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운 사람
-신학비평사 송기득 교수-

목원대학교 조직신학교수로 재직하다 1999년에 은퇴하고 현재 <신학비평> 주간으로 활동하시는 송기득 교수(이하 ‘송 교수’)는 금년 여름에 신앙평전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함께>를 출판했다. 이 평전에는 해방되던 해에 초등학교 5학년으로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된 일들부터 시작해서 1980년에 폐결핵 환자 요양소인 한산촌을 떠나게 되는 삶의 여정이 마치 거칠게 흘러내리는 계곡물줄기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그는 1965년부터 1980년까지, 말하자면 인생의 황금기인 서른세 살부터 마흔여덟 살까지 한산촌 건립과 운영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았다. 타의에 의해 한산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토로한다.

내가 요양소 한산촌을 차리면서 기대했던 것은 ‘사람’이었다. 나는 한산촌의 삶에서 ‘사람’을 남기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을 남기기는커녕 도리어 얻었던 ‘사람’마저 잃었다. <중략> 나는 세상에서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버림을 당했다. 그것은 내게 잔혹한 배신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버림과 배신을 하늘의 버림과 배신으로 여겼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욱 사람과 하늘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않았다. <중략> 그때 나는 “하느님, 하느님, 어째서 나를 버렸습니까?”하고 물을 수도 없었다. 나는 예수처럼 하느님과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한산촌에서 ‘하느님 없이’ 살았다. 그러나 반드시 그랬을까? 하느님 없이 살았던 게 사실이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송기득, 나의 신앙평전 1권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함께>, 신학비평사, 2006년, 478 쪽. 이하 ‘하느님’)

하루 종일 한눈팔지 않고 이 신앙평전을 읽은 나는 그를 휘몰아친 숙명과 그의 저항이 너무 절절하여 마지막 쪽을 덮는 순간 잠시 지금 여기가 어딘가, 하는 멍한 상태에 빠졌다. 설교비평이라는 글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면 송 교수의 삶을 자세하게 따라가는 일은 그만 두는 게 좋겠다. 그러나 송 교수는 목사가 아니면서도 제법 많은 설교를 했고, 1989년에는 그것을 버젓이 설교집으로까지 묶어냈으며, 지금도 간혹 설교를 하고 있으니 그 사연은 우리가 들어야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질문은 이렇다. 뒤늦게 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요, 설교자로 살았던 송기득은 왜 목사가 되지 않았나?

좌절된 목사의 꿈
1933년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에서 태어난 송기득은 이미 중학생 시절부터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창 철이 없어야 했던 그 나이에 그는 목사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좋은 조건으로 다니던 5년제 여수수산중학교에서 인문계인 순천의 매산중학교로 전학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매산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송기득은 거의 전도사 못지않은 열정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입학한 해에 육이오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간 송기득은 인민군들이 교회당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에 설교하는 일도 있었다.
고2 때 송기득은 학생신분으로 교장의 불법적 행위를 목도하고 학생들을 선동(?)하여 맞서 싸웠다. 그는 불의를 보고 넘어가거나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못하는 청소년이었다. 공부는 잘했고, 통솔력은 뛰어났지만 가난한 집 학생이 학교 권력과 싸운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그는 다른 친구 몇 명과 함께 무기정학을 당했지만, 여론에 못 이긴 교장이 학년말 시험 직전에 그를 복학시킨 덕분에 가까스로 유급을 면할 수 있었다. 결국 그가 목표로 했던 교장 추방에는 성공했지만, 그 교장은 친척인 국회부의장의 ‘빽’으로 오히려 큰 학교의 교장으로 영전되었다고 한다. 그는 왜 그렇게 무모한 투쟁에 자기의 삶을 던진 것일까? 생존 자체가 급급하던 어린 시절에 말이다.

