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

통곡하는 설교자
그 장면은 내게 충격이었다. 만약 내가 남에게서 전해 들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일축하고 말았을 것이다. 열린교회의 김남준 목사(이하 ‘김 목사’)는 2005년 6월26일 주일공동예배 시간에 통곡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한다면, 김 목사는 그날 “흔들리지 말라”(고전 15:58)는 제목으로 설교한 다음, 청중들과 함께 통성기도를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남편을 여읜 젊은 아낙처럼 2분여에 걸쳐서 통곡을 했다. 모르긴 해도 지천명의 세월을 넘겼을 법한 한 남자 설교자가 자신의 모든 인격을 해체해 버린 듯 큰소리로 울고 있는 그 현상 앞에서 내 생각은 매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를 영혼의 심층에서 뻗쳐 나오는 통곡으로 몰아간 걸까? 그는 성령의 활동 앞에서 자기를 무장해제하는 순수한 영혼의 ‘불꽃’인가, 아니면 자기 역할에 몰입할 줄 아는 배우인가?
김 목사는 그 날만 운 게 아니다. 7월10일에도 통성기도 시간에 결국 울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설교 중간에도 울먹이는 경우가 흔하다. 내가 인터넷으로 확인한 그의 주일예배 설교는 6월26일부터 7월31일까지 6편에 한정되기 때문에 그 이전에도 여전히 그런 분위기가 자주 연출되는지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는 그런 ‘흐느낌’이 있는 예배야말로 열린교회의 모토처럼 ‘감격이 있는 예배’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집과 저서에 등장하는 흐느낌, 울부짖음, 눈물에 관한 대목만 따로 묶어도 몇 권의 책은 족히 될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설교자는 말씀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회중들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 때문에 설교 중 흐느끼기도 하였으며, 설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역사의 현장을 예배 속에서 보며 예상치 못한 엄청난 설교의 결과들을 인하여 경이로운 기쁨을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136쪽. 이하 ‘불꽃’).

