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포즈의 뒤안길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뵙고 싶은 설교자
대중적인 설교자 중에서 필자가 한번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든 분은 오늘 설교비평의 대상으로 삼은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이하 ‘박 목사’)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이 말은 한편으로 필자가 박 목사에게서 배울만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설교만 듣고는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우선 그에게서 느낀 소통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일단 박 목사는 성서와 복음의 변죽을 울리는 게 아니라 본인이 해결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정곡을 치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거의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설교 명망가로 이름을 떨치는 대중 설교자들은 대개 설교 이외의 요소들, 예컨대 신유의 능력, 고상한 인격, 심금을 울리는 예화, 대중을 선동하는 기술, 빼어난 입담 같은 것으로 일정한 성과를 얻어내려고 하는 반면에, 박 목사는 그런 주변적인 요소에 한눈팔지 않은 채 흡사 하나의 표적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궁사처럼 성서의 세계와 성서가 가리키고 있는 영적인 세계만을 향해서 자신의 고유한 길을 가고 있다.
물론 피상적으로만 보면 다른 설교자들도 역시 성서를 텍스트로 삼아 설교하기 때문에 복음과 영적인 세계를 전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성서의 세계로 직접 들어가서 그 성서가 제시하는 영적인 현실을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단지 남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간접적으로 요령 있게 전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두 사람 모두 한 가지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앞 사람은 무엇을 ‘본’ 사람이고, 뒷사람은 그것을 ‘들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실체일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직접 ‘본’ 분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전해 듣고 풍월을 읊었을 뿐이라는 사실과 같은 맥락이다. 내가 보기에 박 목사는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에 계시되고 있는 영적인 실체를 나름으로 경험하고 실체화한, 몇 안 되는 설교자 중의 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인간학 넘어서
박 목사의 설교가 다른 설교자들과 구별되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즉 그에게 고유한 영적인 세계가 확보되었다고 볼 수 있는 단서는 설교의 중심을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에게 돌렸다는 데에 있다. 한국 교회의 설교와 목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인간학적 구조로 작동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겉으로는 하나님, 은혜, 믿음, 칭의, 할렐루야, 아멘 같은 용어들이 신자 개개인과 교회 공동체 안에 범람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매우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 부분에서 사람의 욕망과 세속적 원리에 의해서 끌려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목사는 한국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이런 인간학적 경향들을 매우 예리하게 뚫어보고 있으며, 어떤 점에서는 무모하리만큼 그것과 대결하고 있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는 구호가 한국의 모든 교회에서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박 목사처럼 그런 것들을 철저하게 상대화하는 일은 단순한 결기만이 아니라 깊은 신학적 통찰이 확보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그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전도와 봉사, 구제 이런 것들은 신자 된 가장 중요한 표는 아닙니다. 오히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은 전도를 요하는 것이라기보다 ‘구원이 전 인류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이 훨씬 큰 초점일 것입니다.”(로마서 강해 3, 의와 영광, 134). 물론 상식이 좀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전도와 기도와 헌금을 노골적으로 강조하지는 않겠지만 박 목사처럼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끊어서 말하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박 목사는 교인들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친교를 위해서 어떤 이벤트나 프로그램을 생산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다. 일례로 그는 신자들의 생일을 별로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데, 아마 남포교회 신자들 중에서는 냉정한 듯 보이는 박 목사의 이러한 태도를 섭섭하게 생각할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박 목사의 이런 태도는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복음 공동체인 교회 안에는 근본적으로 인간학적 방법론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혹은 그런 것으로 인해서 본질이 훼손되고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뚫어본다는 데에 있다. 그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이렇게 된 큰 이유 중에 하나가 저는 실존주의의 영향과 함께 현대 모든 과학과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심리학에 의한 피해라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이 실존주의 내에서 어떤 영향을 발휘하고 있느냐 하면 모든 기준을 우리에게 집중시킨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대단히 나쁜 확인법입니다.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저 사람과 살아야겠다.’ ‘나이가 맞느냐? 둘이 지금 좋게 결혼할 수 있는 위치냐?’ 이런 것은 상관이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자기 기분과 자기 입장에서 모든 것을 요구할 떳떳한 학문적인 근거를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리학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는 것이 상담학입니다.(의와 영광, 120).

