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 영성
-대전중문침례교회 장경동 목사-

졸리운 설교
며칠 전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이 아무개 목사에게 전화를 드렸다.
“목사님, 제가 장경동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글을 써야하는데,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씀 좀 해주시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참 난감하네요. 설교 내용을 붙잡고 평할 만큼 내용이 충실한 게 아니고, 그렇다고 그분의 넉살 좋은 선포방식을 문제 삼는 것은 너무 뻔한 이야기가 될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설교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목사님은 장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전화를 받은 이 목사님은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더니, 요즘 본인도 삼일기도회 때는 장경동 목사의 부흥회 설교를 신자들에게 시청하게 한다고 말했다. 좀 의외였다. 신학과 신앙의 깊이가 상당하며 말에도 설득력도 있는 분이 이유야 어디에 있든지 장경동 목사의 설교를 공개적으로 본다는 게 말이다. 흉허물 없이 지내는 분이라서 나는 따지듯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뭐라고요? 아무리 나이 드신 분들만 참석하는 삼일기도회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그렇지 장 목사의 설교를 중개할 수 있어요?  당장은 재미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그분들의 영성에 손해가 갈 것 같은데, 아닌가요?”
이 목사의 생각은 이런 것 같았다. 주로 할머니들이 대상인 삼일기도회에서 말씀의 깊이에 들어가 봐야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오히려 졸기만 하니까 그것보다는 장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게 그래도 낫지 않느냐는 말이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는 대학생인 내 딸에게도 들은 적이 있다. “아빠 설교를 듣고 있으면 졸려요. 좀 화끈하게 해보세요.” 그런데 나는 내 설교가 졸리다 말을 들었어도 하나도 서운하지 않다. 엉뚱한 것을 전하는 설교보다는 졸리게 하는 설교가 차라리 낫다는 게 내 지론이니까 말이다.
장경동 목사와 연관된 또 하나의 작은 사연이 있다. 작년 가을 어느 주일엔가 우리 신자가 후배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함께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서양미술을 전공한 그 후배라는 여자 분은 현재 대학원에 다니면서 그 대학의 기숙사 조교로 활동하고 있었다. 성품이 맑고 지성적이고 신앙이 돈독할 뿐만 아니라 인상도 좋은, 그야말로 나무랄 데가 하나도 없는 분이었다. 원래 그분은 매주일 결혼할 남자가 살고 있는 대전에 가서 장경동 목사가 시무하는 대전중문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장경동 목사에 대한 그녀의 칭찬을 듣고 나는 좀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는 기독교 티브이 방송으로 장경동 목사의 설교를 몇 번 시청하고 ‘별로!’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당혹감이나 딜레마는 내가 지금껏 설교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던 분들과 그 청중들 사이의 관계를 지켜볼 때마다 경험했던 것이다. 본인들은 은혜 받는다고 저렇게 아우성인데, 제삼자인 내가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첫사랑에 깊이 빠져있는 젊은 두 남녀에게 “꿈 깨라!”면서 툭툭 치고 다니는 것처럼 좀 생뚱맞은 행동 아닌가. 혹은 성령을 거스르는 잘못은 아닌지.

