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비평 "영성과 설교"에 대하여

(아래의 글은 와싱통 한인교회 김영봉 목사님이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 글에 대한 답글이다. 편집자 주)

1.

   지난 달 말 경, 저를 아는 어느 목사님께서 메일을 보내셔서, 저의 설교에 대한 비평이 <기독교사상> 7월호에 실렸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정 박사께서 제 설교에 ‘극찬’을 했다고 좋아하셨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저는 보통 한국 독자들보다 일주일 정도 늦게 책을 받아보기 때문에 며칠 동안 답답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책이 도착하기 전에 혹시나 싶어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버 홈(http://dabia.net)을 찾았더니, 그곳에 원고가 올라 있었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고는 한 참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독자들이 ‘극찬’이라고 느낄 정도로 후하게 평가해 주신 것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다비아 홈에 어느 방문자께서 정 박사님의 비평의 칼날이 무뎌진 것 아니냐는 글을 올리신 것을 보았습니다. 비평을 받은 본인도 무안할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 방문자에게 응답하시면서, 정 박사님은, 한 설교자의 설교를 비평할 때, 전체적인 방향이 괜찮으면 할 수 있는 대로 우호적으로 평가하고, 그렇지 않으면 문제점을 가능한대로 부각시키려 한다고, 자신의 비평의 원칙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답변을 읽고 나니, 무안함이 약간 해소되기는 했습니다만, 여전히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독자들 가운데는 혹시 정 박사님과 제가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닌지 의심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 동안 정 박사님의 글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정 박사님이 웬만해서는 객관성을 잃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분임을 인정할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일수록 모르는 사람보다 알고 지내는 사람에게 더 박하게 대하는 법이지요. 다행히 저는 글로만 정 박사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정 박사님 또한 저를 글로만 알고 계십니다. 사실, 저는 정 박사님의 설교 비평을 읽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전업 설교자로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설교 비평이 연재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과거에, 청부론의 문제를 붙들고 고단한 씨름을 했던 경험이 있기에 정 박사님의 설교 비평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명 설교가들의 허점을 드러내는 통쾌함에 흥분하면서 읽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으로서 읽었습니다.
   돌아보면,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배웠을 뿐 아니라, 설교 준비를 끝내고 검토할 때마다, “정용섭 박사가 이 설교를 읽었다면 뭐라 했을까?”라는 질문을 자주 해 보곤 했습니다. 특별히 ‘성서의 깊은 세계로 인도하는 설교’에 대한 정 박사님의 끈질긴 요청은 성서학도인 제게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서학자로 일하면서 저도 그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었는데, 이제 전업 설교자가 되었으니, 성서의 깊은 세계로 인도하는 설교가 무엇인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야 할 위치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 노력에 있어서 정 박사님의 설교 비평은 그 동안 제가 읽은 그 어떤 설교학 책보다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제 설교에 대한 칭찬 중 적지 않은 부분을 정 박사님의 공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 지면을 빌어 그 점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영성적 설교’에 일가를 이루었다고 칭찬하셨지만, 정 박사님이야말로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설교비평학’에 있어 일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 비평을 읽으면서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놀랍니다. 첫째는 설교 비평에 담겨 있는 예리한 분석력과 번득이는 통찰력에 놀랍니다. 다른 분의 설교 비평을 읽을 때는 ‘뭐, 꼭 그렇겠어? 한 면만 보고 하는 말이겠지’라는 생각을 종종 했었습니다만, 저의 설교 비평을 읽고는 정 박사님의 정확한 분석력에 두 손을 들었습니다. 둘째는 이 어려운 작업을 지금까지 해 오고 있는 정 박사님의 열정에 놀랍니다. 저도 연재를 해 보았습니다만, 보통의 자기 훈련(discipline)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미리 준비한 원고가 아니라, 매 달 50여 편이 넘는 설교를 읽고 이같이 높은 완성도의 원고를 써낸다는 것은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다비아 홈을 보니, 틈틈이 정 박사님이 속한 성결교회 소속 목회자들에 대한 설교 비평을 쓰고 계시더군요. 외국처럼 넉넉한 연구비를 받아서 이 일에만 전념할 상황이라면 모르되, 배고픈 학자 목사로서 이 일을 이렇게 오래 동안 지속적으로 해 오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내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실로, 성령께서 정 박사님을 준비해 오신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2.

