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상상력과 신학적 상상력
-여주성결교회 이성관 목사-

필자는 활천사 편집부를 통해서 여주교회 이성관 목사님(이하 ‘이 목사’)의 설교문 15편과 동영상 10편, 그리고 설교집 <사다리가 있습니까>를 넘겨받았다. 2000년 성탄절에 강남교회에서 출판한 이 설교집의 뒤표지 날개에 이 목사의 경력이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이 목사는 서울신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윤리를 전공했으며, 에모리대학교의 캔들러 대학원에서 설교학을 공부했다.(D. Min can) 이 목사의 부친과 형제들, 그리고 매제들도 모두 목회자이며, 이 목사의 할아버지가 순교자 이판임 장로라고 한다.
이 비평 글쓰기 초장부터 이 목사의 이력을 거론한 이유는 그의 설교를 추동하는 핵심적 요소들이 그의 이력에 이미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간단히 추리면 세 가지이다. 첫째, 그가 대학원에서 전공한 기독교 윤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함으로써 그의 설교에 인간 삶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했다. 둘째, 이 목사는 목회학 박사 과정에서 설교학의 큰 스승들에게 영향을 받음으로써 나름으로 고유한 설교의 패턴을 개척할 수 있었다. 셋째, 그의 몸에 흐르는 순교자의 피는 그의 설교가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신비로운 영적인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원천이다.  
이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 가지 요소, 즉 문학적 상상력과 고유한 설교의 경지, 그리고 영성은 구별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 목사의 인격과 신학적 사유와 신앙 안에서 서로 변증법적으로 상호 연관됨으로써 이성관 유의 설교를 이루었으며, 지금도 역시 그 과정 중에 있다. 오늘 필자의 소임은 이 목사의 설교를 ‘이성관 유’라고 부를만한 근거가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에 보충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데 있다.

설교의 본질주의
필자가 이 목사의 설교를 대하면서 받은 가장 강렬한 인상은 그가 성서 텍스트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을 향해서 놀라운 집중력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는 30분 동안의 설교 시간에 변죽을 울리는 일 없이 흡사 비너스 상을 조각하는 예술가처럼, 또는 외줄 위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곡예사처럼 신앙의 본질에만 천착하고 있었다. 그는 신자들을 향해서도 역시 그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쉽게 떠나고, 쉽게 포기하고, 본질이 아닌 것들에 묶여서 거기서 멈춰 있으면 우리는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는 예수님은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기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칠 일도 생기지 않겠지요. (“두로와 시돈에서”)

필자는 그의 이러한 특징을 ‘설교의 본질주의’라고 일컫고 싶다. 청중들의 요구와 성서의 요구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게 아니라 오직 성서의 요구에만 귀를 기울이는 설교자라는 말이다. 수영을 하려면 두 발을 땅에서 완전히 떼어내고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말씀의 본질에만 영혼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이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본질주의적 성격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목사들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그런 본질을 전하는 거 아니냐,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왜 하느냐, 하고 의아해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 신앙의 본질만 설교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주어진 은사가 아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 설교는 잔소리로 떨어진다. “설교하고 있네!”라는 표현이 잔소리처럼 들리는 말에 대한 비아냥거림인 것처럼 설교와 잔소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매우 미묘한 경계선에서 발을 헛디디면 잔소리가 되고, 바르게 디디면 설교가 된다. 기도해라, 전도해라, 십일조 해라, 사랑해라, 충성해라 등등, 많은 신앙적 가르침이 한끝차이로 어떨 때는 설교가 되고, 어떨 때는 잔소리가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어떤 어머니는 예의 잔소리로 이 아이를 다그칠 것이다. 공부해라. 다른 애들은 밤 12시까지 공부한다는 데 너는 10시만 되며 자냐. 거꾸로 어떤 어머니는 아이가 솔깃해할 약속을 줄 것이다. 다음에 3등 안에 들면 최신형 핸드폰을 사주마. S대학에 합격하기만 하면 승용차를 뽑아주겠다. 그것이 채찍이든, 당근이든 학습 자체 이외의 요소로 아이들을 닦달하는 행위는 잔소리이다. 반면에 아이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그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학습결과와는 상관없이 학습 내용자체만을 바르게 제공하는 행위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다. 성서의 말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을 강요하는, 그래서 그의 말이 잔소리처럼 들리는 설교자와 달리 이 목사는 성서 언어의 본질에 지독하게 매달리는 설교자이다.  
필자는 이런 설교만이 청중들의 영성을 살린다고 본다. 선정적인 예화에 휩쓸리지도 않고, 어떤 종교적 권위에 안주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일종의 포퓰리즘에 흔들리지도 않은 채 하나의 푯대를 향해서 구도 정진하듯 나가는 설교야말로 청중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상상력
설교자들이 설교의 본질주의라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서 텍스트와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대한 깊은 인식이 요구된다. 그것에 관한 깊은 인식이 따라주지 않는 설교는 교리문답처럼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단조로움을 견뎌내지 못하는 설교자와 청중들은 변칙 플레이를 펼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사람의 종교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에 설교의 중심을 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심리치료의 기제로, 또는 처세술의 방법론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이런 위기의 뿌리는 곧 성서를 영적인 깊이에서 읽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필자가 보기에 바로 이 대목에서 이 목사의 설교 능력이 돋보인다. 그가 설교의 본질주의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성서 텍스트를 심층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성서 해석의 천편일률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뽕잎만 먹으면서도 명주실을 뽑아내는 누에처럼 그는 성서 텍스트라는 문자의 표층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생명의 세계를 풀어낼 줄 아는 설교자이다. 그에게 성서 텍스트의 숨어 있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은 곧 문학적 상상력에서 주어진다. 이 목사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이렇게 규정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저의 이야기 설교는 상상력의 설교입니다. 물론 공상이나 망상과는 다릅니다. 추상적인 상상과도 다릅니다. 다 실현 불가능한, 실제로 있지 아니 한 일들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주는 상상력은 현실적입니다. 실제적입니다. 그리고 사실 귀납법적인 설교는 그 발원이 현대 과학이었거든요. 상상력이 전화를 만들어 내고, 진공청소기를 만들어 냈지 않습니까?(설교집 <사다리가 있습니까>에서, 이하 ‘사다리’)