서른, 잔치는 끝났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런 논리는 내가 자주 들어온 것이다. 작년 연말 의기투합하는 몇 사람들이 송년모임을 겸해서, 한국교회와 대중설교자들의 문제점을 분석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대화 시간을 가졌다. 오랫동안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가르치신 양 아무개 장로 한분이 지나가는 투로 (혹은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던 생각인지 모르지만) 이런 말씀을 내게 하셨다. 역사의식과 사회의식 없이 단순하게 교회에서 은혜 받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위로받고 자기 일상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설교와 목회라고 한다면 그런 대중적인 설교자들의 역할도 크지 않느냐? 양 장로는 젊어서부터 진보적 신학의 영향을 받아 역사와 사회의식이 또렷한 분이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보수적인 정통교회에 대한 연민과 관심이 많으신 분이다. 정통교회에 안주하고 있는 듯한 자신의 모습에 약간 불편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역시 소위 ‘체제 내에서의 변혁론’에 무게를 두는 온건한 성품의 소유자이셨다. 이런 점에서도 대화의 소통이 가능한 분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날 그분이 제기한 질문이 무슨 뜻인지 그 속내를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세상살이에 지친 소시민들을 위로해주는 게 기독교의 역할에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상적이고 거창한 주제보다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용무에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간다.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서 울고, 애기 낳고, 집 장만하고, 잘난 척 하기도 하고 기가 죽기도 하면서, 티브이 멜로드라마에 취하고, 동창들 만나서 잡담하고, 그렇고 그런 일상에 빠져서 알콩달콩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과 그런 삶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노래하지 않는가?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역시 대개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통일, 생태보전, 민주화, 여성주의, 세계평화, 경제정의, 노동해방 같은 주제나,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지평을 설교함으로써 ‘졸게’ 만드는 것보다는 ‘웃음보따리’를 안겨줌으로써 그들을 교회 공동체에 붙들어두는 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심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이 시대에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유일한 대안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미시담론의 세계관은 교회의 설교 현장만이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199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 사회 안에서 가파르게 상승 곡선을 타고 있다. 1994년에 나온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이런 사회적 현상을 극적으로 보여준 하나의 생기(生起)였다. 소위 386 세대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최영미는 이 시집의 표제어로 삼은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이렇게 냉소적으로 노래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중략>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다. 사회, 역사, 우주가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하나님 나라와 평화와 그의 통치가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이게 곧 우리 시대의 정신이고 알맹이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거시담론과 미시담론의 철지난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런 담론이 우리에게 무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두 담론은 한쪽이 어느 한쪽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실체에 대한 다른 관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개인들이 사회, 민족, 인류, 우주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소박하게 자기의 삶에 충실하고 거기서 기쁨을 누리는 것 자체를 비난하거나 무시하거나, 또는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도 기본적으로 ‘밥상 공동체’라는 일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작고 개인적인 일상에 초점을 둔 설교를 귀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일상에 접근하는 태도에 있다. 개인의 일상을 참된 생명의 능력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을 잡담 수준으로 타락시켜 결국 생명의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가벼움의 극치를 추수(追隨)하는 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추수(秋收)해야 할 할 설교자들이 따를 길은 결코 아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경동 목사를 비롯한 적지 않은 대중 설교 명망가들이 혼란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본인들은 청중들의 영성을 살린다고 주장하고, 또한 그렇게 확신하고 있겠지만 실제로는 축소, 왜곡하거나 손상시키고 있다는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내 주장의 근거를 간추려서 설명한다면 두 가지다. 하나는 이들이 성서를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의 설교가 매우 공격적이라는 점이다. 설교자가 성서를 정상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채 사람의 영을 살릴 수 없으며, 청중에게 공격적으로 접근하면서 그들의 영을 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맞물려 있다. 말씀의 해석이 없으면 영성이 빈곤해질 수밖에 없으며, 빈곤한 영성의 설교자들은 끊임없이 청중들을 공격함으로써 그 영성의 빈곤이 몰고 오는 위기를 망각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의 악순환으로 인해서 청중들은 물론이고, 그런 설교를 제공하는 설교자의 영성은 급기야 심리학적 메커니즘의 차원으로 떨어져버리고 만다. 우리의 생각과 예상을 뛰어넘는 생명의 영인 성령이 예민하게 작동해야 하는 바로 그 영역에 사람의 심리적 현상과 그 치료법만 무성하다는 말이다. 이 생명의 영이 살아 숨 쉬지 않는다면 비록 화려한 교회당과 최고급의 멀티미디어를 통한 열린예배와 요란한 신앙 언어의 성찬과 자기 몸을 불사르는 헌신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면 이런 현상은 결국 ‘허무주의 영성’이다. 많은 설교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이런 현상을 어렴풋하게는 의식하고 있겠지만 정확한 실체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이 실체에 대한 해명이 바로 오늘 나에게 주어진 숙제다.  

