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영성의 내일을 향하여!
-모새골, 임영수 목사-


열정과 영성
신대원 1년생들과 목사 안수 후보생들을 ‘모새골’의 영성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시키는 계획은 신학대학교 총장님들과 교단 총회장님들이 진지하게 검토해볼만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에 관한 학문인 신학을 공부할 학생들과 교회에서 영적인 현실들을 붙들고 씨름하게 될 목사 후보생들이 영적인 차원에서 건강할 뿐만 아니라 그 영에 관한 깊은 이해와 경험을 쌓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필수적인 공부이기 때문이다.
물론 각 신학대학교와 총회에서 운영하는 나름의 영성 프로그램이 있겠지만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그런 교육은 대개 일방적인 사명감 고취에 머물러 있을 뿐이지 참된 영성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교회를 크게 키운 선배 목사들의 성공담, 일년에 수백 명을 전도했다는 전도 전문가나 모범적으로 기업을 일군 평신도들의 간증, 설교 방법론이나 교회 관리에 관한 특강, 영적인 카리스마가 탁월하다는 부흥 강사들의 설교가 이런 프로그램의 핵심 메뉴로 등장한다. 여기서의 목표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 전도자가 되겠다거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한 몸 바치겠다는 신앙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이런 열정을 영성과 일치시키면 곤란하다. 물론 영성이 열정으로 표출될 수도 있긴 하지만, 열정은 어디까지나 영성 없이도 가능한 인간의 감정 일반일 뿐이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영성의 깊이에 들어갈수록 인간의 열정은 축소되고 거룩한 영의 활동이 무한히 확대된다. 왜냐하면 생명의 영인 성령의 지배를 받음으로 발현하게 되는 영성은 자기 스스로 빛을 내는 게 아니라 성령의 빛을 반사하거나, 아니면 그 뒤에 숨는 영적 작용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엄습하는 영의 광휘에 두려움을 느낀 영성의 대가들이 거의 한결같이 묵언, 명상, 고독, 내면의 세계로 침잠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열정과 영성의 차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열정과 영성을 혼동하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벌어진다. 예컨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놓여야할 예배가 인간의 열정에 놓이는 현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 교회 안에서는 대형 프로젝트와 율동을 곁들인 복음 찬송, 강해설교, 또는 감동적인 간증 중심의 설교로 구성된 ‘열린예배’가 신드롬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대개가 인간의 열정을 끌어내는 방법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예배만이 아니라 교회당 건축, 해외 선교사 파송, 장로 및 안수 집사를 중심으로 한 평신도의 위계제도, 복지관 건립 등등, 거의 모든 조직과 행사들 역시 인간의 열정을 불러내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점차 소멸되는 반면에 인간의 열정이 범람하는 현상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리라.
이런 풍토에서 생활한 탓인지 평신도 지도자들 중에서도 영적인 깊이가 있는 분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평생 교회에 다닌 그들은 노회와 총회의 정치에 관심이 많고, 철저하게 교회 이기주의에 젖어있으며, 자녀들을 세속적인 가치 기준으로 키운다. 교권의 이해관계가 달린 일에는 이전투구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끊임없지만, 구원과 종말과 생명에 관해서 밤새워가며 진지하게 토론했다는 이야기는 귀를 씻고 기다려도 감감하다. 연말 연초 제직 수련회에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신학강연을 개최했다는 소식을 나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결국 신앙의 연조가 깊을수록 교회생활의 요령만 늘었지 영적으로는 무감각하거나 단지 인간적 열정에 도취한 평신도들이 늘어간다는 말 아닌가. 심은 대로 거둘 수밖에!

