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중심에 대해
-안산영광성결교회 송창원 목사-

필자는 안산영광교회 송창원 목사께서(이하 ‘송 목사’) 설교하는 동영상을 시청하면서 말씀을 시원스럽게 잘 전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고 달변이라는 말은 아니다. 숙달된 조교처럼 스피치 연습을 통해서 얻어진 기술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일견 화려하기는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식상하게 마련이지만 송 목사의 스피치는 그런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뜨거운 신앙과 진솔한 삶의 토대에서 우러나오는 힘찬 설교라 할는지. 개인적으로 송 목사를 모르는 처지에서 필자가 그런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소상하게 살필 수는 없을 것 같다. 아쉽지만 대충 윤곽만 그려야겠다.
송 목사의 설교에 나타나는 외적인 행태는 세 가지 특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나는 학자풍의 면모이며, 둘째는 목회자적 영성이고, 셋째는 부흥사적 열정이다. 그는 신약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답게 설교에서 진부한 신앙 용어를 생각 없이 쏟아내지 않는다. 누에가 자기 몸에서 실을 뽑아내듯이 자신의 신앙과 삶에서 충분히 소화된 말을 한다는 뜻이다. 또한 그는 학자들이 빠지기 쉬운 신앙 언어의 관념성과 공소(空疎)성을 극복했다. 이것은 곧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에 뿌리를 둔 목회자적 영성에서 나오는 능력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청중들의 심령을 강하게 뒤흔드는 부흥사적 카리스마를 통해서 설교의 역동성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이렇듯 신학, 영성, 열정이 그의 설교행태에 녹아듦으로써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송 목사만의 고유한 설교 경지를 이뤄낸 것 같다.
신학, 영성, 열정을 한 설교자가 모두 담아내기는 쉽지 않다. 신학이 깊은 설교자는 영성이 부족하고, 목회자적 영성이 풍부한 설교자는 신학적 깊이에서 문제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신앙적 열정과 더불어 신학과 영성을 두루두루 갖추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송 목사에게서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모자람이나 치우침 없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가 신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좋은 목회자, 신학자, 부흥사를 꿈꾸었다고 하는데, 그런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진 것일까? 어쨌든지 앞으로 그의 설교는 연륜과 더불어 훨씬 강력한 대중적인 호소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어쩌면 그렇게 멀지 않은 기간 안에 우리는 성결 교단을 뛰어넘어 인정받을 수 있는 설교 명망가 한 분을 배출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송 목사의 설교전달 능력은 필자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며, 또한 그런 것은 필자의 전문 분야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으로 접고, 이제 설교의 내용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내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설교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그가 성서텍스트에 충실하려는 흔적을 보인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에 의한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가 성서 텍스트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해당되는 각각의 설교를 한편씩 예로 들겠다.

성서의 깊이로!
“자기의 것 자랑”이라는 제목의 설교는 갈 6:1-5절을 본문으로 한다. 바울 서신을 전공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서가 어렵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으로 송 목사는 설교의 문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2절 말씀과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니라.”는 5절의 말씀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인다. 또한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라는 4절 말씀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송 목사는 이런 난해구절을 만났을 때 그것을 헤쳐 나가는 길을 이렇게 제시했다. 이런 제안은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아, 약간 긴 대목이지만 그대로 인용하겠다.

무엇보다도 기도하고 많이 읽어야 합니다.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후문맥을 잘 참조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어의 뜻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종 저는 성경 원어인 헬라어나 히브리어의 원뜻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그 원어의 뜻이 성경말씀의 의미를 더 분명히 드러내 주는 경우일 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많이 읽었습니다. 저 자신에게도 그 의미가 확연하게 잘 들어오지 않아서 읽고 또 읽고 충분히 읽었습니다. 그 후에 원어의 뜻을 더 깊이 묵상해 보고, 여러 주석도 참조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또 읽고 읽고 또 읽고 묵상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깨달아지고 은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 속의 은혜를 사모하는 가운데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해서, 말씀이 열려지고, 그 말씀 속에서 자신에게 주시는 주님의 깊은 은혜를 받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평체로 된 원고를 경어체로 바꾸었음, 필자 주)