먹을 게 없는 잔치
장경동 목사(이하 ‘장 목사’)는 자신이 ‘신바람’을 일으키는 설교를 한다고 생각하던데, 내가 보기에 그의 설교에는 청중들과 강사의 신바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말씀과 성령의 신바람은 별로 없다. 최영미가 노래하는 대로 잔치가 끝나서 먹을 게 없다면 그런대로 수긍이 가지만 잔치가 한참 진행되는 마당인데도 먹을 게 없다는 이 사실은, 먹을 게 많았다가 손님이 넘쳐서 떨어진 상황이라도 참을 만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먹을 게 없었다는 이 사실은 비극이다. 그런데 거기에 모인 손님들이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쫄쫄 굶으면서도 배불리 먹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이 사실은 차라리 희극이다. 이런 정도만 암시를 해도 장 목사는 그 실상을 충분히 눈치 챘을 것이다. 장 목사처럼 최소한도라도 자기를 성찰해나가는 분은 기존의 부흥강사들처럼 자기 착각에 완전히 빠지지 않기 때문에 비록 청중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하고 있지만 자신의 설교가 지나치게 빈곤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태가 노출되는 걸 막아보려고 장 목사는 본인의 힘에 부칠 정도로 애를 쓰고 있을 뿐이다. 나는 왜 장 목사의 설교에서 먹을 만한 말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씨비에스 티브이 방송국에서 방영되는 장 목사의 설교를 여러 번 시청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도서출판 누가에서 출판한 장경동 목사의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이다>라는 책과 오디오 테이프 1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에 실려 있는 네 편의 설교(기도와 감사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 외식을 걷어내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 권능을 붙잡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 대전중문침례교회에서 행한 최근의 설교 다섯 편(2004년 11월28일-12월26일, 타력, 귀신, 성령, 원망, 삼일)을 꼼꼼히 읽거나 들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라>는 안산의 모 교회에서 행한 부흥집회 설교이고, 홈페이지에 실린 설교는 주일공동예배 설교다. 부흥집회에서는 그런 대중 집회 성격 상 어쩔 수 없이 ‘오버’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서 주일공동예배에서는 상당히 자제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런 차이는 보기에 따라서 중요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서 약간 절제하는 포즈를 취했다고 해서 그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 기본이 잡혀 있다고 한다면 대중 집회에서 보이는 거친 부분들은 크게 문제 삼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설교가 먹을 게 없는 잔치인 이유는 성서말씀에 대한 해석이 전혀 없다는 데에 있다. ‘타력’(엡 2:8-10)이라는 설교에서 장 목사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에베소서의 본문을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 타력신앙이라고 설명했다. 1.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타력입니다. 2. 기도하는 것도 타력입니다. 3. 믿음도 타력입니다. 4. 하나님을 아는 것도 타력입니다. 5. 우리의 구원도 타력입니다. 6. 우리의 의로움도 타력입니다. 그는 결론적으로 타력신앙이 예정론에 대한 오해로 받아들여지면 안 된다고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평신도들은 이런 정도의 내용을 장 목사가 걸쭉한 입담으로 풀어나간다면 상당히 은혜가 있는 설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설교는 성서의 세계에 들어가는 노력은 접어두고 본문에서 제목만 취한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전형적인 ‘나열식 설교’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기독교 사상> 2004년 5월호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성서를 해석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초기 기독교 당시에 이해된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좀 더 세밀하게 추적하고 살피면서 오늘의 삶에서 이 은총이 어떤 의미인지 심층적으로 해명해야 할 것이다.