왜 나는 고 2 때 그처럼 ‘무서운 놈’으로 극성이었을까? 내게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그것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느님 44)

그에게 불의와의 투쟁은 바로 신앙의 문제였다. 중2 때 이미 “나는 셋째”라는 손양원 목사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첫째로는 하느님을 위해서, 둘째로는 이웃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했고, 책상머리에 “나는 셋째”라는 표어를 써 붙이기까지 했으니 그의 신앙 열정을 알만 하다. 고3이 된 그는 주로 기독학생회 연합활동에 주력했다. 매산기독학생회 회장이면서 동시에 순천지역 기독학생연합회 회장을 겸하고 있던 송기득은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김형모 교장, 또는 황성수 선생을 강사로 모시고 연합집회를 주최했으며, 주말이 되면 학교 밴드 부를 데리고 다니면서 역전과 장터에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시오!” 하고 외쳐댔다. 송기득의 고등학교 학창 시절은 이렇게 목사가 되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가겠다는 생각으로 고3 가을 학기를 맞은 송기득은 보이열 선교사와의 상담을 거쳐 연희(지금의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갔다. 무식한 목사가 되지 않아야겠다는 본인의 생각과 미국에서는 일반대학을 거쳐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보이열 선교사의 충고에 따라서 그렇게 결정했다. 그 결정도 자기 스스로 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에도 그를 도와줄 집안 식구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까지 그는 여전히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하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 그는 대학의 마지막 여름방학을 고향에서 보내면서 졸업 후에 신학교에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대학원 철학과에 진학해서 유학을 다녀온 다음에 철학교수의 길을 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 와중에 그는 몸에 이상을 느꼈고, 진단 결과 매우 심각한 폐결핵에 결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2년 가까운 병원생활에서 죽음의 문턱에 이를 정도로 큰 위기가 몇 번 있었지만 천행으로 다시 살아났으며, 그 뒤로 1년 가까운 후(後)요양까지 대략 3년에 이르는 투병생활을 버텨냈다.

한산촌 촌장으로!
만약 순리라고 한다면 투병 이후에 그는 이제 어릴 때의 꿈이었던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입학해야만 했다. 6학기 동안 철학과 수석을 연이어 할 정도로 학문적인 깊이가 있었으며, 3년 동안의 투병생활을 거쳤다면 이제 그에게 남아있는 길은 바로 그 길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하고 낭만적인 신앙과 대학생 시절의 지적 훈련과 죽음을 담보한 투병의 경험은 그를 지성과 영성에서 아주 탁월한 종교 지도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만으로 스물다섯 살을 갓 넘은 송기득에게는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정석해 교수와 김하태 교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모교인 연희대학교 철학과 전임조교로(1958년 4월)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쪽으로 잘 풀리기만 한다면 연희대학교 철학과 교수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목사의 꿈을 완전히 접고 만 것일까?
전임조교 다섯 학기 째 송기득은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지원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길도 막혔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면접을 보고 합격을 확인한 후 곧장 도서관에 들려 틸리히와 바르트의 책을 찾아보았지만 한권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학문을 향한 그의 열정을 실망시켰다. 둘째, 거의 반나절에 이르는 신촌에서 광나루까지의 통학 거리가 그를 질리게 했다. 결국 장로회신학대학교 입학을 포기한 송기득은 4.19와 5.16의 혼란기에 전임조교 자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행이 바로 신학을 해야 한다는 하늘의 뜻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청년 송기득은 비교적 개방적인 한국신학대학교를 찾았다. “선생님, 제가 신학을 할 수 있을지 어떨지를 알기 위해서 대학원에 연구생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하는 송기득의 물음에 김재준 학장은 정식으로 입학할 것을 권했지만, 송기득은 자기 고집대로 연구생으로 등록했다. 본격적으로 신학을 하기 전에 신학이 공부할만한 학문인지, 또는 자신에게 그런 열정과 마음이 남아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한 학기 만에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1962년 봄학기에 결국 연희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대학원장의 도움으로 풀브라이트 장학금과 언더우드 장학금을 받아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그는 신학과 목사의 길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대학원 졸업 후 전임조교로 활동했던 본교에 자리를 알아보고 있던 그에게 몇 년 전 자신의 결핵 치료에 도움을 준 의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결핵환자들의 요양시설을 짓고 운영하고 싶은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조금 기다리기만 하면 가능성이 높았던 대학교수의 길을 포기하고 결핵환자들에게 자기의 미래를 맡기기로 했다. 당장 식구들과 먹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 문제와, 대학교수로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송기득의 질문에 “밥은 먹여주지 않아?” 하는 선배 교수의 대답을 핑계 삼아 1965년 3월 서른 세 살의 송기득은 목포로 내려갔다. 거기서 그는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결핵환자 요양소인 한산촌 촌장으로 열다섯 해를 살았다. 그 끝은 위 글머리에 인용한대로 참담한 실패였다. 한산촌 운영은 기금의 이자만으로도 많은 환자들을 무료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가 말하는 실패는 사람을 남기는 일이었다. 가장 가깝게 지냈던 분으로부터 받은 인간적인 배신감은 그를 심부전에 걸리게 할 정도로 심각했다. 다시 한 번 더 그는 목사의 길로부터, 그리고 전통적인 신앙의 길로부터 멀찍이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그에게 목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주어졌다고 한다. 한번은 그를 한산촌으로 끌어들인, 공식적으로 한산촌 원장인 여성숙 의사를 통해서 알게 된 안병무 박사와 가까이 지내게 된 뒤에 안 박사가 교장으로 있던 중앙신학교 학생으로 등록한 사건이었다. 교수들은 강의를 직접 듣지 않고 대신 논문으로 학점을 받을 수 있도록 송기득을 특별 대우해 주었다. 그렇게 그는 세 학기를 마쳤다. 목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변칙으로 학점을 딴다는 것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목사가 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결국 중도에서 포기했다. 깐깐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래서 목사는 되기 싫었지만 신학은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지 여러 해 뒤에 내 생애에 목사가 되려는 또 한 번의 시도를 하게 된다. 끝내 좌절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아마도 내가 목사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에 없었던 것이리라. 아니 하느님께서는 나 같은 사람을 ‘목사’로서 쓸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리라. 훗날 때가 오면 그 까닭은 여쭙고 싶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실까? 자못 기대가 되지만, 내가 지금 목사가 되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을 아신다면, 그것은 나의 실패로 보실까, 아니면 하느님 자신의 실패로 보실까?(하느님 421)