영적인 촉수(觸鬚)
이런 상황에서 왜 나는 모새골 영성을 주목하는 걸까? 나는 아직 그 모새골 영성 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임영수 목사(이하 ‘임 목사’)께서 쓴 몇 권의 책과 모새골 홈페이지에 실린 최근 설교를 통해서 임 목사의 영적인 깊이를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그 대답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친분을 맺었어도 여전히 막막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글을 통해서만 잠시 알게 되었어도 매우 오랜 지우(知友)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데, 임 목사는 나에게 바로 후자에 속한 분이다. 나는 임 목사의 개인 신상에 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 자녀가 몇인지, 취미가 무엇인지, 왜 영락교회를 그만두었으며, 주님의교회에도 잠시만 머물렀는지, 찬송가는 잘 부르는지, 영화를 즐겨보시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건강을 위해서 가끔 포도주는 마시는지, 어린시절에 개구쟁이였는지 등등, 아는 게 거의 없다. 설교집에서 얻어들은 몇몇 정보가 모든 거다. 1948년 부모 손에 끌려 월남했으며, 연세대학교, 숭실대학교, 장로회 신학대학교,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스위스 융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하셨고, 평광교회, 남대문교회, 영락교회, 주님의교회를 담임하셨으며, 지금 모새골 공동체 목사로 계신다.
겉모양에 불과한 학력과 경력보다는 위에서 내가 모른다고 지적한 그런 부분들을 알아야만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래도 내가 임 목사를 매우 가깝게, 그리고 비교적 깊이 있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과 나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이번에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모든 삶을 영적인 현실성(spiritual reality)에 집중시키는 태도를 말한다. (이 뒤로 사용된 실제, 실재, 실체라는 단어는 모두 reality를 의미한다.) 임 목사의 모든 설교는 바로 이 영적인 실제를 가리킴으로써 청중들로 하여금 그 세계에 눈을 뜨게 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도는 곧 “영적인 실제를 향해 촉수를 내미는 것”이다.(모새골 홈페이지, 2005년 4월24일, 행 17:22-34을 본문으로 한 주일설교 “기도란 무엇인가”에서. 이하 편의상 홈페이지 설교는 월과 일만 표기).
만약 목회자들에게 이런 영성이 확보된다면 목회의 틀 자체가 새로워질 것이며, 따라서 한국교회의 갱신과 개혁이 근원적인 차원에서 촉진될 것이다. 물론 다른 건전한 영성 훈련기관도 이런 부분에서 나름으로 공헌할 수 있겠지만, 임 목사가 끌어가고 있는 모새골의 영성은 탄탄한 신학, 칼 융의 정신 분석과 건강한 세계 인식, 그리고 목회적 현실감각이 종합적으로 작동함으로써 매우 독특하고 확실한 영성의 지평을 열어간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모새골의 영성은 곧 임 목사의 설교에 그대로 녹아 있다. 청중을 자신의 얄팍한 신앙형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좌충우돌하고 있는 이 척박한 한국교회 강단에서 영적인 실체에만 집중하는 설교자를 만났다는 기쁨은 땅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그것과 같다. 주제넘은 말인지 모르겠지만 임 목사의 설교에서 그가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이 기쁨은 두 배가 되지 않겠는가. 영성의 세계가 한참이나 미숙한 사람이 이렇게 드러내놓고 “그는 나와 같다”고 말하는 소리를 임 목사가 듣는다면 “주제파악을 못하는군!” 하실지 모르겠지만, 영적인 부분에서는 짝사랑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자존심상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한편으로는 기쁨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으로 임 목사의 설교에 담겨 있는 영성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볼 생각이다.

빈집의 위기
영적인 실제를 향해 촉수를 내미는 그의 여정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게 아니다. 1993년에 발행된 <삶, 그리고 성령>(홍성사, 21쪽. 이하 ‘삶’)에서 임 목사는 “진실한 내적 동기는 거의 일어남이 없이 행사, 의미 없는 기도회, 정치, 세미나, 각종 행사를 치루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속이며 살아가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하고 영성이 없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진단했다. 영이 제공하는 생명 충만감, 기쁨과 자유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영이 자리해야 할 그곳이 비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임 목사는 <빈집의 위기>(도서출판 신앙세계, 1997, 이하 ‘빈집’)에서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오늘의 비유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삶의 공백 상태의 위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공백 현상이 위험스러운 것은 ‘악한 영’ 또는 ‘악한 생각’을 내쫓을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를 괴멸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더 큰 힘에 의해서 쫓겨난 후에도 그것은 기회를 봐서 다시 그의 거점을 확보해 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빈집’, 220쪽).