요나 이야기인 ‘삼일’((욘 3:6-9)이라는 설교에서 장 목사는 다음과 같은 신앙적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끝까지 이루십니다. 2. 하나님은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3.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4. 한 사람의 영향력이 나라를 살립니다. 그는 이 네 번째 교훈을 매우 강조하면서 ‘버터플라이 이펙트’(나비효과)에 대해서 감동적으로 설명했다. 요나의 기본 주제가 우리의 생각과 의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네 가지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차라리 첫 번째 항목인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끝까지 이루십니다”에만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만약 장 목사의 영성이 심층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이 한 가지 주제만으로도 선포해야할 내용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별로 연결되지 않는 소주제를 산만하게 나열한 채 그것을 특유의 말재주로 밀고나감으로써 결국 말씀과 그 해석을 놓친 것이다. 나머지 설교들도 대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더 인용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장 목사만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목사들이 성서말씀을 해석하지 않고 단지 나열한다는 점에서 장 목사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런지 장 목사는 툭하면 “당신은 어떤데?”하고 따지고 든다.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도 역시 별 수 없더라는 주장이다. 성서의 깊이를 파고들지 못할 바에는 자기처럼 청중들을 재미있게 하는 게 오히려 낫다는 말이다. 이 논리는 부분적으로는 옳지만, 근본적으로는 옳지 못하다. 장 목사 특유의 어법을 따라서 말한다면 “옳지 못한 것은 옳지 못한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 옳지 못하다고 해서 자기의 옳지 못함이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는 말씀의 깊이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설교의 상투성을 벗어나기 위해서 청중을 감정적으로 다그침으로서 오히려 큰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다. 장 목사에게는 바로 이게 문제이다. 세계와 삶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어쩌다가 벼락부자가 된 졸부처럼 말씀에 대한 해석 능력 없이 청중을 제압할 수 있는 카리스마만을 확보한 장 목사의 설교에는 그런 능력이 없는 설교자의 설교보다 문제를 일으킬 위험성이 훨씬 높다. 역설적으로 그의 장점이 복음 앞에서는 단점이 된다는 말이다. 이 위험성이 곧 장 목사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공격성인데, 군중은 이런 공격적인 설교에 아주 쉽게 약점을 보이는 법이다.

설교의 공격성
어떤 독자들은 장 목사의 설교가 공격적이라는 필자의 진단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평신도들의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겠지만, 고도의 해학과 웃음을 전면에 내세운 그의 설교 내면에는 공격성이 도사리고 있다. 장 목사는 모르긴 해도 상담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공부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약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그 약점을 파고든다. 바로 이것이다. 청중들이 그의 설교에 매료되는 이유는 단순히 웃긴다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심리적 약점을 정확하게 짚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적절하게 해소시켜준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서 공격적이라는 말은 그렇게 나쁜 의미만 있는 건 아니다. 한 인간의 심리적인 실존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그것을 정확하게 잡아내서 치료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인간 구원 문제에서 어느 정도 공헌하고 있는 셈인데, 이런 작업을 매우 공격적으로 끌어가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적절하게 치료하면 됐지 무엇이 문제인가? 만약 그런 치료가 핵심이라고 한다면 사이비 이단들의 접근 방식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종교 활동에도 나름의 인간 치유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문화 현상은 일정한 구원론적 정당성을 담보하고 있다. 한일 월드컵 당시 수십만 명의 ‘붉은 악마’들이 집단적으로 벌였던 거리 응원도 일종의 대중치료이며, 그런 점에서 구원 현상이다. 그뿐이 아니다. 교육학과 심층심리학에서 이용되고 있는 ‘음악 치료’나, 요즘 동네마다 들어서 있는 기 치료, 단 훈련도 역시 그런 토대에서 운영되고 있다. 청중들이 이런 걸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탓인지 많은 교회들이 영어 회화도 가르치고, 노숙자에게 밥도 주고, 탤런트를 불러다가 간증도 듣고, 의료 활동도 하고, 사회봉사도 하는 것 같다. 그것 자체가 바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교회도 있고, 본질은 아니지만 선교를 위해서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대목에서 좀 더 심사숙고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할 교회가 과연 그런 일에 신경을 쓸 시간이나 물적 토대의 여유가 있는가를, 또는 그런 행태들이 자기의 본질에 대한 구도자적 치열성의 부재로 인해서 벌어진 ‘한눈팔기’는 아닌지를 말이다. 나는 여기서 그런 주변적인 일을 일절 거부하라는 게 아니라 그런 행위들이 복음의 근본을 흐리게 하거나 해체할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해서 교회가 자칫 사이비 구원론에 빠져버릴 수 있다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뿐이다.
지나가는 길에 한 마디 한다면, 한국교회는 구원론에 대한 공부가 시급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 창조, 재림, 종말, 성만찬 등등의 교의와 예전 속에서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간직하고 열어온 그 구원의 내용과 미래를 실질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고 있는 한 우리는 구원론적 공동체로서의 자리를 유지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정통 교회 안에도 유사 구원론이 얼마나 팽배한지 웬만큼 생각이 있는 분들은 알고 있으리라. 이제 장 목사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그 공격성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잠시 살펴보자.