평자는 송 교수가 목사가 되기 위한 네 번째의 시도에 얽힌 사연이나 한산촌에서의 좌절 이후 목원대학교 신학교수가 된 사연을 모른다. 다만 그가 한산촌을 떠난 다음에 서울에서 안병무 박사와 함께 활동했으며, 5년가량 몇몇 신학대학교에 출강하다가 1985년에 정식으로 목원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것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신학교수 활동을 하면서 <인간 - 그리스도교 인간관에 대한 인간학적 해석>을 비롯해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평자가 지금도 필요할 때마다 들여다보기 위해 책상머리에 놓아둔 <파울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와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를 비롯해서 여러 권의 책을 번역했다. 15년 동안 한산촌에 쏟았던 정열을 그는 다시 15년 가까이 목원신학대학교에 쏟은 셈이다. 그의 신학은 현학적 사유가 아니라 사람의 삶이 용해된 행위이다.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며,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은퇴 후 지금도 그는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계간지 <신학비평>을 6년 동안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발행하고 있으며,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신학강연과 설교를 한다.
도대체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힘은, 혹은 운명은 무엇인가? 그는 무엇을 위해 한산촌에 들어갔으며, 무엇 때문에 절망했는가? 목사의 길로 줄달음치던 그는 왜 목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번번이 걷어찼는가? 아니면 무엇에 걷어차였는가? 신학자의 길로 들어선 그에게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은퇴한 그는 지금 자신이 추구하던 것을 잡았는가, 아니면 아직도 잡으려고 앞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 대답은 ‘사람’이다. 그는 사람 때문에 목사의 길을 외면했고, 사람 때문에 한산촌에 자기의 삶을 불살랐고, 사람 때문에 그곳에서 좌절했다. 그에게 화두는 곧 사람이다. 당연히 그에게 신-학(Theos-logos)은 곧 인간-학(Anthropos-logos)이다. 그는 목원대학교 교수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1989년에 <예수와 인간화>라는 제목으로 설교집을 출판했는데, 그의 설교도 역시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사람다움의 회복에 집중한다. 평자는 사람의 사람다움((homo humanus)을 부르짖는 그의 설교에, 말로만이 아니라 이미 삶으로 육화된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볼 생각이다. 평자가 앞에서 언급한 송 교수의 이야기는 삶으로 된 설교였다고 한다면 이제 하게 될 이야기는 언어로 된 설교인 셈이다.  