이것은 옳은 자평이다. 그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그리듯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성서 본문을 살아 움직이게 할 줄 아는 설교자이다. 상상력이 설교 행위에서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성서 자체가 고도의 상상력에 의한 작품이라는 사실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다. 예컨대 메시아 시대에 대한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표현은 예언자적 상상력의 결과이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중략>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그뿐만 아니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암 5:24)는 아모서 예언자의 진술이나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는 요한계시록 기자의 진술도 역시 놀라운 예언자적 상상력에 의한 말씀들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는 이런 신앙적 상상력에 의해서 형성된 말씀 사건의 압권이다. 노파심으로 한 마디 해 두자. 이 목사가 이미 지적했듯이, 여기서 말하는 상상력은 공상이나 망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온 영적 통찰력이다. 이사야, 아모스도 그렇지만 예수님의 수많은 가르침은 인간과 세계의 영적인 현실에 분명한 토대를 둔 상상력이다. 이런 상상력에 의해서 성서는 단순히 문자와 정보의 전달에 머물지 않고 궁극적인 생명이 완성될 종말론적인 진리의 길을 열고 있다.
이런 말씀 해석의 상상력이 이 목사의 설교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자. “두로와 시돈에서 생긴 일”(마 15:21-28)에서 이 목사는 단순한 사실 전달에 불과한 21절 말씀에 근거해서 이렇게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예수님께서 “거기서 나가셨다.”라고 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 가셨다고 했습니다. 순식간에 이스라엘을 벗어나 가장 북쪽에 있는 수리아라는 나라로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단순한 여행 같지만, 잘 살펴보면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시비를 걸었습니다. 신앙의 전통을 위반했다는 것인데, 식사 할 때 손을 안 씻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필자가 위의 글을 약간 길게 인용한 이유는 바로 이런 대목에서 이 목사가 성서 텍스트를 어떻게 접근하는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설교자들은 단순하게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강조하는 설교로 직접 들어가지만 이 목사는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셨다.”는 문장 안에서 본문을 심층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줄 안다. 즉 그는 이 사건 앞에 서술된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을 지적함으로써 가나안 여인의 신앙을 돋보이게 했다는 말이다. 이런 통찰력에 의해서 평면적이고 정적이었던 성서 본문은 이제 입체적이고 동적인 세계로 발전한다.
2005년 11월6일 설교에서 이 목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소위 탕자의 비유를 해석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탕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품꾼으로 일하겠다고 다짐했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한 신앙적 결단으로 해석하지만 이 목사는 다르게 해석했다. 집으로 돌아가 종이 되겠다는 탕자의 생각은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게 된 것이라고 한다. 구태의연한 눈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눈으로 성서 본문에 접근함으로써 이 목사는 탕자의 비유가 말하려는 그 중심을 포착하고 있다. 그는 그 설교에서 청중들에게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삼상 1:12-18)이라는 설교에서 이 목사는 본문을 전후로 하는 전체 콘텍스트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세 사람을 통해서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설교했다. 이 설교에도 문학적 상상력은 빛을 발휘하고 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한나의 기도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반해서 이 목사는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그 상황을 매우 리얼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한나가 구체적으로 기도할 때까지 남편 엘가나의 또 다른 부인인 브닌나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이제 그의 설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에 집중하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 목사의 성서 해석은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서 다양하게 전개된다. 이런 상상력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인간 삶에 개입하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진술인 성서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설교 행위의 본질주의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의 모든 설교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이런 특징들은 설교자 자신과 청중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본질 이외의 것에 한눈을 팔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말이다. 이는 곧 고도의 피아노 연주의 세계를 알고,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피아니스트는 청중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직 음악의 세계에만 집중할 수 있으며, 그럴 때만 피아니스트와 더불어 청중들도 음악의 존재론적 즐거움에 빠져들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성서읽기의 통찰력
이 목사의 설교적 특징이라 할 문학적 상상력과 설교의 본질주의가 성서읽기의 통찰력을 어떻게 구현시키는지 한 두 대목만 확인해보자. “해피엔딩”(룻 1:1-5)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오미와 룻 사이를 맺어준 고부간의 따뜻한 정리(情理)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들의 소박하고 진실한 관계로 인해서 결국 이방인 여자 룻은 다윗 가문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일반적으로 나오미와 룻의 관계만을 설교의 중심 주제로 부각하는데 비해서 이 목사는 훨씬 심층적인 차원까지 파고들었다. 모압 땅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는 끔찍한 상황을 맞았지만 나오미와 두 아들은 살아 “남았으며”(3절), 그리고 두 아들이 죽는 참척(慘慽)의 슬픔을 당했지만 나오미는 두 아들과 남편 뒤에 “남았다.”(5절)는 것이다.