장 목사는 “무식하다!”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자주 사용한다. 청중들이 성서 구절을 빨리 찾지 못하거나 간단한 신앙적인 질문에 대해서 바르게 대답하지 못할 때 대놓고 무식하다고 외친다. 물론 분위기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멘트를 하는 것뿐이라고 설명하겠지만, 그리고 그런 가학적인 말을 듣고도 청중들이 재미있어 한다는 게 사실이지만, 아무리 대중집회라는 사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어쩌다가 한두 번이면 몰라도 거의 습관적으로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은 그 집회를 시장 바닥의 약장사만도 못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무식하다는 말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청중을 비하시키는 언급은 훨씬 심각하다. 그는 잘 나가다가 갑자기 엄숙한 자세로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거야!”라든지 “이혼하지 말란 말이야! 그냥 참고 살아!” 하고 호통 친다. 아마 정서적으로 불안하거나 주체적이지 못한 사람은 장 목사의 고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그것마저 농담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최소한 자신의 삶에 책임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무모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쪽에 속한 사람이나 저쪽에 속한 사람이나 공격받았다는 사실은 매한가지이다.
이렇게 겉으로 공격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은 확인이 가능하니까 청중들이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경험을 청중들에게 일반화하는 것은 그것의 음모가 숨어있기 때문에 청중들이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당하게 된다. 그는 고등학교 때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했는데, 기쁨이 너무 큰 탓인지 헌금봉투의 제목을 혈서로 썼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자극적인 사건을 공개하는 모습을 보면, 간혹 버스에 올라와서 방금 교도소에서 10년 살다나왔다면서 먹고 살도록 물건 좀 사달라고 윽박지르는 자해공갈단의 협박 장면과 비슷해 보인다. 장 목사는 지금까지 거금의 건축 헌금을 열두 번 했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오른 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자주 인용했을 장 목사가 설교 강단에서는 자신의 헌금행위를 동네방네 선전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장 목사는 집을 사기 위해서 8천만 원짜리 적금을 붓다가 마지막 번을 넣기 바로 직전에 이 돈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음성을 듣고 바쳤다고 한다. 그것도 칭찬받을 만하지만 그렇게 온 천하에 알릴 일은 전혀 아니다. 이런 방식의 접근은 장 목사의 설교에 거의 구조적으로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인용이 필요 없겠다. 물론 그는 신자들의 신앙에 자극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라고 둘러대겠지만, 그게 바로 청중들의 약점을 파고드는 공격적 설교이며, 그로 인해서 청중들의 영성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다. 혹시 그는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연출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만약 그런 식이라면 나도 할 말은 참으로 많다. 눈물 날만한 일도, 감격스러운 일들도 많다. 조금만 과장하면 청중들이 은혜 받을 만한 일들이 제법 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모두 ‘나’라는 사람의 특별한 삶과 조건 안에서 일어난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까지 일반화할 수는 없다. 특히 설교라는 것은 자기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전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가능한대로 간증 유의 이야기는 삼가야 한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사건과 경험들을 거침없이 쏟아낸다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기보다는 상처를 줄 뿐이다. 만약 청중들이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은혜를 받는다면 그것은 곧 영성이 망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장 목사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부담감을 주어서라도 은혜를 받게 해야 한다.” 그는 왜 구원과 은혜를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에 맡기지 못하고 자신이 감당하려는 것일까?
사실 장 목사만 유난히 이렇게 공격적으로 설교하는 건 아니다. 필자가 씨비에스 라디오로 듣고 있는 설교 중에서 7,80%가 공격적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이 필요하겠지만 필자의 짧은 생각이라도 한 마디 하자. 표면적으로만 보면 청중을 설득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 실존 자체가 바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이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자기에게 집중해 있는 인간의 말은 늘 상대방에게 공격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어떤 여자가 동창회에 나가서 자기 남편을 자랑했다면 그런 부분에 약점이 있는 친구는 시험에 든다. 또는 장애인을 돌본 이야기나 봉사활동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어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의 말은 아무리 선의라고 하더라도 늘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설교자는 내놓고 청중들을 자기의 믿음까지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강하기 때문에 훨씬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게 마련이다. 이런 대목에서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영성의 대가들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나 토마스 아 캠피스 같은 이들의 글을 읽으라고 권면하고 싶다.  

