿음만으로 의인이 되는 기쁨도 있지만 야고보서가 가르치는 실천의 가르침도 있다. 기독교 영성이란 바로 전자의 기쁨으로 후자의 실천을 행하는 힘이다.

향린교회의 현장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옮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그 말 속에 담긴 상대방의 진심이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긴 글에서 짧은 문장을 인용할 때는 전체 문맥을 잘 살핀 뒤에 맥락에 따라 그 문장을 비판해야지 전후 문맥을 고려함 없이 아무런 예비지식도 없는 제삼자를 향해 불쑥 한 구절을 내미는 것은 지성과 객관을 생명으로 하는 학자로서의 정당한 태도는 아니다. 마치 ‘성전의 벽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발언에서 이 문구만을 문제 삼아 예수는 민중폭동을 주창하였다고 고발하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의 태도가 이런 것이었다. 내가 30분이 넘어가는 설교 말미에서 채 1분도 걸리지 않는 마지막 문장을 들이밀고 조목사의 설교는 이런 식이다! 라고 단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바른 비평의 방법이 아니다. 정목사도 지적하였지만 나의 설교는 어쩌면 한편의 단편소설과 같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문학적 반전을 꾀하는 강조의 문장이 많다. 그 문장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정목사가 지적한대로 과장이나 억지 그리고 선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체 설교를 들은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결론들은 물이 흘러들어옴과 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정목사에게는 온당치 않고 무거운 보이는 말들이 향린교인들에게는 값비싼 은혜의 초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장을 ‘와서 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모든 목사마다 자기가 서 있는 교회의 특수한 상황이 있다. 필자가 설교하는 향린교회는 남한 내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진보적인 교회이다. 한 눈으로는 성서를 그리고 다른 한 눈으로는 민중의 고통 받는 현실을 보는 신앙인들이 모인 곳이다. 제3세계적인 시각인 남미의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그리고 통일신학의 진보적 성서 해석을 목말라 하는 교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향린교회가 아니라면 애당초 교회에 발을 집어넣지 않을 비판적 지식인도 있고 교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교회 자체를 떠날 만큼 (믿음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남한의 기독교의 행태에 대해 매우 실망한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그들은 향린교회를 자신들의 막장교회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는 최후의 남은 구원의 방주이다. 기나긴 방황 끝에 향린교회를 찾아온 많은 젊은이들은 진보 개혁적 사회사상과 성서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는 민족의 평화적 통일과 자주를 교회목회의 우선과제로 여기고 있는 실천가들이다. 필자는 향린교회의 목회나 필자의 설교가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이유가 어느 교회보다 민족자주적인 의미에서 분명하고 크다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가 구체적 역사 상황에 상관없이 똑같은 구원만을 선포하셨다면 성서가 그렇게 두꺼울 필요도 없고, 복음서를 4권이나 가질 필요가 없다. 조직신학자의 눈에는 각기 다른 공동체에 선포된 4권의 복음서가 같을지 몰라도 구체적 현실을 중시하는 성서신학자인 나에게는 매우 다른 것이다. 교회라는 이름은 같지만 필자가 매주일 설교를 해야 하는 향린교회라는 자리는 바로 이렇게 다른 자리이다.

옳고 그름이 아니다. 필자에게 어떤 선을 넘었다고 비평하는 정목사가 만약 향린교회에서 설교하게 된다면, 다른 교회에서 했던 원고를 그대로 들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설교 비평은 단순히 한 목사의 설교의 내용을 비평자의 자기 신학이라는 고정된 자리에서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하고자 하는 설교자의 삶과 신학 그리고 그가 서 있는 목회현장을 고려하는 가변적 기준을 가질 때에 비로소 양자가 서로 소통하는 참다운 비평의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필자는 정목사를 향린교회에 초청하여 교인들이 함께 동참하는 진정한 설교 비평을 하고 함께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열린 대화를 하고 싶다.

설교비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한 목사의 수 십 편의 설교를 읽고 평을 한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목사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적어도 비평하려는 목사가 섬기는 그 교회가 일반적 기준에서 벗어나는 교회라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번쯤은 직접 와서 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목회하는 목사로서 쉽지 않은 일이기에 동영상으로 설교를 들었을 것이고 예배의 분위기를 파악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영상을 통해 보는 것과 예배에 직접 참여해서 그 분위기를 체득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정목사가 알지 못하는 더 큰 놀라운 사건이 향린의 예배 속에 있다. 그것은 향린 교회가 국악예배나 평신도 설교 그리고 평신도목회에 있어서 개혁적인 길을 걷을 뿐만 아니라, 더 큰 개혁도 시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2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바 모든 교우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드리는 공동 축도이다. 조직신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신조 대신에 국악풍의 독자적인 신앙고백을 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겠지만, 공동축도 또한 매우 위험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향린교회는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따라 축도를 단지 목사(교회목회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신도들(생활목회자)이 함께 공유해야 하는 하늘의 축복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배의 마지막에서 온 교우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그 사랑의 체온을 느끼며 서로를 향해 축복을 비는 이 공동축도에서 성령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구원의 초청을 듣는다.

정목사께서 한번이라도 직접 예배에 참여하여 기쁨에 넘치는 향린교인들의 반응을 보았더라면 “민중들의 영혼을 신경과민하게 만드는 무거운 은혜라는” 혹은 “이런 주장은 흡사 유신시대 조회시간에 행한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아닌가” 하는 무책임한 얘기는 결코 하지 않았으리라! 더 나아가 예수님이 함께 하셨던 갈릴리사람들이 오늘 남한의 역사 현실에서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하고 체득하기 위해 고통 받는 그들의 삶에 몸으로 접근하였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설교 비평이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전히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설교 비평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를 드린다. 지금까지 내게 이런 충심어린 설교 비평을 해준 사람이 정목사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으니 진정 정목사의 설교비평의 길과 하나님 나라 운동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기독교사상, 200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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