교회 안에 종교적 율법과 감정적 열광주의가 득세하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빈집의 위기가 몰고 온 또 하나의, 혹은 훨씬 심각한 영적인 위기일 뿐이다. 우리를 결코 참된 만족과 기쁨에 참여할 수 있게 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은 거룩한 영이 아니라 악한 영의 작용이다. 임 목사는 이미 영락교회의 담임 목사로 시무하고 있을 때부터 이러한 문제를 거침없이 지적하고 있었다. 일반 신자들에게 신앙의 절대적인 목표처럼 간주되고 있는 교회의 일들을 우상이라고 설교한다는 것은 예언자적 영성과 결기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모든 우상숭배의 근원은 욕심(골 3:5)입니다. 이러한 욕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많은 우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말씀드리면, 돈, 권력, 성, 명예, 미모, 건강, 지식 등입니다. 우상은 국가적으로도 있고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우상들은 맘몬, 교회건물, 제도, 교리, 성경책, 성물, 사람입니다.(‘빈집’ 74).

임 목사는 영락교회라는 그 실체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또한 목회적인 계산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영적인 시야에 들어오는 현상을 그대로 외쳤을 뿐이다. 그는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금관으로 치장된 예수가 시멘트 콘크리트에 갇혀서 울고 있다는 김지하의 연극 ‘금관의 예수’를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한 후 이렇게 일갈한다.

기독교 역사 2천년 동안 예수 상은 왜곡되었고, 거듭 왜곡되어 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책임과 임무는 왜곡과 편견에 갇혀 있는 예수를 살아있는 예수로 보고 듣고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예수는 많은 형식과 제도 속에 갇혀 있고, 너무나 피상적인 인물로, 혹은 지나치게 관념적인 인물로 되어 버렸습니다.(‘빈집’ 36).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이야기와 비슷한 교회 비판적 설교가 그 당시 영락교회 지도급 평신도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궁금하다. 최근 얼마동안 영락교회 담임 목사와 당회원 사이에, 당회원과 권사들, 혹은 여러 계층의 신자들 사이에 알력다툼이 벌어진 것을 본다면 그분들이 임 목사의 설교를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다. 혹시 이런 근본적인 신앙의 차이 때문에 임 목사가 영락교회를 사임한 게 아닐까 모르겠다. 어쨌든지 빈집으로 전락한, 그래서 악한 영이 알게 모르게 앞자리를 차지한 교회의 존재론적 근거가 얼마나 취약한가 하는 점을 임 목사는 진작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우리 한국교회의 큰 불행은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형교회일수록 그런 과오를 많이 범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매스컴, 사회 분위기, 사회 문화적인 가치에 의해서 통제를 받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육체가 이 세상 통제소에 장악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이 구심력이 없어지고 원심력에 의해서 움직여집니다.(‘삶’ 63).

임 목사의 진단에 의하면 하나의 거대한 조직으로 작용하는 대형교회일수록 훨씬 심각한 영적 결핍증에 노출되는 셈이다. 영성의 깊이가 없는 교회는 당연히 남에게 보이기 위한, 또는 자신을 성취하기 위한 세상적인 가치에 의해서 부화뇌동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그의 영적 통찰은 오늘 우리 교계에 그대로 적중한다. 철저하게 대교회주의 내지 개교회주의에 몰입해 있는 목회자들이 요즘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명분으로 조직을 꾸리는 일에 바쁘다. 교회가 조직폭력도 아니고, 웬 조직이 그렇게 많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지 나는 그들이 진정으로 개혁에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흉내를 내자는 것인지 약간 혼란스럽다. 모든 개혁의 단초는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교회의 바람직한 ‘재정운영’이나 ‘도덕성 회복 운동’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인 단일성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인식하고 있을까? 내가 보기에, 물불가리지 않고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목회를 고수하면서 교회 개혁을 운운한다는 것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영성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홍보용 ‘개량주의’ 영성에 불과하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한국교회 원로 목사님들의 ‘회개행사’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미 연초에 교육계 원로들께서 한국교육의 총체적 부실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표시로 자기 종아리를 치는 퍼포먼스를 벌인 터라 원로들에 대한 마음이 ‘끌끌’했지만, 목사님들은 그들과 달리 경천동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면목을 보여줄지 모른다는 작은 기대를 걸었다. 대중들의 추앙을 한 몸으로 받던 목사님들이 기자들을 불러들이면서까지 회개하신다고 했으니 그게 어디 보통 일인가? 맙소사! 그날 회개행사는 그야말로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리스도교 영성이 개인의 실존에서 극단적 실천으로 나타나는 회개가 일종의 볼거리로 변질된 셈이다. 중학교 2학년인 내 늦둥이 작은딸에게 이렇게 물었다. “얘,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회개한 다음에 자기 재산의 반을 내어놓고 남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단다. 그런데 왜 원로 목사님들은 잘못했다는 말만 하고, 실제로 내어놓는 게 없을까?” 내 우문을 받은 딸의 현답은 이렇다. “그분들은 삭개오가 아니잖아요!”