복음화와 인간화
아마 송 교수의 설교집을 읽는 사람들은 서른두 편에 이르는 그의 모든 설교가 오직 이 한 가지 주제, 즉 인간화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특이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는 거의 편집증적으로 인간을 중심에 놓고 설교하는데, 그 집중력이 놀랍다. 저건 설교가 아니라 대학의 인간학 강의야, 하고 생각할 분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송 교수는 형식으로나 내용적으로 분명히 설교를 하고 있었다. 평자가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그의 설교관이 분명하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설교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기본 되는 메시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기본 되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묶어서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명제로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저절로 다음과 같은 물음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어째서 예수는 그리스도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려는 것이 다름 아닌 설교입니다. 따라서 설교라는 것은 예수가 어째서 그리스도인가를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교훈 따위를 능가합니다.(<예수와 인간화> 현존사, 1989년, 6쪽. 이하 제목 없이 번호만 인용할 경우에 이 설교집의 쪽수를 가리킴)

송 교수는 설교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설교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가리키는(指) 것이다. 둘째, 설교는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평자가 보기에 설교의 본질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중에서 첫 관점은 송 교수를 포함한 모든 설교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둘째 관점에서는 적지 않은 차이가 난다.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송 교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해방자를 뜻한다고 볼 때, 해방의 실체는 사람을 억누르고 짓밟고 따돌리는 비인간적 현실의 극복이므로, 해방자는 일체 비인간적인 것을 극복하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 수 있게 하는 이른바 ‘인간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는 바로 이 인간화의 실현에 그의 운명을 걸고서 인간화 운동을 펴다가 죽임을 당한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비로소 그리스도가 되었고, 또 그렇게 고백되어옵니다.(6)

일반적으로 많은 설교자들은 설교의 중심을 소위 복음화로 보는데 반해서 송 교수는 인간화로 본다. 복음화와 인간화 문제는 1960-80년대에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세계교회에서도 매우 중요한 선교신학적인 주제였다. WCC 2차 총회(1954년 에반스톤)를 거쳐 3차 총회(1961년 뉴델리)에서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가 중요한 신학적 의제로 제시된 이후로 세계교회는 민주화와 인간화를, 특히 제삼세계 민중들의 정치 경제적 해방을 중요한 선교정책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서 교회는 양진영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사회구원을 중심으로 한 인간화에, 다른 한쪽은 개인구원을 중심으로 한 복음화에 무게를 두었다. 전자는 진보진영, 소위 에큐메니칼이며, 후자는 보수진영, 소위 복음주의이다. 양 진영 안에는 훨씬 많은 갈래들이 뒤얽혀 있기 때문에, 에큐메니칼도 개인의 영성을 소중히 여기며, 복음주의도 사회구원의 요소가 없지 않기 때문에 칼로 무를 자르듯이 구별할 수는 없지만, 큰 틀로만 본다면 이런 구분이 가능하다.
한국교회에서 인간화 문제를 선교와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은 일단의 신학운동을 가리켜 민중신학이라고 한다. 민중신학은 기득권 세력에게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민중의 해방을 그리스도교 선교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안병무, 서남동, 김용복 교수가 있다. 평자가 잘 알지도 못하는 민중신학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안병무와 절친했던 송 교수가 이들과 더불어 해방신학자 제1세대라는 사실만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송 교수는 지금 이 순간까지 민중신학을 떠날 수 없다고 고백한다.

나는 나의 신학 생태로 보아 민중신학을 떠날 수가 없다. 나는 내 신학의 화두를 ‘인간화’에 두고 있는데, 인간화는 먼저 ‘민중의 인간화’이므로, 나는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는 민중신학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신학비평>,2005년 겨울호, 61 쪽)

그는 “민중신학은 살았는가, 죽었는가”라는 글에서 오늘 민중신학이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처음부터 민중신학회 회원과 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요즘 세미나 소식도 듣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그는 “민중 편에 서서 민중의 인간화운동을 벌였던 ‘역사의 예수’를 전거로 삼아, 민중신학은 아직도, 아니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한다. 가깝게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덜 가깝게는 유럽의 정치신학 및 여성신학과 연결된, 한국교회의 고유한 신학인 민중신학이 송 교수의 희망처럼 영원히 살아있을 것인지 아니면 시대적 조류로 끝나버리고 말 것인지 평자는 확언할 수 없다. 1990년대에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로 마르크스주의가 표면적으로는 급격하게 쇠락하는 것 같지만 그 정신만은 여전히 지속될 것으로 내다보는 학자들이 있는 것처럼 제2, 제3 민중신학자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민중신학의 미래도 결정되지 않겠는가. 다만 오늘의 시대상황에 한정해서 본다면 그 전망이 어둡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혹시 이 글쓰기에서 민중신학에 대한 부정확한 진술이 있다면 독자들의 질책을 바란다.  