그렇다고 해서 한 시간 반 동안 김 목사가 계속해서 울먹이며 설교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의 설교는 신학교 강의실을 방불하게 하는 진지한 내용으로 시작되며, 위트도 넘치고, 때로는 웅변가의 호소력도 엿보인다. 한편의 설교에서 ‘흐느낌’으로 묘사될 수 있는 부분이 양적으로는 일부라고 하더라도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 신앙의 결정체’(7월24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는(이름뿐인 신앙을 벗어나라, 188, 208쪽, 이하 ‘이름’) 그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를 예레미야 같은 눈물의 예언자라고 불러도 크게 잘못은 아닐 것이다. 솔직히 나는 통곡과 눈물로 표현되는 그의 원초적 패토스가 부럽다.
  김 목사는 그날 왜 통곡했을까? 어쩌면 이 글이 끝날 때까지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찾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설교를 정확하게 따라잡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 질문을 내 염두에 둘 생각이다. 여기에 바로 그가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그래서 상당한 정도의 효력을 보이고 있는 설교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성서 텍스트가 울게 하는가?
이 질문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가기 위해서 우선 그 날의 설교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쉽게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며, 늘 지성을 중요한 신앙적 인식론으로 간주하고(영적 기상도를 본다, 140쪽. 이하 ‘기상도’), 더구나 회중들의 반응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설교의 중심이 있다고 생각하는(‘불꽃’ 66) 설교자가 통곡했다는 사실은 성서 텍스트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김 목사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한 시간 반 동안 설교했다. 내 딸들은 35분 내외의 내 설교도 길다고 야단들이다. 김 목사의 설교는 길이만이 아니라 내용도 따지고 보면 어려운 편이었다. 그는 늘 교리적인 색채를 바탕에 깔고 설교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김 목사는 7월31일에 “지식으로 자라게 하라”(엡 4:14)는 설교에서 지성, 이성, 오성, 믿음, 지식, 경험이라는 신학적이고 철학적 개념을 한 시간 반 동안 밀고 나갔다. 설교자로서의 내공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무도 이런 설교를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짧고, 쉽게!”라는 현대 설교학의 원리를 완전히 비틀어버리는 설교가 열린교회에서 먹히고(?) 있다는 이 불가사의는 여러 각도에서 검토해볼만 하다.
6월26일에 그가 선택한 본문은 그 유명한 부활장(章)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공동번역, 고전 15:58). 그는 부활의 우주적인 차원과 개인적인 차원을 구분해서 설명했다. 하나님은 종말에 우리의 흩어진 몸을 다시 모아서 부활의 몸을 이루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매일 부활하는 영적인 삶을 추구해야 한다. 김 목사의 설명에 의하면 그런 영적인 삶은 곧 죄로부터 용서받는 것이다. 부활에 관한 일반론적인 설명을 끝낸 후에 김 목사는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굳건한 삶과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야한다는 사실을 열정적으로 선포했다. 사명을 견고하게 지켜야 한다는 대목에서 그는 불끈 쥔 오른쪽 주먹을 위 아래로 수없이 흔들면서 “왜 교회가 이렇게 냉담할 수 있는가?”라고 외쳤다. 그는 이 장면에서 계속 울먹이며 청중들을 향해서 책망하고 호소했다. 그는 (열린)교회를 보면 신자들이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그런 아픔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한 탓인지 급기야 그는 통곡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김 목사의 그런 열정을 조금이라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바울의 부활장 전체를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바울은 거기서 세 가지를 진술했다. 첫째, 부활의 증인들. 둘째, 부활의 확실성, 셋째, 몸의 부활. 이로 미루어볼 때 고린도 교회는 부활 자체를 부정하거나 또는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자들에 의해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15장 전체를 통해서 그런 이단들을 극복하고 있으며, 특히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56절)는 진술을 통해서 부활에 근거한 복음의 특징을 정확하게 논술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에 의해서 인간이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성취해야 할 모든 의무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김 목사가 선택한 본문(고전 15:58)은 부활 신앙을 올곧게 유지하라는 권고이며, 동시에 격려라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이 본문으로 설교했다면 청중들에게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희망하며 기뻐하라고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 목사는 신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하며, 통곡했다. 내가 보기에 울만한 장면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울었다는 사실을 보면, 김 목사는 텍스트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신의 주관적 종교경험에 치우침으로써 감정적으로 ‘오버’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신앙적 취향이기 때문에 내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길 이유는 하나도 없다. 다만 성서 텍스트를 향한 접근이 나와는 좀 ‘다르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참회의 영성
이 ‘다르다’는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신앙의 토대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결정적으로 중요할 수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영성을 현실에 대한 깊은 ‘긍정’에서 나오는 기쁨이라고 생각하지만, 김 목사는 죄와 심판과 ‘참회’에 의한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김 목사가 부활장을 본문으로 하는 이 설교에서 그렇게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기본적으로 참회의 영성에서 접근한다는 데에 있다. 그게 바로 김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앞에서 내가 흐느낌과 눈물이라는 단어가 그의 설교집과 저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다고 지적했는데, 그건 곧 그가 참회의 영성에 천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오늘날 조국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쇠퇴하면서 눈에 뜨게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이러한 회개를 보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회의 눈물이 없는 예배,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는 마음이 없는 기도회, 성경을 읽어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어두움 같은 것들은 모두 참된 회개의 부족에서 생겨나는 것이다.(‘기상도’ 126).