내면의 빛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기에 개량주의가 교회개혁의 선봉장으로 자임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향한 방향전환인 ‘메타노이아’(회개)마저 남을 교훈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되는 것일까? 그분들의 신앙이나 인격의 오류라기보다는, 물론 간접적으로는 그런 요인들도 연관되기는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영적인 현실성에 대한 오해가 이런 일련의 사태를 불러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목사가 교회 안에서 흡사 사이비 교주처럼 행세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이 종교적 열정의 심취와 동일시되고, 신자들의 죄책감을 매우 선정적으로 자극하는 풍토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의 곡해와 황폐화는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임 목사에 따르면 철야기도회, 교회봉사, 100일 기도회 등등, 이런 행사들을 통해서 영적인 실체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교회의 가르침은 ‘공갈’(3월20일)이다. 그런 가르침들은 단지 인간의 요구를 자극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배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예배의 중심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에 닿는다는 사실에 있다. “노래, 기도, 찬양 모두 예배를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그것보다 더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불에 의해 점화되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삶’ 69). 결국 예배는 “하나님의 빛(영광)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의 빛에 엄습되는 것”이다.(같은 곳). 내면의 빛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표면적으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지키며, 이 세상의 보상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내면의 평강과 자유가 주어진다.(5월1일).  
임 목사가 시종여일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일종의 메타포라 할 ‘내면의 빛’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경험이라는 말이다. 그는 앤소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의 우화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버스를 타고 호수와 산, 전원과 강이 어우러진 매우 아름다운 지방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차창 밖으로 무엇이 지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누가 버스의 상석에 앉을 것인가, 누구에게 갈채를 보낼 것인가, 누구를 중요한 인물로 여길 것인가에 대해 말다툼하느라고 여행의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런 상황이 이어질 것입니다.(‘빈집’ 47).

임 목사가 이런 우화를 통해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버스 창문의 커튼을 걷어내고 밖의 세계, 빛의 세계를 보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온갖 시행착오, 권모술수, 사행심을 벗어나서 참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첩경이다. 열일곱 살부터 평생 수도원 주방에서 음식 만들고 설거지하던 로렌스가 그 주방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도 역시 이런 내면의 빛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3월27일).  
그런데 이런 내면의 빛을 인식하고 경험하기는 사실 간단하지 않다. 그럴듯하게 말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기는 어렵다. 여기서는 자기 몸을 불사르는 헌신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매우 오랫동안 어린아이처럼 성서를 읽고 설교하던 나에게 이 ‘내면의 빛’은 더 이상 느릴 수 없는 완행열차와 같았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현실, 즉 영에 대한 분명한 경험이 없거나 혹은 유치한 경험에 머물러 있으면서 내면의 빛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현존을 청중들에게 선포해야 한다는 이 현실이 설교자들에게 놓여있는 가장 큰 딜레마일 것이다. 자칫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될 테니 말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말을 듣기는 하지만 그분의 현존을 직접 체험해 가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간혹 체험을 가능케 한다는 어떤 은사집회나 모임에 가보면 너무나 인위적이고 비지성적인 분위기로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을 보곤 합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체험된 하나님은 성서에 계시된 참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상을 가지려면 먼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체험이 있어야합니다.(‘삶’ 19).