한국 교회에 상담학이 정도에 넘칠 정도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을 필자도 상당히 우려하고 있는 중인데, 박 목사가 이 부분을 아주 오래 전부터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었다는 건 그의 신학적 안목이 어느 정도라는 걸 확인해준다.
박 목사의 목회관이자 설교관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이런 반(反)인간학적 기조는 복음적 구원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즉 그는 인간 구원이 인간의 요구를 채워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죄와 절망의 악순환 속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에 의존하는 데 있다고 본다. 이런 하나님의 주도적 구원 행위에 대한 그의 일관된 관심은 목회 초기에 출판된 그의 책 <하나님의 열심>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열심”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면 박 목사의 설교가 무엇에 근거하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내가 과문한 탓인지 박 목사와 그의 설교와 남포교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게 겨우 두 주일 전이다. 뒤늦게 박 목사의 설교를 접했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20년에 걸친 그의 설교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려고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수십 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를 모두 상대하기는 형편이 여의치 못했다. 대략 시기별로 나누어 초기와 중기는 설교집으로, 그리고 현재는 남포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설교로 대신했다. 설교집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열심>(새순, 1985년, 이하 ‘하나님’), <고린도교회와 성도들>(도서출판 엠마오, 1993, 이하 ‘고린도’), <의와 영광>(로마서 강해 3, 도서출판 엠마오, 1995, 이하 ‘의’), <독설>(규장문화사, 1998년, 이하 ‘독설’). 홈페이지의 설교는 주로 2001년에 행한 마태복음 강해와 2004년에 행한 이사야서 강해를 참고하였다.
‘하나님’은 1985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 1995년까지 32쇄에 이르고 있으며, 그 이후로 벌써 10년이 지났으니 40쇄 이상은 나왔을 것으로 보이는데, 개인의 설교집이 이런 정도의 호응을 얻었다는 건 한국 교회사에 기록될만한 사건일지 모른다. 그런데 나를 더 기죽게 한 건 다른 게 아니라 이 스테디 베스트셀러를 집필할 때의 박 목사가 겨우 30대 중반이었다는 사실이다. 경상도의 어느 작은 면 소재지에 있는 개척 교회에서 끙끙거리며 설교하던 나의 삼십 대는 한참 철이 없었던 것 같은데 비해서, 박 목사가 삼십대에 설교한 ‘하나님’은 오십 대에 이르러서야 성서와 기독교에 대해서 무언가를 약간 말할 수 있게 된 현재의 내가 읽어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내용과 논리가 탄탄하다. 원래 뛰어난 사람들은 젊었을 때부터 그런 능력이 드러나는 법이다. 바르트가 <로마서 주석>을 집필할 때와,  몰트만이 <희망의 신학>을 집필했을 때가 각각 삼십대 중반이었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30대 후반에 출판했다.
박 목사는 ‘하나님’에서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욥, 다윗, 엘리야, 베드로를 열다섯 번에 나누어 강해했다. 이런 성서의 인물전이야 어린이 주일학교로부터 부흥회에 이르기까지 단골 메뉴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반복해서 듣고 들어도 물리지 않는 소재이긴 하지만 박 목사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해석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됨으로써 새로운 빛을 내고 있었다. 전통적인 해석 방법은 이런 위인들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들어갈 수 있었던 능력을 감동적으로 전개하는 것이었지만, 박 목사는 이들을 신앙적인 위인의 관점이 아니라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로 끌어내린 다음에 그들을 그렇게 위대한 사람들이 되게 했던 하나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성서의 위인들을 무조건 존경하거나 그들 앞에서 공연히 주눅 들지 말고 오직 그런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만을 붙들어야 한다는 독특한 메시지로 그는 상당한 반향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방식의 가르침은 다른 설교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발견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지나가는 투로 언급될 따름인 반면에 박 목사의 설교에서는 일관성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모세를 부러워하지 마시고 그 모세를 이 항복의 자리까지 끌고 가시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그 자리에 인도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오늘도 여러분은 기쁨과 감격 속에 돌아가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모세를 그 때 만든 것 같이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이 감격 속에 걷게 하시기 위하여 지금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도 이 자리에 와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요, 뺏길 수 없는 우리의 자랑인 것입니다.(‘하나님’ 204).