   정 박사님의 설교 비평에 대해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설교 비평의 성격 상 문자화된 설교 원고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스 수사학에 의하면, 효과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려면,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가 고루 작용해야 합니다. 로고스는 설교의 내용을 가리키고, 파토스는 설교의 내용과 전달 과정에 개입하게 되는 정서적 차원을 가리키며, 에토스는 설교자 자신의 영성과 인격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정 박사께서는 143쪽에서 제 설교의 파토스를 언급하기는 했으나, 설교 원고를 중심으로 행해지는 설교 비평에서는 파토스와 에토스의 차원이 다루어지기 어렵습니다. 현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의하면, 효과적인 의사소통에 있어서 로고스는 30%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이론에 대해 저는 아직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로고스가 전부는 아님이 확실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아주 훌륭한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영혼의 깊은 곳을 만지는 힘이 있습니다. 설교 중에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도록 돕는 ‘은혜’가 그분에 설교에 충만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설교 본문을 읽어 보면, 마치 맹물 같은 느낌입니다. 특별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설교 원고만 두고 보면, 그분의 설교에는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설교단에 서서 입을 열어 말씀을 전하면, 그분의 인격적, 영성적 힘 때문인지, 특별한 설교가 됩니다. 저는 그분을 뵈면서, 로고스보다 에토스에 훨씬 더 큰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합니다. 어떤 목회자가 교회를 성장시켜 볼 양으로 어느 대형 교회 설교자의 설교를 몇 년 동안 카피했는데,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경우, 문제는 로고스가 아니라 에토스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교자의 에토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로고스를 회중이 듣는다면, 그 어색함이 얼마나 심할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 원고를 잘 작성하려는 노력과 함께, 자신의 에토스의 힘을 키우는 일에도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설교자의 영성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원고 작성법은 단기간에 배울 수 있지만, 에토스의 힘을 키우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의 지속적인 영성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설교자는 ‘이미 알고 있는 자’로서 ‘모르는 자’들에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이미 행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훈계하는 것이 설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는 이미 완성된 자로서 설교단 위에 선 것이 아니라, 회중과 함께 ‘도상에 있는 자’로서 단 위에 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고 지시하고 훈계하려 하지 말고, 영적 여행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몇 걸음 앞서 걸으면서 그 여정에서 얻는 깨달음을 나누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설교자의 권위를 낮추는 것이라고 비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의 외적 권위를 가지고 고압적으로 선포하기보다는, 말씀의 내적 권위에 호소하면서 낮은 자세로 호소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설교자는 부단히 영적 생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설교자의 영성이 정체되어 있으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교리와 교훈과 훈계와 잔소리에 호소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만을 예로 말했습니다만, 검토해 보면 보완할 점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보완을 통해 정 박사님의 설교 비평이 하나의 이론으로 정리되기를 기대합니다. ‘정용섭의 설교 비평--그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상상해 본다면, 이제까지 ‘실제편’을 쓴 셈이니, 연재를 마치고 나서, 그 동안의 실제를 정리하여 ‘이론편’을 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론편을 먼저 쓰고 실제편을 나중에 쓰는 법이지만, 개의할 것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정리되지만 않았을 뿐, 제가 느끼기에, 여러 가지의 비평 원칙이 정 박사님의 머리 안에 마련되어 있음에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설교 비평 이론이 설교자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못할지 모릅니다만, 그것을 배우고 나면, 설교를 준비하면서 스스로를 자평해 볼 능력을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목회자의 설교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는 한국 교회 상황에서, 설교자들이 자신의 설교를 스스로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면, 그 일을 다른 누가 해 줄 수 있겠습니까?

3.