이미 예수께서 “때가 다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막 1:15)고 말씀하셨으니까 김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열정적인 설교자들이 청중들에게 회심을 강조하는 것은 틀린 게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그렇게 힘주어 말하는 ‘메타노이아’(회심)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도대체 어디로부터 어디로 돌아서라는 말인가? 물론 그들은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라는 복음찬송 가사처럼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으로 돌아서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너무나 막연하다. 이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김 목사가 통곡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신자들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죄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의 설교에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전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거룩한 빛이 예배의 현장에 들어올 때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죄악으로 가득 찬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죄에 대한 놀라운 각성은 성령의 능력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예배를 통하여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지 머리로만 아는 상식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미움과 원망의 죄, 공동체의 화해와 화목을 깨뜨린 자신의 허물을 보게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 53쪽, 이하 ‘맺힌 것’)

성령의 능력으로만 각성될 수 있는 그 죄라는 게 ‘미움’(‘맺힌 것’ 34, 48)과 ‘포악하고 무자비한 성품’(‘맺힌 것’ 136)이라는 말인가? 만약 복음이 이런 인격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이런 것들은 다른 종교인들이나 약간만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눈여겨본다는 점에서 복음의 차원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교양의 차원에 속한다. 너무 답답해서, 김 목사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 세상의 죄와 악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보기에 김 목사는 복음의 지평을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메타노이아’가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신자들을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예수에게서 배운 바에 따르면, 이 세상으로부터 교회로 돌아오는 게, 또는 미움과 포악한 마음을 버리고 교양인이 되는 게 회심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실행할 수 있는 사건을 자기가 성취하겠다는 생각으로부터 그것을 포기하는 게 바로 회심이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예수의 선포는 바로 이 사실을 의미한다. 바울이 부활장 56절에서 확인했듯이, 자신의 종교적 성취인 율법을 통해서 구원이 임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구원을 일으키신다는 엄정한 사태로 돌아서라는 선포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영적으로 영민하고 지성적으로 진지하신 분이 회심의 토대인 ‘하나님 나라’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말이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는 김 목사가 신자들을 향해 돌아서라고 불을 토하는 그런 세상의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셨다. 종교적인 교양인들이었던 바리새인들로부터 “당신은 왜 죄인들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느냐?”고 핀잔을 들을 정도로 그냥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삶을 긍정하셨는데, 왜 김 목사는 그런 세상에 진저리를 치실까?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린 이유는 그들을 회심시켜서 반듯한 사람이 되게 하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의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도 역시 나는 그가 틀렸다기보다는 나와 ‘다르다’는 사실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참회의 영성이 김 목사의 독특한,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고루하고 편협한 세계관에 의해서 침소봉대되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청교도 신앙
김 목사는 왜 이 세상을 나와 전적으로 다르게 보실까? 열린교회의 홈페이지와 저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김 목사를 아는 처지에서 뭐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가 사람들에게 전반적으로 호감을 줄만한 스타일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신학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서울 근교에서 우체국장을 역임하셨고, 전도사 생활 14년, 신학교수 9년의 경력을 거쳐 열린교회를 개척한지 10년이 넘었다. 김 목사의 외모는 동안인데다가, 천성이 좋은 사람 같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도 대체로 고압적이지 않아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한다. 한국교회를 향한 문제의식도 나와 비슷하다.
이렇게 의기투합할만한 부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 여기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밖에 없는 것 같다. 김 목사가 ‘청교도’ 신앙에 철저하게 경도되었다는 게 그 대답이다.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조나단 에드워즈, 리처드 박스터, 조지 휫필드, 존 오웬, 토마스 맨튼, 헨리 스쿠갈, 존 번역 같은 청교도들을 내세웠다. 개신교 설교자 중에서 종교개혁자들보다 청교도 지도자들을 더 많이 인용하는 설교자는 김 목사 이외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편식하면 사람의 건강에 적신호가 오는 것처럼 김 목사의 경우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김 목사의 삶과 신앙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김 목사가 자주 인용하는 존 오웬은 로마서 8:13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청교도 신앙의 중요한 세 가지 교리를 이끌어낸다.

죄의 정죄하는 능력으로부터 확실하게 자유로운 가장 정선된 신자들은 죄의 거하는 능력을 극복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오직 ··· 성령만이 이 일을 하실 능력이 있다. ··· 우리의 신령한 삶의 활력과 능력과 위로는 우리가 육체의 행위를 극복함에 좌우된다.(J. Owen, Works 6, 7ff., 제임스 패커, 청교도 사상, 97쪽에서 재인용).