성서에서 하나님의 주도적 구원행위만을 포착하려는 박 목사의 성서해석학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하다. 이런 입장에 근거해서 그는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신앙적 표본으로 제시되고 있는 충성과 헌신보다는 ‘신성의 충만한 것’에 집중하라고 열변을 토한다.(2004.1.4. 사 40:27-31 설교, 홈페이지. 이하 연월일 표시는 홈페이지 설교를 가리킴.). 사람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하게 믿었는가, 헌신했는가 하는 점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며, 오히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와 열심이 핵심이라는 이런 신학적 특성은 캘빈 신학의 모토인 ‘하나님의 영광’이며, 또는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인 ‘하나님의 큰 긍정’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박 목사의 이런 주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특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위를 몇몇 도식적인 도그마에 고착시킨 채 사람들의 열정과 욕망, 심리학적 기제만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한국교회 현실에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열심”은 우리에게 기독교 영성의 새로운 지평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구원 이후
박 목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열심”은 기본적으로 ‘성화’와 결탁되어 있다. 사람의 구원은 이미 하나님이 선택하심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 수 없지만 ‘구원 이후’에 전개되는 성화의 문제는 기독교인이 책임져야 할 현실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간섭하는지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박 목사처럼 기독교인의 삶을 ‘성화’ 개념에 근거해서 이토록 철저하게 물고 늘어지는 경우는 정통교회 안에서는 찾아보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20년 이상 그는 계속해서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이 주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초지일관이다. 물론 ‘천로역정’ 식의 인간 이해가 오늘 이 시대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는 내가 여기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철저하게 관념적이거나 도구적인 신앙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전개되는 성화의 과정으로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썩 좋은 가르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을 성화의 과정으로 본다는 이런 원론적인 주장이야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주제에 접근하는 박 목사의 방법론이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근거와 한국교회의 신앙적 현상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즉 그는 구원의 풍요로움을 충분하게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죄 문제로 인해서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신자들에게 신학적 성화론에 근거해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성화의 과정’에는 두 가지 국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죄악된 부분을 고쳐나가는 국면과 실제로 구체적인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어려움을 통하여 보다 높은 자리로 영광스럽게 나아가는 부분입니다. ··· <중략>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면서 얻어지는 고통을 통하여 점점 믿음이 자라가는 것을 ‘성화’로 이해하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음에도 당하게 되는 어려움을 통해서도 보다 높은 신앙의 경지로 끌어 올려지는 ‘성화’의 또 다른 국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많은 오해와 필요 없는 좌절감으로 절망하기 일쑤입니다.(‘하느님’ ,7,8).  