예수의 당파성
송 교수가 보기에 예수는 인간화 운동에 몸을 던진 분이다. “예수의 민권선언의 본뜻”이라는 제목의 설교는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은 예수의 제자들로 인해서 바리새인들과 예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본문으로(막 2:23-28) 한다. 그는 본래 약자를 위해서 제정되었던 율법이 예수 당시에 오히려 약자를 억압하는 악법으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역사 비평적으로 설명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하루 품삯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안식일 법을 예수는 해체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다. 사람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송 교수에 따르면 예수의 이 선언은 가난과 굶주림이라는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전제로 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약간 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가난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복이 임한다는 예수의 가르침과 상응하는 이 선언은 곧 가난한 사람을 향한 예수의 편향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말의 내용 전체가 하느님 나라로 결집되고, 그가 벌인 운동이 곧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데로 집약되는데, 바로 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운동이 가난한 사람들을 겨냥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철저한 편향성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35)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당파적으로 지지했다는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여기에 관한 논란도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니다. 평자는 이에 연관된 논란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일 생각이 없다. 그 논의가 지나치게 첨예할 뿐만 아니라 결말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의 글쓰기에 직접 연관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만 평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설교의 중심에 자리매김하려는 송 교수의 입장을 기본적으로 지지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하고, 그 이유를 밝혀야겠다. 이를 위해서 그렇게 복잡한 성서학적 담론으로 들어갈 것까지도 없다. 송 교수가 이미 지적하고 있듯이 구약의 율법은 스스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해주기 위한 안전장치였으며, 예수의 복음에 귀를 기울인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지 않는다면 오늘의 설교자들이 무엇을 설교해야 할는지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양극화 현상에 노출된 이 시대의 설교자들에게 이런 관점은 더욱 시급하게 요청된다. 이런 요청에 명민한 영성을 집중시킬 때 우리는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많은 설교자들이 경쟁력 제고만을 최고의 가치와 규범으로 삼는 이 시대정신에 영합하는 것 같다.
훨씬 근원적인 신학적 주제가 여기에 연루된다. 그것은 창조론과 인간론이다. 우리가 성서의 하나님을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창조주라고 믿는다면 그런 창조의 질서, 또는 창조의 영성을 훼손하는 악한 질서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성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숨(루아흐)을 불어넣어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이 되게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숨은 영이며, 그 영이 곧 하나님의 존재이다. 하나님의 존재인 영을 부여받은 “사람은 곧 하나님이다.”(人乃天) 오해는 마시라. 이 말이 사람을 신격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평자는 사람(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바르트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다는 그리스도교의 기초적인 교리에도 동의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원초적 창조능력과 구원능력을 참되게 신뢰하기 때문에 바로 그 현실의 인간을, 흡사 하나님의 형상을 몽땅 도둑질당한 것 같은 그 인간을 하나님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곧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창조론은 죄론에 비해 훨씬 상위에 놓인 개념이라는 뜻이다.
이 문제는 예민하기도 하고, 창조론과 인간론에 근거해서 인간 구원을 선포해야 할 설교자들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 더 보충하겠다. 여기에는 두 가지 대립적인 명제가 놓여 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둘째,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죄로 타락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게 아니라는 말이 된다. 이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지만 각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여전히 진리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명제를 인간론이라는 하나의 도그마 안에 받아들인 이유는 인간 자체가 그렇게 모순적인 존재이기도 하며, 근본적으로 세계와 역사와 인간의 삶이 우리의 인식론적 논리를 뛰어넘는 신비라는 사실 때문이다. 인간론만이 아니라 신론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정론 문제를 보라. 인간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임한다는 사실 앞에서 하나님의 전능과 사랑은 모순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서로는 대립적이지만 각각으로는 옳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각각의 그리스도교 교리를 독단적인 규범으로 적용하지 말고 통합적으로 사유하고, 특히 해석해야만 한다. 성서와 교리에 대한 통합적인 해석 없는 설교는 곧 선동으로 변질되고 만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이 예수 당시에 생명력을 잃고 형해화한 것처럼 말이다. 평자의 생각은 이것이다. “해석 없이 설교 없다.”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편향적으로 대했다는 사실은 송 교수의 해석학이다.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라는 설교의 근본 질문을 민중사관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것의 옳고 그름은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지만, 평자가 보기에 그의 해석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이런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복음과 설교가 탈은폐의 속성을 가진 진리(알레테이아)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사람다움의 회복
송 교수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당파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이 누구인지 살피는 게 송 교수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연희대학교 철학과 김하태, 정석해, 구본명, 그리고 김하태를 통해서 소개받은 틸리히, 결핵 요양소에서 만난 유영모, 전임조교 시절 서울 와이엠씨에이에서 만났던 함석헌, 한산촌 시절부터 깊은 인간적 유대와 사상적 관계를 맺은 안병무 등이 그에게 중요한 인물들이다. 틸리히만 제외하면 모두 송 교수와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은 분들이다. 크게 구분한다면 그는 틸리히의 신학적 철학에서 궁극적 실재를 배웠으며, 유영모의 구도적 삶에서 보편적 사유와 삶의 철학을, 안병무의 민중신학에서 역사의식을 배웠다. 이런 제 사상이 어릴 적 손양원 목사의 설교에 영향을 받아서 목사의 길을 가겠다고 나섰던 송기득이라는 한 인격체에서 지평융해를 일으켜 고유한 인간화 신학으로 열매를 맺은 셈이다. 그런데 틸리히의 궁극적인 관심이나 실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이지만,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아주 강력하게 당파적이기 때문에 서로 이질적이지만 송기득에게서 일치하고 있었다. 틸리히의 궁극적인 실재가 곧 안병무의 민중 편향성, 즉 인간화라는 것이다. 이 논리는 송 교수 신학의 뿌리이다. 예수가 전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세상이다.