남았다는 것을 비극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떠나고, 아들들이 떠난 뒤에, 아무 대책 없이 남겨진 그 자체가 더 비극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남았더라.” 라고 말합니다. 남겨진 것입니다. 그들만은 하나님께서 남겨 주신 것입니다. 다 데려 가지 않고 남겨 두신 것,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러므로 남겨 두신 만큼, 그 뒤의 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이 목사의 성서읽기가 놀랍지 않은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경구가 여기에 해당되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남았다.”는 사실이 이제 이 목사에 의해서 전면으로 클로즈업되었다. ‘남은 자’는 구약성서 전체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남아있는 그 백성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지신다. 룻기서의 중심 메시지가 하나님은 누구이며, 그 백성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놓여 있다는 이 목사의 결론은 전적으로 옳다.  
“만일 주시어든”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과 물 위로 걸으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마 14:22-33)이다. 여기서 이 목사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에게 던진 두 마디 문장에서 설교의 동기를 캐냈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절)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만일이라는 말은 사단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라는 말로 유혹했습니다. 만일이란 말은 무한한 다른 가능성들을 상상하게 하는 말입니다.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 갈피를 못 잡게 만드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만일 하나님이 내 기도 안 들어주신다면, 만일 망한다면, 하면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람을 보고 두려움에 빠진 베드로는 “만일 주시어든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하지 않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 목사는 베드로의 고백이 바뀌었다는 그 미묘한 차이를 정확하게 제시했다. 이 설교의 결론은 “만일이라는 말을 빼십시오. 생각조차도 하지 마십시오.”였다. 이렇게 작은 단서를 통해서 신앙의 깊은 세계를 열 수 있다는 것은 이 목사의 성서읽기가 나름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목사의 설교행위에 나타나는 성서읽기의 통찰력은 위에서 지적한대로 신앙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맞물려 있다.
참고적으로 그리스도교 복음에 대한 이 목사의 이해를 가늠할 수 있는 그의 진술을 두 대목만 제시하겠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복음을 값싸게 만들지 마십시오. 복음을 세상적인 복에 관한 이야기라고 믿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헛되이 믿고 있습니다.”(보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성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다만 승리를 약속할 뿐입니다. 승리는 상대방에게 내가 공략 당하여 정복되지 않았으며, 지배되지 않고 물리쳐 이겨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이 세상의 문화는 성공 지향적입니다. 성공에 관한 것이 아니면 도태되고, 쓰레기장으로 직행합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행복과 성공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삶의 부산물이지 목표가 아닙니다.”(십자가의 길)
이제 우리는 이 목사의 신앙과 설교가 얼마나 정확하게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짚은 셈이다. 복음의 본질에 분명하게 서서 문학적 상상력으로 성서 텍스트의 깊이를 노련하게 풀어내고 있는 이 목사의 설교에 대해 필자는 더 이상의 코멘트가 필요 없을 정도로 만족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의 설교가 어떻게 새로워질지 기대된다. 다만 주마가편의 심정으로 한 마디 하는 걸 양해하시라.  