내가 보기에 청교도 신앙은 두 가지 특징으로 해명된다. 하나는 평생 죄 문제와 투쟁하는 일에 관심을 쏟는 것이다. 기독도가 자기에게 매달리는 아내와 친구를 뿌리치고 장망성을 떠나 천성문으로 향한다는 <천로역정>의 주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끊임없이 기독교 영성을 죄와 회심에서, 그리고 육체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서 찾으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성령의 현재적 임재에 의한 신앙적 열정이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설교하는 순간에 성령이 임하신다는 사실의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위의 책, 400).
이런 청교도의 전통에 따라서 김 목사는 목회자의 가장 큰 사명을 ‘성도 스스로 모르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7월24일), 예배에 ‘흐느낌’이 있어야 하고, 사람들의 회심이 계속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여름성경학교 설교 시간에 초등학교 2,3학년 어린이들에게 십자가에 관해 설교했을 때 “비닐 장판을 깐 기도실 바닥이 눈물로 질퍽질퍽할 정도”로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이름’ 70). 내가 볼 때 초등학생들에게 일어난 이런 현상은 기독교적 영성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작용에 불과하다. 훗날 청소년 집회 때도 그의 설교가 정점을 향하여 줄달음치자 여기저기서 흐느껴 우는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설교가 끝났을 때에는 노천 광장을 뒤흔드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비에 젖은 땅바닥을 치며 우는 아이들과 주저앉아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하였다.(‘기상도’ 132).

김 목사에게는 전문적인 설교자가 되기 이전에 이미 청중들을 울릴 수 있는 카리스마가, 혹은 ‘끼’가 있었던 것 같다. 원래 청교도들은 감정보다는 깨달음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반해서 김 목사는 이런 젊었을 때의 경험이 깊이 뇌리에 박힌 탓인지 설교 시간에 이런 감정적인 접근을 자주 시도한다. 그가 설교 중에 조성모 톤으로 부르는 복음찬송은 청중의 심금을 울리기에 ‘딱’이다.
청교도 신앙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그것을 신자들에게 강요하느라 눈물마를 날이 없는 김 목사를 향해서 인간이 그런 편협한 구도에서 해명되는 게 아니라고 내가 아무리 떠들어봐야 무의미할 것이다. 그는 이미 그런 방식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교회를 개척한지 10여년 만에 수천 명의 교인들이 모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집필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하니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한물 간 청교도 신앙이 그에 의해서 다시 리바이벌하는 것 같다.