‘하느님의 나라’란 어떤 나라입니까? 성서에는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그때그때의 역사적인 상황에서 표현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계’입니다. 사람이 사람대접 받고 사는 세계입니다. 사람이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고 목적으로 받들어지는 세계입니다. 사람이 굶주림으로부터 해방되는 세계입니다. 사람이 할 말 좀 하고 사는 세계입니다.(276)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다음이다. 송 교수의 인간화는 거창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가리킨다. 그는 어떤 형이상학의 설계도로부터 이런 논리를 연역해내는 게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부터 귀납적으로 대답을 얻는다. 그에게 인간화는 거시담론이 아니라 오히려 미시담론인 셈이다. 복음서에 보도되고 있는 치유, 해방 사건들은 그것 자체에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그 사건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사람으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죄인 취급을 당하던 병자들을 예수가 고쳤다는 것은 그들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는 의미이다.

예수가 병자를 고친 것은 병의 고통에서 벌어나게 하기 위한 것에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병 때문에 사람취급 받지 못한 그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받게 하기 위한 데 있었습니다. 환자에게 일차적인 해방은 병을 고치는 ‘치유’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구원은 그 환자가 ‘사람’으로 대접받는 일입니다. 병의 고통은 참을 수 있지만, 병 때문에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고통은 더 괴로운 것입니다.(88)