미야자키와 욘사마
위에서 설교자의 공격성에 대해서 짚었는데, 이제는 입장을 바꾸어 그런 설교를 듣는 청중의 문제가 무엇인지 짚어보자. 도대체 한국교회의 청중들에게는 왜 이런 직, 간접의 공격적인 설교가 먹히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제시될 수 있긴 하지만 한국사람 일반의 정서가 바로 여기에 한몫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한(韓)민족은 바로 한(恨)민족이라고 하는데, 그 한의 정서가 승화하거나 계몽되지 못한 채, 또한 복음선포의 도구라는 미명으로 우리 삶의 합리성과 주체성을 파괴하고 만 것 같다.
요즘 우리의 대중문화계에 ‘신파’ 신드롬이 일고 있다고 한다. ‘돈에 속고, 사랑에 우는’ 심순애의 신파가 21세기 오늘 우리의 삶에도 뿌리 깊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대박을 터뜨린 장윤정 씨의 <어머나>라는 트로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음악에서는 유치한 가사로 웃기는 신파가 유행인 반면에, 영상매체에서는 비현실적인 상황 전개로 울리는 신파가 주가를 올리고 있다.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12월의 열대야>,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불치병을 앓다가 죽는다. 배국만 평론가는 “2004년 한국 드라마는 새해 벽두 <천국의 계단>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죽음으로 연말을 마무리했다”고 꼬집었다. 이런 울리는 신파는 2005년에도 계속된다. <봄날>의 여주인공은 실어증에 걸렸고, <슬픈 연가>의 주인공은 시각 장애를 가진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한겨례 21, 1월11일자 참조).
대중들이 이런 신파조의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것은 비단 우리만의 현상은 아닌 것 같다. 소위 한류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겨울연가>의 배용준 씨가 일본의 아주머니들에게 백마 탄 왕자로 대우받는다는 사실을 보면 일본 청중들의 정서도 우리와 별반 다른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참으로 신기했다. 탄탄한 인문학적 토대에서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세계를 선구적으로 열어가고 있는 미야자키 같은 사람이 크게 대접받는 일본에서 컨텐츠는 거의 없이 단순한 이미지만으로 꾸며진 욘사마(배용준의 일본식 발음)가 그에 못잖은 찬사를, 열광의 강도만으로 치자면 훨씬 뜨거운 찬사를 받는다는 게 말이다. 우리나라 극장에서 개봉된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비롯해서 미야자키의 몇몇 애니메이션 작품을 이번 겨울에 필자도 보았다. 만화도 인간, 세계, 역사를 그렇게 심층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그의 작품에서 충격적으로 느꼈다. 어쨌든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세계의 대표자들인 미야자키와 욘사마가 동거한다는 사실을 보면서 필자는 이미지만으로도 대단한 대중적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에 대한 가치론적 판단은 논외로 치고 말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한(恨), 감성, 이미지 중심의 목회와 설교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시류에 영합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개운치 않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본류와 너무나 멀어지는 것 같아서 불안한 생각까지 든다. 영화, 음악, 예술, 사업의 영역에서는 이미지로만 승부를 건다고 해도 크게 문제는 아니지만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 행위는 비록 신파조의 정서적 접근이 청중들에게 먹힌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벗어나야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의 설교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인간의 심리와 정서가 아니라 그 인간의 심리와 정서가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이 맥락을 예민하게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거나 웃음보를 터뜨리게 하는 방식으로라도 청중들에게서 어떤 열정적인 반응을 얻어내려고 한다. 대중의 신파적 기질에 영합하는 설교에 길들여지면 결국 설교자들은 청중들을 계속해서 그런 심리적 방식으로 다루려고 하고, 청중들의 영성은 성서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지로 조작된 열정에 의해 지배당할 것이다. 그런 현상의 가장 적나라한 상태가 곧 사이비 이단이나 유사 집단에서 발생하는 집단적 ‘세뇌’인데, 이런 세뇌는 결국 공격적인 목회와 설교에 기인한다.  