필자도 일단 박 목사의 진단과 문제의식이 정확하다고 본다. 구원이 흡사 음악회 입장권 정도의 차원에서 인식되는 한국교회 안에는 양 극단이 출현할 수밖에 없다. 한쪽에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에만 흥분하고 도취하고 있는 ‘열광’이, 다른 쪽에는 자신들이 여전히 죄와 더불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그 현실 앞에서 불안해하는 ‘절망’의 악순환이 자리 잡고 있다. 앞의 사람들은 홍해를 건넜다는 사실에 멈추어서 더 이상의 진보가 없는 이들이며(2004.1.4), 뒤의 사람들은 죄에 집착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다(‘의’ 44). 그의 모든 설교는 이런 두 부류의 신자들에게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박 목사의 생각에 따르면 이런 양 극단의 기독교인들에게 내재하고 있는 문제는 곧 성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부족이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기독교인의 성숙을 외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도취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망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의 성화가 곧 우리의 삶이라는 사실을 깨어있는 지성으로 또렷하게 인식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감상주의에 사로잡혀서 울고불고 하는 태도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의’ 30). “신앙이란 감정이 동원되는 것이고 기쁨과 희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들의 가장 큰 잘못은 그런 아우성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이와 같이 일종의 몰아의 경지로 가는, 그래서 자기를 잊으려는 몸부림, 이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사용되지 않기를 거듭거듭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의’ 62). 이런 대목에서 박 목사와 필자 사이에는 한국 교회 안에 사람들의 주관주의적 신앙체험이 과잉 생산됨으로써 벌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왜곡에 대한 공동의 인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도 나는 이번 박 목사의 설교 ‘읽기’에서 느낀 바가 많다.
그러나 박 목사의 주장에 필자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여기까지다. 왜냐하면 그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그의 대중적인 설득력은 내가 한참 배워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의 설교에 신학적으로 어딘가 꺼림칙한 내용과 구조가 적지 않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로 이에 대한 세세한 내용들은 접어두기로 하고 큰 단락만 짚어보려고 한다. 우선 결론적으로 한마디 한다면, 내가 보기에 박 목사는 ‘구원 이후’라는 구도에서 길을 잃은 채 자신이 극복하려던 한국교회의 인간학적 해석과 적용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말았다. 원래부터 그에게 신학적인 한계와 오류가 있었는지, 아니면 목회 과정에서 겪게 된 딜레마를 이론적으로 해결하려고 지나치게 의욕을 부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길을 잃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성화의 율법적 해석
위에서 박 목사의 관심이 ‘구원 이후’의 성화에 있다고 밝혔듯이 그가 투정부리는 듯한 한국 신자들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기독교인다운 삶, 인격,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독교인다운 ‘성품’을 강조한다는 건 우리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성화의 실체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혼란스럽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교양이나 인격에 있지 않고 자기 의존성으로부터 ‘하나님 의존성’(2004.11.21)으로 돌아서는 것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신학적인 견해를 밝히면서도 성화의 단계에서는 여전히 사람이 해결해야 할 구체적인 윤리와 성품을 거론하고 있다.(‘의’ 42, 94).

신자들의 가장 큰 오해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 기도원에 얼마나 많이 갔는가? 성경을 얼마나 많이 봤는가가 자랑의 초점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한 것, 여러분이 성경 본 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거짓을 버리게 하고 분을 내지 않게 하고 도적질을 하지 않게 하고 더러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게 하며 악덕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버리도록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의’ 102).

일단 그의 이런 주장은 옳다. 기도와 전도와 교회 봉사에는 물불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참여하지만 실제로 구체적인 삶의 변화에는 거의 무기력한 한국교회의 실상을 그는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격적인 삶의 변화를 바로 율법의 성취라고 주장한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의 내용을 만족시키라고 구원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골자입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내용을 만족시키는 길을 가야 합니다.(‘의’ 206).

우리는 박 목사의 이런 일련의 진술에서 웬만해서는 문제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일반적으로 옳은 말을 하며, 또는 평범한 설교자들이 놓치고 있는 신학적 깊이를 끌어낼 줄 알기 때문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그는 상당히 세련된 신학적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포즈만으로 본인에게 있는 신학적 오류와 한계를 계속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마 5:17), 율법과 사랑의 관계(롬 13:10)는 변증법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직 믿음과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율법(윤리)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지만 박 목사처럼 노골적으로 구원 이후의 삶을 이렇게 율법의 수행으로 직결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그의 태도에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보았다. 그는 율법의 성취인 성화가 인간적인 연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의’ 99, 102) 매우 용감하게 선포하면서, 친절하게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다.

성화 문제에 대하여 실제적인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교회 안의 봉사기관에 가입하십시오. 여러분 마음에서 성화에 관한 연습을 스스로 하려고 기다리면 일년 동안 한번 할까 말까입니다. 그 한번이 언제냐 하면 크리스마스 때 어쩌다 자선냄비에 돈 넣는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훈련되기 위해서 자신을 봉사기관에 예속시키십시오.(‘의’ 103).