   제 설교에 대해 칭찬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지나치게 평가된 점은 ‘앞으로 그렇게 하라’는 기대로 알고 그냥 수용하겠습니다. 다만, 제 설교의 한계점으로 지적된 세 가지 문제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것은 결코 반론이나 반박이 아닙니다. 이 응답을 쓴 것도 그런 의도에서 쓴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좀 더 흥미롭게 이 문제를 고려해 볼 기회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첫째, 정 박사께서는 저의 영성이 실존적이며 다분히 현재적 종말론으로 치우쳤다고 지적하셨습니다(152쪽 이하).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식은땀이 났습니다. 그것이 큰 잘못이어서가 아니라, 저의 신학과 영성의 특징을 정확하게 짚어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실존주의에 가깝고,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합니다. 제가 이렇게 방향 지어진 것은 제가 거쳐 온 정신적 이력 때문이기도 하고, 저의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기도 하며, 제가 영향 받은 사람들의 경향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성찰 때문이기도 하며, 제가 믿는바 건강한 성서적 신앙에 대한 소신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저는 실존주의적인 문학가와 철학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실존주의 작가들의 글을 좋아했다고 해야 옳을까요? 또한 저는 저 개인의 삶의 문제에 관련성이 없으면 별로 관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저의 한계이지만, 저는 그 경향성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저는 또한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영성이 너무 지나치게 내세적이고 타계적이라는 점에 대해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과정에서 저는 신약성서를 연구하면서 실현된 종말론이 예수님과 바울 사도에게 공통적인 신학적 특징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이론이 있을 수 있지만, 제가 알기로 그것이 신약학계 안에 형성된 다수 의견입니다. 또한 제가 서 있는 웨슬리 전통도 역시 같은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구원의 세 시제, 즉 과거의 십자가 사건, 미래의 영원한 영화, 그리고 현재의 성화 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성화 과정이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글쎄요, 제가 실존주의적 영성과 현재적 종말론을 선택했는지, 아니면 저의 학업 과정과 영적 성숙 과정에서 제가 선택 당한 것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스탠리 존스의 자서전 <순례자의 노래>를 감명 깊게 읽었는데, 그는 현재적 종말론을 의식적으로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의식적으로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적은 없지만, 스탠리 존스의 입장을 읽으며, 얼마나 공감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 일부를 옮겨 적으면 이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금 존재하는 분, 곧 ‘이 예수’를 강조한다. ‘이 예수’는 살아계시고, 지금도 유효하고, 지금도 활동하고 계시며, 우리 안에서 존재 이유로 살고 계시며,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사용하고 계신다. 그분은 역사 속에 존재하신 ‘저 예수’도 아니고, 장차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실 ‘저 예수’도 아니다. 그분은 ‘이 예수’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게 하시는 분도 아니고, 미래를 바라보게 하시는 분도 아니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바라보게 하시고, 자신이 지금 개인과 사회의 구원자이심을 입증하신다(203쪽).

   이러한 입장에 근거하여, 그는 인도 선교사로서 ‘저 예수’가 아니라 ‘이 예수’를 전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저는 이 선택이 옳다고 생각하며,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이런 입장에 서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다만, 정 박사께서 우려하신 것처럼, 현재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역사가 무시되거나, 하나님의 초월적인 나라에 대한 비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설교자로서의 저의 관심이 너무 지나치게 개인적인 차원, 내면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지나친 치우침이 없다면, 크게 우려할 것은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4.