집단적 노이로제
장 목사는 주일 공동예배의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두 가지 세리모니를 유도했다. 하나는 청중들끼리 인사를 나누게 하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다른 교회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고, 일종의 코이노니아 의식이라는 점에서 그런대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또 하나의 세리모니는 청중들의 두 손을 가슴에 모으게 한 후 이렇게 주문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이다.” 매 주일 대전중문침례 교회 신자들은 설교를 듣기 전에 이 구절을 함께 외친다. 설교를 하기 전에 신자들끼리 인사 나누는 것도 좀 의도적인 느낌이 드는데, 이제는 한술 더 떠서 흡사 대학생들 엠티나 신입사원의 극기 훈련 때 반복해서 외치는 슬로건처럼 이런 구절을 신자들이 외친다는 건 놀라웠다. 어떤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면 초청 인사가 한마디 할 때마다 주부들을 중심으로 한 청중들이 인형이나 로봇처럼 ‘아!’라거나 ‘우!’라는 탄성을 거의 기계적으로 내지르는 경우가 있다.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을 방불케 하는 이런 행태가 바로 장 목사를 비롯해서 적지 않는 설교자들의 설교 현장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은혜를 받으면 좋은 것 아닌가,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예배의 근본이 사람들의 ‘은혜’에 놓인 게 아니라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교회의 예배와 설교는 끊임없이 ‘열린 음악회’나 ‘개그 콘서트’를 닮아갈 것이다.
이미 우리 한국교회 안에 이런 조짐은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장 목사만이 아니라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 중에 청중들에게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치도록 하는 것도 역시 작위적이다. 이는 흡사 피라미드식으로 판매하는 회사의 직원들이 “나는 할 수 있다”는 구호를 반복적으로 제창하면서 어떤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과 비슷하다. 도대체 설교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사람들을 들들 볶으면서 약을 팔아야만 하는 것일까? 교회의 청중들을 ‘오빠부대’로 만들 생각인가? 말씀과 영을 사람들의 감정으로 대체할 생각인가?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얼마나 이성적인데 열정적이고 희생적인 목회와 설교 현상을 그렇게 매도하는가? 요즘은 ‘아이큐’(지성)가 아니라 ‘이큐’(감성)의 시대라는 걸 모르는가? 칸트가 말한 대로 종교는 순수이성이 아니라 실천이성의 영역이며, 쉴라이에르마허가 말한 대로 절대의존 ‘감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기독교 신앙의 신비가 바로 이런 열정에 담겨있지 않는가? 그것이 곧 기독교 영성이 아닌가? 기독교 신앙이 죽어가던 유럽의 19세기에 ‘각성운동’으로 인해서 기독교 신앙이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어떤 방식이든지 신자들의 신앙을 고취시키고 교회 운동의 추동력을 확보하는 게 오늘 한국교회에 급선무 아닌가? 필자는 이 모든 반론에 대해서 또 다른 반론을 제시할 수 있지만 이 자리에서는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왜냐하면 이런 반론은 필자가 말하려는 주제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무의미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나 신앙에서 웃음과 눈물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은 어떤 놀라운 세계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따라와야 할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 추운 겨울철에 자전거를 타면서 그 추위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노래를 부르고 싶을 때가 많다. 얼마 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관람하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이런 내 삶의 모든 부분에 생명의 영으로 임재 하는 성령의 신비 앞에서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도 잦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희로애락의 감정 자체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의도적으로 조작해나가는 행태를 경계하는 것이다. 웃고 울리는 감정의 바다로 몰입시킨 다음에 상투적이고 조잡한 설교를 주입시키는 인위적인 방법을 쓰지 말고,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성서의 세계를 직면하게 함으로써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깊이와 그 영에 사로잡히게 하라는 말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 하고 말할 분이 있겠지만 이건 전혀 다른 사태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복음의 내용이 형해화(形骸化)하는 대신 인간의 열정만 무성하게 되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에는 복음이 (미래를 향해, 또는 진리를 향해, 또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 또는 심화하는 대신 인간의 감정은 거기에 철저하게 의존될 뿐이다.