영적 결벽증
나는 청교도 신앙의 진정성과 열정이 김 목사의 설교와 목회 현장에서 아무리 실효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신앙이 한국교회의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교도들의 신앙적 특성은 17,18세기 영국 국교회와 또는 18,19세기 미국이라는 특별한 사회를 배경으로 일어난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기본적으로 그 당시 기독교의 금욕주의적 인간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퓨리턴(puritan)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그들은 절대적으로 ‘순수한’ 그 어떤 것을 향해서 비타협적으로 돌진한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을 ‘영혼 순수주의’, 또는 ‘영적 결벽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결벽증’은 깨끗함을 지나치게 즐기는 성벽이다. 다른 사람과 악수한 다음에도 곧 화장실로 달려가서 손을 씻는다거나 지하철 손잡이를 휴지나 손수건으로 닦은 다음에야 잡는 행동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위생건강을 위해서 가능한대로 청결한 생활습관을 갖는 거야 권장할 만 한 일이지만, 그것도 정도의 문제이다. 우리가 손을 아무리 자주 씻어도 여전히 온갖 균이 남아 있으며, 아무리 음식을 끓여먹어도 우리 위와 창자에는 박테리아가 득실거린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그런 균들과 더불어서 살아가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 결벽증에서 훨씬 본질적인 문제는 당사자가 대상을 왜곡함으로써 피해망상에 빠진다는 것이다. 자기 이외의 모든 세계를 불결하게 생각함으로써 접촉하기를 꺼려한다면 결국 그것은 대상을 왜곡하는 행위이다. 자기 자식에게 눈물을 보이며 5분마다 “손 씻어라.”고 닦달하는 어머니처럼, 거의 모든 설교가 죄와 심판과 참회를 목표로 진행된다면 그건 심각한 사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았어도 동물처럼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목양 불꽃에 빠져라, 157쪽. 이하 ‘목양’) 김 목사의 주장에서 나는 이런 결벽증의 닦달을 느꼈다. 그는 도대체 무얼 말하려는 것일까? 같은 목사이면서도 나는 그의 말이 낯설다. 그는 지금 신자들의 부도덕성이나 파렴치한 행위를 지적하는 걸까? 아니면 새벽기도회 드리지 않는 걸 말하나? 아니면 흐느낌 없이 예배드리는 죄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가 말하는 동물처럼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내가 보기에 그는 일종의 영적인 결벽증에 빠져있는 청교도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악하게 보고, 모든 세상 사람의 삶을 동물과 같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의 입에서 이런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쉽게 사는 것은 쉽습니다. 짐승처럼 사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 없지만 성도답게 사는 일에는 고난과 싸움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녀답게’ 사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 부인과 절제와 죄를 죽이는 싸움을 요구합니다.(‘맺힌 것’ 122).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포기하거나 짐승처럼 살기로 작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에 관해서 배우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중요한 신앙생활의 목표가 하찮게 취급되고 있습니다.(‘목양’ 151).

독자들께서는 ‘짐승처럼’이라는 김 목사의 진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아시겠는가? 나는 모르겠다. 어쩌면 김 목사는 거꾸로 “나는 오히려 당신의 생각을 모르겠다.”고 말씀하실 것 같다. 옳다. 두 사람 중의 하나는 분명히 무언가 근본에 관해서 모르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판단은 독자의 몫이고,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몫이다. 다른 한편으로 필자도 ‘설교비평’이랍시고 뭔가를 투덜대고 있으니 짐승 운운하는 그의 예언자적 독설에 대해 뭐라 할 말은 별로 없다. 그러나 김 목사와 필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만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짐승이다
김 목사는 짐승 같은 삶에 진저리를 치지만(‘목양’ 152, ‘맺힌 것’ 136,168) 나는 그게 바로 인간 삶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그는 짐승으로서의 삶을 부정하고 나는 긍정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짐승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자연적 조건들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런 요소들에는 우선 먹고 마시는 것, 성행위를 통해서 후손을 번식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무엇을 먹으면 반드시 ‘똥’을 누게 되어있으며, 후손을 번식하려면 ‘에로티시즘’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우리가 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모습까지 포함된다. 노파심으로 다시 한 번 더 확인해 두자. “그렇다면 거짓말과 미움과 폭력도 괜찮다는 말인가?”하고 묻지는 마시라. 그런 문제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교양의 지평이지 복음이나 존재의 지평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외다.
시인 황지우는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의 표제로 삼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82).

김 목사는 이런 주점에 앉아서 술잔의 수위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짐승 같다고 볼지 모르지만 나는 이런 모습까지 포함한 모든 인간의 삶을 귀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렇게 자기 존재(Sein)의 심층을 뚫어보려는 시인들의 삶이 나에게는 바로 현실로 다가온다. 이 말은 이런 게 곧 구원론적인 사건이라는 뜻이다.
다른 목사들의 신앙과 세계관에도 여전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지만 기독교 신앙이 자칫하면 순수주의에 함몰됨으로써 오히려 현실로서의 인간을 잃어버릴 염려가 많다. 인간에게 있는 짐승으로서의 삶이 부정되면 보기에는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다. 우스갯소리로, 서양에는 남녀의 성행위에서도 ‘청교도 자세’가 있다고 한다. 성마저도 그런 엄숙주의가, 그런 순결주의가 지배하는 삶이 건강한 것일까?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런 순수주의를 ‘키취’로 설명했다.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존재에 대한 정언적 동의의 미학적 이상은 똥이 부인되는 세계, 모두가 거기에서는 마치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세계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취(저속)라고 일컫는다.(송동준 옮김, 305쪽).