그의 지적은 옳다.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한 설교자는 결국 신변잡기나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만담, 청중들을 자극하고 처리할 수 있는 기술과 요령을(‘빈집’ 책머리) 찾기 마련이다. 요즘 설교 명망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증상들을 임 목사는 이미 오래 전에 지적한 셈이다. 그런 대중 설교자들과 달리 임 목사는 전도, 새벽기도회, 십일조 같은 교회생활에 관한 지침이나 어떤 윤리강령 같은 것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 말은 곧 그가 전적으로 내면의 빛에 사로잡혔다는 증거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런 충고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현존인 ‘내면의 빛’에 직면한 사람에게는 그런 요소들이 부차적인 것으로 제자리를 잡아간다는 의미이리다.

오시는 하나님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성의 내공이 깊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의 신앙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며, 비합리적인 특징을 지닐 때가 많다. 그러나 임 목사의 영성은 깊은 신학적 토대와 연결되어 있다. 복음을 전하는 일군이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건전한 영성과 깊은 신학적 소양과 섬김의 삶’에 익숙한 훈련이 필요하다고(‘빈집’ 152) 권면하고 있듯이 영성에 기초한 그의 설교는 신학적 깊이가 있다. 특히 ‘미래’ 개념이 그의 설교에 매우 특징적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미래는 바로 그리스도의 희망(5월1일)이며, 하나님에게 숨겨져 있는 세계이며, 우리가 현재의 생에서 맛보는 영원한 현재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현재나 미래에 다같이 하나님 안에, 하나님 통치 가운데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 홍성사, 1992, 100쪽. 이하 ‘무엇을’).

미래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정치적 권모술수와 음모를 꾸미는 자들의 것도 아닙니다. 미래는 ‘스스로 있는 자’의 계획과 행동으로 채워져 갈 미지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과 기대 가운데서 미래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미래의 시간을 채워 가는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빈집’ 70).

임 목사가 언급하고 있는 미래 개념이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나 <오시는 하나님>에서 인용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설교자가 충분하게 이해했다면 신학 대가의 진술들을 자신의 설교에 적용시킨다는 건 바람직하다. 간혹 설교의 영성과 신학의 영성을 별개의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큰 오해이다. 영성은 성령의 활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의 정신적 능력이라는 점에서 신학이나 설교 모두 동일한 영성에 토대하고 있다.
그는 2003년 대강절 둘째 주일에 행한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설교에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비유를 자신의 독특한 영적 착상에 근거해서 설교한 적이 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이 막힌 사람들이며, 결과적으로 자기와의 소통도 막힌 사람들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이르는 통로는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길에 달려있다. 신랑이 올 때까지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은 교회의 어떤 규범에 묶이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소통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 설교의 중심도 역시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하나님의 현존에 놓인다.
바로 이런 데서 우리는 일반 설교자들의 상투적인 설교와 영성의 깊이에 들어간 임 목사의 설교를 구별할 수 있다. 일반적인 설교는 대개 깨어있는 처녀가 되기 위해서 교회 봉사, 예배와 기도회 출석, 전도 같은 종교행위를 강조하지만, 임 목사의 설교는 전혀 다른 지평을 뚫고 있다. 우리가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는 삶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열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곧 영성이다.
임 목사의 이러한 신학적 영성이 신자들의 모범적인 삶과 사회봉사, 구원 이후의 성화, 철저하게 변화된 삶을 강조하는 설교자들의 영성과 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건 아직 임 목사의 영적인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또는 내가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혼선이다. 그가 비교적 의식이 있는 설교자들과 비슷한 내용을 설교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의 영적인 시야는 그들과 전혀 다른 데 놓여 있다. 오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또렷하게 의식하고 있는 설교자의 영성은 훨씬 근원적이고, 훨씬 초월적이고, 훨씬 통시적이다. 하나님이 ‘오신다’는 신학적 명제와 그것의 영적인 깊이를 들은풍월로 흉내는 낼 수는 있어도 그것의 실체 안으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깊이를 들여다보려면 종말과 현재의 변증법적 상관관계를, 또는 모든 생명이 완성되는 종말이 오늘의 삶에 어떻게 선취(先取)되는지 실제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인식하고 체화하는 경험이, 즉 영적 돈오(頓悟)의 경험이 선행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임 목사는 단지 변죽을 울리는 설교자들과 전혀 달리 영적인 실제의 정곡을 짚고 있다. 과연 그게 사실인지 그의 설교를 좀더 추적해보자.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라지 뭐!
내면의 빛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일까? 우선 이런 인식과 경험은 단숨에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해야한다. 그림공부나 음악공부에도 오랜 훈련 과정이 필요하듯이 어떤 영적인 현실성을 깨우는데도 그에 못지않은, 혹은 훨씬 치열한 공부가 필요하다. 오랜 묵언수행으로 도(道)에 이르려한 동양 선승들의 삶에서 우리가 배우듯이 영적인 경지는 로또 복권 당첨이나 콘서트 입장권 구입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의 복음은 자기 수양이라기보다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원칙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이런 원칙론이 극단화하면 어떤 자극을 통해서라도 믿음을 강화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 지상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는 곧 인간의 주관주의적 신앙이 성령의 존재론적 계시능력을 위축시키게 된다는 뜻이다.
말이 좀 옆으로 흘렀다.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직접 질문하자. 우리는 모새골의 영성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현존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부정과 긍정의 대답이 겹친다. 우선 부정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영적인 공부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듯이 언어를 통한 배움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이 말은 곧 아무리 뛰어난 선생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현존을 규정하거나 처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적인 선생은 자기의 경험을 상징적으로 서술하면서 제자들에게 일종의 화두를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선생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선생의 영적인 손가락이 지시하는 현실성을 나름으로 익혀야 하며, 보아야 하며,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선생은 그 제자의 인식과 경험을 교정해줄 수 있을 뿐이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복음을 강제로 신자들에게 주입시키려고 닦달하는 것은 그가 영적인 가르침의 본질에 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증거다. 모르면서도 안다고 고집 피우기만 하면 통하는 게 우리의 목회 현실이긴 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영성훈련은 하나님의 현존으로 들어가는데 긍정적인 역할도 한다. 특히 스승을 찾아서 출가하던 우리 동양의 전통이나 좋은 교수를 찾아 대학을 옮겨 다니던 서양의 전통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영적인 깨우침에 도달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이런 공부에서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영적인 현실성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인식을 벗어나지만 거기에 이르는 훈련만은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하면 혀를 주님의 지체로 잘 길들일 수 있겠는가? 우리가 혀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홀로 있는 삶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길들이지 아니하고는 혀를 길들일 수가 없습니다. 혀는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내적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려면 홀로 있는 삶의 훈련이 필요합니다.(‘삶’ 45).