이 뒤로 송 목사는 2절과 5절에 나오는 ‘짐’으로 번역된 헬라어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2절의 짐은 ‘baros’인데(마 20:12; 행 15; 고후 4:17; 살전 2:6; 계 2:24) 혼자 감당하기 힘든 짐을 가리킨다. 5절의 짐은 ‘fortion'인데,(마 11:30; 마 23:4; 눅 11:46) 그것은 단순히 어떤 짐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자기가 할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2절과 5절은 서로 모순되는 문장이 아니다.
이어서 그는 4절 말씀을 설명했다. “살피라”는 dokimazo의 번역인데, 이 헬라어는 “신중히 여러모로 테스트하고 검증하는 것”을 뜻한다. 헬라어에는 ‘자랑’이라는 단어가 두 개다. 부정적으로는 alazoneia가, 긍정적으로는 kauchema가 사용된다. 물론 본문에 사용된 헬라어는 후자이다. 송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4절은 각 사람이 그 자신의 일을 잘 살펴보고, 경험을 통해 테스트하고 검증해 본 다음에, 자랑이 그 자신에게만 있지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갈라디아서의 원어를 전문가답게 풀어낸 다음에 송 목사는 여기서 신앙적인 의미를 찾아낸 후 삶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막무가내로 신자들을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성서텍스트에 근거해서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가는 방식의 설교는 설득력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가 신자들의 삶에 적용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자기 자랑’의 문제이다. 그는 남에게서 자랑을 발견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에게서 찾으라고 권고한다.

자기 것을 자랑해야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과 가진 일에 만족하고 감사해야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내 것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내 것을 감사하고 자랑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어떤 것인가요? 본문에 따르면 자신의 일, 즉 맡겨진 일, 직분, 또는 직업 등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모든 것들을 자랑할 수 있어야합니다. 내 직분, 내가 하는 일, 내 가족,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이들, 내 집, 이 모든 것들을 자랑해야합니다. 남의 것 보고 부러워하고, 불만족해 하지 말고 내 것에 자부심 갖고 감사하고 자랑해야합니다.

그 뒤로 송 목사는 행복에 관한 심리학자 미할리 칙스젠트미할리 씨의 연구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행복은 삶의 조건에 상관없이 주어지며, 따라서 자기 내면에서 그걸 찾아야 한다고 전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내게 맡겨 주신 직분을 잘 감당합시다. 최선을 다합시다. 기쁨으로 감당합시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 모든 일들에 감사하고, 감당해야 할 일들에 자원함으로 최선을 다해 행복을 낳는 가정, 행복을 낳는 교회 만드시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외쳤다. 필자가 보기에 이렇게 성서텍스트의 깊이에 충실한 설교는 당장 열광적인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말씀 자체가 청중들의 영혼에서 활동함으로써 참된 의미에서 그들을 살릴 것이다.

성서읽기의 새로운 시각
“다음에 보다 어리석은 생각은 없습니다.”라는 설교는 사도행전 17:32-34절을 본문으로 한다. 이 설교는 아덴에서 행한 바울의 복음 선포에 대해서, 특히 부활에 관한 설교에 대해서 청중들이 보인 세 가지 반응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송 목사는 바울의 설교를 냉소적으로 대한 사람들과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 사이에 중간자적 입장을 보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런데 잘 보면 이 양 극단이 아닌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2절 중반을 보시기 바랍니다.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그렇게 나쁜 발언은 아닙니다. ‘다시 듣겠다,’ ‘다음에 다시 한 번 들어봅시다,’ ‘제가 아직까진 모르겠는데 다음에 들어봅시다.’ 이렇게 유예를 했습니다. 결단을 미루었습니다. 언뜻 볼 때에 이 반응은 그렇게 나쁜 반응이 아닙니다. 기롱한 사람, 비웃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한 다음에  돌로 쳐 죽이려 하며  박해하고 핍박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중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송 목사에 따르면 바울의 설교를 다시 듣고 싶어 한 사람들 중에는 말씀을 사모한 이들이 없지 않았겠지만 바울이 아덴을 떠나는 바람에 그들은 말씀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다음에’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에서 설교자들은 바울의 복음 선포를 극한적으로 반대한 사람이나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기 마련인데, 그는 약간 비틀기 식으로 본문에 접근하고 있다. 송 목사에 따르면 ‘다음에’ 해도 될 일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해야 하는데, ‘다음에’ 해도 될 일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먹는 문제이다.