자신들의 신앙적 절대명제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불결하거나 불쾌한 것들은 아예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런 키취가 기독교 신앙 안에도 적지 않다. 이미 앙드레 지이드는 <좁은 문>에서 인간에게 있는 에로스와 섹셜리티를 죄라고 부정함으로써 결국 한 여자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현실 사회주의가 극단적 순수주의의 의해서 실패한 것처럼, 내가 보기에 도덕적 허무주의가 우리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 수도 있고, 개인의 인격을 파괴할 수도 있지만, 청교도의 도덕적 순수주의도 역시 이에 못지않은 위험성이 있다. 더구나 아무리 좋게 보아도 2,3세기 전에 영미 사회에서 일시적으로 필요했던 신앙적 정서에 불과한 청교도들의 영적 결벽증을 나사렛 예수의 복음과 연결시킨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 세상을 기독교 신앙과 적대적인 것처럼 가르치는,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의 악과 투쟁해야 할 것처럼 가르치는 성서 텍스트에 관해서는 여기서 논의하지 말자. 이를 위해서는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김 목사가 이 글을 읽고 정식으로 담론의 장 안으로 들어오신다면 그때 논의하자. 대신 나는 영적 결벽증과 도덕적 순수주의에 묶여 있는 청교도 신앙이 과연 도덕적인가에 대해서 질문하겠다. 이런 부분은 미국의 청교도적 신앙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한국 교회 설교자 모두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기독교 패권주의
이 세상을 전쟁터로 여기고, 전투적인 태도로 살았던 청교도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종교의 자유를 찾으려고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요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해서 미국에서 활동한 수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이 인디언들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운명에 어떻게 동참했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김 목사의 설교집과 저서를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이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 내가 잘못 보았다는 질정을 바란다.  
모르긴 해도 청교도들은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리차드 박스터(청교도 사상, 388)나 김 목사(‘기상도’ 136)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설교에만 관심이 있었지 인간 삶에 개입하고 있는 역사적 부조리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서에 손을 얹고 대통령 선서를 하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인디언들과 흑인들에게 사죄를 구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 아무리 양심적이고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이 잘못되었거나 역사를 바로 인식하지 못할 경우에 결과적으로 매우 몰염치하고, 파렴치하고, 더 나가서 패권적인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김 목사가 이런 청교도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탓인지 나는 그에게서 일종의 ‘기독교 패권주의’를 읽을 수 있었다.
일례로 그는 조국분단과 통일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다. 그는 남쪽과 북쪽의 이데올로기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중도적인 입장에서 적적하게 설명했다. 그는 ‘레드컴플렉스’에 빠지지도 않았으며, 설교자의 위치를 교회 내부로만 한정시키지도 않는다. “우리는 단지 교회 안에서, 교회만을 위하여 설교하도록 부름받지 아니하였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불꽃’ 163). 그러나 나는 통일문제에 관해 그가 무얼 말하고 있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는 분단의 벽을 허물고 마음 깊이 하나 되게 하는 일은 정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면서 “그 나라가 처한 문제나 그 민족이 놓인 정황이 어떠하든지, 그들이 고통하는 실정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불꽃’ 168)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꿈에도 그리는 조국은 그리스도 없이 단지 물질적인 부요를 누리며 함께 사는 사회가 아니라, 남과 북의 동포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되어 아오지로부터 마라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양의 함성으로 가득한 나라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가 열방 가운데 등불로 나타나고 열국 가운데 횃불로 타올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의 장엄한 행진을 역사 속에 보여주어 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일에 시기 나게 하기 위함입니다.(‘불꽃’ 168).