그러나 여기서 임 목사가 언급하고 있는 삶의 훈련, 혹은 영성 훈련을 어떤 방법론인 것처럼 오해하지 마시라. 영성마저도 일종의 종교적 기교처럼 생각한 채 상담 심리학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임 목사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어떤 규범이나 종교 행위로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어떤 완전한 인간 형성에 두고 있지도 않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적 오류에 빠진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해결되지만 성화의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윤리적 실천과 심리적 치유에 힘을 쏟아야한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겉으로만 보면 임 목사가 제시하는 ‘삶의 훈련’과 다른 목회자들이 주장하는 성화의 노력이라는 게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임 목사는 인간 자체를 수련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마저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본다. 우리에게 내면의 빛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바른 믿음, 그것의 심화, 그것과의 일치가 영적 훈련이다.
따라서 임 목사에게는 인간의 약점, 상처, 모순까지 긍정된다. 나는 그의 이런 영성을 ‘큰 긍정’이라고 본다. 이것은 곧 인간적 요령과 테크닉으로, 사람들은 그것을 영성교육이며 훈련이라고 착각하지만, 자기를 성취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에 맡김으로써 자신의 약점까지 긍정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4월10일)이라는 설교에서 이런 독특한 영성을 발견할 수 있다.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 본문을(눅 18:1-8) 중심으로 전개된 그 설교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거듭나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늘 잘 풀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상태로 들어갑니다. 재판관이 과부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것은 기도에서 하나님이 침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도 과부는 계속해서 요청했습니다. 즉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기분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사람의 기분을 넘어서 하나님에게 나갑니다. 사업에 어려움을 당하는 신자들의 호소를 들을 때 한편으로는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라지 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실패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에게 집중할 수 있다면 결국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라지 뭐!”라는 그의 어투에서 그가 바라보고 있는 영성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 땅에서 당하는 삶의 시련이 긍정되고, 인간의 욕망까지 긍정되는 ‘큰 긍정’의 영성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당해야 할 고난과 시련, 우리의 인간적 약점까지 하나님의 현존에 이르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깨우침이 우리에게 분명하다면 우리의 삶은 전혀 새로운 경지에 들어선 셈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런 사실을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런 영적 현실 안으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영적인 현실성을 어렴풋하게 감지하고 있는 필자 자신도 실제적인 삶에서는 어림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영적인 실체를 또렷하게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세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임 목사 같은 영적인 스승에게서 배울 게 많을 것이다.