나는 그가 도대체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연습을 통해서 성화에 이르러야한다고 주장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양, 지식, 의지가 아니라고 주장하던(‘의’ 282) 그가 어떤 근거로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더 나아가 그는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를 가리켜 인격과 품성을 훈련받는 곳이라고 주장하는지(‘고린도’ 302)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결국은 그는 자신이 극복하려고 했던 율법 신앙, 업적 신앙, 윤리 신앙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걸까?
아마 박 목사는 이런 내 말에 근거가 없다고 펄쩍 뛸지 모르겠다. 신학적이지 못한 일반 교회의 신앙생활은 기복적이고 감상적이고 자기중심이지만 신학적인 박 목사가 가르치는 성화는 여전히 인격적이고 이성적이고 하나님 중심이라고 말이다. 과연 그런 차이가 있을까? 필자의 눈에 이 두 모습은 무늬만 약간 다를 뿐이지, 요즘 젊은이들 표현으로 짝퉁이다.
나는 이 문제를 좀더 집중적으로 검토하겠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설교자들에도 신학적인 오류가 자주 발견되지만 이런 분들이야 스스로 신학적이 못하다는 사실을 자인하고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면 되지만, 한국교회는 도덕성 회복이 아니라 신학적 회복이 필요하다고 강변하고(2004.11.7), 실제로 신학(교리)적으로 설교하고 있는 박 목사에게서 이런 오류가 발견된다는 것은 문제를 훨씬 심각하게 만들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칭의와 성화의 이원론
내 생각에 박 목사의 신학은 칭의와 성화를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박 목사에 의하면 칭의는 인간의 그 어떤 공로로도 가능하지 않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며, 따라서 여기에 필요한 인간의 책임은 믿음뿐이지만, 성화는 하나님도 어떻게 도와 줄 수 없는 오직 인간 자신이 책임져야 할 대목이라는 것이다. 그가 볼 때 한국교회는 이 두 사태, 즉 칭의와 성화를 확실하게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문제가 발생했다.

예수를 믿는 신자들 중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과 구원 얻은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이 성화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시는 이 구원에 있어서 칭의란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고 받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사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입니다.(‘의’ 94).  

평신도들은 눈치 채기 힘들겠지만, 칭의는 하나님의 소관이고 성화는 사람의 책임이라는 박 목사의 발언은 매우 위험한 이원론적 발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단정한다.

주님은 우리 대신 싸우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싸울 싸움입니다. 여기가 성화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거리입니다. 여러분은 이 성화를 기도해서 얻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노력하고 연습하고 훈련하셔야 됩니다.(‘의’ 109).

이런 진술은 그의 설교에 지천으로 널려있는데, 그가 성화를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해야 할 어떤 지경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칭의와 성화에 이르는 길이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칭의는 단지 우리의 믿음에 의한 것이지만, 더 정확하게 그의 신학적 뉘앙스를 살려서 설명한다면 사람이 믿어서 칭의를 얻고 구원받았다기보다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믿게 된 것이지만(‘의’ 72), 성화는 우리의 구체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철저하게 이원론적이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종교개혁자들과 칼 바르트에게 이르기까지, 어떤 점에서는 조직신학 전반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학자들에 따라서 칭의와 성화를 정확하게 구분하기도 하고, 어느 한쪽에 더 큰 무게를 두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신학사를 거칠게 요약한다면, 마틴 루터는 칭의에 무게를 둔 반면에 캘빈은 성화에, 그리고 바르트는 양쪽에 같은 무게를 두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는 ‘법’적인 차원의 칭의와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살아야할 ‘실천’적인 차원의 성화를 구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박 목사처럼 칭의와 성화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한 정통 신학자는, 내가 아는 한 하나도 없다. 구분은 하지만 이원적으로 분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잘못 보았다면 누구든지 한수 지도를 바란다.
미리 한 마디 밝힌다면 신학적으로 약간 예민한 이런 주제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아래의 책들을 다시 한번 들추어보았다. 칼 바르트의 <義認과 聖化>, 게르하르트 에벨링의 <신앙의 본질>, 하인리히 오트의 <신학해제>, 한국신학연구소 편 <하나인 믿음>,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3>. 이신건 <조직신학입문>. 박 목사 덕분으로 이번에 기초신학을 다시 공부한 셈이다. 이 문제를 가능한 요약적으로 정리해보자.
칭의와 성화는 기독교 신학 안에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의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 신학적 개념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은혜로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지 박 목사의 주장처럼 우리의 노력으로 성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 때문이지 그것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분리되기 때문은 아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박 목사가 혼란을 일으킨 것 같다. 즉 그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인식론적 구분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함으로써 존재론적 분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한국교회에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인식론과 존재론의 차이를 예민하게 식별하지 못함으로써 벌어지는 신학적 과오는 적지 않다. 구원, 하나님 나라, 삼위일체, 종말론 등등, 거의 모든 주제가 이에 해당된다.    
약간 길지만 우리가 깊이 음미할만한 칼 바르트의 신학적 명제를 몇 대목만 간추려보겠다.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천명한다.