김 목사의 이런 언급은 원칙적으로 옳기도 하고, 수사적으로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무언가 알맹이가 빠진 것처럼 들린다. 그는 교회가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매진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보다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게 급선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복음으로 하나가 되지 않는 한 통일은 무의미하다는 말로 들린다. 백 개 이상의 교파로 분열되어 있는 한국교회가 남북통일 문제 앞에서 복음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만한 일이다.
김 목사는 조국의 통일에 진정한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그 통일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데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면 통일 후의 무정부 상태와 같은 북한의 정신적 공황이 선교를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기상도’ 209)는 그의 진술에는 기독교 패권주의가 엿보인다. 김 목사의 인격 자체는 결코 이런 패권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건 분명하지만, 청교도 신앙이 그를 그렇게 의식하도록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한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인디언들과 흑인 노예들에게 예수를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북아메리카 청교도들의 논리와 정치적인 통일보다는 남북 모든 주민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김 목사의 논리가 맞아 떨어진다. 청교도들의 입장은 어느 정도 이해할만 하다. 그들은 우선 영국 국교회에 맞서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을 유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런 극단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김 목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은 아무도 종교적인 박해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3,4세기 전의 영국과는 전혀 다른 종교 다원적 사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청교도 신앙을 문자의 차원에서 그대로 우리에게 주입시키려고 한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그 열정에 고개가 숙여지기도 한다.

성서해석의 오류
그의 설교가 내게는 그저 복음의 깊이에 이르지 못한, 그러나 나름으로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힌 청교도의 도덕주의적 잔소리처럼 들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내가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가 늘 지성에 호소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기상도’ 130) 내가 보기는 철저하게 센티멘털리즘에 기울어졌다는 사실도 더 따지고 싶긴 하지만 그저 서로 ‘다름’의 문제로 남겨두겠다. ‘거룩한 목회자와 어린아이 같은 교인들’이 아름다운 목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도 내가 이해할 수 없기는 매 한가지이다. 나는 신자들을 성숙한 사람들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리와 생명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목양’ 154),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한다고 열을 올리지만(‘목양’ 189) 그의 주장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사실도 역시 여기서 더 이상 문제 삼고 싶지 않다. 신기하게도 한국교회 신자들은 기복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모호한 설교에만 은혜를 받는다.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고 본인 스스로 놀라워하고 있는 최근의 저서 <게으름>이 나에게는 그저 “새벽종이 울렸네!”의 노랫말로 대표되는 새마을운동 독려서처럼 보인다.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마디 더 한다면, 단지 청소년들의 감수성에나 약발이 먹힐만한 내용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바람에 나는 찡그리지 않고는 두세 쪽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독자들에게 내 표현이 지나치게 감정적인 것처럼 읽혔다면 용서를 바란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김 목사가 심취해 있는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이 빚어내는 결과들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잘못이라기보다는 내 생각과 ‘다르다’는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성서 해석과 그 적용의 오류만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다름’이 아니라 ‘틀림’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예배의 중심을 설교에 두고 있으며, 설교는 방법론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의 신앙 인격이라고(‘불꽃’ 137) 생각하고, 말씀의 막장에 들어가서 진리의 석탄을 캐는 일에 전념하고 싶다고 호소할 정도로 말씀 해석자로서의 진정성을 확보한 사람이기 때문에(6월26일), 그리고 늘 자신의 가르침에 자신만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오류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몇 가지 내용을 짤막하게 따라가 보자.  
야곱이 죽은 다음에 요셉의 형들은 야곱의 유언을 빙자해서 요셉에게 용서를 빈 적이 있다. 그런데 김 목사는 이들이 요셉에게 전한 야곱의 유언을 모두 거짓이라고 단정한다. “아버지 야곱은 죽기 전에 그런 유언을 하지 않았습니다.”(‘맺힌 것’ 194). 물론 성서 텍스트가 그 사실 여부를 확정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야곱이 그런 유언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한다는 것은 성서 텍스트의 깊이를 놓치는 어리석음이다. 김 목사의 주장과 반대로 폰 라트는 그런 단정을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김 목사는 엘리가 하나님의 의무를 이탈한 실패한 제사장으로 최후를 마쳤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의 목자로서의 그의 섬김은 단지 돈을 버는 세속적인 직업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종교적인 삯꾼으로 전락한 것입니다.”(‘목양’ 33). 그는 엘리와 그의 아들들을 혼동한 게 아닐까? 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신 교수 출신 설교자의 이런 주장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요한일서 4장3절은 분명히 초기 기독교 당시의 이단이었던 그노시스트를 향한 경고인데도 불구하고 김 목사는 그것을 “성경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영적인 운명”에 대한 것이라고 곡해하고 있다.(‘기상도’ 176).
아마 어떤 분들은 내가 김 목사의 작은 실수까지 헐뜯는 악동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그의 우연한 실수를 문제 삼는 게 결코 아니다. 인간의 영혼이 걱정되어 통곡할 정도의 영적인 열정이 있으며, 목회의 중심을 설교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일어날 수 없는 오류를 문제 삼고 있을 뿐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 이외에도 크고 작은 문제들은 많다.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와 병행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놓고 예수가 단번에 설교한 것처럼 주장한다거나(‘불꽃’ 128, 142, 213), 중세기에 제시되었던 소위 ‘배상만족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맺힌 것’ 56,114), 예수의 용서가 쉬운 일이었다는 주장(‘맺힌 것’ 65), 예수탄생 설화와 연결된 유아살해 명령을 ‘피비린내 나는 영적인 싸움’이라고 확대해석하는 것(‘기상도’ 175)도 논란거리이다. 이런 문제들을 거론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으니까 접어두고, 청교도적 신앙의 특징을 가장 그림처럼 보여주는 한 가지 오류를 짚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자.