신학적 상상력
약간 도발적인 뉘앙스가 풍기는 제목의 설교 “어떻게 하시렵니까?”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논쟁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도 바울의 편지를(고전 3:11-15) 본문으로 한다. 우선 필자의 생각에,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배경에서 나왔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유대교와 완전히 구별되는 헬라파 그리스도교인들과 유대교적 전통을 그대로 안고 가려는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이 경쟁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이런 긴장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갈라디아 공동체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9) 바울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파송한 사람들이 현장에 나타났을 때 그 자리를 피한 베드로와 바나바를 책망한 일까지 있었다.(갈 2:11 이하) 만약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바울의 과격하고 치열한 투쟁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자칫 유대교의 아류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논쟁적인 맥락에서 바울은 일종의 혼합주의적 성격이라 할 율법적 복음의 위험성을 위의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 목사는 이 본문의 주제를 정확하게 붙들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곁가지에 불과한 ‘공력’과 ‘상’을 중심 주제로 삼았으며, 달란트 비유를 길게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가기만 하면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불공평한 일 겪으며 속상해 살았습니까? 남들과 비교되는 마음 상한 일들 겪으며 사셨습니까? 이제 진짜 차별되고, 구별되는 영원한 삶이 천국에서 시작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사다리)

필자가 보기에 이런 해석은 전형적인 견강부회에 가깝다. 우리의 상황으로 성경을 가져오지 말고 “우리가 그 성경의 상황과 사건으로 들어가야 한다.”(사다리)는 것을 강조하는 이 목사가 이번에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성서 텍스트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도 차별이 있다는 주장은 아무리 그 날이 송년주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성서와 신앙의 본질로부터 벗어나는 어리석음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필자가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대신 이 목사의 말로 대신하겠다. 그는 한 시간 노동한 사람이나 열 시간 노동한 사람이나 그들의 생산성과 상관없이 일용할 양식에 필요한 한 데나리온 씩 일당을 지급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차별화한 보상을 요구하는 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2005년 8월7일)
만약 위의 설교가 이 목사의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필자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을 것이다. 성서 텍스트에서 이런 정도 옆으로 기울어지는 설교행위는 흔하게 일어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목사의 설교를 접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그래, 이게 바로 복음적인 설교야!” 하는 기대가 컸기 때문에 이 대목을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짚었다. 이 목사도 필자의 이런 좋은 뜻을 헤아려 주리라 본다.
이심전심으로 상호간에 이해하는 것은 그렇다하더라도, 성서 텍스트의 행간까지 세밀하게 살필 줄 아는 이 목사에게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다른 설교에서도 간혹 이런 조짐이 보이는 걸 보면 여기에는 어떤 곡절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게 무언가? 필자가 보기에 이 목사의 성서 해석은 문학적 상상력의 영향을 과도하게 받음으로써 결국 신학적 반성의 자리가 축소된 것 같다. 위의 설교에서도 이 목사가 그 본문의 신학적인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조금이라도 염두에 두었다면 중심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었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 개념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조금 더 깊숙이 받아들였다면 소위 천국 상급론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위의 사태는 문학적 상상력과 신학적 상상력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데서 일어난 당연한 귀결이었다는 말이다.  
오늘 설교 현장에서 신학은, 특히 조직신학은 필수불가결의 공부인데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창조론, 교회론, 삼위일체론, 성령론, 칭의론, 죄론, 인간론, 종말론 등등, 그리스도교 교리의 체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는 한 성서 텍스트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설교가 청중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그리스도교의 영성으로 안내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그래서 성서와 영적인 호흡을 시도하려고 한다면 설교자는 반드시 조직신학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지난 2천년 동안 성서를 해석함으로써 얻은 영성이 바로 조직신학의 체계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옳다. “조직신학적 반성 없이 주석으로부터 직접 설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해석학의 질문들은 단지 미학적 판단을 통해서 견인될 뿐이다. 결국 설교자들은 자신이 어떤 고유한 신앙적 판단의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근본주의에 치우쳐버리지 않으려다가 시대정신의 다변적인 유행에 휩쓸려 버린다.”(신학과 철학, 14쪽)
이 목사는 최근에 여주교회로 임지를 옮기셨다고 한다. 그 교회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할 만하고, 실제로 교세도 상당한 것 같다. 목회자로서는 큰 규모의 교회가 기회일지 몰라도 설교자로서는 위기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서는 설교자가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목사는 대중적인 설교자는 아니다. 그는 청중을 감동시키는 데에 마음을 두는 설교자가 아니라 자신의 영적인 오솔길을 혼자 걸어가는 구도자적 설교자이다. 그런 사람이 대중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필자가 보기에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부탁드린다. 성결교회 역사에서 이 목사가 성서 텍스트로부터 울려나는 영적인 북소리를 향해 내면의 촉수(觸鬚)를 작동시킨 설교자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기로에 서 있는 이 목사에게 소로우의 <월든>에 나오는 한 대목을 빌려 필자의 생각을 전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지,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지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활천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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