실존적 영성과 역사적 영성
그런데 영적인 스승에게도 한계가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여전히 그의 영적인 깊이를 충분하게 포착하지 못했다는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설교에서 무언가 아쉬운 ‘2%’가 느껴졌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그것은 곧 그가 신앙적, 신학적 용어를 충분하게 해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설교에 추상적인 부분이 엿보인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그의 진술을 들어보자.

부활의 영이 있는 자는 이미 새로운 부활의 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부활의 생은 아닙니다. 부활의 궁극적 실체는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완전히 드러나게 될 때 우리의 부활의 실체도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무엇을’ 79).

현대신학의 대가들에게서나 맛볼 수 있을법한 이런 진술을 청중들이 따라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감추어져’ 있다는 말의 신학적 심연을 누가 새겨들을 수 있을까? 이 진술이 지시하고 있는 은폐와 노출의 변증법적 관계는 상당한 정도의 신학적 사유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다. 3월27일에 행한 부활절 설교에서도 ‘감추어진 생명’(골 3:3)은 구체적으로 해명, 또는 해석되지 않고 단지 서술되고 있을 뿐이다. 임 목사는 스테인 글라스와 빛의 관계를 통해서 영의 현상을 해명하기도하지만,(‘빈집’ 40) 자신의 설교에 등장하고 있는 신학개념을 충분하게 관통해 나갈만한 해석학적 토대가 부족해 보인다. 그게 아니면 혹시 그는 설교의 역할이 그런 해석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조금 더 나가보자.  
‘선한 목자’(4월17일)에서도 임 목사는 길을 잃었을 때와 돌아왔을 때의 삶을 영적 시각에서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지만, 그리고 영적 투쟁과 그 치열성에 관해서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선과 하나님의 관계’에 관한 해명에는 소홀하고 있다. 그는 아마 우리의 모든 삶을 맡겨야 할 그 선한 목자 자체에 관한 해명이 없어도 청중들이 충분히 이해한다고 전제하는 것 같은데, 그게 과연 옳을까? 5월1일 설교 “의를 위한 고난”(시 66:8-12, 벧전 3:13-18)에서도 이러한 구도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를 희망하기 때문에 사람의 칭찬이나 반응에 상관없이 의를 행할 수 있다는 게 그 설교의 요지이다.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도 ‘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명이 없는 탓에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위가 당위론에 떨어지고 말았다.
내 생각에 선, 의, 사랑, 희망 같은 성서의 주제들은 완료된 도그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으로 인해 우리의 삶과 역사에서 발생하는 다층적이고 개방적인 힘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그 층들을 뚫고 들어가지 못할 경우에 설교는 추상성을 면할 수 없으며, 설교의 추상성은 결국 삶의 역동성을 훼손하게 된다. 이는 곧 설교자가 모순, 역설, 양면성, 상호성 등으로 가득한 구체적인 인간의 삶과 역사를 단순하게 처리하거나 일방적으로 재단한다는 말이다.
이런 단순화의 결과로 인해서 임 목사는 북한의 김정일을 ‘미치광이’(5월1일)라고 표현하게 된 것 같다. 지나가듯이 던진 말이긴 하지만 영적인 현실성의 심층에 들어가 있는 그에게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건 의외였다. 물론 그가 옳게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는 외면적 현상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속사정이 숨어있다. 사실 김정일만이 아니라 미국의 쌍둥이 빌딩을 파괴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도 미치광이이고 그걸 빌미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아프가니스탄을 박살내고 이라크를 초토화한 미국의 부시도 역시 미치광이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쩌면 여리고와 아이 성을 공격하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든 주민을 몰살시킨 여호수아도 역시 보는 입장에 따라서 미치광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 성서의 야훼 하나님은 대체 누구라는 말인가?
내가 여기서 무례를 무릅쓰고 거칠게 표현한 이유는 설교자에게도 역시 인문학과 사회과학적인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에 있다. 그 통찰력은 곧 개인의 실존적 영성과 구별되는 역사적 영성이다. 우리에게 그런 준비가 충분하지 못하다면 일반 목사들이 공산주의를 사탄처럼 비난할 때 자기의 판단을 유보한 바르트처럼 침묵을 지키는 게 훨씬 지혜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의 영이며 종말의 영인 성령이 끌어가는 이 역사의 신비를, 임 목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신비를 설교자가 개인의 실존적 영성이라는 범주에 한정해서 규정하는 경우에 그 역사는 피상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임 목사의 설교가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와 질적으로 구별된다는 내 생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성의 깊이와 크기가 그런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삼층천의 신비한 세계를 경험했다는 바울과 삼위일체의 신비를 정확하게 해명하고 있는 어거스틴이 여전히 여성 차별적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어거스틴 수도회 출신인 마틴 루터가 지동설을 악마의 주장이라고 단정했으며, 퀘이커 교의 태두인 조지 폭스가 올리버 크롬웰과 찰스 왕의 비민주적 정치행태를 정확하게 뚫어보지 못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교 영성의 대가들에게서 발생하는 역사과학적 영성의 결핍은 한 개인이 어찌 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사실에 있다. 내가 잘못 보았다면 용서 바란다.