   정 박사께서 지적한 두 번째 문제는 교회력을 무시한다는 점입니다(153쪽 이하). 이 점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와싱톤한인교회에 부임하기 전까지 저도 가능한 대로 교회력을 따라 설교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성서의 책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교하는 것도 한 번쯤 시도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고, 전임자가 중도에 끝낸 요한복음 연속 설교를 지속해 나가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후임 목사가 전임 목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를 애쓰는 경향이 한국 교회에 강하니, 전임자의 그림자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해 보기로 했습니다. 또한, 설교자로서 요한복음을 붙들고 씨름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정 박사님의 말씀대로 이것은 저의 신학에서 나온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53쪽).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히 교회력이 무시되는 경우를 피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이 점에 대해 몇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우선, 교회력 상의 중요한 주일에는, 필요할 경우, 저는 잠시 연속 설교를 멈추고 교회력을 따라 설교를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 주일 설교하기로 되어 있는 그 본문이 교회력과 일치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매일의 경건 시간에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도 그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순서에 따라 읽게 되어 있는 성경 본문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응답이 되는 경험 말입니다. 그런 경험을, 연속 설교를 하면서도 자주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자가 교회력에 대해 민감하기만 하면, 연속설교를 하면서도 교회력을 따라가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력의 메시지는 설교만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강단 장식, 찬송가 선택, 성도의 교제 등을 통해 교회력의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정 박사께서 지적한 세 번째 문제는 예화의 문제입니다(154쪽 이하). 제가 설교에서 사용하는 예화들이 다른 설교자들의 예화처럼 진부하고 선정적이고 일반화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제가 사용하는 예화들이 너무 길고 너무 감동적이어서 성서의 본문이 압도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셨습니다. 그 염려에 대해서는 저도 동감입니다. 오래 전입니다만,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마친 다음, 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데, 그 중 한 분이 제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제가 사용한 예화를 거론하는 거였습니다. 그분은 제 설교에서 그 예화만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 때, ‘아, 예화가 너무 강하면 설교에 방해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특히, 유머러스한 예화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일수록 사람들은 그것만을 기억할 가능성이 크고, 그렇게 되면 설교의 메시지는 잊혀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두 가지 점을 덧붙이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첫째, 저는 예화를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성서 본문이 이야기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다른 예화를 사용할 여유가 없습니다. 정확하게 계산해 보지는 않았으나, 다섯 번에 한 번 정도로 예화를 사용할 것입니다. 하나의 주제를 깊이 파고 들어가는 식으로 설교하다 보니, 예화가 따로 필요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감동적인 스토리를 사용하는 경우는 대개 설교의 주제를 논리적으로만 이끌어 가기에 벅찬 경우입니다. 잘 못하면 소화 불량에 걸릴 것 같은 상황이 되면, 이야기를 사용하여 소화하기에 용이하도록 만듭니다. 혹은, 설교를 준비하는 중에 본문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이야기가 생각이 나면, 그 때 사용합니다.
   둘째, 저는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에게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드러내는 이야기들을 선택하려고 애씁니다. 인간을 영웅화시키는 이야기나 ‘성공 시대’에 나올만한 이야기, 혹은 보통 인간의 승리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한 이야기를 주로 사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그 이야기가 성서의 본문을 압도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의 이야기도 결국은 무엇입니까?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던가요? 문제는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고 사람이 드러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강조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실종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설교 예화들이 인간의 영웅 의지를 찬양하게 만듭니까? 이런 면에서 설교자는 세심하게 배려해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5.

   이렇게 설명하고 나니, 마치 ‘내 설교에는 아무런 흠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겸연쩍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사실, 저는 제 설교 비평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 편으로는 긴장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제가 알지 못하는 약점에 대해 배울 수 있기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약간 실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다른 분의 설교에 대한 비평을 통해 ‘타산지석’으로 배운 점들이 많이 있으므로, 그것만으로도 감사의 마음이 큽니다.
   참으로 설교 사역은 신비롭고 가슴 벅찬 사역입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들은 자주 제게 묻습니다.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구요. 저는 아무 주저 없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답합니다. 매 주일, 성도들의 삶의 현장을 마음에 품고 성서 본문을 읽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오늘 하시는 말씀을 듣고, 성도들을 그 세계 안으로 인도해 들여 같은 음성을 듣도록 인도하는 것은, 때론 힘겨운 씨름이기도 하지만, 저의 영혼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력 있는 도전입니다. 뿐만 아니라, 설교를 통해 성도들의 삶에 일어나는 변화들을 목도하노라면,  이처럼 보람 있는 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설교하는 동안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저는 아무런 공로도 주장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설교하는 동안 저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있을 뿐이고, 진정한 영적 사건은 하나님과 회중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로 옳습니다. 제가 매 주일 설교를 위해 전심전력하는 것은 다만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돕기 위한 작은 노력일 뿐입니다. 제 도움이 없어도 그분은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하시겠지만, 저로서는 그분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 박사님의 수고와 헌신이 한국 교회에 큰 공헌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사상, 200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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