그러나 보세요, 먹는 거 한 끼 안 먹어도 됩니다. 제가 작년에 40일 금식기도를 했지만 40일을 안 먹어도 삽니다. 사람이 40일을 안 먹어도 되요. 지금 안 먹고 다음에 먹으면 되요. 그런데 어떤 때 보면 사람들이 먹는데 목을 맵니다. 그래서 안 먹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먹는 거 다음에 해도 되요.

그뿐만 아니라 잠도 그렇고 청소도 역시 그렇다.  몸을 씻는 일도 대충 해도 된다. 시장 보는 일도 그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다. 송 목사에 의하면 그런 것들은 절대적인 게 아니다. ‘다음에’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이에 반해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되는 게 있다. 군인들의 경계근무 같은 것들이 그렇다. 건강을 돌보는 일도 뒤로 미루면 안 된다. “건강은 있을 때 잘 돌봐야 됩니다.” 송 목사는 위암 수술을 받은 이웃교회 이 아무개 목사에 관한 이야기와 고등학교 2학년 딸이 우울증에 걸린 아무개 여 전도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건강관리를 뒤로 미루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송 목사가 정작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목은 영혼의 건강이다.

여러분, 몸과 건강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고, 다음으로 미뤄서는 안 되는데,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에 대한 관심, 영혼을 돌보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라고 절대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일에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송 목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CCC 집회에 참석했다가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자신이 그 친구의 권유를 ‘다음에’라고 미루지 않은 것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복음을 선포하고 청중들의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할 전도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즉시 따르지 않아 벌어진 불상사를 그는 집회 중에 결단의 초청을 뒤로 미루었다가 결국 화재로 그 집회를 진행할 수 없게 된 무디 목사의 예에서 찾았다. 결론적으로 송 목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은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필자는 위에서 송 목사의 설교 구성에 나타나는 두 가지 특징을 설교 두 편을 예로 들어 확인했다. 다른 설교도 대체적으로 이런 구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성서텍스트 자체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이 놓치기 쉬운 새로운 시각이 그의 설교 전체를 끌어가는 동력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설교를 다른 이들의 설교와 구별해낼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고, 앞으로 그의 설교가 무한히 발전될 수 있는 토대이기도 하다.

바디매오의 부르짖음
대중 설득력과 탄탄한 구성력으로 전개되는 송 목사의 설교에 매료되면서도 필자는 무언가 아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이 아쉬움은 단순히 입장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설교의 중심에 연관된 것인지 모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송 목사의 설교가 하나님보다는 청중들에게 쏠려 있다는 사실이 필자의 입장에서 조금 꺼림칙하다. 이는 곧 그가 현대 설교학의 전반적인 경향이라 할 수요자 중심의 설교 패턴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청중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교리를 일방적으로 선포하던 과거의 권위주의적 설교로부터 눈높이를 완전히 청중들에게 맞추어야 한다는 수요자 중심의 설교 패턴은 소위 ‘강해설교’라는 트렌드로 한국교회에 자리를 잡았다. 수요자 중심의 설교와 강해설교는 약간 다른 관점이지만 큰 틀에서 볼 때 비슷한 범주로 놓아도 된다.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 되겠다. 이러한 입장을 보이는 이들은 성서텍스트와 동떨어진 교리설교로부터 성서와 밀착된 강해설교로, 그리고 설교자의 일방적인 독백(모노로그)에 불과한 연역적 설교로부터 청중들과의 대화(다이얼로그)에 초점을 둔 귀납적 설교로 나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문제 제기와 대안제시에 대해서 필자 역시 기본적으로는 동의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현대 설교학에서 주장하는 이런 일련의 요청들이 극단화하면 설교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허물어뜨릴 위험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런 요청들은 말씀의 존재론이 아니라 말씀의 실용론에 중심을 둔 것들이기 때문이다. 성서와 기독교 신앙이 도구적 실용주의는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그런 실용주의적 세태를 꿰뚫고 하나님의 존재론적 통치에 용맹 정진하는 영성이 아닌가. 이 자리에서 필자가 잘 알지도 못하는 설교의 이론적 담론에 대해 왈가왈부하려는 게 아니다. 송 목사의 설교에서도 청중 중심적 경향이 매우 노골적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이 필자의 입장에서 조금 염려스러워 한 마디 했을 뿐이다. 이렇게 묻고 싶다. 그는 왜 성서텍스트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 그의 나라, 그의 통치, 그의 생명, 계시, 종말, 그리고 그의 신비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는 반면에 청중들을 향한 신앙적 계몽, 위로, 격려에 대해서만 말이 많을까?
“바디매오가 됩시다.”라는 설교는 시각장애인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부르짖어 결국 장애를 치유 받고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는 사건을(막 10:46-52) 본문으로 한다. 송 목사는 이 본문의 상황을 아주 사실적으로 끌어나갔다. 그는 분명히 성서텍스트에 밀착 접근하는 설교자다. 송 목사는 여기서 소리치는 바디매오와 그를 침묵하게 만드는 무리들을 비교한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많은 무리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고 고침을 받은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 바디매오도 예수님께 부르짖어 고침을 받았다.