교회력을 넘어서(?)
장 목사의 설교에 복음의 근본이 아니라 설교자와 청중의 열정만 범람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교회력을 무시하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교회력의 시작이자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대림절(2004년 11월28일-12월19일) 중에 장 목사는 대림절 설교를 하지 않았다. 대림절 첫 주일은 ‘타력’, 둘째 주일은 ‘귀신’, 셋째 주일은 ‘성령2’, 넷째 주일은 ‘원망’이었다. 물론 어쩌다 일어난 일이라고 대충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서와 복음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교회력을 놓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교회의 역사가 자기의 개인적인 신앙경험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사실을 너무도 확실하고 절실하게 인식하고 때문이다. 대림절을 외면한 장 목사는 자신의 신앙적 경험과 열정이 교회력을 넘어선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연말에 너무 바빠서 ‘아차!’ 했을 뿐이겠지. 그러나 내가 보기에 바로 이런 소홀함이 가능한 그의 신앙 체계야말로 생명의 영이 아니라 인간의 열정이 중심으로 작동되는 한 전형이다. 물론 우리들도 모두 이렇게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할 때가 많기는 하다.
교회력을 무시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가 주일공동예배 때 행하는 설교 제목에서도 그의 그런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설교제목은 한결같이 한 단어로 구성된다. 진선미, 이십년, 기도, 목숨, 두 사람, 에베소, 의미, 고향, 순교, 관계, 생사, 새일, 전쟁, 질병, 기본, 구역, 증세, 구원, 일 등등, 모든 설교 제목이 이런 식이다. 적절한 설교 제목을 잡기 위해 설교자들이 진땀을 흘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장 목사가 이런 문제를 이렇듯 무사려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설교가 일종의 ‘테크닉’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내가 굳이 이렇게 사소한 것 까지 딴죽 걸듯이 지적하는 이유는 자신의 주관적 신앙 열정,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오는 열정이 그를 신앙의 중심부가 아니라 종속변수인 인간의 심리와 감정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설교에는 꼭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도 될 것은 차고 넘친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곧 허무주의 영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도 장 목사의 설교가 한국교회와 사회에 놀라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만은 높이 사야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확보한 대중성 자체는 기독교 역사의 바른 발전과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문제는 내가 여기서 구구절절이 토를 달 필요도 없다. 사람들의 열정만 가득하고 참된 생명의 영이 실종되어 있는 영성은 하나님 나라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나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예컨대 한국 사회가 장 목사의 설교를 기독교 설교의 정형으로 착각한다면, 말씀과 영성의 깊이를 진지하게 추구하며 목회와 설교에 진력하고 있는 많은 젊은 목회자들의 자리는 점차 좁아들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작년 서울 시청 앞에서 반공, 친미 기도회를 열어 의식 있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기독교 극우 인사들의 행태나 인간의 열정에만 끝없이 집착하고 있는 장 목사의 공허한 설교는 약간 다른 옷을 입었을 뿐이지 기독교의 본질에 상처를 낸다는 점에서는 오십보백보이다.
나는 여기서 장 목사의 설교만을 도마 위에 올리려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모두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장 목사의 설교를 이렇게 비평한다는 것은 누워서 침 뱉는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땅 구석구석에 숨어서 생명의 영에 사로잡힌 채 큰 소리 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용맹 정진하는 젊은 설교자들 중에서 혹시라도 장 목사가 일으키고 있는 이런 신바람 설교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들이 있을까 염려되어 이렇게 공론화했을 뿐이다. 젊은 설교자들이여, 청중을 다룰 줄 아는 기술에 ‘혹’하지 말고, 다층적 영성의 내공을 쌓는 일에 ‘힘’쓰시라. 설교자들이 자기도 설득(구원)시키지 못한 채 남을 설득하려고 덤벼드는 것보다 더 큰 어리석음은 없으니 말이다.   <기독교사상, 2005년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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