피리 부는 장터아이
김 목사는 예수께서 주신 유명한 비유 ‘장터 아이들’(마 11:16-19, 눅 7:31-35)을 이렇게 전달하고 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탄하시던 세대와 같은 시대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가슴을 쳐도 애곡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인들의 일반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불꽃’ 335, 336 참조).

김 목사는 이 비유를 정당하게 인용한 것일까?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 비유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들어보면 아주 명백하다. “너희는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하고 말한다.”(공동번역, 눅 7:33,34). 이 설명에 의하면 피리를 불고 가슴을 치는 아이들은 금욕적으로 살았던 세례요한과 평범하게 살았던 예수가 자기들의 요구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투정부린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킨다. 이런 건 그렇게 심오한 신학적 사유를 거치지 않고 그저 문맥만 따라가면 충분히 포착될 수 있는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김 목사는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예수의 해명을 제외한 채 이 비유 자체만 놓고 본다면 김 목사의 설명처럼 피리 부는 아이들이 곧 하나님의 일꾼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개연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비유에 근거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 거룩한 하나님이 모임 가운데 임하여 그 임재를 체험하도록 해주기를 사모하는 갈급함이 없는데 무슨 신앙의 감격이 있겠습니까?”(‘불꽃’ 335)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바리새인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받아들였다는 본문의 결론(35절)과도 한참 거리가 있는 해석으로서, 전형적인 견강부회이다.
어쩌면 김 목사는 무의식중에 그 비유를 정확하게 인용한 것인지 모른다. 그는 장터에 앉아 피리 부는 아이들처럼, 예수를 향해서 “왜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가?”하고 못마땅해 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을 향해서 “왜 당신들은 ‘게으름’을 피우는가?” 책망하고 있다. 만약에 예수가 2천년 살아가시던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면 김 목사는 예수를 불쌍하게 여기면서, “인간아, 왜 그렇게 사냐?”고 계속 울먹이며 채근할 것 같다.
이 대목에서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게 무엇인가, 하고 묻지는 마시라. 그건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처럼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또한 김 목사의 설교에 은혜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열린교회가 한국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상기시킬 필요도 없다. 그것은 종교사회학자가 간단하게 해명할 수 있는 현상이다. 나는 다만 김 목사의 설교를 이렇게 진단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에 의해 포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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