여기 바디매오도 예수님을 그냥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도 없었기에 예수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꾸짖음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목이 터져라 불러댔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래서 예수님의 시선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고치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바디매오에 관해서 설명했다. 바디매오는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시각장애인이고, 가난했다. 생존의 위기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는 부르짖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그냥 보내고 말았지만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던 바디매오만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송 목사는 우리도 바디매오처럼 약점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주님께 부르짖으라고 외쳤다. 딸이 죽게 된 어떤 가나안 여인,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얍복강을 앞에 둔 야곱 같은 이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응답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예수님을 부르십시오. 예수님을 구하십시오. 내가 바디매오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되어야 합니다. 바디매오처럼 구하십시오. 간절히 주님을 구하십시오. 바디매오가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았던 것처럼 신경 쓰지 말고 구하십시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는 당신 바디매오를 예수님께서는 만나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그는 매우 은혜로운 설교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은혜롭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설교는 아니다. 이렇게 질문하자. 마가복음 기자는 이 대목에서 우리도 바디매오처럼 부르짖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것일까? 필자의 생각에 복음서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사건이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밖에 없었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바디매오를 고치셨는가? 바로 이 사실에 설교의 중심을 두어야 하는 게 아닐는지. 부르짖는 바디매오의 역할에도 관심을 기울여야하겠지만 송 목사처럼 그의 부르짖음에 초점을 맞추는 설교는 성서텍스트의 변죽을 울리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가 부르짖는다고 해서 모든 일들이 그렇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부르짖지 않은 시각장애인을 고치신 일도 있다.(요 9:1 이하)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하나님을 부르짖는 신앙적 태도가 무의미하다는 게 결코 아니다. 필자는 이 사건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에서 바디매오보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 싶다는 말이다. 그런데 송 목사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그렇게 부르짖는 사람을 만나시고 고쳐주시는 분 정도로만 머물러 있을 뿐이지 그 사건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고 고치시고 구원하시는 사건에 대한 진술인 성서에서 사람의 태도만을 클로즈업 시킨다는 건 성서읽기에서 무언가 혼란이 개입된 것 같아 보인다. 송 목사의 다른 설교도 전반적으로는 이런 구도로 전개되었다. 한편의 설교를 더 확인하자.

요셉의 꿈과 하나님의 통치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모두가 보았습니다.”(창 37장)라는 설교에서 송 목사는 요셉의 꿈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꿈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설교 앞부분에서 요셉을 둘러싼 야곱 가족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형들은 요셉을 살해할 음모를 꾸민 다음 이렇게 말한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요셉의 형제들이 음모를 꾸몄지만 우여곡절을 통해서 요셉의 꿈은 이루어졌다. 송 목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그 비전은 어떠한 방해의 세력에 의해서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은 꼭 이루어집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송 목사는 이런 꿈의 성취가 성서 전체의 맥락이라는 사실을 변호하기 위해서 여러 예를 들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구약성서의 메시아 예언인 예수의 오심과 공생애와 십자가, 다윗, 솔로몬, 바울 등등이 열거된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때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내일, 아니 오늘이 그 꿈이 이루어질 때일 수 있습니다. 그 꿈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일진대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를 확신하고 흔들리지 말고,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그 꿈에 합당한 자로 살고, 그 꿈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십시오. 그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지를 모두가 보게 될 것입니다!