수도회 전통의 복원을 기다리며···
지금까지 나는 주로 임 목사의 설교에 내재해 있는 영성만 다루었는데, 설교 형식에도 우리가 눈여겨볼만한 대목이 많다. 그는 천편일률적인 설교구조를 근본적으로 벗어나서 자유롭게 설교한다. 영의 자유로움이 설교형식의 자유로움까지 허락했으리라. 자유롭기는 하되 영적인 실제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그의 설교형식을 굳이 하나의 유형으로 규정한다면 ‘에세이식 설교’라 부를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이 세계를 자신의 영적 사유에서 넉넉하게 소화한 사람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에세이식 설교가 이전의 나열식 설교나 요즘의 강해설교와 왜, 그리고 얼마나 다른지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심층을 인식하고 인문학적 글쓰기의 훈련이 준비된 설교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런 설교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 지적하겠다. 나도 개인적으로 설교와 성서연구, 또는 이런 잡지에 내는 글이나 특강의 원고까지도 가능한대로 에세이의 틀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바라는 만큼 되는지 확신은 서지 않는다.  
어쨌든지 내가 임 목사의 설교 구조에 관해서 충분하게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그에 의해서 열리는 영성의 세계가 설교와 목회의 길을 가고 있는 후학들에게 훨씬 본질적인 요소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의 영성 운동이 한국교회의 내일과 직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 관해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지만, 모든 신앙생활의 토대인 영성의 심화와 풍요를 위해서 개신교회 안에도 프란체스코, 분도, 베네딕트, 또는 떼제 공동체 같은 수도회 전통이 (미래지향적으로) 복원되어야 한다. 혹시 아는가. 앞으로 2,3백년이 흐른 다음에 우리 신앙의 후손들이 임 목사가 주도하고 있는 모새골 공동체의 영성운동에서 한국 개신교의 독특한 수도회 전통을 발견할 수 있을는지. 내 생각에 임 목사는 이렇게 개신교 영성의 내일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끝으로, 6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내면세계의 문제가 거의 치료되었고, 삶이 ‘쉬워’진다고(3월20일) 말씀하시는 걸 보면 임 목사의 영성과 삶이 이미 통전되어 있는 것 같다. 여전히 작은 일에 휘둘리는 나로서는 그런 경지가 부러울 따름이지만 영적인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영과 일치하는(incarnation)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런 영적 수행을 위해서라도 내가 양평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면 모새골 공동체와 가깝게 지내면서 영성훈련과 정기적으로 열리는 산행에도 기꺼이 동참했을 텐데, 아쉽다. 대신 멀리서나마 인사를 드려야겠다. “임 목사님, 부디 건강하십시오. 개신교 영성의 내일을 향한 발걸음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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