이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천적인 인간 지향성이 바로 안병무의 민중신학과 송 교수의 민중신학을 구별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송 교수는 함께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 바로 옆에서 함께 숨을 쉬는 사람이 소중하다. 그래서 그는 비인간적인 모든 세력에게 저항한다. 표면적으로 사회복지를 내웠던지, 민주화를 내세웠든지, 아니면 경제정의를 내세웠든지 불문하고 인간다움을 상실한 세력에게 그는 저항한다. 그가 한산촌을 떠나면서 겪게 된 배신감도 역시 이런 사람다움의 상실을 목도했다는 데에 있었다.
“성전종교와 예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송 교수는 이 대목을 정확하게 짚었다. 그 설교는 악마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던 이야기를 본문(눅 4:9-12)으로 한다. 송 교수는 기득권 세력의 성전체제를 거부한 예수가 무엇을 대안으로 선택했는가, 하고 묻는다. “흔히 해방자들이 선택한 카리스마적 영웅주의를 표방했을까요?”(202) 아니다. 예수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았다. 예수 당시에 정치적 메시아로 등장하려면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지만 예수는 그런 방식으로 영웅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예수는 카리스마적 영웅주의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카리스마적 메시아니즘을 거부한 까닭 가운데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카리스마적 영웅주의 대신에, 바로 그것 때문에 빚어지는 비인간적, 반인간적인 질곡에서 소외계층을 해방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지배 때문에 빚어지는 비인간적 현상, 바로 거기에서 피지배자의 구원을 문제시했다는 점입니다.(205)

송 교수는 정치, 종교 안에서 벌어지는 영웅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소위 양 김 씨가 민주화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실현하지 못한 것은 영웅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이들은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 설교는 1988년 2월에 행한 것인데, 그 시기는 김영삼, 김대중 양 김 씨의 분열로 인해서 1987년의 민주화 항쟁의 결과로 주어진 실재적인 민주화의 기회를 놓쳤을 때이다. 양 김 씨는 단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열화 같은 요구를 저버림으로써 군사정권을 연장시켰다. 양 김 씨의 분열이라는 그 여파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는 걸 보면 송 교수는 역사의 미래를 내다보았던 것 같다. 물론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교회에도 비인간적 영웅주의가 팽배하다는 점을 그는 지적한다. “오늘날 교회의 성직자 가운데는 섬기는 자임을 망각하고 도리어 하느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지배하려 드는 카리스마적 영웅주의에 빠진 사람이 많습니다.”(204)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영웅주의, 권위주의에 대한 송 교수의 비판은 매우 극단적이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내세울 경우에 무소유도 소유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274) 언급하는 그는 민중신학의 경직화와 공산주의의 관료화가 불러올 비인간화의 위험성을 일찌감치 내다보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교수은퇴 기념 강연에서 자신의 신학을 민중신학이 아니라 “인간화신학”이라고 말함으로써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을 놀라게 한 것일까. 어쨌든지 평자가 보기에 그는 철저하게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민중지향성과 편향성을 추구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인간다움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다. 그는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보다 사람의 사람다움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휴머니스틱 민중신학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송기득은 그런 사람의 사람다움을 성서에서, 특히 예수에게서 발견한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그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이다.

하느님의 두 아들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는 세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그런 세계를 송 교수의 설교에서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의 사람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사회체제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사회주의 체제로 운영되는 북한과 자본주의 제체로 운영되는 남한이 경쟁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매우 절실한 문제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사람다운 체제는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인가? 오늘의 시대는 순전한 사회주의나 순전한 자본주의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다원적이지만 큰 틀에서 볼 때 사회주의는 주로 분배와 정의를, 반면에 자본주의는 생산성과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다는 건 분명하다. 평자는 잘 알지도 못하는 정치 경제학이나 사회학이 아니라 송 교수의 설교에 근거해서 이 문제를 간략하게 짚겠다.
소위 포도원 주인의 비유로 일컬어지는 마 20:1-15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 “예수의 경제학”에서 송 교수는 “예수의 경제학은 분배에 그 초점이 있다.”고 규정한다. 이 분배경제학은 성서의 일관된 사상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이 비유는 아주 간단한 구조이지만 내용은 매우 심각하고 치열하다. 하루 노동이 끝난 후 포도원 주인이 노동자들에게 품삯을 지불하는 기준은 파격적이었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이나 하루해가 지는 시간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일당인 한 데나리온 씩 받았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이런 주인의 처사에 불만을 터뜨렸고, 주인은 오히려 그들을 나무랐다. 본문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행간을 통해서 볼 때 주인의 논리는 두 가지이다. 첫째, 한 시간만 노동한 사람은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일할 기회가 없어서 일하지 못한 실업자였다. 둘째,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역시 생존을 위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 포도원 주인은 투덜거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동일한 일당을 지급했다. 이 비유는 사람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아닐는지.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리라. “인간은 결코 돈 버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목적입니다.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공평한 분배, 이것이 예수의 경영학의 제일원리입니다.”(161)
정의로운 분배 위주의 경제학은 성장 동력을 훼손시켜서 결국 전체적으로 가난한 사회를 만든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으며, 그것이 어쩌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학자나 경제인이 아니라 종말론적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가나안 바알의 풍요가 아니라 공의로운 야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소유가 아니라 존재를, 경쟁력이 아니라 더불어 나누는 삶을 공동체의 토대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오늘 신학회와 노회나 총회가 이 시대의 가장 절실한 문제인 양극화를 중요한 신학적, 목회적 이슈로 제시하지 않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분들에게 불쾌할지 들릴지 모르겠지만 기왕에 나온 말이니까 그에게서 대답을 들어야겠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무엇이 사람다운 사회체제일까?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는 둘 다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인간화라는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사회주의는 하느님의 배다른 두 아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하고, 사회주의는 하느님의 이름 없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름이 문제겠습니까?(<하느님의 두 아들> 한국신학연구소, 1995, 145 쪽)