의인은 지금 여기의 아직 제거되지 않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묵과이다. 성화는 이런 죄 안에 있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청구이다./ 의인의 은혜는 우리의 삶이고 성화의 은혜는 죄인으로서 우리의 죽음이다./ 하나님의 죄인-사랑의 역사에 있어서 의인은 영원한 측면이고 성화는 시간적 측면이다./ 동일한 하나님의 엄숙성으로써 의인의 은혜는 우리를 크고 절대적인 결정 안에 세워놓고 성화로서의 은혜는 신앙과 복종의 작고 상대적인 결정 안에 세워 놓는다./ 의롭다 인정된 죄인의 신앙과 성화된 죄인의 복종은 동일한 방식으로 서로 자비에 대한 찬양이고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리의 인정이다.(의인과 성화, 17-48).

위의 신학적 명제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칭의나 성화 모두 우리의 회개와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은혜이며,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고 순종할 뿐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화가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서 성취되는 것이라는 박 목사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박 목사는 정통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신앙적 오류에 빠졌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비판의 화살은 곧 자기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존재론적으로 분리함으로써 결국 이원론에 빠져들고 말았다.  
바로 이 순간에 박 목사는 “내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둘러댈지 모르겠다. 기도, 전도, 회개 같은 종교적 현상에 머물러서 실제적인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의 문제점을 강조한 것뿐이라고 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성화가 칭의와 달리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할 어떤 상태인 것처럼 명시적으로 발언한 내용들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 건전한 신학을 심층적으로 공부한 분이라고 한다면 성화의 과정에 신자들의 회개와 믿음이 필요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발언을 결코 취소하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런 발언들은 목회적 필요에 의해서 우연하게 나온 게 아니라, 그의 신학적 확신, 따라서 신학적 오류와 한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실증주의적(혹은 결정론적) 구원론
필자가 보기에 박 목사가 칭의와 성화의 이원론이라는 덫에 걸린 이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종의 실증주의적 구원론에 포로가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실증주의적 구원론이 일방적으로 강조되면 아무리 의도가 순수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구원파’ 유의 함정에 걸려들 위험이 높다.  

분명히 단언하는데 여러분이 무슨 짓을 해도 천국 가는 것을 취소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매는 많이 맞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을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의’ 187).

구원받은 사람의 범죄 행위가 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구원이 결정된 사람에게 발생하는 죄는 단지 성화의 과정이라고 그는 대답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접근하게 되면, 구원파 유의 사람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독교의 죄론은 관념화한다. 관념화한 죄론에서는 아무리 기독교인다운 품성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마저 관념으로 떨어질 뿐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이런 문제를 희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죄를 짓는 것이 편치 않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들입니다. 죄짓는 것은 싫습니다. 그러나 죄를 안 짓고 신앙인으로 살아가기에는 부족하여 눈앞에 있는 이익을 위해서 여러분이 죄인의 모양으로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아주 중요한 증거입니다.(‘의’ 75).