필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방식의 설교 앞에서 조금 당혹스럽다. 그런 명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설교는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인지를 해명하고 설득하고, 그쪽으로 초청하는 것이지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거나 “나는 할 수 있다.”는 구호와 선전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라고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이런 방식의 설교는 “불가능은 없다.”는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심리학적 자기신념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기독교 신앙은 자신의 꿈을 축소시키고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뜻을 실현하시는지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아닌가.
이 기회에 한 마디 하자. 필자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무슨 생각으로 “요셉의 꿈”을 과대 포장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설령 곡식 단, 해, 달, 별이 자신에게 절을 한다는 꿈 이야기가 특별한 신탁(神託) 사건이었다 하더라도, 우리도 그런 꿈을 꿔야 한다고 외치는 설교는 성서와 신학의 심층적인 영성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진 것이다. 요셉의 꿈은 없다. 아니 그런 꿈은 없어야 한다. 요셉의 꿈 전승은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야훼 하나님이 신실하다는 사실을 변증하는 통로일 뿐이다. 그 꿈은 요셉이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전제에서만 소극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이다. 만약 그가 국무총리가 되지 못했다면, 야훼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들을 지키셨을 것이다. 설교자는 이 본문에서 요셉의 꿈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요셉도 흠이 좀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집트 이방 종교 제사장의 사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풍년과 흉년 시절에 매점매석을 통해서 이집트의 자유농을 농노로 만들었고, 그런 방식으로 일인지하만인지상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필자가 요셉 전승을 딴죽걸기 식으로 표현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까닭이다. 성서기자의 주된 관심은 사람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 활동이다.

영성, 기술인가 도인가?
필자의 주장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에게 아무래도 보충 설명을 드려야겠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활동에 중심을 둔다는 것은 곧 설교자가 온전히 창조와 생명의 영인 성령에게 의존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바람과 어원이 같은 히브리어 루아흐와 헬라어 프뉴마의 번역인 성령은 곧 우리의 프로그램이나 노력, 또는 업적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의 뜻대로 활동하는 힘, 즉 전적으로 자유로우신 영이다. 이런 영만이 청중들의 영혼과 영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반면에 설교자는 영과 청중과의 사이에서 무능력하다. 설교자는 질그릇이 그것을 만든 주인의 뜻을 모르듯이 영의 뜻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청중들의 영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잘 모른다. 기껏해야 피상적으로만 알뿐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이 세상을 유지하며 종말론적으로 완성하실 성령만이 그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영혼을 책임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설교자들은 야훼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성서기자들의 진술인 성서텍스트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일에 만족해야 한다. 말하자면 청중들로 하여금 성령이 영혼의 문을 두드릴 때 열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뿐이라는 뜻이다. 사실 이것마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과중하며, 따라서 두렵다.
비유적으로, 성서는 바둑의 기보다. 기보 안에 많은 바둑의 길이 숨어 있듯이 성서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가 숨어 있다. 바둑을 아는 사람은 기보에서 그 수를 찾으려고 노력하듯이, 기독교 신앙(신학)을 아는 사람은 성서에서 그 길을 찾아 나선다. 좋은 바둑 해설가는 청중들을 바둑의 잔기술이나 요령이 아니라 바둑의 길로 끌어들이듯이, 좋은 설교자는 신자들을 신앙 기술이나 규범이 아니라 그것 너머에 있는 영적인 현실인 하나님의 나라와 도(道) 안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그 안에서 청중들은 고유한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
송 목사는 도를 몸으로 익힌 분이다. 합기도와 검도 7단, 유도 2단이라고 한다. 영의 세계도 기술이 아니라 도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으리라. 필자는 송 목사의 설교에서 그 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설교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한 14:6)
<활천 2007년 5월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