송 교수의 설교집과 평전을 읽은 평자는 약간 우울하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쏟았던 한산촌에서 사람을 잃었다. 그가 꿈꾼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세상은 오지 않았으며, 불원간에 올 것 같은 조짐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은 어긋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교와 (이복)형제인 사회주의는 가출한 탕자와 같고, 민중신학과 민중교회도 한국에서 활기를 잃은 지 오래다. 오늘의 사태가 송 교수의 책임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자는 이 글을 끝내기 전에 한 마디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마음을 쏟았던 민중으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한 것일까?    

프로메테우스의 불
송 교수에 의하면 “인간해방의 주역, 민중해방의 주체는 민중 그 자신”이다.(20) 그뿐만 아니라 “민중이 곧 메시아”다. “예수는 억압받고 소외된 민중의 대표이며 상징”이다. 그에게 “그리스도의 수난과 프로메테우스의 수난은 인간해방이라는 뜻에서 같은 차원의 것”이다.(106) 예수에게 닥친 십자가의 운명과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받아 간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이 과연 동일한 것일까? 우리는 송 교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사적 예수와 전통교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문제를 소상하게 검토해야겠지만 이 자리에서 이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신학적인 비약이 심하다는 말을 감수하고, 평자는 이렇게 정리할 수밖에 없다. 송 교수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인간과 세계를 자유하게 하고 해방하는 힘과 지혜이다. 과연 그런가? 호모에렉투스(직립인)가 발견한 불은 분명히 문명의 토대였지만 그것이 곧 자유와 해방의 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제2의 불인 핵이 무한의 에너지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지구 멸망의 씨앗인 것처럼 프로메테우스의 불도 역시 양면성이 있는 게 아닐는지.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더 정확히 말해서 문명의 에너지는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악과 사건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밝은 눈(目)처럼 못 볼 것을 봄으로써 얻게 된 자기 분열은 아닐는지. 평자의 생각에 피투적 존재인(das geworfenes Sein) 인간은 궁극적인 구원과 생명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흡사 신을 보면 죽어야 하듯이 인간이 생산해내는 것은 결국 양날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명의 완성인 구원은 그리스도교의 대림절 신앙이 말하듯이 세상 너머에서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닐는지.
평자의 생각이 송 교수와 대척점에 서는 건 아니다. 인간 삶과 구원을 설교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다만 송 교수는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인간다운 삶에 몸을 던지는 반면에 평자는 이 삶의 질적인 변형에 마음을 두고 있다. 그는 “지금 여기”서 최선의 삶을 찾아보지만, 평자는 “종말론적 미래”로부터 오게 될 생명을 기다리고 있다. 약간의 수사적인 표현이 허락된다면, 그에게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생명과 구원의 단초이다.  
위에서 평자는 그의 설교와 평전을 읽고 우울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송 교수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리라. “오늘날처럼 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울 때가 없습니다.”(90) 그렇다. 사람다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꿈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외롭다 하더라도 여전히 행복한 사람 아니겠는가. 반민중적이고 반인간적인 권위주의에 저항하면서도 사람의 사람다움을 결코 놓쳐본 적이 없었던, 아니 그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 송 교수에게서 우리는 사람의 체취를 느끼며, 사람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기독교사상, 2007년 1월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