겨우 죄의식 여부에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여부가 결정된다면 결국 박 목사는 자신이 경계하고 있는 신앙적 센티멘털리즘으로 되돌아갔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 그가 성화의 문제에 그렇게 집착하면서도 성화의 사회적 차원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문제 삼지 말자. 이미 칭의와 성화의 이원론적 분리로 인해서 그의 신학적인 토대가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과 엇갈려 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밝혀진 마당에, 더구나 자신의 가르침이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으니까(‘하나님’ 298, 306) 이에 연관된 더 이상의 논의는 무의미할 것이다. 다만 그의 주장이 목회 현장에서, 혹은 그가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신자들의 성숙한 삶을 위해서 실효성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만족하자. 만약 실증주의적 구원론에 근거한 칭의와 성화의 이원론적 가르침이 실제로 신자들의 삶에 실효성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신학적으로 완벽할 수 없다는 전제와 또한 기독교의 도그마가 여전히 미래로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 내 비판을 조용하게 거두어들일 용의가 있다.  

성화의 리얼리티
필자는 이 마지막 대목을 박 목사의 수사적 기법에 기대서 설명하겠다. 지난날 거지였다가 왕의 양자로 들어온 사람이 있다고 하자. 신분과 자리는 근본적으로 바뀌었지만 지난날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왕자를 향해서 박 목사는 왕자다운 품위를 가져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는 중이다. 박 목사의 이런 태도는 율법 해체론이 극단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집단을 향해서는 어느 정도 대안적 가르침이 될 수 있지만, 인간과 세계와 역사에 대한 통전적(integrity) 관점에 근거해서 선포해야 할 정상적인 복음적 설교로서는 방향설정의 오류이다. 왜냐하면 왕자가 왕자다운 품위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은 그에게 왕자의 신분을 갖추라고 다그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왕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주는 데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그가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성화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믿음의 차원이지 훈련의 차원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박 목사는 성화의 ‘리얼리티’에 대한 해명에는 등한한 채, 어쩌면 그 세계를 미처 인식하고 있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성화의 ‘당위’성만을 열정적으로 선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성화의 리얼리티인 사랑이 우리의 연습을 통해서 실현되는 어떤 경지가 아니라 사랑 자체인 하나님만의 자유로운 행위이며, 능력이며, 계시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아마 지난 20년간 줄기차게 선포한 그의 설교가 목회 현장에서 별로 실효성이 없었다는 사실 앞에서 박 목사도 상당히 곤혹스러워 하리라.
물론 박 목사만이 아니라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자의 고유한 자리를 놓치거나 오해함으로써 결국 설교를 잔소리로 만드는 경우가 흔하다.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좀 고급한 잔소리와 저질의 잔소리가 있다는 것뿐이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통치와 그의 미래와 그 완성을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 그리고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서 풍부하게 제시하기만 하면 설교자와 신학자로서의 역할은 이미 끝난 것이다. 만약 설교자가 제시하는 그런 생명의 세계가 설득력이 있다면 기독교인답게 살아야한다고 닦달하든 않든 상관없이 청중들이 그 길을 향해 갈 것이다.
인간, 신학, 세계에 대한 이해가 풍부하고, 교회 현장에 대한 감수성도 예민한 박 목사에게서 위에서 언급한 신학적 혼선이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신학적으로 ‘부분’에 묶인 채 ‘전체’를 놓침으로써 기독교의 근본으로부터 약간 이탈했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다른 설교자들에게서 똑같이 발견할 수 있듯이 전체의 틀을 놓치는 경우에는 신학과 설교에서도 견강부회는 종종 일어나는 법이다. 이는 곧 박 목사가 한국교회의 유치한 신앙을 성숙한 신앙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그럴듯한 신학적 포즈를 취하긴 했지만 그 포즈의 뒤안길은 결코 신학적이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들에게 조직신학 공부는 필수적이다. “조직신학적인 성찰 없이 주석으로부터 직접 설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해석학의 질문들은 단지 미학적 판단을 통해서만 견인될 뿐이다.”(판넨베르크, 신학과 철학, 14).
                                    
  <기독교 사상 2005년 3월호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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